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와 관련된 기사를 작성해서 <오마이뉴스>에 송고했습니다.  뭐 여행섹션에 걸리면 좋겠다 싶었는데 전체 메인 기사에 걸리게 됐네요! 그런데 그 오마이뉴스기사가 다음 메인에도 걸렸네요. 다음 서브 메인에는 몇 번 걸린 적이 있었는데  탑메인에는 처음 걸려봅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메인만 두 개가 걸렸네요~

 

앞으로도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여러분들도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길~!

 

 

 

 

 

 

 

 

 

 

 

 

 

 

한국에도 이런 대형석불이? 외국 안 가도 되겠네 2

 

고려 전기시대 대형석불 테마 탐방...

가을 여행지로 여기 어떠세요?

 

14.09.30 15:51 최종 업데이트 14.09.30 15:51

 

 

 

 

 



 

 
▲ 대조사 석불 대조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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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찰에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이제 충남 부여로 가보자. 부여군 임천면에는 대조사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도 거대한 석불이 있다. 대조사는 부여 천도를 위한 밑돌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백제 성왕이 천도를 앞두고 직접 대조사의 창건을 명했다고 하는데, 사찰터를 지목한 사람은 유명한 백제의 고승 겸익이라고 한다.

현재의 대조사는 작은 사찰이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사찰에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있다. 바로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바로 그것이다. 대조사 석불도 고려 초기 작품이다. 그래서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쳤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다고 한다.

은진미륵과 대조사 석불은 지리적으로 가깝게 위치해 있고, 또한 제작 시기나 규모가 유사하기 때문에 곧잘 같이 묶여 이야기된다. 또한 두 석상은 서로 비교가 되기도 한다. 은진 미륵이 뒷산과 좀 거리를 두고 평지 쪽으로 나와 있다면, 대조사 석불은 바로 옆쪽에 작은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언덕에서 뻗어 나온 소나무 가지가 석불에 우산처럼 드리운 형상을 하고 있다.

한편 석불 앞에 있는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 법당의 창문을 열면 큰 석불이 시원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도포를 두른 안동 이천동 석불?

이제는 경북 안동으로 가보자. 안동 시내에서 북쪽으로 5km쯤 떨어진 곳에 가보면 제비원이라는 곳이 있고, 그 뒤쪽으로 이천동 석불이라는 거대한 석불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제비원(燕飛院)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이었던 원(院)이었다.

영남에서 충청도나 한양으로 갈 때에는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제비원이 있었다. 그렇게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에 거대한 석불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 이천동 석불은 도포를 두른 모습이었다. 큰 도포를 두르고 얼굴을 불쑥 내민 형상이었다. 뒤쪽의 무성한 수풀과 어우러져서 그런지,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노출(?)한 모습이었다.

안동 이천동 석불도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석불이다. 용미리 쌍미륵처럼 몸통 부분과 머리 부분이 별개의 암석으로 제작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몸통 부분, 즉 필자가 도포를 둘렀다고 지칭한 큰 바위 상단 중앙에 머리 부분을 조각한 별개의 돌을 얹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올렸을 뿐인데도 자연석인 몸통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일체형의 거대한 석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석불 제작자의 지혜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 이천동 석불 안동 이천동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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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장승 같은 고려 전기시대의 대형석불들

이제까지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형 석불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다. 그렇다면 왜 고려 전기시대 사람들은 이처럼 대형 석불들을 만들었을까? 당시는 고려왕조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들의 독특한 지방문화가 불교문화제에 투영된 시기였다. 활기차고 강건한 지방문화가 석불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거대한 돌미륵을 탄생 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된 대형 석불은 해당지역의 민간신앙까지 접목되어,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형상화됐다. 거인 같은 미륵불이 마을입구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서 있게 된 것이다. 요즘처럼 청명한 가을날. 전국에 산재한 돌미륵을 찾아 복을 기원해 보자. 그렇게 여행을 하다보면, 어쩌면 '복'된 테마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여행도 하고, 유물답사도 할 수 있으니까!

 

 

 

※ 도움말 : 찾아가는 길

1. 용미리 쌍미륵: 서울 불광역에서 파주 광탄면행 버스에 탑승한 후 용암사에서 하차한다. 소요시간 약 50~60분 정도.

2. 논산 은진미륵: 논산 읍내에서 건양대행 버스에 탑승 후 관촉사에서 하차함. 읍내에서 관촉사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거리임.

약 3km 정도다. 그래서 택시를 타도 부담이 없음.

3. 대조사 석불: 부여군 읍내에서 임천행 버스 탑승. 임천면사무소에서 하차한 후 대조사로 이동. 면사무소에서 대조사까지는

도보로 20~30분 정도 소요됨.

4. 안동 이천동 석불: 안동 시내에서 제비원(연미사)행 버스 탑승. 시내에서 제비원까지는 약 5km 정도 떨어져 있음.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 작가라고 합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한국에도 이런 대형석불이? 외국 안 가도 되겠네 1편

고려 전기시대 대형석불 테마 탐방... 가을 여행지로 여기 어떠세요?

 

14.09.30 15:51    최종 업데이트 14.09.30 15:51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 산이나 들, 어디로든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이제 곧 단풍철도 다가오지 않는가!

기왕 떠나는 여행, 테마를 가지고 떠나면 어떨까? 발 가는대로 떠나는 좌충우돌식의 여행도 좋지만 주제를 잡고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산성(山城)기행, 폐사지 답사기행, 천주교 성지순례 등등... 이런 것들이 테마 여행이다.

이렇게 테마를 중심에 놓고 여행을 하다 보면 학습과 여행이 유기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성 기행인 경우 '행주산성 → 서울성곽 → 공산성' 등으로 여행 일정을 계획 할 수 있다. 각 산성들을 탐방, 관찰한 후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필자가 제안하는 테마 여행은 거대석불 탐방이다. 고려 전기시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거대한 석불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한때 필자는 거대한 석불들을 찾아다니며 '복'을 기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거대한 석불 앞에 섰을 때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바미안 석불에는 못 미치지만 그런 거대한 석불이 내 눈 앞에 떡하니 서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던지! 그래서 복스러운 함박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한편 바미안 석불은 탈레반이 파괴해 지금은 흉물처럼 서 있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의 석불들은 천년의 세월을 꿋꿋이 견뎌내며 거리의 수호신처럼 서 있었다.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돌미륵을 찾아 여행을 떠났었다.  

 

 

 


  


 
▲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쌍둥 석불 형식이다. 왼쪽에 원립불을 쓰고 있는 상은 손에 연꽃을 들었는데 남성을 뜻한다. 오른쪽 방립불을 쓰고, 손을 합장한 상은 여성을 상징한다. 원립불은 말그대로 둥근 모자 형태이고, 방립모는 그에 비해 각이 진 모자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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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쌍으로 들어오려나? 파주 용미리 쌍둥이 석불

 

 

먼저 소개할 석불은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용미리 쌍둥이 석불이다. 용미리, 용암사에 위치한 이 쌍둥이 석불의 공식명칭(문화재청)은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대중교통으로도 편리하게 닿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서울에서 용미리로 가기 위해서는 혜음령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혜음령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개성으로 넘어갈 때 거쳐야 했던 중요한 고개다. 그래서 혜음령 근처에는 벽제관이라는 역관(驛館)이 있었다. 그렇다. 용미리 일대는 한양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 의주로 향했던 의주대로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곳을 내왕했고, 쌍미륵에게 복을 기원했던 것이다.

장지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용미리 쌍미륵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자연석을 몸통으로 삼아 조각을 새기고, 얼굴 부위는 따로 제작해 올렸다. 쌍미륵도 고려 전기시대의 다른 석불들처럼 인체 비례가 일치하지 않는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남여 쌍미륵 형상이라 '다산(多産)'과 관련된 기원들을 많이 하러 온다고 한다. 즉,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많이 와서 기원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쌍미륵과 관련된 설화도 '잉태'와 관련이 있다.

그 전설로 들어가 보자. 고려 선종 때였다. 선종은 자식이 없어 원산궁주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원산궁주도 쉽게 잉태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궁주가 이상한 꿈을 꾼다.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이런 내용의 꿈이었다.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선종은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궁주의 꿈처럼,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왕은 그 바위에다 미륵불을 조각하고, 그 옆쪽에 사찰을 세워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 정성이 전해졌는지 그해에 왕자인 한산후가 탄생했다고 한다.

고려 선종은 13대왕으로 1083년부터 1094년까지 왕위에 올랐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용미리석불입상도 고려 전기 때 제작된 것임이 유력해진다.

쌍미륵 앞에서 복을 기원하면 복이 두 배로 들어올까?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쌍미륵 앞에 서면 함박웃음이 두 배로 지어질 것이다. 그렇게 웃다보면 복은 자연스럽게 들어올지 모른다. 



 
▲ 은진미륵 고려전기시대 제작된 대형 석불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관촉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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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 석불 '관촉사 은진미륵'

 

 

이제 거대 석불을 찾아 충남 지역으로 가보자. 다음으로 탐방할 곳은 충남 논산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관촉사 석불은 관촉사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관촉사는 반야산이라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계백장군 혼이 살아있는 황산벌이 보이고,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보인다.


그렇게 전망이 좋은 곳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굽어보고 있던 것이다. 한편 관촉사 석불은 은진미륵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그 지역의 명칭이 '은진'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은 높이가 18m가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제작하는 데 무려 3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 있었다. 어느 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도저히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장난감 로봇 만들 듯 3단으로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모방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관촉사 석불도 고려 전기시대 작품답게(?) 인체 비례가 맞지 않는다. 대신 신체 부위를 시원시원하게 표현하였다. 머리, 손, 발 등이 아주 굵직하게 표현되었다. 인체비율을 중시했던 석불들이 정교한 디테일을 강조했다면,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표현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손가락, 발가락까지 시원시원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그런지, 관촉사 석불을 보고 있노라면 친근감이 밀려온다. 거대 석상에 압도된다기 보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관촉사 일대도 예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옛 삼남대로가 이곳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은진미륵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서 있었다. 액운을 막아주고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 관촉사 은진미륵

 

 

 

* 관촉사 은진미륵

 

 

 

 

 

* 대조사 석불

 

 

 

* 대조사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 파주 용미리 쌍미륵

 

* 파주 용미리 쌍미륵

 

 

 

천상의 맛 '지리산 잡탕라면', 들어보셨나요?

 

준비소홀이 만들어낸 지리산 에피소드

 

 

14.09.18 19:06l최종 업데이트 14.09.18 19:06

 

 

 

 

 

 

 

 

 
 
▲ 지리산 천은사 옆 호수 지리산 천은사 옆에 있는 호수. 천은사는 전남 구례 방면에 있다. 2012년 촬영. 잡탕라면 산행 사진이 없어 2012년에 촬영한 지리산 사진들로 대체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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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례구역 전남 구례구역. 지리산을 탐방한 뒤 구례구역 부근에서 사진을 찍었다. 앞에 보이는 강은 섬진강이다. 2012년 백두대간 여행 당시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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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소리에 홀려 떠나다!

 


그 때도 딱 이 시기였던 것 같다. 한 낮의 뜨거움은 어느덧 사라져 가고, 선선한 바람이 따뜻한 차 한 잔을 품게 하는 계절. 한 밤 중 귀뚜라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어디론가 불쑥 떠나고 싶은 계절.

십 몇 년 전. 필자는 귀뚜라미 소리에 혹해(?) 진짜 배낭을 메고 떠났다. 그렇게 떠난 곳은 바로 다름 아닌 지리산이었다. 그렇게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 떠난 지리산 등산여행을 내 아웃도어 활동의 시초로 삼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등산을 해왔지만 등산다운 등산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일 동안 계속 산 중을 헤맸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요한 산행이었지만 준비는 철저하지 못했다. 준비소홀을 귀뚜라미 탓으로 돌리고 싶을 정도로 준비가 꽝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미흡한 준비 덕에 재미난 에피소드들도 많이 생겨났다.  

 

 



 
▲ 도계 삼거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도 경계를 가르는 도계 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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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너무 우습게 봤다!

 


당시 필자는 매일같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승기를 잡을 수 없는 전쟁이었다. 매일 패배하고, 또 패배하고. 그런 전쟁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야 했다. 귀뚜라미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액션'을 취해야 했다. 어쨌든 액션은 등산으로 표출됐다. 기왕 하는 거 '빡세게' 하자며 지리산을 택했다. 험하게 산을 타다보면 내 머릿속을 흔들고 있는 번뇌들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단독산행이었다. 그런 만큼 각오도 대단했다. 천왕봉 밑에서 비박을 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다보니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추웠다. 초가을에 동상에 걸리는 줄 알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식사였다. 준비가 안 된 산행의 부작용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짐을 가볍게 하자는 의미에서 일부러 초코바 같은 행동식만 챙겨갔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산행에 나섰지만 허기가 진 상태로 산행을 했던 것이다.

지리산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었다. 누구는 당일치기 산행에도 철저한 준비를 하고 떠난다는데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에 오르면서 초콜릿과 과자부스러기가 전부였다면 그거 정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그나마 먹던 초콜릿은 다 떨어지고 배낭 속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다. 허기가 지니 기운도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주 넘어지기까지 했다. 삼일 동안 산행을 한데다 여러 차례 넘어졌더니 옷은 진흙투성이였다. 갈아입을 옷이 있기 만무했다. 영락없는 지리산 노숙자였다.

 

 

 

 

 
▲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을 탐방할 때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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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끼 정도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했더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인적도 끊겼다. 멀리서 '웅~' 하고 반달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던데 무섭지도 않았다. 그 소리를 내뱉는 반달곰이라도 잡아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겨우겨우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배는 너무 고프고, 돈은 한 푼도 없고. 초췌한 모습으로 산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한 번씩 다 쳐다보는 것 같았다. 마치 조난자 취급하듯 그런 측은한 눈빛으로 필자를 대했다. 그런 조롱 섞인 주위 눈빛을 물리치고 벤치에 누워버렸다. 탈진 일보 직전이었다.

'지리산이고 뭐고, 그냥 누워있자! 정 안되면 산신령한테 배고프다고 하소연을 하던가!'

 

 



 

천상의 맛, 지리산 잡탕라면!

 


산 중에서 허기가 지니 망상까지 들었던 같다. 그렇게 허상에 사로잡혀 벤치에 누워 있는데 솔솔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그냥 냄새가 아니었다. 천상(?)에서나 맡을 수 있는, 그런 너무나 맛있는 냄새였다. 혹시 지리산 산신령께서 식사를 하시고 계시나?

"야! 섞을 거 다 섞었더니 더 맛있는 거 같아!"
"역시 산에서는 잡탕라면이 최고야."
"맞아요. 집에서 먹으면 이 맛이 안 나죠."

동호인으로 보이는 성인 남자 네 명이서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5~6인용 코펠에다 넣을 수 있는 건 다 넣어 잡탕라면을 끓인 것 같았다. 라면, 참치, 햇반, 김가루, 북어... 식사 당번이 음식도 넉넉하게 준비한 것 같았다.

그들은 환한 미소를 띠우며 음식을 떠먹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침이 꿀꺽 넘어갔다. 발걸음이 그 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치 뭐에 홀린 듯이.

"정말 잘 먹었다. 근데 이거 많이 남았네."
"이거 여기다 버리면 안 되잖아요. 환경오염 될 텐데..."

 

 

 

 
▲ 아웃도어 음식 저렇게 푸짐한 김치는 누가 주었을까? 충남 서산을 방문했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주셨다. 빛깔도 일품. 맛도 일품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소시지 반찬은 필자가 만든 것이다. 2011년 국토종단 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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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남은거 좀 주세요"... 아까운 음식을 버리다니요

 

 


" 저 그거 남은 거 좀 주세요!"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이 필자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냥 들이댄 것이다. 산 중에서 허기가 져, 탈진 상태에 놓이게 됐는데 앞뒤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정신없이 먹었다. 허겁지겁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배고픈 누렁이 개 밥그릇 닥닥 긁어 먹듯이 단 한 방울의 국물조차 남김없이 먹었다. 옆에서 그 분들이 체한다고 천천히 먹으라고 했지만 그 소리는 그냥 소화제로 삼았다.  

 

 

 

산행 중에는 많이 먹어야 한다!


 

그 잡탕라면의 힘 때문인지 필자는 지리산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대성동 계곡쪽으로 내려왔는데 별 탈 없이 하산을 한 것이다. 하산하다 넘어지지도 않았다. 그 동호인 분들은 필자에게 음식으로'셀파'역할을 해주셨던 것이다. 어쩌면 그 잡탕라면은 지리산 산신령께서 내려주신 '천상의 음식'이었을지 모른다.


그 잡탕라면의 맛은 아직까지도 필자의 뇌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평소 여행을 많이 하다 보니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산해진미를 맛보았지만 아직까지도 '지리산 잡탕라면'을 뛰어넘는 음식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 그 잡탕라면이 그립다. 언젠가는 꼭 다시 한 번 그 잡탕라면을 맛보고 싶다. 그 '천상의 음식'을.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당부드릴 것이 있다. 이제 곧 있으면 단풍산행 철이라 산으로 들로 많이 나가실 것이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다.

산행에 나설 때는 충분히 식량을 챙겨야 한다. 트레킹도 마찬가지다. 좀 많다 싶을 정도로 챙겨도 상관없다. 좀 넉넉하다 싶으면 산행 중에 만난 이들과 나눠 먹으면 된다. 그렇다. 많이 먹어야 한다. 그래야 안전한 산행, 안전한 트레킹을 할 수 있다. 필자처럼 준비 없는 산행을 하면 에피소드는 많이 생성될 수는 있지만 그만큼 허기가 져서 탈진 할 수도 있다.

 

 

 


 
▲ 지리산의 한 찻집 지리산 천은사 앞 쪽에는 '이속'이라는 운치 좋은 찻집이 하나 있었다. 이속(離俗)은 속세를 떠난다는 뜻이다. 2011년에 방문했을 때 공짜로 차 대접을 받았었는데... 2012년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주인장은 떠나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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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지리산 종주 같은 장거리 산행에 나설 때는 예측된 식량보다 더 챙겨가자. 비상식량으로 2~3끼 정도를 더 휴대하면 좋을 것이다.

 


2. 바로 꺼내 먹을 수 있게 행동식은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보관한다. 필자는 허리에 작은 보조가방을 메는데 그 곳에 비상용 영양바 하나를 항상 넣어두고 다닌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허벅지를 더듬는 '손길'.. 친구를 의심하다

오마이뉴스 2014.09.15 11:45

 

 

 

 

 
▲ 부동산 광고 전월세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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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 제주 → 공주 → 거창 → 남도 일대 → 거창


지난 여름, 필자의 이동 궤적이다. 무슨 팔자(?)가 붙었는지 유랑단처럼 계속 이동을 하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잠자리도 계속 바뀌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내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던 점이다. 매일 밤 폭우를 걱정하며 텐트 생활을 했던 장거리 여행 때보다는 그나마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그렇게 방랑 생활을 하다보니 한 가지 '잠자리의 철학'이 생겼다.

"7성급 호텔이든 공동묘지 옆에 친 텐트든 내가 두 다리 뻗고 누운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잠만 잘 자면 되잖아!"

실제로 이런 원칙을 세우고 장거리 여행을 다녔더니, 잠자리가 바뀌어서 겪는 불면증 따위는 겪지 않게 됐다. 하지만 이 같은 나의 '잠자리 철학'은 역설적으로 안정된 거주지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하고 싶은 그런 열망.

 

 

 


 
▲ 물폭탄 맞은 텐트 돈이 없어 모기장 텐트를 쳐가며 여행을 했을 때 사진. 전날에 내린 게릴라성 집중호우로 물난리를 겪은 모습을 담았다. 2011년 여름, 전북 완주 부근에서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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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가 된 내 방


대학 시절이었다. IMF 이후였다. 자영업을 하시던 삼촌이 일이 잘못되어 사업을 정리해야 했고, 사시던 집까지 잘못되어 가족들을 이끌고 우리집으로 들어오셨다. 가뜩이나 좁은 집에 삼촌 식구 4명이 들어오니 집안은 정신이 없었다. 삼촌네 살림살이들도 전부 다 이사 왔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이동할 때도 짐들을 피해 쏙쏙 옮겨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내 방도 짐이 쌓여 창고(?)처럼 보였다. 간신히 몸을 누일 정도만 됐던 것이다.
당연히 내 생활은 사라졌다. 창고 같은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학교 근처에다 방을 구하기로 했다.

'룸메이트는 없고 방에서 술은 안 마시겠다'

이런 식의 나름대로의 독립생활 수칙도 정했다. 내 방이 주당들의 아지트화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친구와 시작한 자취생활


우여곡절 끝에 나의 '자취 일기'는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생활을 잘했다. 삼시 세끼 다 챙겨먹었고, 방 청소도 주기적으로 했다. 거의 다 학교 사람이긴 했지만 이웃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빨래, 설거지, 청소, 음식 장만 등등...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척척 해내니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 같이 살 여자 친구만 있으면 되겠네!'

그 기원이 통했는지 정말 친구와 함께 살게 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친구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 같이 살고 싶다는 소박한 기원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친구 녀석인 성훈이와 동거를 하게 됐던 것이다. 룸메이트를 두지 않겠다는 수칙을 깨지게 만든 이 녀석의 사연도 기구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전부 뿔뿔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한 수칙 때문에 친구의 어려운 사정을 제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친구를 위해 방 한편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다행인 건 성훈이가 생활 매너가 좋았다는 점이다.

성훈이도 방을 아지트화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서로서로 바빠서 그랬는지 방을 아지트화 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런대로 잘 지켜졌다. 또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그런지 서로간의 생활 트러블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성훈이가 등장한 이후로 이상한 일이 생겼다. 무언가 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바퀴벌레!

전에는 한두 마리씩 보이던 바퀴벌레가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보이는 거였다. 소풍(?)을 가는지 어른 바퀴 뒤로 줄줄이 새끼바퀴들이 따라다니는 장면도 목격됐을 정도다. 전에는 분명 이렇게 자주 출몰하지 않았었는데...

바퀴벌레는 정말 별로다. 차라리 뱀이나 두꺼비가 낫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바퀴벌레 덕택에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어두운 밤에 집에 불을 켰을 때 처음 눈에 띄는 게 바퀴벌레라면... 그것 참 거시기 했다.

 

 

 

 

 
▲ 부동산 어플리케이션 음식배달 어플이 있듯이, 이제는 부동산 어플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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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때문에 친구를 의심하게 되다


바퀴벌레들 때문에 성훈이를 오해한 적도 있었다.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다. 전날 알바 때문에 난 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쉽게 잠은 오지 않았다. 성훈이도 알바를 하고 왔는지 골아 떨어져 있었다. 뒤척거리다가 선잠에 들었다. 몽롱한 기운이었지만 의식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자꾸 내 허벅지를 뭐가 건드는 게 아닌가. 한쪽도 아니고 양쪽을 동시에 다 건드리고 있었다.

"너, 뭐야!"

소리를 냅다 지르고 일어나 불을 켰다. 그런데 성훈이는 방 한편에서 곤히 잘 자고 있었다. 정신없는 내 눈에는 범인으로 보이는 어른 바퀴벌레 두 마리가 도망가는 게 보였다. 그 중 한 마리는 성훈이 얼굴을 타고 도망을 갔는데, 그 기척에 놀라 성훈이도 일어났다.

"뭐야... 도둑 들었어?"
"어.... 아니..."
"그럼 꿈꿨냐? 빨리 자라. 나 내일 일찍 나가야 돼."
"......"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성훈이가 내 방으로 이사 왔을 때 살림살이도 좀 가지고 왔다. 그래서 그 이사 와중에 바퀴벌레들도 같이 이사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성훈이의 짐들을 방 한편에 쌓아두었으니 바퀴벌레 녀석들의 아지트도 넓어진 셈이다.

물론 이런 결론은 내 스스로 한 것이고, 성훈이한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훈이도 눈치가 있었는지 바퀴약 사는데 '거금'을 내놓았다. 또한 집 청소와 이불 말리기에 손수 앞장섰다.

우리들의 일제소탕 작전으로 그 녀석들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일단 집안 청소에 신경을 쓰니 자연스레 그 녀석들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우리집 본가에서도 바퀴벌레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삼촌댁 이삿짐과 함께 그 녀석들이 옮겨왔던 것이다.

그 바퀴벌레 에피소드가 일어난 몇 달 후 나는 다시 본가로 복귀를 했다. 삼촌이 집을 구해 나가셨고 내 방도 창고 신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두 다리 뻗고 누운 곳이 바로 천국


글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필자에게는 돌아다니는 팔자가 붙은 거 같다. 역마살이 붙은 것 같다. 역사트레킹이니 도보여행이니 하는 역마살 팔자가 붙다보니 역설적으로 안정된 거주지에 대한 갈증이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그 갈증은 평생 해소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잠자리가 바뀔 때마다 '내가 누운 곳이 천국'이라는 다짐을 하며 유유자적하게 받아 넘겨야 할 것 같다. 그 곳이 7성급 호텔이든 허름한 오두막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정말 내가 두 다리를 뻗고 있는 곳이 천국인가? 진짜 그럴지도 모르지! 대신 바퀴벌레가 있으면 지옥일지도 몰라. 뱀은 자세히 보면 귀엽기라도 한데... 바퀴벌레는 진짜 별로야...'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입니다.

 

 

 

 



 

 

 

차례상 사과의 붉은 빛깔, 이렇게 만들어진다 2편

일조량 높이기 위해 잎따기 작업도... 온 몸에 파스를 붙이며 한 사과 출하

 

14.09.08 16:37
최종 업데이트 14.09.08 16:37

 

 

 

 

---> 전편에 이어서

 

 

 

# 잎사귀 따다가 사과를 날려 먹기도...

색깔이 안 난 건 일조량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8월의 뜨거운 햇살이 스며들어야 백설공주가 먹었던, 그 빨간 사과처럼 홍로가 붉은 색을 띤다. 하지만 올해 8월은 일조량이 적었고, 그만큼 사과에 붉은 기운이 들지 않았다. 이런 '색깔의 문제' 때문에 농장주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떤 농장주는 하늘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색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장주들은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색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강한 햇살이 최고다. 하지만 그건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잎따기'를 해준다. 사과 주변에 달려있는 잎사귀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성하게 감싸고 있는 잎사귀들을 제거함으로써 사과에 직접 도달하는 햇볕의 양을 높여주는 것이다.

 

 

 

▲ 홍로 색이 잘 든 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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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따기는 매해 수확에 앞서 꼭 진행되는 작업이다. 하지만 올해는 잎따기가 더 강화됐다고 한다. 색깔이 안 났던 만큼 잎사귀 제거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그런 잎사귀 제거가 필자의 첫 번째 사과작업이었다.

햇살을 더 잘 받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잎사귀들을 제거했다. 그러다 애꿎은 가지도 몇 개 '제거'했다. 또한 알이 굵은 멀쩡한 사과들도 날려먹었다. 농장주의 시선이 싸늘했다. 

 

 

# 사과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색깔이 안 났다고 사과 따기를 계속 미룰 수는 없는 법! 농장주들은 8월 마지막 주를 기점으로 사과수확에 나섰다. 이제 고제면은 면 전체가 사과 수확에 매달리게 됐던 것이다. 필자는 매일 아침 마음을 다잡고 사과밭으로 향했다.

"열심히 일해서 사람들한테 누를 끼치지 않겠어. 내 명예를 지키겠어!"

하지만 저렇게 아침마다 한 다짐은 밤이 되면 달라졌다. 허리와 팔에 붙인 파스를 갈며 조용히 혼자말을 했다.

'내일 비가 왕창 와서 작업이나 취소됐으면...'

그만큼 사과 작업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매일밤 숙소에 돌아와 허리와 팔다리를 주물러야 했을 정도로 고된 일이었다.

사과수확 작업에서 가장 고역이었던 건 컨테이너 박스를 옮기는 일이었다. 일단 사과나무에서 딴 사과는 일괄적으로 컨테이너 박스에 담기게 된다. 그렇게 쌓인 컨테이너를 화물차에 적재시키고 선별장으로 향했다. 선별장에서는 선별을 위해 컨테이너를 잘 쌓아 놓았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계속 컨테이너를 상차, 하차하는 것이 내 임무였던 것이다.



 

 

 

▲ 컨테이너 저 노란색 박스를 컨테이너라고 부른다. 저 컨테이너를 '들었다 놨다'했다. 아주 삭신이 다 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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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 놨다'를 계속하다 보니 사람이 무척 단순해졌다. 컨테이너 중에는 사과가 덜 담긴 것들도 있었고, 많이 담긴 것들도 있었다. 적게 담긴 것에는 콧노래를 불렀고, 가득 담긴 것에는 속으로 욕을 해댔다. 컨테이너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콧노래와 욕을 번갈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들었다 놨다'를 무한반복한 날은 밥숟가락도 잘 잡히지 않았다. 음식을 뜨다가 실제로 숟가락을 놓친 적도 있었다. 또한 펜을 잡기 힘든 날도 있었다. 작업일지를 작성하려다 손가락이 시큰거려 그만 둔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직접 작업한 사과라 그건가? 더 맛있네!

그래도 버텼다. 매일밤 온 몸을 파스로 도배하며 버텼다. 사과 농장주들은 매년 이렇게 고되게 작업을 해왔는데... 겨우 이거 가지고...

그렇게 그렇게 버티다 보니 마침내 필자가 잡아두었던 서울 상경일이 다가왔다. 잘 버텼던 셈이다. 어떤 농장주는 필자에게 일당 이외에 사과 한 박스를 선물로 보내주셨다. 또 어떤 농장주는 다음해에도 꼭 같이 자기와 사과작업을 하자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이런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필자가 일을 못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들었다 놨다'의 역경을 뚫고 애초 다짐했던 명예를 사수했던 것이다.

추석 과일의 대명사 사과. 그 사과가 식탁, 혹은 차례상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번 사과작업은 그 땀과 눈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어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필자의 집 한 편에는 '들었다 놨다'하며 작업했던 사과들이 놓여 있다. 식사를 한 후 후식으로 베어 먹는 사과 맛이 좋다. 아삭아삭... 소리까지 맛있다. 내가 작업한 사과라서 더 맛있는 건가?

 


 

 
▲ 사과작업 사과작업을 하는 분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멀리 삼봉산 자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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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차례상 사과의 붉은 빛깔, 이렇게 만들어진다 1편

 

일조량 높이기 위해 잎따기 작업도... 온 몸에 파스를 붙이며 한 사과 출하

 

14.09.08 16:37
최종 업데이트 14.09.08 16:37

 

 

 

 

 

 

 
 
▲ 수승대 트레킹 표지판 사과 캐릭터를 이용한 트레킹 표지판. 유명한 거창의 수승대 트레킹 코스를 알리는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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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 좀 발랐다. 이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도 허리와 팔목이 욱신거린다. 손끝도 시려서 키보드가 부자연스럽게 터치된다. 이게 다 10여 일간의 사과작업 때문에 얻은(?) 증상이다.

지난 8월 21일. 필자는 전라북도 무주를 통해 경남 거창군 고제면으로 진입했다. 일명 '무진장'의 하나로 불리는 무주군은 백두대간인 덕유산과 삼봉산 등을 두고 거창군과 남북으로 맞닿아 있다. 그래서 무주 읍내에서 출발하는 무진장 시골버스를 타면 거창군 접경지역에 닿을 수 있다.

 

 

# 사과로 유명한 무주군 무풍면과 거창군 고제면


이렇게 두 지역이 인접해 있으니 특산품도 유사하다. 삼봉산 북쪽에 있는 무주군 무풍면과 남쪽에 있는 거창군 고제면 둘 다 사과가 특산품이다. 무주 무풍 사과의 명성을 잘 아실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거창군 고제 사과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일 분들이 많을 것이다. 어쩌면 '고제면'이라는 지명도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행여나 이런 분들도 있을지 모른다.

"거창하면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한국전쟁 때 일어난 거창 신원 민간인 학살은 알겠는데... 그나저나 거창이 사과 산지였어?"

 

 

 
▲ 사과 가로등 거창군 고제면에 위치한 사과테마파크의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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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거창은 사과 산지다. 그 거창 사과의 중심에 고제면이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고제면에는 삼봉산이 자리잡고 있다. 해발 1254미터인 삼봉산은 거창의 주산으로 그 일대는 큰 일교차를 이용한 고랭지 농업이 발달해 있다. 그렇게 큰 일교차는 사과의 당도를 현격히 높여주는 '촉매제' 역할을 해준다.


그렇게 삼봉산 아래 자락에 위치한 거창군 고제면을 방문했던 건 사과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한참 손이 부족할 시기이기에 기꺼이 가서 손발 노릇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품삯은 받았다. 대신 일당 이상의 값어치를 해준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올해로 벌써 사과따기 3년 차! 농장주들한테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겠어!'

 

 

# 무척 중요한 사과의 색깔


필자는 앞서 무주군 무풍면에서 시골버스를 타고 거창군 고제면으로 진입했다고 언급했다. 차창 밖으로나마 무풍면의 사과농장들을 관찰할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관찰을 하다보니 좀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사과에 '색깔'이 안 났던 것이다. 색

깔? 무슨 색깔?

 

 

무풍면과 마찬가지로 고제면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홍로라는 품종이다. 홍옥과는 다른 품종인 홍로는 차례상에 오르는 사과로 추석을 앞두고 수확을 한다. '홍동백서'할 때 '홍'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홍로인 것이다. 한가위 차례상은 햅쌀과 햇과일 등 그해 가을걷이로 얻어진 재료들을 올려야 하기에, 추석 직전에 출하되는 홍로는 자연스럽게 차례상에 오르는 과일 품목 1순위에 속한다.

 
▲ 홍로 홍로는 새빨간 사과다. 한 여름 일조량을 풍부하게 받아야 빨게진다. 사진에 등장한 사과는 색이 아직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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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차례상에 올려지는 과일이기에 홍로는 출하시기가 명확하다. 이를 다르게 이야기하면 모든 생산 역량을 추석이라는 한계 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추석을 넘겨 생산이 된다면 그만큼 시장에서의 가치는 감소될 수 있다. 사람들이 택배로 받아볼 수 있게 최소한 추석 연휴 이틀 전에는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홍로는 시간에 쫓기며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품종이다.

 

 

 

 

 


 

 

 

 

 

 

추석 예초 앞두고 '말벌' 조심하세요 2편

과민증 여부 미리 확인하고, 벌에 쏘이면 즉시 119 연락

 

 

 

구급차 접근이 용이한 곳으로 즉시 하산


그렇다면 아나필락시스 증상이 있는 사람이 말벌에 쏘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벌침을 신속히 제거해야 한다. 벌침은 손이나 핀셋으로 뽑으면 침낭에 담긴 독소가 체내로 주입되므로 카드 같은 모서리가 단단한 물체로 긁어내는 것이 좋다. 통상 1분 안에 벌침 속의 독이 체내로 주입되므로 신속하게 손을 써야 한다.  

또한 지체 없이 119에 신고를 해야 한다. 1분 안에 벌침을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안전을 위하여 119에 신고해야 한다. 이때 환자는 구급차 접근이 용이하도록 포장도로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아웃도어 활동이나 제초작업 등은 통상 산 속에서 행해지므로 사고 발생지점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 말벌에 쏘였을 때의 골든타임은 20분에서 60분 사이이다. 이 시간 안에 병원에 도착한다면 생존 확률은 크게 높아진다. 하지만 그 시간을 놓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 주위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일단 환자 옷의 단추나 지퍼 등을 풀어줘야 한다. 이미 환자의 몸은 퉁퉁 부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환자를 똑바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환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더라도 환자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땅바닥에 드러누우면 호흡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얼음주머니를 대거나 물을 뿌려 환자가 의식을 잃지 않게 계속 일깨워야 한다.

 

 

 


 

 

 
▲ 포장도로 아나필락시스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말벌에 쏘였을 때 즉시 하산을 하여야 한다. 구급차 진입이 용이한 곳으로 이동을 하여야 한다. 산 중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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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알레르기 증상이 있는지 사전에 파악해야...


앞서도 언급했듯이 말벌에 의한 아나필락시스 증상은 골든타임을 지켜주면 치유가 가능하다. 문제는 자신이 아나필락시스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파악하고 있느냐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벌에 의한 아나필락시스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를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봉침을 놓는다. 벌침에 있는 봉독(蜂毒)을 정제하여 주사기로 환부에 주입하는데, 봉침은 강력한 항염증 작용이 있어 척추치료에까지 이용된다고 한다. 이런 봉침 시술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바로 벌침 알레르기 테스트다. 봉침 시술을 받다 아나필락시스 증상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봉침 시술에 필요한 벌침 알레르기 테스트를 통해 자신이 아나필락시스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봉침 시술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일부러 한의원에 들러 벌침 알레르기 테스트를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또한 의술차원에서 정제된 봉침을 맞는 것과 말벌, 특히 독성의 강도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야생 말벌에 의한 벌침 공격은 그 정도의 차이가 크다. 

자신이 아나필락시스 증상을 가지고 있는지 인지하는 가장 최후의 수단은 이전에 벌에 쏘였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복기해 보는 것이다. 꿀벌이든 말벌이든 벌에 쏘였을 때 알레르기 반응이 몸 전체적으로 일어났다면 중증 알레르기 체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손성일 대장은 자신이 벌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전에도 벌 때문에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 사건이 있기 2주 전에도 꿀벌에 물려 통원치료를 받았었다. 그런 '학습' 효과가 있었기에 손성일 대장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산 중 깊은 곳에서 작업을 했던 그는 당시의 말벌 공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그 즉시 구급차 접근이 용이한 장소로 하산을 했던 것이다.  

이번 여름은 마른장마로 인하여 벌 개체 수가 증가했다. 일찍부터 말벌주의보가 발령된 상태다. 그래서 추석을 앞두고 예초 작업을 할 때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작은 곤충이라고 벌을 낮잡아 봐서는 안 된다. 그 작은 벌의 침 하나가 사람의 생사를 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벌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벌에 의한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팁들이 있다. 아래를 참고해서 벌에 의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하자.

1. 산에 오를 때에는 진한 향수나 화장품을 쓰지 말자. 진한 향기 때문에 벌들이 몰려올 수 있다.  


2. 단맛이 나는 음식물을 곁에 두지 않는다. '꿀'인줄 알고 벌들이 몰려들 수 있다.


3. 벌침에 쏘였다면 손으로 잡아 빼지 말고, 교통카드 같은 끝 면이 단단한 물체로 긁어내듯이 제거하자. 손으로 침을 잡아 빼면, 치약이 짜이듯 침낭 안에 있는 독소가 체내로 주입되게 된다. 


4. 벌침은 신속히 제거해야 한다. 1분 안에 제거해야 침 안에 있는 독소가 우리 신체로 주입되지 않는다.  


5. 아나필락시스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에피네프린(epinephrine) 성분이 있는 '자가 에피네프린 펜' 주사를 휴대하고 다니는 게 좋다. 에피네프린 주사는 처방전이 있어야 하고, 가격이 비싸다는 게 흠이다. 전 세계적으로 아나필락시스 증상을 가진 사람이 드물어 대량생산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6. 에피네프린 주사를 주입했다고 하더라도 119에 연락을 해야 한다. 주사는 단지 증상을 늦춰줄 뿐,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다.

 

 

 

 

 

 

추석 예초 앞두고 '말벌' 조심하세요 1편

 

과민증 여부 미리 확인하고, 벌에 쏘이면 즉시 119 연락

 

 

14.08.21 10:06
l최종 업데이트 14.08.22 11:38

 

 

 

 

 

지난 12일,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은 잠시나마 '황천길'을 경험했다. 그가 개척한 도보여행길인 삼남길 보수 작업을 하다 말벌에 쏘였던 것이다. 말벌에 쏘였다고 해서 모두가 다 '황천길'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구급차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다면, 목숨을 잃을 뻔 했을 정도로 그는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겨우 말벌 한 마리 때문에 생(生)과 사(死)의 기로에 서게 됐던 것이다.

 

 


 
▲ 말벌집 말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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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민증이라 불리는 아나필락시스

살면서 누구나 다 한 번쯤은 벌침에 쏘인 적이 있을 것이다. 야외 활동을 하다 쏘일 수도 있고, 제초 작업을 하다 쏘일 수도 있다. 필자도 트레킹을 하다 여러 번 벌침에 쏘였다. 그렇게 벌침에 쏘였지만 하루 정도 욱신거리다 말았다. 따로 약물치료를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상처 부위가 가라앉았다.

대다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말벌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쏘인 부분, 국소 부위에만 이상 증상을 나타낸다. 따로 치료를 하지 않더라도 자연치유가 가능하다.

하지만 손성일 대장처럼 중증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벌침은 치명적이다. 온 몸이 부어올라 기도가 좁아져 호흡곤란 증세가 발생하고, 더불어 심장마비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다 저혈압으로 인한 쇼크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중증 알레르기 반응을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라고 부른다. 과민증이라고도 하는 아나필락시스는 벌이나 독개미 같은 곤충뿐만 아니라 땅콩이나 새우 같은 음식물을 통해서도 발병할 수 있다.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인구 10만 명당 3~4명 정도다.

 

 

 


 
▲ 산 길 아웃도어 활동이나 제초작업은 통상 산 중에서 행해진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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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차 접근이 용이한 곳으로 즉시 하산

그렇다면 아나필락시스 증상이 있는 사람이 말벌에 쏘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벌침을 신속히 제거해야 한다. 벌침은 손이나 핀셋으로 뽑으면 침낭에 담긴 독소가 체내로 주입되므로 카드 같은 모서리가 단단한 물체로 긁어내는 것이 좋다. 통상 1분 안에 벌침 속의 독이 체내로 주입되므로 신속하게 손을 써야 한다.  

또한 지체 없이 119에 신고를 해야 한다. 1분 안에 벌침을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안전을 위하여 119에 신고해야 한다. 이때 환자는 구급차 접근이 용이하도록 포장도로가 있는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아웃도어 활동이나 제초작업 등은 통상 산 속에서 행해지므로 사고 발생지점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면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 말벌에 쏘였을 때의 골든타임은 20분에서 60분 사이이다. 이 시간 안에 병원에 도착한다면 생존 확률은 크게 높아진다. 하지만 그 시간을 놓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 주위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일단 환자 옷의 단추나 지퍼 등을 풀어줘야 한다. 이미 환자의 몸은 퉁퉁 부어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환자를 똑바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환자가 정신을 잃고 쓰러질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더라도 환자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땅바닥에 드러누우면 호흡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얼음주머니를 대거나 물을 뿌려 환자가 의식을 잃지 않게 계속 일깨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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