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안산 일대는 역사트레킹의 단골 메뉴 같은 곳이다. 진짜 여러번 탐방을 했다. 강의에 참여하신 분들도 필자를 따라서 이미 발걸음을 여러번 하신 분들도 있을 정도였다. 무슨 말이냐? 본 성북50플러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강의에는 필자를 따라서 강의를 신청하신 분들이 반 이상이다. 그럼 필자는 팬덤을 이끌고 다니는건가?^^
그렇게 눈 감고 갈 수 있는 서대문 안산이라 새로울 게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시건방이었다. 천년 고찰 봉원사에서는 '불우리' 혹은 '노주석'이라고도 불리는 정료대를 보았고, 메타세쿼이아 숲에서는 연두빛의 파릇파릇한 새순을 보았다.
그리고 트레킹팀을 감탄하게 만든 연희숲속무대의 벚꽃길! 통상적으로 4월 초순에 피는 벚꽃이라 3월 하순에 갔으니 그저 맛만 보겠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올해는 벚꽃이 일찍 펴서 이날 연희숲속무대는 온통 다 꽃 천지였다. 쉽게 볼 수 없다는 능수벚꽃까지 만개를 했으니 정말 환상적이었다.
안산을 너무 잘 알아서 그랬나? 중간에 시건방을 떨어 매끄럽지 않은 일이 발생했는데 연희숲속무대에서 꽃을 보며 다 털어버렸다. 트레킹팀들 모두 다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휴~ 다행이었어!^^
잘 아는 길이라고 시건방을 떨지 말자. 매너리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아직 부족함이 많지 않은가? 아직까지 갈 길이 아주 멀구나!
ps. 1강 후기는 성북50에 동영상으로 올려져 있어 따로 작성하지 않았음. 2강부터 계속 작성할 예정임.
* 정료대: 불우리, 노주석이라고도 불린다.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석물인데 봉원사에 있더라. 여기서 잠깐! 서울 강남에 있는 봉은사가 아니다. 봉원사다.
이날은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과 신륵사를 탐방했다. 한 달도 더 넘은 여행기를 이제서야 작성한다. 너무 게을렀어...ㅋ
여주는 세종대왕께서 먹여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곳곳에 세종대왕의 이름을 끌어와 네이밍을 했더라. 세종여주병원, 세종도서관... 하물며 훈민정음 한글교회라는 곳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피식하며 생각이 들더라.
"이 도시는 아직도 세종대왕께서 통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세종대왕께서 잠들어 계시는 영릉(英陵)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446년 세종의 부인이었던 소헌왕후가 숨을 거두자 헌릉 서쪽편에 능을 마련한다. 헌릉은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 묻힌 곳인데 강남구와 서초구에 걸쳐 있는 대모산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효자였던 세종은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래서 소헌왕후의 능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마련한다. 수릉은 살아있을 때 미리 봐두는 임금의 무덤을 말한다.
우리 옛 풍습에는 윤달에 수릉을 미리 봐두거나 수의(壽衣)를 만들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다. 미리 무덤가를 마련하고, 죽을 때 입을 옷을 만들어놓으면 오래산다니... 윤달이 가져다주는 독특함이라고 해야 하나?ㅋ
세종대왕은 실제로 대모산, 즉 헌릉 서쪽편에 묻히게 된다. 최근에 크게 언론에 오르내린 서초구 내곡동이 바로 그곳이다. 소헌왕후와 합장을 했는데 조선 왕릉 중에서는 최초의 합장릉이었다. 영릉은 1450년에 들어선다. 지금은 그곳에 국가기관이 들어서 있어서 일반인들은 접근을 할 수가 없다.
세종대왕은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헌릉 옆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평안함은 19년 후인 1469년(예종 1년) 깨어지고 만다. 세종이 승하하고 난 후 연이어 안 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뒤를 이은 단종도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게 된다.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도 불행을 피하지는 못했다. 장남이었던 의경세자가 20살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도 잦은 병치레를 겪어야 했다.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기세등등하게 왕좌에 오른 세조였지만 재위 기간은 13년에 불과했다.
그렇게 흉사가 거듭되자 영릉은 예종 원년에 멀리 여주땅으로 천릉(遷陵)을 하게 된 것이다.‘옮길천(遷)’자에서도 보듯 천릉은 이장(移葬)을 뜻한다. 천장(遷葬)이라고도 부른다. 세종대왕의 능을 옮겼지만 흉사는 멈추지를 않았다.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숨을 거두웠기 때문이다. 예종은 세조의 장남이었던 의경세자의 아들이었다.
능을 옮긴다고 불길한 일들이 없어지겠는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 사람의 문제다. 아무리 천하제일 명당에다 이장을 하고, 용한 무당에게 굿을 시키더라도 사람이 못 됐으면 흉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쁜놈이 나쁘게 되는게 세상 이치 아닌가! 인생사 자업자득, 인과응보!
* 세종대왕상
여기서 다른 왕릉들의 위치를 살펴보자. 거의 수도권을 벗어나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종이 묻힌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은 예외다. 경종이 묻혀 있는 의릉 같은 경우에는 성북구에 자리잡고 있는데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4km도 되지 않는다.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은 그보다도 더하다. 3km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울을 중심으로 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왕들의 능행차 때문이었다. 능행차는 하룻길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만나러 갔던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가 1박 2일이었듯, 꼭 원칙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경강선으로 편하게 전철을 타고 갈 수 있다해도 여주는 멀긴 멀다. 걸어서 하루에 다녀올 수 없는 길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다. 뱃길이 있지 않은가! 여주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그 물결을 타고 가면 하루 안에 한양에 닿을 수 있다. 육로든 수로든 하루거리면 되지 않은가. 어쨌든 뱃길로 하루거리라 왕릉을 쓰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거 꼼수 아닌가? 어째 구렁이가 스리슬쩍 담 넘어 가는 거 같다.^^
세종대왕의 능답게 영릉(英陵)은 다른 왕릉들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한다. 500미터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또다른 영릉(寧陵)과 비교를 해보면 바로 알게 된다. 영릉(寧陵)은 제17대왕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의 능이다. 이 영릉도 천릉을 했는데 원래는 구리시 동구릉에 있었다. 세종대왕릉이나 효종의 능이나 둘 다 자리 이동을 한 셈이다.
영릉(寧陵)은 봉분이 두 개인 쌍릉 형식인데 좌우가 아닌 위아래로 봉분이 늘어서 있다. 무척 독특한 형식인데 경종의 능인 희릉도 위아래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 달리 세종대왕의영릉(英陵)은 합장릉이다. 그래서 외형적으로는 단릉과 유사하다.
세종대왕릉은 규모가 크기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좋다. 능 입구에는 세종대왕 시기에 발명된 각종 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그것들을 관찰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또 효종의 능까지 숲길로 연결되어 있으니 꼭 같이 탐방해보자. 왕릉의 숲길을 한들한들 걸어보는 것이다.
세종대왕도 만나고, 왕릉 숲길도 걷고...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세종대왕릉: 능 바로 옆까지 올라갈 수 있어 석물들을 관찰하기에 좋다.
* 세종대왕릉
* 효종릉: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세종대왕릉에 비해 한적하다.
* 재실: 영릉(효종의 능)에 있는 재실이다. 영릉 재실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지난 2007년에 보물 1532호로 지정되었다.
*영릉(寧陵): 효종의 능인 영릉은 좌우가 아닌 상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왼쪽의 봉분이 효종의 능이고, 오른쪽이 왕비인 인선왕후의 능이다.
미륵대원지 옆으로는 큰 마방터가 있다. 이전편에도 언급했듯이 미륵대원은원(院)을 겸하고 있었다. 옛 통신교통 수단인 역원이 있었다는 건, 그 앞으로 길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미륵대원지 앞으로는 하늘재라는 고갯길이 있다.
계립령 혹은 지릅재라고도 불리는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 이사금(왕) 때인 서기 156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보니 하늘재는 문헌상으로 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 됐다. 1900년도 더 지난 아주 오래전에 고갯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하늘재를 중심으로 미륵대원지가 있는 곳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이고, 반대편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다. 하늘재를 두고 한쪽은 미륵신앙을 받들고, 반대편은 관음신앙을 중시하는 모양새다. 그러고보면 하늘재는 불교 문화 전파에 중요한 행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방터를 둘러 본 후 하늘재 표지석 앞에 있는 3층 석탑과 불두(부처님 머리)를 친견했다. 불두만 있는 것은 아무래도 석불을 만드려다 사정상 중지가 된 것 같았다. 얼핏봤을 때는 이스턴섬에 있는 모아이 석상처럼 보였다. 아니면 제주도의 돌하루방루방처럼 보이던가...^^
3층 석탑의 위치도 좀 애매했다. 하늘재 표지석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마방터 외곽이라 미륵대원지와는 거리가 좀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땅의 기운을 채우기 위한 비보의 의미로 세웠다는 게 중론이라고 한다.
* 3층석탑: 고려시대 만들어졌다. 하늘재 표지석 인근에 서 있다.
* 불두: 오른쪽에 불두가 있다.
자 이제 본격적인 하늘재 트레킹에 나서보자. 입구에서 하늘재 정상까지는 약 2km 정도인데 경사도가 급하지 않아 트레킹 초심자들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울창한 숲길 사이를 걷다보면 어느 순간 콧노래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만큼 걷기도 편하고 탐방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옆쪽으로는 계곡물도 흐르고 있어 나름 여름에도 시원하게 걸을 수 있을 거 같다.
하늘재를 가다보면 '연아 닮은' 소나무가 있으니 한 번 눈여겨 보자.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그런 명칭을 붙였는데... 정말 닮았나?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드디어 하늘재 정상에 도착했다. 해발이 525미터다. 출발점 고도가 높아서인지 겨우 2km를, 그것도 순하게 이동했는데 그 높이에 닿은 것이다. 하늘재에 닿으니 시야가 넓어졌다. 옆쪽으로 암반면이 드러난 포암산이 반겨주고 있었다. 역시 돌산은 보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이다. 물론 거기를 올라가면 힘들지...^^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라 그런지 당연히 산신각이 있었다. 간단히 합장을 하고 찬찬히 그림을 살펴보는데... 중국풍이었다. 기왕 그리는 거 산신령님은 우리풍으로 그리는게 맞지 않나? 호랑이도 백두산 호랑이로 그려야 제 맛이지. 호랑이가 뱅골 호랑이였던 거 같았다...ㅋ
상주쪽으로 넘어갔다. 도를 넘은 것이다. 그런데 상주쪽 하늘재는 아스팔트 길이었다. 더이상 걸을 이유가 없었다. 단전된 느낌이었다. 인근에 있는 문경새재는 그렇게나 잘 관리를 하면서... 사람들은 흙길, 숲길을 걸으려고 하지 아스팔트를 걸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당연한 것이다.
하늘재는 조령, 즉 문경새재가 개통되면서 그 위치를 상실해간다. 문경새재는 조선 초기 서울에서 동래까지 영남대로가 만들어지면서 함께 개통이 된 것이다.
삼국 항쟁기에는 온달 장군이 '계립령 서쪽이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할만큼 전략상으로 무척 중요했던 곳. 고려 후기 공민왕이 홍건적들의 침입을 피해 몽진을 할 때 넘었던 그 고개. 망국의 한을 품은 신라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도 눈물의 발걸음을 했을 그 하늘재!
이렇듯 이 땅의 고개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했고, 그 발걸음들은 수많은 이야기거리들을 길 위로 뿌려댔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는 발걸음을 미륵리석조여래입상은 큰바위 얼굴처럼 묵묵히 지켜보고 계셨겠지!
이날은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미륵대원지와 계립령을 탐방하러 갔다. 이 답사기는 3월 31일에 작성하고 있으니 거의 20일 만에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게으른 것도 있지만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다. ^^
미륵대원지는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에 자리잡고 있다. 정확히는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이다. 서울에서 수안보까지 다이렉트로 도착하는 시외버스를 타면 가장 좋다. 하지만 그 버스편이 많지가 않다. 수안보의 명성이 예전만 못한 것이다. 차선책이 있다. 동서울이나 강남터미널에서 충주터미널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타는 것이다. 생각보다 버스편이 꽤 많아서 좋다. 이후 충주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시내버스를 탄다. 수안보행 시내버스도 적은편이 아니다. 어쨌든 수안보는 미륵대원지를 가기 위한 전진 기지가 되는 셈이다.
2016년이었다. 당시 필자는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이라는 곳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를 하고 있었다. 보건, 위생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트레킹을 리딩하는 것이었다. 문경새재 트레킹을 리딩하는 것이었는데 다른 교육 프로그램보다 필자의 트레킹 강의가 훨씬 더 인기가 많았다. 수강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우천시에도 우비를 뒤집어 쓰고 문경새재를 누볐던 것이 기억이 난다. 당시 강사료도 짭짭했는디...ㅋ
갑자기 이렇게 문경새재에 대해서 언급하는 건 이유가 있다. 문경새재의 전진 기지도 수안보이기 때문이다. 수안보에서 미륵리 방면으로 가면 미륵대원지가 나오고, 괴산군 연풍면 연풍리 방면으로 가면 문경새재가 나온다. 문경새재를 두고 충북 괴산군 쪽에서는 연풍새재라고 부른다.
미륵대원지든 문경새재든 둘 다 아름다운 곳이다. 국내여행을 좋아하시고 트레킹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두 곳 모두 방문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륵대원지는 하늘재라고도 불리는 계립령이 있어 이 둘을 묶어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수안보에서 미륵대원지까지는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뚜벅이가 택시를 타다니! 그래도 시간 관계상 어쩔 수 없었다. 중간에 월악산 국립공원을 지나가는데 눈이 호강할 정도로 아름다운 숲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 울창한 숲길에는 인적도 없고 차편도 드문드문이라 참 묘한 느낌이 들더라.
미륵대원지에 들어섰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향을 향하고 있다는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을 친견할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드디어 이곳에 왔구나!
'에이~ 이게 뭐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사중이었다. 공사장 가림막 넘어 곁눈질로 친견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유일의 북향 석불을 보러왔더니만 곁눈질이라니!
*미륵대원지: 미륵대원지에 있는 대표적인 석물들을 한 컷에 담아보았다. 미륵리5층석탑, 미륵리석등,미륵리사각석등.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는 충북과 경북을 잇는 하늘재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원(院)을 겸하고 있는 특별한 형태의 절이었다. 원은 공적인 임무를 띈 관리나 상인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는 공공 숙소를 말한다. 원은 대개 말을 다루는 역(驛) 인근에 설치하였다. 이를 두고 역원(驛院)제도라고 불렀다. 역원은 30리마다 세워졌는데 중앙의 행정력을 지방까지 빠르게 전달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조치원, 퇴계원이 바로 그 역원이었다. 그래도 가장 유명한 지명은 어디? 이태원이다. 우리가 아는 그 이태원! 이태원이 원래 클럽이 즐비한 곳이 아니었다니깐~!^^
보물 제96호인 충주미륵리석조여래입상은 미륵대원의 본존불이었다. 미륵리석불도 고려 초기에 만들어져서 그런가? 키가 엄청 크시다. 무려 10.6미터에 달하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인 관촉사 은진 미륵이 약 18미터에 달하는 거에 비하면 작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산 중에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실제로 석불 뒤편에 올라서면 가까이로는 북바위산 일대가, 멀리는 월악산의 영봉 일대가 보인다. 그 광경을 보면 석불이 북향을 향하는게 아니라 주위 산들을 굽어보시는 거 같더라.
물론 이런 장면은 사진 속에서 봤다. 지금은 공사중이니까...
미륵대원은 석굴사원이다. 거대한 암석을 쪼개서 굴 형식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석굴 사원이다.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감실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거대한 충주미륵리석조여래입상을 모신 것이다. 처음에는 지붕 역할을 하는 목조 건축물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되는데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돌들이 석불에 둘러져 있으니 석굴사원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더불어 공사 이전에는 뒤편까지 올라갈 수 있어 석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선에는 월악산 영봉 일대가 보이는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공사중이라 석불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미륵리 석불의 강한 기운을 느끼고파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그런 아쉬움은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에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 꿩대신 닭이라고 해야 하나?
보물 제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은 높이가 6미터에 달한다. 바로 뒤에 있는 석불도 크고 석탑도 크다. 얼핏보면 6층 석탑같은 이 석탑의 기단은 자연석에 가까워보인다. 앞쪽에 있는 돌거북처럼 그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다듬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과 옥개석을 올려 지금의 석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1층 탑신은 기단처럼 아주 거대하지만 2층 탑신은 확 줄어든 모습이 정교성을 떨어뜨린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뒤에 있는 석불도 디테일은 떨어지니까. 필자는 그런 덜 정교하고 더 순박한 불교 미술도 좋아한다. 정교한 것은 정교한대로 투박한 것은 투박한대로 눈길이 가는게 우리들의 시선이 아니겠는가.
* 미륵리석조여래입상: 옛날 사진을 필자의 카메라로 찍었음.
미륵리사각석등, 미륵리석등, 거북바위, 온달장군 공기돌 등등... 미륵대원지는 협소한 공간에 문화재들이 오밀조밀하게 뭉쳐있고, 옆쪽으로는 새로 지은 절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폐사지와는 달리 분주함이 느껴졌다. 다른 페사지에서 느꼈던 허허로움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띄엄띄엄이지만 계속해서 탐방객들이나 기도객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곳에 문화해설사가 배치되었을까!
다른 페사지에도 보물이나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다. 국보급 문화재를 품고 있는 페사지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도 어김없이 허허로움이 강하게 밀려든다. 넓디넓은 공간에 덩그러이 남아 있는 석조물들이 세상사의 흥망성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 같아서다.
하지만 미륵대원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으니 폐사지의 느낌이 덜하다는 것이다. 역시 사람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폐사가 된 것도 사람 때문이겠지만 그 곳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도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끈 것은 누가뭐래도 미륵리 석불이다. 다른 폐사지에는 석불이 없으니 덜 할 수밖에 없지만 미륵대원지에는 석불이 있으니 발걸음이 분주할 수밖에... 그렇게 필자의 발걸음을 이끈 것도 미륵리 석불 때문이었지.
미륵대원지 옆쪽으로는 넓은 마방터와 3층 석탑, 또 불두(부처님 머리)가 있다. 그 옆쪽으로는 하늘재 입구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 거북바위: 미륵대원지의 마스코트 같은 거북바위. 형태를 봐서는 당연히 등에 비석을 올려놓았을 거 같은데 인근에서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이 형태가 최종결과물인 셈이라 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 미륵리석조여래입상과 5층석탑:빨리 공사가 끝나길 기원해본다.
* 미륵리석등
* 미륵리사각석등
* 공기돌: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돌. 그럼 온달장군은 헤라클라스인가? 충북 일대에는 온달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아주 많이 있다.
* 미륵대원지 가는법
1.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시외버스 탑승. 편수가 많지 않음. 약 2시간 40분 소요. 이후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 탑승. 거리는 약 11km임.
2. 서울강남터미널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충주터미널행 고속버스(시외버스) 탑승. 이후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 탑승.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는 충주시내에서 출발하고 수안보를 경유함. 충주버스터미널에서 미륵대원지까지는 약 33km임.
***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6일간 강원도 일대를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인제 ☞ 속초 ☞ 양양 ☞ 강릉 ☞ 평창 ☞ 원주
* 법천사지 당간지주
2021년 2월 5일 금요일.
강원도 동계여행의 마지막 날. 이날은 원주에 있는 폐사지 여행으로 테마를 잡았다. 남한강변을 끼고 있는 원주 일대에는 예전에 큰 사찰들이 번창을 했었다. 하지만 이후 억불정책, 전란 등으로 인해 사찰들은 폐사가 된다. 이날은 그렇게 폐사가 된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를 찾아나섰다. 이 두 곳은 모두 원주시 서쪽에 위치한 부론면에 자리잡고 있다.
먼저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를 찾았다. 법천사(法泉寺)는 한자에도 보이듯 '진리가 샘물과 같이 솟는다'라는 뜻을 가졌다. 남한강을 따라 강원, 충청, 경기의 물산들이 이동을 했던 이 일대에는 흥원창이라는 큰 조창이 있었다. 고려시대 13개 조창 중에 하나로 설치된 흥원창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그 기능이 이어져 마포 일대에 있던 경창까지 세곡과 공물들을 수송했다. 그런 남한강 수계를 이용한 조창과 그에 따른 물산의 집산은 이 일대에 큰 사찰들이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물적 동력이었을 것이다.
먼저 당간지주를 찾아보았다. 법천사지도 다른 페사지들처럼 허허벌판에 있는터라 평지에 우뚝 서 있는 당간지주에 첫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다. 사찰이 융성했을 때도 지금처럼 사찰이 망했어도 당간지주는 사람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사실 당간지주가 없었다면 좀 헤맸을 것이다.
길이가 약 4미터 정도 되는 법천사지 당간지주는 후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별다른 장식없이 소박한 외형을 드러내고 있는 당간지주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20호이다. 좀 거시기하지 않은가? 천년의 세월을 넘긴 문화재가, 더군다나 비교적 외형이 잘 보전된 당간지주가 도지정 문화재라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히 보물일 줄 알았는데 말야.
당간지주를 뒤로 하고 지광국사탑비를 보러 갔다. 원주 출신인 지광국사는 속명이 원해린이었다. 승통, 왕사, 국사 등의 큰 칭호들을 받은 지광국사는 당대 제일의 고승이었다. 1058년(문종12)에 국사에 오른 그는 1070년에 법천사에서 열반에 든다. 법천사는 지광국사가 출가를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탑비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전체 높이가 4.5미터에 달하는 지광국사탑비는 정교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문화재다. 비신을 받히고 있는 용같은 거북이는 당장이라도 발걸음을 뗄 것처럼 힘에 넘친다. 하지만 그래봐야 거북이 걸음이지...ㅋ
맨 상단의 이수 부분은 또 어떤가. 탑의 상륜부처럼 보주를 장식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비신 옆쪽에 용을 새겨놓았다. 비신 옆쪽에 조각을 새겨놓는 비석은 그리 흔한게 아니다.
그 규모나 정교함 때문인지 지광국사탑비는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탑비와 함께 지광국사탑(국보 101호)이 있었는데 지금은 부재중이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일본인이 가져갔다가 3년 후에 다시 돌려받아 경복궁 뜰에 전시하였다. 그러다 보존처리를 위해 대전시에 있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전됐다. 언론 보도를 보니 이제 곧 있으면 진짜 원래 제자리인 법천사지로 돌아올 예정이란다.
지광국사탑이 돌아온다면 다시 한 번 법천사지로 가야하나? 안 갈 수가 없잖아!^^
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법천사지 일대를 둘러보았다. 황량한 벌판 위에 전각터와 행랑터가 눈에 들어왔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건물을 지어볼까? 옛 법천사는 분명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옛 영광은 사라지고 이제 쓸쓸한 터만 남아 있다. 그 적막한 터 위로 겨울 바람이 슬쩍 지나간다. 다시 옷깃을 부여잡고 거돈사지로 이동을 한다.
* 지공국사현묘탑비
* 지공국사현묘탑비:비신 옆면에 용이 새겨져 있다.
* 법천사지
거돈사지(居頓寺址)는 부론면 정산리에 있는데 법천사지와는 약 4km 정도 떨어져 있다. 두 곳은 원주역사문화길이라는 도보여행길로 연결되어 있어 트레킹 행할 수 있다. 포장된 농로길과 비포장길을 걷는 것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당간지주가 법천사지의 길잡이였다면 거돈사지에서는 삼층석탑(보물 제750호)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높이 5.4미터에 달하는 거돈사지 삼층석탑은 안에 흙을 채운 토단 위에 세워져 그 높이가 더 두두러진다. 1층 비신은 길쭉한데 갑자기 2층부터는 확 줄어드는게 눈에 띈다. 또 탑 앞에 있는 배례석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탑 자체에는 딱히 화려한 장식이 없다. 대신 후기 신라시대 양식을 잘 계승한 탑이다.
3층 석탑 뒤로는 본당 건물터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 큰 돌들이 쌓여진 것이 보인다. 이것은 돌로 만든 불대좌이다. 불대좌면 불상을 놓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왜 건물 중간에 있었을까? 예전에는 본존불이 모셔진 본당 건물은 일반 신도에게 개방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본존불을 본당 중앙에 안치해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조선시기에는 본당도 일반 신도들이 와서 종교활동을 행하게 됐고 불대좌는 건물 후미로 자리를 잡게 된다. 공간 효율성면에서 당연한 위치변동이었다. 이후 불대좌는 수미단으로 바뀌게 된다.
건물 한 가운데 떡하니 있는 거대한 불대좌만 남아 있다는 건 누군가 그 위에 있는 불상을 가져갔다는 뜻인가? 원래 있어야 하는 것의 부재를 지켜봐야 하는 게 폐사지 여행의 본질이다. 그런 부재감을 계속 확인해서 그런가? 폐사지 여행은 항상 허전함이 그림자처럼 뒤따라 다닌다. 그런 허전함 허허로움도 여행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 거돈사지 3층석탑
* 불대좌
석축 위쪽에 있는 원공국사탑을 보러갔다. 원공국사는 법명이 지종이었는데 고려 광종 때 큰 활약을 했던 승려였다. 이후 1018년 현종 때 거돈사에서 입적을 했다. 그 원공국사를 기리는 탑이 세원진 것이다.
-찰칵찰칵
사진을 찍으며, 피식 웃었다. 사실 거돈사지에 있는 원공국사탑은 가짜다. 오리지널은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진짜 원공국사탑은 보물 제 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산 비봉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 사례와 유사하다. 오리지널은 보존을 위해 박물관에 있고, 원래 그 자리에는 카피본을 세운 것이다.
어쨌든 카피본이지만... 원공국사승묘탑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팔각 부도탑으로 그 외형이 참 멋스럽다.
마지막으로 원공국사탑비를 보았다. 보물 제78호인 원공국사탑비는 법천사지에 있는 지광국사탑비보다는 소박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 즉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은 역시나 특이하게 생겼다. 거북이의 귀가 커다랗고 독특해서 얼핏보면 해마처럼 보인다. 또 얼굴은 어떤가. 손오공처럼 보인다. 언발란스한데 이상하게 합쳐놓으니 서로 잘 어울린다. 우리 선조들의 해학미가 잘 녹아있어서 그런 것일까?
이렇게하여 원주 부론면 법천사지, 거돈사지 탐방이 종료가 됐다. 아울러 강원도 동계여행도 무사히 종료가 됐다. 얼음트레킹(아침가리골)에서부터 바람트레킹(선자령), 폐사지 탐방까지... 여러모로 참으로 유익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여행 내내 동장군과 옥신각신 했다는...ㅋ
***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6일간 강원도 일대를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인제 ☞ 속초 ☞ 양양 ☞ 강릉 ☞ 평창 ☞ 원주
2021년 2월 4일 목요일.
이날은 바람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선자령에서 트레킹을 행하는 날이다. 전날에 이미 평창군 대관령면에 숙소를 잡아서 좀 여유로웠다. 대관령면은 원래 도암면이었다. 하지만 대관령이 워낙 유명하다보니, 2007년도에 그 이름을 대관령면으로 바꿨다. 한반도 지형으로 유명한 강원도 영월의 한반도면도 같은 사례다. 한반도 지형이 워낙 유명세를 타니 2009년에 기존 명칭인 서면에서 한반도면으로 개명을 했다.
전날 밤에 잠이 안 와서 잠시 숙소 밖에 나왔더니 눈이 소북하게 쌓여 있던게 아닌가. 역시 겨울 강원도다웠다. 인적이 끊긴 거리에 가로등 불빛이 외롭게 비추고 있고, 눈은 소북하게 쌓여만 갔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참 묘한 감정이 느껴지더라.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일 선자령을 제대로 보겠구만! 겨울 선자령이면 당연히 눈꽃 세상이 펼쳐져야 하는거 아니야?'
선자령 트레킹의 출발점은 대관령 휴게소이다. 대관령면에 있는 횡계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관령 휴게소까지는 약 6km 정도 떨어져있는데 하루에 4번 마을버스가 운행된다. 6km로도 안되는 거리라서 그런지 버스에 탑승한 지 10분도 안되서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대관령 휴게소는 해발 840m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면소재지보다도 더 쌀쌀한 느낌이었다. 바람도 더 많이 불고. 저체온증이 걱정될 정도로 동장군이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돌아갈 수가 있나!
- 남자는 직진이지! ㅋ
선자령은 대관산 혹은 보현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높이가 1,157m에 달한다. 남쪽에 대관령이 있고 그곳에는 유명한 대관령 양떼목장이 자리잡고 있다. 슬쩍 보니까 추워서 양떼들이 안 보이더만~^^
최고점이 1157고지이지만 시작점이 840고지로 높은데다 길이 순해서 선자령을 오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북한산 둘레길 중에서 어려운 코스 정도의 난이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아웃도어의 비수기인 겨울철에도 사람들이 꾸준히 찾고 있는 것이다. 완경사의 길을 걸으며 눈꽃 트레킹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대관령 양떼목장
* 선자령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문제는 저체온증이다. 사진에도 보이듯 선자령 일대는 풍력발전기가 물레방아 돌듯 '붕붕' 소리를 내며 돌고 있다. 그만큼 바람이 많이 분다는 뜻이다. 선자령 정상 능선 부근은 워낙 바람이 세게 불어 사진을 찍는데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바람이 거세 눈들이 다 휩쓸려 날라가 정상 부근에는 마른 땅이 보일 정도였다. 정상을 조금만 벗어나도 눈이 쌓여있는데...
선자령 트레일은 강릉바우길 1구간이기도 한데 길이가 약 12km 정도된다. 순환형 코스인데 크게 윗길과 아랫길로 나눌 수 있다. 윗길은 능선부를 타고 가는 길이고, 아랫길은 숲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윗길이 아랫길보다는 좀 수월해서 시작점을 삼는 분들이 많은데 필자는 그 반대로 했다. 숲길을 따라 아랫길로 올랐고, 내려올 때는 바람을 맞으며 윗길로 내려왔다. 확실히 숲길에서는 큰 바람을 맞지 않았지만 능선길에서는 태풍같은 바람과 맞서야했다.
바람과 맞서서 이겼는가? 지지는 않았다. 풍차를 향해 내달리는 돈키호테처럼 풍력발전기 사이를 거침없이 활보했다. 사실은 종종 걸음치며 빠르게 걸었다. 추워서...^^
* 선자령 정상석
약 4시간을 잡고 트레킹을 했는데 사진도 찍고 풍광도 보고 하니 4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다시 시작점인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하니 횡계버스터미널로 돌아가는 마을버스편은 이미 끊겨 있었다. 터미널까지 걸어갈까 하다가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비는 9천원이 나왔다. 주행 시간은 7분 정도였다.
이렇게하여 바람의 계곡인 선자령에서 행한 선자령 눈꽃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됐다. 글을 마치기 전에 다시 한 번 언급한다. 겨울 트레킹은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단단히 준비를 하셔야 한다.
저체온증에 대한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내피 개념의 패딩 점퍼 같은 여분의 옷을 챙기면 좋다. 핫팩도 여러개를 준비하면 좋다. 설원을 걷게되니 아이젠과 스패츠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일부 여행객들 중에는 스패츠는커녕 아이젠도 착용을 하지 않고 선자령을 오르시는 분들이 있었다. 좀 위험해보였다.
눈꽃 트레킹은 정말 환상적이다. 하얗게 쌓인 설원을 걸다보면 마음이 다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런 아름다운 장면들을 안전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 선자령 가는 길:마스크 쓰고 한 컷.
* 선자령 정상:인증샷 찍느라 장갑을 안 끼고 사진을 찍는데 정말 손이 시려웠다.
*** 선자령 가는 법
1. 동서울 터미널이나 남부터미널에서 횡계행 시외버스 탑승. 약 2시간 30분 소요됨.
2. 횡계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관령휴게소행 마을버스 탑승. 하루 4편 운행. 이동시간 약 10분.
3. 하산시: 대관령휴게소 ☞ 횡계시외버스터미널행 마을버스는 오후 2시 30분이 막차임. 그래서 일반적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을 함. 요금은 약 9천원.
***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6일간 강원도 일대를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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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3일 수요일.
이날은 강릉에 있는 굴산사지와 신복사지를 탐방했다. 그리고 커피로드로 유명한 안목 해변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캔커피!^^
굴산사는 후기 신라에 유행했던 구산선문 중에 하나였다. 구산선문은 신라말 고려초에 형성된 선종 불교를 칭한다. 9개의 종파가 각각 산을 근거지로 하여 개창을 했다하여 구산선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신라 문성왕 때인 851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굴산사지라는 말처럼 지금은 폐사되었는데 그 시기가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였다고 전해진다.
굴산사지는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 가보면 굴산사지 당간지주가 우뚝 서서 여행자들을 반겨주고 있다. 큰 논들 사이에 당간지주가 위치해 있는데 예전에는 그 논이 다 굴산사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굴산사의 가람이 컸다는 뜻인데 일설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 굴산사의 스님들이 밥을 짓느라 쌀을 씻으면 그 물이 바다로 흘러가 동해바다를 하얗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5.4미터에 달하는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보물 제86호이다. 별다른 장식은 없었는데 자세히보니 만들 때 생긴 정 자국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어 좀 거친면이 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멋이라고 칭할 수도 있겠다.
당간지주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굴산사지 석불좌상을 만날 수 있다. 보호각 안에 있는 석불좌상은 너무 많이 훼손되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면 저렇게까지 심하게 손상되지 않았을텐데... 혹시 누가 일부러 훼손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얼굴 부분은 자연훼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한 절단면이 보였다.
미련하게 범일국사 부도를 보지 못하고 왔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와서 범일국사 부도를 친견해야겠다.
* 굴산사지 당간지주
* 굴산사지 석불좌상
다시 강릉 시내로 가야했다. 일단 구정면 면소재지로 이동했는데 굴산사지에서 면소재지까지는 약 2.5km 정도였다. 바우길 표식이 나와 그것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굴산사지는 도보여행길인 강릉바우길 6구간에 속한다.
오랜만에 강릉 바우길을 걸으니 참 좋더라. 예전에 자전거여행을 할 때 도보가 아닌 자전거를 질질 끌면서 바우길을 이동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2012년 경이었으니 거의 9년 만인가?
그렇게 바우길을 걷다보니 신복사지까지 다다르게 됐다. 굴산사지에서 신복사지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6km 정도라 걷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더군다나 강릉바우길 15코스를 따라가면 신복사지까지 무리없이 도달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필자가 중간에 길을 빠져나왔다가 헤맸다는 거...ㅋ
강릉시 내곡동에 자리잡은 신복사지는 강릉 시내와 아주 가깝다. 넓게 논밭이 펼쳐진 굴산사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신복사도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국사가 개창했다고 전해진다. 신복사지에 들어서면 고려시대 초기에 만든 3층석탑과 함께 그 석탑에 기원을 올리는 석조보살좌상을 볼 수 있다.
석탑과 석조보살좌상이 한 세트로 있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형식이 아니다. 이런 귀한 문화재를 도심권 근처에서 볼 수 있는 강릉 사람들이 참 부럽다. 참고로 오대산 월정사 9층 석탑 앞에도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신복사지 3층 석탑은 2층 기단에 3층 탑신을 세운 형식이다. 그런데 잘 보시면 알겠지만 탑에 무언가가 많이 첨가되어 있다. 그렇다. 신복사지 3층 석탑은 탑신 아랫부분에 괴임돌을 받혔다. 큰 하드보드지 같은 괴임돌이 각각의 탑신을 받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탑에 많은 것들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이다.
신복사지 3층석탑은 보물 제87호이고, 석불보살좌상은 제84호이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부터 신복사지 문화재들까지. 이날 도대체 보물을 몇 개나 본 거야! 이렇게 눈이 호강해도 되는거야? ^^
커피거리로 유명한 안목해변도 잠시 다녀왔다. 바다는 속초에서 아주 제대로 봤기에 안목 해변에서는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으로 만족했다. 카페에 들어갈까 하다가... 그냥 캔커피에 만족했다.
***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6일간 강원도 일대를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인제 ☞ 속초 ☞ 양양 ☞ 강릉 ☞ 평창 ☞ 원주
2021년 2월 2일 화요일 .
화요일에는 일정을 두 개를 소화했다. 첫번째는 이전 포스팅에 언급한 속초 해수욕장과 외옹치 탐방이었다. 두번째는 양양군에 있는 진전사지와 둔전 계곡 탐방이다. 오전과 오후로 나눠서 일정을 소화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속초와 양양이 서로 인접해있기 때문이다.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진전사지(陳田寺址)에는 국보 122호인 진전사지 3층 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진전사는 신라 현덕왕 13년(821)에 도의선산에 의해서 창건됐는데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곳이다. 교종에서 선종으로 바뀌는 시기에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 경전이나 해석하고 염불을 외우는 일보다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도의선사의 주장이었는데 지금이야 별다를 게 없는 말이다. 하지만 저 당시에는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교종 중심의 불교는 신분 질서와도 일치했다. 왕이 부처, 귀족은 보살, 일반 백성은 중생으로 여겨졌다. 도의선사의 주장대로 하면 실제적으로 경전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일반 백성들도 자신의 본연의 마음을 알면 득도를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당시 경주에 있던 승려들과 귀족들은 난리가 났다. 자신들이 누리는 안락함과 권위를 송두리째 뺏겨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들은 도의선사를 마귀라고 몰아붙였고, 이에 도의선사는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설악산 자락에 둥지를 틀게 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의 이익과 배치된다면 악착같이 달라든다. 그게 인간의 속성인지...
* 진전사지 3층 석탑
* 진전사지 3층 석탑: 상층부 기단에 8부중상, 1층 탑신에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진전사지로 가기 위해 물치해수욕장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 바로 앞에 송이버섯 등대로 유명한 물치 해수욕장이 있어 잠시 탐방했다. 물치 해변은 서핑으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그 추운날에도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휴~ 보기만 해도 춥더라. 그런데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더라.ㅋ
양양읍에서 진전사지가 있는 강현면 둔전리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4편 뿐이다. 그나마도 둔전리까지 안 가고 바로 아랫 동네인 석교리까지만 가는 버스도 있다. 필자가 그 버스를 탔다.^^ 석교리 정류장에서 둔전리까지는 약 30분 정도 걸어갔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주위 풍광도 수려해서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진전사지가 설악산 자락에 있어서 그렇다. 실제로 화채능선을 따라가면 설악산 대청봉에 닿을 수 있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 루트로 설악산을 가보고 싶다. 물론 무자게 빡세겠지...ㅋ 둔전리 버스 종점에서 진전사지까지는 약 10분 정도 걸어간다.
진전사지 3층 석탑을 친견했을 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석탑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 둔전계곡의 자연적 아름다움과 3층 석탑의 인공미가 너무나도 잘 어우러졌다. 정교하게 표현된 3층 석탑을 보고 있자니 피로감이 싹 다 날라갔다. 문화재를 보면서 큰 희열을 느끼게 되다니!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니 직업병이 생긴거야~^^
진전사지 3층 석탑은 2단 기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상층 기단부에는 8부중상이 새겨져 있고, 탑신 1층에는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고부조, 즉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솜씨가 무척이나 빼어나다. 사진으로 봐도 좋지만 직접 바라보면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참고로 8부중상은 불교를 수호하는 8종류의 신을 말한다.
진전사지 3층 석탑에서 500미터 정도 올라가면 새로 지은 진전사가 있고, 그 옆에 진전사지 부도가 있다. 도의선사의 부도인데 제작시기는 9세기 중반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진전사지 부도는 얼핏보면 석탑처럼 보인다. 석탑 형식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부도들 하고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부도의 탑신은 8각형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한쪽면에는 길쭉하게 네모 문양을 새겼다. 감실 역할을 하는 네모인 거 같다.
둔전 계곡을 왔으니 당연히 계곡 탐방을 해야지. 새로 지은 진전사 앞에는 설악저수지가 있는데 물길을 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산 중턱에 큰 저수지가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1980년에 준공됐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도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둔전 계곡은 장엄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곳이었다. 단풍으로 유명한 설악산의 한 자락에 위치해 있으니 가을 때오면 눈이 아주 호강할 거 같다.
이렇게하여 진전사지 탐방을 무사히 마무리했다. 멋진 문화재와 멋진 풍광 때문에 눈이 호강한 날이었다.
***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6일간 강원도 일대를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인제 ☞ 속초 ☞ 양양 ☞ 강릉 ☞ 평창 ☞ 원주
2021년 2월 2일 화요일 .
전날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 탐방이 어그러진 후 바로 속초시로 넘어갔다. 굳이 인제에 더 머물 필요가 없었으니까.
속초에서 가장 눈여겨 볼 것들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속초 해수욕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옹치의 해안산책로였다. 속초 해수욕장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수욕장이라고 할만 하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약 3분 정도만 걸으면 속초 해수욕장이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승차를 한 후 2시 20분 정도를 달리면 속초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할 수 있다. 그런 후에 약 5분 정도만 걸어가면 파도가 넘실대는 속초 해수욕장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청과 가까운 동명동에는 속초 시외버스터미널도 있다. 사실 이 동명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하여 대포항에서 종료하는 역사트레킹 코스를 기획했었다.
동명항(영금정) ☞ 갯배 ☞ 아바이마을 ☞ 속초 해수욕장 ☞ 외옹치 ☞ 대포항
실제로 회원들을 모집해서 트레킹을 행한 적도 있었다. 속초는 워낙 유명한 동네여서 사람들이 올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속초 여행 안 해본 한국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기우였다. 생각보다는 반응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한 번 갔다고 두 번, 세 번 못 갈 것도 없지 않은가.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사람 냄새를 맡으며 여행을 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검증된 프로그램을 원했던 것 같았다.
파도가 넘실대는 속초 해수욕장을 보고 있자니 속이 뻥 뚫리듯 시원해진다.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푸른 동해바다는 청량제와 같은 존재다. 철썩철썩 치는 파도에 일상의 찌든 피로를 씻어낼 수 있다. 그래서 접근성이 좋은 속초 바다가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 조도: 속초 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조도. 새들의 고향이다.
파도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 파도 사진을 몇 장 좀 찍어봤다. 날씨가 맑은 날았음에도 파도가 크게 쳐서 좀 의아하더라. 이것을 두고 너울성 파도라고 하는데 이런 너울성 파도에 의해 몸이 휩쓸려 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맑은 날에 파도가 크게 일어 좋은 사진은 찍었지만 자칫하다 파도에 휩쓸릴 뻔도 했다. 실제로 예상치를 훨씬 넘는 바닷물이 밀려와 바지가 젖어버렸다. ^^
모습이 항아리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외옹치는 속초 해수욕장과 인접해 있다. 설악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주봉산과 청대산을 거쳐 외옹치에서 바다와 만나게 된다. 바닷가에 불쑥 튀어나온 산줄기라 그런지 외옹치는 예로부터 무척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었다. 예전에는 봉수대가 있었고, 근래까지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다 부대가 철수했고, 그 자리에 대형 리조트가 들어섰다. 리조트가 들어서면서 해안 산책로가 만들어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해안 절벽 구간도 탐방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예전의 외옹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외옹치와 그 옆 외옹치항은 꽤나 운치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니 참 아쉽다.
더불어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속초인데... 너무 많이 변해서 좀 당황스러웠다. 해안가를 중심으로 고층 빌딩들이 연이어 들어섰는데 얼핏 해운대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그 거주 시절들이 다 분양이 됐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도시가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너무 갑자기 변하면 적응하기가 힘들다. 속도 조절은 분명히 필요해 보인다.
***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6일간 강원도 일대를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인제 ☞ 속초 ☞ 양양 ☞ 강릉 ☞ 평창 ☞ 원주
2021년 2월 1일 월요일 .
유명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탐방하는 날이다. 전날 아침가리골 얼음트레킹을 행한 후 다시 현리로 돌아왔는데 시간이 저녁 7시경이었다. 서울에서야 오후 7시면 초저녁이지만 지역에서는 어두워지면 인적이 드물어진다. 그래서 인제읍으로 이동하지 않고 현리에 있는 모텔에서 1박을 했다.
얼마나 많은 군인 아저씨들이 이곳을 거쳐 갔을까? 생각해보니 나도 20년도 더 전에 강원도 화천의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아휴 그때만 생각하면 아주 징글징글한데 강원도의 자연은 정말 매력적이단 말야! 강원도는 아웃도어 천국이지...^^
현리에서 인제읍내까지는 약 3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윗길과 아랫길로 갈 수 있다. 현리에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가려면 고사리 수변공원까지 시골버스를 타고 가야한다. 현리에서 고사리 수변공원까지는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아랫길은 유명한 남대천을 끼고 있어 풍광이 아주 수려하다. 자칫 운전하는데 시선을 뺏겨 사고가 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아니다를까 앞에서 사고가 났다. 아스팔트에 살짝 살얼음이 언 거 같았다. 안개도 끼었고. 하여간 사고 때문에 20분 정도를 버스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 자작나무 숲 입구
고사리 수변공원에 도착했다. 안개낀 남대천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곳이 자작나무 숲이 아니다. 수변공원에서 약 5km 정도를 걸어가야 자작나무 숲 입구에 갈 수 있다. 버스를 타라고? 자작나무숲 입구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에 몇 편 되지 않는다. 그럼 택시는? 돈이 없다. ^^
그리고 필자도 나름 도보여행가인데 왕복 10km 정도는 항상 감안해야 하지 않나? 물론 자작나무 숲에 이동을 하면 거의 20km 정도에 달하겠지만...
고사리 수변공원에서 자작나무숲 입구까지는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었지만 나름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서 걸을만 했다. 걸으면서 마을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는데 왜 버스편이 하루에 몇 편밖에 없는지 알겠더라. 아무리 자작나무 숲이 유명하다고 하더라도 원대리는 그저 시골 동네였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런 곳에 버스편이 많이 배치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뚜벅이 여행자들은 자신의 두 발을 믿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10km 이상을 걸을지 모르니까. 돈 없는 게 원수지...ㅋ
전날 아침가리골 얼음트레킹에서 힘 좀 뺐더니만 다리가 말을 안 듣는다. 더군다나 배낭도 50리터 짜리를 메고 왔다. 배낭이 크니 마구 때려넣었다. 태블릿과 키보드를 세트로 넣고, 책과 다이어리 세트도 넣었다. 결론적으로 태블릿은 한 번도 전원을 안 켰고, 책은 한 장도 펼쳐보지 않았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숙소에서는 그저 TV만 붙잡고 있었다. 모텔만 다녀서 그런가? 성인방송이 잘 나오더군~^^
그나저나 저놈의 배낭 2014년도에 스페인에서 구매해서 잘도 써먹는다. 저 배낭으로 두 번이나 산티아고 순례길도 다녀오고 했으니 본전은 제대로 뽑은 셈이다. 사실 50리터짜리 새 배낭이 있긴 하지만 저 녀석이 더 끌린다. 그런데 왼쪽 사이드 포켓 자크가 고장이 났다. 하지만 고장이 났더라도 계속 쓸 생각이다. 여행의 동반자를 함부러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론적으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핵심 부분을 가보지 못했다. 사진은 입구 바로 앞쪽에 있는 구간에서 찍은 것이다. 한마디로 맛배기만 보고 온 것이다. 자세히 알아보니 그간 코로나 때문에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입산 통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2월 3일부터 탐방이 재개가 됐다는 것이다. 코로나 때문이든 휴무일이든... 어쨌든 탐방을 하지 못했다.
세상 일이 다 그렇겠지만 여행도 합이 맞아야 한다. 기껏 갔더니 휴무이거나 공사중이라면 김이 셀 수밖에 없다. 물론 그 핑계대고 해당 지역을 또 방문할 수도 있다. 이번에 못 가면 다음에 또 가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검색을 해야 할 거다.
조만간 다시 자작나무 숲을 방문할 예정이다. 그때는 20km 정도 걸어야 할 거 같다. 통상적인 코스가 아니라 임도따라 쭈욱 걸어볼 생각이다. 이때 못 걸은 거 그날 다 걸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