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에 대한 소개 동영상입니다.

제가 직접 만들어봤습니다! ^^

남양주 트레킹에 대한 개략적인 장면들을 카드뉴스 형식의 동영상으로 풀어봤습니다.

















* 능내역. 작은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 있다.









정약용 선생 만나러 갑시다_ 1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서울내부트레킹, 속초해변트레킹. 솔직히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누가 그런 명칭을 지었습니까?”

 

트레킹 참여자들 중에는 간간이 이렇게 문의를 해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제가 직접 지었습니다. 코스에 담긴 내용성을 전달하려고 그런 이름을 지었어요.”

 

제 대답을 듣고 물음표를 거두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물음표를 몇 개 더 가져다 붙인 표정을 지으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그런가하면 이렇게 더 묻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럼 귀에 확 꽂히는 명칭 같은 건 없나요?”

 

당시 저는 잠시 망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답을 했지요.

 

! 이건 어떻습니까?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정확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 그래요? 귀에 확 꽂히네요. 다산 선생은 저도 좋아하는데... 그 명칭 잊어버리지 않겠는데요.”

 








* 능내역.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있는 능내역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보겠습니다. 귀에 확 꽂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을 소개하겠습니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습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됩니다. 폐역이 된 것이죠.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습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무척 차분했습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입니다.

 

 






* 마재성지. 한옥성당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입니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입니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요?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습니다. 바로 위형이었습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1791(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됩니다. 신유박해(1801)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 마재성지.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 다산생가 가는 길.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습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지요.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요? 정약용이 1순위였습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다산선생 묘.





벽파는 꼼수를 썼습니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습니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됩니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18006월이었습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습니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됩니다. 1801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되었죠.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 거중기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습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릅니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입니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 다산 선생 동상.





 

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제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마디 더 설명을 보탰습니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저는 참가자들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습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저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답니다. 그러고보면 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드네요.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죠.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답니다.


정약용역사트레킹은 그 명칭이 귀에 확 꽂힙니다. 또한 눈도 확 뜨이게 하지요. 양수리일대가 수도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에 한 곳이니까요. 그 아름다운 양수리 일대를 다산 선생을 생각하며 걸을 수 있기에 정약용역사트레킹은 더욱더 재밌는 것이겠지요.

 

 



* 마진산성. 마진산성에서 바라 본 양수리. 앞에 보이는 다리는 신 양수대교이다.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폐역)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마진산성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옛 선인의 길을 따라...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 능내역 2008년 복선화된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능내역은 폐역사가 됐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듯 능내역은 많은 나들이객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공간으로 재탄생(?) 하였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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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의 생가다. 대개 천주교 성지는 순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절두산, 새남터, 황새울 등등... 하지만 이 곳은 독특하게도 한 인물의 생가가 성역화 됐다. 그만큼 우리 천주교에서 정약종의 업적과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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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의 코스는 다음과 같다.

팔당역 ▲(시내버스 이동) ▲능내역(폐역) ▲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운길산역

2008년 중앙선 복선화로 인하여 폐역이 된 능내역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우리는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데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윗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 다산 정약용 선생

 


 

 

 


 

안타깝게도 형제들조차도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다.

그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뒤로 하고, 역사트레킹 팀은 마재성지에 있는 '한복 입은 예수상' 앞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묵념을 올렸다. 참가자 중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분도 있었고, 무신론자도 있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종교를 뛰어 넘어 경건의 시간을 함께했다. 필자도 나지막이 묵념을 올렸다.

'희생자들 모두 좋은 곳으로 가시길, 그리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말길. 나도 당할 수 있는 이런 참사가 다시는 이 땅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역사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 생가(여유당)에 연꽃 공원까지, 이들 지역이 도보로 20분 이내의 거리에 묶여 있다. 이런 명소들이 집중적으로 밀집해 있으니, 앞서 언급한대로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찾는 것이다.


 

 

 
▲ 정약용 동상 정약용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 이날은 햇살이 강해서 그랬는지, 참가자들은 선글라스나 창모자 등으로 햇살을 가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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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과 정약용

매번 와도 느낌이 좋은 곳.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쉬운 곳. 다산 선생의 뜻을 되새기고 싶은 곳... 필자는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좋은 감흥을 받았고, 그런 감흥을 다른이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다. 결국, 그 날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썼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 연꽃 공원 팔당호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뒤편으로 보이는 곳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진 정약종 선생이 따로 떨어져 살았던 곳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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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매진하게 된다.

"다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 진둥산 남한강 자전거 도로만 따라가면 재미가 없다. 잘 닦인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이런 비포장 도로를 걸어야 진정한 트레킹이 될 것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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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필자의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마디 더 설명을 보탰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입니다."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필자는 참가자들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이번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필자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다. 그러고보면 필자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릿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다산 선생을 뵈러갈 생각이다. 남양주든 강진이든 상관없다. 그냥 가서 위로를 받고 올 생각이다. 역시 다산 선생은 멘토 중에 멘토인 듯싶다. 난 힘들 때마다 항상, '다시 다산 정약용선생'에게로 갈 생각이다.    


 


 

 

 

 


 



● 도움말

1.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코스: 팔당역 ▶(시내버스 이동) ▶ 능내역(폐역)▶ 마재성지 ▶ 다산 생가(여유당) ▶ 연꽃 공원 ▶ 다산 삼거리 ▶ 조안면사무소 ▶ 진둥산 ▶ 솔개고개 ▶ 운길산역



2. 이동거리: 약 9.5km / 소요시간: 약 4시간 30분(쉬는 시간포함)



3. 교통편: 중앙선 팔당역에서 하차하여 능내1리행 버스에 탑승함. 능내역이 능내1리임. 버스로 약 10분 정도 이동함.

 

 

 

 

 

 

 

 

 

 

 

 

       <양수리> 마지막 봄을 만끽하자! 양수리 역사트레킹!



 

벌써 더워졌네요. 이제 곧, 아니 이미 벌써 여름이 왔는지도 모르겠네요.

이마에 땀이 몽글몽글 맺히고, 시원한 맥주가 땡기는...! ㅋ


그래서 강바람을 좀 쐬러 가자고 양수리 트레킹을 개설했습니다. 

아무리 덥다고 하더라도 강바람은 시원하게 불겁니다! 

정 바람이 안불면 제가 부채질이라도...ㅋㅋㅋ


그러고보니 역사트레킹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여름은 더워서 못하고, 겨울에는 추워서 못하니까요...

그래서 이번 양수리 트레킹은 더 재밌게 해보려고 합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트레킹 중간에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이 있을 예정입니다. 사진 촬영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은 선글라스나 모자 등을 착용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스크 추천이요! ㅋㅋㅋ




일시: 2014년 5월  31일 토요일 오후 1시 


집결장소
:  중앙선 팔당역 --->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해 있음.

이동경로:  팔당역 ▶(버스이동) ▶ 조안면 면사무소 ▶진둥산 ▶ 솔개고개 

 

 운길산역 팔각정▶ 습지공원 ▶ 북한강 철교 ▶ 양수리 생태공원▶ 두물머리(양수리) 


이동거리: 약 8km / 약 5시간소요 예상(쉬는 시간 포함)

 

난이도: 하 ---> 평이한 코스입니다. 기초 체력이 되시면 누구나 다 참여가능합니다. 


준비물
: 여분의 옷, 배낭(혹은 백팩), 트레킹화(혹은 운동화) 

주의점: 장시간 트레킹을 하는 것이니 가급적 편한 복장을 해주세요. 하이힐 NO! 트래킹화 YES!
출발 즈음에 가볍게 스트래칭을 할 예정입니다. 아웃도어를 하기 전에는 꼭 스트래칭을!!!


 

참고사항:  당일날 햇살이 강할지 모르니 모자나 썬크림 등을 준비해주세요. 해가 떨어지면 추워집니다.

여분의 옷도 준비해주세요!

 


비용: 비용은 1만 원입니다. ---> 식수, 간식, 아이스크림, 리딩비, 수수료 포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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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둥~ 이제 곧 있으면 직장인들이 그렇게 고대하던 황금 연휴가 시작되겠네요.
바쁜 일상 생활 속에서 맛보는 휴일의 느긋함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달콤할테죠.

그런 달달한 느낌을 5월 5일 어린이날에 양수리에서 맛보는 건 어떨까요?

 

황금연휴에 좀 멀리 여행을 가고 싶지만 그런 여건이 안되는 분들도 환영합니다.

예전에 이성친구 혹은 애인과 함께 거닐었던 양수리, 그 두물머리를 집밥 식구들과
함께 걷는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나요? 집밥 식구들과 느긋하게 대화를 하며
사뿐사뿐 소풍을 가듯 두물머리를 걷는 겁니다.

 

집밥지기인 제가 남자친구 역할에 부적절하다고요? 그래서 저는 판만 깔아드리고
뒤로 빠진답니다~ㅋ 여러분들이 재밌게 노시라고~ㅋ

 


일시: 2014년 5월  5일 월요일 오후 1시 ---> 좀 시일이 촉박하죠.  사실은 예정된 출장이 날라가서...

이 모임을 급조해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재미만큼은 급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집결장소:  중앙선 팔당역 --->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해 있음.

 

이동경로:  팔당역 ▶(버스이동) ▶ 조안면 면사무소 ▶진둥산 ▶ 솔개고개 ▶ 운길산역 ▶ 팔각정 ▶ 북한강 철교

▶ 양수리 생태공원▶ 두물머리(양수리) ▶ 새미원(선택사항)
*** 맛나고 유익한 뒤풀이 예정~ㅋ

 

이동거리: 약 7km /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쉬는 시간 포함)
 
난이도: 하 ---> 평이한 코스입니다. 기초 체력이 되시면 누구나 다 참여가능합니다.

 

준비물: 여분의 옷, 간식

 

확인사항: 중간 중간에 사진 촬영이 있습니다. 이 점 양지해 주세요. 사진 촬영이 별로인 분들은
스키마스크 착용을 추천 드립니다!~ㅋ

 

주의점: 장시간 트래킹을 하는 것이니 가급적 편한 복장을 해주세요. 하이힐 NO! 트래킹화 YES!
출발 즈음에 가볍게 스트래칭을 할 예정입니다. 아웃도어를 하기 전에는 꼭 스트래칭을!!!


참고사항:  당일날 햇살이 강할지 모르니 모자나 썬크림 등을 준비해주세요. 해가 떨어지면 추워집니다. 여분의 옷도 준비해주세요!
 

비용: 비용은 7천원입니다. ---> 식수, 간식, 리딩비 포함입니다.  이번에는 어떤 간식이 제공될까요?ㅋㅋㅋ



















 

* 마재 성지

 

 

 

*능내역

 

 

 

 

 

이 포스팅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에서 만나게 될 장면들을 모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포스팅은 사진으로 보는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입니다.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 마재성지, 다산 생가, 연꽃공원, 중앙선 자전거길, 진둥산, 솔개고개 등등... 많은 볼거리들로 풍성한 트레킹 코스입니다. 그래서 주말이면 나들이객들로 그 주위가 북적북적 해지는 곳이랍니다.

 

우리는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하며 다산 선생의 실학 정신과 초기 천주교에 대해서 곱씹어 볼 수 있을 겁니다.

수려한 풍광은 당연합니다. 그래야 시간내서 트레킹 하는 재미가 있죠. 너무 인공적인, 너무 잘 닦인 길들만 다닌다는 것은 트레킹 정신과는 좀 동떨어진 게 아닐까 합니다.

 

사실 이 곳은 남양주시에 개설한 <다산길>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기반하여 걷습니다. 하지만 좀 다르게 걸어보려고요. 왜? 능내역부터 운길산역까지 자전거도로를 따라 걸어가야 하는데 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들과 경합하는 것이 썩 좋지 않거든요!

 

진둥산과 솔개고개 코스는 다산길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입니다. 이 부분은 마스터인 제가 개설했답니다. 너무 인공적이고, 너무 잘 닦인 길보다는 조금은 다른, 좀 덜 닦인 길을 가보는 것도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답니다!!!

 

 

 

 

* 마재 성지

 

 

 

 

* 마재 성지

 

 

 

 

 

* 연꽃 공원

 

 

 

 

*능내역 기차카페

 

 

*진둥산

 

 

 

*솔개고개

 

 

 

 

 

 

 

 

 

 

 

 

 

 

 

 

 

 

 

 

양수리가 인접해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있답니다.

이곳은 능내라는 곳으로, 서울에 근접해 있으면서도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말만 되면, 이 곳을 찾는 등산객들과 자전거족들로 인해 이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만큼 남양주 조안면 일대가 수도권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이 곳은 두물머리, 즉 양수리가 지척에 있어 강변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자전거족들과 좀 경합을 벌여야 하는 구간도 있고 산자락을 타고 가는 구간도 있습니다.

또 성지를 탐방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코스는 은근히 아기자기합니다. 폐역이 된 능내역에 가면 파전을 맛볼 수 있습니다.

반면 마재성지라는 천주교 성지에 가면 정숙함이 주위를 맴돕니다. 그러다 다산 정약용 선생 생가에 가면

역사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운길산역 앞에 다다르면 동동주라도 한 사발 들이키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아기자기한 곳이 바로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이랍니다!

이 코스를 여러분과 함께 걷고 싶습니다.

 

사실 이 곳은 남양주시에서 개설한 <다산길>이 있지만, 그 다산길과는 좀 다른 코스로

가보려고 합니다. 기존의 다산길은 옛 중앙선 폐선로를 이용해서 좀 지루한 감이 있거든요~!

 

 

 

일시: 2014년 4월  26일 일요일 오후 1시


집결장소
: 중앙선 팔당역 -> 중앙선은 용산에서 출발을 합니다. 서울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중앙선 팔당역에서 집결하오니 착오 없으시길! 또한 팔당역에서는 시내 버스를 타고 다산 삼거리까지 이동할 예정입니다.

이동경로: 팔당역 ▶(버스 이동)  능내역(폐역) 마재성지(천주교)  ▶ 다산 생가 탐방 ▶ 연꽃 공원 ▶ 다산 삼거리  

▶ 조안면사무소 ▶ 진둥산 ▶ 예봉산 입구 ▶ 운길산역

이동거리: 약 9.5km / 약 4시간 정도 소요 예상(쉬는 시간 포함)

 

난이도: 하 ---> 기초체력이 있으면 누구나 가능함. 


준비물
: 여분의 옷, 간식

주의점
: 트래킹을 하는 것이니 가급적 편한 복장을 해주세요. 하이힐 NO! 트래킹화 YES!

팔당역에서 버스를 타고 능내역으로 이동할 예정이오니 지각 no!

능내역까지 이동할 때,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광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 때는 잠시나마 버스투어가 될 것 같네요.

    


기타
: 출발 즈음에 가볍게 스트래칭을 할 예정입니다. 아웃도어를 하기 전에는 꼭 스트래칭을!!!

 
참고사항: 햇살이 강할지 모르니 모자나 썬크림 등을 준비해주세요. 해가 떨어지면 추워집니다.

여분의 옷도 준비해주세요!

 


비용: 비용은 6천원입니다. ---> 식수, 음료수, 간식, 리딩비 포함입니다.

 

 

 

 

 

 

 

 

 

 

 

 

 

 

 

 

 

 

 

 

 

 

 

 

 

 

 

 

 

 

* 운길산: 다산 선생께서 자주 발걸음을 하셨다는 운길산에서 양수리 방면을 찍은 사진이다.

 운좋게도 날씨가 정말 좋아서 사진이 잘 나왔다. 하늘에 구름이 참 멋지다!

 

 

 

 

 

 

 

껑뚱한 나,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되다

다산 정약용 테마여행 이야기

 

 

 

 

 

 

 

따로 또 같이, 테마여행



우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필자의 이런 질문에 당황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필자 스스로에게 해봤다. 나는 다산 선생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나? 다산 선생의 저작은 많이 읽어보았는가?

필자는 역사트레킹 인터넷 카페의 주인장이다. 우리 카페는 역사유물 탐방과 트레킹이 결합된 고품격(?)의 도보여행 카페다. 그래서 가입할 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흥미로웠던 것은 다른 역사인물보다 압도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쟁쟁한 역사인물들을 물리치고, 다산 선생이 우리카페 회원들이 제일 존경하는 역사인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퀴즈의 결과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 카페의 회원수는 겨우 8명에 불과하니까.

기사 앞 부분부터 싱거운 소리를 한다고 질책을 가하실 독자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런 소리를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 다산 정약용 선생상: 생가인 여유당에서는 저렇게 선비적인 풍모로 여생을 보내셨을 것 같다. 뒤쪽의 나무가 선생의 상과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에 박경리 선생과 관련된 문학관은 세 개에 이른다. 강원도 원주, 경남 하동과 통영이 바로 그곳이다. 동학혁명기념관도 마찬가지다. 전북 정읍과 전주에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또한 장내리 집회가 열렸던 충북 보은에도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렇듯 동일한 테마를 가졌지만 각 지역별로 나눠져 있는 기념관 혹은 기념공원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이번에는 원주 토지 문학관에 갔다면, 다음에는 통영 박경리 기념관을 방문하는 식이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박경리'라는 하나의 테마를 가진 곳이라, 두 곳의 일대일 비교도 가능할지 모른다. 자동차 있으면서 질질 끄는 거 싫어하는 분이라면 당일치기로 테마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식의 테마 탐방은 무척 흥그런 테마 탐방은 무척 흥미로운 여행일 수 있다.

필자의 테마 탐방은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다. 다산 선생의 유적지는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오랫동안 유배돼 있던 전남 강진이고, 또 하나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다산 생가다. 하나를 더 하자면 수원 화성도 다산 테마 탐방에 포함된다.

 

 

 

 

 

* 다산길: 다산길은 남양주시에서 개설한 도보여행길이다. 아마 이 길을 다산선생도 걸으시지 않으셨을까?

 

 

 

L자형 여행

2010년 여름 당시 필자는 L자형 자전거여행을 행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여행은 제주도를 거쳐 고흥 나로호 우주센터에서 종료됐다. 이동한 지역을 선으로 이어보면 알파벳 L자와 비슷한 형상이 나와서 L자형 여행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L자형 여행 당시 필자는 제주도→완도→해남→강진 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도자기로 유명했던 도요새의 고장 강진. 하지만 강진은 내게 '다산 정약용'의 고장으로 더 많이 기억됐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1801년에 있는 신유박해로 인해 억울하게 유배길에 올라야 했지만 다산은 그 황량한 유배지를 하나의 작은 '규장각'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러 강진의 다산 초당을 자전거 여행코스로 잡았던 것이다.

 

 

 

 

* 경세유표

 

 

 

 

*목민심서

 

 

 

 

1800년, 당시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 유럽에 걸쳐 프랑스 혁명을 전파했던 1799년. 당시 조선의 조정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했기 때문이다.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당연히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했으면 '승복'해야 할 텐데 벽파는 그렇지 못했다. 꼼수를 썼던 것이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형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낙향하게 된다. 그렇게 정약용이 한양을 등지고 낙향한 후 두 달도 안 돼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승하하게 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다산초당: 강진의 다산초당. 이 현판을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추사는 다산을 정신적인 스승으로 흠모했다고 한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이때 정약용도 유배길에 나서게 됐는데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이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다사다난했던 2012년이 뒤안길로 살라지고, 이제 희망찬 2013년이 시작됐습니다. 아무쪼록 2013년에는 복되고 알찬 한 해를 맞이하시길! 작년 한 해 나무들 블로그를 찾아주신 블로그 친구님들 감사합니다. 2013년에는 더욱더 활기찬 모습으로 포스팅을 할 생각입니다. 사진첩을 찾아 봤는데 일출 장면이나 복돼지를 담은 사진들이 없어 푸른 나무 사진으로 대체 합니다. 사진은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와 관련된 사진들입니다.  온 몸이 덜덜 떨리는 추운 겨울입니다. 어서 빨리 봄날이 와서 파릇파릇한 새싹들을 보고 싶습니다!

 

 

 

 

 

2013년에는 원하는 일 다 이루시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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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물머리 생태공원에서 본 남한강자전거대교: 생태공원은 이렇게 사진 찍기가 좋은 곳이다.

 

 

 

 

 

* 두물머리의 수호신 나무: 남한강과 북한강이 굽이굽이 흘러 양수리에서 만났을 때 항상 이 수호신 나무를 지나게 된다.

왜 수호신 나무냐고? 내가 그냥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전편에 이어 '운길산역주변-양수리 도보여행' 이 계속된다. 바로 속편을 올렸어야 했는데...

그 넘의 게으름 때문에 말야! ㅋ

2편은 양수리, 즉 두물머리에 대한 사진이 주를 이룰 것이다.

 

난 양수리와 관련하여 몇가지 지식을 찾아보았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양수리'라고

불리는 지명이 여럿된다는 것이다. 또한 '두물머리'라고 불리는 지명도 여럿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우리나라처럼 산지가 많은 곳은 자연스럽게 계곡이 발달하게 되어 있다.

그런 계곡들이 하류쪽으로 나아가면 하천이나 강으로 발전하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합수지점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양수리나 두물머리라는 지명들이 여럿 있게 된 것이다.

 

 

* 표지판: 남한강자전대교에서 벗어나면 이 표지판을 볼 수 있다. 표지판 아래에 '물래길'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 생태공원의 오두막: 생태공원은 사진찍기도 좋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라 느긋하게 앉아 도시락을 먹을 수도 있다~

 

 

 

 

 

그러고보면 지금 우리가 가고자 하는, 경기도 양평군에 속해 있는 양수리는  '양수리'들의

대표주자가 된 것 같다. 선점효과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서울에서 가까워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기 때문일까?

 

그것과 관련하여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 이유는 한강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반도의 중앙부를 관통하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서 서울을 지나 서해바다로 빠져나가니

양수리의 중요성은 이루 말 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인가? ㅋㅋㅋ

 

 

 

 

 

 

 

 * 생태공원의 오두막

 

 

 

 

* 생태공원: 구름이 나무들에 사로잡힌 듯이 보여서 한 컷 찍었다....ㅋ 

 

 

 

 * 생태공원: 상당히 매력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수 있는 곳이 생태공원인 듯싶다!

 

 

 

* 생태공원: 규모는 작지만 생태공원은 풍광이 수려해서 정말 좋다! 

 

 

 

                 * 버스터미널 앞에 있는 나무: 여기가 양서면 면소재지다. '생태공원 -> 양수리' 요 부분이 매끄럽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중간에 길을 잃을 정도로 복잡하지 않다. 그냥 잠깐 양서면 면소재지 구경을 해본다고 생각하면 좋을 듯싶다.

 

 

 

 

 * 두물머리 표지판: 이 표지만 찾으면 된다. 장시간 도보에 강바람까지 맞아 허기가 진 사람들은 이 곳에서 식사를 해도 좋을 듯하다. 김밥천국도 있군~ㅋ

 

 

 

 

* 두물머리 가는 길: 걷기 참 좋은 길이다. 주위 풍광도 참 아름답다. 

 

 

 

 * 두물머리 가는 길

 

 

 

*두물머리: 드디어 두물머리다! 저 고목이 우리를 반겨준다!

 

 

 

 

 

 * 두물머리의 고목: 고목은 항상 누군가의 모델이 되어준다.

 

 

 

 

* 두물머리 나룻배: 저 나룻배도 항상 누군가의 모델이 되어 준다. 

 

 

 

 * 두물머리의 연인: 저 고목은 그동안 수많은 연인들의 사랑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겠지? 

 

 

 

 

* 두물머리의 수호신 나무

 

 

 

 

 

* 양수리역으로 향하는 길: 해가 점점 더 기울어져 간다. 두물머리에서 양수리역까지는 20~30분 정도 걸린다.

면소재지에서 식사를 한 후 천천히 양수리역으로 걸어가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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