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각 새벽 2시 30분 경. 

이제 몇 시간 후면 파리행 비행기에 오른다. 앞선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자전거로 탐방한다. 이후로는 버스 여행도 하고.

작년에도, 2014년에도 다녀왔던 순례길을 또 가는 것이다. 그냥 얌전하게 순례길을
걸을 것이지... 그때 왜 자전거 타는 순례객들에게 시선을 빼앗겨서...ㅋ

2010년도 전후로 해서 자전거여행을 참 많이다녔었다. 국토종단 4회, 국토횡단 2회.
여름만 되면 고물자전거 끌고 그렇게 다녔었다. 장마철에 여행을 시작했으니 비도 엄청맞았다.

자전거만 고물인가? 텐트도 고물이었다. 텐트에 계곡이 생길 정도로 내 장비들은 참으로 열악했다. 5만원 짜리 고물 자전거에 2만원 짜리 텐트, 1만원 짜리 침낭... 돈을 아끼려 밥은 당연히 해 먹었고. 그러다보니 짐은 엄청나게 불었다. 자전거 자체가 무게가 꽤 나가는 철TB에다 이것저것 짐을 때려 넣었더니 약 무게가 약 40킬로 정도가 됐다. 물론 자전거 무게 포함이다. 또 약간의 뻥이 들어가서...ㅋ

그때도 비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비싼 자전거를 타며 전국일주에 나선 라이딩족들도 많이 만났다. 

"꼭 비싸고 좋은 자전거로만 여행을 다니나요? 이런 중고 자전거도 쌩쌩 잘 달립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좀 쪽팔렸다. 여행 중에 만난 대학생들보다도 더 장비가 열악했다. 자격지심이라는 말은 이때 쓰는 거겠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칭하기에는 당시 내 상황이 좀 애매했다.  그때 내 나이는 이미 서른 중반이 넘은 상태였으니까. 변변한 직업없이, 마땅한 돈벌이도 없이... 그렇게 내 삼십대 중반은 바닥이었다. 뭐 그 이전이라고 잘 나간건 아니었고...ㅋ

그런 바닥 같은 삶에 한줄기 빛 같은 게 있었으니 바로 자전거 타기였다. 텐트를 칠 수만 있다면 공동묘지에서도 잘 잤으니 매년 여름만 되면 페달을 열심히 굴렸던 것이다. 장비빨이 떨어져 좀 쪽팔기는 했지만 페달을 굴릴 때만큼은 그냥 모든게 잊혀졌다. 요즘 숲길 트레킹을 하다보면 가끔 무아지경 비스무리하게 빠지는게 있다. 그런 무아지경을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좀 느꼈었던 것 같다.  

엄청난 무게를 싣고 갔으니 언덕길은 당연히 자전거를 끌고 갔다. 사진에 나온 곳은 한계령인데 2012년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때 끌고 올라갔었다. 여름이라 제설장비를 모아 둔 곳이 놀고 있었고, 그곳에다 텐트를 쳤었다. 하루밤을 아주 잘 자고 그 다음날 한계령을 찾은 관광객이 찍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원도 인제군 읍내에서 열심히 자전거를 끌고 약 4시간 만에 도착했던 걸로 기억한다. 한계령 초입에서 정상부까지. 고갯길에서 자전거를 끌고 갈 때는 몸이 뒤로 밀리기도 한다. 급경한 경사도에 질려서 도로변에 그냥 자전거랑 같이 털썩 넘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정상부에 오르면!!! 엄청난 쾌감이든다. 등산할 때 정상을 찍는 맛과는 다르다. 정말 그 쾌감은 짜릿할 정도다. 그런 맛이 내 삼십대 중반을 버티게 해주었던 것 같다. 몸을 혹사시켜서 얻는 그런 맛? 혹시 변태?ㅋ

산티아고 순례길은 지형이 완경사라서 자전거를 끌고 갈 일은 거의 없을 거 같다. 몇 군데가 있기는 한데... 한계령도 가고 지리산 관통도로(노고단)도 가 본 적이 있기에 그렇게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다. 차라리 비 오는 거에 대한 걱정이 더 많다. 

지금도 살림살이가 넉넉하지가 않다. 통장은 '텅'장이 되려고 준비중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10년 전 보다는 확실히 더 낫다. '강사'님이라는 호칭도 듣고 있고, 나만 잘하면 꾸준히 강의도 할 수 있으니까. 많이는 못 벌어도 나 혼자 묵을 거는 마련할 수 있다. 

자전거여행이든 트레킹이든, 아니면 배낭여행이든. 안전하게 행해야 한다. 이번 여행도 안전하게 잘 하고 와야겠다. 

좋은 기운 팍팍 받고, 2020년에는 더욱더 활기차게 생활해야겠다! 아자아자 파이팅!
 













2019년 12월 12일 목요일.

올해의 마지막 트레킹 강의가 있었던 날이다. 뭐하느라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갔는지, 봄학기 개강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마무리를 해야하다니! 

내게 2019년도는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한 해였다. 

1. 60개 이상의 트레킹 코스 확정, 목표달성함.
2. 햄스트링 건염이 발생하여 병원 신세를 졌음.
3. 6년 만에 다시 여름 장기 여행을 실시함.
4. 커뮤니티 체제로 트레킹 강의를 진행함.
5. 산티아고 순례길을 또 갔음.

이렇게 작성하다보니 2019년을 그렇게 허투르게 보내지는 않은 듯싶다. 물론 가슴 한 구석에는 아쉬움이 한가득이다. 무언가 된 거 같지만 허허로운... 그런 감정? 뭐 그런 허허로움을 채우는 것도 내 몫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올 해의 마지막 트레킹은 홍은골 역사트레킹이었다. 3호선 홍제역에서 시작하는 이 코스는 탕춘대성을 따라 걷는다. 그렇게 탕춘대성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북한산 비봉이 한 눈에 보이는 구간까지 갈 수 있다. 

이 코스는 두드러지는 문화재가 없어 그냥 예비 코스로 잡았다. 탕춘대성이 있긴 하지만 눈에 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묵언 수행을 하면서 걷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홍은골 역사트레킹은 인공 전망대는 없지만 천연의 바위전망대는 두군데가 있다. 이곳에서 지난 1년 동안 함께 트레킹을 해왔던 분들의 사진을 찍어드렸다. 수려한 풍광 아래에서 미소를 띄우고 있는 그 분들의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내년에도 이런 멋진 미소들을 많이 보고 싶다. 그게 내 2020년의 소망이다!

2019년 한 해동안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가오는 2020년에는 더욱더 알차고 재밌는 트레킹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2월 8일 일요일.

이우학교라는 대안학교 학생들과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나섰다. 
이우학교 학부모 모임(1학년)에서 의뢰를 하여 행해진 트레킹이었다. 
중학교 1학년들과 그 학부모들로 이루어진 트레킹팀이 꾸려졌다. 
나를 포함하여 총 25명이라는 대규모 팀이 꾸려진 것이다. 

12월에 행하는 트레킹이라 좀 걱정을 했었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면 어쩌나 하는...
그래서 처음에는 11월 중순경에 하는게 어떠냐고 역제안을 했었다. 그때는 날씨도 좀 온화할테고
단풍놀이도 하면 더 좋을 테니까.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게 외부행사다. 의뢰하신 분들도 
일부러 12월에 날짜를 잡고 싶지는 않으셨다고 했다. 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

다행스럽게도 이날은 덜 추웠다. 전날까지도 비바람이 불며 날씨가 쌀쌀했는데 이날은 
햇살이 좋았다. 미세먼지도 덜했다. 날씨 덕을 좀 봤다. 3대가 덕업을 쌓은 참가자가 있었나...^^

대안학교라지만 중학생들은 중학생들이다. 더구나 이제 곧 있으면 그 무시무시하다는 중2가 되는...!

나 같은 아재가 아무리 날고 뛰고 한다고 하더라도 중딩들을 이길 수는 없다. 더군다나 썰렁한 나의 아재 개그는 5060세대들을 위한 것이니...ㅋ

청소년들과 함께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마치 모험을 하는 느낌이든다. 그만큼 흥미진지하다는 뜻이다. 역사트레킹의 주 향유 세대들인 5060세대들과는 다른 반응이 나오니까.

그렇게 4시간 정도 진행된 이우학교 학생들과의 인왕산 역사트레킹! 무사히 잘 종료됐다. 모험 하나
제대로 마쳤다. 그런데 한가지!!!

힘들어서 집에서 뻗었다. 나같은 아재가 중딩들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라니까! ㅋ














12월 5일 목요일.

찬바람이 코 끝을 시리게했다. 하지만 우리가 실내에만 있을 거 같은가!^^
이날은 남한산성 서편 역사트레킹을 행하게됐다. 남한산성은 한 번으로 커버하기에는 워낙 방대하기에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었는데 그중 서편을 행하게 된 것이다. 

이제 2019년의 트레킹도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사실 이날 트레킹도 벙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초겨울까지 역사트레킹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런 차원에서 남한산성을 코스로 잡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수강생분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으니까!

더군다나 전날 눈이 내렸는지 응달진 곳에는 눈길로 뒤덮여 있었다. 서울에서 못 본 눈 구경을 남한산성에서 봤던 것이다. 올 해 첫 눈 감상인가? ㅋ

바람이 코 끝을 시리게 했는데 역설적으로 대기의 질은 좋았다. 코에 제대로 바람 좀 쐬고 왔다고 할까나?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서울의 북현무 북한산과 남주작 관악산은 정말 멋지더라! 그렇게 한 반짝 떨어져 서울의 풍광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남한산성은 참 매력적인 곳이다. 

그래서 트레킹팀은 내년에 꼭 다시 오자고 결의를 했다. 그때는 남한산성 동편 역사트레킹을 행해야지!
























지난 11월 27일 수요일에 행했던 트레킹에 대한 후기를 이제서야 올린다. 

제목에 나와있듯이 이날은 하루에 두 탕 뛰었다. 체력적인 문제도 있고 시간 문제도 있고 해서
하루에 한 트레킹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는데... 이날은 두 탕을 뛰었다. 

내 강의는 4시간을 기준으로 하는 터라 이렇게 두 탕을 뛰려면 여러가지가 갖춰져야 한다. 
오전 타임은 단축 수업을 한 후 바로 오후 타임 시작점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오전 타임 종료점과 오후타임 시작점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 두 탕을 뛰기는 정말 어렵다. 
만약 오전 타임 종료점이 아차산이고, 오후 타임 시작점이 백사실계곡이라면 두 탕은 아예 생각도
못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전 종료점과 오후 시작점이 동일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루에 두 탕을 뛸 수
있었던 것이다. 

오전타임: 도심권커뮤니티,  진관사 역사트레킹 -> 진관사 종료
오후타임: 기업체 동호회, 북한산계곡 역사트레킹 -> 진관사 입구에서 시작

오전타임 오후타임 둘 다 단축수업을 했다. 그래도 이날 총 6시간 정도 걸으며 해설을 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냐고요?

뻗었습니다! 완전히! 
다음날 트레킹이 또 있었는데...ㅋ






















속옷*3

양말*5

수건*2

자켓*2

침낭

잠옷세트

구급약통

태블릿pc

세면도구

헤드랜턴

필기도구

충전기

여권

버스 출력증

건전지

슬리퍼

판초우의

보조배낭

보조배터리

카메라 충전기

...

짐작을 하실 것이다. 이 목록들은 장거리여행을 가기 위한 물품 목록이다.

그런데 여기에 몇 가지 물품들이 포함된다.

공기펌프

앞, 뒤 흙받이

따릉이

후면반사등

뒷안장용 로프

렌치 15mm

바구니

그렇다. 이것들은 자전거여행용 물품들이다. 스페인_포르투갈 자전거여행을 가기 위한

물품 목록이다. 작년 이맘때는 산티아고 순례길 준비로 분주했다면 지금은 산티아고 순례길

자전거 여행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저 물품들을 언제 다 정리하고, 언제 다 패킹을 할 것인가! 여행은 준비할 때가 더 설렌다는데...

난 준비할 생각에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더군다나 자전거여행이면 준비할 것들이 훨씬 더

늘어난다.

또 그 무거운 짐을 들고 공항에 갈 생각을 하니... 항공권 철회하고 싶다...ㅋ

이번 자전거여행은 산티아고순례길을 자전거로 완주한 후 포르투갈로 넘아가는 여정으로 삼았다.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뭐 이렇게 3개국의 국경을 자전거로 넘을 거 같다. 여행 일정은 50일이 넘게 잡았는데... 자전거 여행을

끝낸 후에는 버스여행으로 바꿀 예정이다. 마지막 여행지는 이탈리아 로마다.

아무리 짠내 투어를 한다고 하더라도 꽤 많은 여행 경비가 필요한 건 당연지사다. 음식을 직접 해먹고

싸구려 숙소에서 잠을 청한다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다. 솔직히 뻔한 호주머니 사정상 이런 짠내 투어도 내게는 사치다.

56일 짜리 여행을 항공권 포함해서 4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갔다온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대학생들이 자유여행을 떠날 때 일일 경비를 10만원 정도로 책정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대학생 자유여행 계산법으로 따져도 560만원이 필요하고, 거기에 항공권까지 더해지면... 하여간 난 자유여행 혹은 배낭여행을 하는 대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비행기표를 끊었으니 이제 죽이되든 밥이되든 떠나야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 여행은 많이 망설여졌다. 유럽만 4번째고, 특히 작년 말부터 올초까지 산티아고순례길도 걸었고 스페인 포르투갈도 버스 여행을 했는데 말이다. 도보여행이 아닌 자전거여행이라서 그런가? 그건 아닌 거 같다. 내가 자전거여행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니까... 결정 장애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 여행에는 결정 장애를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약했다, 취소했다, 예약했다, 취소했다...ㅋ

하여간 잘 준비해서 잘 다녀와야 할 거 같다. 여행 기간이 긴만큼 준비물이 많다!

그나저나 자전거 여행이라면서 준비 물품에 자전거가 빠지지 않았냐구요?

자전거는 현지에 가서 사려고요! 자전거를 비행기에 싣고 가느니 현지에서 구매하는게 더 낫더라고요. 대신 일부 부품은 국내에서 사서 가져가려고요.

뭐 중고자전거로 열심히 국토종단, 국토횡단도 해봤으니까 그냥 굴러가는 것만 타고 가도 됩니다요~^^



















2019년 11월 27일에 행한 진관사 역사트레킹에서...

6호선 독바위역에서 내려 북한산 둘레길 서편을 쭈욱~
따라 걷는길. 이곳은 내시와 상궁들의 묘역이 많다.
그래서인지 버려진 석물들도 많다. 

쌍으로 서 있어야 할 문인석이지만... 저 문인석은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대신 내가 저 옆에 서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했다. 

그 순간을 수강생분이 찍어주셨다. 
너무 잘 찍어주셔서 올해의 포토인감?ㅋ













2019년 11월 14일 목요일.
영등포50플러스 역사트레킹 커뮤니티와 함께...


누가 수능일 아니랄까봐... 왜이리 쌀쌀한 것이냐!
아무리 추워봐라, 동장군이 미리 엄습했다고 해도 다산 정약용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발바닥은 시려도 남양주 마재로 향하는 길은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렇게 호기롭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날 춥기는 추웠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도 여러가지 여건상 1년에 딱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 트레킹이다. 비교적 서울에서 멀기도 하고, 코스도 좀 길다. 다른 코스들이
대략 7~8km 정도면,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은 약 10~11km 정도 된다. 
또 그늘이 없는 구간이 많아서 햇살이 강한 시기에는 걷는데 무척 애를 먹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을 행하고 나면... 내가 뻗어버린다는
것이다. 꽤 긴 코스를 이동하다보니 체력소모가 무척 커서 그런 거 같다. 이번에도
뻗어버렸다^^

하지만 어려운만큼 값진 법이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대기는 어느 때보다 더 깨끗했다. 
또한 파란 하늘과 강과 산이 어우러진 남양주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들이 트레킹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진 출사 여행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남양주 트레킹은 그렇게 행할 때마다 재미났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멘트도 날렸다. 

"제가 생각해도 남양주는 올 때마다 재미났어요. 재미난 수학여행 같다고 해야 하나요. 
하여간 그렇게 재미났어요!"

다산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은 시골 외갓집 같고, 선생의 고향인 마재 일대는 외국의
어느 풍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트레킹팀은 아주 신나고 재미나게 걸었다. 이맛에 트레킹 하는 것이 아닌가!



















예전부터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생각!

그림을 정말 잘 그리고 싶다!

그래서인지 그림이나 디자인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럽다. 
예전에 박재동 화백님이 내 캐리커처를 그려준 일이 있었다. 

박 화백님은 터치 몇 번으로 캐리커처를 완성하시더라~ 
난 수 백 번 그렸다 지웠다... 지우개를 몇 개 날려 먹은 후에야 겨우 얼굴 모양이 나오던데...ㅋ

인왕산 역사트레킹 지도를 그려봤다. 연필로 그리고 색칠하고, 거기에 컴퓨터 작업까지 하다보니
한 3일은 걸린 거 같다. 차라리 3일 동안 글을 썼으면 수 십 페이지를 작성했을텐데. ^^

3일 동안 투자를 했는데 어째 초딩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내 드로잉 레벨은 딱
초딩 수준인 거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계속 그릴 수밖에. 
저 지도를 누가 그려주지도 않고, 그려준다고 해도 돈이 무지 많이 들거다. 

트레킹 관련 글에 지도가 빠지면 얼마나 휑하던가! 그런 휑한 글을 지도가 일정 부분 채워줄 수 있다. 
물론 내가 그린 지도는 초딩 레벨이라 많이는 못 채워줄 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기원이 행해지는 곳이 어딜까? 정답은 서울이다.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다 기원을 한다. 건강, 학업, 승진, 시험... 누구는 로또.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원을 올린다.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기도를 드리겠지만 단어가 달라진다고 내용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성경책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불경 위에 올려진 합장한 손은 종교적인 구분만 있을 뿐 그 속에 담은 마음만은 동일하다.


무속신앙도 마찬가지다. 정화수를 떠놓고 바퀴 굴리듯 손을 비벼대며 올리는 기원도 외형만 다를 뿐이다. 잘 되라고, 건강하라고, 사랑하라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정성인 것이다.

오늘 탐방할 곳은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이다. 이곳 인왕산에는 한국에서 가장 기도빨이 잘 받는 기도터가 있다.

 




* 인왕산역사트레킹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울에도 좌청룡·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좌청룡·우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인왕산이 우백호라면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인왕산과 낙산, 거기에 남산과 북악산을 더해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안쪽의 4개의 산이라는 뜻이다. 이 내사산을 기반으로 18.6km의 성벽을 쌓았으니 그것이 바로 한양도성이다.


외사산(外四山)도 있다. 남쪽에서 주작 역할을 하는 관악산, 북쪽에서 현무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 여기에 동쪽의 아차산과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 4개의 산을 일컬어 외사산이라고 칭한다. 이를 두고 필자는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곤 했다.

 

내사산이니 외사산이니 하는 말들이 감이 잘 안 오시죠.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사산은 작은 서울, 외사산은 큰 서울. 지도 놓고 보시면 더 감이 잘 올 거예요.”

 





* 내사산 외사산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워 기원을 올렸다. 그것도 한 곳에만 세우지 않고 여러 곳에 세웠다. 우편번호를 검색해보면 사직동이라는 지명이 꽤 여러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부산에 사직야구장이 있지 않던가.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 지역에 있는 사직단에는 해당지역 수령이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라고 불린다. 그 유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이번편의 주제는 기원이다. 사직단은 국가적인 기원, 즉 풍작을 기원하는 곳이니 주제 적합도가 딱 맞아 떨어진다.

 




* 사직단





그래도 국가적인 기원은 계속될 것이다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자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역 안에 차례로 도서관, 어린이 놀이공간, 단군성전 등이 세워지게 된다. 심지어 수영장도 들어섰다. 애초 사직단의 근본 취지와 동떨어진 건물들이 자리를 잡게 됐다.


그렇게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국가적으로 기원을 드렸던 곳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현재 사직단은 복원정비사업 중이다. 2015년에 시작한 복원 사업은 2027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무려 12년 동안 진행된다. 상처가 깊었던 만큼 복원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는 셈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현대에는 왕도 없고, 국가적으로 제례를 드리지도 않는다. 농업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더 이상 사신과 직신은 한물간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적인 기원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녀상을 두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는 것과 세월호를 두고 진실규명을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 선바위






승복을 입은 선바위?

 

국가적인 기원을 올렸던 사직단을 탐방했으니 이제 개인적인 기원을 드리는 곳으로 가보자.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선바위다.


인왕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바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도빨이 잘 받는 곳 중에 하나다. 특히 아이를 잘 잉태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이런 말을 간간이 건넸다.

 

늦둥이를 낳고 싶으신 분들은 시주 한 번 하시고 간절히 기원하세요!”

 

어떤 대답이 돌아왔을까?

 

지금 있는 것들도 징글징글한데 무슨 놈의 늦둥이야!”

 

본전도 못 찾고 핀잔만 잔뜩 들었다.

 

선바위는 높이 7미터, 가로 10미터 정도가 되는 바위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 있다. 그렇게 바위의 규모가 크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는 애국자 바위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 국사당






국사당과 산악신앙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궁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그렇게 아래쪽에 국사당이 자리 잡게 되니 선바위는 거석숭배문화에다 산악신앙까지 더해지게 된다. 선바위에서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이 국사당 앞에서도 두 손을 모으게 됐다는 것이다.

사직단에서 선바위, 그리고 국사당까지. 인왕산 남쪽은 굵직굵직한 기원 장소가 즐비하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선바위를 빠져나오면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을 걸을 수 있다. 최근 성곽 밖의 순성로도 잘 정비되어 성곽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이다. 인왕산 성곽도 좌청룡인 낙산 성곽길처럼 성돌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더군다나 이 성곽길의 반대편은 자락길로 유명한 서대문 안산이기에 양 옆의 시선이 다 즐거운 곳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의 숨어 있는 보석, 수성동 계곡

 

다음 탐방지는 수성동 계곡이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 계곡인 것이다.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고,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인데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재개발로 사라졌던지.

 





* 창의문







창의문 밖에는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인왕산에도 자락길이 있다. 걷기에 부담이 없는 길이다.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지와 가까운 곳에 이렇게 부드러운(?) 길이 있다는 게 참 좋다. 그렇게 부드럽게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마지막 구간인 창의문을 만나게 된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이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 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창의문의 천장에는 큰 새가 그려져 있다. 필자는 창의문을 지날 때마다 트레킹팀에게 묻는다.

 

저기 위에 그려진 새가 뭐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다. 하지만 꽝! 정답은 닭이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이다. 창의문 밖을 나서면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냄새를 맡은 도보여행자들은 더 이상 길을 나설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럽게 트레킹도 종료되게 된다. 대신 입이 즐거워진다.


사직단, 선바위, 국사당, 성곽길, 수성동계곡, 창의문까지... 거기에 이번 글에 언급하지 않은 윤동주문학관(시인의 언덕)과 이빨바위, 출렁다리까지... 이처럼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인왕산을 소개할 수 있어서 필자도 참 기쁘게 생각한다.

 




* 인왕산 성곽길





난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사람

 

트레킹팀과 함께 열심히 걷다보니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내가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기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레킹에 오신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육체건강이든 정신건강이든 건강에 대한 간절함이 강렬하셨다.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역사트레킹이 거기에 이라는 것이다.


숲길도 걷고, 답사도 하고, 만 보 이상 걸으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튼튼해졌다고 필자에게 신앙고백을 하셨던 분들도 계셨다. 그런 말씀들을 하실 때마다 참 고마웠다. 어쨌든 필자가 건강에 대한 기원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으니까. 좀 우쭐하기도 했다. 복 받을 일을 했으니 이 정도 우쭐함은 괜찮지 않나.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선바위(국사당) 성곽길 수성동계곡 출렁다리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In: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 Out: 창의문(부암동)





* 인왕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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