<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3편>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필연이든 우연이든 역사적 라이벌과 관련된 테마를 언급하게 된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다룬 무학대사와 정도전, 즉 불교세력 VS 유교세력 간의 라이벌 대결이 좋은 예이다. 인물이 아닌 자연지형물 간의 대결도 있다. <낙산 역사트레킹>에서 서울의 좌청룡(낙산)과 우백호(인왕산) 간의 대결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정릉 역사트레킹도 라이벌과 관련이 있다. 누구와 누구 간의 라이벌일까?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일단 한 명은 나왔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 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정릉: 필자가 탐방했을 때는 비가 많이 온 다음이어서 그랬는지 봉분에 방수포를 덮었었다. 보시다시피 정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무척 단출하다. 뺄셈을 당한 것이다.

 

 

 

 

 

 

●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 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 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병풍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에서 정자각 및 부속건물들을 내려본 모습.

 

 

 

 

 

 

 

●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들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이 대화들은 청계천 광통교를 탐방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신덕왕후의 능을 탐방한 후에는 정릉 숲길을 따라 걷는다. 정릉 자체보다 정릉 숲길이 더 좋다고 할 정도로 숲길이 참 빼어나다. 30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고 1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는데 둘 다 좋다. 트레킹팀은 일부러 긴 코스를 걸었다.

 

이제 트레킹팀은 흥천사(興天寺)로 향한다. 정릉에서 나와 위쪽 주택가로 길을 잡으면 흥천사 표지판이 나온다. 왕릉의 정문을 통해 나오니 바로 주택가가 나오는 것도 정릉의 특징이다. 큰 주차장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구릉이나 서오릉 같은 곳과는 차이가 확연하다. 숲길을 좋아하는 주민들은 아예 정릉 숲길에서 산책을 할 정도다. 정릉이 속해있는 성북구 주민들에게는 50% 할인이 적용된다. 성인 입장료가 1천 원이니 할인을 받으면, 500원으로 매일같이 정릉 숲길을 걷는 것이다. 무척 부럽더라.

 

 

 

 

 

 

 

* 석각신장: 청계천 광통교 교각 부분에 있는 석각신장. 머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정릉의 봉분을 두루고 있던 병풍석이었는데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이상한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릉의 봉분이 단출할 수밖에...

 

 

 

 

 

 

● 정릉의 원찰 흥천사

 

흥천사는 정릉의 원찰이다. 신덕왕후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했던 태조 이성계였기에 원찰을 크게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흥천사는 1397년에 170여 칸의 대가람으로 탄생했고, 창건과 동시에 조계종의 본산이 된다. 1년 후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각(舍利閣)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흥천사도 정릉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다. 흥천사는 정릉처럼 중구 정동에 세워졌다. 정릉이 현재의 자리인, 성북구로 옮겨진 후로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이때에는 원찰이 아닌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는 왕실 사찰이 된다. 하지만 성종 이후에는 쇠락해졌고 1504년(연산군10)에는 큰 화재가 나서 사리각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불에 타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다 1510년(중종5)에는 남아있던 사리각까지 불타 없어진다. 이렇게 사찰이 쇠락하니 그 안에 있던 기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게 보물 1460호로 지정된 흥천사 동종이다. 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에 전시되어 있다. 범종이 사찰이 아닌 궁궐에 있는 것이다.

 

흥천사는 1569년(선조2)에는 왕명에 의해 정동 생활을 마감하고 ‘함취정’이라는 정자터에 다시 세워진다. 이때는 이름을 바꿔 신흥사(新興寺)로 불렸다. 그러다 1669년(현종10)에 신덕왕후가 복권됐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자리인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전하여 중창된다.

 

신흥사에서 흥천사로 제 이름을 다시 찾게 된 건 1865년(고종2) 때였다. 흥선대원군은 대방을 짓고, 그 대방의 현판을 쓰는 등 흥천사의 중창에 큰 역할을 한다.

 

어렵지 않은가? 연도도 많이 나오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솔직히 정릉골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참 많이 애를 먹었다. 위에 저 내용을 트레킹팀 앞에서 해설을 했다고 생각해보시라!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 그래서 정리를 해본다.

 

1. 1397년 정릉과 흥천사 만들어짐

2. 1409년 정릉, 성북동으로 천장됨

3. 1569년 흥천사가 신흥사로 이름을 바꿔 옛 함취정 자리에 들어섬

4. 1669년 신덕왕후 복권됨

5. 1794년 신흥사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 중창됨

6. 1865년 흥선대원군이 중창을 하고, 흥천사로 이름을 다시 고침

 

흥천사는 사찰 탐방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본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대방, 명부전 등의 가람들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흥천사 대방의 겨울

 

 

 

 

 

 

 

● 이름값 하는 산사 가는 길

 

이제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의 동쪽편을 따라 걷는다. 차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북악하늘길을 걷는 것이다. 계속 북악하늘길을 따라 걷다 북악골프연습장이 나오면 숲길로 들어선다. 이 숲길은 ‘산사 가는 길’이라는 도보여행길이다. 북악산 북쪽편에는 작은 사찰들이 많은데 그 사찰들을 연결한 길이다. 북악하늘길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가 다니는 길이라 산사 가는 길보다 못하다. 산사 가는 길은 진짜 이름값을 한다. 직접 걸어보시길 권한다.

 

역사의 라이벌은 참 많이도 있었다. 싸움 구경이 재미나듯이, 역사가들에 의해 싸움 붙여진 라이벌들도 많을 것이다. 라이벌은 선의의 경쟁관계로 있어야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는 라이벌은 비극만을 초래할 뿐이다. 특히 권력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더 그렇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 흥천사의 본당 극락전

 

 

 

 

 

 

 

 

* 정릉 숲길

 

 

 

 

 

 


 

 

 

 

■ 정릉골 역사트레킹

 

1. 코스: 정릉 ▶ 흥천사 ▶ 북악하늘길 ▶ 산사가는길 ▶ 전망대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경전철 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 / OUT: 국민대 ☞ 국민대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정릉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2편>

 

 

역사트레킹 리딩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불만 섞인 지적을 받게 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필자에게 쏟아내는 욕구들도 다양했던 것이다. 역사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팔자에도 없는 욕을 먹게 될 거라는 건 각오를 했다. 하지만 서로가 충돌하는 욕구들을 쏟아낼 때는 참 난감해진다.

 

- 코스의 물리적 난이도가 너무 높다 혹은 너무 낮다

- 이동 속도가 너무 빠르다 혹은 너무 느리다

- 해설의 수준이 너무 높다 혹은 너무 낮다

- 막걸리를 못 마시게 해서 너무 싫다

 

일부 수강생분들 중에는 엄청난 여행 경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 엄청난 등산 경력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다. 그런 베테랑들에게 역사트레킹은 성이 안 찰 수도 있다. 7~8km 밖에 되지 않는 구간을 4시간에 이동을 하니 그 분들이 보기에 너무 느린 것이다. 평지 기준으로 보통 성인이 한 시간에 4km 정도를 이동하니 그 분들은 2시간 남짓이면 해당 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트레킹은 테마를 따라가는 느림보 트레킹입니다. 소걸음 걷듯이 아주 느긋하게 소풍 맞은 아이들처럼 그렇게 재밌게 걸을 겁니다.”

 

이렇게 사전에 계속 안내를 하지만 ‘너무 느리다’라는 컴플레인은 꾸준히 제기됐다. 그런 컴플레인을 제기했던 분들은 다음번 강의에서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불만이 다는 아닐 거다. 아무래도 막걸리를 못 마시게 해서 그런가...

 

 

 

 

 

 

* 이말산의 봄

 

 

 

 

 

 

● 이름도 독특한 이말산

 

이번에는 삼천사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말산(莉茉山)에서 시작된다. 이말산은 3호선 구파발역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곳인데 산이라고 칭하지만 작은 언덕배기에 불과하다. 해발이 겨우 132미터 정도니까. 구파발역 옆에 있는 통일로를 건너가면 앵봉산으로 갈 수 있는데 앵봉산 남쪽에는 유명한 서오릉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반대로 구파발역에서 이말산을 계속 타고 가면 북한산 서쪽편이 나온다. 즉 이말산은 앵봉산과 북한산의 중간에 있는 작은 산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말산은 이름이 참 독특하다. 명칭이 독특해서인지 동명이산도 없다. 실제로 검색을 해봐도 구파발 이말산이 유일하다. 그럼 이말(莉茉)은 무슨 뜻일까? 재스민을 한자로 풀면 '이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말산은 재스민이 만발한 산이라는 뜻이다. 이말산에 재스민이 많이 피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산에는 무언가가 확실히 많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무덤이다.

 

특히 이말산에는 내시를 비롯한 궁인들의 무덤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북한산의 지산인 이말산은 한양도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성저십리 밖이라 무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저십리(城底十里)는 도성에서 십리(4km)까지의 거리를 뜻하는데 성저십리까지는 무덤을 쓰지 못하게 했다. 북한산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말산은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무덤을 쓰기에 적당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의주로를 따라 비교적 편하게 당도할 수 있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의주로는 지금의 통일로다.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전에 소개한 <진관사 역사트레킹>과 여러 면에서 겹쳐진다. 동쪽편과는 다른 북한산 서쪽편의 이야기, 거기에 잠들어 있는 궁궐사람들의 이야기 등등... 실제로 진관사와 삼천사는 북한산 응봉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자리를 잡고 있다. 두 사찰 사이의 직선거리가 1km도 안 될 정도로 아주 가깝다. 그러니 이번편 삼천사 역사트레킹과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교차해서 살펴보시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 이말산: 주인을 잃은 석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 죽어서까지 서럽다

 

거대한 암봉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북한산은 골산(骨山)의 면모를 보인다. 이와 달리 해발 130미터 정도의 이말산은 육산(肉山)이라고 할 수 있다. 푸근한 동네 뒷산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현재 이 산의 무덤들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다. 쓰러진 문인석, 뒹굴고 있는 묘비, 잘려나간 망주석 등등... 자신들의 '씨앗'을 남길 수 없었던, 그래서 후손들을 둘 수 없었던 내시들이었기에 그런 황량함이 더 애절하게 느껴진다. 물론 예전 내시들 중에는 양자를 드려 자신의 제사를 받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양자도 후손을 둘 수 없는 이들이었기에 그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후손이 없는 무덤은 버려진 것과 다를 바 없다. 봉분은 깎여 나가 평평해지고, 그 주위에 세워둔 석물들은 쓰러진다. 그 중 잘 생긴 문인석은 누군가의 손에 들려 나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도둑을 맞는 것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서러운데 더 서러운 일도 있다. 2010년을 전후로 해서 이말산 부근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유명한 은평 뉴타운이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 입주민들이 이곳에 있는 무덤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민원을 넣은 것이다. 아파트 창문을 열면 바로 무덤들이 보이니 무섭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뉴타운보다 무덤이 더 오래됐다. 그 무덤들이 먼저 들어섰고, 몇 백 년 후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뉴타운이 굴러온 돌인 것이다. 그리고 이말산에 있는 궁인들의 무덤은 그자체로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

 

 

 

 

 

 

 

* 문인석: 머리가 잘려나간 문인석. 누군가 일부러 머리 부분을 자른 것처럼 절단면이 반듯해보인다. 주인이 없는 무덤가라 그런지 문인석들도 크게 훼손됐다.

 

 

 

 

 

 

 

● 북한산의 고봉들이 반겨주는 삼천사

 

이제 트레킹팀은 삼천사로 향한다. 삼천사는 661년(문무왕1)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웃한 진관사가 천년고찰이면서 서울의 4대 명찰로 불리지만 창건연대에서는 삼천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진관사는 1010년, 고려 현종 때 건립됐으니 삼천사가 그보다 400년이나 앞서 세워진 것이다.

 

삼천사는 한때 3000명의 수도자가 불도를 닦았을 정도로 크게 융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크게 손상을 입는다. 한국전쟁 때도 크게 불에 타는데 지금의 전각들은 1960년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때 복원을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터를 잡은 것이다. 오리지널 삼천사 터는 계곡을 따라 약 30분 정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현재의 삼천사에 들어서면 북한산 서쪽편의 고봉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계곡을 따라 장군봉, 나한봉, 나월봉, 보현봉... 그 다음에 뭐였더라? 그렇게 우뚝우뚝 서있는 고봉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심지 빌딩숲에 펼쳐진 인공의 스카이라인이 밋밋하게 여겨진다.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눈을 정화했다면 이제 부처님을 향해 갈 차례다. 삼천사에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마애불이 있는데 그 부처님을 만나 뵈러 가는 것이다. 보물 657호로 지정된 ‘서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을 뵈러 가는 것이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개성미가 넘치는 석불들이 많이 등장한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안동 제비원 석불, 파주 용미리 쌍미륵 등등... 이 시기에 등장한 석불들은 거대한 사이즈를 자랑하는데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약 18미터에 달할 정도다. 그렇게 어마어마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로 자리매김했다. 1등이라는 말이다.

 

돌장승같이 석불들이 큼직큼직하니 균형미나 비례미는 떨어졌다. 신체비율에 안 맞게 얼굴을 크게 부각하여 3~4등신으로 만들어진 석불도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개성미가 넘치게 된 건 그 당시 정치상황과 연관이 있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호족세력들이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는데 그런 사회상황이 석불 제작에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 삼천사: 뒤쪽으로 북한산의 고봉들이 펼쳐져 있다.

 

 

 

 

 

 

 

● 같은 고려 전기에 제작됐지만 삼천사 마애불은 다르다

 

11세기경에 제작됐으니 삼천사 마애불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된 고려 전기에 제작된 석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세련미와 균형미가 잘 갖추어졌다는 뜻이다. 격식을 파괴한 듯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이는 거대한 석불과는 차이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대웅전을 돌아 위쪽으로 올라가면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마애불(磨崖佛)은 벼랑애(崖) 자에서 보듯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환조(丸彫) 형식의 석상으로 되어 있다. 좀 어렵다. 학창시절에나 배웠던 미술용어도 나오고, 그보다 더 어려운 한자도 나왔으니까. 트레킹팀도 어려워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했다. 해설을 질을 떨어뜨렸다고 하지 마시라.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마애불은 벽에다 그리는 그래피티라고 생각하시고요, 환조는 이순신 장군 동상 생각하세요. 물론 동상은 금은동 할 때 그 동으로 만들었어요. 석상은 돌, 그러니까 스톤이고요. 오케이?”

 

삼천사 마애불은 신체의 비례가 잘 표현됐고, 승각기 등의 법복이 잘 그려졌다. 약 3미터 정도인 삼천사 마애불은 양각, 음각, 부조까지 다양한 기법들이 조화롭게 잘 스며들어 있다. 양각과 음각은 아실 것이다. 그럼 부조는? 부조(浮彫)는 돋을새김이라고도 하는데 평면에 형상이 도드라지게 만든 것을 말한다. 삼천사 마애불의 얼굴 부분을 보시면 부조로 잘 조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애불 앞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치성을 드린다. 이곳 아래로는 삼천사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다리 형식으로 복개를 하여 부처님에게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제작된 지 거의 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삼천사 마애불은 별로 마모가 되지 않고 뚜렷하게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석불 좌우에 뚫린 가구공(架構孔)에 당장이라고 목재를 끼워 지붕을 달 수 있을 정도로 가구공도 그 빤듯함을 유지하고 있다.

트레킹팀도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 기원을 드렸다.

 

“여러분 무슨 기원을 올리셨나요? 어쨌든 소중한 기원이 잘 성취됐으면 좋겠네요.”

 

글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역사트레킹은 테마를 따라가는 느림보트레킹이다. 쭉쭉 치고 나가는 걸 좋아하시는 분들은 역사트레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삼천사 역사트레킹과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따로따로 행하셨으면 좋겠다. 느긋하게 따로따로 행하는 게 더 기억에 남을 테니까.

 

 

 

 

 

 

* 삼천사 마애불: 고려 전기시대 작품

 

 

 

 

 

 

 

* 삼천사 마애불: 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음.

 

 

 

 

 

 


 

 

 

 

■ 삼천사 역사트레킹

1. 코스: 이말산 ▶ 진관근린공원 ▶ 삼천사 ▶ 삼천사계곡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 / OUT: 진관한옥마을 ☞ 삼천사계곡까지 탐방한 후 은평한옥마을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구파발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삼천사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1편>

 

 

 

 

* 철도공원

 

 

 

 

 

 

간단한 퀴즈로 시작해본다.     

 

- 태릉선수촌을 모르시는 분?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문제.   

  

- 그럼 태릉이 뭐하는 곳인지 아시는 분?     

 

문제를 못 맞히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 태릉 옆에 강릉도 있는데 강릉은 뭐하는 곳인지 아시는 분?     

 

일단 죄송하다. 독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책은 덮지 마시라. 정답은 아셔야 할 것 아닌가.     

 

 

 

 

* 옛 화랑대역: 역사트레킹 팀

 

 

 

 

 

 

● 커피 한 잔이 어울리는 간이역, 옛 화랑대역     

 

그렇다. 이번에는 태릉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태릉 역사트레킹은 철길을 걸으며 시작한다. 진짜는 아니고, 지금은 폐선이 된 경춘선 옛 철길을 걸으며 시작하는데  약 5분 정도 걷다보면 옛 화랑대역에 도착할 수 있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 잡고 있는 옛 화랑대역은 거대도시 서울과는 어울리지 않게 작고 아담한 간이역이다. 가을 낙엽이 떨어질 때는 커피 한 잔과 시집 한 권을 들고 서성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그런 곳이다. 

 

화랑대역은 1939년에 개통된 경춘선의 한 역으로 상업운영을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 역이 들어섰을 때는 화랑대역이 아닌 태릉역이었다. 그러다 1958년 화랑대역으로 이름이 바뀐다. 바로 옆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역명이 변경된 것이다.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이 화랑대다. 

 

목조건물로써 약 80년의 세월을 거친 옛 화랑대역은 좀 특이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좌우가 다른 비대칭 삼각형 형태의 지붕이 바로 그것이다.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길게 내려왔다. 일반적인 목조 간이역은 책을 뒤집어 놓은 박공지붕 형태를 취한다. 맞배지붕이라고도 불리는 박공지붕은 좌우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나 옛 화랑대역은 오른쪽이 쭈욱 더 내려와 있는 것이다. 건축용어로는 이어내림지붕이라고 말한다. 이런 독특한 모양을 갖춘 옛 화랑대역은 2006년에 국가등록문화재(300호)로 지정된다.  

 

2010년 경춘선은 복선화됐고, 옛 화랑대역은 더 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 역이 된다. 폐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화랑대역이라는 명칭이 아직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건 지난 2000년에 개통된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이다. 경춘선과 지하철 6호선은 다른 노선이다. 

 

기차가 달리지 않자 사람들의 발걸음도 끊겼다. 그러다 다시 옛 화랑대역을 사람들이 찾게 된다. 2018년에 철도테마공원인 화랑대 철도공원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기차들이 선로에서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청춘의 시절로 돌아간 듯 기차를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모두 다 행복한 표정이다. 달리지 못하는 그저 전시된 기차지만 이미 그들은 그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떠난 것 같았다. 필자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물어봤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네! 당연하죠!”     

 

그렇게 행복한 옛 화랑대역에서 달콤한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발걸음을 이어갔다. 이제 트레킹팀은 경춘선 옛 철길을 따라 태릉으로 향한다. 옛 화랑대역에서 태릉까지는 화랑천이라고도 불리는 묵동1천을 따라 걷는다. 작은 하천이지만 물과 함께 걸어서 참 좋은 길이다. 

 

일반적으로 서울에 있는 옛 철길들은 고층 빌딩에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옛 경의선 철길을 생각해보시면 된다. 도심지가 확장되니 기존에 있던 지상 철길 구간은 지하화 되고, 나중에는 공원으로 꾸며진다. 그래서 기차처럼 길쭉한 형태의 공원이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 철길 공원은 도심지에 폐철로가 있다는 점 이외에는 다른 공원들과 차이점이 별로 없다. 소음과 인파들 때문에 걷는 맛도 덜하다. 

 

하지만 화랑천을 끼고 걷는 옛 경춘선 철길 구간은 고독을 씹으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걷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소음도 별로 들리지 않고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그렇게 호젓하게 걷다보면 태릉에 도착한다.      

 

 

 

 

*옛 화랑대역: 사진에서도 보이듯 지붕이 비대칭이다.

 

 

 

 

 

 

● 태릉을 알려면 중종시대를 알아야 한다     

 

태릉이 뭐하는 곳인지 몰라도 태릉선수촌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릉은 1565년에 들어섰고, 선수촌은 1966년에 개촌 했으니 무려 400년이나 앞서 능이 조성된 것이다. 그래서 태릉(泰陵)이 뭐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하면 문정왕후가 크게 노여워하실지 모른다. 그렇다. 태릉에는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께서 잠들어 계신다. 

 

태릉에 들어서기 전에 입간판을 먼저 살펴보자. 태강릉이라고 적혀있다. 태릉에 왔는데 강릉? 강원도 강릉? 아니다.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그의 부인 인순왕후가 묻힌 곳이다. 이로써 앞서 제시한 퀴즈들의 답이 얼추 언급됐다. 퀴즈를 풀었다고 여기서 책을 덮으시면 섭섭하다. 이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태릉에 들어서면 의리의리한 그 넓이에 혀를 내두르실 것이다. 불암산 남쪽에 위치한 태릉은 단일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의리의리한 능역을 통해서 주인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다. 

 

윤지임의 딸인 문정왕후는 열일곱의 나이인 1517년(중종12)에 중종의 셋째 부인이 된다. 1515년에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가 왕자를 낳은 후 산후통증으로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장경왕후가 낳은 왕자는 이후 인종이 된다. 남한산성에서 굴욕을 당한 인조 말고 인종. 

 

좀 어렵다. 이 부분에서 교통정리 좀 들어간다. 일단 용어 정리부터. 문정왕후는 제2계비, 장경왕후는 제1계비이라고 했는데 그럼 계비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계비(繼妃)는 ‘임금이 다시 장가가서 얻은 부인’이다. 새어머니를 계모라고 부르듯이 왕의 새로운 부인을 계비라고 부른다. 

 

그럼 중종은 문정왕후, 장경왕후 이전에도 부인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있었다. 단경왕후가 바로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다. 중종이 조강지처라고 칭할 정도로 중종과 단경왕후는 금슬이 좋았다. 하지만 단경왕후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였기에 중종반정 세력들은 단경왕후를 폐서인으로 만들어 궁궐에서 쫓아냈다. 

 

신하들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중종이었기에 그렇게 자신의 조강지처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후 단경왕후는 평생 중종만을 그리워하다 삶을 마감한다. 경복궁 옆에 있는 인왕산에는 단경왕후가 치마를 흔들며 중종을 그리워했다는 치마바위가 있다.      

 

단경왕후(1739년 복위) - 장경왕후 문정왕후      

 

중종의 여인들이 이들 뿐이겠는가.  오죽했으면 ‘여인천하’라는 사극까지 있었을까.      

 

 

 

 

* 태릉: 정자각

 

 

 

 

 

 

●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지 못했다     

 

다시 태릉이야기. 앞서도 언급했지만 태릉의 능역은 크지만 단릉이다. 문정왕후 홀로 잠들어 계신다. 아들인 명종 재위시절 약 20년 동안 큰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아비인 중종 곁에 묻혀 있는 것이 맞지 않나?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생산했을 때는 1534년이었다. 입궁을 한지 무려 17년 만에 왕자를 출산한 것인데 30대 후반인 나이에 낳았으니 그때 당시의 기준으로는 노산이었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왕자를 생산했음에도 문정왕후의 앞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미 세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세자는 앞서 언급한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이었다. 

 

왕통을 이을 세자가 있는 마당에 중전의 몸에서 또 다른 적자(嫡子)가 탄생을 했다는 건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 있게 된다. 인조반정의 원인이 되었던 광해군의 인목대비 유폐와 영창대군 사사를 생각해보시라. 

 

1544년 문정왕후의 지아비인 중종이 숨을 거둔다. 왕위는 인종이 잇게 됐다. 그런데 인종은 재위 9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를 두고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인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경원대군이 1545년 왕위를 이어받아 조선 13대왕, 명종으로 등극한다. 이때 명종의 나이 12살이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 권력은 누가 휘둘렀을까?

 

중종은 죽고 나서 장경왕후와 함께 고양 서삼릉에 묻혔다. 그러다 명종 17년(1562) 지금의 자리가 길지라 하여 천장(遷葬)된다. 아버지 성종이 묻힌 선릉(강남구 삼성동) 옆으로 옮겨온 것이다. 사후에 자신의 지아비인 중종 옆에 묻히고자 문정왕후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공을 들였지만 문정왕후는 지아비와 함께 묻히지 못한다. 옮긴 중종의 능이 지대가 낮아 여름철에 비가 오면 그 일대가 다 잠겼기 때문이다. 결국 문정왕후는 중종과 멀리 떨어진 불암산 남쪽에 잠들게 된다. 홀로!    

 

 

 

 

* 연결숲길: 태강릉 연결 숲길.

 

 

 

 

 

 

● 태릉과 강릉을 연결하는 숲길을 따라     

 

자 이제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의 능이 있는 강릉을 향해 가보자. 강릉은 태릉과 언덕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는데 그 두 곳을 연결하는 숲길이 참 좋다. 말 그대로 왕릉의 숲이다. 산책로도 잘 정돈되어 있고, 나무들도 잘 가꾸어져 있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숲길이다. 산책로가 시원시원하고 널찍해서 그런지 언뜻 문경새재 길 분위기도 났다.

 

태릉에 비해 강릉은 무척 단출하다. 능역이 무척 소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명종은 죽어서까지도 문정왕후의 품에서 못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문정왕후가 1565년에 생을 마감했고, 명종은 1567년에 숨을 거두었다. 명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라 22년 간 용상에 앉아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치세 기간은 문정왕후 사후 2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위 기간 내내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식 사랑도 적당히 해야 한다. 과유불급!

 

그렇게 태강릉을 탐방한 트레킹팀은 산 중 호수인 제명호를 만나게 된다. 제명호는 미국인 선교사가 만든 인공호수인데 불암산 중턱부에 위치해 있어 산과 물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모습을 선사한다. 크지 않은 호수지만 그저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호수에 비친 불암산 봉우리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철도테마공원에서 행복해지고, 태강릉 숲길 힐링하고, 제명호에서 물에 비친 불암산을 바라보고. 아~ 좋다! 태릉 역사트레킹!          

 

 

 

 

 

* 강릉: 강릉의 참도

 

 

 

 

 


 

 

 

■ 태릉 역사트레킹

 

1. 코스: 옛 화랑대역 ▶ 경춘선철길 ▶ 태릉 ▶ 태강릉 연결숲길 ▶ 강릉 ▶ 제명호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6호선 화랑대역 / OUT: 삼육대학교 ☞ 삼육대학교 앞에서 6호선 화랑대역 방면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음.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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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숲길 따라 걷는 길, 진관사 역사트레킹 (서울/독바위역)

서울에 이렇게도 한적한 사찰이 있었나요? 북한산과 어우러진 진관사의 모습이 절경입니다!

www.myrealtrip.com

 

 

 

 

역사트레킹과 관련된 글을 많이 쓰다보니 역사트레킹에 참여하고 싶다는 분들이

연락을 주신다. 그동안 내가 영업(?)을 잘 했나 보다.

근 몇 년 동안 난 5060세대들을 타깃 삼아 역사트레킹 강의를 진행했었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트레킹을 가장 많이 향유하는 세대들이 바로 5060세대들이니까... 이분들과는 서울시50플러스센터를 통해서 만났고 함께 트레킹을 행했었다. 많게는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트레킹을 행할 정도로 5060세대들의 열의는 뜨거웠었다. 서울50플러스센터 강의는 특성상 주로 주중에 이루어졌다.

그럼 다른 세대는? 또 주말에만 시간이 나는 사람은?

몇 년째 이 물음들은 나를 머쓱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 힐링 혹은 쉼표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주말에만 시간이 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다 주말을 맞지만... 그 주말도 의미없이 허비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주말에만 시간이 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행하려한다. 예전 모 문화센터에서 주말반을 개설한 적이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그만 둔 이후로는 주말반을 만들지 못했었다. 이제 다시 만들어보려고 한다.

내 개인 SNS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이리얼트립>이라는 플랫폼에다 모임을 개설을 했다. 오늘 소개된 진관사 역사트레킹 이외에도 다른 코스들도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가이드 투어로 진행되고 최대 인원은 10명을 넘지 않을 예정이다.

코로나19로 실내 문화활동이 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나마 둘레길을 걷는 트레킹은 비교적 안전하다. 숨 좀 제대로 내쉴 수 있는 공간으로만 찾아갈 예정이다. 내가 이런 것은 정말 잘한다.

9월 5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진관사 역사트레킹 가실 분들~ 손 한 번 들어주세요!

ps. 진관사 역사트레킹 이외에도 많은 코스들을 올려놓았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가해주시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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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숲길 따라 걷는 길, 진관사 역사트레킹 (서울/독바위역)

서울에 이렇게도 한적한 사찰이 있었나요? 북한산과 어우러진 진관사의 모습이 절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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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20년 7월 31일.

예전 기준으로는 한창 휴가철이다. 하지만 장맛비가 아직까지도 계속된다. 작년이었으면 나도 배낭을 꾸리며 휴가 계획을 짜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올해는 휴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계속되는 장마 때문만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 시국에 무슨놈의 휴가?'

이런 식으로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것이다. 휴가 검열인가...^^ 코로나19로 인해 모든게 다 꼬이게 된 것이다.

난 2020년 새해를 스페인에서 맞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2020년을 어떻게 잘 보낼까, 그런 계획들을 세웠다.

'anno nuevo(아뇨 누에보,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스페인어로 'anno'는 '해', 'nuevo'는 '새로운'이라는 뜻이다. 안되는 발음 굴려가면서 스페인 사람들과 새해 덕담을 주고 받았다.

'2020년은 원더키티의 해! 새해에는 더욱더 원더풀하게 나아가는 거야!'

1. 새로운 트레킹 코스 런칭하기

2. 트레킹 원고 작성 완료하기

3. 역사트레킹 100회 이상 실시하기

4. 돈 많이 벌기

5. 투잡하기

산티아고 순례길 종료 후 이어진 배낭여행까지 무사히 잘 마치고 2월 11일에 한국에 잘 도착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강타했고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코로나 공포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지를 않았다. 그런 상황인데 무슨 트레킹이며, 무슨 여행인가! 귀국 후 지금까지 약 6개월이 흐르고 있는데 그간 의미있게 한 일이 딱 두 가지 뿐이다.

1. <트레킹은 생각창고> 원고 작성 완료 및 브런치북 발간

2. 2020 위대한 여정 희망걷기

2020 위대한 여정 희망걷기는 파킨슨병 환우인 정만용 선생이 600km 국토종단을 행하는 행사였다. 나는 거기에 스태프를 참가하여 정만용 선생의 국토종단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그 행사는 내가 주인공은 아니었다. 스태프는 스태프일 뿐이다.

그런 의미로 <트레킹은 생각창고> 의 브런치북 발간은 내 스스로 생각해도 참 기특한 일이었다. 코로나가 준 시간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트레킹은 못하더라도 트레킹 원고는 쓰자라는 생각에 열심히 노트북 앞에서 엉덩이 싸움을 했었다. 그 결과로 지난 6월 30일에 브런치북을 발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20년이 '원더'하긴 하다. 물론 이런 식으로 원더하리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지만. 지난 며칠간 기분도 별로여서 미뤄두었던 사진기 수리와 노트북 점검을 했다. 사진기를 맡기고, 노트북을 포맷하고. 이제 장비 점검도 끝났으니 다시 시작해야겠다.

한 여름이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내 마음은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한 겨울같다. 그래도 여기서 얼어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음 속의 동장군은 이제 매콤한 비빔면으로 비벼서 보내드리고 싶다. 두 손 두 발 놓고 있기에는 지금의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남은 2020년은 더 기운차게 보내고 싶다. 브런치북을 간행한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는지 출간 제의도 왔다. 가능하면 정식 출간도 하고, 더 나아가 베스트셀러에도 등극하고 싶다. ^^

어쨌든 남은 2020년은 확실하게 원더하게 살아볼 생각이다. 나 스스로에게 외친다. 아자아자 파이팅!

ps. 예전에 <2020 원더키티>라는 국산 만화영화가 있었다. 2020년의 기대감 때문에 난 1~2년 전부터, '2020 원더키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어쨌든 그 말대로 원더하긴 원더했네...ㅋ

 

 

 

 

 

 

 

 

 

 

지난 6월 30일에 <트레킹은 생각창고>라는 브런치 북을 발행했다.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에 무슨 대단한 변화가 있으랴!

하지만 그래도 지난 일주일 동안의 변화를 기록해 봐야겠다는 생각이들어 이 포스팅을 작성한다.

1. 조횟수가 많이 늘어났다.

2. 10년 묵은 체증이 날라갈 정도로 속이 시원했다. 한편으로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3. 아직 '제안하기' 메일함은 텅 비어있다.

4. 계속 해오던 원고 쓰기가 종료되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느낌이들었다. 글쓰기 금단 현상이라도 있는 걸까? 초초함 같은 것이 밀려왔다. 무언가를 써야하는데 쓰지를 못하니 손까지 떨리더라.

이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아는 지인이 Daum 메인 화면에 <트레킹은 생각창고>가 떴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데... 금방 내려가더라! 어쨌든 평소에는 파리가 날렸던 내 브런치가 좀 들썩들썩 해졌다. 좋은 일이다.

10년 묵은 체증이 날라갈 정도로, <트레킹은 생각창고>에는 약 10년 전에 쓴 글도 있다. 10년 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따로 놀았던 꼭지들이 브런치북으로 제대로 묶였던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데... 10년 동안 널브려뜨렸던 구슬들을 이참에 잘 꿰어둔 것이다.

그렇게 보배를 만들어놨는데 아직까지도 제안하기 메일함은 텅~ 비어있다. 사실 난 브런치 초기 유저다. 2015년인가에 브런치를 시작했는데 이제껏 제안다운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구는 브런치를 하자마자 받았다고 하던데... 얼마나 부럽던지. 뭐 이제까지 기다렸는데 좀 더 기다려보자. 언젠가는 나도 제안다운 제안 받아보겠지.

사실 본 포스팅은 마지막 4번 때문에 작성하는 것이다. 브런치북을 완성, 이후 후속작업까지 마무리지었다. 이제는 느긋하게 즐기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노트북 앞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룰루랄라였다. 그런데 갑자기 초초함 답답함 이런 감정들이 밀려왔고 식은땀도 나더라. 무슨 금단현상처럼 느껴졌다.

거의 9개월 정도 밤마다 원고와 씨름을 해와서 그랬던가, 그 루틴에서 벗어나니 무엇을 해야할지 갑자기 콱 막혀버린 느낌이었다. 물론 중간에 지방 출장 같은 뜀뛰기 시간도 있긴 했다.

어쨌든 더이상 공을 들인 대상이 사라지니, 더이상 에너지를 쏟을 대상이 사라지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분명 금단현상이었다.

담배나 술을 끓을 때 금단현상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글쓰기가 중단이 됐다고 금단현상이라니...ㅋ

빨리 다른 연재를 시작해야하나. 원고 하나 다 썼다고 별 일을 다 겪네~

 

 

 

https://brunch.co.kr/brunchbook/thinktrekking

 

[브런치북] 트레킹은 생각창고

저에게 트레킹은 단순히 걷는 행위만이 아니었습니다. 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주옥같은 사색들이 떠올랐답니다. 바쁜 일상에서는 피어오르지 못했을 사색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꽃망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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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트레킹은 생각창고>가 브런치북으로 발간됐다. 첫 프롤로그가 2019년 9월 30일에 발행됐고, 완성을 2020년 6월 30일에 했으니 장장 9개월이란 시간이 걸린 셈이다.

 

프롤로그, 본편, 에필로그... 총 20편이 실린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역사트레킹을 행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담아내었다. 역사와 트레킹, 그리고 사색을 서로 어우러지게 했다. 

 

분량이 A4로 약 100매 정도다. 적은 분량은 아니다. 그럼에도 작성에서 발간까지 9개월이나 소요될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순수하게 A4 100매짜리 원고를 새로 썼다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롤로그에도 언급했는데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예전 원고를 재작성한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는 한 달 정도면 

브런치북으로 발간할 수 있을지 알았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딱딱 떨어지던가! 브런치북이든 종이책이든 세상에 결과물을 내놓으려고 하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허점들이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재작성 수준으로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아예 몇 편은 처음부터 새로 쓴 것도 있다. 초등학생 실력의 그림 솜씨로 지도도 만들어 넣었다. 

 

긴 글, 여러장의 사진, 안 예쁜 지도... 기존 브런치북들과는 많이 좀 다르다. 뭐 이렇게 길게 썼냐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핀잔도 이미 다 각오하고 있다. 사실 종이책까지 염두해두고 원고를 썼으니까. 

 

<트레킹은 생각창고>에 실린 글 중에는 첫 작성을 7년 전에 한 것도 있다. 꽤 오랫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원고들이 

<트레킹은 생각창고> 브런치북에서 자기의 위치를 잡게됐다. 이점 필자로서 참 뿌듯하다. 글만 썼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산하고 작품화시키는 것도 작성자의 큰 역할인데 이제서야 그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제 브런치북도 만들었으니 많은 곳에서 희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종이책도 만들고, 강연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필자가 역사트레킹 마스터인만큼 북토크는 실내가 아닌 아웃도어에서 하고 싶다. 역사트레킹을 행하면서 독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벌써부터 김칫국인가? 그래도 좋다.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켜도 좋을 만큼 오늘은 기분이 좋다. 

 

오늘밤의 엔터키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기분 좋게 눌러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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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트레킹은 생각창고

저에게 트레킹은 단순히 걷는 행위만이 아니었습니다. 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주옥같은 사색들이 떠올랐답니다. 바쁜 일상에서는 피어오르지 못했을 사색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꽃망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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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는 전편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의 두 번째 이야기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제목에서처럼, 필자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산티아고’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셈이 됐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작성한 건 산티아고 순례길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필자는 여전히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동경심이 있고, 기회가 닿는다면 계속 방문을 할 예정이다. 다른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길을 걸으며 많은 감흥을 얻었고, 큰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만큼 필자도 ‘산티아고 앓이’를 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도발적인 글을 썼을까? 간단하다. 제대로 알고 가자는 의미에서 글을 썼다. 기왕 돈 들여, 시간 들여가는 길이라면 제대로 알고 가야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더 알찬 트레킹을 할 수 있을 테니까.

 

* 피스테라 가는길

●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피스테라(Fisterra)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한다.

많은 여행책자들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어쨌든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도 그렇게 피스테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말도 떠올랐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다.

 

                        * 피스테라 위치: 구글 지도 변형

●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로 가는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여있는 형태였다.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서게 된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선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던 곳이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으니까.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볼 수 있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였다.

 

 

* 피스테라 표지판

 

● 피스테라와 야고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이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그곳을 유럽대륙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피스테라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스테라는 필자가 반복해서 기술한대로 스페인의 땅끝이지 유럽 대륙의 땅끝은 아니다.

정확히 유럽 대륙의 땅끝은 호카 곶(Cabo de Roca)이다. 호카 곶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깎아질 듯 서 있는 해안절벽이 일품인 곳이다.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을 말할 때 두 가지로 분류를 해서 말한다. 튀어나온 규모가 크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곶’이 된다. 유명한 포항의 호미곶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다. 북한 쪽에서는 장산곶이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대한 환상(?)을 한 가지 더 깨볼까 한다. 전편에 ‘야고보 성인은 이베리아반도에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서술했다. 그 서술을 따라가 보면, 야고보의 시신이 담긴 배가 예루살렘에서 피스테라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뻔한 당시의 항해 기술은 둘째 치고, 사역을 하지도 않은 곳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전도자는 없을 테니까.

 

 

*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그렇다면 피스테라가 왜 야고보와 연결이 됐을까? 아무래도 야고보의 존재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피스테라가 동원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로마인들은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도착하여 별들의 들판이라는 산티아고 콤프스텔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정리될 수 있겠다. 이런 전개 과정 자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로마인들이 세상의 끝을 호카 곶으로 판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 호카 곶과 야고보가 서로 연결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환상이 다 깨졌다고 해도 피스테라는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곳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안절벽들을 따라 가다보면 땅끝 등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의 모습은 일품 중에 일품이다. 이곳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띄우는 의식을 행한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자신의 것들을 불태우는 것이다. 실제로 등대 근처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태운 신발과 옷가지의 흔적들이 널려 있었다.

피스테라는 그런 장소였다. 무언가 의식을 행하거나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소였다는 것이다. 마치 해남 땅 끝에 가면 무언가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필자도 대서양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 앞에서 다짐을 한 말치고는 무척 소박한가? 그래도 상관없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허상과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일들을 척척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괴롭게 되새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서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하다.

 

 

* cee: 피스테라를 가기 전에 만나는 cee라는 항국 도시. 매력적이다.

●남북한 순례자들이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면?

순례길은 화합의 길이었다. 지역감정으로 유명한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스페인 내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앙숙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발트3국) 청년들이 서로 의지를 하며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었다. 도보여행을 하는데 국적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소용이 없을 테니까.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그게 바로 순례길에 녹아 있는 정신일 것이다. 그런 정신들이 길 위에 뿌려지고, 뿌려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사랑하는 것일테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북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일일 될 것이다. 함께 격려하며 돕고, 먹을 것을 나누고... 힘들 때는 함께 아리랑도 부르고! 상상만으로도 참 흥미롭다.

 

 

 

* 피스테라 가는길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16편으로 종료가 됐다. 이제 두 편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필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들은 넘치고 넘치지 않았던가. 필자까지 거기에 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간의 통념을 깨려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제목도 저렇게 지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읽으신다면 그 환상이 깨질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 산티아고 순례길

 

●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이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지금은 2만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엄청난 영향을 준 셈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니까.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꼭 한 번은 다뤄봐야 하지 않겠나?

 

* 산티아고 순례길

 

 

●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한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온다.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년 7월 25일에 참수를 당한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이베리아반도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한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던 것이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한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길’)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여행기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장식된 야고보 성인.

 

●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린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종교다원론자(?)인 필자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필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바로셀로나가 있는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산티아고 대성당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하였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

 

 

* 산티아고 순례길: 저렇게 평원길을 많이 걷는다.

 

●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건립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침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던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셈이다.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위치. 구글 지도 변형.

●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한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

 

* 산티아고 순례길: 용서의 언덕에 선 필자.

ps. 이렇게 기존의 통념을 깨는 글을 쓰고 있지만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할 생각이다. 왜?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매력 있는 길이니까. 실제로 필자는 2014년 첫 방문 이후, 2018년과 2019년 연이어 방문을 했었다. 그 시간이 참 뜻 깊었다.

어떤 식으로든 필자는 야고보 성인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다. 뜻하지도 않은 짐을 지고 있는 야고보 성인의 어깨를 가볍게 해드리고 싶어 이 글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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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백사실계곡 벙개트레킹을 행했답니다. 그에 대한 약식 후기~

전날부터 비가 내려 좀 걱정이 됐습니다. 모임을 취소해야 하는건 아닌지, 뭐 그런 걱정이 들었죠. 하지만 강행을 했습니다. 그까이거 이 정도 비는...!

다행스럽게 당일 오전에는 좀 비가 가늘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축축하게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백사실계곡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여름숲이 주는 싱그러움을 만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비가 와서 그랬는지 항상 매말라있던 백사실계곡에도 물소리가 좀 크게 들리더군요.

수풀 속에 숨어 있는 개구리들의 합창 소리도 우렁찼습니다.

숲 한가운데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습니다. 얼마나 신선하던지! 비가 여름 백사실계곡 숲을 아주 풍성하게 만들었네요!

이 맛에 트레킹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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