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은 관악산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도림천. 그 도림천에 용이 나타났습니다. '도림천에서 용나는 작은도서관'이란 곳에서 걸어놓은 용 상징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도림천에서는 용이 나올 수 없을 것 같더군요. 유량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용이 몸을 적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죠.

용 대신 개는 많이 나타나더군요. 도림천이 인구 밀집 지역을 흐르고 있는 터라 산책나온 견공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좋겠지만 안 난다고 해도 너무 좌절하지 말자고요. 천변이 보이는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도림천을 걸으며 머리를 식히고... 또 누가 아나요? 그렇게 꾸준히 독서를 하고, 산책을 하다보면 어느새 자신이 와룡선생이 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단종의 한이 서려 있는 강원도 영월을 탐방했습니다. 사진에 등장하는 강은 서강입니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이 서강길을 따라 단종 임금이 유배를 오셨답니다.


강 쪽으로 불쑥 튀어 나온 돌이 선돌인데 단종도 그 선돌을 유심히 지켜봤다고 합니다. 신선들이 노닐 거 같은 기이한 형상의 돌을 지켜보며 잠시나마 유배길에서 오는 고단함을 잊었던 것이죠.

섬처럼 생긴 곳은 청령포라는 곳입니다. 단종의 유배지였죠. 유람선이 등장하는 것처럼 지금도 저 곳은 배가 있어야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뒤로는 높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어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리는 곳이 바로 청령포입니다. 최적화된 유배지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선돌과 청령포 모두 다 서강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영월에는 유명한 동강이외에도 서강이 흐른답니다. 동강과 서강이 영월 읍내에서 합수되어 남한강이 되는 것이죠. 아직 서강에서는 어로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목선은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답니다.


이래서 영월이 무척 매력적인 고장인 것이죠. 빼어난 자연환경과 함께 풍부한 역사적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져 있으니까요.










딸이면 오동나무, 아들이면 잣나무를 심었다 


내 나무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의 옛 선조들

 





우리 선조들에게 나무란 어떤 존재였을까? 너무 막연한 질문일까? 그럼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민들에게 나무는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이 두 개의 질문의 답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두 질문의 답의 간극이 무척 멀다는 것을 말이다. 꼭 답을 말하지 않더라도 질문 자체만으로도 그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숲 생태 공부는 나무와 관련된 옛 선인들의 생활방식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좋은 학습의 장이 된다. 현대인들보다는 나무와 교감을 훨씬 더 많이 했던 옛 조상들이기에 훨씬 더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무 옆에 서 있는 선조들과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끼를 들고 있는 이들도 있을 거고, 바구니를 들고 임산물을 채취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 소나무 서울성곽 옆에 있는 소나무. 잣나무와 소나무가 아들나무로 심겨졌다.

                                                                      ⓒ 곽동운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

딸나무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이다.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집 앞에다 오동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오동나무를 두고 딸나무라고 칭했다. 딸나무가 있으면 아들나무도 있을 터! 그렇다. 아들나무도 있었다. 딸나무에 비해 많이 회자되지는 않지만 분명 아들나무도 있었다. 아들나무는 잣나무였다.

일단 오동나무에 대해서 알아보자. 오동나무는 생장이 빠른 것이 특징이다. 심은 지 1년 만에 사람 키만큼 자란다. 그래서 15년 정도가 되면 이미 15미터가 넘을 정도로 키가 커져 있다.

지금이야 1인 가구들이 넘쳐나고, 결혼도 늦추는 추세라 30대가 훌쩍 넘어 결혼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다. 하지만 예전에는 다들 일찍 시집장가를 가지 않았는가. 그렇게 시집을 갔던 나이가 15~16살 경이었다. 꽃가마 타고 떠나갈 딸을 위해 집안 식구들은 오동나무를 베었다. 오동나무로 장롱이나 반닫이 같은 가구를 만들어 혼수로 보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혹시 나무가 생장이 빠르면 내구성이 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 일반적으로 생장이 빠른 나무는 단단하지 못한 특성이 있다. 하지만 오동나무는 다르다. 그렇게 빨리 생장하지만 가구 제작에 적합할 정도로 튼튼하다. 또한 습기에 강하기도 하다. 그래서 가구 제작은 물론 악기제작에도 널리 쓰이는 것이 오동나무다.
  


 

▲ 장롱 오동나무는 습기에 강하고 내구성이 좋아 가구를 만들기에 적합하다.

사진에 보이는 장롱은 반닫이장이다.             

       ⓒ 곽동운

                                                                             




아들나무는 관으로 짜였다

딸나무로 오동나무를 15년 정도를 바라보고 심었다면, 아들나무인 잣나무는 60~70년을 바라보고 심겨졌다. 기대수명이 짧았던 그 옛날에 60년 이상 나무를 길렀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다. 일생을 같이 한 후 그 아들나무를 잘라 관을 만들었던 것이다. 아들이 죽으면 그 아들나무도 일생을 마치게 됐던 것이다.

딸나무는 '실용성'이라는 말과 어울린다. 이에 비해 아들나무는 '운명체'라는 표현과 어울린다. 나무의 주인과 일생을 함께하다 죽을 때 함께 죽고, 관이 되어 함께 흙에 묻히니까.

한편 아들나무로 꼭 잣나무가 심기지는 않았다. 잣나무의 사촌인 소나무도 아들나무로 심겼다. 얼핏 보면 소나무나 잣나무나 비슷하게 생겨서 쉽게 구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둘을 구분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소나무는 잎이 둘이고, 잣나무는 잎이 다섯이다.

이렇듯 옛 선조들은 딸을 낳았을 때는 딸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았을 때는 아들나무를 심었다. 옛날 이 땅에 태어난 아가들은 그렇게 태어나자마 자신의 나무를 갖고 태어났던 것이다. 이름을 갖듯 내 나무를 가졌던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가? 자신의 나무가 있는가? 없을 것이다. 아니 나무에 눈길을 제대로 준 적도 거의 없을지 모른다. 이렇듯 현대인들은 나무와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다. 아쉽게도. 


































예전에는 넓이를 중시했습니다. 넓으면 깊어진다는 소리에 보폭을 넓혔던 것이죠. 깊이보다는 넓이에 방점을 찍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진리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선문답을 되뇌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어느덧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넓이'와 '깊이'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게 부질없어 보입니다. 
 

꼭 넓다고 깊어지는 게 아니더군요. 반대로 깊다고 넓은 것도 아니었고요. 더군다나 '넓이'든 '깊이' 든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니까요.

어쩌면 진리라는 것이 찾는다고 찾아지는게 아닐 겁니다. 찾는다고 찾아지면 그게 진짜 진리일까요?

그런 혼자만의 착각에서 깨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세상이 좀 다르게 보이더군요. 예전에는 저런 동자승 인형은 눈에도 잘 안 들어왔습니다. 그냥 조잡한 캐릭터 인형으로 치부를 했었지요. 하지만 요즘은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이나 미소를 짓는 답니다. 사진도 더 예쁘게 찍으려고 셔터도 여러번 누르고요. 

그렇게 찍다보니 수행 중인 부처님 사진도 찍게 됐네요. 물론 캐릭터 인형이지만. 저렇게 45도로 누워서 참선을 하고 있는 부처님 인형을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듭니다.

'진리라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일상을 충실히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 쫓아가면 달아나지만 묵묵히 내 일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내 옆에 와 있는...'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백련사라는 사찰을 탐방하며 저런 선문답 같은 생각을 이리저리 해봤답니다.

























겨울에 떠나는 답사여행은 봄, 여름, 가을과는 다른 멋이 있습니다. 문화재들의 민낯을 볼 수 있기에 그런 것이죠. 울창한 수풀로 자기의 몸을 가렸던 문화재들이 온전하게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는 계절이 바로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눈까지 내려준다면 답사객들의 카메라는 더욱더 분주해질 겁니다. 설국으로 변한 세상이 문화재를 더욱더 돋보이게 해 줄 테니까요. 첫번째부터 세번째 사진까지는 북한산의 풍경을 담은 것입니다. 중성문, 산영루, 대남문입니다. 마지막 사진은 경복궁의 경회루입니다. 

이렇듯 겨울에 만난 우리 문화재는 여타 계절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눈물 날만큼 아름다운 북한산의 설경




이번 설 연휴에는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방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북한산에도 눈이 엄청 많이 내렸더군요.

눈 덮힌 봉우리들을 보고 있자니 그 아름다운 모습에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설국으로 변한 북한산 일대를 카메라에 담아 보았습니다. 둘레길을 눈썰매로 질주하는 눈썰매 가족, 눈으로 치장(?)한 천하대장군, 북극곰처럼 생긴 눈길 위의 백구까지... 그렇게 눈 쌓인 북한산은 제게 설국이자 천국처럼 보였답니다.









설 명절 잘 보내세요! 2017년에는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서울에 '기도발' 잘 받는 바위가 있다고?


선바위와 국사당을 품고 있는 인왕산



17.01.26 10:29   최종 업데이트 17.01.26 12:10

곽동운(artpunk)             





    

        

 

▲ 선바위 인왕산 중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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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거대한 암반이 노출된 인왕산은 그 자체가 절경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인왕산에 대한 애정 공세는 오늘날에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성곽길을 탐방하는 도보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왕산을 향하는 발걸음이 모두 성곽길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성곽길 트레킹이 아닌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인왕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속인일 수도 있고, 그냥 평범한 일반 시민일 수도 있다. 필자와 같이 역사 트레킹을 즐겨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럼 그들은 어디를 가서 기원을 드릴까. 대충 아무 곳이나 가서 돗자리 펴고 절을 올리는 것일까.





       

▲ 선바위 누군가 간절히 기원을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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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복을 입은 바위?
 
그들이 기원을 드리는 곳은 인왕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바위라는 곳이다. 선바위는 높이 7미터, 가로 10미터 정도가 되는 바위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 있다. 그렇게 바위의 규모가 크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 국사당 인왕산 선바위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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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과 산악신앙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년(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 국사당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신사를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사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그렇게 아래쪽에 국사당이 자리 잡게 되니 선바위는 거석숭배문화에다 산악신앙까지 더해지게 된다. 선바위에서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이 국사당 앞에서도 두 손을 모으게 됐다는 것이다. 









        

▲ 선바위의 뒤태 선바위의 뒷모습.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을 닮았다. 그래서 필자는 선바위를 사오정바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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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와 정도전, 선바위를 두고 맞서다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인왕산은 그 자체가 매력적인 산이다. 또한 그 안에 선바위와 국사당 같은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을 잘 간직해온 산이다. 그렇게 매력적인 풍광과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가진 산이 서울 중심가에 '떡'하고 위치해 있는 것이다.







        

▲ 선바위 선바위는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세력들에 의해 한양도성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사진에서보듯 선바위는 한양도성과 무척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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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 불여일견! 인왕산에 직접 가서 선바위와 국사당을 탐방하고 오는 건 어떨까. 선바위가 기도발이 잘 받는 곳이라는데 그곳에서 기원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살짝 뒤로 돌아 선바위의 '뒤태'도 살펴보자. 앞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왔던 사오정과 비슷하게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선바위를 '사오정바위'라고 부른다. 

거기에 더해 유명한 수성동 계곡에도 가보자. 수성동계곡에서 바라보는 인왕산은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거대한 암반이 노출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인왕산에 올라 '기도발'도 세워보고, 유명한 수성동 계곡도 탐방하고. 그 아래 서촌에 들러 배도 채우고! 참 서울을 즐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 것 같다.





여행정보

1. 교통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1번 출구 하차. 표지판을 따라 800미터 정도 올라가면 선바위에 도착함.


2. 추천이동경로: 선바위(국사당) ▶ 인왕산 성곽구간 ▶ 수성동계곡 ▶ 서촌
 






 



        

▲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눈이 내리고 난 후라서 그런지 동네 골목에 고드름이 생겼습니다. 이동통신 중계기가 달린 곳에 고드름이 열려서, 얼핏 봤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계기 안테나를 수정으로 걸어놓았나? 그것도 거꾸로?'

제 착각이었죠. 하필이면 통신사 중계기에 달려서 수정 안테나로 착각을 한 것이죠. 좀 머쓱하기는 했지만 이내 미소가 지어지더군요. 오랜만에 고드름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잠시나마 '수정안테나'라는 것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내친김에 사진편집기를 이용해서 원본 사진을 90도로 돌려봤습니다. 그래서 짝퉁 '수정안테나'를 한 번 만들어봤습니다. 오랜만에 본 고드름 덕분에 잠시나마 즐거운 '딴짓'을 해봤네요.



























성곽에 눈 내리는 날





1월 22일 토요일.


서울에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더군요. 온 세상이 다 하얗게 변했습니다.


서울성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인왕산 성곽길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곳은 설국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성곽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눈길을 걸었습니다. 성곽길 너머 희미하게 눈 쌓인 바위들이 보이더군요. 절경이었습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하얗게 눈 덮인 성곽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게 다 정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흰 눈으로 세상살이에 찌든 제 몸을 씻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눈 덮인 성곽길을 걷고 난 후 촛불 집회가 열리던 광화문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눈사람을 만났네요. 역시 촛불 집회에 참석하는 눈사람이라 그런지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주장하고 있네요. 앞에다 촛불도 여러개 켜 놓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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