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량사 극락적, 오층석탑, 석등: 귀중한 유물 세 개가 동시에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부여의 단풍

 

 

 

 

---> 전편에 이어

 

 

# 대조사의 석조관음보살입상

 

 

장하리를 떠난 답사단은 임천면 대조사로 향했다.

대조사는 부여 천도를 위한 밑돌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백제 성왕이 천도를 앞두고 직접 대조사의 창건을 명했다고 하는데, 사찰터를 지목한 사람은 유명한 백제의 고승 겸익이라고 한다. 겸익은 성왕의 명을 받고 인도로 직접 가서 범어를 배우고 돌아온 최초의 백제 승려였다. 성왕이 직접 창건을 명하고, 겸익이 그 사찰의 터를 지목하였던 만큼 사비시대의 대조사는 의리의리 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현재의 대조사는 어마어마한 사찰이 아니다. 대조사가 있는 임천면 성흥산에 올랐을 때의 첫 느낌은 ‘뭐야 왜 이렇게 작아’였다. 우리동네 관악산에 있는 사찰보다도 더 작은 대조사였다. 물론 사찰을, 물리적인 공간의 크고 작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성왕과 겸익이 창건에 힘을 썼다면서?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하는데 신호탄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서...

 

 

 

# 고려 초기 석불: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하지만 그런 ‘외소 콤플렉스’를 일거에 날려버릴 석불이 있었다. 바로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무려 10미터가 넘는 큰 키를 자랑하는 ‘거인’과도 같은 풍모였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얼굴은 어찌나 큰지 ‘얼큰이’ 같았다. 머리에 쓴 네모난 관도 매우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석상이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옆 동네 논산 관촉사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도 고려 초기의 작품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럼 왜 고려 사람들은 선이 굵으면서, 개성이 넘치는 이런 큰 석불을 제작했을까? 이전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사람들보다 정교성이나 세공 기술이 떨어져서 이런 식으로 석불을 제작을 했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고려시대 사람들의 기술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은 당시 그 지역, 중부지방 일원의 민간신앙이 접목된 석불이었다. 마치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석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마을의 수호와 안녕부터 개인적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를 제작했던 것이다. 삼국시대 귀족불교에서 출발한 불교문화가 통일신라를 거친 후 고려 초기 시대에 각 지역의 민간신앙과 어떤 식으로 접목이 되었는지 탐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한편, 재미있는 것은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약 18미터)보다 키가 작을지 모르지만 보물로 재정된 순번은 더 빠르다는 것이다. 대조사 석불이 보물 제217호이고, 관촉사 석불이 보물 제218호다.

 

대조사는 경내가 작지만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어 큰 사찰이 됐다. 10미터가 넘는, 그것도 천년의 세월을 이겨내며 꿋꿋이 성흥산 일대를 굽어보는 석불이 있는 사찰이 작다고 표현을 하면, 그거 큰 실례일 것이다. ‘대조사는 아담하기에 차분하게 경내를 둘러 볼 수 있어 좋았다. 큰 대조사 석불이 있어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 있겠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멀리 아래쪽에서 찍어봤다.

 

 

 

* 대조사의 건물들과 석조관음보살입상: 대조사는 경내가 작은 사찰이었다. 하지만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어 결코 작은 사찰이 아니었다.

 

 

 

 

 

 

이제 일행은 무량사로 향했다. 무량사는 외산면 만수산에 위치해 있다. 무량(無量)사의 뜻은 셀 수 없다는 뜻이다. 세월도, 돈도, 삶조차도 셀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곳 무량사에 들어서면 셀 수 없단다. 무량사를 탐방했을 때가 11월 3일이라 세상은 이미 늦가을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저 강원도 지역은 이미 단풍철이 지났다고 했다. 하지만 무량사는 늦가을의 정취가 남아 있었다. 올 가을은 단풍놀이다운 단풍놀이를 못하고 넘어가나 했더니 무량사에서 단풍을 제대로 구경했던 것이다. 문화재 관람과 단풍놀이를 동시에 즐겼던 셈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우리문화답사 여행을 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문화 유적을 탐방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대자연의 정취에 녹아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이 만든 유물과 유적은 자연의 조화를 중시해 제작을 했다는 뜻이다.

 

 

 

# 방랑시인 김시습의 흔적이 곳곳에 베어든 천년 고찰 무량사

 

무량사는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세조에 의해 단종이 폐위된 사건을 보고 천재 시인 김시습은 세상을 등지고 정처 없이 유랑길에 나선다. 그렇게 유랑생활을 계속하다 말년에는 이곳 무량사에 머무르게 되고, 결국에는 병환으로 서거하게 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59세였다.

 

이렇듯 무량사는 김시습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유명한 무량사 극락전의 편액을 김시습이 직접 썼다고 한다. 당시 극락전은 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마땅히 시주할 것이 없었던 김시습은 글씨로서 시주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편액 글씨로서 재능 나눔을 했던 셈이다.

 

김시습의 유려한 서체가 빛나는 극락전은 외형도 참 웅장하다. 외부에서 보면 2층 기와집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1층이다. 위아래를 터버려서 하나의 층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극락전 내부에 모셔진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도 키가 크다. 본존인 아미타불상이 무려 5.4미터라고 하는데 동양 최대 규모라고 한다. 극락전 외부가 크고 웅장한 만큼 내부의 삼존불상도 크고 화려했던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무량사는 2층 전각 구조를 가졌다. 극락전은 조선 중기 시대에 재건축되었는데 다층 구조를 가진 건축물은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이 유명하다. 억불 정책에 의해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에서 크고 웅장한 다층 구조의 사찰 건축물이 들어섰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승병장들의 활약으로 인해 천대받던 불교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곡창지대에 있는 사찰들을 중심으로 큰 건축물들이 들어서게 됐다고 한다.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충북 보은 팔상전 등이 대표적이다.

 

 

 

# 무량사의 자랑: 무량사 오층 석탑

 

무량사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량사 오층석탑이다. 오층석탑은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층 한층 올라가지만 안정감을 잃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7미터 이상으로 쌓여 올린 탑은 고려 전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앞서 본 장하리 삼층석탑과는 좀 다른 인상이 느껴진다. 이런 장중하면서 안정감을 강조한 오층석탑이 무량사 극락전 앞에 서있다.

 

또 오층석탑 앞에서는 석등이 하나 서있다. 일명 무량사 석등이다. 이 역시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석등을 맨 앞으로 하여, 오층석탑과 극락전이 연이어 서있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조밀한 공간에 세 개나 있다는 건, 보는 이에게 새 배 이상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답사는 외산면 반교마을과 홍산면 홍산관아 탐방으로 이어졌다. 반교마을은 돌담길이 잘 정비된 곳인데 현재 유홍준이 ‘휴휴당’이라는 집을 짓고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이다. 유홍준은 자신이 반교마을 청년회 회원이라고 힘주어 말해 답사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홍산관아는 옛 관아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곳이다. 관아는 고을의 수령이 직무를 보던 곳으로 지금의 군청이나 읍사무소의 역할을 했다. 대신 조선시대 수령들은 사법권도 행사하고 있었기에 관아에는 자체적으로 감옥도 갖추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330여 곳에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후 관아들은 다 파괴되거나 원형을 잃게 된다. 그나마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한 관아가 바로 홍산현 관아라는 것이다.

 

홍산관아 탐방을 끝으로 하루 동안의 짧은 부여 답사여행이 끝이 났다. 좀 더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 했다. 하긴 한 번 오고 다시 부여에 안 올 텐가?

 

이렇게 좋은 답사여행을 준비해주신 유홍준 선생님과 눌화출판사에 감사를 드린다. 유홍준 선생님은 우리나라 문화 답사의 붐을 일으킨 주범(?)으로서 앞으로도 더 많이 답사여행 가이드에 나서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책에 기술된 유적 앞에서 독자들을 위해 마이크를 든 저자 유홍준의 모습은 참 행복해보였으니까!

 

 

 

 

 

* 무량사 극락적, 오층석탑, 석등: 차례로 위치해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무량사 극락전: 조선 중기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외부에서는 2층으로 보이나 사실은 천장이 높은 1층이다. 층간을 터버려서 내부는 1층으로 만든 것이다.

 

 

 

*무량사 오층석탑: 한 층, 한 층 올려진 모습이 안정감 드러낸다. 고려 초기 작품으로 백제와 통일신라 기법이 어우러진 석탑이라고 한다.

 왼쪽 하단에 있는 꼬맹이 녀석은 오층석탑이 좋은지 탑돌이를 하는 것 같다.

 

 

 

 

 

*홍산 관아 객사: 조선시대에는 전국 팔도에 330여 고을이 있었고, 그 고을마다 관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관아들은

거의 다 사라져 갔다. 홍산현 관아는 비교적 원형복원이 잘 된 곳이라고 한다.

 

 

 

 

 

* 홍산현 관아 객사: 조선시대 객사에는 임금과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가 안치되었다고 한다. 수령은 임금을 대신하여 고을을 다스리기에 그에 걸맞은 징표를 객사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사는 수령이 근무하는 동헌보다 더 격이 높은 곳이라고 한다. 한편 동헌은 객사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헌이라고 불린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김새와 조각기법 등이 논산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안동 이천동 석불상, 관촉사 석불 등 고려 초기의 석불 등은 위 사진처럼 아주 거대한 크기로 제작됐다. 전체 높이가 10미터가 넘는 대조사 석상은

그냥 봐도 투박하다. 인체 비례도 맞지 않다. 이천동 석상이나 관촉사 석상도 마찬가지다. 왜 고려 초기 사람들은 이토록

투박하고 '얼큰이' 같은 석불을 제작했을까? 그들의 조각 실력이 미천해서???

 

 

 

 

* 대조사 뒷길 단풍: 대조사 탐방을 마친 후 임천면 면사무소 방면으로 길을 걸을 때 이 단풍나무들을 만났다. 생각지도 못한 단풍놀이를 해서 무척 흥이 났다.

 

 

 

 

 

---> 이 여행기는 유홍준 선생님과 함께 하는 부여답사기에 참여를 하고 작성한 포스팅입니다. 현재 충남 부여에 둥지를 튼 유홍준 선생님은 부여문화원의 요청으로 2009년 4월부터 부여답사 여행에 가이드를 하시고 계십니다. 1회 답사여행의 정원은 80명인데, 유홍준의 네임밸류가 있어서 그런지 접수와 동시에 마감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부여문화원을 통해서 부여답사를 한 게 아닙니다. 눌와출판사라는 곳에서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2>가 새롭게 나왔는데, 신간 발행 기념으로 답사이벤트를 진행했고, 저도 운이 좋게 답사에 참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눌와출판사 탐방단 일행 40여 명은 부여문화원이 주관한 답사에 서로 결합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11월 3일에 있은 부여답사 일행은 총 120명이나 됐답니다. 뜻깊고 알찬 행사를 주관해주신 눌와출판사와 부여문화원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저도 좋은 답사여행을 했고, 현장에서 바로 책도 한 권 구매를 했습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라는 책을 사서 유홍준 선생님에게 직접 저자 사인도 받았습니다.

 

아! 정말 이런 문화 체험이벤트는 정말 좋습니다. 저자도 만나고, 책에 기술된 현장에 대한 답사도 하고. 꿩먹고 알먹고...ㅋ 기회가 닿는다면 <유홍준의 국보순례>에 대한 서평도 한 번 써보고 싶네요.

 

 

 

 

 

# 아웃도어와 문화답사

 

나는 아웃도어 여행을 즐겨하는 터라 단독여행이나 소규모 여행을 선호한다. 그래서 가이드 여행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여행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고, 할 필요도 못 느꼈다. 가이드여행이라면 여행의 주도권을 내가 아닌 가이드들이 행사하는 것인데, 그것이 별로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행의 주체자는 어디까지나 내 자신 스스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사고방식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 미처 내 시선이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들을 가이드들이 짚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여행의 주도권은 잠시 접어야 한다. 나는 그런 것이 ‘거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행가이드가 유홍준이라면?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저자이자 문화재청 청장을 역임한 유홍준이라면? 그거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유홍준이 가이드를 해준다면 여행의 주도권을 잡시 접어둔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유홍준 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않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저서가 많은 것을 대변해주지 않는가 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유홍준은 참 복받은 사람이다. 그의 저작물들이 독서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그로 인해 유홍준이라는 이름 석 자가 대중들에 의해 각인이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책으로 인해 폭넓은 독서 계층을 확보한 저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소설가나 시인 같은 문인이 아닌 미술사 저작물을 통해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이 도대체 대한민국 지식인층에서 몇 명이나 될까 이 말이다.

 

더군다나 노무현 정권 시절, 유홍준은 문화재청 청장이라는 우리나라 문화재 행정의 수장으로서 그 이름을 날리지 않았던가. 그는 2004년 9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문화재청장 직을 수행했다. 유홍준은 3대 청장을 역임했는데, 솔직히 일반 대중들이 유홍준 이외에 다른 문화재 청장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현재 문화재 청장은 김 찬씨인데, 그는 6대 청장이다. 그런 대중적 관심도와 인기로 인해, 유홍준은 <1박 2일>이나 <놀러와>와 같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현을 했다.

 

 

 

 

* 장하리 삼층석탑과 유홍준 쌤: 유홍준 쌤은 특유의 언변으로 답사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부여의 가을: 단풍이 예쁘게 색깔을 머금고 있어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던 유홍준

 

 

하지만 그도 탄탄대로만을 걷지는 않았다. 기억하시는가? 2008년 2월에 있은 숭례문 방화사건을 말이다. 당시 신병을 비관한 한 남성이 불을 질러 숭례문이 전소된 사건 말이다.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그는 유럽 출장 중이었다고 한다. 국내에 머물고 있지 않았지만 국보 1호인 숭례문의 상징성 때문에 문화재 행정의 수장이었던 유홍준은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했다.

 

또한 유홍준은 풍운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1967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그는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해 미술사학으로 석사과정을 밟는다. 1967년부터 1981년 무려 14년의 시간적 간극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1967년부터 1981년 사이의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유홍준이 걸었을 길이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사실 그 기간 동안 유홍준은 학생운동으로 인해,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런 폭압적인 정치 세력과의 갈등과 고민, 우리문화에 대한 사랑은 <민족미술협의회> 발족으로 이어지게 된다. <민족미술협의회>는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비슷한 성향의 단체로 보시면 될 것 같다. 단지 구성원들이 다를 뿐 우리문화, 우리문학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공통분모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학문적 과정도 마찬가지다. 1967년 서울대 미학과 입학, 1981년 홍익대 대학원 석사과정(미술사학과), 1988년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과정(예술철학) 등 계속 학교를 옮겨 가면서 공부를 하게 된다. 학부, 석사, 박사 과정을 한 대학교에서 수학하는 통상적인 방식이 아니었고, 하나의 테마에 집착한 학문 과정도 아니었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가 다른 것을 보면 그가 걸어간 학문적 길이, 깊이보다는 넓이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유홍준의 면모를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 풍토상 '넓이'에 주안점을 두었으면 전문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폄하를 받지 않던가. 그럼 유홍준은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위에 언급 그대로다. 우리나라 지식인 풍토가 그리 너그럽지 못하지 않던가. 풍운아에 대한 대접을 적절하게 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번 부여 문화답사 행사는 눌와출판사에서 진행을 했는데, 신간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2> 발행 기념으로 마련된 것이다. 나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통해 본 행사에 지원을 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끝발’로 당첨이 되어 11월 3일(토요일) 부여 답사에 나설 수 있었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카메라 각도를 다르게 해보니 마치 석불이 숨바꼭질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 반교마을의 석등: 유홍준 선생의 반교마을 집에 있는 석등. 지리산 실상사에 있는 석등을 '카피'하여 세웠다고 한다.

 

 

 

 

* 유홍준과 나무들: 유홍준 쌤은 자신의 독자들과 사진을 찍는게 익숙하신지 아주 자연스러운 포즈를 지으셨다.

 그에 비해 나무들(필자)은 굳은 표정이다.ㅋ 뒤쪽에 서있는 여자분은 눌와출판사 직원 분이다.  

 

 

 

 

 

 

 

 

 

 

 

 

 

 

 

 

 

 

 

 

* 동강 단소길과 단풍: 동강산소길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형형색색의 단풍들

 

 

* 동강 산소길: 동강을 끼고 걸을 수 있는 참 좋은 도보여행 길이다.

 

 

---> 전편에 이어서

 

 

 

그렇게 산길을 오르다보니 옆에서 물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지곤 했다. 코너를 돌면 들렸다, 다시 길 안쪽으로 가면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 소리는 그냥 시냇물 소리가 아니었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아니라 세찬 물소리였다. 그렇다. 그 소리는 동강이 내뿜는 우렁찬 물소리였다. 그 우렁찬 강물 소리를 길벗 삼아 난 더욱더 걸음을 빨리 했다.


와!


내 입에서 외마디 탄성이 일어났다. 얼마나 멋있던지! 전망대에 바라본 어라연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산들을 이웃 삼아 동강이 휘돌아 나가는 모습은 말 그대로 절경이었다. 만약 잣봉에 오르지 않았다면 그런 멋진 모습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망과 옆에서 보는 광경은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여름에 오지 않고 가을에 온 게 훨씬 더 나았던 것 같다. 전망대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시야를 좀 가렸기 때문이었다. 여름이었으면 잎이 무성하여 어라연 일대를 조망하는 것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낙엽이 지는 계절에 왔더니 그런 제한에서 좀 더 자유로웠던 것 같다.

 

 

 

 

* 동강 산소길에서 바라본 어라연 일대

 

 

 

 

* 붉게 물든 동강산소길: 저렇게 예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한 일이다.

 

 

 

잣봉 정상에 올라 간단한 식사를 하고 나는 어라연으로 나아갔다. 빨리 가서 어라연을 더 자세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0분 정도의 산길을 내려갔더니 드디어 어라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강이 빚어 놓은 아름다운 절경을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곳은 U자형을 그리며 휘돌아 나가는 동강과 단풍으로 물든 울창한 숲, 그리고 기암괴석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강물에 비친 단풍나무와 기암괴석들의 모습이 마치 무릉도원을 연상케 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혼자서 호젓하게 볼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었다. 그렇다. 나 혼자 어라연을 ‘전세’냈던 것이다. 기암괴석에 박힌 형형색색의 단풍들을 보니 기쁨에 겨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런 식으로 단풍 구경을 하다니! 정말 나는 복 받은 놈이야!

 

다시 등산 원점으로 향해갈 때는 잣봉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강산소길을 걸었다. 동강산소길은 동강을 끼고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었다. 그 오솔길 주변으로는 오색찬란한 단풍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런 길을 걷다보면 누구다 시인이 될 거 같다. 누구나 다 가객이 될 거 같다. 그렇듯 나도 시와 노래를 읇조리며 동강의 가을을 만끽했다.

 

 

 

 

 

 

 

 

* 이정표: 잣봉과 어라연을 탐방하는데는 약 3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필자는 사진도 찍고, 게으름 좀 부리고 했더니 5시간 이상 걸렸다. 

 

 

 

 

* 동강 산소길: 동강 산소길을 걸으면 잣봉을 거치지 않고 어라연에 닿을 수 있다. 동강 산소길은 평지와 같은 트래킹 코스다.

 한편 기왕하는 거 표지판을 좀 좋은 것으로 설치하면 어떨까? 이정표가 좀 없어 보인다.  

 

 

 

 

* 동강과 나룻배: 단풍잎 사이로 사공 없는 나룻배가 보인다.

 

 

 

* 동강과 나룻배: 저 나룻배로 래프팅을 할 수 있을까?

 

 

 

* 동강

 

 

 

 

* 동강산소길: 힘차게 흐르는 동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세상 시름도 사라질 것 같다.

 

 

 

 

 

 

 

 

 

 

 

 

 

 

 

* 어라연: 어라연은 동강 중에서도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숙부에 의해 사사된 단종이 태백산 산신령이

되기 위해 황쏘가리가 되어 동강의 상류로 올라가려다 여기 어라연 일대에서 잠시 쉬어 갔다는 전설이 내려져 온다.

단종의 넋도 쉬어갈 정도로 어라연의 풍광은 일품이다. 그래서 필자도 잠시 쉬었다.

 

 

 

* 잣봉 어라연 전망대: 잣봉 정상 부근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다 본 어라연. 전망대에 올라서면 동강과 앞쪽에 있는 완택산을 둘러 볼 수 있다.

가을이라 나뭇잎들이 많이 떨어져서 시야 확보가 더 잘 되는 듯싶다.

 

 

 

 

동강 어라연에서 가을을 만끽하다!

 


하필 왜 강원도 영월군 동강으로 단풍여행을 하러 가는가? 동강이 레프팅의 천국인 만큼 여름 시즌에 동강을 방문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가 한 순간에 물밀 듯 사라진 곳의 황량함을 잘 알면서.

 

사실 이번 동강 단풍여행은 그런 점을 역이용하여 진행됐다. 단풍여행 하면, 우리는 설악산과 내장산부터 떠올린다. 그렇듯 동강으로 단풍여행을 하러 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필자는 영월군 관계자에게 직접 몇 개의 사안에 대해 확인을 해봤다. 그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가을시즌에 영월군의 숙박업소 예약률이나 택시이용률은 현저히 격감한다는 한다.

 

동강이 빛나는 시간은 확실히 여름 시즌이다. 뗏목을 젖고, 펜션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하지만 여름시즌의 동강은 바캉스 철의 유명 해수욕장처럼 내게는 기피 대상으로 등재되어 있다. 왜? 나는 호젓한 산행, 정숙한 트래킹을 좋아하니까! 외롭고 힘들지만 진짜 여행은 단독여행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아웃도어맨이니까!

 

천혜의 자연을 품고 있는 동강과 그 일대를 감싸고 있을 오색찬란한 단풍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나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영월행 버스에 올랐다. 주중 낮시간이라 그랬는지 고속도로는 아주 시원했고, 버스도 예상 시간보다 일찍 영월에 도착했다.

내가 동강 탐방의 목표로 삼은 곳은 영월읍에 위치한 어라연이다. 동강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라는 어라연은 영월군 시내에서 직선거리로 15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람들이야 손쉽게 접근을 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뚜벅이 여행가인 내게 그곳은 먼 곳이었다. 오직 시골버스만이 그 곳을 연결시켜 줄 수 있었다.

 

 

 

* 어라연: 기암괴석과 단풍이 어우러진 모습이 장관이다. 특히 바위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붉은 빛을 띄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 잣봉의 소나무: 소나무가 신기한 형상을 하고 있어서 한 컷 담아 보았다.

 

 

 

 

뚜벅이 여행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골버스 타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예전 섬진강 여행을 할 때였다. 그때도 난 시골버스를 타고 있었는데, 섬진강이 자아내는 멋진 풍광에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운전을 하다가 주위 풍광에 넋을 잃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머니가 가벼운 만큼 불편한 점도 있지만 그렇게 저렴하게 여행을 해서 얻는 이득도 있으니, 우리 너무 상심하지 말자.

 

버스에서 내려 난 산행 준비를 했다. 높은 곳에서 어라연을 조망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잣봉이었기 때문이다. 잣봉은 해발 500미터 정도 되는 야트막한 산으로 정상부근에 어라연 전망대가 있다. 험준한 산은 아니므로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산행을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동강의 어라연과 그 일대를 감싸고 있는 완택산 등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기에 후회 없는 산행이 되실 것이라고 생각된다.

잣봉은 매력적인 단풍을 품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단풍은 영월읍내에 있는, 단종 묘역인 장릉 일대가 더 색깔을 잘 머금었다. 또한 등산적인 면에서도 잣봉은 그리 매력적인 산은 아니다. 오히려 620고지인 우리동네 뒤편의 관악산이 난 더 좋다.

 

하지만 분명 잣봉은 매력적인 산이었다. 그 앞쪽에 있는 완택산도 마찬가지였다. 왜? 동강을 품고 있으니까. 동강의 어라연 일대는 큰 계곡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높은 산들 사이로 강물이 흐르는 형상이다. 이런 모습은 두물머리 인근의 한강의 지세와 유사점이 있다. 한강 일대 산행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코스가 있는데 그곳은 바로 남양주시에 위치한 예봉산 코스다. 경기도 양평군 두물머리 일대 산행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예봉산에 올라서면 바로 앞쪽에 있는 검단산이 눈에 잡힐 듯 잘 보인다. 반대로 검단산에 올라서면 예봉산이 눈앞에 잡힐 듯 잘 보인다. 그렇게 멋진 산들 사이로 한강이 흐르니 그 지역을 좋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수도권 지역의 한강 일대와 강원도 영월의 동강을 일대일 비교를 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강도 한강의 일부분이다. 동강은 남한강에 합수되고, 남한강은 북한강과 합수되어 한강을 이루지 않던가. 상류 지역인 동강의 아름다움이 한강 하류지역까지 계속 연결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 동강 어라연의 십자동굴: 혹시 저기에 용왕님이 살고 계시는 건 아닐까? 어라연이 속한 영월읍 문산리에서는 용왕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 어라연의 바위들: 그 모습들이 다 특이하여 나그네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 어라연의 바위들: 맨 왼쪽 바위는 사자바위, 두번째는 치타 바위다. 그냥 필자 임의로 이름을 붙여 봤다.

 

 

 

 

 

 

* 동강의 억새밭

 

 

 

 

 

 

 

 

 

 

 

 

 

 

 

 

 

 

 

 

* 설악산: 산봉우리의 걸린 흰구름을 보니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해지더라!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배 맛 탱크보이가 그리웠었다.

 

 

 

* 장수대: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설악전투의 전승을 기념하고, 설악산을 찾은 탐방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지은 'ㄱ' 형태의 한옥집.

 

 

 

 

---> 전편에 이어서

 

 

 

#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어찌하리요!

 

인제군 원통리의 지형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다. 북쪽으로는 명당산(764m)이 있긴 하지만 동쪽으로는 소양강을 향해 가는 북천이 흐르고 있어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원통리에는 원통체육공원도 자리 잡고 있다. 차라리 한계령을 품고 있는 한계리의 지형이 험하면 더 험한 듯싶었다.

 

원통(元通)은 원래 원산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설악산과 금강산을 넘으면 바로 원산이니 그런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리적인 의미의 명칭은 한국전쟁과 분단, 그리고 군사도시로 변모한 인제군의 모습 속에서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마음속에 ‘슬픈 아리랑’ 한 곡조씩을 품고 사는 강원도 군번들에게 ‘인제’와 ‘원통’이란 명칭은 심심풀이 땅콩 같은 푸념거리의 소스로 제격이었던 것이다.

 

원통에 대해서 왜그리 장황하게 이야기를 했냐고 필자에게 질책을 가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자전거여행을 하는 것인지 ‘명칭 따라 삼천리’를 하는 것인지 혼동스럽다고 비판의 화살을 내게 발사하는 분들도 계실 것 같다.

 

필자는 원통을 보면서 한국전쟁과 뒤이은 분단으로 인해 해당 지역 명칭이 일반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각인되는지에 대해서 주목을 해본 것이다. 예를 들어 지리산 피아골 같은 경우도 원래는 곡식인 피가 많이 재배된 지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리산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골짜기가 피로 넘쳐 났다는 변형된 의미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상식'으로 통하게 됐다는 것이다. 

 

 

 

 

* 설악산: 구름 덮인 산봉우리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 설악산

 

 

 

 

# 달려라 블루야크

 

한계령의 초입에 해당되는 한계교차로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12시 경이었다. 40Kg 달하는 자전거를 끌고 한계령을 넘기 위해서는 꼼꼼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행동식은 준비가 됐는가? 식수는 몇 통을 챙겼는가? 만약 밤샘 이동을 한다면 체력적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등등의 물음들에 대한 답을 충족시키려면 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계령이 어떤 곳인가? 설악산을 가로질러 동해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높디높은 고개가 아니던가!

 

한계교차로에서 46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 미시령 고개를 넘을 수 있고, 44번 국도를 타면 한계령에 다다를 수 있다. 인제군에서 만난 사람들은 인접 도시인 속초로 갈 때 주로 미시령 도로를 이용한다고 했다. 미시령은 터널로 연결됐기 때문에 보다 더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꼬불꼬불한 한계령을 이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서울에서 속초로 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주로 미시령을 이용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나아갔지만, 설악산의 속살을 다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난 콧노래를 부르며 나아갔다. 더군다나 차가운 개천이라는 뜻의 한계(寒溪)로 들어가는데 그 정도의 노고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확실히 자동차 여행과 자전거여행은 차이가 난다. 아무리 한계령이 험하다고 하지만 자동차로 1시간 정도면 반대편 양양군에 입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다보면 놓치는 것들이 많아진다. 공간을 빨리 이동할수록 인간의 두뇌가 ‘패스’시키는 지리적 장면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하긴 운전에 집중을 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 수많은 자연풍광들을 어떻게 일일이 다 지켜보겠는가.

 

비록 중고자전거지만 엄연히 내 자전거도 이름을 가지고 있다. 블루야크. 내 자전거가 푸른색이라 국내 모 아웃도어 브랜드 명칭을 빗대서 그렇게 지어본 것이다. 내 자전거가 무적 철TB라 히말라야 야크들처럼 튼튼하다는 의미에서 그런 네이밍을 붙여본 것이다. 다른 사람이 시비를 거는 것도 아니니까.

 

산중에서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어차피 야간 이동을 각오했지만 밤이 되니 덜컥 무서운 것이었다. 남는 건 사진이라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사진을 찍었던 터라 시간이 더 지체됐던 것이다. 나도 블루야크도 지쳐갔다. 이전의 여행들을 통해 많은 경험이 쌓였지만, 한밤중 산중에서의 이동은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 장수대

 

 

 

* 설악산

 

 

 

 

* 설악산: 한계령을 지나 양양 오색약수 방면으로 향하는 길

 

 

 

 

 

 

 

 

 

 

 

 

 

 

 

 

 

 

 

 

 

 

 

 

 

 

 

 

 

 

 

 

 

 

 

 

 

 

 

*홍로: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린 홍로

 

 

 

* 8월 초순의 홍로: 9월 초순이면 홍로는 먹음직스럽게 붉은 빛을 드러내지만 8월 초순의 홍로는 아직 여물지도 않은 그런 모습을 나타낸다.  

 

 

 

---> 2편에 이어서

 

 

 

 

 

"사과를 아기 다루듯이 해주세요!"

 

 

나는 여러농장을 다니면서 사과작업을 했는데, 여러명의 농장주분들이 이구동성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과를 아기 다루듯이 해달라는 그 말에 농부님들이 바라보는 사과에 대한 애착을 조금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다. 봄부터 계속된 고된 작업의 결실이 가을 추수 기간에 사과라는 아기로 그들 곁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농장주 분들의 피와 땀이 대변된 말이 내게는 좀 부담이었다. 투박한 내가 사과를 아기처럼 다루어야 하다니!

사과 수확 작업은 단순했다. 일단 사과 나무에서 색이 제대로 든 녀석을 골라 사과가위로 잘라내고, 무작위로 프라스틱 콘테이너에 담았다. 그런 후 선별장에서 '과'라는 단위로, 크기별로 골라낸다. 통상 선별장에서는 10과에서부터 20과까지 걸러내는데, 10과가 가장 큰 녀석이고 20과 쪽으로 갈수록 크기가 작아진다. 얼핏보면, 10과 짜리 홍로는 빨간색 호박처럼 보일 정도로 상당히 컸다.

 

 

 

 

 

* 사과나무: 아래에 깔린 은박지는 반사 필름이다. 사과 하단면에도 태양빛을 받게 하기 위해 반사 필름을 까는 것이다. 태양빛을 잘 받지 못하는 부분은 홍로 특유의 붉은 빛이 감돌지 않게 된다. 위쪽은 새빨갛게 붉은 빛이 잘 영글었지만 아래쪽은 히물건한 홍로들이 가끔 발견되곤 했다.

 

 

 

* 컨테이너에 담긴 사과: 사과나무에서 떼어낸 사과를 이렇게 무작위로 담아 선별장으로 나간다.

 

 

 

 

그렇게 과별로 선별된 사과들은 박스 포장이 되어 영농조합으로 넘겨지거나 택배로 도시민들에게 직접 배송이 된다. 이렇듯 사과 수확 작업은 무척 단순한 진행 과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진행 과정이 단순하다고 노동 강도도 단순한 것이 아니다. 난 거창 귀농학교에 2주 동안 머물렀는데, 16호 태풍 산바가 들이닥친 날을 제외하고는 계속 사과작업을 했고, 잘 때마다 계속 파스를 발라대야 했다. 한마디로 '파스빨'로 버틴 것이다. 나는 '파스스타일'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사과작업을 하다보니 농부님들의 피와 땀이 저절로 내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B급으로 분류된 홍로도 난 무척이나 맛있게 먹었다. B급은 점이 있거나 멍이 든 사과를 말하는데 상품성이 떨어질 뿐 맛과 품질에는 하등 문제가 없는 녀석들이었다. 점있는 거 점빼서 먹고, 멍든거 멍파서 먹고. 아삭아삭, 얼마나 맛있던지!

 

내가 사과를 아기 다루듯이, 섬세하게 사과작업을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 욕은 안 먹으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자부한다. 내가 모난 짓을 하면, 거창귀농학교가 욕을 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좀 긴장감 있게 작업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하여 2주간의 나의 거창 고제면 사과작업은 무사히 마무리 됐다. 평소에 안쓰는 근육을 썼던 터라 온 삭신이 다 쑤셨지만 작업이 마무리 될 무렵에는 나도 사과를 아기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말을 내 입에서 스스럼 없이 하게 되었다. 허리가 욱씬거리기는 했지만, 농촌 사과체험을 제대로 했던 것이다.  

   

 

 

 

* 사과농장: '사과를 애기 다루듯이 해달라'고 하셨던 농장주 분이다.

두 분 다 거창귀농학교 출신으로 대도시에서 거주하다 최근에 귀농을 하신 분들이다.

 

 

 

 

* 사과작업: 사과작업을 하는 와중에 곽작가도 한 컷 찍어봤다.

 

 

 

* 구절초: 거창 귀농학교 운동장에 피어 있어서 한 컷!

 

*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해발고도가 높은 고제면에는 이렇듯 탐스러운 홍로가  재배된다.

 

 

 

 

 

* 홍로: 빨갛게 잘 영근 홍로가 탐스러워 보인다. 색깔만큼이나 맛도 좋다.

 

 

 

 

 

내게 경상남도 거창은 무척 흥미로운 지역으로 각인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전라북도 무주와 장수, 북쪽으로는 경상북도 김천과 맞닿아 있어 조금만 이동을 하면 도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거창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에 서울로 복귀할 때, 나는 시골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는데 짧은 시간 안에 무려 4개나 되는 도 경계를 넘나들기도 하였다.

 

경남 거창 -> 전북 무주 -> 경북 김천 -> (또다시) 전북 무주 -> 충북 영동 

 

실제로 서편으로는 덕유산, 동편으로는 합천 가야산, 남쪽으로는 함양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 있는 곳이, 경남 거창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듯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인 거창이지만 읍내 만큼은 쑥 내려앉은 지세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거창 외곽은 해발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거창의 다운타운(?)은 분지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런 거창에 난 베이스캠프(?)가 하나 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고제면에 있는 거창귀농학교이다. 거창귀농학교는 1996년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 하여 귀농학교로 탈바꿈을 시켰는데 현장 위주의 노작 활동이 강점인 곳으로 불리고 있다. 실제로 거창귀농학교는 고제면 면소재지에서도 약 5Km 정도 떨어져 있을 정도로 외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그만큼 실제 농업활동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여건이 풍부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거창귀농학교: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현대식 시설을 갖추었다. 나에게는 지리산으로 향하는 베이스캠프다.

 

 

 

* 황토방: 거창귀농학교 운동장 한 켠에 황토방이 있다. 저 곳은 왠만한 고급 폔션 저리가라 할 정도로, 좋은 시설과 전망을 자랑한다.

 

 

 

여기서 잠깐! 베이스 캠프를 언급하다 갑자기 뚱딴지 같이 귀농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고 질책을 가하실 분도 있을 듯싶다. 결론적으로 거창귀농학교가 내게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거창 귀농학교는 백두대간인 삼봉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해 있다. 거창귀농학교는 삼봉산 예술학교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건 분명 지역명에서 네이밍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또 거창귀농학교에서 조금만 더 가면 대덕산이 있다. 이렇게 아웃도어 접근성이 강한 곳인데 어떻게 내가 그곳을 베이스캠프화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베이스캠프 선언은 개인적으로 거창귀농학교 교장선생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시골인심이 좋다지만 뚱딴지 같이 불쑥 '베이스캠프 선언'을 한다면, 그 지역분들에게 볼기짝을 훅씬 두들겨 맞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런 거창귀농학교를 난 지난 9월 중순경에 방문을 했다. 왜? 사과작업을 하려고! 아웃도어는 잠시 접어두고 말야.

귀농학교의 정확한 위치는 거창군 고제면 봉산리이다. 고제면은 읍내에서 북서방면으로 25Km 정도 떨어진 곳인데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무주군의 무풍이 어떤 곳인가? 덕유산의 무주 구천동을 끼고 있는 곳이 아닌가? 그렇다. 덕유산의 기운이 넘쳐 흐르는 백두대간에 고제면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제면도 해발이 높은 곳이다.

 

그렇게 해발 고도가 높은 곳이기에 아침저녁으로 일교차가 큰 건 당연한 일이다. 이에 비해 거창 읍내는 해발고도도 낮고 분지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고제면보다는 더 기온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 볼 일이 있어 잠시 읍내에 다녀온 후 다시 고제면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온도 변화를 피부적으로 체감했을 정도다. 그런 지형적인 특성 때문인지 고제면 지역은 고랭지 농업이 잘 발달되었다. 과수원과 밭이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특히 고랭지 사과 재배가 유명한 곳이었는데 큰 일교차가 사과의 당도를 현격히 높여주는 듯싶었다. 그런 고제 사과 중에서도 홍로 품종이 농가 소득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홍옥과는 다른 품종인 홍로는 추석 차례상에 올려지는 사과로 9월 초순경에 수확을 한다. 그렇다. 홍로는 '홍동백서'할 때 쓰이는 그 사과다. 한가위 차례상은 햅쌀과 햇과일 등 그해 가을걷이로 얻어진 재료들을 올려야 하기에, 추석 직전에 출하되는 홍로는 자연스럽게 차례상에 올려지는 과일 품목 1순위에 속하는 것이다.

 

"사과를 아기 다루듯이 해주세요!"

 

 

 

 

 

 

 

*삼봉산과 사과농장: 앞쪽에 보이는 산이 삼봉산이다. 사진에 등장하신 분들은

당시 거창귀농학교에서 본격적인 귀농교육을 받으시는 귀농희망자 분들이었다.

 

 

 

 

* 강물이 범람한 거창 읍내: 16호 태풍 산바는 15호 태풍 볼라벤과 달리 한반도에 폭우를 뿌리고 갔다. 

산바가 지나간 후 거창 읍내를 흐르는 위천이 수위가 높아져 범람하고 있다.

 

 

 

*수위가 높아진 거창군의 위천

 

 

 

* 홍콩 아가씨들:  '우프'를 통해 전세계에서 한국의 농촌문화를 탐방하고 싶은 젊은이들이 거창귀농학교까지 찾아 왔다.  우프는 유기농 농사를 짓는 농가에 집적 가서 일손을 돕는 국제 조직을 말한다. 우프지원자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농장주는 식사와 숙소를 제공한다.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임금을 받지 않는 관계로 워킹홀리데이와는 차별화가 되는 것이다. 거창귀농학교도 우프에 조직되어 있어 이렇게 홍콩아가씨들도 멀리 거창까지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도깨비: 거창귀농학교 복도에 걸린 도깨비들이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수꽝스러운 모습에 친근한 감정까지 들 정도다.

 힘든 사과작업이 끝난 후에는 항상 저 녀석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거창 귀농학교

 

 

 

 

 

*박수근과 자전거: 박수근 미술관에 가면 무언가 하나 작품을 제작해야 할 것 같다. 그 곳에 가면 누구나 다 예술가가 되는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한 번 설치미술(?)을 해보았다. 박수근 선생은 내 자전거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박수근 화백 작품: 박수근 화백이 이런 작품도 그렸다. 박수근 화백에게서는 서양 화풍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

 

 

 

 

---> 전편에 이어서

 

 

 

난 양구읍내로 진입했다.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했듯이 양구는 소양호와 파로호를 끼고 있다. 그래서 호반의 도시로 보이기도 한다.


양구 읍내에서 가까운 곳에 박수근미술관이 있었다. 양구 읍내에서 걸어갈 수도 있을 정도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난 그곳에서 좋은 감흥을 받고 왔다. 자전거여행에 지역축제가 접목되고, 또 미술관 탐방까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박수근(1914~1965)은 양구군 양구면(현 양구읍) 정림리에서 출생을 했다. 가난했던 그는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하게 됐는데

그런 성장배경은 박수근의 작품들에 오롯히 스며들게 된다. 그는 화강암처럼 두툼하고 거친 풍의 질감으로 작품들을 많이

제작을 했는데 그런 작품들은 서민적이면서도 소박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수근 공원 박수근 미술관 앞에 있는 박수근 공원. 산책하거나 사색하기 제격이다.

 

 

 

〈농악〉(1932),〈나무와 여인〉(1950년대),〈행인〉(1964), <할아버지와 손자〉(1964) 등등... 작품명만 봐도 한국적이지 않은가?

그런 박수근미술관은 선생의 작품들과 함께 일대기를 기록한 공간이었다. 2002년에 개관한, 비교적 최근에 개관한 곳이라 그런지

전시공간과 편의시설도 합격점을 줄만 했다. 

 

박수근 선생 생가 터에 200여 평 규모로 건립된 양구군립 박수근미술관은 그 자체로 문화공간이었다. 앞산이 보이는 확 트인 공간에

위치한 미술관은 전면에 공원과 함께 야외전시장이 있었다. 그냥 얼핏 봐도 산책하기도 좋고, 사색하기도 좋은 공간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나는 공원에 앉아 야외전시물들을 감상하며 식사를 했다. 왜 이상하게, 난 그렇게 멋진 문화공간에 들어서면

허기가 지는지 모르겠다. 야유회를 가면 도시락부터 챙기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긴 잘 먹어야지. 그래야 구비구비 돌아가는 한계령을

넘을 수 있지 않겠는가!

 

 

 

* 박수근 공원

 

 

 

 

박수근 미술관 탐방을 마친 후 나는 야영지를 찾아야 했다. 전날 너무 늦게 텐트를 치는 바람에 몸이 많이 피곤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리저리 좋은 야영지를 찾다가 난 어느 섬에 들어가게 됐다. 그곳은 한반도 섬이었다. 앞서 포스팅에서 양구는 한반도의 정중앙임을

브랜드화 했다고 기술했다. 한반도 섬도 양구의 그런 점을 부각시켜 놓은 인공섬이었던 것이다.

 

한반도섬에는 북쪽의 백두산에서부터 남쪽의 제주도까지 미니어처 형식으로 만들어 놓았다. 물론 울릉도와 독도도 있었다.

나는 이런식으로 한반도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백두산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제주도까지 마실을 갔다왔고,

다음날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살펴본 후 한반도섬을 떠나왔다. 그러고보면 난 그날 한반도를 다 품에 앉고 잠이 들었던 셈이다.

 

 

 

 

 

* 박수근 미술관 외부 설치예술품

 

 

 

*박수근 미술관과 자전거: 이것도 설치 미술???

 

 

 

*박수근 선생 좌상: 사진 찍기 좋은 조형물이다 

 

 

 

 

*박수근 미술관: 박수근 미술관은 시원한 전망을 가지고 있다.

 

 

 

* 박수근과 자전거: 박수근 선생께서 내 자전거를 보고 계시다. 

 

 

 

*고구려이야:기 가난했던 박수근 화백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직접 역사 그림책을 만들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감옥에서 역사편지를 썼던 인도의 네루 총리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 박수근 미술관

 

 

* 박수근 미술관

 

 

*한반도 섬: 한반도 섬 내부의 지리산에서 한 컷

 

 

 

*한반도 섬: 한반도 섬 내부의 제주도에서 한 컷

 

 

 

*한반도 섬

 

 

* 북한강의 자전거도로: 화천에서 양구를 향해 가는 길. 이 길을 따라 시원하게 강변을 질주했다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4편> 국토의 정중앙 양구를 가다!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강원도 화천에서 행한 <평화안보백일장>의 쓰라린 패배를 뒤로 하고 나는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아야 했다. 내 스스로 생각해봐도 자전거여행에, 지역축제 방문을 접목하는 방식은 확실히 신선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몸은 많이 축났다. 그저 방문객의 입장에서 보고 즐기는 축제에 참가했으면 모르겠는데,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글쓰기 대회에 참여를 했으니, 예상치 못한 체력의 소진이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난 1등을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1등은커녕 가작에도 못 들어, 인건비도 못 건졌으니 강원랜드에서 '한 판 땡길' 이유도 없어졌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기념으로 정선에도 가보고, 가리왕산도 탐방할 생각이었는데 애초 계획이 어긋난 것이다. 그래서 여행 경로를 수정했다.

 


화천 -> 양구 -> 인제 -> 양양 -> 강릉 ->울릉도

 

 

 

* 파로호 전망대: 파로호라는 명칭은 한국전 때 이 곳에서 중국 공산군, 즉 호로군을 격파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 코스로 길을 잡았고, 실제로 이 코스로 주행을 했다. 그런데 이 코스에는 중간에 한계령이 자리잡고 있다.

한계령! 그 이름만으로도 아웃도어 여행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설악산 한계령!

일단 자전거를 타고 설악산을 넘는다는 것이 무척 '환상'적인 일인데, 게다가 다른 고개도 아닌 한계령을 넘어간다는 것이

더욱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화천에서 한계령으로 가려면 양구를 거쳐 가야 한다.

 


'국토중앙 양구'

 


위의 명칭은 양구군에서 내세우는 슬로건이다. 지역을 두루 다니다보면 각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특색을 슬로건화 해, 네이밍 한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순천시는 '대한민국 생태도시 순천', 거창군은 '거창한 거창', 장흥군은 '정남진 장흥'

등으로 브랜드화 했다. 거창군의 '거창한 거창'이야 지역 명칭을 브랜드화 시켰음을 단 번에 알아낼 수 있지만 장흥군의 '정남진'이나 양구군의 '국토중앙 양구'는 쉽게 그 뜻이 와닿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정남진은 장흥군이 서울에서 정남쪽으로 있다하여 정남진이라는 명칭을 썼다고 했는데, 정동진을 빗대서 생각해보니 그 뜻을 쉽게 이해하게 됐다.

그럼 국토중앙 양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 양구군은 DMZ를 끼고 있는데... 조금만 더 가면 북한인데...

국토중앙 양구라는 슬로건은 남한, 북한을 뛰어넘는 한반도적인 슬로건이다. 휴전선 남쪽이라는, 협소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양구는 철책선에 갖힌 변방에 불과하지만 철책선을 걷어낸 후의 양구는 국토의 정중앙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국토중앙 양구라는 슬로건은 미래지향적이고 통일지향적인 구호라고 할 만 하다.

 

 

 

*국토중앙 양구: 한반도 중앙에 양구가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

 

 

 


남쪽만 나와 있는 교통지도와 남쪽지역 날씨만 알려주고, 북한 지역은 '언저리'로 알려주는 날씨방송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국토중앙 양구라는 슬로건은 죽비소리와도 같은 일침을 가하고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 구글 어스에는 북한지역 정보가 나오지 않지만 옛날 <대동여지도>에는 남북한의 구분이 없지 않았던가? 지리적으로 남과 북을 구분하는 사고도 극복해야 할 분단고착적인 사고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휴전선으로 남북이 갈려있다고 하지만 백두대간이 갈렸는가? 남쪽 백두대간이 따로 있고, 북쪽 백두대간이 따로 있겠는가? 다 똑같이 소중한 우리의 백두대간이지 뭐!

 


국토의 정중앙이라서 그런가? 양구를 진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최근에 양구는 도로 접근성이 많이 좋아졌다. 올 봄에 배후령 터널이 개통됐기 때문이다. 5.1Km라는 국내 최장거리 터널이 개통이 되어 양구와 화천을 오가는 길이 많이 편리해졌다고 한다. 기존의 양구는 소양호와 파로호를 끼고 있어 도로교통이 무척 불편했었다. 그 두 호수가 보기에는 아름다워도 길이 그 곳을 '뼁~'하고 돌아가야 하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차에 배후령 터널이 개통되었으니 화천과 양구에 사시는 분들은 더 빠르고 안전하게 이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 난 왜 양구를 진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말을 했나? 이율배반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5.1Km나 되는 터널을 통과한다고 생각을 해봐라. 그거 정말 못할 짓이다. 400~500m 짜리 터널을 지나는 것도 정말 괴로운 일인데 무려 5.1km에 달하는 터널 구간을 지날 때의 고통이란! 내 고막을 도려낼 것 같은 자동차의 소음은 자전거를 타고 터널을 지나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이다. 그나마 뒤에서 오는 차가 승용차면 다행이지, 22톤짜리 바퀴 8개 달린 덤프트럭이 뒤따라온다고 생각해봐라!

 


그 긴 장거리 터널을 지나고 나니, 탈진할 정도로 온 몸에 기운이 빠졌다. 설상가상이라고 이미 주위는 어두워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어둠속에서도 야영지를 찾았다는 것이다. 당시의 여행일지를 보니, 난 양구군 양구읍에 있는 사명산 양구학생캠핑장에서 텐트를 쳤었다. 도착 시간을 보니 23시였다.

 

 

 

 

 

 * 소양호: 화천에서 양구로 가는 길에 한 컷

 

 

 

 

 

 

 *파로호 화천에서 양구로 넘어가기 위해서 파로호 인근을 지나야 했다. 멀리 파로호댐이 보인다

 

 

 

 

 

 

 

 

*둔주봉에서 바라 본 역한반도 지형: 충북 옥천군에 위치한 둔주봉은 해발 300정도 되는 야트막한 산이다.

둔주봉은 등산로가 잘 닦여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대신 마지막 부근에서는 좀 급경사가 되지만 그 곳만 지나면 이렇게 멋진 장면을 감상할 수 있다.

한반도를 역대칭한 모습이다.  

 

 

 

* 회룡포: 경북 예천군의 회룡포는 일명 '육지의 섬'이라고도 불린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350도로 휘돌아 나가 저렇게 멋진 장관을 연출했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 한 번 해보겠다. 우리나라를 자세히 살펴보면 외부로는 3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내부로는 산악 지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부 외부를 막론하고 '판타스틱'한 지형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오늘 소개할 충청북도 옥천군에 위치한 둔주봉과 경상북도 에천군에 위치한 회룡포도 그런 판타스틱한 지형들을 드러내는 곳이다.

 

오늘 포스팅은 그냥 '사진으로 이야기' 정도에 그치지만 시간이 된다면 둔주봉과 회룡포에 대한 상세한 포스팅을 해 볼 생각이다. 이렇게 좋은 곳을 그냥 흘려버린다는 건 안 될 말이니까!

 

강이나 하천을 따라 트래킹을 하다보면 강 주변에 산재한 퇴적층들을 보게 된다. 어차피 물이야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이렇게 저렇게 흐르다 보면 토사물도 운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유속이 느린 구간을 만나면 그 토사물들이 그대로 쌓이게 되는 것이고. 그런 퇴적층들이 큰 규모를 나타내거나 특이한 모양을 한다면 우리들의 눈길은 거기에 쏠릴 수밖에...

 

위 사진들에서도 보여지듯 그런 하천의 지형들은 물길이 어떻게 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그러니 물길은 그냥 있는 그대로 놔두었으면 한다. 직강화 할 필요도 없고, 물길을 돌릴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놔두웠으면 좋겠다. 자연 그대로!

 

 

 

 

 

 

* 회룡포: 회룡포는 용이 휘돌아 나간다는 의미다. 얼핏보면 내성천이 태극 문양으로 휘돌아 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 회룡포: 색깔이 있는 벼를 심어 저렇게 논에다 '벼그림'을 그렸다. 논을 도화지 삼아 벼로 모양을 내다니, 정말 대단하다!

 당시 내가 예천군을 방문했을 때는 <예천 곤충엑스포>를 앞두고 있었다.

 

 

 

 

 

 

* 둔주봉: 내가 둔주봉을 방문했을 때는 2010년 8월 경이었다. 당시는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내렸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강에 유량이 풍부했다.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렸을 정도다. 

 

 

 

 

 

* 둔주봉 인근에서 찍은 사진

 

 

 

 

 

* 둔주봉 인근에서 찍은 사진

 

 

 

 

 

* 법주사 팔상전: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이다. 17세기 지역에 등장한 부농들이 자금을 마련하여 지었다고 한다. 다층 형태의 모습을 띄고 있다.

충북 보은과 옥천은 서로 인접해 있는 터라 함께 묶어서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 경북 예천의 삼막주막 인근: 예천에는 삼막주막이라는 유명한 주막터가 있다. 그 곳은 하천 세 곳이 만나는 곳이라 수로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룻터가 생기고 주막거리가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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