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이런 대형석불이? 외국 안 가도 되겠네 2

 

고려 전기시대 대형석불 테마 탐방...

가을 여행지로 여기 어떠세요?

 

14.09.30 15:51 최종 업데이트 14.09.30 15:51

 

 

 

 

 



 

 
▲ 대조사 석불 대조사 석불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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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찰에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이제 충남 부여로 가보자. 부여군 임천면에는 대조사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도 거대한 석불이 있다. 대조사는 부여 천도를 위한 밑돌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백제 성왕이 천도를 앞두고 직접 대조사의 창건을 명했다고 하는데, 사찰터를 지목한 사람은 유명한 백제의 고승 겸익이라고 한다.

현재의 대조사는 작은 사찰이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사찰에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있다. 바로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바로 그것이다. 대조사 석불도 고려 초기 작품이다. 그래서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쳤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다고 한다.

은진미륵과 대조사 석불은 지리적으로 가깝게 위치해 있고, 또한 제작 시기나 규모가 유사하기 때문에 곧잘 같이 묶여 이야기된다. 또한 두 석상은 서로 비교가 되기도 한다. 은진 미륵이 뒷산과 좀 거리를 두고 평지 쪽으로 나와 있다면, 대조사 석불은 바로 옆쪽에 작은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언덕에서 뻗어 나온 소나무 가지가 석불에 우산처럼 드리운 형상을 하고 있다.

한편 석불 앞에 있는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 법당의 창문을 열면 큰 석불이 시원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도포를 두른 안동 이천동 석불?

이제는 경북 안동으로 가보자. 안동 시내에서 북쪽으로 5km쯤 떨어진 곳에 가보면 제비원이라는 곳이 있고, 그 뒤쪽으로 이천동 석불이라는 거대한 석불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제비원(燕飛院)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이었던 원(院)이었다.

영남에서 충청도나 한양으로 갈 때에는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제비원이 있었다. 그렇게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에 거대한 석불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 이천동 석불은 도포를 두른 모습이었다. 큰 도포를 두르고 얼굴을 불쑥 내민 형상이었다. 뒤쪽의 무성한 수풀과 어우러져서 그런지,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노출(?)한 모습이었다.

안동 이천동 석불도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석불이다. 용미리 쌍미륵처럼 몸통 부분과 머리 부분이 별개의 암석으로 제작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몸통 부분, 즉 필자가 도포를 둘렀다고 지칭한 큰 바위 상단 중앙에 머리 부분을 조각한 별개의 돌을 얹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올렸을 뿐인데도 자연석인 몸통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일체형의 거대한 석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석불 제작자의 지혜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 이천동 석불 안동 이천동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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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장승 같은 고려 전기시대의 대형석불들

이제까지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형 석불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다. 그렇다면 왜 고려 전기시대 사람들은 이처럼 대형 석불들을 만들었을까? 당시는 고려왕조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들의 독특한 지방문화가 불교문화제에 투영된 시기였다. 활기차고 강건한 지방문화가 석불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거대한 돌미륵을 탄생 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된 대형 석불은 해당지역의 민간신앙까지 접목되어,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형상화됐다. 거인 같은 미륵불이 마을입구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서 있게 된 것이다. 요즘처럼 청명한 가을날. 전국에 산재한 돌미륵을 찾아 복을 기원해 보자. 그렇게 여행을 하다보면, 어쩌면 '복'된 테마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여행도 하고, 유물답사도 할 수 있으니까!

 

 

 

※ 도움말 : 찾아가는 길

1. 용미리 쌍미륵: 서울 불광역에서 파주 광탄면행 버스에 탑승한 후 용암사에서 하차한다. 소요시간 약 50~60분 정도.

2. 논산 은진미륵: 논산 읍내에서 건양대행 버스에 탑승 후 관촉사에서 하차함. 읍내에서 관촉사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거리임.

약 3km 정도다. 그래서 택시를 타도 부담이 없음.

3. 대조사 석불: 부여군 읍내에서 임천행 버스 탑승. 임천면사무소에서 하차한 후 대조사로 이동. 면사무소에서 대조사까지는

도보로 20~30분 정도 소요됨.

4. 안동 이천동 석불: 안동 시내에서 제비원(연미사)행 버스 탑승. 시내에서 제비원까지는 약 5km 정도 떨어져 있음.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 작가라고 합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한국에도 이런 대형석불이? 외국 안 가도 되겠네 1편

고려 전기시대 대형석불 테마 탐방... 가을 여행지로 여기 어떠세요?

 

14.09.30 15:51    최종 업데이트 14.09.30 15:51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 산이나 들, 어디로든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이제 곧 단풍철도 다가오지 않는가!

기왕 떠나는 여행, 테마를 가지고 떠나면 어떨까? 발 가는대로 떠나는 좌충우돌식의 여행도 좋지만 주제를 잡고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산성(山城)기행, 폐사지 답사기행, 천주교 성지순례 등등... 이런 것들이 테마 여행이다.

이렇게 테마를 중심에 놓고 여행을 하다 보면 학습과 여행이 유기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성 기행인 경우 '행주산성 → 서울성곽 → 공산성' 등으로 여행 일정을 계획 할 수 있다. 각 산성들을 탐방, 관찰한 후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필자가 제안하는 테마 여행은 거대석불 탐방이다. 고려 전기시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거대한 석불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한때 필자는 거대한 석불들을 찾아다니며 '복'을 기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거대한 석불 앞에 섰을 때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바미안 석불에는 못 미치지만 그런 거대한 석불이 내 눈 앞에 떡하니 서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던지! 그래서 복스러운 함박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한편 바미안 석불은 탈레반이 파괴해 지금은 흉물처럼 서 있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의 석불들은 천년의 세월을 꿋꿋이 견뎌내며 거리의 수호신처럼 서 있었다.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돌미륵을 찾아 여행을 떠났었다.  

 

 

 


  


 
▲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쌍둥 석불 형식이다. 왼쪽에 원립불을 쓰고 있는 상은 손에 연꽃을 들었는데 남성을 뜻한다. 오른쪽 방립불을 쓰고, 손을 합장한 상은 여성을 상징한다. 원립불은 말그대로 둥근 모자 형태이고, 방립모는 그에 비해 각이 진 모자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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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쌍으로 들어오려나? 파주 용미리 쌍둥이 석불

 

 

먼저 소개할 석불은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용미리 쌍둥이 석불이다. 용미리, 용암사에 위치한 이 쌍둥이 석불의 공식명칭(문화재청)은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대중교통으로도 편리하게 닿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서울에서 용미리로 가기 위해서는 혜음령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혜음령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개성으로 넘어갈 때 거쳐야 했던 중요한 고개다. 그래서 혜음령 근처에는 벽제관이라는 역관(驛館)이 있었다. 그렇다. 용미리 일대는 한양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 의주로 향했던 의주대로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곳을 내왕했고, 쌍미륵에게 복을 기원했던 것이다.

장지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용미리 쌍미륵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자연석을 몸통으로 삼아 조각을 새기고, 얼굴 부위는 따로 제작해 올렸다. 쌍미륵도 고려 전기시대의 다른 석불들처럼 인체 비례가 일치하지 않는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남여 쌍미륵 형상이라 '다산(多産)'과 관련된 기원들을 많이 하러 온다고 한다. 즉,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많이 와서 기원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쌍미륵과 관련된 설화도 '잉태'와 관련이 있다.

그 전설로 들어가 보자. 고려 선종 때였다. 선종은 자식이 없어 원산궁주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원산궁주도 쉽게 잉태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궁주가 이상한 꿈을 꾼다.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이런 내용의 꿈이었다.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선종은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궁주의 꿈처럼,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왕은 그 바위에다 미륵불을 조각하고, 그 옆쪽에 사찰을 세워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 정성이 전해졌는지 그해에 왕자인 한산후가 탄생했다고 한다.

고려 선종은 13대왕으로 1083년부터 1094년까지 왕위에 올랐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용미리석불입상도 고려 전기 때 제작된 것임이 유력해진다.

쌍미륵 앞에서 복을 기원하면 복이 두 배로 들어올까?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쌍미륵 앞에 서면 함박웃음이 두 배로 지어질 것이다. 그렇게 웃다보면 복은 자연스럽게 들어올지 모른다. 



 
▲ 은진미륵 고려전기시대 제작된 대형 석불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관촉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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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 석불 '관촉사 은진미륵'

 

 

이제 거대 석불을 찾아 충남 지역으로 가보자. 다음으로 탐방할 곳은 충남 논산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관촉사 석불은 관촉사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관촉사는 반야산이라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계백장군 혼이 살아있는 황산벌이 보이고,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보인다.


그렇게 전망이 좋은 곳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굽어보고 있던 것이다. 한편 관촉사 석불은 은진미륵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그 지역의 명칭이 '은진'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은 높이가 18m가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제작하는 데 무려 3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 있었다. 어느 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도저히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장난감 로봇 만들 듯 3단으로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모방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관촉사 석불도 고려 전기시대 작품답게(?) 인체 비례가 맞지 않는다. 대신 신체 부위를 시원시원하게 표현하였다. 머리, 손, 발 등이 아주 굵직하게 표현되었다. 인체비율을 중시했던 석불들이 정교한 디테일을 강조했다면,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표현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손가락, 발가락까지 시원시원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그런지, 관촉사 석불을 보고 있노라면 친근감이 밀려온다. 거대 석상에 압도된다기 보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관촉사 일대도 예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옛 삼남대로가 이곳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은진미륵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서 있었다. 액운을 막아주고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 관촉사 은진미륵

 

 

 

* 관촉사 은진미륵

 

 

 

 

 

* 대조사 석불

 

 

 

* 대조사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 파주 용미리 쌍미륵

 

* 파주 용미리 쌍미륵

 

 

 

천상의 맛 '지리산 잡탕라면', 들어보셨나요?

 

준비소홀이 만들어낸 지리산 에피소드

 

 

14.09.18 19:06l최종 업데이트 14.09.18 19:06

 

 

 

 

 

 

 

 

 
 
▲ 지리산 천은사 옆 호수 지리산 천은사 옆에 있는 호수. 천은사는 전남 구례 방면에 있다. 2012년 촬영. 잡탕라면 산행 사진이 없어 2012년에 촬영한 지리산 사진들로 대체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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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례구역 전남 구례구역. 지리산을 탐방한 뒤 구례구역 부근에서 사진을 찍었다. 앞에 보이는 강은 섬진강이다. 2012년 백두대간 여행 당시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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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소리에 홀려 떠나다!

 


그 때도 딱 이 시기였던 것 같다. 한 낮의 뜨거움은 어느덧 사라져 가고, 선선한 바람이 따뜻한 차 한 잔을 품게 하는 계절. 한 밤 중 귀뚜라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어디론가 불쑥 떠나고 싶은 계절.

십 몇 년 전. 필자는 귀뚜라미 소리에 혹해(?) 진짜 배낭을 메고 떠났다. 그렇게 떠난 곳은 바로 다름 아닌 지리산이었다. 그렇게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 떠난 지리산 등산여행을 내 아웃도어 활동의 시초로 삼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등산을 해왔지만 등산다운 등산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일 동안 계속 산 중을 헤맸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요한 산행이었지만 준비는 철저하지 못했다. 준비소홀을 귀뚜라미 탓으로 돌리고 싶을 정도로 준비가 꽝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미흡한 준비 덕에 재미난 에피소드들도 많이 생겨났다.  

 

 



 
▲ 도계 삼거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도 경계를 가르는 도계 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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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너무 우습게 봤다!

 


당시 필자는 매일같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승기를 잡을 수 없는 전쟁이었다. 매일 패배하고, 또 패배하고. 그런 전쟁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야 했다. 귀뚜라미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액션'을 취해야 했다. 어쨌든 액션은 등산으로 표출됐다. 기왕 하는 거 '빡세게' 하자며 지리산을 택했다. 험하게 산을 타다보면 내 머릿속을 흔들고 있는 번뇌들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단독산행이었다. 그런 만큼 각오도 대단했다. 천왕봉 밑에서 비박을 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다보니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는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추웠다. 초가을에 동상에 걸리는 줄 알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식사였다. 준비가 안 된 산행의 부작용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짐을 가볍게 하자는 의미에서 일부러 초코바 같은 행동식만 챙겨갔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산행에 나섰지만 허기가 진 상태로 산행을 했던 것이다.

지리산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었다. 누구는 당일치기 산행에도 철저한 준비를 하고 떠난다는데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에 오르면서 초콜릿과 과자부스러기가 전부였다면 그거 정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그나마 먹던 초콜릿은 다 떨어지고 배낭 속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다. 허기가 지니 기운도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주 넘어지기까지 했다. 삼일 동안 산행을 한데다 여러 차례 넘어졌더니 옷은 진흙투성이였다. 갈아입을 옷이 있기 만무했다. 영락없는 지리산 노숙자였다.

 

 

 

 

 
▲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을 탐방할 때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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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끼 정도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했더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길을 잘못 들었는지 인적도 끊겼다. 멀리서 '웅~' 하고 반달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던데 무섭지도 않았다. 그 소리를 내뱉는 반달곰이라도 잡아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겨우겨우 세석산장에 도착했다. 배는 너무 고프고, 돈은 한 푼도 없고. 초췌한 모습으로 산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한 번씩 다 쳐다보는 것 같았다. 마치 조난자 취급하듯 그런 측은한 눈빛으로 필자를 대했다. 그런 조롱 섞인 주위 눈빛을 물리치고 벤치에 누워버렸다. 탈진 일보 직전이었다.

'지리산이고 뭐고, 그냥 누워있자! 정 안되면 산신령한테 배고프다고 하소연을 하던가!'

 

 



 

천상의 맛, 지리산 잡탕라면!

 


산 중에서 허기가 지니 망상까지 들었던 같다. 그렇게 허상에 사로잡혀 벤치에 누워 있는데 솔솔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그냥 냄새가 아니었다. 천상(?)에서나 맡을 수 있는, 그런 너무나 맛있는 냄새였다. 혹시 지리산 산신령께서 식사를 하시고 계시나?

"야! 섞을 거 다 섞었더니 더 맛있는 거 같아!"
"역시 산에서는 잡탕라면이 최고야."
"맞아요. 집에서 먹으면 이 맛이 안 나죠."

동호인으로 보이는 성인 남자 네 명이서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5~6인용 코펠에다 넣을 수 있는 건 다 넣어 잡탕라면을 끓인 것 같았다. 라면, 참치, 햇반, 김가루, 북어... 식사 당번이 음식도 넉넉하게 준비한 것 같았다.

그들은 환한 미소를 띠우며 음식을 떠먹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침이 꿀꺽 넘어갔다. 발걸음이 그 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치 뭐에 홀린 듯이.

"정말 잘 먹었다. 근데 이거 많이 남았네."
"이거 여기다 버리면 안 되잖아요. 환경오염 될 텐데..."

 

 

 

 
▲ 아웃도어 음식 저렇게 푸짐한 김치는 누가 주었을까? 충남 서산을 방문했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주셨다. 빛깔도 일품. 맛도 일품이었다. 오른쪽에 있는 소시지 반찬은 필자가 만든 것이다. 2011년 국토종단 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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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남은거 좀 주세요"... 아까운 음식을 버리다니요

 

 


" 저 그거 남은 거 좀 주세요!"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이 필자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냥 들이댄 것이다. 산 중에서 허기가 져, 탈진 상태에 놓이게 됐는데 앞뒤 가릴 필요가 있겠는가.

정신없이 먹었다. 허겁지겁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배고픈 누렁이 개 밥그릇 닥닥 긁어 먹듯이 단 한 방울의 국물조차 남김없이 먹었다. 옆에서 그 분들이 체한다고 천천히 먹으라고 했지만 그 소리는 그냥 소화제로 삼았다.  

 

 

 

산행 중에는 많이 먹어야 한다!


 

그 잡탕라면의 힘 때문인지 필자는 지리산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대성동 계곡쪽으로 내려왔는데 별 탈 없이 하산을 한 것이다. 하산하다 넘어지지도 않았다. 그 동호인 분들은 필자에게 음식으로'셀파'역할을 해주셨던 것이다. 어쩌면 그 잡탕라면은 지리산 산신령께서 내려주신 '천상의 음식'이었을지 모른다.


그 잡탕라면의 맛은 아직까지도 필자의 뇌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평소 여행을 많이 하다 보니 전국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산해진미를 맛보았지만 아직까지도 '지리산 잡탕라면'을 뛰어넘는 음식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 그 잡탕라면이 그립다. 언젠가는 꼭 다시 한 번 그 잡탕라면을 맛보고 싶다. 그 '천상의 음식'을.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당부드릴 것이 있다. 이제 곧 있으면 단풍산행 철이라 산으로 들로 많이 나가실 것이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다.

산행에 나설 때는 충분히 식량을 챙겨야 한다. 트레킹도 마찬가지다. 좀 많다 싶을 정도로 챙겨도 상관없다. 좀 넉넉하다 싶으면 산행 중에 만난 이들과 나눠 먹으면 된다. 그렇다. 많이 먹어야 한다. 그래야 안전한 산행, 안전한 트레킹을 할 수 있다. 필자처럼 준비 없는 산행을 하면 에피소드는 많이 생성될 수는 있지만 그만큼 허기가 져서 탈진 할 수도 있다.

 

 

 


 
▲ 지리산의 한 찻집 지리산 천은사 앞 쪽에는 '이속'이라는 운치 좋은 찻집이 하나 있었다. 이속(離俗)은 속세를 떠난다는 뜻이다. 2011년에 방문했을 때 공짜로 차 대접을 받았었는데... 2012년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주인장은 떠나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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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지리산 종주 같은 장거리 산행에 나설 때는 예측된 식량보다 더 챙겨가자. 비상식량으로 2~3끼 정도를 더 휴대하면 좋을 것이다.

 


2. 바로 꺼내 먹을 수 있게 행동식은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보관한다. 필자는 허리에 작은 보조가방을 메는데 그 곳에 비상용 영양바 하나를 항상 넣어두고 다닌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차례상 사과의 붉은 빛깔, 이렇게 만들어진다 2편

일조량 높이기 위해 잎따기 작업도... 온 몸에 파스를 붙이며 한 사과 출하

 

14.09.08 16:37
최종 업데이트 14.09.08 16:37

 

 

 

 

---> 전편에 이어서

 

 

 

# 잎사귀 따다가 사과를 날려 먹기도...

색깔이 안 난 건 일조량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8월의 뜨거운 햇살이 스며들어야 백설공주가 먹었던, 그 빨간 사과처럼 홍로가 붉은 색을 띤다. 하지만 올해 8월은 일조량이 적었고, 그만큼 사과에 붉은 기운이 들지 않았다. 이런 '색깔의 문제' 때문에 농장주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떤 농장주는 하늘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색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장주들은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색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강한 햇살이 최고다. 하지만 그건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잎따기'를 해준다. 사과 주변에 달려있는 잎사귀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성하게 감싸고 있는 잎사귀들을 제거함으로써 사과에 직접 도달하는 햇볕의 양을 높여주는 것이다.

 

 

 

▲ 홍로 색이 잘 든 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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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따기는 매해 수확에 앞서 꼭 진행되는 작업이다. 하지만 올해는 잎따기가 더 강화됐다고 한다. 색깔이 안 났던 만큼 잎사귀 제거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그런 잎사귀 제거가 필자의 첫 번째 사과작업이었다.

햇살을 더 잘 받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잎사귀들을 제거했다. 그러다 애꿎은 가지도 몇 개 '제거'했다. 또한 알이 굵은 멀쩡한 사과들도 날려먹었다. 농장주의 시선이 싸늘했다. 

 

 

# 사과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색깔이 안 났다고 사과 따기를 계속 미룰 수는 없는 법! 농장주들은 8월 마지막 주를 기점으로 사과수확에 나섰다. 이제 고제면은 면 전체가 사과 수확에 매달리게 됐던 것이다. 필자는 매일 아침 마음을 다잡고 사과밭으로 향했다.

"열심히 일해서 사람들한테 누를 끼치지 않겠어. 내 명예를 지키겠어!"

하지만 저렇게 아침마다 한 다짐은 밤이 되면 달라졌다. 허리와 팔에 붙인 파스를 갈며 조용히 혼자말을 했다.

'내일 비가 왕창 와서 작업이나 취소됐으면...'

그만큼 사과 작업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매일밤 숙소에 돌아와 허리와 팔다리를 주물러야 했을 정도로 고된 일이었다.

사과수확 작업에서 가장 고역이었던 건 컨테이너 박스를 옮기는 일이었다. 일단 사과나무에서 딴 사과는 일괄적으로 컨테이너 박스에 담기게 된다. 그렇게 쌓인 컨테이너를 화물차에 적재시키고 선별장으로 향했다. 선별장에서는 선별을 위해 컨테이너를 잘 쌓아 놓았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계속 컨테이너를 상차, 하차하는 것이 내 임무였던 것이다.



 

 

 

▲ 컨테이너 저 노란색 박스를 컨테이너라고 부른다. 저 컨테이너를 '들었다 놨다'했다. 아주 삭신이 다 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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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 놨다'를 계속하다 보니 사람이 무척 단순해졌다. 컨테이너 중에는 사과가 덜 담긴 것들도 있었고, 많이 담긴 것들도 있었다. 적게 담긴 것에는 콧노래를 불렀고, 가득 담긴 것에는 속으로 욕을 해댔다. 컨테이너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콧노래와 욕을 번갈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들었다 놨다'를 무한반복한 날은 밥숟가락도 잘 잡히지 않았다. 음식을 뜨다가 실제로 숟가락을 놓친 적도 있었다. 또한 펜을 잡기 힘든 날도 있었다. 작업일지를 작성하려다 손가락이 시큰거려 그만 둔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직접 작업한 사과라 그건가? 더 맛있네!

그래도 버텼다. 매일밤 온 몸을 파스로 도배하며 버텼다. 사과 농장주들은 매년 이렇게 고되게 작업을 해왔는데... 겨우 이거 가지고...

그렇게 그렇게 버티다 보니 마침내 필자가 잡아두었던 서울 상경일이 다가왔다. 잘 버텼던 셈이다. 어떤 농장주는 필자에게 일당 이외에 사과 한 박스를 선물로 보내주셨다. 또 어떤 농장주는 다음해에도 꼭 같이 자기와 사과작업을 하자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이런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필자가 일을 못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들었다 놨다'의 역경을 뚫고 애초 다짐했던 명예를 사수했던 것이다.

추석 과일의 대명사 사과. 그 사과가 식탁, 혹은 차례상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번 사과작업은 그 땀과 눈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어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필자의 집 한 편에는 '들었다 놨다'하며 작업했던 사과들이 놓여 있다. 식사를 한 후 후식으로 베어 먹는 사과 맛이 좋다. 아삭아삭... 소리까지 맛있다. 내가 작업한 사과라서 더 맛있는 건가?

 


 

 
▲ 사과작업 사과작업을 하는 분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멀리 삼봉산 자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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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차례상 사과의 붉은 빛깔, 이렇게 만들어진다 1편

 

일조량 높이기 위해 잎따기 작업도... 온 몸에 파스를 붙이며 한 사과 출하

 

14.09.08 16:37
최종 업데이트 14.09.08 16:37

 

 

 

 

 

 

 
 
▲ 수승대 트레킹 표지판 사과 캐릭터를 이용한 트레킹 표지판. 유명한 거창의 수승대 트레킹 코스를 알리는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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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 좀 발랐다. 이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도 허리와 팔목이 욱신거린다. 손끝도 시려서 키보드가 부자연스럽게 터치된다. 이게 다 10여 일간의 사과작업 때문에 얻은(?) 증상이다.

지난 8월 21일. 필자는 전라북도 무주를 통해 경남 거창군 고제면으로 진입했다. 일명 '무진장'의 하나로 불리는 무주군은 백두대간인 덕유산과 삼봉산 등을 두고 거창군과 남북으로 맞닿아 있다. 그래서 무주 읍내에서 출발하는 무진장 시골버스를 타면 거창군 접경지역에 닿을 수 있다.

 

 

# 사과로 유명한 무주군 무풍면과 거창군 고제면


이렇게 두 지역이 인접해 있으니 특산품도 유사하다. 삼봉산 북쪽에 있는 무주군 무풍면과 남쪽에 있는 거창군 고제면 둘 다 사과가 특산품이다. 무주 무풍 사과의 명성을 잘 아실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거창군 고제 사과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일 분들이 많을 것이다. 어쩌면 '고제면'이라는 지명도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행여나 이런 분들도 있을지 모른다.

"거창하면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한국전쟁 때 일어난 거창 신원 민간인 학살은 알겠는데... 그나저나 거창이 사과 산지였어?"

 

 

 
▲ 사과 가로등 거창군 고제면에 위치한 사과테마파크의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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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거창은 사과 산지다. 그 거창 사과의 중심에 고제면이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고제면에는 삼봉산이 자리잡고 있다. 해발 1254미터인 삼봉산은 거창의 주산으로 그 일대는 큰 일교차를 이용한 고랭지 농업이 발달해 있다. 그렇게 큰 일교차는 사과의 당도를 현격히 높여주는 '촉매제' 역할을 해준다.


그렇게 삼봉산 아래 자락에 위치한 거창군 고제면을 방문했던 건 사과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한참 손이 부족할 시기이기에 기꺼이 가서 손발 노릇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품삯은 받았다. 대신 일당 이상의 값어치를 해준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올해로 벌써 사과따기 3년 차! 농장주들한테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겠어!'

 

 

# 무척 중요한 사과의 색깔


필자는 앞서 무주군 무풍면에서 시골버스를 타고 거창군 고제면으로 진입했다고 언급했다. 차창 밖으로나마 무풍면의 사과농장들을 관찰할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관찰을 하다보니 좀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사과에 '색깔'이 안 났던 것이다. 색

깔? 무슨 색깔?

 

 

무풍면과 마찬가지로 고제면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홍로라는 품종이다. 홍옥과는 다른 품종인 홍로는 차례상에 오르는 사과로 추석을 앞두고 수확을 한다. '홍동백서'할 때 '홍'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홍로인 것이다. 한가위 차례상은 햅쌀과 햇과일 등 그해 가을걷이로 얻어진 재료들을 올려야 하기에, 추석 직전에 출하되는 홍로는 자연스럽게 차례상에 오르는 과일 품목 1순위에 속한다.

 
▲ 홍로 홍로는 새빨간 사과다. 한 여름 일조량을 풍부하게 받아야 빨게진다. 사진에 등장한 사과는 색이 아직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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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차례상에 올려지는 과일이기에 홍로는 출하시기가 명확하다. 이를 다르게 이야기하면 모든 생산 역량을 추석이라는 한계 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추석을 넘겨 생산이 된다면 그만큼 시장에서의 가치는 감소될 수 있다. 사람들이 택배로 받아볼 수 있게 최소한 추석 연휴 이틀 전에는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홍로는 시간에 쫓기며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품종이다.

 

 

 

 

 


 

 

 

풍경 좋은 산, '머리 잘리는 산'이 되다 2편

서울에서 가까운 천주교 성지는? 절두산, 삼성산 그리고 마재성지


 


 

 
▲ 마재성지 마재성지 한옥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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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선생 동상. 다산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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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생가와 함께 둘러보는 마재성지

 

 

이제는 서울을 조금 벗어나 중앙선 전철을 타고 이동해 보자. 목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 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앞서 언급한 절두산을 비롯해 새남터, 해미읍성, 황새울(충남 공주)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다수다. 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일단 정약종에 대해서 알아보자. 정약종은 정약용의 바로 윗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 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했다. 하지만 그는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 마재성지 이 곳 뒤편에 한복 입은 예수상이 있다. 이 사진에서는 가운데 부분에 작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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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형제들조차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 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교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다.

마재성지에 있는 한옥 성당은 가톨릭과 한옥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옥 성당 옆으로 산책을 할 수 있는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에는 한복을 입은 예수상이 서 있다. 한복을 입은 예수상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동상이다.

마재성지에서 다산 정약용 생가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마재성지 그리고 정약용 생가까지 연결해서 탐방할 수 있다. 마재성지와 정약용 생가 일대는 수도권 일대에서도 손꼽히는 역사트레킹 코스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이 기대되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왔던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가르침을 한국에서 어떻게 실천할까'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의 '낮은 곳'은 어디일까. 당장 십자가를 둘러메고 순례를 떠났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떠오른다. 또 단식을 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도 떠오른다.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다른 낮은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파파'의 손길을 기다릴 것이다. 당장 '젖과 꿀'이 흐르게 해주지는 않을지라도 그가 내미는 손길을 따뜻하게 받고자 하는 사람이 아주 많을 것이다.

 


 

수도권 천주교 성지, 어떻게 가나요?

 

1. 절두산 성지 : 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에서 하차. 합정역에서 절두산까지는 도보로 약 10분 정도 소요됨. 절두산 성지 탐방 후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 탐방을 해보는 것도 좋음.

2.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지는 관악산둘레길 2코스를 통해 탐방하는 방법이 좋음. 관악산둘레길은 서울대입구에서 시작됨. 산길을 약 1시간 30분 정도 이동을 하면 삼성산 성지에 도착할 수 있음. 서울대입구까지는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함.

3. 마재성지 : 마재성지는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전철을 이용함. 중앙선 팔당역에서 하차하여 능내 1리행 버스에 탑승. 능내 1리가 능내역임.

 

 

 

 

풍경 좋은 산, '머리 잘리는 산'이 되다___ 1편

 

서울에서 가까운 천주교 성지는? 절두산, 삼성산 그리고 마재성지

 

14.08.13 11:29 최종 업데이트 14.08.13 11:29

 

 

 

 

 

 

 

 

 
▲ 절두산 성지 당산역 방면에서 바라본 절두산 성지. 뒤로는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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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4일부터 266대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호세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라는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의 방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천주교 신자들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

비천주교 신자들도 그의 방문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로 그간 활발한 대외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노숙인을 초청하고, 분배의 정의를 역설하는 등 전임 교황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역사 트레킹을 통해 천주교 성지 답사를 꾸준히 해왔다. 천주교 성지 탐방은 사찰 탐방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지금까지 천주교 성지 답사를 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생각보다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성지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 기사는 서울 인근에 있는 천주교 성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맞춰, 우리 땅에서 천주교가 어떤 식으로 뿌리를 내렸고 또한 어떤 수난을 겪어 왔는지 공부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산, 절두산

 
▲ 척화비 절두산 성지 한 쪽 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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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지나다 보면 절두산과 선유도를 볼 수 있다. 절두산은 옛날에는 '잠두봉'이라 불렸는데 선유봉(선유도)과 함께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곳이다. 양천 현감이었던 겸재 정선은 <양화환도>를 통해 화폭에 이 풍광을 담아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해 이름이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재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렸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인 절두산(切頭山)으로.

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뤄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아홉 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병인박해가 원인이 돼 병인양요가 발생한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로즈 프랑스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그런데, 당시 로즈 제독의 침공은 자국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병인양요는 국가 대 국가간의 분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한 곳까지 올라왔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격분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라면서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을 가진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리게 됐다. 병인박해는 1866년을 시점으로 1871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약 150년 전, 절두산은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우뚝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서 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세 프랑스 신부가 운명 달리한 곳,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지 왼쪽부터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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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삼성산은 원효·의상·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다. 그런 삼성산에도 삼성산 성지라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한 것이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 탄압에 앞섰다. 그렇게 해서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로 넘어갔다. 그런 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혔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했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조성됐다.

이 성지는 산 중에 있어서 그런지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이다.

 

 

 

 


 

 

 

내 똥에 그만 '철퍽'하고 넘어졌다 2편

[공모- 더러운 이야기]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서 벌어진 일, 그만 웃어버렸다

 

 

 

 

 


 

 
▲ 자전거여행 2009년 여름에 행한 1차국토종단 자전거여행. 면도를 안 해서 지저분하다. 무릎쪽에는 그날에 난 그 상처때문에 큰 거즈가 붙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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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편에 이어서

 

 

 

 

무릎은 깨졌지, 다리는 풀렸지, 그래서 뒤로 넘어갔지!

상처부위를 직접 눈으로 보니 아픈 게 더 크게 느껴졌다. 잠시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통증에 다리도 더 후들거릴 정도였다. 그 때 때마침 무언가가 제 앞을 휙~ 지나가는 것이었다. 귀신인가?

"악!"

머리는 띵하지, 다리는 풀렸지, 귀신인지 뭔지 때문에 갑자기 중심을 잃었다. 그렇다. 그냥 뒤로 넘어졌다. 이번에는 '꽝'이 아니라 '철퍽'하고 넘어졌다. '철퍽'하고 소리가 우렁차게 난 만큼 다 묻었다. 그 날 제주산 똥돼지 먹었다고 크게 일을 봤었는데 그게 다 필자의 엉덩이로 옮겨왔던 것이다. 무릎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지 엉덩이에는 철퍽하고 다 묻었지! 정말 난감했다. 이러려고 자전거 여행을 한 게 아니었는데.

'이게 다 뭐냐! 제주도에서 한 밤 중에 뭐하는 짓이냐!'

그래도 별 수 있는가, 이미 다 묻어버렸는데. 빨리 빡빡 닦아내야지. 정신을 가다듬고 뒤처리에 나섰다. 그리고는 크게 한 번 웃었다. 뭐가 좋아 웃었냐고, 묻지 마시라! 그 상황에서 울음을 터뜨릴 수도 없지 않은가?

덕분에 아주 시원하게 샤워도 하고 비데도 하게 됐다. 그것도 전신으로 하게 됐다. 저녁을 해먹은 코펠통으로 물을 받아 시원하게 내려 부었다. 깨진 무릎팍이 쓰라렸지만 참았다. 아주 빡빡 문질렀는데도 냄새가 잘 안 지워졌다. 코펠통으로 수없이 물을 뿌려댄 후에야 겨우 샤워를 끝낼 수 있었다. 그때서야 무릎의 피도 어느 정도 지혈이 됐다.

여행을 하다보면 별의별 일들이 다 있지 않던가. 어쩌면 그렇게 지저분한 일들을 당하는 것도 여행의 일부일지 모른다. 한라산 중턱 이름 모를 야영장에서 홀로 샤워 겸 비데를 마음껏 즐겼으면 그만 아닌가! 또 덕분에 이렇게 '더러운 이야기' 공모에 쓸 '꺼리'도 생기지 않았던가! 이런 것도 다 여행의 재미다. 더러워서 문제지만.

 

 

 

 
▲ 제주도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보시며, 필자의 더러운 이야기 때문에 지저분해진 눈과 마음을 정화하시길!

 

 

 

 

 

 

 

 

 

 

내 똥에 그만 '철퍽'하고 넘어졌다 1편

 

[공모- 더러운 이야기]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서 벌어진 일, 그만 웃어버렸다

 

14.08.10 14:54  최종 업데이트 14.08.10 14:54
 

 

 

 

 

 

 

 
▲ 화장실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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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여름.


당시 필자는 1차 국토종단 자전거여행을 행하는 중이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여행은 목포를 찍고 제주까지 이어졌다. 무려 17일 동안 계속된 여행이라 재밌는 일도 힘든 일도 많았다. 그래서 에피소드도 넘쳐났다. 특히 그날의 에피소드는 정말 '거시기'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지저분한 일이었다.

장기간의 여행이었지만 식사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똥'이었다. 평소에는 화장실을 자주 가지 않았었는데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여행 중에는 무척 자주 가게 됐다. 자전거 타기가 장운동에 좋아서 그런가? 화장실을 갈 때마다 아주 넉넉하게 일을 처리했다. 변기가 막혀 조마조마한 적도 있었다. 자전거 타기가 숙변제거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골에는 화장실 시설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야산에다 일을 처리 한 적도 있었다. 야삽으로 터를 잡고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일을 볼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제주산 똥돼지로 배를 채웠던, 그날 밤

제주도의 한 아영장.

문제의 사건은 여행의 끝무렵이었던 제주도에서 발생했다. 필자는 그날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있는 한 야영장에다 텐트를 쳤다. 야영장이라고 하지만 폐쇄가 됐는지 시설은 다 노후화 된 곳이었다. 다행히 근처에 몸을 씻을 수 있을 정도의 수도 시설은 있었다.

그 날 그 곳에는 필자 혼자였다. 달빛이 있었지만 어두웠다. 가로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좀 쓸쓸한 밤이었다. 한라산 중턱 부근에 홀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쓸쓸함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문제의 그 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낮에 '똥돼지'로 불리는 제주산 돼지를 배불리 먹었더니 신호가 오는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아주 큰 녀석이 배출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욱신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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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여행 2009년에 행한 1차국토종단 자전거여행. 주렁주렁 매달고 지저분하게 하고 다녔다. 정신이 없었는지 뒤쪽 받침대도 안 올리고 타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촬영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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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게 뭐야!'


화장실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건 화장실이 아니었다. 그 곳은 귀신도 줄행랑을 칠 정도로 아주 최악의 화장실이었다. 냄새는 그렇다 치고 두 발로 자세잡기도 힘든 곳이었다. 아영장에 왜 사람이 없었는지, 왜 그렇게 시설이 낙후됐는지 깨닫게 되는 대목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자연을 벗 삼아 일을 치르기로 결심 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데 이게 딱 그거네. 오늘 따라 무척이나 비데있는 좌변기가 그리워지는구나!'

서둘러 땅 팔 곳을 찾았다. 허겁지겁 일을 치를 곳을 물색했는데, 그만 사고가 나고 말았다. 그만 '쾅'하고 돌에 부딪혀 오른쪽 무릎이 크게 다치게 된 것이다. 야영장이 어두웠던 데다 장기간의 여행 여파로 피로가 누적됐는지, 그만 다리 힘이 풀렸고 바위를 들이 받은 것이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엄청 세게 다쳤지만 아파도 별 도리가 없었다. 그저 빨리 일을 처리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인간의 배설욕구가 외상의 고통 정도는 쉽게 불식시킨다는 것을 온 몸으로 습득하였다.

그렇게 볼일을 봤다. 정말 시원했다. 그렇게 원초적인 순간이 지나가니 자연스럽게 무릎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출혈이 심했던 것이다. 상처 부위도 상당히 넓었다. 그렇게 큰 상처가 났을 줄은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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