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이거 놀고 먹는 펀딩이 아니었네!



봉수대에서 바라보는 일품 풍광, 안산 역사트레킹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12월 20일까지 진행합니다. 그 프로젝트 연재글을 알맞게 편집·수정하여 오마이뉴스에 기고할 예정입니다. 이번글은 3편입니다. - 기자 말 


           


    

 
▲ 안산에서 본 인왕산 안산 봉수대에서 바라 본 인왕산의 모습. 능선을 따라 늘어선 서울성곽이 보인다. 왼쪽 뒤로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 곽동운









나를 설득 해봐요!

"이번에 또 펀딩하니까 한 번만 더 도와줘요!"


얼마 전 만난 지인과의 대화. 나는 능청스럽게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 프로젝트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어차피  돈 벌려고 펀딩을 하는 건 아니었다. 지인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터라, 난 저렇게 능청을 떨면서 돈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냥 편안하게.

"전에 한 번 했었잖아요. 그거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야."
"한 번 했다고 두 번 못하라는 법 있어요. 그냥 하는 거지."
"어차피 인건비도 못 뽑을 거면서... 괜히 돈 냈다가 허무하게 공수표 되는 거 아니에요?"

"뭐 그러겠죠. 그런데 어차피 돈 벌려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냥 하는 거지."
"팔자 좋네. 부러워 정말.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데..."
"부럽기는... 뻔히 사정 알면서. 그리고 펀딩하면서 욕도 많이 먹는 거 알잖아요."


툭툭 말을 던지는 지인. 그걸 또 툭툭 맞받아치는 나. 지인과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저렇게 이야기를 해대도 지인은 속이 깊은 사람이다.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니까. 지난번에 행한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펀딩에도 거액(?)의 후원금을 내게 쥐어줬었다.

"자 그럼 내가 지갑을 또 열 수 있게 나를 설득해 봐요. 그냥 도와달라는 말은 사절합니다!"

나는 주변 사람을 설득시키지 못하면, 제3자도 설득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본 프로젝트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기본적인 취지에서부터, 다른 펀딩과의 차별성 등을 차례로 설명해나갔다. 본 펀딩의 사회적·공익적 역할 부분에서는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까지 이야기를 해댔다.   

"잠깐, 전이나 비슷하네... 그건 그렇고 방금 말한 리워드 중심이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아, 리워드 중심이요. 리워드 중심 프로젝트라는 건..."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은 기획할 때부터 리워드에 방점을 찍고 시작했다. 다른 프로젝트들이 에코백이나 도서 같은 현물을 리워드로 제공하지만 내 프로젝트는 '트레킹 초대' 식으로 리워드가 제공된다. 그렇게 리워드 트레킹이 5회가 제공되기에 창작자인 나는 후원자들을 5번 이상 만나게 된다.

확실히 다른 프로젝트들과는 차이가 나는 지점이다. 이것을 두고 나는 리워드 중심 프로젝트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 부분은 앞선 1화에서도 언급을 했었다. 지인은 그때서야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쉽게 이야기를 하지. 뭘 그렇게 어려운 단어들 써가면서 말을 해요."
"음... 이게 어려운가요?"
"한마디로 자기 돈 만 원 내고, 트레킹에 참여를 한다는 거잖아요. 내 말이 맞죠?"
"맞아요. 딱 그 말이에요."


역시 날카로워! 그런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펀딩을 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런 날카로운 지적이 오히려 필요했다.

"리워드 중심이니, 뭐니 하는 어려운 말을 쓰지 말고, 해당 트레킹 코스의 매력에 대해서나 이야기를 해봐요."
"예... 매력이요?"

"그게 현실적이지. 백날 리워드 중심이니, 창작자와 후원자가 만난다느니 하는 소리하지 말고요. 뭐하러 그 구리구리한 얼굴을 보러 가겠어!"
"쩝..."


"처음 간다는 곳이 어디에요? 안산이라고 했나요?"
"네. 서대문 안산이요. 경기도 안산 말고."
"그럼 그 안산의 매력에 대해서 읊어 봐요."






▲ 봉수대 안산 봉수대 전망대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중국인 유학생들. 근처에 연세대가 위치해 있어 유학생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 곽동운





서대문 형무소와 다크 투어리즘

안산 역사트레킹은 서대문 형무소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시다시피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에 항거했던 독립 운동가들이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인해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곳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독립운동가들만 시련을 당했던 것은 아니다. 작고한 김근태 의원 같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분들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런 아픈 역사 때문인지 서대문 형무소는 다트 투어리즘(dark tourism)의 대표적인 장소로 손꼽힌다. 다크 투어리즘은 전쟁이나 학살, 천연재해 등을 당한 곳을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즉 다크 투어리즘은 아픈 기억을 가진 지역을 탐방함으로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로 착안된 테마여행 방식인데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만약 당신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동남아 쓰나미 피해를 입은 지역을 방문했다면 다크 투어리즘 여행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다크 투어리즘을 확대해보면, 서울도 곳곳이 다 그 탐방지에 속할 수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던 경복궁, 한국전쟁 중에 폭파가 됐던 한강철교 등등... 서울만 그러겠는가. 전국이 다 다크 투어리즘 천지다. 5·18 민주화운동, 충북 영동 노근리 학살 등등... 동학농민군이 몰살을 당한 공주 우금치도 다크 투어리즘의 최적지일 것이다.



 

▲ 서대문 형무소 안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대문 형무소.
ⓒ 곽동운







안산과 인왕산

그렇게 서대문형무소를 지나 본격적인 안산 역사트레킹이 시작된다. 안산(鞍山)은 그 형태가 말 위에 올려놓은 안장과 비슷하다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鞍'는 '안장안'자다.

안산은 인왕산과 무악(毋岳)재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지금은 통일로가 놓여 있는 무악재는 무학재로도 불린다. 이처럼 한끝의 차이는 왜 나타났을까? '무악'이나 '무학'이나 똑같아 보이는데.

조선이 개국할 즈음에 천도 예정지로 거론된 곳은 한양, 계룡산, 안산 세 곳이었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 하륜은 안산 주산론을 펼치며 안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었다. 이에 이성계는 실제로 안산 남쪽 부근을 도읍지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안산의 남쪽은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이유로 안산 주산론은 폐기되고, 무학대사의 의견에 따라 북악산 남쪽이 도읍지로 결정된다. 이런 이유로 무악재가 무학재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무악재는 말안장 같은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고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렸다.

나는 이전에 안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인왕산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은 인왕산이 아닌 이곳 안산입니다. 저기 보세요. 정상부 능선 따라 이어진 서울 성곽의 윤곽을요."

괜한 말이 아니다. 안산 정상부에 올라서면 봉수대와 함께 전망대가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인왕산의 모습은 좀 색다른 멋이 있다. 통상적으로 바라보는 경복궁 방면의 인왕산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봉수대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면 어떻게 이 산이 내사산(內四山:작은서울)과 외사산(外四山:큰서울) 속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그 때문에 나는 이런 멘트를 덧붙였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나 산이나 비슷한 거 같아요. 한 발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봐야 제대로 냉철하게 볼 수 있는 거 같아요."

안산 봉수대 전망대의 또 다른 매력은 한강 너머로 보이는 낙조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한강이 시원하게 보이는데 그 한강에 붉은 기운이 감돌 때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안산의 명소인 메타세쿼이아 숲 탐방도 꼭 해야 한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시원스럽게 뻗어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눈이 다 상쾌해진다.


 

▲ 안산 봉수대 봉수대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 커플.
ⓒ 곽동운





이런 설명들을 들은 지인이 입을 열었다.

"음... 가볼만 한 거 같긴 한데요."
"진짜 가보면 말로 들은 것보다 더 좋아요."
"그런가..."


헤어질 시간이 됐다.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지인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아참 각 코스들 다 1만 보 이상 걷죠?"
"당연하죠."
"그럼 운동이 꽤 되겠네요."
"그럼요. 아주 많이 됩니다. 스트레칭도 쭉쭉 하고."
"리워드로 모이는 사람이 전부 다 합치면 75명이 된다고 했죠?"
"네 맞아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지인이 내게 미소를 보이며 말을 했다.

"그럼 공익성은 있네요. 그냥 놀고먹는 펀딩이 아니었네. 그 많은 사람들 1만 보 이상 운동시켜주니까요."
"맞아요. 이제야 제 펀딩을 좀 이해를 해주시네!"
"잘하면 보건복지부에서 상 받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좋죠. 상금도 빵빵하게 주면 더 좋고. 그럼 제가 한 턱을...!"
  









* 능안정: 안산은 행정구역상 북아현동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 이곳은 능안리로 불렸던 터라 능안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있다.  













 * 안산 자락길: 서대문 안산 자락길 표식
        








요즘도 가끔가다 이런 질문을 받는다.

"트레킹으로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런 질문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입 속에서 우물거리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지만 대응능력은 예전보다는 좀 더 나아졌다.

"우리나라에서 글만 써서 밥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요?"
"거의 없지 않나요."
"그렇죠. 거의 없죠. 이 트레킹 바닥은 그것보다 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걷기열풍이 휘몰아치지 않았던가. 그에 편승되어 각 지자체에서 앞 다투어 도보여행길을 개설하지 않았나. 그렇게 만들어진 트레일(trail:오솔길)이 무려 2만km가 넘는다. 또 아직까지도 사그라지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길 열풍은 또 어떤가.

참 아이러니컬하다. 그렇게 트레킹에 대한 물리적인 저변이 크게 확장됐음에도 트레킹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니! 

솔직히 나도 트레킹만으로 먹고 사는 입장이 못 된다. 얼마 전에도 시멘트 포대를 좀 날랐다. 각기목도 나르고. 공사판에서 일을 했던 것이다. 또 요즘은 추석 시즌이라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공사장일도 농장일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 자리에서 일당을 딱딱 받는 재미가 있으니까. 또 삼시 세끼를 규칙적으로 먹을 수 있어서 그것도 좋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트레킹으로 먹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적어도 트레킹과 관련된 일로 생활이 가능하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 필자: 남도의 어느 임도 길에서.     




● 트레킹의 정확한 어원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더 많이 답사를 다니고, 더 많이 자료조사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적절할 때 '아재 개그'를 터뜨려서 참가자들의 배꼽을 빠뜨리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트레킹이든 답사여행이든 재밌어야하니까.

어쨌든 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트레킹의 어원을 잘못 쓰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아래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다.

최근 몇 년간 거세게 일어났던 도보여행 덕분일까? 우리는 트레킹(trekking)이라는 낯선 단어를 꽤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하물며 이 글의 서두에서는 '트레킹으로 먹고 살 수 있냐'는 질문까지 적시되어 있다.

그렇듯 우리는 트레킹이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고 있다. 그것도 그냥 액면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접두사까지 붙여서 사용한다. 힐링트레킹, 숲길트레킹, 봄꽃트레킹 등등...








 * 공산성: 공산성 성곽길을 걷고 있는 도보여행자.      
        





한마디로 '트레킹'이란 명칭은 이제 우리에게 '등산'이란 단어만큼이나 친숙해진 말이 됐다. 하지만 트레킹이란 말은 자주 입에 올려도 그 어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싶다.

트레킹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인들이 소달구지 등을 이용하여 정처 없이 이동한다는 것을 그 어원으로 두고 있다. 여기서 보어(bore)인들은 네덜란드에서 지금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즉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의 원주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은 백인이었고 네덜란드어를 썼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트레킹(trekking)이라는 말도 네덜란드어 'trek(끌기, 이동)'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일부에서는 보어인들을 남아프리카 원주민으로 잘못 설명하고 있다. 남아프리카의 원주민은 흑인인 줄루족인데도 보어인들을 원주민으로 잘못 지칭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원 설명도 뒤바뀌어 버렸다. 네덜란드 이주민들이 썼던 말을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썼던 말로 잘못 설명한 것이다.

그 설명대로 하자면 넬슨 만델라도 보어인이 된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때문에 온갖 박해를 받은 넬슨 만델라가 보어인이 되는 것이다. 보어인들은 아파르트헤이트를 정책을 만든 장본인들이다.

어원 설명이 잘못되다보니, 나머지 사실들도 뒤죽박죽이 된 것이다. 참고로 만델라는 줄루족이 아닌 템부족 출신이다. 줄루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수 종족이다.

일부 도보여행 전문가들의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온라인 백과사전에도 그런 식으로 트레킹의 어원 설명을 잘못 기재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안은 확실하게 개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삼신봉: 지리산 삼신봉. 1284고지에 위치한 삼신봉. 저 곳에 올라서면 지리산의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져진다.










● 트레킹 VS 등산

사실 트레킹의 어원이 네덜란드이든 남아프리카이든 걷기에 나선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걷기가 트레킹으로 불리든 도보여행으로 불리든 배낭을 둘러메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트레킹의 장점일 것이다. 트레킹의 효용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동어반복이 될 수 있다. 트레킹 좋은 거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차라리 누구나 다 아는 트레킹의 장점을 나열하는 것보다 등산과 비교하는 것이 더 알찬 일이 될 것이다.

등산은 '산에 오른다'라는 말처럼 수직적인 개념이다. 이에 비해 트레킹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산에 올라야 하기에 등산의 등판각은 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에 비해 산 주위를 둘러가는 트레킹은 등판각이 완만하다. 거의 평지를 걸을 때도 있다. 그렇게 완만한 길을 걷기에 등산보다는 관절에 부담이 덜 한 것이다.

관절의 부담만 덜한 것이 아니다. 심장의 부담도 덜하다. 등산 시에는 종종 호흡이 가팔라지지는 경우가 있지만 트레킹을 할 때는 그렇게 심장박동이 빨라질 일이 별로 없다. 그렇게 완만함이 유지되다 보니 접두사가 붙여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풍류, 역사, 봄꽃, 인문학 등등...

그런 접두사들은 테마로 도출된다. 한마디로 테마트레킹이 되는 것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헥헥' 거리는 게 아니라 느긋하게 걸어 다니니 설명을 하고, 이야기를 듣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추석 연휴도 막바지를 향해간다. 한 해의 소출을 거두는 귀중한 시기를 맞이한 것이다. 가을걷이가 이루어지는 들녘은 언제 봐도 풍요롭다. 수확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농부들의 미소가 달덩이처럼 보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도 모두 다 보름달 같은 미소로 추석 연휴를 즐기셨으면 좋겠다. 나도 보름달 같은 미소를 짓고 싶다. 그리고 올해는 머뭇거렸지만 내년에는 당당히 답을 하고 싶다.

"트레킹으로 먹고 살 수 있어요?"
"네, 많이는 못 벌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 안산 자락길: 안산 자락길을 산책하는 모습.









* 공주역사트레킹: 공산성 위에 선 후원자님. 뒤로 보이는 강이 금강이다.  





* 관악산 역사트레킹: 장승들 앞에 선 후원자분들.







9월 3~4일.


그날도 어김없이 저는 트레킹을 했습니다. 어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열심히 걸었지요. 하지만 그날 트레킹에 참가한 분들은 남다른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냐?


바로 제게 후원금을 내주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들은 제 후원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108일 동안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이라는 펀딩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 스토리펀딩이라는 플랫폼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죠. 크라우드 펀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리워드'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리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창작자가 후원자들에게 주는 답례입니다.


통상적으로 리워드로 많이 지급되는 것이 엽서, 머그컵, 에코백 등등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저런 것들을 리워드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트레킹이라는 이름으로 펀딩을 한 만큼 트레킹에 초대하는 것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관악산 역사트레킹: 후원자분들과 함께 서 있는 나. 맨 오른쪽. 땀으로 범벅이 됐다-_-







* 공주 역사트레킹: 우금티 고개에 선 나. 그날 햇살이 강해서 그랬는지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렇습니다. 리워드를 트레킹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리워드 트레킹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리워드 트레킹이 9월 3일과 4일에 진행됐습니다.


3일에는 공주 역사트레킹이 실시됐고, 4일에는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진행됐습니다. 두 날 모두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 아쉽기는 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오셔서 함께 걸었으면 좋았을텐데...


특히 공주 역사트레킹 같은 경우는 쉽게 행할 수가 없답니다. 일단 제가 미리 가서 답사를 해야 합니다. 또 이동시간도 꽤 깁니다. 서울에서 하는 트레킹보다 적어도 1시간 이상 더 걸리니까요. 그러니 참가자들도 부담, 저도 부담이 되지요. 비용도 만만치 않고요. 어쨌든 더 많은 분들이 오셨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_-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나름의 특색이 있는게 트레킹의 매력입니다. 공주 역사트레킹 같은 경우는 1:1 맨투맨으로 트레킹을 했습니다. 관악산 역사트레킹의 경우는 3명의 후원자와 함께 행했습니다.





* 공주 역사트레킹: 공산성 광복루에 선 후원자 분. 저 광복루라는 이름은 김구 선생께서 직접 붙이신 것이다.








* 공주 역사트레킹: 공주성당.








트레킹 하기 좋은 가을날 후원자분들과 함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습니다. 후원자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펀딩이 사실 많지가 않답니다. 실제로 만난다고 해도 티타임이나 강연 정도이고요. 후원자가 능동적인 입장이 되어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행운아입니다. 후원자들과 직접 만나 트레킹을 행했으니까요. 서너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었으니까요. 저같은 창작자도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함께 걷는 길 서울 트레킹>이라는 펀딩을 또 하고 있답니다. 후원자들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또 펀딩을 개설한 것이죠. 이번 펀딩에는 리워드 트레킹을 5개를 배치해서 후원자들들 5번 이상 만날 계획입니다. 5번 이상 그들과 만나 웃고 떠들고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가을은 은근히 바쁠 것 같습니다. 소출이 기대되는 올가을입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8179  <--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


 



* 관악산 역사트레킹: 메타세콰이어 숲에 선 후원자분들.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12월 20일까지 진행합니다. 그 프로젝트 연재글을 알맞게 편집·수정하여 포스팅 할 예정입니다. 여기에서는 <함께 걷는 서울역사트레킹>으로 이름을 바꿔서 올릴 생각입니다. 실제로 '서울트레킹'보다는 '서울역사트레킹'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함께 걷는 서울역사트레킹_ 다음스토리펀딩 1편

올 해는 소출이 좀 있었다!







 ▲ 남산 남산 서울성곽       







우리나라는 서울공화국이다.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끌어들이는 서울. 그 서울이 싫어 누구는 '탈 서울'을 꿈꾼다. 귀농, 귀촌, 주말농장, 혹은 제주살이. 명칭만 다를 뿐 서울을 떠나는 이들의 이유는 비슷비슷할 것이다. 각박한 삶, 끊임없는 경쟁, 웃음기 잃은 얼굴들...




다시 서울로

역사트레킹 강사인 나도 '탈 서울'을 꿈꾸었다. 서울과는 더 이상 궁합이 맞지 않는 내 자신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지금 이 글도 백두대간인 삼봉산이 올려다 보이는 경남 거창군 고제면이라는 곳에서 쓰고 있다. 거창 귀농학교라는 곳에서.

하지만 나는 다시 서울로 상경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귀농하려다 실패해서 다시 리턴하는 것인가? 아니다. 현재 귀농학교에서 기거를 하고 있지만 나는 농사를 지을 실력이 못 된다. 귀농은 아무나 하는가!

귀농학교는 내게 집필 장소이자 생태교육의 장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우리 농촌과 우리 산하의 이해의 폭을 넓혀 왔다. 위쪽으로는 덕유산, 아래쪽으로는 지리산이 가까운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한마디로 이곳은 강원도를 빰치는 아웃도어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웃도어 천국인 곳을 뒤로 하고 나는 왜 다시 서울로 돌아가려 하는가? 서울이 역사 도시이기 때문이다. 서울도 뚜껑 없는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각박함, 스트레스, 공해 등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단어들 너머로 숨어 있는 서울의 유적지와 그 유적지를 탐방할 수 있는 도보여행길이 내 시야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 진관사: 북한산에 위치한 진관사의 대웅전

 





성곽길이 곡선을 그리며 나가는 인왕산, 계곡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는 북한산성, 낙조가 아름다운 안산의 봉수대... 남도가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을 품고 있다 해도,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서울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사람이다. 역사트레킹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어요?"
"서울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니요!"


그런 말을 내게 하며 미소 짓던 얼굴들. 그렇게 미소를 지으며 물과 간식거리를 건네주었던 따뜻한 마음들. 그런 고마운 미소와 마음들 때문이라도 더 열심히 리딩을 하고 싶어 했던 내 모습. 그런 아름다운 모습들이 내게 서울로 가는 티켓을 다시 끊게 했던 것이다.

두 말하면 잔소리지만 결국은 또 사람이다.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망나니들만 만났다면 나는 진작 트레킹 리딩을 때려치웠을지 모른다. 돈도 안 되는 일에, 거기다 망나니들까지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시라!






 ▲ 안산 봉수대 서대문 안산의 정상에 자리잡은 봉수대. 중국인 관광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작은 서울과 큰 서울

서울은 작은 서울과 큰 서울로 나눌 수 있다. 작은 서울은 내사산(內四山)이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북악산, 낙산, 목멱산(남산), 인왕산이 바로 그 내사산이다. 이 내사산들을 따라 한양도성이 축조됐던 것이다. 즉 작은 서울은 사대문 안쪽을 말한다.

이에 비해 큰 서울은 외사산(外四山) 안쪽을 뜻한다. 북한산, 아차산, 관악산, 덕양산(행주산성)이 외사산이다. 아시다시피 조선건국 초기의 서울은 도성 안쪽이었다. 하지만 이후 서울은 계속 팽창해 나갔다. 그렇게 팽창해 나갔지만 외사산을 넘지는 못했다. 현재 서울의 행정구역은 외사산 안쪽에 위치해 있다. 아무리 도심지가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자연지형까지 뛰어넘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 작은 서울, 큰 서울은 내 트레킹의 단골 소재로 이용됐다. 이번 주는 작은 서울, 다음 주는 큰 서울. 그 다음 주는 좀 멀리가고. 계속 그런 식으로 트레킹을 해왔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만났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 볼 일 없는 나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쳐주었고, '선생님'이라는 호칭까지 붙여줬다. 아이고, 낯 뜨거워! 그러고 보면 트레킹은 나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매개창구였던 셈이다.





▲ 인왕산 서대문 안산에서 바라본 인왕산. 산 능선을 타고 서울성곽이 구축되어 있다. 왼쪽 뒤편에 있는 산은 북한산이다.  







올해는 소출이 좀 있었다!

'덥다 덥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슬슬 외투를 챙겨 입어야 할 계절로 들어섰다. 그렇다. 이제는 가을로 진입했다. 야외활동하기에 제격인 계절로 들어선 것이다.

사실 이 글은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 1편을 오마이뉴스에 싣기 위해 편집한 글이다.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은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실시하는 프로젝트로 9월 1일에 오픈하여 111일간 진행된다.

트레킹 하기 좋은 계절에 시작해서 올해가 끝나는 시기에 종료되는 펀딩이다. 정확히 12월 20일에 종료가 되는데 그때가 동지다.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 연재가 마무리된다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지난 3월에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이라는 펀딩을 이미 실시한 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올해에만 펀딩을 두 개를 실시하는 것이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난생 처음으로 펀딩을 해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후원을 받아봤고,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시작해서 '선생님' 소리도 들었다. 이 정도면 소출이 좀 나왔다고 할 만하다.

이제 나는 그 소출을 더 늘리기 위해 다시 서울로 복귀할 것이다. 그렇게 서울로 복귀를 하면 남도의 넉넉한 들녘이 내 시야에서 계속 아른거릴 것 같다. 내가 남도에서 서울성곽길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 서울트레킹 서울트레킹, 정확히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참가했던 분이다. 앞쪽에 있는 한옥 구조물은 창의문이다. 창의문은 사소문 중에 하나로 작년에 보물로 승격됐다.      






* 북악산 역사트레킹: 북악산 역사트레킹에 참여한 참가자들. 저런 울창한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것이다.  

     









 
  

 

 















* 수표교: 장충단 공원 안에 있는 수표교 앞에 선 참가자들.










"소나기라도 안 내리나? 이런 날씨에 무슨 트레킹이야! 더워 죽겠구만!"



2016년 8월 16일.



찌는 듯한 폭염이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광복절 전후로 폭염이 꺾인다는 기상청의 발표는 그저 무색할 따름이었죠. 정말 망설였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에 무슨 트레킹입니까!


그래도 약속은 약속입니다. 아무리 덥다고 해도 일정을 변경을 할 수는 없겠죠. 중간에 에어컨이 빵빵한 커피숍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발걸음을 떼야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덥더라고요. 오죽했으면 제가 소나기가 내렸으면 하는 기원까지 드렸겠습니까!


앞선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렛츠런 문화공감센터에서 역사트레킹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16일은 서울내부 역사트레킹이 행해진 날이었습니다. 폭염에 대한 염려의 마음을 한가득 안고 집합장소인 청구역에 도착했습니다.


렛츠런에서 행하는 트레킹은 모임 인원이 20명인데 이날은 9명이 오셨더군요. 아무래도 날씨 때문에 참가율이 저조했던 것 같습니다.


두둥~ 드디어 첫걸음을 옮겼습니다. 태양은 뜨겁게 내려째고 있었고, 지열은 이글이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서울내부 역사트레킹 코스는 응봉이라고 불리는 산등성이를 타고 갑니다. 산등성이라고 하지만 해발이 낮아서 누구나 다 오를 수 있는 코스죠. 그래도 산을 오르려면 오르막 길을 올라야 하잖아요. 그런 오르막이 초반에 있답니다. 그 초반 오르막을 지나면 숲길을 지나는 터라 걷기는 편하죠. 참가자 분들이 도보여행에 익숙한 분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초반 오르막 길을 무사히 잘 오르시더군요.







*버티고개: 버티고개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참가자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날 트레킹도 모든 분들이 완주를 해주셨답니다. 땀을 뻘뻘 흘리기는 했지만... 그래서 옷이 완전 젖었지만... 아참 출발하기 전에 제가 참가자 분들에게 손수건을 나눠 드렸습니다. 일명 '역사트레킹 손수건'이었는데 나름대로 디자인이 예쁘다고 하시더군요. 그 손수건으로 땀도 닦으시고 그러더군요. 하여간 잘 나눠드린 것 같습니다.


저도 다른 모임 때보다 아주 천천히 리딩을 했답니다. 사실 저도 무척 힘들었으니까요. 사실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요.


하여간 쉽지 않은 트레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했더니 기억에 많이 남는 모임이 되었답니다. 보람도 컸습니다.


그래도 9월 달 트레킹은 좀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성곽: 서울성곽 구간에 선 참가자들.













 







더운 요즘입니다. 수박 한 덩이가 간절하게 그리운 계절이네요.


휴가철이라 많은 분들이 피서를 떠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휴가를 못 떠납니다.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고, 여행작가이기도 한데... -_-


하지만 며칠 전에 저에게 시원한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역사트레킹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정식으로 런칭을 했고, 모집 공지도 문화센터 홈페지에 정식으로 올라왔더군요.


한겨레문화센터는 제가 수강생 입장으로 방문을 했던 곳인데... 이제 저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 강사 타이틀을 얻게 됐네요.





 

* 한겨레문화센터: 역사트레킹 패키지. 이번 가을 학기에는 총 5회 실시한다. 패키지를 구매하면 10%를 할인 받는다.









물론 저는 다른 문화센터에서도 역사트레킹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겨레문화센터는 인지도 면에서나 영향력에서나 다른 문화센터보다는 좀 남다르잖아요.


그래서인지 한겨레문화센터에 역사트레킹이 런칭된 것이 정말 감격스럽더군요!


런칭이 확정됐을 때는 좀 울컼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삼 시 새끼를 빵 뜯어 먹으며 답사다녔던 기억들, 당사자는 무심코 내뱉었지만 내게는 비수가 되었던 이야기들,


지독하게 내렸던 빗줄기 때문에 어느 마을회관 처마에서 오도가도 못했던 그 때, 그때 내 얼굴에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그 때의 기억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만 기어이 그런 기억들이 제 눈 앞에 떠오르더군요.









* 인왕산 역사트레킹:  이번 가을 학기의 첫번째 스타트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이 끊는다. 9월 24일에 실시된다.








세상 참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제가 문화센터에서 강연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지요. 정말 세상일 알다가도 모를 일이죠.



하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도 계속 역사트레킹을 해왔으니까요. 대신 자만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더 열심히 길을 걷고, 자료를 더 많이 습득해야겠습니다.


또한 열심히 아재 개그를 준비해야겠습니다. 참가자들이 은근히 아재 개그를 좋아하거든요... ㅋ



클릭 ---> 역사트레킹         













*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참가자 분들.






 

​   * 전단: 역사트레킹을 알리는 렛츠런문화공감센터의 전단 










7월 12일 화요일.


일기예보에는 분명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진다고 했지만... 날씨가 화창했습니다. 기상청 예보대로 움직였으면 그날 트레킹을 못할 뻔했지요.


이날 저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했습니다. 제가 7월 달부터 렛츠런문화공감센터에서 역사트레킹을 런칭했는데 이날이 첫 시작일이었습니다.  사실은 일주일 전인 5일 날이 첫 개강일이었지만 그날 호우경보가 내려서 한 주 연기가  것이지요. 


어렵게 시작한 만큼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제가 문화센터 강의는 처음이라 긴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는 역사트레킹을 많이 리딩을 했지만요...


좀 덥기는 했지만 그래도 트레킹 하는데 양호한 날씨였습니다. 또한 인왕산 트레킹의 특징이 전반부만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숲길로 갑니다. 그래서 초반 30분 정도만 버티면 때양볕 걱정은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죠.


이날 참가를 해주신 분들은 트레킹에 대한 이해도가 무척 높으셨습니다. 제가 바짝 긴장을 할 만큼...^^;


트레킹에 적극적으로 임해주셔서 제가 다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부족한 저의 설명도 경청을 해주셔서 감사했고요. 그래서인지 한 분의 낙오자도 없이 모든 분들이 다 완주를 해주셨습니다.


또한 얼마나 저를 잘 챙겨주시는지... 먹을 것도 엄청 얻고 먹었습니다. 또 어떤 분께서는 제게 모자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날 제가 모자를 쓰고 가지 않았거든요. 제가 챙겨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제가 넉넉한 인심을 누리고 온 것이죠.


보람찬 하루였습니다. 이 맛에 트레킹 리딩을 하는 거겠죠! 카아~!



이 포스팅은 간략한 스케치입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정식 포스팅이 궁금하신다면


 

클릭 ☞ http://blog.naver.com/kwakmaster/220736534015


 









* 성곽길: 곡선미가 넘치는 서울성곽






* 수성동 계곡: 수성동 계곡에서. 뒤로 인왕산이 보인다.





​*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 뒤쪽에 있는 시인의 언덕에서.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하이힐을 신고 성곽길을?


성곽길을 걷는 서울시티트레킹

 





이제 역사트레킹 펀딩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역사트레킹 펀딩 기간은 108일입니다. 108일이면 충분히 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기간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못 다한 이야기가 넘쳐나네요. 한편으로는 펀딩이 빨리 종료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원고를 작성하는 게 만만치 않았거든요. 여기에 올린 글들은 기 발표작들입니다. 그것들을 펀딩 플랫폼에 맞게 수정을 가했지요. 그런데 수정하는 게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새로 작성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으니까요.


어쩌면 역사트레킹 펀딩은 제게 108번뇌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번뇌를 벗어나고자 저는 계속 허우적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허우적거리다보니 이제 종료를 코앞에 두게 됐네요. 시간이 참 빠르죠!


후원자분들! 파티란에 리워드 트레킹 공지 올렸으니 확인해 주세요. 보충 트레킹도 올려놨으니 꼭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화에서는 서울시티트레킹을 소개해 봅니다. 서울시티트레킹은 '서울시티투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가보면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이 버스를 타면 서울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2층 버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면 좋겠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보려면 역시 자신의 두 발로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요.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정상에 버스를 타고 올라갈 수는 없으니까요!


한편 서울시티트레킹은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자매편입니다. A코스, B코스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될 듯싶네요. 인왕산이 스토리텔링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나눈 것이죠.

 




 

* 소녀상






 

꽃 한 송이가 놓여 있는 소녀상

 

서울시티트레킹은 조계사와 그 옆쪽에 자리 잡고 있는 우정국 탐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정국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1884)을 일으킨 곳입니다. 일명 '3일 천하'로 불린 갑신정변은 임오군란(1882)과 함께 개화기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정변 주동자들의 의견과 너무나 큰 간극을 보였던 당시의 조선 상황, 정변 당사자들의 과도한 일본 의존 등으로 갑신정변은 '그들만의 리그'로 막을 내렸고, 주동자였던 김옥균은 중국 상해에서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정변 주동자들은 일본을 맹주로 한 '대동합방론'과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후쿠자와 유키치의 충실한 모범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에 메이지유신을 '이식' 시키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 만 것이죠.


갑신정변이 발생한 곳인 우정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대사관이 있고, 그 앞에는 위안부소녀상이 꿋꿋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92년부터 개최된 수요집회는 2012년에 1000회를 맞이하게 됐고, 그 기념으로 본 위안부소녀상이 건립되었습니다.


누구는 위안부소녀상이 외롭고 처량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2인용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일본 정치인들의 끊임없는 망언들을 생각하면 그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소녀상이 외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소녀상을 방문할 때마다 꽃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꽃이 아니라 매번 다른 꽃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어떨 때는 과자나 그림 같은 것들이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소녀는 벤치에 홀로 앉아 있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친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녀상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행사. 뒤로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다음 탐방지는 광화문입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입니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 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광화문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무지개문)을 셋이나 내서 격식을 높였습니다.


궁궐은 ''''이 합쳐진 말인데 ''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맙니다. 광화문 앞에 화기를 막으려고 세운 해태상이 있었음에도 불에 전소되었던 것이죠.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임금의 피난)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갑니다. 급기야 백성들은 궁궐에 불을 놓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해태상을 세운다고 한들, 강력한 소방시설을 갖춘다고 한들 성난 민심 앞에서는 그저 무용지물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지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8월에 완공된 것입니다. 사실 광화문은 1968년에 중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져 버렸던 것이죠.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입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 동십자각. 도로 위에 섬처럼 떠있다.






 

섬처럼 떠 있는 동십자각

 

광화문에서 동쪽, 삼청동 방면으로 가다보면 누각 하나가 껑뚱하게 떨어져 나와 있습니다. 광화문 인근이라서 그런지 자동차들이 쉴 세 없이 그 앞을 지나고 있지요.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대형 버스들도 많이 지나갑니다. 도로 한복판에 툭 튀어 나온 누각을 보고 있다 보면 마치 섬이 하나 떠 있는 느낌이듭니다.


도로 한복판에 외떨어져 나온 누각은 앞서 언급한 동십자각입니다.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동쪽의 방위 초소 역할을 했던 곳이죠. 서십자각은 서쪽 방위 초소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담벼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왜 지금처럼 끊겨져 있는 걸까요? 이것 역시 일제에 의해 끊기게 됐습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남쪽 담벼락을 다 헐어버렸습니다. 그때 광화문도 이전을 하게 됐지요.


돌담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철책선이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구한말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십자각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단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한편 동십자각이 감시초소였던 만큼 그 역할은 무척 중요했습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인 자객들도 동십자각을 점령한 후 경복궁 내부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동십자각은 서십자각 보다는 상황이 더 낫습니다. 서십자각은 아예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 사이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는데 그때 서십자각을 철거했던 것입니다. 멀쩡한 광화문을 옮겨버리고, 담장을 헐고, 누각도 철거시키고...


그러고 보면 일제도 반달리즘을 저지른 셈입니다. 반달리즘은 로마의 유적들을 파괴했던 반달족들의 반문명적인 행위를 빗댄 명칭입니다.

 

 



* 서울성곽




 

인왕산과 서울성곽

 

이제 서울성곽을 오를 차례입니다. 18km에 달하는 서울성곽은 조선의 도성이었습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기준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멱산(남산)을 둘러서 만든 성곽입니다. 이 산들을 묶어 내사산이라 부릅니다.


북악산은 원래 백악산이라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북악'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런 도성에는 4대문이 있는데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 북쪽에는 숙정문, 서쪽에는 돈의문(서대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서대문은 없지요.


인왕산에 올라서면 성곽과 함께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입니다.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는 서울 중심부입니다. 이를 두고 저는 '작은 서울'이라 칭합니다.


그럼 '큰 서울'은 어디일까요?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아차산(용마산), 서쪽으로는 덕양산(행주산성)을 두고 외사산이라 부르는데 그 외사산의 안쪽 지역을 '큰 서울'이라고 불렀습니다.


서쪽 지역만 빼놓고는 지금의 서울 행정권역과 얼추 비슷합니다. 한양천도 이후, 서울의 확장은 계속됐지만, 지형적인 굴레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 서울성곽. 급경사를 타고 내려가는 참가자. 딱 봐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모든 참가자들이 완주를 해주셨다는 점이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급경사를 타는 서울성곽

 

서울성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요새를 구축했습니다. 산사면의 급경사를 이용하여 적의 침략을 대비한 것이죠. 한마디로 매우 급한 경사면에 성곽이 구축됐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경사면이 급하면 급할수록 방어력은 증강될 테니까요.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서울성곽길은 걷기가 만만치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걷다 보면 발바닥에 불이 난다는 뜻이지요.


물론 평지구간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평지 구간은 도시화로 인해 성벽이 거의 다 허물어졌지요.

간혹 서울성곽길을 좀 만만하게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전 트레킹 팀원 중에서도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께서 하이힐을 신고 오셨던 것입니다. 트레킹 리딩자로서 참 난감하더군요.

     

"! 제가 분명히 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고 오라고 당부 드렸는데요."

"앞에는 그냥 평지고, 서울성곽길 걷는다면서요..."

 

서울성곽은 여러 번에 걸쳐 개축됐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토성이었고, 이후에는 주위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됐습니다. 그러다 조선 후기 숙종시대에는 두부 모양의 장대석이 올려지게 됩니다.


이렇듯 서울성곽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마치 600년이란 시간이 퇴적층처럼 돌들에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랫돌은 옛날에 쌓여 '누리끼리'한데 그 이후에 축성된 돌들은 하얀색입니다. 윗돌과 아랫돌이 서로 '시간 퇴적층'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아참! 그 하이힐 신은 분은 어떻게 됐냐고요? 다행이었습니다. 그 분도 끝까지 완주를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참가자분들이 완주를 해주시면 저는 정말 뿌듯하더군요. 물론 조마조마 하기는 했지만...

 

 





* 독립문. 독립문을 지나고 있는 참가자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마지막 탐방지는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입니다. 독립문은 잘 아시다시피 독립협회에서 자주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문입니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문이죠.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든 문이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자주독립'은 분명 한계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독립의지는 확고했으나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이권침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했으나 일본의 이권 침탈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함의가 있어서 그랬는지 독립문은 일제강점기에도 헐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서울시티 투어를 떠납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설명을 듣고, 분주히 사진을 찍어 됩니다. 외국인들이 이렇게까지 서울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데 우리가 그들보다 서울을 더 모르면 안 되겠지요? 우리도 열심히 서울에 대해서 배워 보자고요.


그렇게 배우다보면 역사도시 서울의 매력에 푹 빠질 겁니다. 그 매력에서 허우적거리다보면 주말마다 배낭을 꾸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손에는 서울 역사지도를 들고 있을 거고요.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초대형 태극기.





 

 

서울 시티트레킹

 

1. 코스: 조계사 소녀상 광화문(동십자각) 황학정 서울성곽(인왕산) 서대문형무소(독립문)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토박이와 함께 한 공주역사트레킹

 

 

이번 트레킹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다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제 리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중간에 집에 가버리는 분. 그것도 아무런 말씀도 없이... 험한 서울 성곽길을 걷는데 하이힐을 신고 오신 분. 트레킹에는 관심이 없고 이성의 연락처를 얻는 데만 혈안이 되신 분 등등...


몇 해 전, 가을경에 행했던 공주역사트레킹에서도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바로 공주 토박이 분이 참가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공주 시청에서 근무하는 분이 참가를 한 것입니다. 좀 긴장이 되더군요. 괜히 밑천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기까지 했습니다.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 원래는 서 있었는데 지금은 쓰러져 있다. 120여 년 전, 우금티에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그런지,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애잔해진다.






 

토박이에게 선수를 빼앗기다!

 

공주역사트레킹의 시작점은 공산성입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봉준 부대가 가고자 했던 성이 바로 공산성입니다. 공주성이 공산성이라는 것이죠.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습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습니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도 개·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 진남루: 공산성 진남루. 남쪽에 위치해 있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습니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


!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습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에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

 

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산책로: 공산성 산책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

 

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습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립니다.


이후 영조 11,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입니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습니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습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더군요.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사람이 떡을 받쳤데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에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

 

또 그 토박이 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습니다. 저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닙니까!

 

“‘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에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

 

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습니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번데기 앞에서는 주름을 잡는 게 그렇게나 힘들 줄이야!

 

 





* 임류각: 공산성 임류각. 백제 동명왕 시대 건축물이다. 1980년대 복원한 것이다.






 

공산성을 떠나 우금티로 향하는 길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습니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공주 분들은 이를 두고 공주대간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렇게 공주대간을 타고 가는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들을 간략하게 했습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을 걷고 있는 트레킹팀.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습니다. 복병은 바로 밤송이들이었습니다. 공주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가 가을경이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밤 막걸리에서 보듯, 공주는 밤의 고장 아닙니까?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지요. 선두에 선 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여곡절 끝에 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우금티터널: 우금티 아래를 지나고 있는 우금티 터널.





 

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습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습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지요.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습니다. 당시 참가자들이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입니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투표날에 놀러가지 말고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었지요.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맛에 역사트레킹을 하는 것이겠죠.

그렇게 하여 공주역사트레킹은 잘 종료가 됐습니다. 트레킹을 마친 후 그 토박이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공주 사람도 잘 몰랐던 길을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랜만에 엄청 걸었네요. 힘들어도 재밌었어요.”

 

공주 토박이 분에게 그런 칭찬의 말을 들으니 정말 기분이 좋더군요. 코스를 잡기 위해서 100km 이상을 탐방을 했었는데 그게 물거품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중간에 뱀들과 사투(?)를 벌이며 탐방했던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초반에는 좀 스텝이 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번데기 앞에서 제대로 주름을 잡아본 하루였습니다.

 

 



* 우금티: 우금티 조형물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트레킹팀.




 

공주 역사트레킹

 

1. 코스: 공산성 중동성당 금학생태공원 우금티

 

2. 이동거리: 11km

 

3. 소요시간: 4시간 30분 정도(휴식시간 포함)

 

4. 난이도:















문경새재에서 온 몸으로 설명하다!

- 문경새재 역사트레킹


"아까 전에 말씀 드렸죠. 펠리페 2세 시기에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 스페인 무적함대가 임진왜란이 있기 4년 전인, 1588년에 영국의 드레이크 함대에 의해 칼레에서 대파를 당합니다. 칼레는 도버해협 중에서 도버 반대편에 있던 프랑스 땅이랍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을 한 후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뗐습니다.

 

 





* 주흘관: 제1관문 주흘관. 뒤쪽에서 바라본 모습.





 

온 몸으로 설명하기

 

"임진왜란 때, 일본군 수군이랑 당시 무적함대랑은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닮은 점은 둘 다 수군이면서, 한편으로는 강력한 지상군이었다는 점입니다. 둘 다 래밍(ramming, 상대방 배에 부딪히기)과 보딩(boarding, 상대방 배에 올라타기) 전법을 썼는데 그렇게 했다가 둘 다 크게 패했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이 말을 끝낸 후 저는 몸을 틀어서 참가자들이 제 옆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른팔로 대포를 쏘는 시늉을 했습니다.

 

'빵빵빵'

 

"당시 판옥선은 제자리 선회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현에서 대포를 쏜 다음에 바로 뱃머리를 돌려서 좌현에 있는 대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빵빵빵'

 

그 말대로 저는 제자리에서 몸을 돌렸고, 이번에는 왼쪽팔로 대포를 쏘는 시늉을 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수군의 주력함인 세키부네는 속도가 빨랐을지 몰라도 선회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이 설명을 할 때는 판옥선 때와는 달리 작은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조일전쟁 당시 판옥선의 특성을 일본군의 주력 함정과 비교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 몸을 설명 도구로 썼던 셈이지요. 이때 참가자 중에 한 분이 '~'라는 외침을 내뱉더군요.


어떤 참가자는 고개를 끄떡이며 응답 해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온몸으로 표현해서 그랬던가요? 제 설명이 영 ''은 아니었나 봅니다.


위 설명은 제가 문경새재에서 행한 것입니다. 2관문인, 조곡관을 바라보면서 설명을 했었답니다. 조곡관은 비밀의 정원 같은 아름다운 곳이죠. 그렇습니다. 이번화는 문경새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문경새재 역사트레킹을 하는 것이죠.

 






* 백두대간 조령






 

 

우리나라 고개는 스토리텔링의 보고

 

성씨가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지켰다는 성삼(性三), ‘경사가 가팔라서 오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미시령(彌時嶺), ‘남쪽에 높은 고개라는 남태령(南泰嶺), ‘밤에는 소들을 끌고 넘을 수 없다는 우금(牛禁)티 등등...


우리땅은 산이 많은 만큼 그 산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고개도 많습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도 다양했습니다. ‘’, ‘’, ‘()’등으로 불리기도 했고, ‘여우고개처럼 그냥 고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개를 넘는 이들의 사연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선비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고개를 넘었고, 보부상들은 장시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종교인들은 포교를 위해 넘었겠지요. 이렇듯 고개는 많은 이들의 발자국을 담아낸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흘러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룻밤의 사랑 이야기부터 귀신에 홀린 이야기까지...


그렇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었던 고개는 스토리텔링의 보고였습니다. 그런 고개들 중에서도 문경새재의 스토리텔링은 더욱더 두드러졌습니다.

 

 




* 문경새재 과거길: 3관문, 조령관 앞쪽에 세워져 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문경새재를 넘었던 선비들

 

새재는 새들도 넘기 힘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자로 풀면 조령(鳥嶺)이 됩니다. 3관문, 즉 조령관이 위치한 곳의 해발 고도가 642m인 만큼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습니다. 서울남부를 지키고 서 있는 관악산의 정상고도가 629m이니, 조령의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물론 해발 1,102m인 성삼재나 826m인 미시령 앞에서 높이를 말한다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겠지만...


문경새재는 영남대로(嶺南大路) 상에 놓여 있습니다. 조선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며, 전국을 ‘X'자 형태로 연결하는 도로망을 구축합니다. 그렇게 하여 6개의 대로(大路)가 탄생하게 되는데 영남대로도 그 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고갯길을 제쳐두고 문경새재가 우리나라의 으뜸 고갯길로 꼽히는 이유도 문경새재가 영남대로 상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문경(聞慶)이라는 지명 이름도 문경새재의 격을 높여주는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과거를 보러 나서는 경북 영주나 강원도 삼척의 선비들은 가까운 죽령을 넘지 않았습니다. 경북 김천이나 성주 등지의 선비들도 추풍령을 넘지 않았습니다. 죽령은 주욱 미끄러진다라고 해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해서 기피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대신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다라는 뜻을 가진 문경이기에 과거길에 나서는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필수코스처럼 밟고 지나갔습니다. 심지어 전라도 지역의 선비들까지 문경새재를 넘으며 합격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의 마음은 비슷한 거 같습니다. 조그만 징크스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이렇듯 문경새재는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았고, 그로 인해 조선의 으뜸 고갯길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 선 발자국들이 모두 다 좋은 걸음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 조령관: 3관문인 조령관을 지나고 있는 참가자들.







 

조령과 조일전쟁(임진왜란)

 

1592414.


부산포에 왜군들이 상륙합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20만 명은 파죽지세로 북상합니다. 그러다 조령을 앞에 두고 잠시 숨고르기를 합니다.


당시 조령 앞에서 주춤했던 일본군은 고니시유키나와가 지휘하는 제1부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부대였습니다. 이들이 숨 고르기를 한 건 조령의 지세가 험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시 일본군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고 하지만 낯선 곳에서 험한 지형지물을 만나면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고니시유키나와는 수차례에 걸쳐 조령을 정찰했다고 합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부대가 큰 타격을 입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쾌재를 부릅니다. 그 험한 조령을 지키는 조선군 부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군을 이끌었던 장수는 신립이었는데 그는 조령이 아닌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조령이 험준한 골짜기라면 탄금대는 기병전이 가능했던 개활지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잘 아실 겁니다.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크게 패배하고 맙니다. 조총으로 무장한데다 백병전까지 능한 일본군을 상대로 개활지에서 싸운다는 건 승산이 없는 게임임에 분명합니다. 그럼 왜 신립 장군은 조령이 아닌 탄금대를 선택했을까요? 신립하면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기병술을 전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군들이 보병 위주였기에 기병의 말발굽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습니다. 보병은 기병의 공격에 취약한데다 신립 자신이 기병술에 능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탈영병 문제와 연락체계 문제 였습니다. 산 중에서 진을 치다보면 시야가 가려질 테고, 그 틈을 타 병사들이 탈영을 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오합지졸인 당시의 조선군이기에 산악보다는 개활지에서 진을 쳐야 그나마 연락체계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 사진 중앙 상단부에 살짝 고개를 내민 봉우리는 부봉이다. 겨울철 눈이 많이 온 후 조곡관을 방문하면 색다른 장면을 볼 수 있다. 조곡관 넘어 부봉에 눈이 덮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 참 장관이다.




426, 고니시유키나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조령을 넘었고, 탄금대에서 조선 육군을 격파합니다. 탄금대 패배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 52일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합니다.


만약 신립이 탄금대가 아닌 조령에서 일본군들의 북상을 막았다면 어땠을까요? 험준한 산악지형을 방패삼아 게릴라 전술을 취했다면 어떤 결과가 도출됐을까요? 한편 다음과 같은 시각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원된 병사들이 오합지졸인 농민군이라는데 의병에 참여한 이들도 제대로 훈련이 안 된 농민들이 주축이었습니다.


같은 오합지졸인데도 후자쪽은 승전보를 울렸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오합지졸을 승리의 용사로 만드는 것도 장수의 책무라는 겁니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다지만 문경새재 트레킹을 하다보면 그런 가정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더군요. 이 고지에 궁수들을 배치하고, 저쪽에서는 매복을 하고... 자신 스스로가 조령 방어 사령관이라고 생각하고, 가상으로 병력을 배치해보는 것도 문경새재 트레킹의 또다른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 지름틀 바우: 기름을 짜는 '지름틀'과 유사하다 하여 '지름틀 바우'라고 이름 붙여진 바위. 지름틀은 경상도 방언이다. 하지만 필자는 저 바위를 '악어 바위'라고 불렀다. 제1관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그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문경새재에 방어시설이 들어 선 건 1594년의 일입니다. 충주 사람인 신충원의 건의로 지금의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 이후 숙종대에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 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 세 개의 관문은 제각기 다른 멋이 있습니다. 1관문인 주흘관은 넓고 평평한 터에 세워져 있어 성곽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성문이라고 합니다.


산 중 깊은 곳에 위치한 제2관문인 조곡관은 조곡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앞으로 계곡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죠. 조곡관의 계곡물은 적군의 침입을 방해하는 역할도 하지만 관광객들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만큼 조곡관은 비밀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관문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제3관문인 조령관은 조령 정상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조령관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세워져서 그런지 주흘관과 달리 북쪽을 향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외적 방비를 위해서 세워진 관문들이지만 딱히 그 기능대로 쓰인 적은 없었습니다. 대신 그 관문들 덕택에 다른 고개들보다 문경새재는 더 안전해졌지요. 시험 징크스 때문에 고집한 것도 있지만 다른 고개들보다 새재가 더 안전했기에 선비들의 발걸음이 문경으로 향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 주흘관: 제1관문 주흘관.






 

경사스러운 소식을 많이 듣고 싶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너무나 안 좋은 소식들만 들려옵니다. 귀를 막고 싶어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귀를 막는다고 막아지겠습니까?


기왕 들을 소식이라면 경사스러운 소식을 많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문경(聞慶)이라는 말처럼, ‘경사스러운 소식이 많이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문경새재를 한들한들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문경새재는 초보자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수 정도로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한들한들거리며 거닐어 볼 수 있을 겁니다. 마치 바람을 타고 나는 나비처럼요.

 

 




* 옛길 박물관: 문경새재 입구쪽에 있다.






문경새재 역사트레킹

 

1. 코스: 수옥정관광단지(괴산) 3관문 2관문 1관문 옛길박물관(문경)

 

2. 이동거리: 9km

 

3. 소요시간: 3시간 30분 정도(휴식시간 포함)

 

4. 난이도:

 

 

 

 

 

 

     * 연풍새재: 충북쪽 새재를 연풍새재라고 칭한다. 문경쪽 반대편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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