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자전거여행을 많이 다녔었다. 고물자전거에 바리바리 짐들을 싣고 페달을 밟았었다. 자전거무게에 짐무게까지 더해지면 거의 40kg 이상 정도 될 듯싶었다. 그때는 여행이 좋아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 떠밀려서 떠났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거다.

필자는 항상 한 박자가 늦었다. 대학도 한 박자 늦게 들어갔고, 사회생활도 한 박자 늦게 시작했다. 연예는 더 늦게 했다. 물론 지금은 솔로지만... 고물자전거로 국토종단 여행을 행했는데 대학 때 못해본 국토종단을 삼십대 중반 시기에 처음 해본 것이다.

당시 필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도 한 박자 늦게 시작했다. 안 돌아가는 머리로 두꺼운 수험서를 보는 게 참 막막했었다. 봄에는 시험을 보고 여름에는 짐을 싸서 여행을 떠났다. 그 기간이 무려 4년 정도나 됐다. 장수생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무원 시험을 그만두는 것도 한 박자 늦었던 것이다.

도피성 여행인지라 여행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법! 그래서 자전거 앞 뒤로 짐을 잔뜩 실어야했다. 없는 살림에 무언가 부족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짐은 늘어났고, 자전거도 육중해졌다.

“미쳤군요!”

여행 중에 만난 어떤 외국인이 웃으면서 했던 말이다. 그 외국인 눈에도 필자가 무척 신기했을 것이다. 폼이 하나도 안 나는 자전거, 일명 철TB에다 짐을 덕지덕지 싣고 장거리여행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좌충우돌 여행은 계속됐는데 그러다보니 국토종단 4회, 국토횡단 2회를 행하게 됐다. 한 박자 늦게 국토여행을 시작했지만 횟수는 차곡차곡 더 많이 쌓았던 것이다.

사실 이 때의 자전거여행이 현재의 필자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두 발은 페달에서 내려와 트레일(trail:오솔길)을 걷게 됐다. 페달을 굴리면서 굵어진 허벅지로 트레일을 마음껏 걸어 다녔다. 자전거여행 때 행복속도 11km로 주행을 했는데 그 개념을 트레킹을 할 때도 적용했다. 행복속도 3.3km로 걷기.

* 진관사 역사트레킹

 

● 서쪽과 동쪽이 다른 북한산

이번편에는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지하철 6호선 독바위역에서 집합을 하는데 독바위역은 출구가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1번 출구밖에 없다.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 항상 불광사 앞에 있는 소공원에서 스트레칭을 했었다. 그리고는 항상 이런 멘트도 했었다.

“불광사를 다녀왔는데요, 우리가 서 있는 동네가 불광동이에요. 사찰 이름을 따서 동네 이름이 지어졌어요. 안양사가 있어서 안양시라는 동네 이름이 붙여진 것처럼요.”

진관동도 마찬가지다. 진관사가 있어서 진관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사찰의 이름에서 따 온 동네들을 두 곳이나 지나간다. 스트레칭을 끝내고 길을 나설 때 이런 멘트도 했었다.

“불광동 하시면 뭐가 생각나세요? 불광동 휘발유?”

 

하지 말았어야 했나. 썰렁함에 기름을 부은 것 같았다.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북한산둘레길 8구간 구름정원길과 9구간 마실길을 따라 걷게 된다. 불광사를 빠져나오면 넓게 펼쳐진 도시 텃밭을 만나게 된다. 그 뒤로는 북한산 선림봉이 널찍한 암반면을 드러내며 자리 잡고 있다. 선림봉은 400미터가 되지 않는 봉우리인데 북한산 서쪽에 위치해있다.

북한산은 일명 삼각산이라고 불린다. 백운대(837m), 인수봉(810m), 만경대(800m) 세 개의 봉우리가 삼각뿔의 형태를 지녔다고 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그런데 그 삼각뿔은 동쪽편에 치우쳐있다. 지역으로 따지면 강북구 우이동 방면에 삼각뿔이 펼쳐져있다. 그에 비해 선림봉, 그리고 진관사의 뒤쪽 봉우리인 응봉은 북한산의 서쪽편에 자리 잡고 있다.

같은 북한산이라고 해도 삼각뿔이 있는 동쪽편과 진관사가 있는 서쪽편은 좀 차이가 난다. 동쪽편은 거대한 봉우리들이 장벽처럼 늘어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면, 서쪽편은 비교적 낮은 봉우리들이 올망졸망하게 늘어서 있다. 같은 북한산이라고 해도 서쪽과 동쪽을 비교해가면서 탐방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 문인석: 원래 두 개가 한 쌍인데 도굴 때문에 하나만 남았다. 문인석 옆에서 필자가 해설을 하고 있다. 얼핏보면 문인석은 돌하르방 같아보인다.

● 이거 돌하르방이에요?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북한산의 서쪽편을 집중적으로 탐방한다. 북한산 둘레길을 기반으로 걷기 때문에 난이도가 어렵지도 않다. 숲길을 따라 걷기 좋은 길을 가다보니 참가자들은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러다 갑자기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 이거 뭐에요? 돌하르방인가?”

 

홀로 서 있는 문인석(文人石)을 두고 그렇게 물은 것이다. 쌍으로 있어야 할 문인석이 홀로 외떨어져 있으니 돌하르방으로 착각을 하신 거 같다. 그럼 왜 거기 문인석이 있는 것일까?

불광동에서 진관동으로 향하는 북한산둘레길 8구간 구름정원길 곳곳에서는 주인 잃은 석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내시와 궁녀들의 무덤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들의 무덤에 세워진 석물들이 방치된 것이다. 그들 궁인들은 후손이 없기에 그들의 묘소는 황폐화됐고, 석물들도 버려졌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성저십리라 하여 도성 밖 십리까지는 무덤을 쓰지 못하게 했다. 십리는 약 4km 정도에 달하는데 불광동 일대의 북한산은 도성에서 4km 이상 떨어져있던 것이다. 도성에서 십리 이상 벗어나 있고, 산세도 그리 험하지 않으니 무덤을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앞으로 의주대로가 펼쳐져 있으니 교통도 편리했다. 인근에 이말산이라고 불리는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이곳에도 수많은 내시와 상궁들의 묘지가 있다. 그래서인지 근처에 있는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은 아예 명칭이 내시묘역길이다.

 

* 문인석: 이말산에 있는 문인석. 저 둘이 한 쌍이 아니다. 각기 다른 무덤을 지켰던 문인석을 한 자리에 모아 둔 것이다. 도굴 때문에 친구(?)를 잃은 각기 다른 문인석 둘을 한 곳에 모아두워서 한 쌍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 똥강아지가 내시를 만들었다?

궁인들은 재산 모으기와 무덤을 꾸미는데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후손이 없으니 다른 방면으로 에너지를 쏟은 것이다. 그래서 무덤가에 세우는 석물들이 화려했다. 여느 사대부들의 무덤가에 세워진 석물들과 비교해 봐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정교하게 새겨진 문인석들을 보고 있자면 어느 왕릉의 문인석이 연상될 정도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석물들은 후에 도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인이 없는 석물들을 다른 사람들이 들고 나간 것이다. 그래서 홀로 남은 문인석들을 이 코스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문석인이라고도 불리는 문인석은 둘이 한 쌍으로 무덤을 지킨다. 무인석도 마찬가지로 한 쌍으로 이루어져있다.

 

“내시가 됐던 경우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예전에는 꼬맹이들이 똥을 싸고 똥강아지들에게 엉덩이를 내밀었어요. 꼬맹이는 똥강아지에게 비데를 받았고, 똥강아지는 별미를 즐긴 셈이죠. 그러다 똥강아지가 엉뚱하게도 꼬맹이의 거기를 앙하고 물어버립니다.”

트레킹팀은 주로 여성들이 많지만 필자는 꼭 저 해설을 한다. 똥강아지 흉내를 내면서 혀도 날름거린다. 그런 필자를 한심하게 보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저 설명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액션을 취해야 더 생동감 있게 와 닿지 않겠는가.

저것 말고도 내시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예전에는 밤에 화로를 많이 썼는데 화로가 넘어져 성불구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편 자신의 아들을 궁궐로 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성불구자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궁인들의 무덤도 키가 큰 소나무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못생긴 소나무가 무덤을 지킨다고 했나? 그렇다면 이 소나무들은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못한 셈이다. 그래도 솔내음은 언제나 좋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좋다.

 

* 화의군 묘

● 의리남이었던 화의군과 금성대군

소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오면 진관동이다. 앞에 한옥마을이 펼쳐지는데 유명한 은평 한옥마을이다. 한옥마을을 지나면 마지막 탐방지인 진관사에 다다른다. 진관사를 가기 전에 잠깐 화의군 묘역에 가보자.

세종대왕은 슬하에 자녀들이 참 많았다. 무려 18남 4녀를 두었으니 다산의 상징이라고도 할 만 하다. 하지만 세종대왕보다 더 많은 자식을 둔 왕이 있었다. 바로 세종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었다. 태종은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었으니 조선 왕조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이었다.

다시 화의군 이야기. 화의군은 세종대왕의 아홉 번째 아들이었다. 서자 중에서는 첫 번째였다. 화의군은 학문에 조예가 깊었는데 아버지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창제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화의군은 분명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야 할 건 그가 의리남이었다는 것입니다. 단종과 관련하여 많은 종친들이 수양대군에 편에 서게 되는데 화의군은 끝까지 절의를 지켰습니다. 진정한 의리남이었죠.”

화의군 묘역 앞에서 꼭 저런 해설을 했다. 역사 인물을 해설할 때 가장 좋은 장소는 해당 인물의 묘지 앞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는 해당 묘지를 바라보며 그의 삶을 곱씹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456년, 사육신에 의해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났는데 화의군이 이에 연루됐다하여 전라도 금산(현재는 충남 금산)으로 유배된다. 이때 세종대왕의 6남 금성대군도 경상도 순흥에 같은 죄목으로 유배된다. 이미 금성대군은 삭녕(철원과 연천의 옛 지명)에 유배되었다 순흥으로 왔으니 정확히는 이배(移配)가 된 것이다. 순흥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다.

다음해인 1457년,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단종을 복위시키려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고 만다. 결국 금성대군은 처형된다. 이때 화의군도 아들과 함께 사사된다.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수양대군 세력과 적당히 타협을 했으면 순탄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의군과 금성대군은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진정한 의리남이 아닌가!

화의군 묘역과 멀지 않은 곳인, 구파발역 부근에 금성당이라는 금성대군을 모신 신당이 있다. 서울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신당인데 현재는 샤머니즘박물관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러고보면 은평구 진관동 일대는 세종대왕과도 연관이 깊은 곳이다.

* 진관사: 진관사에 있는 전통찻집. 독특하게 초가를 올렸다.

 

● 기막힌 스토리가 숨어 있는 진관사

 

수도권 최대의 한옥마을인 은평 한옥마을을 지나 마지막 탐방지인 진관사로 향한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대 명찰이 있다. 동쪽에 불암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 그럼 서쪽은? 진관사다. 천년 고찰인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현종 때인 1010년에 만들어졌다. 고려 제8대 왕인 현종이 직접 창건한 이 절은 진관대사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손자였던 현종, 즉 왕순은 어릴 적에는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로부터 어릴 적부터 박해를 받은 왕순은 한때 강제로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천추태후가 그의 이모가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당시 얽히고설킨 왕실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같은 왕건의 혈통이자 이모뻘의 천추태후로부터 살해위협까지 받게 된 건 그가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천추태후는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으로 등극시킬 셈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의 마수가 진관사에까지 뻗치게 됐다. 원래 진관사 자리에는 신혈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진관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승려가 홀로 거처하는 곳이라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무언가 거사를 치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랬다. 천추태후는 신혈사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일 셈이었다. 천추태후의 의도대로 왕순이 자객에 손에 비명횡사를 했다면, 현종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진관사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천추태후의 의도를 눈치 챈 진관은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굴을 파서 왕손을 숨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수미단은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말한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산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진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왕순은 3년 뒤,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려 8대 왕 현종이다. 현종은 1010년,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진관 대사의 이름을 본 따서 사찰 이름을 지으니 그 사찰이 바로 지금의 진관사다.

조선시대 진관사는 사가독서제로 애용된 곳이다. 사가독서제란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정진하게 만든 제도로 세종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다. 풍광이 수려하고 계곡이 시원한 진관사라면 학문을 닦기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가독서제로 진관사를 다년간 이들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었다.

진관사는 한국전쟁동안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다. 그래서 지금의 진관사는 천년고찰의 웅장함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관사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는 사찰이다. 진관사 숲길과 계곡을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느낌들이 좋아서 발걸음들이 진관사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 진관사: 북한산과 어우러진 진관사.

 

● 한 박자 늦어도 좋은 역사트레킹

- 느리게 걷기

- 나를 돌아보는 시간

이런 표현들은 트레킹과 잘 어울린다. 굳이 빨리 걸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천천히 유유자적하게 걷다보면 몸도 튼튼해지고, 머리도 맑아진다.

그런데 역사트레킹은 시간이 더 걸린다. 해설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더 소요될 수밖에 없다. 해설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아재 개그라도 해야 된다. 필자 혼자서 트레킹을 하면 행복속도 3.3km를 유지하지만 역사트레킹을 리딩할 때는 시간당 약 2.2km로 이동한다. 일반적으로 성인은 1시간에 4km 정도를 이동할 수 있기에 시간당 2.2km는 좀 많이 느린 편이다. 확 치고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역사트레킹 팀을 거북이 팀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자는 이제껏 계속해서 한 박자 느린 삶을 살아왔다. 일부러 그렇게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걸 팔자라고 해야 하나? 한 박자 느린 삶을 살았으니 역사트레킹과 궁합이 잘 맞는 것도 팔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필자의 삶은 한 박자 늦을 거 같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한 박자 늦는 만큼 그 안을 차곡차곡 채우고 싶다. 느릿느릿 걸어도 소걸음인 것처럼...

■ 진관사 역사트레킹

1. 코스: 불광사 ▶ 내시묘 ▶ 화의군묘 ▶ 은평한옥마을 ▶ 진관사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지하철 6호선 독바위역 1번 출구 / Out: 진관사 ☞ 진관사를 탐방한 후 은평한옥마을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3호선 구파발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진관사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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