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

- 마음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번에는 국내를 넘어 스페인으로 이야기를 확장해볼까 합니다. 스페인에는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내용이 아닐 겁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입니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지금은 2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입니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많은 영향을 준 셈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이 역사트레킹펀딩에서도 꼭 한 번은 다뤄봐야겠지요.

    

 







 

 * 산티아고 콤포스테라라 시가지. 사진 중앙 상단에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합니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습니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지요.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습니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입니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습니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725일에 참수를 당합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겁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겁니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습니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습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습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우리언론들 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조각된 야고보.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립니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입니다. 종교다원론자(?)인 저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습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지요. 그 영감은 예전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보았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답니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저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한국 컵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많기에 저런 광고문구가 나왔으리라...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됩니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의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습니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지요.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집니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수준으로 서술하였더군요.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요?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요?

 

 




* 이베리아 반도 지도. 야고보의 제자들이 이베리아에 가려고 했다면 바로셀로나 같은 동부 지역에 닻을 내렸을 것이다. 뭐하러 지르롤터를 거쳐 대서양까지 나갔다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먼 길을 돌아갔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이 탄 배는 나룻배 수준이었을텐데. 한편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포함하는 서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습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611,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습니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습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합니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를 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릅니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됩니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입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을 겁니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습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답니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 산티아고 개: 산티아고 도심 입구 쪽에 있는 대저택에서 기르던 개. 무척 귀여워서 한 컷!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저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저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죠.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요.

 

 

 

 

 

 

 

 

 

 







투표 후에 떠나는 봄꽃트레킹

한강, 서울성곽, 수표교까지! 아기자기한 서울내부트레킹

 

  

봄날이 왔습니다. 봄바람이 부니 하얀색 벚꽃들이 잎을 흩날리고, 노란색 개나리들이 춤을 춥니다. 20대 총선도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트레킹의 계절이 다가온 만큼 정치의 계절도 다가온 것이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립니다. 413일에는 투표함에 민주주의의 꽃 한 송이를 넣으시고, 가까운 곳으로 봄꽃트레킹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요? 이번에 소개할 코스는 서울 남산 부근에서 행해지는 일명 서울내부트레킹코스입니다. 남산 부근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투표를 하시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트레킹을 즐기셔도 좋을 듯합니다.


사실 이 서울내부트레킹은 동네 뒷산을 타고 갑니다. 시작점이 매봉산(금호산)이라는 곳인데 이 산은 전형적인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스 중간에 있는 남산도 그 동네 사람들에게는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동네 뒷산을 타고 가지만 서울내부트레킹도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풍부하게 품고 있답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한강을 조망할 수도 있고, 서울성곽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걸음을 더하면 수표교와 광희문, 그리고 동대문으로 익숙한 흥인지문도 탐방할 수 있답니다.

    


 

 


* 한강: 매봉산 팔각정에서 바라 본 한강. 사진 오른쪽에 있는 다리는 동호대교임.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트레킹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이죠.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습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죠.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곳이죠.


지금의 매봉산은 의 눈빛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매를 볼 수 없는 매봉산이지만 트레킹팀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강을 시원스럽게 조망했던 것입니다. 매봉산 팔각정에 올라서면, 압구정동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역동적인 한강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답니다.


또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까지 한강을 굽어볼 수 있습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춰보는 것도 매봉산 탐방의 재미입니다. 지인과 동행을 했다면 한강다리 맞추기 내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 버티고개: 버티고개를 걷고 있는 트레킹팀.

 





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전에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에서 김수현이 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네요.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입니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합니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한 밤 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겠지요.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습니다. 안전한 보행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답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됩니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갑니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 서울성곽: 이 곳을 지나면 장충단공원이 나온다.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9월경이었습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지요.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습니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세긴 것입니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겁니다.


장충단은 1910, 일제에 의해 폐사됩니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됩니다. 마치 종묘사직할 때의 사직단,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죠.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습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습니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웃음이 나옵니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냥 폭사했습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죠.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습니다.

 





 *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있다.

    



 

유명한 정치집회 장소였던 장충단공원

 

광복 이후 장충단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1971418,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해 4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당시의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됩니다. 19791026일에 있은 시크릿 파티에서 한 잔의 술에 섞인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었지요.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습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시 김대중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든 인파는 약 1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인파였죠.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그렇게 대규모 선거유세를 하지 않는 분위기지요. SNS를 이용한 선거홍보가 활발히 진행되니 굳이 대규모 정치연설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대규모 연설회를 하든 SNS를 활발히 운영하든 중요한 건 돈 안 들리고, 정정당당하게 선거에 임하는 모습일 겁니다. 깨끗한 선거운동, 착실한 의정활동, 국민 편에 선 정치 등등... 이런 후보자들을 찾아내서 국회로 보내야 하는 게 유권자의 임무입니다.

 

그 놈이 그 놈이다

 

이 말이 맹위를 떨치면 떨칠수록 우리 정치는 발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짜 그 놈이 그 놈인지, ‘그 놈이 그 놈이 아닌지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유권자의 임무 아닐까요?

 

   





*  서울성곽: 성곽 주변에 핀 개나리. 







 

청계천 복원의 핵심, 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습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습니다.


수표교는 세종 2(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습니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1441)의 일입니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입니다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습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지요.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지요.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영조 36(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입니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입니다.


하지만 수표교는 청계천이 복원된 지금까지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광희문: 4소문 중에 하나인 광희문.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

 

 

광희문과 흥인지문(동대문) 탐방을 끝으로 서울 내부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광희문은 4소문 중에 하나고, 흥인지문은 4대문 중에 하나입니다.


한강 보고, 서울성곽길 걷고, 장충단도 탐방하고, 대문과 소문을 관찰할 수 있는 서울 내부트레킹! 동네 뒷산에서 시작되지만 이 정도면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라고 할 수 있겠죠. 봄날, 매봉산과 남산 부근에는 벚꽃과 개나리들이 활짝 피어납니다. 413일이면 만개를 했겠네요. 투표 끝난 후에 봄꽃트레킹 어떠세요? 투표함에 민주주의의 꽃 한 송이를 넣으시고, 가까운 곳으로 봄꽃트레킹을 떠나보는 거죠!

 

 

 

 

서울내부트레킹

 

1. 코스: 매봉산 팔각정 버티고개 성곽길 장충단공원(수표교) 광희문 흥인지문(동대문)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청구역(5호선) / OUT - 동대문역

 

 










역사트레킹 관련 글 썼다 강사되고, 펀딩도 하게 됐네!


오마이뉴스에 쓴 역사트레킹 기사 덕분에 생긴 일들


16.04.08 15:01 최종 업데이트 16.04.08 15:01

곽동운(artpunk)             








 
▲ 서강 강원도 영월에 있는 서강에서 찍은 필자의 사진. 트레킹을 하며 전국에 있는 명소를 다니다보니, 저런 멋진 풍광에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영월강변 트레킹을 실시할 때 찍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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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에 말씀 드렸죠. 펠리페 2세 시기에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 스페인 무적함대가 임진왜란이 있기 4년 전인, 1588년에 영국의 드레이크 함대에 의해 칼레에서 대파를 당합니다. 칼레는 도버해협 중에서 도버 반대편에 있던 프랑스 땅이랍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을 한 후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뗐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수군이랑 당시 무적함대랑은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닮은 점은 둘 다 수군이면서, 한편으로는 강력한 지상군이었다는 점입니다. 둘 다 래밍(ramming, 상대방 배에 부딪히기)과 보딩(boarding, 상대방 배에 올라타기) 전법을 썼는데 그렇게 했다가 둘 다 크게 패했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이 말을 끝낸 후 저는 몸을 틀어서 참가자들이 제 옆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른팔로 대포를 쏘는 시늉을 했습니다.


'빵빵빵'


"당시 판옥선은 제자리 선회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현에서 대포를 쏜 다음에 바로 뱃머리를 돌려서 좌현에 있는 대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빵빵빵'


그 말대로 저는 제자리에서 몸을 돌렸고, 이번에는 왼쪽팔로 대포를 쏘는 시늉을 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수군의 주력함인 세키부네는 속도를 빨랐을지 몰라도 선회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이 설명을 할 때는 판옥선 때와는 달리 작은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조일전쟁 당시 판옥선의 특성을 일본군의 주력 함정과 비교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 몸을 설명 도구로 썼던 셈이지요. 이때 참가자 중에 한 분이 '아~'라는 외침을 내뱉더군요. 어떤 참가자는 고개를 끄떡이며 응답 해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온몸으로 표현해서 그랬던가요? 제 설명이 영 '꽝'은 아니었나 봅니다.






 
▲ 서울성곽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성곽이 곡선을 그리고 있어, 그 멋을 더하고 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실시할 때 찍은 사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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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트레킹과 글쓰기, 내가 할 줄 아는 두 가지


지난 3월 23일. 저는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문경새재에 서 있었습니다.


"준비는 하긴 했는데 버벅대면 어떡하냐. 한 열댓 명은 커버가 되는데 30명은 솔직히 좀 버겁네. 핀 마이크도 써야 되고..."


당시 저는 모 기관에서 개최하는 '힐링 트레킹'에 강사로 초빙됐습니다. 제 역할은 30여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을 리딩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문경새재와 관련된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을 설명하는 역할도 부여받았습니다. 그냥 걷기만 한다면 굳이 저를 강사로 초빙할 이유는 없었겠지요. 우리나라에 트레킹 강사들은 많이 있으니까요. 한마디로 저는 문경새재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는 강사였습니다. 


저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가 유일하게 저 직함을 쓰고 있을 겁니다. 딱히 시비 거는 사람도 없으니 계속 저 직함을 쓸 생각이지요.


역사트레킹은 제가 할 줄 아는, 아니 할 수 있는 단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바로 글쓰기입니다. 저도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제가 할 수 있는 것만 움켜쥐려는 습성을 보이더군요. 그렇게 움켜쥐었던 게 역사트레킹과 글쓰기였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모래알 빠지듯이 다 빠져나가고 저 두 가지만 남아있더군요.





 
▲ 꽃길걷기 서울내부트레킹에 참가한 분들을 찍은 사진이다. 이 구간은 버티고개인데 꽃길이 예쁘게 조성되어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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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쓴 글 덕택에 트레킹 강사가 되다


역사트레킹은 주로 서울에서 행했습니다. 열 명 남짓 되는 인원을 모아서 함께 떠났지요. 참가비가 있긴 있었습니다. 하지만 참가비는 명목상으로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항상 운영비는 마이너스였지요. 그래서 제 사비를 턴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제가 멍청한 걸까요? 그렇게 하면 할수록 손해가 나는 짓을 저는 왜 했을까요? 재밌어서 그랬습니다. 참가자들에게 해당 코스의 역사지식을 알려주는 것도 재밌었고, 사람들과 이것저것 세상 이야기하는 것도 재밌었습니다. 그렇게 트레킹을 진행하다 보면 에피소드들도 생기고, 아이디어도 얻게 됩니다. 글감이 생기는 것이죠. 역사트레킹을 할 때만큼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런 내용들을 담아 <오마이뉴스>에 풀어냈습니다. 그나마 글쓰기도 할 줄 아는 것 중에 하나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쉽게 글이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가며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작성을 했습니다. 사진도 예쁜 것만 추리고 추렸지요. 역사트레킹 기사를 작성할 때도 참 행복했습니다. 진행했을 때의 사진을 보면서 미소를 짓곤 했었죠.


그렇게 나름대로 공을 들여서 그랬는지 역사트레킹 관련 기사들은 그런대로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사이드에 실린 것들이 대다수였지만 그래도 몇몇 기사들은 메인탑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기사들은 포털 사이트 첫 화면에 실리기까지 했지요. 그 기사를 보고 어떤 여자분이 트레킹에 참여하고 싶다며, 제 블로그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겨 놓기도 했습니다. 기사를 썼다가 생판 모르는 여자분의 '전번을 땄던' 셈이죠.







 
▲ 문경새재 문경새재 제1관인 주흘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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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에 실리든 사이드에 실리든, 그렇게 저는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차곡차곡 결과물이 쌓이게 된 것이죠. 그 결과물을 보고 모 기관에서 연락을 했던 겁니다. 트레킹 강사로 나서달라고, 트레킹을 하면서 역사 지식을 설명해달라고, 강사료는 챙겨줄 테니 걱정 말라고...


아무리 역사트레킹이 할 줄 아는 것 중에 하나라지만 그래도 '강사님'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 앞에 서니 좀 떨렸습니다. 더군다나 30명 정도 되는 인원을 리딩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어떻게 됐을까요? 제 첫 강사 데뷔 무대는 성공했을까요? 성공까지는 모르겠는데 망치지는 않았습니다. 버벅대기는 했지만 준비했던 걸 거의 다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온몸을 설명도구로 썼던 것도 플러스 요인이 된 듯했습니다. 반응이 괜찮았으니까요. 문경새재 코스가 걷기에 편해서 참가자들의 부담이 덜했던 것도 제게는 이점이었습니다. 사전답사를 하고, 어느 지점에서 무슨 설명을 할 것인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던 것도 도움이 된 거 같습니다.






 
▲ 스토리펀딩 스토리펀딩에서 역사트레킹을 주제로 모금을 하고 있다. 역사트레킹의 부제는 길 위의 인문학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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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트레킹 펀딩


저는 얼마 전부터 카카오 스토리펀딩에서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역시 역사트레킹입니다. 역사트레킹펀딩도 오마이뉴스에 쌓아둔 결과물이 아니었으면 진행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요즘 아무리 펀딩이 흔하다고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모금을 할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 결과물이 있어야지 펀딩 기획서도 통과될 수 있잖아요. 기획서가 통과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바로 오마이뉴스에 쓴 기사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썼다가 강사도 되고, 펀딩도 하게 됐습니다. 제가 할 줄 아는 딱 두 가지를 가지고 오마이뉴스에 적용시켰더니 나름대로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런 흥미로운 변화들이 제게는 큰 활력소로 다가오네요.


저는 앞으로도 계속 오마이뉴스에 글을 쓸 생각입니다. 메인에 실리든 사이드에 실리든 계속 쓸 생각입니다. 그렇게 쓰다보면 결과물이 계속 축적되겠지요. 그런 결과물로 인해 흥미로운 변화들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 남태령 망루: 참가자와 함께 포즈 취하기!







덧붙이는 글 | http://blog.daum.net/artpunk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 절두산: 당산역에서 바라 본 절두산. 뒤에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이승만이 한강 다리를 끊었다고요?

 

- 한강 따라가는 한강역사트레킹

    

 


그게 정말이에요? 저 한강대교가 폭파됐었다고요? 그게 언젠데요?”

 

어느 가을날, 한강 역사트레킹을 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참가자 중 한 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저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다른 분들의 표정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강대교와 한강철교가 폭발해서 폭삭 주저앉았다는 제 설명에 대한 반응들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KTX 한 대가 미끄러지듯 한강철교 위로 속도를 내고 지나가고 있더군요. 강제적(?)으로 묶인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저는 입을 뗐습니다.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폭발시킨 주체가 인민군이 아닌 우리 국군이었다는 점입니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다리를 폭파시킨 거죠. 전쟁 때는 일부러 시설물을 파괴해서 적군의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강대교 폭파는 문제가 아주 많았어요. 다리 폭파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거든요.”

 

무슨 피해가 있었는데요?”

 

사전 예고 없이 폭파가 실시돼서 당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들이 많이 죽었어요.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더 황당한 일은 다리가 끊기기 몇 시간 전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힘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는 겁니다.”

 




* 노들텃밭: 노들섬, 노들텃밭에서 바라 본 한강대교 아치형 교각.






그럼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끊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들은 멀리 대전까지 피난을 간 상태였습니다. 미리 녹음했던 음성으로 계속 돌려 됐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 방송 내용을 믿고 피난을 안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웃기는 거죠.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간 건 그렇다 쳐도 왜 거짓말을 합니까? 서울에 있지도 않으면서 서울에 있다고 구라쳐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마지막 설명을 할 때는 저도 비속어를 써가며 좀 흥분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침도 튀기면서... 마지막 설명이 끝나자 분위기가 좀 가라앉는 듯 보이더군요. 그래서 영화이야기로 방향을 좀 틀어봤습니다.

 

“<웰컴투 동막골>이라는 영화 기억나시죠? 그 영화에서 신하균이 육군 소위로 나오잖아요. 영화에서 신하균은 탈영을 하고 자살까지 시도를 했는데 그게 다 죄책감 때문에 그랬더라고요. 피란민들이 몰려든 다리를 폭파시켰는데 담당자가 신하균이었던 거죠. 그래서 신하균은 죄책감에 시달렸던 거고요. 그 부분은 한강대교 폭파에서 모티브를 따온 게 아닌가 하네요.”

 

그때 다시 한강철교 위로 무궁화호가 한 대 지나가더군요. 무궁화호가 느린 걸음을 하는 동안 트레킹 팀은 또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풍 같은 역사트레킹이라는 리딩 원칙이 어긋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아픈 우리 현대사네요.”

 









 * 샛강생태공원: 여의도에 숨어 있는 보물인 샛강생태공원.

 







 

# 선유도가 되어버린 선유봉?

 

한강. 매일 보는 한강인데. 매일 같이 출근하러 다리를 넘고, 퇴근하면 복실이랑 같이 산책하는 그런 곳인데. 그런 한강에도 역사트레킹을 할 곳이 있는 걸까요? ,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한강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도착지는 절두산 성지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선유도부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선유도와 절두산은 하나의 권역으로 묶일 수 있기에 선유도부터 이야기하는 전개 방식이 틀린 것만은 아니죠.


원래 선유도는 섬이 아니었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렸던 봉우리였습니다. 높이는 해발 40미터 정도였습니다. 해발 40미터면 썩 높은 편은 아니지요. 하지만 푸른 나무들을 품고 있는 봉우리가 강가 가까운 쪽에 우뚝 서 있었으니,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중국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선유봉이 있는 양화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도 선유봉을 사랑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선생도 한 풍류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겸재 선생이 선유봉이 자리잡고 있는 양천현의 현령으로 부임을 하게 됩니다. 그때가 1740, 조선 영조 때였죠

 

겸재 선생은 1741년에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3편의 진경산수화를 화폭에 담았답니다. 지금의 선유도 일대의 한강 유역을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낸 것이죠. 특히 <양화환도>에서는 선유봉과 함께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절두산이 등장합니다. 또한 그 잠두봉 아래에는 양화진(지금의 합정동)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의 물길을 느긋하게 노를 저으며 건너가는 뱃사공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양화환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에 뛰어들어 신선놀음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은 한자 풀이대로 신선이 노닌다는 봉우리입니다. 만약 진짜 그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면 선유봉 꼭대기에 서 있는 노송 아래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네요. 막걸리 말고.


그렇다면 왜 선유봉은 졸지에 선유도로 내려앉았을까요? 누가 파먹었나요?

일제에 의해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설 무렵이었습니다. 일제는 활주로를 닦고 제방을 쌓는다며 명목으로 선유봉을 깎아냈습니다. 채석을 한 것이죠. 그렇게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봉우리는 점점 더 깎여나갔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선유봉은 계속해서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선유봉에서 캔 돌들은 지금의 강변북로 공사 등에 이용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깎이다보니 선유봉은 납작하게 되어버렸고, 이후 한강이 개발되어 강폭이 넓어졌을 때 영등포쪽과 분리되어 결국 섬이 되고 맙니다.


그러고보면 선유도는 참 사연이 많은 섬이네요. 깎이고, 부서지고, 졸지에 섬이 되고... 그렇게 섬이 된 선유도는 지금 서울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식처 중에 한 곳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와서 신선놀음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척화비: 절두산 성지에 있다.







 

# 절두산으로 개명한 잠두봉

 

이제 절두산 이야기를 해보죠. 앞서 언급한 <양화환도>에서 절두산, 즉 잠두봉은 선유봉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제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살벌한 이름으로

   

1866.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절두산이 아닌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죽었습니다.


이 병인박해가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이까지 올라온 것이죠.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대원군은 아주 격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며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든 것입니다. 잠두봉이 양화진이나 서강과 가깝다는 이유로 그렇게 된 것이죠. 그렇게 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의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150년 전, 그렇게 절두산은 수 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감시견처럼 서 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런 흐름은 흥선대원군도 막을 수는 없었겠지요.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꿔다둔 보릿자루 마냥 껑뚱하게 서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우리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습니다. 절두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 쯤은 가볼만한 곳입니다. ‘피의 역사가 서린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소인 만큼 직접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척화비를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고요

 

그러고 보면 절두산이나 선유도나 공통점이 많네요. 예전에 사랑을 많이 받은 것도 똑같고, 본의 아니게 이름이 바뀐 것도 똑같고.

 






* 한강철교: 63빌딩 쪽에서 바라본 한강철교. KTX가 지나고 있다.







 

 

# 이승만이 끊은 한강대교

 

다시 한강대교 이야기.

한강대교 폭파로 인해 군사적인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한강 북부에 남아 있던 국군의 퇴각로가 봉쇄됐기 때문입니다. 만약 순차적인 퇴각이 이루어졌다면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950714일에 전격적으로 이양된 전시작전통제권도 그렇게 쉽게 이양되지 않았을 겁니다. 아직까지도 우리에게는 전시작전권이 없습니다.


분명 한강대교 폭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모르고 있더군요. 대다수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리가 끊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절단한 주체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교량이 폭파되지 않았냐고 물었던 참가자도 있었으니까요.


좋은 역사든 아픈 역사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름이 바뀌었으면 왜 바뀌었는지, 다리가 끊어졌다면 왜 끊어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막을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한강역사트레킹을 마칠 때 항상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인민군의 남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강대교 폭파에 대한 면죄부가 부여될 수 없지요. 자기는 안전하게 대전에 내려가 있으면서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이나 해대고... 그게 바로 이승만입니다.”

 





 

한강역사트레킹

 

1. 코스: 절두산성지 양화대교 선유도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63빌딩 한강철교 노들텃밭(한강대교)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정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지하철 2호선 합정역 / OUT - 노들텃밭 노들텃밭에서 노량진역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할 수 있음.

 

 

 

 

 





* 인왕산 서울성곽에서 본 남산




돈 안 되는 거 뭐하러 하세요?


길 위의 인문학_ 인왕산 역사트레킹

 


 

윤동주 시인이야 굳이 제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겠죠. 유명한 서시도 잘 아실 거고요. 국어 시간에 배웠잖아요...”

 

햇살이 따사했던 어느 봄날. 당시 저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고 있었습니다. 역사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지나 창의문 인근에 있는 시인의 언덕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시인의 언덕은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는데 그 곳에 올라서면 서촌과 광화문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그만큼 전망이 좋은 곳이죠.


영화 <동주>에서도 보듯, 윤동주 시인은 너무나 유명한 국민시인입니다. 굳이 입 아프게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저 수준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도 <참회록>까지는 설명을 해야 할 거 같아서 첨언을 했습니다.

 

참회록도 아시죠? 그것도 배웠잖아요. 그래도 모르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스스로에게 느낀 자괴감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죠.”

 

됐다 싶어서, 저는 창의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참가자 한 분이 제게 불쑥 이런 말을 던지는 겁니다

 

창씨개명을 했으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잠시 저는 숨이 하고 막혔습니다. 발걸음도 잠깐 꼬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친일파소리를 듣다니!


하지만 이내 숨을 가다듬은 후에 그 참가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진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일부러 윤동주 시인을 깎아내리려고 그런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 인왕산역사트레킹: 인왕산 성곽구간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돈 안 되는 역사트레킹

 

저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트레킹은 말 그대로 도보여행을 통해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입니다. 마스터는 필드에서는 대장 역할을 하고, 역사유적 앞에서는 문화해설사로 변신을 해야 합니다.


참가자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화장실이나 주차시설을 찍어주는 것도 마스터의 책무이지요. 부상 방지를 위하여 스트레칭을 행하는 것도 꼭 챙겨야 할 임무중에 하나입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답사지를 소개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간 역사트레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그들과 함께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해왔습니다. 그렇게 만난 이들은 대체로 찬사와 격려를 보내줬습니다. 하지만 날카로운 지적도 꽤있었습니다. 역사트레킹이 걷기열풍에 편승한 단순한 파생물이라는 이야기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또한 이미 많은 이들이 답사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굳이 역사트레킹이라는 명칭을 써가며 차별화 하는 것이 좀 억지 같다는 이야기도 간간이 들리더군요. 그런 쓴소리들은 그냥 그렇게 흘려 넘겼습니다. 이미 예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애정 어린 쓴소리는 항상 저를 머뭇거리게 했습니다.

 

돈도 안 되는 거 뭐하러 하세요? 참가한 저희야 좋지만...”

 

그렇습니다. 역사트레킹은 돈이 안 됩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 사비를 턴 적도 꽤 있었죠. 그럼 저는 왜 돈도 안 되는 역사트레킹을 해왔을까요? 재밌으니까요! 역사 공부도 하고 트레킹도 하면 몸도 머리도 상쾌해지니까요!

 






* 윤동주 문학관: 시인의 언덕





 


 

마스터는 멍석을 깔아주는 사람

 

참가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참가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멍석을 깔아준다는 표현을 합니다. 저 혼자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 각 개인이 스스로 보고 느끼게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죠.


멍석이 잘 깔리면 참가자들은 스스로 그 멍석 위로 올라오더군요. 그러다보면 얼음처럼 굳어 있던 참가자들의 입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한들거리는 봄꽃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맛집이야기로 군침을 흘리기도 하더군요. 그렇게 즉흥적인 반응들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품격(?)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옵니다.


정약용 트레킹에서는 다산 선생의 실학 정신과 조선 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공주 우금티 트레킹에서는 우금티 전투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제가 굳이 아이스브레이킹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어색함을 깨버리고, 나중에는 해당 주제에 맞혀 토론까지 즐기더군요.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전 흐뭇했습니다. 요즘같이 파편화된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지식을 나누며, 함께 도보여행을 즐긴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닙니까? 헬조선이니, N포세대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는 요즘인데.

 

 

 




* 윤동주문학관: 서시





 


윤동주가 친일매국노?

 

다시 윤동주 이야기로 돌아와서.

1941년 겨울,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라는 창씨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윤동주 개인의 의사가 아닌 창씨개명이었다는 점이죠. 집안 전체에서 행해진 것이지 윤동주가 직접 행정기관에 찾아가 창씨개명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까지도 참회를 했던, ‘참회록을 썼던 윤동주였습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고뇌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한편 당시는 중일전쟁이 이미 발발했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때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져 식량이 배급되기에 이릅니다. 이때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다고 합니다. 그런 생존과 직결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 매국노로 분류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입니다. 실제로 반민특위에서도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황군을 화끈하게 격려하고 찬양한 시인 서정주나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소설가 이광수하고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가 진짜 친일매국노였다면 교도소에서 옥사했겠습니까? 윤동주도 나름대로 지식인 아니었습니까? 그가 진짜 친일매국노였다면 그의 재능을 팔아 일제와 잘 붙어먹었겠지요. 그래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서정주나 이광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대편에 섰고, 결국에는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이런 윤동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그 참가자에게 해주었습니다. 버벅대면서 이야기를 했는데도 내용은 전달됐는지 그 분은 고개를 끄덕거리더군요. 어쨌든 그 분이나 저나 함께 호흡을 맞춘 것입니다.

 






 * 성곽에 핀 풀과 꽃: 인왕산 성곽 구간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요즘도 인문학은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꺾일 만도 한데 그 위력은 계속 되더군요. ‘먹방처럼요. 아무리 사회가 각박하다고 해도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려주는 분야는 계속 건재하나 봅니다. 근원적인 지적 욕구! 근원적인 식욕

 

역사트레킹의 부제는 길 위의 인문학입니다. 트레킹을 하면서, 인문학을 느껴보자는 뜻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역사가 균형추를 잡고 있습니다. 그 균형추 옆에 다른 영역도 배치를 해두었죠. 세계사, 신화, 종교, 국제정치, 육식 문제까지... 역사만 하면 재미없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들... 트레킹을 하면서 참가자들과 함께 그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스토리펀딩에서도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취지에 맞춰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재밌죠!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인왕산 입구 수성동계곡 인왕산(서울성곽) 윤동주 기념공원창의문

2. 이동거리: 6km

3. 예상시간: 3시간 정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 OUT - 부암동 부암동(윤동주 기념공원 옆 정류장)에서 버스에 탑승한 후 다시 경복궁역으로 돌아올 수 있음.

 

 

 

 

 


 

강남주민 오들오들 떨게 한 우면산 '그 물건'

 

[여행] 남태령-우면산 '안보 트레킹'

 

15.03.19 09:08    최종 업데이트 15.03.19 09:08

 

 

 

 

 

 

* 남태령

 

 

 

 

 

 

 

 

 
▲ 지뢰지대 과거에 지뢰지대였음을 알리는 경고판. 아직 미수거된 지뢰들이 남아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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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적대적 공생관계, 공포의 균형, 안보상업주의 같은 냉전시대 맹위를 떨쳤던 개념들이 어지럽게 난무해 있으면서도 그 나름대로 질서를 갖추고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는 적대관계에 있는 두 세력들이 서로를 비방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강경파와 이란의 강경파들이 서로에게 비난을 해대며 자신들의 몸집을 불리는 것이 좋은 예이다.


공포의 균형은 공포나 두려움을 통해서 쌍방 간에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냉전시대 미소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들은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녔다. 그래서 핵무기의 발사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두 괴멸된다. 그런 공포감이 역설적으로 '균형자' 역할을 하게 됐는데 이를 두고 공포의 균형이라고 칭했다. 안보상업주의는 문자 그대로 안보를 가지고 상품화 시켰다는 의미이다.

남한의 강경파와 북한의 강경파가 서로 윽박을 질러 자신들의 입지를 키우고,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한의 전력 70%, 북한의 전력 90%가 몰려 있고, 안보를 상품화하여 계속해서 송출하는 방송국들이 있으니 앞서 언급한 필자의 판단이 꼭 억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그것들이 어지럽게 난무하지만 '종북몰이'에서는 진영을 갖춰 질서정연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공포의 균형 정도만 최신무기 획득이라는 방향으로 변주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최근 회자와 되고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THAAD)가 바로 그 예일 수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남태령 옛길 남태령 옛길을 알리는 표지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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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으로 개명한 여우고개


자자, 서설이 너무 길어졌다. 뚱딴지같이 여행기사에 냉전시대에나 통용되던 개념들을 끌어와 어지럽히지 말라는 독자들의 원성도 들리는 듯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좋아 주말에 갈 봄 소풍 장소를 알아보려고 <오마이뉴스>에 접속했는데 '종북' 같은 신물 나는 단어를 여행면에서까지 볼 줄이야, 하고...

필자가 이번에 소개할 곳은 서울 남태령-우면산 구간이다. 남태령(南泰嶺)은 관악산과 우면산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은 183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 워낙 해발이 높은 고개들이 많아 183m의 높이면 명함도 못 내미는 게 맞지만, 한자어에서도 보이듯 이 고개는 당당히 '남쪽의 큰 고개'로 명명되어 있다.

처음에 이 곳은 여우고개, 혹은 여시고개로 불렸다. 한자어 명칭도 '여우호'자를 써서 호현(狐峴)이라고 쓰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는 여우가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그 옛날 관악산과 우면산의 울창한 수풀은 여우들이 서식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여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우 굴들이 발견됐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이곳에는 천 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다녔다는 '전설의 고향'도 전승된다.

 
▲ 과천루 남태령에 위치해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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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곳은 왜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개명을 하게 됐을까? 가장 유력한 설은 정조대왕 시대에 행했던 화산 능행차와 관련이 있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을 한 후, 정조대왕은 참배에 나서게 된다. 이를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이 고개의 이름을 정조대왕께서 물으셨다. 이때 과천현의 이방이 여우고개라는 이름 대신 남태령이란 명칭으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상감께서 행차하는 고개가 '여우고개'라는 요망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여우고개가 토속적인 이름이기는 하지만 요망스러운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더불어 고개의 명칭이 한 사람에 의해 급작스럽게 변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대왕 이전 시대부터 여우고개가 아닌 남태령으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한강 이남에는 정조대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혹시 남태령도 그에 편승된 것이 아닐까? 정조대왕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태령은 이미 보통 이상의 고개가 될 수 있으니까.

정조대왕이 남태령을 넘어서 다닌 기간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1794년 이후부터 능행차 노선이 시흥-안양 방면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과천에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어 일부러 남태령-과천 코스를 버렸다고 한다. 김상로는 영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자이다.

 

 



 
▲ 벙커 벙커 입구를 막아 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저런 벙커나 참호에 쓰레기를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용변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몰상식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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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생활 생각나게 하는 남태령 참호와 벙커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러 다녔던 남태령. 현재 남태령 곳곳에는 참호가 놓여 있다. 벙커도 있다. 서울 인근에서 이렇게 많은 참호와 벙커들이 정열되어 있는 곳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안보(?)시설들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남태령-우면산 코스다. 그 참호와 벙커들을 파고,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인 아저씨들이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시설들을 무심히 지나치기는 했지만 필자도 군대 생활이 생각나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군대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필자는 요즘에도 가끔 이등병 시절의 꿈을 꾼다. 군복을 벗고, 예비군도 끝난 지가 한참인데 아직까지도 그런 꿈을 꾸고 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뒤에는 항상 식은땀을 닦으며 이런 혼잣말을 하곤 했다.

"혹시 죽을 때까지 이등병 꿈을 꾸는 거 아니야?"

 
▲ 우면산 참호 서울시계인 우면산쪽의 참호는 저렇게 나무데크로 덮어 놓았다. 유사시에 나무데크는 열리고, 그 참호에 군인들이 배치된다. 나무데크가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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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뒷산에 걸려 있는 지뢰표식


남태령의 많은 참호와 벙커들을 뒤로 하고 우면산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소가 졸고 있다는 뜻의 우면산(牛眠山)은 해발 293m로, 이웃산인 관악산(620m)보다 훨씬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보다 오르기도 수월하고 코스도 짧다.

우면산은 '서울보다 더 서울'적인 강남의 뒷산이다. 그래서 전망대에 오르면 관악산에서 보는 광경과는 좀 차이가 있다. 관악산이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고시촌의 풍광을 품고 있다면 우면산은 타워팰리스 같은 초고층 주거시설을 보여준다.

 

 

 

* 우면산 벙커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욕망이 발현되는 곳이자 가장 먼저 앞서가는 곳의 뒷산이기에, 그 표식을 우면산에서 봤다는 것만으로도 필자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강남과 그 표식이 우리사회의 냉혹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언제든지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다는 그 엄혹한 현실!

그럼 그 표식이 무엇이냐? 바로 '지뢰' 지대를 알리는 표식이었다. 우면산 정상부에는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부대의 방어를 위해 1980년대 대인지뢰가 매설됐다. 이후 순차적으로 지뢰가 제거됐지만 그 중 일부가 수거가 안 돼 울타리를 쳐놓고 지뢰 표식을 걸어둔 것이다.

지난 2011년 7월, 우면산에 큰 물난리가 났다. 물난리로 큰 고초를 겪은 인근 주민들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지뢰 유실까지 이중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민통선 인근에서나 일어날 줄 알았던 지뢰 유실을 강남 주민들이 걱정했던 셈이다. 

 

 



 
▲ 지뢰밭에 토끼 토끼 한 마리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곳이 지뢰밭인 줄도 모르고.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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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본 것처럼 남태령-우면산 코스는 '안보 트레킹'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당장이라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자리를 잡을 것 같은 참호와 벙커들, DMZ이나 민통선 인근에서나 볼 수 있는 '지뢰' 표식까지... 더군다나 트레킹을 마치고 강남에 가서 맛집 탐방도 할 수 있다.


그 참호와 벙커가 실전에서 작동되는 순간 한반도는 석기시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남북한이 모두 공멸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 시설물들은 계속 '안보 트레킹'으로만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원히!

 


 
▲ 남태령-우면산 트레킹 남태령-우면산 트레킹 코스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호젓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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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령-우면산: 이 코스는 산악자선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다.

 

 

 

 

 

◆ 도움말

1. 코스:  선바위 미술관 ▶ 삼거리 ▶ 남태령 ▶ 군부대 ▶ 약수터 ▶ 예술의 전당
2. 이동거리: 약 7km / 이동시간: 약 3시간 (쉬는 시간 포함)
3. 교통편: 시작점 - 지하철 4호선 선바위역  / 종료점 - 3호선 남부터미널역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3월 21일 토요일에 남태령-우면산 역사트레킹 하러 갑니다!

 

참여를 하시려면 ---> 클릭

 

 

 

 

 

 

 

 

 

 

 

 

 

 

 

 

 

 

 

 

 

 

 

 

 

 

3월 15일 일요일에 관악산으로 역사트레킹 하러 갑니다.

같이 가실 분 있으신가요? 아래 신청하러를 꾹 눌러주세요!

 

 

관악산둘레길 역사트레킹  ---> 신청하러 가기

 

 

 

 

 

 

 

 

 

 

 

 

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공주역사트레킹 2편

 

14.10.31 09:39  최종 업데이트 14.10.31 09:39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과 겹쳐져, 좀 서글퍼 보인다.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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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이든 수평이든, 장염 걸린 사람에게는 힘들다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 지형을 기반으로 도보 여행길을 개척했기에 해변가나 강변을 걷는 길보다는 좀 험하다. 본격적인 등산보다는 덜해도 급경사가 있는 구간이 몇몇 있다는 것이다.

등산이 수직적인 개념이라면, 트레킹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트레킹도 지형을 타고 가야하기에 일정 부분에서는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 반대로 등산도 봄소풍 가듯 평평한 길을 걸을 때도 많다.

개념 정의에서는 수직과 수평으로 나누어지지만 지형이라는 구체적인 물리적 공간에서는 중첩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스 캠프로 삼고 있는 관악산 둘레길의 경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등산로였다. 그런데 걷기 열풍을 타고 '둘레길'로 변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지형적, 개념적 정의들도 컨디션이 좋을 때나 귀에 들어올 것이다. 장염 때문에 배앓이를 하는 사람에게 수직이든 수평이든 힘든 것은 매한가지 일 테니까. 그랬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서게 되니 공주토박이 분보다는 장염에 걸린 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장염 특성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공복인 상태로 장시간 걸으면 자칫 탈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분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자신은 완주를 할 수 있다고 강하게 의사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또 나름대로 아웃도어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고 해서 그분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에서 우금티로 향해가는 역사트레킹 팀. 가는 도중에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가야 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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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금티로...

 


가는 중간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을 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 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다.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밤송이가 바로 그것이다.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다. 선두에 선 필자는 이렇게 외쳤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유독 장염에 걸린 참가자 분이 가장 많이 밤송이에 찔렸다. 트레킹화가 아닌 가벼운 신발을 신고 와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건, 밤송이 지뢰밭 통과 이후부터 그 분이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에 가시가 찔리면서 복통이 완화된 것인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역사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염으로 고생한 분도 무사히 완주를 해주셨다. 공주토박이 분은 '공주 사람도 모르는 길을 개척하고 안내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모두 다 완주를 해주고, 저런 칭찬을 들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 우금티 우금티.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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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주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잘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참가자들이 이번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이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다.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년이 한 갑자이니 120년이면 두 갑자가 되는 것이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선 역사트레킹 팀. 그곳에서 갑오년을 떠올렸다. 단순히 트레킹을 소비(?)했던 것이 아니라 발전적이고 확장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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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11월 초에는 우금티 추모제가 개최된다.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되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진지한 숙고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건과 발언들이 넘쳐난다. 그 중에서 요즘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이인호 KBS 이사장이 해주었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아니다.(10월 22일, 한국방송 국정감사)"
"(조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타협하면서 사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9월 9일,<한겨레신문>과의 전화통화)"


자신의 조부를 구명하고자 김구 선생까지 매도하는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에 앉아 있다. 이렇듯 '친일매국'의 후손들은 요직에 앉아 느긋하게 부모세대들의 친일에 대해 항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무슨 일본의 군국주의 침탈에 대해 왈가불가 하는가? 일본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정과 친일파 후손들의 항변이 서로 맥락이 다른 것인가? 이인호 같은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부비판은 그저 쇼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쇼!

우금티에서 돌아가신 영령들은 그런 쇼를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 혹시 이런 말씀들을 하지 않을까?

"아이고~ 재미없다!"

 

 

 



덧붙임
<공주역사둘레길>은 아직 정식으로 개통되지 않은 길입니다. 내년 봄을 목표로 표식 작업을 완성한 후 개통할 예정입니다. 제 사비를 털어서 표식 작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우금티와 공산성을 이어서 걷다! 공주역사둘레길 탐방기

 

공주역사트레킹 1편

 

14.10.28 11:36 최종 업데이트 14.10.28 11:36

 

 

 

 

 

 

 

기사 관련 사진
▲ 공산성 공산성 성곽길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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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공산성을 연결하여 사람들과 걷고 싶었다

 


필자는 올해 초에 세웠던 계획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실행했다. '2014년 버킷리스트' 중에 한 가지를 달성한 것이다. 작심삼일로 깨진 계획들을 보며, 항상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연말을 맞이했는데 올해는 나름대로 흡족하게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충남 공주에 있는 우금티와 공산성을 연결하는 도보여행길을 개척하고, 그 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이 그토록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와 그토록 가고자 했던 공주성(공산성)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 사람들과 함께 트레킹을 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제주올레와 지리산둘레길 등, 이미 600개가 넘는 도보여행길이 있음에도 굳이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새로 연결하고자 했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실 필자는 도보여행을 하고, 트레킹 코스를 개척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달리 말하면 도보여행만큼은 남들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재능을 살려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고자 했다. 문인들이 시나 소설로, 예술인들이 춤이나 노래로 갑오년의 정신을 계승했듯이 필자는 도보여행길을 만들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했다. 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길을 트레킹을 통해 직접 걸어보는 것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도보여행자들이 역사의 한 장면을 걸을 수 있게,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필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명감은 '공주역사둘레길'로 결실을 맺게 됐다.

 

 

 

 


기사 관련 사진
▲ 금남루 공산성 금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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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다마? 시작부터 이상 징후가...

 


지난 10월 18일. 역사트레킹 팀은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 공산성에 도착했다. 트레킹을 하기에 '딱'인 날씨였다. 가을 햇살이 좀 강한 것 외에는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웃도어에서 날씨가 좋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하지만 청명한 가을 하늘과 달리 필자의 머릿속은 잿빛이었다. 트레킹 시작부터 좀 이상 징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가자 중에 한 명은 충남 공주 토박이였고 또 다른 참가자는 시작부터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 참가자는 공주 시내에 있는 병원에까지 다녀왔다.

'호사다마인가? 이번 트레킹 성사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다고 해도 장염에 걸린 참가자는 어쩌지... 미리 구급차 길이라도 봐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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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트레킹 참가자 공산성 성곽을 걷고 있는 참가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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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역사둘레길'의 시작점은 공산성이다.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
"앗!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예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

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금강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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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

 



 

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린다.

이후 영조 11년,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이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사람이 떡을 받쳤대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예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

또 그 토박이 분이었다. 이번에는 필자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다. 필자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ㅁ'이 'ㄴ'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예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

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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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성당 공산성 다음 코스가 바로 이 중동성당이다. 중동성당은 1937년도에 완공된 유서가 깊은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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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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