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6일간 강원도 일대를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인제 ☞ 속초 ☞ 양양 ☞ 강릉 ☞ 평창 ☞ 원주
2021년 2월 1일 월요일 .
유명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탐방하는 날이다. 전날 아침가리골 얼음트레킹을 행한 후 다시 현리로 돌아왔는데 시간이 저녁 7시경이었다. 서울에서야 오후 7시면 초저녁이지만 지역에서는 어두워지면 인적이 드물어진다. 그래서 인제읍으로 이동하지 않고 현리에 있는 모텔에서 1박을 했다.
얼마나 많은 군인 아저씨들이 이곳을 거쳐 갔을까? 생각해보니 나도 20년도 더 전에 강원도 화천의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아휴 그때만 생각하면 아주 징글징글한데 강원도의 자연은 정말 매력적이단 말야! 강원도는 아웃도어 천국이지...^^
현리에서 인제읍내까지는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윗길과 아랫길로 갈 수 있다. 현리에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가려면 고사리 수변공원까지 시골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현리에서 고사리 수변공원까지는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아랫길은 유명한 남대천을 끼고 있어 풍광이 아주 수려하다. 자칫 운전하는데 시선을 뺏겨 사고가 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아니다를까 앞에서 사고가 났다. 아스팔트에 살짝 살얼음이 언 거 같았다. 안개도 끼었고. 하여간 사고 때문에 20분 정도를 버스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 자작나무 숲 입구
고사리 수변공원에 도착했다. 안개낀 남대천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곳이 자작나무 숲이 아니다. 수변공원에서 약 5km 정도를 걸어가야 자작나무 숲 입구에 갈 수 있다. 버스를 타라고? 자작나무숲 입구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에 몇 편 되지 않는다. 그럼 택시는? 돈이 없다. ^^
그리고 필자도 나름 도보여행가인데 왕복 10km 정도는 항상 감안해야 하지 않나? 물론 자작나무 숲에 이동을 하면 거의 20km 정도에 달하겠지만...
고사리 수변공원에서 자작나무숲 입구까지는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었지만 나름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서 걸을만 했다. 걸으면서 마을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는데 왜 버스편이 하루에 몇 편밖에 없는지 알겠더라. 아무리 자작나무 숲이 유명하다고 하더라도 원대리는 그저 시골 동네였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런 곳에 버스편이 많이 배치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뚜벅이 여행자들은 자신의 두 발을 믿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10km 이상을 걸을지 모르니까. 돈 없는 게 원수지...ㅋ
전날 아침가리골 얼음트레킹에서 힘 좀 뺐더니만 다리가 말을 안 듣는다. 더군다나 배낭도 50리터 짜리를 메고 왔다. 배낭이 크니 마구 때려넣었다. 태블릿과 키보드를 세트로 넣고, 책과 다이어리 세트도 넣었다. 결론적으로 태블릿은 한 번도 전원을 안 켰고, 책은 한 장도 펼쳐보지 않았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숙소에서는 그저 TV만 붙잡고 있었다. 모텔만 다녀서 그런가? 성인방송이 잘 나오더군~^^
그나저나 저놈의 배낭 2014년도에 스페인에서 구매해서 잘도 써먹는다. 저 배낭으로 두 번이나 산티아고 순례길도 다녀오고 했으니 본전은 제대로 뽑은 셈이다. 사실 50리터짜리 새 배낭이 있긴 하지만 저 녀석이 더 끌린다. 그런데 왼쪽 사이드 포켓 자크가 고장이 났다. 하지만 고장이 났더라도 계속 쓸 생각이다. 여행의 동반자를 함부러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론적으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핵심 부분을 가보지 못했다. 사진은 입구 바로 앞쪽에 있는 구간에서 찍은 것이다. 한마디로 맛배기만 보고 온 것이다. 자세히 알아보니 그간 코로나 때문에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입산 통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2월 3일부터 탐방이 재개가 됐다는 것이다. 코로나 때문이든 휴무일이든... 어쨌든 탐방을 하지 못했다.
세상 일이 다 그렇겠지만 여행도 합이 맞아야 한다. 기껏 갔더니 휴무이거나 공사중이라면 김이 셀 수밖에 없다. 물론 그 핑계대고 해당 지역을 또 방문할 수도 있다. 이번에 못 가면 다음에 또 가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검색을 해야 할 거다.
조만간 다시 자작나무 숲을 방문할 예정이다. 그때는 20km 정도 걸어야 할 거 같다. 통상적인 코스가 아니라 임도따라 쭈욱 걸어볼 생각이다. 이때 못 걸은 거 그날 다 걸어봐야지!
***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6일간 강원도 일대를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인제 ☞ 속초 ☞ 양양 ☞ 강릉 ☞ 평창 ☞ 원주
2021년 1월 31일 .
강원도 동계 여행의 시작일이다. 아직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 때문에 좀 조심스럽게 움직였었다. 방역수칙을 항상 염두해 가면서 이동을 했었다. 뭐 물론 단독여행이었으니 누구랑 말 섞을 일도 없었지만...
이날의 일정은 강원도 인제군이었다.
인제오면 언제가나? 원통해서 어찌하리!
인제는 강원도 군번들의 특유의 푸념들을 다 담아놓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제에서는 아침가리골과 원대리 자작나무 숲, 두 곳을 메인 탐방지로 삼아 방문할 생각이었다. 아침 일찍 동서울터미널로 향했고, 인제행 버스를 발권을 하려고 카드까지 꺼냈다. 그러다 딱 멈췄다. 아침가리골을 가려면 인제읍내보다는 현리터미널이 더 가깝기 때문이었다.
현리터미널은 인제군 기린면에 위치해 있는데 인제읍내에서 남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져있다.
굳이 읍내를 들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현리터미널행 시외버스에 탑승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현리터미널까지는 약 2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됐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든다. 기린면터미널로 불리는 것이 맞지 않나? 왜 '면'보다 '리'를 중시해서 현리터미널로 불리는지... 물론 그곳에 가면 '기린면터미널'이라고 입간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린면터미널이 아니라 현리터미널로 부른다. 동서울터미널 자동발권기에도 현리터미널로 적시되어 있다.
무슨 스토리가 있지 않을까? 사실 현리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투 중의 하나로 불리는 현리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혹자들은 조일전쟁 때의 칠전량 해전, 병자호란 때의 쌍령전투와 더불어 한국전쟁 때의 현리 전투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3대 패전이라고 부른다.
1951년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벌어진 현리 전투는 국군 3군단과 중공군 9병단이 맞붙었었다. 당시 중공군은 지금의 현리터미널에서 남서쪽으로 약 7킬로 정도 떨어진 오미재 고개를 점령한다. 오마치 고개라고도 불리는 오미재는 국군 3군단의 유일한 퇴각로이자 보급로였다.
문제는 중심을 잡고 지휘를 해야 할 군단장이 연락기를 타고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퇴각로가 봉쇄되어 동요를 겪고 있는데 지휘관이 도망을 가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렇게 도망간 이는 유재흥 중장이었다. 별 3개가 아깝다.
지휘체계가 무너지니 모든게 엉망이 되어버렸다. 군인들은 오합지졸처럼 퇴각을 했는데 많은 인원이 중공군에게 사살되거나 포로로 잡히게 됐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워낙 급박하게 퇴각을 하다보니 무기와 보급품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하나가 아쉬운 무기와 탄약, 보급품들이 중공군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현리 전투를 두고 당시 미군 사령관인 밴플리트 장군은 격노를 했다. 그리고는 3군단을 해체시키고 한국군의 지휘권을 박탈시키기에 이른다. 현리 전투의 결과 때문에 아직까지도 전시작전권을 미군에게서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가리골 트레킹을 소개한다면서 현리 전투에 대한이야기를 너무 길게 한 걸까? 아니다. 아침가리골과 현리 전투는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 아침가리골은 방태산에 자리잡고 있는데 3군단의 주요 퇴각로가 방태산이었으니까.당시 군인들은 길도 없었던 그 험한 곳을 기어가다시피 했다. 사단장은 제복을 벗어던져 버리고, 장교들은 계급장을 떼어버렸다고 하니 얼마나 군기가 문란했는지 알 수 있다.
* 아침가리골
현리터미널에서 아침가리골 트레킹의 시작점까지는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버스가 다니는데 하루에 6편밖에 없다. 잘 확인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아침가리골 트레킹의 인아웃은 이렇다.
IN: 방동약수(방동약수마을)
OUT: 진동1리(추대)
하지만 필자는 인아웃을 거꾸로 했다. 진동1리로 들어가서 방동약수로 나온 것이다. 간간이 트레킹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나만 반대방향이었다. 뭐 이렇게 가나 저렇게 가나...ㅋ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아침가리골은 계곡트레킹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여름에 인기가 많다. 허리까지 오는 계곡물을 박차며 걷는 맛이 제격인 곳이다. 그만큼 계곡이 깊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얼음트레킹을 하기에도 제격이라는 뜻이 된다. 수위가 원만하니 얼음이 훅 꺼진다고 해도
양말이나 젖는 정도가 될테니까.
어쨌든 여름 계곡트레킹의 천국같은 곳에서 얼음트레킹을 하겠다고 나섰다. 운이 좋았는지 여러 조건들이 받혀줬다. 기온이 비교적 온화했고, 바람이 불지 않았다. 하지만 전전날까지 강추위가 몰아쳐 얼음이 꽝꽝얼었다. 물론 군데군데 얼음이 깨진 구간도 있었지만.
사실 얼음트레킹은 쉽게 할 수가 없다. 갑자기 얼음이 쑥 꺼지면 어떻게 하는가. 또 그만큼 얼음이 얼어야 한다는 건 날씨가 추워야 한다는 뜻이다. 동장군의 위세에 맞서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필자도 정말 오랜만에 얼음트레킹을 하러 온 것이다.
챙겨온 아이젠을 끼고 열심히 걸었다. 아이젠을 끼고 걸었더니 얼음을 치고 나가는 소리가 계곡에 쩌렁쩌렁 퍼져나갔다. 간간이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계곡을 전세낸 듯 위풍당당하게 걸었다. 안전에 신경을 써서 그랬는지 계곡 구간의 종료점인 조경교 인근까지 한 번도 얼음이 깨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원래 사고는 막판에 일어나는 거야! 끝까지 조심해야 돼"
딴에는 경각심을 갖겠다고 혼자서 궁시렁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 우지찍
계곡 구간 막판에 얼음이 제대로 깨져서 오른쪽이 싹 다 젖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몇 걸음을 종종 걸음쳤는데 또 얼음이 깨져 이번에는 왼쪽이 싹 다 젖었다. 그래 원래 사고는 막판에 일어나는 거잖아!
아침가리골 트레킹의 길이는 약 14km 정도다. 계곡 구간이 약 7km 이고, 임도 구간이 약 6km 정도 된다. 나머지는 마을입구까지 걷는 아스팔트 길이다.
방동약수마을☞ 방동약수☞ 방동리고개 ☞ 조경교 ☞ 계곡구간 ☞ 진동 1리
한 번 진입하면 나가는 길이 마땅치 않으니 그냥 열심히 걸으셔야 한다. 그렇게 경사가 심한 구간은 아니기에 트레킹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한 번 도전해 볼만 하다. 하지만 중간에 매점은커녕 화장실도 없다는 걸 명심하셔야 한다. 벤치조차도 없다. 단단히 준비를 하시고 떠나셔야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얼음트레킹은 쉽게 하기가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의 하천은 갑자기 쑥 꺼지는 부분이 있기에 무척 조심해야 한다. 뭐 그걸 선녀탕이라고 부르는데 선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하여간 얼음트레킹을 하려면 여러가지가 받혀줘야 한다. 여러가지 돌발상황도 감안해야 한다. 특히 저체온증이 올 수 있으니 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렇게 단단히 준비를 해야만 설경과 빙설이
서울에도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으로 천도를 할 때 철저하게 풍수지리를 따져가며 도읍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서울의 우백호는 인왕산이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이번에 소개하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이다.
낙산(駱山)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하여 낙타산 혹은 타락산으로도 불렸다. 낙산은 높이가 해발 125미터 정도로 산이라 불리기에는 턱없이 낮다. 실제로 한양도성을 두르고 있는 네 개의 산 중에서도 가장 낮다. 참고로 북악산은 342미터, 인왕산이 338미터, 남산이 270미터이다. 이 4개의 산은 서울 안쪽에 있다하여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른다.
* 낙산 성곽길: 낙산공원에서부터 혜화문까지는 성 밖을 걷는다.
● 서울의 좌청룡 낙산
실제로 이렇게 키가 낮다보니 낙산은 좌청룡으로서의 역할을 못한다고 질책에 시달려야했다. 이에 비해 우백호인 인왕산은 거대한 암반면이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어 돌이 많은 골산(骨山)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낸다. 낙산도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워낙에 체급 차이가 나다보니 우백호인 인왕산에게는 도전장조차 못 내미는 것이다.
그럼 왜 좌청룡의 역할이 중시됐을까?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청룡을 굳이 끌어다가 멀쩡한 산에 이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의미를 알려면 다시 풍수지리로 돌아가야 한다. 좌청룡은 남자, 장자를 뜻한다. 이에 비해 우백호는 여자, 차자를 뜻한다. 차자는 둘째나 셋째를 말한다.
다른 왕조국가들처럼 조선도 엄연히 장자 계승원칙이 있었다. 그러니 장자를 뜻하는 좌청룡이 튼실해야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의 좌청룡은 우백호에게 게임이 되지 않았다. 용호상박은커녕 호랑이한테 냉큼 잡아먹히는 형상이다. 어쨌든 그 말대로 된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실제로 숙종이외에는 제대로 왕위를 이끈 장자 출신 왕이 전무했다.
좌청룡우백호니, 용호상박이니 판타지 같은 말들은 접어두고 낙산을 올라가보자. 우리는 말보다는 걷는 걸 더 잘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한양도성은 앞서 언급한 내사산을 두르고 있는데 그 길이가 18.6km에 달한다. 그런 한양도성을 걷는 것을 두고 순성놀이라고 부른다. 18.6km라면 걸을 만 하지 않은가. 트레킹 마니아라면 충분히 도전해볼만 하다. 옛 선조들은 짚신 신고도 잘 순성을 하셨다. 우리들이야 최신형 트레킹화를 신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순성을 잘 하려면 출발점이 중요한데 그 시작점을 많은 이들이 낙산 구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낙산 성곽길에서 몸을 제대로 풀어주고 북악산 성곽길로 넘어가는 것이다. 키가 작은 것이 역설적으로 낙산의 강점이 되는 것이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시작과 종료를 할 수 있으니 접근성도 무척이나 좋다.
* 낙산: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모습.
● 시원한 풍광을 품은 낙산공원
본격적으로 낙산 성곽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깎아지는 절벽 위에 세워진 집들이 보일 것이다. 이곳은 창신동인데 예전에 채석장이 있던 자리였다. 창신동하면 전태일 열사가 떠오르면서 작은 봉제공장들이 연상된다. 그런 창신동에 채석장이 있었다는 걸 아는 이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하여 도성밖 십리까지는 함부러 묘지를 쓰지도 못하게 했고, 돌도 캐내지 못하게 했다. 한양도성에 쌓여진 돌들은 해당 산에서 캐낸 것이 아니라 멀리 다른 산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성저십리 원칙은 훼손된다. 시가지의 확장으로 많은 석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도심지와 가까이에 있는 낙산은 그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인왕산도 채석장이 들어서 훼손이 된다. 일제에 의해 좌청룡우백호가 동시에 아픔을 겪었던 것이다.
“와 정말 시원한 풍광이네요. 저 앞에 있는 산이 북한산 맞죠?”
“예 맞아요. 북한산 북쪽에서 남쪽까지 파노라마로 보고 있어요. 도대체 이런 풍광을 어디서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낙산 정상부인 낙산공원 전망대에 올라가면 꼭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125미터라는 높이에 비해 품고 있는 풍광이 너무 아름답고 거대하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낙산공원을 좋아한다.
이제는 혜화문 방면으로 내려간다. 혜화문은 동소문인데 일제강점기에 철거됐다 1994년에 지금의 자리에 다시 만들어졌다. 낙산의 영역은 흥인지문과 혜화문 사이인 것이다.
* 낙산성곽: 낙산공원의 성곽. 여장의 구멍 3개가 보인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이고 양 옆에 구멍은 원총안이다. 근총안은 가까운 적을 공격할 때, 원총안은 원거리 적을 공격할 때 이용된다.
● 낙산 성곽길을 걸으며 성곽 공부를 한다
낙산공원 이전까지는 성곽의 안쪽을 걸었다면 혜화문까지는 성곽 밖을 걷게 된다. 그렇게 걷는다는 것은 한양도성 밖, 즉 4대문 밖으로 나왔다는 뜻이 된다. 그 이전까지는 여장(女墻)이라는 낮은 담장을 따라 걸으며 그 너머로 보이는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구멍이 3개가 뚫린 여장은 성가퀴라고도 불리는데 구체적인 전투행위가 벌어지는 곳이다.
“여장 꼭대기 부분의 명칭은 옥개석인데요, 요거를 넘어서 보려면 좀 불편하시죠?”
“네 까치발 들고 봐야 돼요. 왜 이렇게 만들었대요. 키 좀 낮추지.”
다 이유가 있다. 한양도성은 애초 방어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관광을 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병사들이 그곳에서 생사를 걸고 싸워야했기에 방어에 적합한 높이로 여장을 만든 것이다. 여장이 높으니 성 밖에서는 그곳에 군사가 얼마나 배치되어 있는지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이와 달리 바깥쪽은 커다란 장벽 같은 성체를 끼고 걷게 된다. 적군은 그 큰 장벽을 기어 올라가야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 이렇게 안쪽과 바깥쪽이 다른 축성 방식을 두고 편축법(片築法)이라고 칭한다. 편축법은 한마디로 한쪽만 쌓았다는 뜻인데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특성에 적합한 축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쪽만 쌓으니 돈도 덜 들고, 공기도 단축된다. 얼마나 좋은가. 또한 편축법은 지형과 합치되는 방식이기에 성체가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형상을 보인다.
그럼 평지에서는 어떤 식으로 성을 축조할까. 협축법(夾築法)이란 방식으로 쌓는다. 협축법은 성벽의 안팎에서 성체를 올려쌓는 것을 말한다. 유럽의 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편축법이 바깥쪽만 낭떠러지라면 협축법으로 쌓여진 성들은 안쪽과 바깥쪽 모두 다 낭떠러지다.
사진에 등장하는 아빌라성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서북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이 아빌라성은 중세에 건립됐음에도 보존 상태가 좋아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에서 보듯 아빌라성은 협축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 찍은 스페인 역사 기행 사진을 여기서 써먹는다.
한양도성은 크게 세종, 숙종, 순조까지 세 시기에 걸쳐 성을 고쳐 쌓았다. 시간이 갈수록 성돌 낱낱의 크기는 커졌고, 다듬질의 강도는 정교해졌다. 낙산 성곽길을 걸을 때 놓치지 말고 관찰해보면 좋다. 이렇듯 낙산 성곽길 구간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성곽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된다. 이거야 말로 교과서 밖으로 나온 살아있는 역사 공부다.
*아빌라(Avilla)성: 협축법으로 축조된 아빌라성. 저 좁은 협로에서 병사들이 전투를 한다. 사진 왼쪽과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아빌라 대성당이다.
* 아빌라성: 성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협축법으로 축조가 됐으니 성 안쪽과 바깥쪽 모두 낭떠러지다. 그나저나 정원 참 예쁘다.
* 낙산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낙산 성곽길
1. 코스: 흥인지문 ▶ 낙산공원 ▶ 성곽길 ▶ 혜화문
2. 가는법: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바로 흥인지문을 탐방할 수 있음. 이후 혜화문에서는 4호선 한성대역으로 이동할 수 있음.
3. 같이 가면 좋을 곳: 심우장(만해 한용운 선생 집), 수연산방(수필가 이태준의 집. 지금은 전통찻집으로 변모함)
관악산이 올려다 보이는 지역에서 초중고를 모두 다녔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교가에 ‘관악산 정기 아래’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누구 한 사람이 작사한 것처럼 모두 다 ‘관악산 정기 아래~’였다. 그때는 그런 교가가 우스웠고 한편으로는 싫었다. 학창시절 12년 동안 조회시간만 되면...
‘도대체 관악산과 내가 무슨 상관인가? 관악산의 정기가 시험 문제에 나오기라도 하던가?’
그런데 지금은 보시다시피 관악산에 있는 낙성대 탐방기를 작성하고 있다. 필자에게 관악산은 중요한 존재가 됐던 것이다. 정기가 있는지 없는지는 입증할 수 없으나 어쨌든 관악산은 필자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럼 교가대로 된 것인가?
● 서울의 남주작, 관악산
누구나 다 동의하듯이 서울의 으뜸산은 북한산이다. 그럼 그 다음 순번은 어느 산일까? 당연히 관악산(冠岳山)이다. 한강 이북에 북한산(837m)이 버티고 있다면 이남에는 관악산(632m)이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가까이에 있는 청계산이 618미터로 그 아성에 도전해보지만 역시 관악산의 관록에는 당해낼 수가 없다.
조선이 건국된 후 관악산은 북한산과 함께 외사산(外四山)이 되었다. 한자에서도 보이듯 외사산은 서울 외곽을 두르고 있는 4개의 산을 말한다. 남쪽 관악산, 북쪽 북한산, 동쪽 아차산, 서쪽 덕양산이다. 덕양산은 좀 낯선 이름일지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실 것이다. 행주산성.
그렇게 한양의 남쪽 외곽에 자리잡은 관악산은 주작이 되었고, 북한산은 북쪽의 현무가 되었다. 그 위상에 맞는 옷을 입은 것이다. 참고로 서울의 좌청룡은 낙산이고, 우백호는 인왕산이다. 낙산은 이화동 벽화마을을 품고 있는 작은 산이다. 낙산공원으로 유명한 그 산이다.
* 안국사
● 별이 떨어진 곳, 낙성대
서론이 길어졌다. 본격적으로 관악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낙성대((落星垈)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라는 뜻의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생가이다. 서울 남부권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셨던 분들은 소풍 때문이라도 낙성대 인근을 몇 번 가보셨을 것이다. 필자도 여러 번 가봤다.
강감찬 장군의 집안은 호족이었다. 5대조인 강여청이 경주에서 관악산 아래로 이주를 해왔던 것이다. 지금이야 낙성대가 있는 곳이 서울시 관악구이지만 예전에는 금주(衿州)로 불렸었다. 옆 동네인 금천구(衿川區)에 옛 지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강감찬의 아버지는 강궁진이었는데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일조를 했고, 그에 따라 삼한벽상공신이 되었다. 이렇듯 강감찬 장군은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강감찬 장군과 관련해서는 꽤 많은 설화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일단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는 낙성대부터 그렇다.
- 어떤 사신이 어두운 밤에 금주 일대를 거닐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고, 사신은 별이 떨어진 집에 찾아가게 됐는데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아이를 낳은 것이다. 이에 사신은 아이를 데려가 길렀는데 그 아이가 바로 강감찬이었다.
뻥이다. 말 그대로 설화일 뿐이다. 감히 누가 삼한벽상공신의 아들을 몰래 빼돌리겠는가. 또 이런 설화도 있다.
- 당시 삼각산(북한산) 일대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호환 피해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한양부 판관이 된 강감찬이 부적을 써서 두 명의 승려에게 전하며, ‘무리를 이끌고 가라’라고 명했다. 이에 승려는 호랑이로 변한 후 사라졌고 이후 호랑이에 의한 피해도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도 역시 설화일 뿐이다. 부적을 알아먹는 호랑이가 있을까? 더군다나 강감찬이 관직에 있을 때는 한양부라는 명칭이 없었다. 남쪽의 서울이라는 남경(南京)이 등장할 때가 1067년(문종21)이었다. 강감찬은 서기 948년에 태어나서 1031년에 돌아가셨다.
이외에도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설화들은 상당하다. 84세에 돌아가셨으니 그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장수를 하셨다. 그래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다. 이렇게 민간설화들이 많다는 것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강감찬 장군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낙성대 3층 석탑
* 낙성대 3층 석탑: 기단과 1층 탑신을 확대해보았다.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보인다. 기단부는 간극이 보이는 등 정교해보이지 않는다.
● 낙성대3층 석탑
일단 먼저 생가터를 탐방해보자. 현재 생가터는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데 딱히 주목할 만한 문화재가 있지는 않다. 생가터임을 알리는 유허비와 오래된 향나무가 탐방객을 맞이할 뿐이다. 하지만 이곳이 오리지널 낙성대이다. 별이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낙성대로 알고 있는 곳, 필자가 소풍을 갔던 곳은 생가터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인 안국사(安國祠)이다. 사당사(祠)에서도 보이듯 안국사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일대를 낙성대 공원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이곳을 낙성대라고 착각한다. 안국사는 장군이 거란을 물리치고 받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이라는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안국사의 외삼문을 지나면 낙성대3층 석탑이 탐방객들을 맞이한다. 낙성대3층 석탑은 약 4.5미터에 달하는데 사찰이 아닌 공간에서 이렇게 큰 석탑을 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롭다. 임진왜란 때 위쪽인 상륜부를 비롯한 탑 일부가 훼손됐다고 하니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훨씬 더 우람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탑은 강감찬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사리탑 형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3세기경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800년 이상 관악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뜻이 된다.
석탑은 사찰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건립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장군을 위해 큰 석탑이 만들어졌다는 건, 당시 고려 사람들이 강감찬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래 이 탑은 앞서 언급한 생가터에 있었다. 그러다 1974년 안국사가 세워진 후, 현재의 자리로 이동을 했다.
“이 탑이 몇 층일까요?”
“4층 아니에요?”
“땡! 3층입니다. 하단에 큰 네모 부분은 기단입니다. 기단은 층수로 안 쳐줘요. 탑의 층수 맞추기가 아리송하면 저기 옥개석의 개수를 세어보세요. 옥개석 개수가 층수에요. ”
옥개석은 지붕처럼 탑신을 덮어주는 부분을 말한다. 어쨌든 낙성대3층 석탑은 탑신에 비해 아주 거대한 기단부가 인상적이다. 가까이 가서 볼 수 있으니 꼼꼼히 관찰해보자. 1층 탑신에 적혀 있는 姜邯贊落星垈(강감찬낙성대)라는 각자도 잘 살펴보자. 탑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기단석과 1층 탑신 사이에 별도로 올린 괴임돌을 잘 한 번 살펴보자. 그렇게 괴임돌 처리를 한 석탑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기마상: 말은 역동적으로 잘 표현됐는데 장군님의 다리가...
● 강감찬 장군을 만나다!
이제 내삼문을 지나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친견하러 간다. 잘 알려지다시피 강감찬 장군은 거란과의 항쟁에서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런 장면들을 그림으로 담아 장군의 영정과 함께 걸어두었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거란은 993년(성종12) 1차 침입, 1010년(현종1) 2차 침입, 1018년(현종9) 3차 침입 등 세 번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입 때 상원수가 되어 최전방 사령관으로 전쟁에 임하게 됐는데 이때가 70세였다. 대단한 노익장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이야기는 잘 아실 것이다.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전멸에 가깝게 몰살시킨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보신 후 건물 뒤편 후원으로 잠시 눈을 돌려보자. 울타리 넘어 보이는 숲이 아주 울창하다. 후원은 가을에 가면 더 좋다.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필자도 낙성대 역사트레킹을 주로 가을에 행했었는데 그때 트레킹팀과 함께 가을 단풍사진을 찍었었다.
공원 앞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기마상도 꼭 보고 가자. 말이 아주 역동적으로 잘 표현됐다. 적토마같다. 그에 비해 장군의 발은 너무 짧게 표현했다. 너무 숏다리다.
이렇게하여 낙성대 탐방이 종료가 됐다. 끝내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계속 강감찬 ‘장군’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정말 장군이 맞으신가? 정확히 강감찬은 문신 출신이다. 983년(성종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셨다. 한마디로 문무를 겸비하셨던 것이다.
뒤쪽에 늠름하게 서있는 관악산이 듬직해 보인다. 낙성대공원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관악산의 정기가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교가 한 번 부르면서 관악산의 정기 좀 느껴볼까?
■ 낙성대
1. 코스: 낙성대역 ▶ 생가터 ▶ 안국사(낙성대공원) ▶ 잣나무숲
2. 가는법: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하차한 후 인헌초등학교 방면으로 이동하면 생가터에 닿을 수 있음. 이후 낙성대공원으로 이동함.
3. 같이 가면 좋을 곳: 잣나무숲 ☞ 안국사 외곽부에 자리함. 느긋하게 삼림욕을 하기에 좋음.
필자는 종교다원주의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큰 감흥을 느꼈었다. 사찰을 탐방하는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는 합장부터 하며 가람을 누볐다. 또한 간간이 교회도 갔고, 그 곳에서 이웃 사랑에 대해서 곱씹어 보기도 했다.
무속신앙도 빠질 수 없다. 친분이 있는 무속인이 있는데 작두를 아주 잘 탔다. 그 분 따라 작두잡이를 여러 번 해봤다. 작두잡이를 할 때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되기에 입에다 ‘함’을 물린다. 작두굿은 유혈이 낭자하는 경우가 많기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작두굿은 종료가 되고 관객들은 한 명씩 차례로 공수를 받는다. 공수는 신이 무당의 입을 빌려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때서야 작두잡이들도 긴장감에서 해방이 되어 입에 문 함을 뱉어낸다. 침방울로 범벅이 된 함을 그냥 태울 것인가? 안 된다. 함을 열어봐야한다.
“앗싸 돈 들어있다! 작두잡이 값이다.”
* 인왕산 성곽길
● 바위산인 인왕산
이번에는 우리나라 무속 신앙의 메카 같은 곳을 향해 간다. 그곳은 인왕산에 있는 선바위다.
인왕산은 바위산이라 그런지 돌이 많기로 유명하다. 호랑이바위, 투구바위, 해골바위 등등... 독특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참 많다. 원래 인간은 자연이 빚어놓은 형상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이 바위에도 투영되니 거석숭배문화가 발생했다. 인왕산 선바위는 그런 애니미즘적인 거석숭배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선바위는 가로 7미터, 세로 10미터 정도로 인왕산의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규모가 큰 바위인데다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인왕산에 다른 바위들이 많은 터라 좀 자세히 봐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선바위를 비롯해 인왕산의 남서부 일대를 한 발짝 떨어서져 조망하고 싶다면 인왕산이 아닌 그 앞쪽에 있는 안산(鞍山)에 올라가보자. 안산은 무악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이다. 서대문 형무소가 위치해있을뿐더러 유명한 안산자락길이 있어 도보여행자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는 산이다. 그 무악재에는 2017년에 무악재하늘다리가 놓여서 두 산을 연결하고 있다.
안산은 ‘편안한 안(安)’이 아닌 ‘안장 안(鞍)’을 쓴다. 산이 말 안장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 안장 형상을 제대로 인지하려면 인왕산, 그 중에서도 선바위 인근에서 바라봐야 한다. 가까이에서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있고, 반대로 멀리서 봐야 그 전체 틀거리를 알 수 있는 게 있다.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상황에 따라 줌인 / 줌아웃을 적절히 해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선바위
● 선바위와 국사당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는 ‘애국자 바위’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년(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궁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제가 예전에 작두 좀 탔습니다.”
국사당 앞에는 작두를 타는 단이 있는데 그 앞에서 좀 있어 보이려고 저런 멘트를 했었다.
“정말요? 무섭지 않았어요?”
“작두날이 날카롭지 않아요? 피 날 거 같은데.”
“아니 제가 탔다는 게 아니라... 전 작두잡이를 하면서요... 작두잡이 하면 돈도 입에다 물려줘요. 공수도 받고, 돈도 받고...”
돌아오는 반응은 항상 작두의 날만큼 매서웠다. 그럼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궁색해져 돈 타령으로 급히 마무리 할 수밖에...
* 국사당: 국사당에는 당연히 주차장이 없다. 그래서 제사 물품을 지게로 나른다. 최첨단 시대이지만 한편으로는 올드 스타일도 존재하는 법이다.
●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 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무속의 메카답게 오늘도 선바위에는 많은 이들이 와서 기도를 올린다. 아이를 낳게 해 줄 수 있는 바위라 그런지 확실히 여성들이 더 많다. 신엄마, 신딸로 보이는 무속인 무리들도 자주 보인다. 심지어는 외국인 여성도 와서 기원을 드리더라. 확실히 선바위의 기도빨이 좋긴 좋나보다. 그 여성 외국인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꽤 오랫동안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선바위 앞에서 필자도 조심스럽게 합장을 하였다. 무슨 기원을 드렸을까? 로또대박? 역사트레킹이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역사트레킹만큼은 정말 잘하고 싶으니까!
* 선바위와 한양도성: 선바위의 뒷모습. 선바위가 한양도성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 눈내린 인왕산 성곽
■ 선바위
1. 코스: 안산자락길 ▶ 무악재하늘다리 ▶ 선바위 ▶ 국사당
2. 가는법: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하차한 후 선바위로 바로 올라갈 수 있음. 하지만 안산자락길을 좀 걸은 후 무악재하늘다리를 통해 선바위를 탐방하는 코스를 추천함. 길도 예쁘고 완만해서 부담없이 걸을 수 있음.
쓸데없는 가정을 한 번 해본다. 북한산이 품고 있는 울창한 숲, 아름다운 풍광, 풍부한 문화유산 등등...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서울은 정말 밋밋한 도시가 됐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그만큼 서울 사람들은 북한산의 덕을 제대로 보고 있는 셈이다. 이번편은 진관사에 대한 글인데 이 진관사도 북한산이 품고 있는 문화유산 중에 하나다.
* 진관사 극락교
● 삼각산이라 불렸던 북한산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북한산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북한산은 예전에 삼각산(三角山)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알려졌었다. 세 개의 봉우리가 삼각뿔처럼 생겼다하여 삼각산이라고 불린 것이다. 그 세 봉우리는 백운대(837m), 인수봉(810m), 만경대(800m)이다. 예전에 봉우리 이름을 외우려고, 앞 글자를 따서 ‘만백인’으로 외웠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백만인’이 더 잘 머릿속에 남을 거 같다. 한편 북한산의 정상은 인수봉이 아닌 백운대다. 인수봉이 유명해서 그런지 인수봉이 최정상인지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더군다나 인수봉은 일반 등산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클라이밍 장비로 암벽 등반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다른 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북한산도 동서남북이 제각각이다. 삼각뿔이 자리 잡고 있는 동쪽은 높은 봉우리들이 장벽처럼 연이어 서 있다. 이에 비해 서쪽은 비교적 낮은 봉우리들이 올망졸망하게 늘어서 있다. 그렇게 동서간의 고도차이 때문인지 북한산의 물길은 동쪽보다는 서쪽이 더 완만하다. 계곡트레킹을 하기에도 서쪽편이 더 낫다.
이번에 탐방할 진관사도 북한산의 서쪽에 있다. 진관사를 가려면 3호선 구파발역에서 진관사행 시내버스를 타면 쉽게 도달할 수 있다. 15분 정도 타고 이동을 하는데 차창밖 풍경이 예뻐서 지루하지가 않다. 다른 방법도 있다. 6호선 독바위역에서 하차한 후 진관뉴타운 방면으로 북한산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진관사에 도달할 수 있다.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이렇게 행하는데 볼거리도 많고, 문화유산도 많아서 많은 이들에게 별표 5개를 받고 있다. 진짜다.
“와! 멋지네요. 서울에 이렇게 큰 한옥마을이 있었어요?”
“네 있었어요. 한옥하고 북한산하고 잘 어울리죠.”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진관한옥마을이 탐방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진관한옥마을은 진관뉴타운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는데 수도권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한옥마을이다.
* 진관사: 대웅전 앞에 쌍석등이 있다.
● 서울의 4대 명찰 진관사
진관사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대 명찰 중에 한 곳이다. 4대 명찰은 조선 세조 때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서쪽에 진관사, 동쪽에 불암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를 지정하였다. 왕실의 번영을 위해 지정된 사찰들이었기에 이 사찰들은 명찰이라 불리며 승격이 높았다.
일주문과 불이문을 지나 진관사 경내로 들어가자. 초가지붕을 얹은 연지원에서 흘러나오는 향긋한 차향에 이끌리어 발걸음을 멈추지 말자. 바로 대웅전으로 이동하자.
“와, 좋네요. 무언가 탁 트인 느낌이에요.”
“뒤쪽에 있는 봉우리하고 대웅전하고 잘 어울려요.”
수강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외쳤다. 진관사는 계곡 지형에 위치해 있는데 대웅전 뒤쪽편의 봉우리는 비교적 아담하지만 상류쪽으로는 높은 봉우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탁 트인 시야와 웅장한 모습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대웅전 앞에서는 매번 이런 해설을 했었다.
“진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인데요. 보시다시피 본당인 대웅전 앞에 탑이 없고, 대신 석등이 2개가 있어요. 통상적인 가람 구조에서 벗어난 형태에요.”
옛 사찰들은 본당 앞에 탑을 세웠다. 본당 하나에 탑이 하나있는 것을 1당 1탑이라고 한다. 1당 2탑도 있다. 말 그대로 하나의 본당 앞에 쌍탑이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진관사의 대웅전 앞에는 탑 대신에 쌍석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통상적인 가람 구조에서 벗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있어 보이려고, ‘에헴’하고 헛기침도 하면서 해설을 했지만...
“곽작가님, 우리 빨리 단체 사진 찍어요.”
해설 실력이 약하나? 꼭 그렇지는 않은데. 그래, 어차피 해설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그런 것이다. 참고로 ‘가람(伽藍)’은 승려가 모여 수행을 하는 장소를 말하는데 불교 사찰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 진관사
● 진관대사를 위해 세운 진관사
진관사(津寬寺)는 1010년, 고려 현종 2년 때에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신혈사로 불렸던 진관사는 고려 제8대 왕인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해 직접 세운 절이라고 한다. 당시 왕위계승 1순위였던 현종은 어려서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불렸었다.
그런데 헌애왕태후로 불리기도 했던 천추태후(千秋太后)에게 미움을 받았다. 천추태후는 5대왕 경종의 부인이자 7대왕 목종의 어머니였는데 아들인 목종이 후사가 없자 자신의 다른 아들을 왕위에 앉힐 생각이었다. 당시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에 올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대량원군을 위협하는 천추태후의 검은 그림자는 더욱더 짙어져갔다.
원래 신혈사는 진관 스님이 홀로 수행을 하는 곳이었는데 천추태후는 강제로 대량원군을 이곳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외진 곳이니 자객을 보내기도 좋았을 터. 하지만 진관 스님은 이런 음모를 간파했고, 수미단에 굴을 파서 대량원군을 숨겨놓는 기지를 발휘했다. 수미단은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말한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상상속의 산인 수미산을 형상화한 것이다.
3년 뒤인 1009년에 대량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른다. 서북방을 지키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등극시킨 것이다. 고진감래라고 천추태후의 탄압을 끝까지 견뎌냈기에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현종 때에는 2번에 걸쳐 거란이 침공을 해왔다.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1010년에 있었고, 8년 후에는 3차 침입이 있었다. 2차 침입 때는 요나라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터라 현종은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당하고만 있던 민족인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거란과의 전쟁 때는 강감찬 장군이 있었다. 1018년에 있은 3차 침입 때 강감찬 장군은 귀주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진관사 이야기를 하다가 고려 초기 거란과의 항쟁까지 언급하게 됐다. 뭐 이러면서 하나라도 더 익히면 좋지 아니한가. 우리가 역사트레킹을 혹은 답사여행을 행하는 것도 현장에 직접 가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하는 거니까.
진관사는 한국전쟁 때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는다. 빨치산이 지리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북한산에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한전, 칠성각, 독성전은 전쟁의 참화를 피하게 된다.
* 진관사
● 일장기에 덧그린 태극기가 발견되다
2009년도였다. 오래된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다 뜻밖의 문화재가 발견된다. 일장기 위에 태극문양을 덧그린 태극기가 발견된 것이다. 태극문양이 지금처럼 상하대칭이 아닌 좌우대칭으로 그려진 독특한 형태의 태극기였다. 이 태극기를 숨겨놓으신 분은 바로 백초월 스님이셨다.
일제강점기 당시 진관사에 주석하시던 백초월 스님은 한용운 스님, 박용성 스님과 함께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셨던 불교계 인사였다. 1944년 형무소에서 옥사하실 정도로 백초월 스님은 끝까지 항일 의지를 꺾지 않으셨던 분이다. 31운동 경, 일제 경찰에 잡혀가기 전에 숨겨놓은 태극기였으니 무려 9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태극기였다.
“삼각산이 조선이면 왜놈은 계란이다. 계란으로 삼각산을 아무리 친다한들 삼각산은 끄떡없다.”
백초월 스님의 어록이다. 구구절절이 옳으신 말씀이다. 전세계에 있는 계란을 다 친다고해도 북한산은 꿈쩍도 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하여 진관사 탐방은 종료된다. 좀 아쉬우시면 위쪽에 있는 진관사 계곡에 잠시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듯싶다.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계곡이라 잠시 머리를 식히기에 딱인 곳이다.
북한산, 4대 명찰, 진관대사, 현종, 천추태후, 거란, 강감찬, 백초월 등등... 진관사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 거리들이 있다. 본 글에 언급하지 못한 유명한 진관사 수륙재도 있다. 그러니 가보면 좋다.
*** 서울의 명소들을 탐방하는 <서울 그곳에 가다>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본 <서울 그곳에 가다>는 저의 주 종목인 <역사트레킹>에서 파생된 콘텐츠입니다. 기존에 작성했던 트레킹 원고들은 평균이 원고지 35매(200자 기준) 정도여서 읽는데 좀 불편했던게 사실입니다. 이에 좀 컴팩트한 분량의 원고를 작성해보기로 했답니다.
<서울 그곳에 가다>에서 탐방하는 장소들은 기존에 작성했던 트레킹 원고에서 이미 한 번 다뤄본 곳들이 대다수일 겁니다. 그럼 재활용이냐? 아닙니다. 재작성했습니다. 기존 트레킹 원고도 출간해보고 싶고, 본 <서울 그곳에 가다>도 출간해보고 싶어서요. 자기 표절도 표절아닙니까.
원고지 15~20매 정도로 분량이 그리 많지 않으니, <서울 그곳에 가다>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서울의 명소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드릴테니까요~^^
역사트레킹을 직업으로 삼다보니 서울 곳곳을 누비게 됐다. 그러면서 깨달았던 것이 하나 있다. 아니 실감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서울에도 산이 참 많아요.”
수강생들에게 많이 했던 멘트다. 그렇다. 서울에는 북한산이나 관악산 말고도 산이 많다. 인왕산, 아차산, 청계산 등등... 그런 서울의 산을 찾아 떠난다. 산에 간다고 움찔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시지 마시라. 필자도 산 정상부를 가는 것보다 둘레길 걷는 걸 더 선호하니까.
제목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이번에 탐방할 곳은 백사실계곡이다. 백사실계곡은 북악산의 북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북악산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서울 안쪽에는 4개의 산이 자리 잡고 있다. 북쪽 북악산, 동쪽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 이 산들을 연결하여 성을 쌓았더니, 한양도성 18.6km가 탄생했다. 이 산들은 안쪽에 있다하여 내사산(內四山)으로 불렸다.
* 백사실계곡: 초입에 자리잡은 현통사
● 이곳에 들어서면 도시의 번잡함이 사라진다!
청와대의 뒷산이라 그런지 북악산은 많은 부분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개발이 제한되다보니 역설적으로 서울 같지 않은 구역도 존재한다.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명승 제36호 백사실계곡이 바로 그런 곳이다. 백사실계곡에 발길을 들여놓으면 울창한 수목원을 방문한 것처럼 싱그러움이 전해진다. 서울에서도 이런 숲 향기를 느긋하게 맡을 수 있다니!
필자는 백사실계곡을 ‘비밀의 화원’이라고 표현한다. 서울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에서 불과 4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렇게 호젓한 곳이 자리 잡고 있으니,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매연과 소음, 끝없는 인파에 시달리다가도 이곳에 들어서면 갑자기 모든게 멈춰진 듯 그런 도시의 번잡함이 사라진다. 싹 다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비밀의 화원답게 백사실계곡은 물도 1급수다. 그래서인지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고 있단다. 백사실계곡은 홍제천의 상류가 되는데 그 물길을 따라가면 굵직한 문화유산들을 만날 수 있다. 몇 가지를 알아보고 가자. 일단 유명한 세검정(洗劍亭)이 부암동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인조반정과 관련된 김류, 이귀 등이 거사를 모의한 후 이곳에서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졌다하여 세검(洗劍)이라는 명칭이 생겼고, 이곳에 정자가 들어서니 세검정이 된 것이다. 세검정은 백사실계곡 탐방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세검정 인근에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어원이 된 탕춘대(蕩春臺) 터가 있다. 탕춘대는 연산군에 의해 1505년에 만들어졌는데 그는 이곳에 수각을 짓고 화끈하게 놀았다고 한다. 이때가 연산군 11년이었는데 다음해인 1506년,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된다. 과유불급이다. 놀아도 적당히 놀아야한다. 그러니 폐위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수각(水閣)은 물가에 지어진 누각 혹은 정자를 말한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다하여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고, 불천이라고도 불렸다. 보도각 백불이라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거대한 마애불 앞을 흐른다하여 불천(佛川)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정식 명칭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인 보도각백불은 다른 마애불과 달리 호분으로 채색을 했다. 보기 드문 컬러풀한 마애불로 2014년 3월에 보물 제1820호로 승격됐다.
* 백사실계곡: 숲길의 가을
● 풍광이 수려한 백석동천
현통사 앞 너럭바위에서 멋지게 인증사진을 찍은 후 산책로를 따라 이동한다. 싱그러운 숲 향기를 맡으며 걷다보니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걷다보면 큰 연못 자리를 끼고 있는 별서터가 나온다. 백석정, 백석실 혹은 백사실로 불렸던 이 건물은 전에는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의 별서터였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2012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의 주인이었다는 문서가 발견됐고, 그에 따라 부암동 별서는 이항복 선생이 아닌 추사 김정희 선생의 소유물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그 곳이 이항복 선생 소유든 김정희 선생 소유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조선 중기 때 인물인 이항복 선생이 부암동 별서터를 잘 사용했고, 이후 조선 후기를 살았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바톤을 이어받아 잘 이용했다고,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숲을 거닐다보면 상상력도 풍부해진다.
이제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 바위를 보러가자. 예전에 이 일대는 백사골로 불렸었는데 주위에 흰 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천(洞天)이라는 명칭은 삼청동천, 청계동천처럼 풍광이 수려한 곳을 지칭할 때 붙는 말이다. ‘백석동천’을 거칠게 풀이해보면, 풍광이 아름다운 백석지역이라는 뜻이 된다.
어쨌든 이 일대가 비밀의 화원처럼 아름답다보니 어떤 풍류객이 ‘白石洞天’ 네 글자를 보기 좋게 각자를 해두었다. 이 백석동천 바위는 크기나 선명도면에서 다른 각자바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 곳에 서면 카메라를 꺼내 든다.
“곽 작가님, 거기서 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우리 사진 좀 찍어줘요.”
필자는 열심히 사진을 찍어준다.
각자바위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능금마을이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능금이면 사과 아닌가? 서울에서 사과를 재배했었나? 그렇다. 지금은 아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부암동 일대에는 사과밭이 많았다. 경림금(京林檎)이라고 불렸던 부암동 일대 사과는 제사상에 올라갈 정도로 찾는 이들이 많았었다. 부암동은 북소문인 창의문과 맞닿아있는데 가을 수확철만 되면 경림금을 구매하기 위한 행렬로 창의문밖이 들썩들썩 거렸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맛이었기에 창의문 밖이 들썩거리기까지 했을까? 이제는 능금밭은 찾아볼 수 없기에 입맛만 다시며 다시 숲길을 거닐었다.
이렇게 하여 백사실계곡 탐방을 마쳤다. 추사 선생의 별서터와 백석동천 각자바위, 거기에 울창한 숲길이 더해지니 이곳은 정말 서울 같지 않은 곳이다. 잘 간직하고 싶은 비밀의 화원이다. 이곳에 발자국을 들이면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싱그러운 나무향이 전해진다. 그런 자연의 향취에 빠지다보면 어느 순간 어깨춤을 추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걸 무아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숲에 가면 그렇게 좋은 기운을 받게 된다.
* 백석동천: 각자바위
■ 백사실계곡
1. 세부코스: 세검정(홍제천) ▶ 별서터 ▶ 각자바위 ▶ 능금마을 인근 숲길
2. 가는법: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시내버스 탑승, 상명대 앞 하차. 약 10분 정도 소요됨.
3. 같이 가면 좋을 곳: <커피 프린스> 촬영지로 유명한 부암동 카페거리, 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
- 목적없이 그냥 트레킹을 하는 것이 좋으신가, 아니면 주제성이 확실한 테마트레킹이 좋으신가?
수강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 때 거의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테마트레킹이 좋다고 대답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계신분들은 어떤 것이 좋으신가?
역사트레킹은 역사를 중심에 둔 테마트레킹이다. 역사트레킹이 거듭될 때마다 점점 더 큰 욕심이 생겼는데 테마의 강도를 더 높이고 싶은 욕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맨 처음 구체화한 것이 내사산(동: 낙산, 서: 인왕산, 남: 남산, 북: 북악산) 테마였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외사산(동: 아차산, 서: 덕양산, 남: 관악산, 북: 북한산)으로 확장시켰다. 내사산, 외사산의 테마가 종료되니 새로운 주제에 대한 갈증이 일어났다. 그러다 목탁을 치듯 무릎을 쳤다. 사찰이 있었던 것이다.
* 불암사 일주문
● 부처님의 형상을 한 불암산
이번에는 불암사 역사트레킹이다. 불암사는 불암산에 있는 사찰로 동불암(東佛巖)으로도 불리는 서울근교의 4대 명찰이다. 4대 명찰을 알기 쉽게 정리를 해보자. 동쪽 - 불암사, 서쪽 - 진관사, 남쪽 - 삼막사, 북쪽 - 승가사.
불암산 역사트레킹은 서쪽편인 서울시 노원구에서 시작하여 동쪽편인 경기도 남양주시로 넘어간다. 그러니 불암산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는 게 먼저다.
필암산이라고도 불리는 불암산(해발508미터)은 이웃한 수락산과 더불어 바위가 많은 산이다. 거북바위, 해골바위, 백바위 등등... 형형색색의 바위들이 자태를 뽐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불암산이라는 명칭도 바위의 형상에서 도출됐다. 정상부 바위의 모습이 마치 송낙을 쓴 부처님의 모습처럼 보인다하여 불암산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송낙이 뭐지? 어려운 명칭이 나왔으니 잠시 정리하고 가자. 송낙은 송라립(松蘿笠)이라고도 불리는데 주로 여승들이 쓰는 모자를 말한다. 이 송낙은 소나무의 겨우살이인 송라를 엮어서 만드는데 얼핏 보면 지푸라기로 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양은 전체적으로 고깔모자처럼 생겼으나 맨 윗부분은 두상에 맞춰져 평평하다.
이렇게 설명해도 감이 잘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 조각 피자를 생각해보시라. 먹음직스러운 조각 피자를 먹으려고 딱 준비를 했는데 누가 냉큼 한 입 베어 먹은 것이다. 조각 피자의 삼각뿔이 없어지고 마음은 아프고... 송낙을 쓴 부처님의 형상을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곳은 불암산의 동쪽편이다. 그러고 보면 불암산은 부처님 자체인 거 같다.
“불암산, 불암산 하는데 이 산이 최불암 산이에요?”
“그럴 수도 있어요. 최불암 선생이 이 산의 명예 산 주인이라고 하더라고요.”
“최불암 선생님은 좋겠어요.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도 하고, 산 주인도 하고요.”
“저도 정말 부러워요. 하하하”
* 불암사 가는길
● 불암산의 다른 이름, 필암산
불암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꼭 나왔던 말들이다. 물론 최불암 선생의 본명은 따로 있다. 최영한. 하지만 우리에게 최불암은 최불암이다. 송해 선생이 본명인 송복희가 아닌 송해로 우리에게 각인된 것처럼.
앞서 언급한 필암산(筆巖山)이라는 명칭도 살펴보자. 필(筆)자는 ‘붓필’인데 이 일대는 문방사우와 관련된 지명들이 나타난다. 인근에 있는 중랑구 묵동이 대표적이다.
묵동은 먹(墨)을 만드는 동네라고 하여 먹골로 불렸다. 먹골배가 생각나시나? 먹는다고 먹골배가 아니라 먹을 만든다고 먹골이었던 것이다.
노원구 월계동에는 ‘벼루연(硯)’자를 쓴 연촌(硯村)이 있었다. 이 곳은 ‘벼루말’이라고도 불렸는데 동네에 벼루처럼 생긴 연못이 있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종이, 붓, 벼루, 묵. 문방사우(지필묵연) 중에 종이만 빼놓고는 다 나왔다. 기왕이면 종이와 관련된 지명까지 만들어서 완전체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일부러 완전체를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문방사우와 관련된 지명을 배치했다면 종이지(紙)와 관련된 동네 이름을 빼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가 가장 먼저 나오니까.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필, 묵, 연의 지명을 쓴 건 이 일대의 지기(地氣)를 꺾기 위한 풍수적인 의도였다는 설도 있다.
* 불암산
● 숲길이 좋은 불암산
서론이 길어졌다. 불암산 역사트레킹은 4호선 상계역에서 시작한다. 바위가 많은 산을 골산(骨山), 흙이 많은 산을 육산(肉山)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따르면 불암산은 골산이다. 설악산이 대표주자로 많이 언급되듯이, 골산은 ‘악’자가 많이 따라붙는다. 치악산, 관악산, 월악산 등등... 이런 산들은 입에서 ‘악’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골산임에도 불암산은 어렵지 않게 탐방할 수 있다. 해발고도가 508미터로 그리 높지 않기도 하지만 딱히 ‘악’ 소리를 입에 달고 오르는 구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트레킹은 정상을 가는 스타일이 아니라 ‘악’ 소리하고는 거리가 멀다.
현재 불암산의 서쪽은 서울둘레길 1코스(수락불암)에 포함되는데 완경사를 따라 걷는 길이 참 좋은 곳이다. 숲도 울창하고,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 많은 이들이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곳이다. 숲이 우거진데다 흙길도 잘 정비되어있어 명품 숲길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렇게 숲길을 따라 걷다 둘레길 전망대에 올라 불암산 정상쪽을 바라보자. 암반면이 노출된 암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위들이 정말 매끈하지 않습니까? 저 위에서 쭈욱따라 미끄럼 타고 싶어요.”
“그래요. 말 나온 김에 시범을 보여주세요.”
재치 9단인 수강생들 앞에서는 농담도 조심해야한다. 그래서 재빨리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저기보세요. 저 높은 바위에 뭐가 매달려있어요. 그리고 또 움직여요.”
“정말 그러네요. 저거 사람이에요? 어떻게 저길 올라갔데요.”
그곳은 학도암장이다. 그렇게 움직이는 이들은 암벽등반을 하는 이들이다. 로프에 몸을 싣고 암벽을 타는 이들의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인다. 하지만 너무 멋있어 보인다. 필자는 암벽을 탈 용기가 없다. 그냥 걷는 게 좋다. 그래서 트레킹을 한다. 참고로 학도암장 정상부에서 조금만 더 이동하면 신라 시대에 만든 불암산성을 만날 수 있다.
바위가 많은 산은 사람들을 상상의 날개를 펴게 만든다. 바위의 형상이 조금이라도 무언가와 비슷하다면 해당되는 이름이 붙게 된다. 해골바위, 거북바위, 범바위 등등... 거시기한(?) 바위도 있다. 남근석이나 여근석이 바로 그것이다. 불암산에도 남근석과 여근석이 있는데 그 모양새가 꽤 사실적이라는 게 중론이다.
더군다나 두 바위가 그리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여 음양의 조화를 제대로 펼치고 있는 모양새다. 다른 지역에는 남근석만 있거나 반대로 여근석만 있어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불암산은 그걸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 천보사: 대웅전과 코끼리바위
● 하늘의 보물을 품은 천보사
이제 천보사 방면으로 이동한다. 불암산은 필암산 이외에도 천보산(天寶山)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천보산이라는 명칭은 세조가 지었다고 한다. 세조가 이 일대를 유람하다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되어 천보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물음표부터 떠오른다. 불암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 ‘천보산’이라는 명칭을 가진 산이 두 개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유명한 회암사지가 자리 잡고 있는 양주의 천보산이고, 다른 하나는 의정부의 북쪽에 위치한 천보산이다. 이 둘은 하나의 맥으로 연결되어 있긴 한데 그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다.
해발고도도 다르다. 양주의 천보산이 432미터이고, 의정부 천보산이 337미터이다. 이미 기존에 천보산이라는 명칭을 가진 산이 있는데 굳이 세조가 또 천보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이야기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가람을 품고 있는 산의 명칭이 어찌됐든 천보사는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사찰이다. 하늘의 보물을 품고 있는 있다는 뜻 아닌가.
천보사는 천연보궁(天然寶宮)이라고 불린다. 법당 뒤쪽에 병풍처럼 펼쳐진 코끼리바위가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병풍바위처럼 비교적 평평한 암석면에는 마애불을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창 선운사 마애불을 생각해보시라! 하지만 천보사는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자연암석을 부처님으로 보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천연보궁이라고 칭한다.
“여러분 눈을 크게 뜨고 한 번 바라보세요. 저 바위에 부처님이 깃들어 계신데요.”
“잘 안 보이는데요.”
“마음속에 불심이 없으셔서 그런 거에요. 불심이 있으면 보입니다.”
“곽작가님은 보이세요? 설명 좀 해주세요.”
“아니... 제가 사실은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
“피이... 자기도 못 알아보면서.”
그랬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더라도 부처님이 보이지 않더라. 물론 근래에 새겨놓은 석불좌상은 잘 보였다. 하지만 천연보궁에 깃든 부처님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필자에게는 부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불심이 없었던 것이다.
- 모든 돌은 그 내부에 조각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 조각가의 일이다.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말이다. 이 말에 의하면 모든 바위는 부처 바위가 될 수 있다.한낱 중생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천보사 코끼리바위에서 육안으로 부처님을 찾기보다는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게 더 좋을 거 같다. 아니면 바위에 ‘자비’ 두 글자를 그려 넣어도 좋을 것이다. 조각이든 글씨든 뜻이 통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거대한 코끼리 바위를 품고 있는 천보사는 그 자체로 절경이다. 그 아름다운 사찰에서 내려 보는 풍광도 아주 시원스럽다. 정말 말 그대로 하늘의 보물을 품고 있는 사찰이 맞다. 사찰을 떠나기 전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천보사 5층 석탑을 꼭 보고 오자. 천보사의 역사가 짧지 않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천보사
● 서울이 4대 명찰, 불암사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불암사(佛巖寺)로 향한다. 천보사에서 불암사까지는 산길로 연결이 되어 있다. 좁은 오솔길을 걷는 맛이 참 좋다. 그런데 좀 위험한 구간도 있으니 발걸음을 조심하자.
불암사는 지증대사가 후기 신라시대인 헌덕왕 16년(824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불암사는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동불암이라고 불렸다. 서울 근교 4대 명찰은 세조의 명에 의해 지정된다.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재위 기간에 자신의 아들(의경세자)과 손자(인성대군)가 죽는 등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자신도 여러 가지 병치레를 했는데 금강산이나 오대산 같은 강원도 지역의 명산들에서 요양을 했기에 반드시 서울의 동쪽 지역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조가 천보사의 명칭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세조는 그런 시련을 불심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도성밖 사방에 왕실의 발전을 기원하는 4대 명찰을 지정하게 된다. 동쪽 - 불암사, 서쪽 - 진관사, 남쪽 - 삼막사, 북쪽 - 승가사.
불암사에는 보물 제591호 불암사경판이 전해 내려온다. 이중 <석씨원류(釋氏源流)>라는 책을 찍은 목판이 있는데 이 <석씨원류>는 조선 후기 불교의 대중적 확산에 공헌을 했다고 한다. <석씨원류>는 중국에서 간행된 책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제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일반 민중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중간에 그림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이 책은 1631년(인조9년), 정두경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가져왔는데 승려 지습이 1673년에 불암사에서 판각했다. 이후 <석씨원류>가 퍼져나갔고, 사찰 건물의 내외부에 부처님의 행적을 담은 불화가 그려졌다고 한다. 글을 몰랐던 사람들에게 그림만큼 좋은 교화 도구도 없었을 것이다. 성당에 그려진 성화들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1989년 불암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게 된다. 태국에서 3과, 스리랑카에서 4과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진신사리보탑을 건립하게 된다.
- 머리에 송낙을 쓴 부처님의 형상
- 부처님의 행적을 담은 <석씨원류> 목판
- 부처님의 사리를 담은 사리탑
서울의 4대 명찰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만큼 귀한 것들이 많기에 동불암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 하산을 할 시간이다. 제월루 앞에 있는 천보산불암사사적비도 놓치지 말고 보고 가자. 사적비는 1731년(영조7년)에 만들어졌다. 1994년에 만들어진 일주문에도 천보산이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하여 불암산 역사트레킹이 종료가 됐다. 좋은 숲길을 걸으며 귀한 문화유산을 만나서 그런지 마치 하늘에서 보물을 선물 받은 거 같다. 덕분에 즐겁게 역사트레킹을 행했다.
* 불암사
■ 불암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전망대▶ 남근석 ▶ 여근석 ▶ 천보사 ▶ 불암사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4호선 상계역 1번 출구 / OUT: 불암사 ☞ 202번 버스종점에서 6호선 화랑대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음.
보시다시피 각각의 다리들은 그리 길지 않다. 제일 긴 삼천포대교도 한강에 있는 다리보다도 더 짧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다리들을 걸어서 넘어볼까 했으나 시간관계상 시내버스를 타고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이 구간은 총 3.4km로 정도된다. 섬 안쪽 지역까지 포함된 길이다. 어쨌든 아름다운 남해바다를 시내버스를 타고 건넌다는 것이 무척 매력있지 않은가? 남해나 삼천포 주민들은 정말 좋겠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들을 매일 공짜로 볼 수 있으니!^^
언제가는 걸어서 이 다리들을 넘어볼 생각이다. 하긴 남파랑길도 이 다리를 넘어 남해군에서 사천시로 넘어가더군. 일단 버킷리스트로 잠깐 돌려놓을란다.
* 초양대교와 삼천포대교: 왼쪽 다리가 초양대교다. 2014년에 찍은 사진임.
대신 삼동면에서 창선면으로 넘어갈 때 창선교를 걸어서 넘어갔다. 창선교는 앞서 언급한 창선대교와는 다른 교량이다. 하여간 창선교를 걸어서 넘는데 어찌나 바닷바람이 세던지...! 아주 그냥 날라가는 줄 알았다. 덕분에 코에 바람은 제대로 넣었다. ^^
창선교 아래는 지족해협이 흐르고 있는데 이곳은 물살이 무척이나 빠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죽방렴(竹防簾)이라는 우리 고유의 민속 어획법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들어오는 곳은 입구를 크게 하고, 뒤로 갈수록 폭을 줄인다. 물고기들이 모이는 곳에는 대나무를 촘촘히 박아 우리처럼 만든다.
해류의 방향과 반대로 죽방렴을 설치하니 그 안에 있는 물고기들은 지족해협의 급류와 계속해서 맞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 지쳐서 어부의 손에 낚이는 것이다. 물고기들이 계속해서 급류와 싸워서 그런지 죽방렴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신선도가 매우 높고, 그래서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지족해협 죽방렴에는 주로 멸치가 많이 잡힌다.
난 죽방렴을 보면서 갯담이 생각이났다. 갯담은 큰 돌들을 바닷가에 담처럼 쌓아 물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한 어업법인데 밀물 때 갯담에서 유영하던 물고기들이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고 갯담에 가둬지게 되는 것이다. 제주에서는 갯담을 원담으로도 부른다. 갯담이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한 어업법이면 지족리의 죽방렴은 해류의 세기에 의존한 고기잡이 방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족해협 일대에는 약 20여개의 죽방렴이 있는데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8월 18일에 명승 71호로 지정되었다.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따로 있기는 하지만 죽방렴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려면 창선교에서 보는게 제일 낫다. 그나저나 죽방렴을 자세히보니 삼겹살 먹을 때 쓰는 집게 같아 보이지 않는가. 집게를 좀 크게 벌려놓은 거 같다. ^^
남해군을 뒤로하고 사천시 시내버스를 타고 삼천포항으로 갔다. 단돈 1400원인가? 그 버스값 내고 아름다운 한려해상을 넘으니 너무 좋더라. 공짜로 버스투어 하는거 같았다.
삼천포에서는 유명한 코끼리 바위를 보려고 했다. 코끼리 바위는 남일대 해수욕장 인근에 있는데 몇해 전 탐방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큰 감흥을 받아서 이번에 다시보려고 갔는디...! 진입로가 공사중이었다. 올 여름에 있은 태풍으로 진입로가 망실됐다는 것이다. 코끼리바위 바로 앞까지 가려면 2021년 5월까지 기다려야 할 거 같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안전하게 다시 탐방로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이렇게하여 6일간의 경남 서부권 여행이 종료됐다. 이번 여정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보약같은 여행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어찌나 좀이 쑤시던지... 그러다 여행을 하고나니 개운한 감이 드는게 아닌가. 나도 어쩔 수 없는 방랑자인 거 같다. 맞아, 나 여행 좋아해!^^
*** 지난 11월 22일부터27일까지, 6일간 경상남도 서부권을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함양 ☞ 거창 ☞ 남해 ☞ 삼천포(사천)
11월 26일. 경상남도 남해군에서의 일정이 시작됐다. 남해에서는 보리암 탐방을 가장 중요한 일정으로 잡았다. 보리암은 상주면에 있는 금산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금산은 원효대사의 기도처였는데원효대사께서는관음보살을친견하기위해이곳에서수행을했다고 한다.그때당시에는 보광산이라고 불렸다. 그러다 이성계가 이 산에서 기도하였고, 마침내 왕으로 등극을 하였다. 이성계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산 이름을 비단 ‘금(錦)’ 자를 써서 ‘금산(錦山)’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금산은 산악으로서는 유일하게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금산은 빼어난 절경을 품고 있는 것이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기암괴석들을 보시라. 눈이 다 즐거워진다.
그런 금산 정상 아래쪽에 보리암이 자리잡고 있다. 깎아질 듯한 지형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지 보리암은 다른 사찰들과는 다른 가람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기암괴석들과 하나로 혼연일체가 된 느낌이랄까? 예전에 탐방했던 도봉산 원통암이 생각이났다. 다양한 형태의 바위들과 어우러진 원통사의 모습이 보리암 앞에서 떠올랐다.
원통사도 우이암 정상부 아랫부분에 자리잡고 있고, 또한 우리나라 관음사상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는 곳이다. 물론 도봉산 원통사는 보리암보다는 덜 알려져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3대 관음성지는 강화군 석모도 보문사,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 홍련암, 그리고 보리암이다. 서해, 동해, 남해바다를 관음보살께서 살펴주시고 계신다. 더 정확히는 해수관음 성지다. 모두 바닷가에 면해 있으니까.
뚜벅이들은 보리암을 가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보리암을 가려면 남해읍내에서 상주면행 버스를 타야한다. 그리고는 보리암 입구(?)에서 하차한 후 약 30분 정도 복곡 1주차장이라는 곳을 향해 걷는다.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여기서 보리암의 관문인 복곡 2주차장까지 약 7km나 떨어져있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총 9km의 거리를 걸어가야 보리암을 탐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1주차장과 2주차장 사이에 마을버스가 운행되기는 하는데 그건 성수기 때의 일이다. 배차 시간이 있는게 아니라 일정 정도 사람들이 모아져야 운행을 하는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는데 상주면행 버스에서 보리암을 가는 보살님 두 분을 만나 함께 택시에 동승했다. 9km 거리에 택시 요금이 1만원이었는데 셋이 나눠냈다. 난 3천원 냈다. ㅋ
사찰 탐방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보리암은 한 번 쯤 방문해보시면 좋을 거 같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암괴석과 조화를 이룬 가람이 이색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리암 해수관음상 앞에서 바라보는 남해바다의 모습은 정말 절경이다. 속이 다 시원해진다.
하지만 너무 유명해서 그런가? 조금은 어수선하다. 산 꼭대기에 있는 사찰에 사람들이 붐벼서 좀 당혹스러웠다. 이런 말을 해서 좀 그런데... 마치 유원지 같았다.
* 보리암 3층 석탑: 왼쪽으로 해수관음상이 보인다.
마음이 거시기해서 일부러 상주은모래해수욕장으로 길을 잡고 내려갔다. 이곳은 금산 등산로로 향하는 길이기도 한데 상당히 경사가 심했다. 그래서인지 동굴인 쌍홍문 부근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 이 맛이지! 이렇게 호젓하게 탐방하려고 그 멀리 남해까지 온 거잖아!
보리암에서 금산 등산로 입구까지는 약 2km 정도인데 무척 가파르다. 하지만 등산에 자신있는 분들이라면 한 번 해볼만 할 것이다. 택시 1만원이 없는 분들이라면 그쪽으로 가시는 것도... 나도 다음에는 금산 등산로로 올라가 볼 생각이다. 다리에 파스 좀 엄청 뿌리겠구먼~^^
상주은모래해수욕장까지 다시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그냥 걷기로 했다. 어차피 해수욕장까지는 약 2~3km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도로옆을 지나가는 길이니 조심해야 한다. 참고로 금산 등산로 앞에 정차하는 버스는 복곡주자장도 지나가고 상주은빛해수욕장도 지나가는 버스다. 그 버스가 그 버스다.
상주은빛해수욕장에 가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렇게 바다가 보고 싶었는데... 결국 바다에 온 것이다. 모래사장도 어쩜 그렇게 좋은지 느긋하게 음미하면서 걸었다. 이토록 여유롭게 겨울바다를 걸어본 것이 얼마만인지!
남도라서 그런지 겨울인데도 바닷바람이 살랑거린다. 그 바람결이 좋구나!
*** 뚜벅이들을 위한 금산 보리암 가는법
A. 복곡주차장 방면으로는 가는 방법
1. 남해군 읍내에서 상주면행 시골버스 탑승. 복곡주차장 입구에서 하차. 이때 버스기사에게 꼭 보리암으로 간다고 말을 해야함.
2. 진행방향은 이렇다. 주차장 입구 -> 제1 복곡주차장 -> 제2 복곡주차장.
3. 제1 복곡주차장까지 걸어간다. 거리는 약 2km 정도.
4. 여기서 제2 복곡주차장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탄다. 제1주자창에서 제 2주차장까지는 약 7km 정도임.
주의할 점이 있음. 문제는 해당 셔틀버스가 비수기에는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차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 일정 정도 사람이 모이면 운행되는 버스임.
5. 정 안되면 보리암 경내까지 걸어간다. 예전에는 비포장 임도였는데 지금은 포장이 되었다. 총 9km 정도를 이동하면 된다. 약 3시간 정도 잡고 걸어간다.
6. 시골버스에서 하차 한 지점에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있음. 제2 복곡주차장까지 택시비 1만원임.
B. 금산 등산로로 올라가는 방법
1. 역시 남해군 읍내에서 상주면행 시골버스 탑승해서 금산 등산로 입구에서 하차. 이때도 금산 등산로 입구에서 내리겠다고 이야기를 해야 함.
2. 진행방향은 이렇다.등산로 입구 -> 도선바위 -> 쌍홍문 -> 보리암
3. 등산로 입구에서 보리암까지는 계단도 많고 가파르다. 거리는 약 2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넉넉하게 2시간 정도 잡고 산행을 하면 좋을 듯싶다.
4. 가팔라서 그런지 등산로 입구에서 보리암까지는 아주 한적하다. 산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갈 수 있으니 너무 걱정은 마시고. 필자도 나중에는 이 코스로 올라갈 생각이다. 올라갈 때는 화끈하게 올라가야지~^^
5. 참고로 금산의 높이는 해발 700미터다. 보리암은 금산의 9부 능선 쯤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