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목요일.

 

숲길을 찾아 떠난 과천골 역사트레킹. 솜털 구름이 청명한 가을하늘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날이었다. 이렇게 좋은 가을날이라서 그런지 벙개트레킹치고는 많은 분들이 오셨다.

 

- 역시 숲길 걷기에 대한 갈증들이 많으셨던 거 같아요. 사실 저조차도 숲길에 대한 갈증이 아주 크거든요.

 

1년 만에 다시 찾은 과천골... 그런데 좀 변했다. 눈쌀을 찌푸리게하는 '사유지 출입통제' 입간판. 또 사라져버린 과천 망루... 과천 망루가 철거된 것은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이 부분은 차후에 좀 확인을 해봐야 할 거 같다.

 

어쨌든 기대를 크게 하고 온 과천골이었는데 갑자기 상황변인이 생기니 좀 당혹스러웠다. 좀 분위기가 다운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반전됐다. 용마계곡 너럭바위에서 맛나게 식사를 했더니

아주 화기애애해진 것이다. 역시 트레킹도 식후경!^^

 

관악산의 남자하동 계곡도 탐방하고, 거기에 석각된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도 보고... 늘 그렇지만 트레킹팀은 언제나 풍류객처럼 잘 노닐었답니다~^^

 

아참 사진 중간에 맨발 사진이 있는데... 남자하동 계곡을 가기 전에 공터에서 몇몇 분들이 맨발의 청춘이 되었다. 맨발로 걷기 모임을 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 분들을 따라 우리 트레킹팀도 맨발 걷기에 나서셨다. 맨발로 걷기가 만병통치약이라나 뭐라나...ㅋ

 

숲길도 걷고, 맨발의 청춘도 되고... 그렇게 초 가을날의 과천골 역사트레킹도 잘 마무리가 됐다.

 

 

ps. 맨발 걷기든 아니면 역사트레킹이든... 어쨌든 트레킹을 하고 나니 몸이 아주 가뿐해졌습니다. 며칠 전부터 속이 더부룩해서 애를 먹었거든요. 그게 싹

사라졌네요. 허리도 좀 욱신거렸는데 그것도 좀 좋아졌습니다. 역시 걷기는 만병통치약인 거 같습니다. 트레킹은 허준이어라...ㅋ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언젠가 트레킹 리딩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홀로 트레킹을 했을 때는 타인의 시선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트레킹을 리딩하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짙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곽 작가님, 좀 웃어요. 아침부터 찡그리고 있어요.”

 

역사트레킹은 주로 오전 10시 30분에 실시한다. 출근 시간을 피하고자 그 시간으로 정한 것이다. 좋아서 하는 역사트레킹이지만 얼굴에는 월요병에 걸린 회사원의 표정이 묻어났나보다.

 

사실 저런 말을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표정관리를 한다고 했는데도 저런 소리를 들었으니까...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그렇다, 리딩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렇다 등등... 나름대로 변명도 해보았지만 말 그대로 변명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필자의 직업도 서비스업이 아닌가. 말이야 있어보이게 역사트레킹 마스터지 여행가이드와 별 차이가 없다. 서비스업종에 있는 사람이 얼굴을 찡그린다? 업계 관행으로 봤을 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오전에 찡그리던 모습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풀려간다. 어떻게 아느냐?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 LCD창에 비쳐진 모습을 그때그때 체크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필자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해진다. 역시 필자는 트레킹 팔자인 거 같다. 좀처럼 웃을 일이 없다는 요즘인데 트레킹만 하면 함박웃음을 얼굴에 걸고 있으니...

 

 

 

 

 

* 남자하동계곡

 

 

 

 

 

 

 

● 과천골 역사트레킹

 

이번편에는 과천골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과천골 역사트레킹은 말 그대로 경기도 과천시 일원에서 행해진다. 앞선 프롤로그에서도 언급됐듯이 이 원고의 원래 명칭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다. 필자와 대화를 주고받는 트레킹팀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프로그램에서 모집하여 꾸려진 모임이다.

 

이번편 과천골 역사트레킹도 마찬가지고, 안양시에서 행한 정조대왕 역사트레킹도 경기도에서 행한다. 그렇다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란 명칭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과천시나 안양시가 경기도에 있지 서울에 있는 게 아니니까.

 

도성을 관할했던 한성부는 도성뿐 아니라 성 밖 십리지역(4km)까지 그 행정 영역 안에 두었다. 이를 두고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칭했다. 필자는 성저십리 개념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 적용했는데 지금의 서울에서 반경 40km까지를 서울학개론의 범위로 삼은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필자는 수도권 전철이 닿는 곳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영역으로 삼았다.

 

 

 

 

●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

 

지금이야 필자가 무명이기에 과천을 가든, 남양주를 가든, 춘천을 가든 서울학개론이란 명칭을 써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필자가 거물급(?)이 된다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 과천골 역사트레킹이 포함된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곽 작가님, 왜 과천시에서 트레킹을 했으면서 서울학개론이라고 하세요? 그 말이 틀린 거잖아요.”

“맞습니다. 그 명칭은 분명 틀린 거예요.”

“그럼 빨리 고쳐주세요. 이름은 제대로 써야지요! 경기도청에서도 난리에요.”

“그래서 바꿨습니다.”

“뭘로요?”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

 

이런 대화가 현실화 됐으면 좋겠다. 필자라고 거물급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그날이 빨리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교통정리용 설명이 길어졌다. 빨리 진도를 나가자.

 

과천골 역사트레킹의 시작은 우면산 남쪽 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소가 졸고 있다는 뜻의 우면산(牛眠山)은 해발 293m로, 이웃산인 관악산(632m)보다 훨씬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보다 오르기도 수월하고 코스도 짧다.

 

우면산의 북쪽은 서울 서초구이고, 남쪽은 과천시에 속하는데 확실히 남쪽면보다는 북쪽면이 편의시설이나 표식들이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우면산의 남쪽면은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관리가 안 되어 있다. 편의시설도 전무하고 안내표식도 띄엄띄엄 있다. 그래서인지 우면산 남쪽면을 찾는 이들도 별로 없다. 무슨 이유일까? 우면산 남쪽면도 분명 좋은 트레킹 코스인데... 이유는 남태령과 관련 있다.

 

 

 

 

 

 

* 남태령옛길 표지석

 

 

 

 

 

 

 

● 남태령으로 개명한 여우고개

 

남태령(南泰嶺)은 관악산과 우면산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은 183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 워낙 해발이 높은 고개들이 많아 183m의 높이면 명함도 못 내미는 게 맞지만, 한자어에서도 보이듯 이 고개는 당당히 ‘남쪽의 큰 고개’로 명명되어 있다.

 

처음에 이 곳은 여우고개, 혹은 여시고개로 불렸다. 한자어 명칭도 ‘여우호’자를 써서 호현(狐峴)이라고 쓰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는 여우가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그 옛날 관악산과 우면산의 울창한 수풀은 여우들이 서식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여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우 굴들이 발견됐다. 그런 배경들 때문인지 이곳에는 천 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다녔다는 ‘전설의 고향’도 전승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곳은 왜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개명을 하게 됐을까? 가장 유력한 설은 정조대왕 시대에 행했던 화산 능행차와 관련이 있다. 지난 정조대왕 역사트레킹편을 다시 복기하면서 읽어보자.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을 한 후, 정조대왕은 참배에 나섰다. 이를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이 고개의 이름을 정조대왕께서 물으셨다. 이때 과천현의 이방이 여우고개라는 이름 대신 남태령이란 명칭으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상감께서 행차하는 고개가 ‘여우고개’라는 요망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여우고개가 토속적인 이름이기는 하지만 요망스러운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더불어 고개의 명칭이 한 사람에 의해 급작스럽게 변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대왕 이전 시대부터 여우고개가 아닌 남태령으로 불렸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한강 이남에는 정조대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혹시 남태령도 그에 편승된 것이 아닐까? 정조대왕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태령은 이미 보통 이상의 고개가 될 수 있으니까.

 

정조대왕이 남태령을 넘은 것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1794년 이후부터 능행차 노선이 시흥-안양 방면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과천에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어 일부러 남태령-과천 코스를 버렸다고 한다. 김상로는 영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자이다.

 

현재 남태령에는 ‘과천루’라고 불리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남태령이 삼남지방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만큼 망루를 설치하여 감시를 했던 것이다. 과천루는 현재 과천 8경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지역의 명물이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많은 이들이 찾지는 않는다.

 

 

 

 

 

 

*과천루: 남태령망루라고도 불린다.

 

 

 

 

 

 

● 군대생활 생각나게 하는 남태령 참호와 벙커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러 다녔던 남태령. 현재 남태령에는 곳곳에 참호가 놓여 있다. 벙커도 있다. 남태령처럼 서울 인근에서 그렇게 많은 참호와 벙커들이 정열 되어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안보(?)시설들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면산의 남쪽면이다. 그 참호와 벙커들을 파고,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인아저씨들이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시설들을 무심히 지나치기는 했지만 필자도 군대 생활이 생각나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렇게 우면산 남쪽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둘레길 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전무하다. 팔각정은커녕 그 흔한 벤치조차도 찾기 어렵다. 화장실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면산 남쪽 숲길은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높아질 대로 높아진 도보여행자들의 눈높이로 보자면 이 코스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둘레길 트렌드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전이 있기 마련이다!

 

- 이 숲길 정말 울창한데요.

- 서초구쪽 우면산은 가봤는데... 여기는 처음이에요. 그런데 여기가 더 좋아요.

- 숲길도 좋고 사람도 거의 없어서 걷기에 더 좋은 거 같아요.

 

트레킹팀은 저렇게 환호성을 외쳤다. 거의 한 시간 이상 이어진 울창한 숲길에 박수갈채를 보냈던 것이다. 특히 이곳은 완경사로 계속 이어지다보니 사색을 하면서 걷기에 ‘딱’이었던 것이다. 묵언수행을 하기에도 제격인 곳이었다.

 

 

 

 

 

 

* 용마골: 일명 너럭바위 계곡

 

 

 

 

 

 

● 너럭바위와 온온사

 

이제 트레킹팀은 우면산에서 관악산으로 넘어간다. 용담골이라는 곳을 통해 관악산에 진입을 하게 되는데 무척 흥미로운 풍광을 맞이하게 된다. 카펫이 깔려 있듯 너럭바위가 보기 좋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누가 일부러 깎아놓은 것처럼 평평한 너럭바위가 길이 돼주기도 했고, 의자가 돼주기도 했다.

 

그 위에다 식탁보를 깔면 밥상이 되기도 한다. 그랬다. 트레킹팀은 너럭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맛있게 식사를 했다. 노닐기 좋은 곳에서 배를 채웠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너럭바위 계곡을 지난 트레킹팀은 과천현의 옛 객사였던 온온사(穩穩舍)를 탐방하게 된다. 객사는 한마디로 관사를 말한다. 유명한 전주 객사를 떠올리시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649년(인조27)에 창건된 이 건물은 정조대왕에 의해 ‘온온사’라는 특이한 이름을 갖게 된다. 잠깐 한자를 살펴보자. ‘평안할 온(穩)’자가 하나도 아닌 두 개나 들어가 있다. 정조대왕은 평화, 아름다움, 휴식이라는 개념들을 이름에 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실제로 정조대왕은 화산 능행차를 하러가면서 과천현 객사에 머물렀는데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휴식하기에 좋았다고 하여 ‘온온사’라는 현판을 친필로 하사하셨다. 그 현판이 지금도 온온사에 잘 붙여져 있다.

 

지금이야 일대가 많이 개발이 되어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휴식하기에 좋은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온온사 뒤편 숲길은 꽤 아름답고 산보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그 숲길을 따라 트레킹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자하동 계곡으로 향했다. 드디어 추사 선생 글씨를 만나게 된다.

 

 

 

 

 

 

* 온온사

 

 

 

 

 

 

 

● 자하 신위 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

 

돌산인 관악산에도 경치가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 이 계곡은 자하동이라고 불리는데 조선후기 시·서·화에 능했던 자하 신위(1769~1847)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자하(紫霞) 신위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는데 그런 소문을 듣고 정조대왕이 궁궐로 불러 크게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신위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편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에서 한 번 언급했었다. 역시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읽어보자.

 

시(詩)·서(書)·화(畫) 모두에 능한 사람을 시·서·화 삼절이라고 부르는데 그 칭호를 얻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당연한 말일 것이다. 시와 글씨와 그림,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잘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신위 선생은 참 대단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왜 관악산에 신위 선생의 호를 딴 계곡이 있는 것일까? 신동이었으며 시·서·화 삼절로 불리기까지 한 신위 선생과 관악산이 무슨 연관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늘 그렇듯 천재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다. 신위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게 된다. 지방토호들의 횡포에 의해 파직 당하고, 당쟁의 여파로 인해 파직 당한다. 이에 세상의 환멸을 느낀 자하 신위 선생은 관악산에 은거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관악산에는 자하동이란 명칭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과천에 있는 자하동은 ‘남자하동’이라 부르고, 서울대 옆에 있는 자하동은 ‘북자하동’이라고 불린다.

 

 

 

 

 

* 남자하동계곡

 

 

 

 

 

 

● 천재가 천재를 알아봤다!

 

과천의 남자하동 계곡 바위면에는 단하시경(丹霞詩境), 자하동문(紫霞洞門),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등 4개의 바위글씨가 있다. 계곡을 따라 새겨진 이 바위글씨들은 예전에는 접근성이 많이 떨어졌다.

 

실제로 최근에 설치된 탐방데크와 흔들다리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문화재였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바위글씨들을 지나갔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늦게나마 탐방시설들이 확충되어 바위글씨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말 나온 김에 바위글씨에 대해서 살펴보자. 지면 관계상 단하시경(丹霞詩境) 하나만 이야기하겠다. 이 ‘단하시경’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글씨다. ‘단하’는 신위 선생의 다른 호로 추정되고, ‘시경’은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경지라는 뜻이다. 신위 선생이 관악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보고 지은 시를,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단하시경’이라는 바위글씨로 새겨 넣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관악산에 은거했던 신위 선생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그런 돈독함이 ‘단하시경’이라는 바위글씨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추사 선생도 시·서·화 삼절이었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봤던 것이다.

 

자하동 계곡 탐방을 끝으로 과천골 역사트레킹도 종료가 된다. 트레킹 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계곡물에 발 좀 담그고 바위에 새겨진 글씨도 감상해보자. 이런 것이 풍류 아니겠는가? 시·서·화에 능하지 않더라도 풍류는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법이지!

 

 

 

 

 

 

*단하시경(丹霞詩境) 각자바위

 

 

 

 

 

 

 

● 오늘도 즐겁게 역사트레킹해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 아니다. 타인과 끊임없이 호흡을 해야 벌어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시선에 익숙해져야한다. 어쩌면 즐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에 노출되는 것이 나답게 살기와 배치되지도 않는다. 물론 여기서의 타인의 시선은 갑질의 시선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모습을 더 멋지게 하면 좋은 일이 아닌가. 필자의 출근 장소는 트레킹 집합장소인데 해당 집합지에 미소를 띠며 도착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즐겁게 역사트레킹해요!”

 

 

 

 

 

 

*과천향교

 

 

 

 

 

 


 

 

 

 

 

과천골 역사트레킹

 

1. 코스: 남태령망루(남태령옛길) ▶ 너럭바위계곡 ▶ 온온사 ▶ 남자하동계곡(과천향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선바위역 3번 출구(지하철4호선) / Out: 과천역(지하철4호선)

 

 

 

 

 

 

* 과천골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영등포50플러스 센터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강의를 진행했었습니다. 총 8강으로 이루어진 강의에서 7강째 행한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기억에 많이 남아 약식으로 그 후기를 올려봅니다. 




미세먼지로 좀 고생을 했던, 지난 3월 23일 금요일.

이날은 영등포50플러스에서 진행하는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7강 수업이 진행되는 날이었습니다.

시작할 때는 언제 끝나나 했었는데... 벌써 7강이나 진행됐네요. 그러고보니 이번주 금요일에는 드디어 종강(8강)을 하게 됐습니다. 정말 시간이 빠릅니다. 춥다춥다 할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 봄꽃들이 만개하고 있으니까요. 

이날 수업은 관악산 둘레길을 베이스 삼아 이동을 했습니다. 3개의 탐방포인트를 찾아가는 식으로 진행을 했습니다. 무당골, 낙성대, 봉천동 마애불이 그 세 탐방포인트입니다. 무당골과 낙성대는 둘레길 경로 위에 있어서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합니다. 

하지만 봉천동 마애불은 많은 이들이 찾지 않습니다. 경사가 있는 등산로를 따라 걸어야 만날 수 있고, 더군다나 좀 외진 곳에 있어서 많은 이들이 찾지 않습니다. 사실 관악산에 마애불이 있다는 거 자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관악산을 자주 탐방하는 분들도 마애불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얉은 양각으로 세겨진 봉천동 마애불은 163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마애불의 제작연도가 명확하니까요. 통상적으로 마애불은 제작년도를 추정합니다. 고려나 후기신라시대 작품들이 많지요. 그런데 봉천동 마애불은 조선 인조 시대에 만들어진 게 떡하니 밝혀졌답니다. 또한 본 마애불을 위해 시주한 이도 명시되어 있는데 박씨 성을 가진 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고려시대도 아닌 조선시대에, 그것도 시주자가 명시된 마애불이 관악산에 있다는게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저만 신기한가요?^^; 

수강생분들도 마애불 탐방을 만족해 하시더군요. 임팩트가 있었다고 하시더군요. 물론 좀 길이 험해서 고생을 하셨다는...ㅋ

아래 단체사진은 낙성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안국사가 있는 곳이죠. 서울 남부지역에 사시는 분들은 한 번쯤 가보셨을 겁니다. 서울 서남부에 살고 있는 저는 아주 자주갔답니다.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마지막 8강 수업이 진행됩니다. 수강생분들의 아쉬움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마지막 수업까지 잘 마무리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합니다. 다음에 더 좋은 트레킹 강의로 만나뵜으면 더욱더 좋구요! 












역사트레킹 코스를 잡기 위해 답사를 다니보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문화재입니다.

숲 속 길을 헤쳐나아가다 불현듯 문화재를 만나게 됐을 때! 제 눈에는 그런 문화재들이 보석처럼 여겨집니다. 

제 밥벌이를 해주는 물건들이라 그런가요?...ㅋ

그렇게 다니다보면 쉽게 접하지 못하는 독특한 문화재들도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그냥 말 그대로 독특하고, 흥미로운 문화재 정도로 표현을 하겠습니다. 아래의 사진들도 그런 독특한 문화재들입니다.

간단히 설명해보죠.









1. 마애종: 마애불은 많이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마애종이라니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마애종입니다. 스님이 범종을 타종하는 모습이 상당히 정교하게 새겨져 있지요? 고려 전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거의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저렇게 종소리가 났을 겁니다. ^^;
저 마애종은 경기도 안양시 안양예술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2. 석분: 석분은 돌로 만든 분묘입니다. 그러니까 돌로 무덤을 만들어 망자의 시신을 안치한 것이지요. 한성 백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분인데 층층이 돌을 쌓아 올린 형상이 꽤 정교해보이더군요. 사실 고인돌은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좀 멀리 여행을 가야하지만... 하지만 석분묘는 쉽게 접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서울 인근에서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석분의 존재는 참 특별합니다. 
저 석분도 마애종과 같이 경기도 안양시 안양예술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답니다. 










3. 호압사 법고: 사찰에서 법고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이 법고는 많이 독특하지요? 법고 밑에 호랑이가 깔려 있는 형상이니까요. 도대체 저 호랑이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매일 같이 북소리를 들으며 깔려 있어야 하는지...ㅋ  이 법고가 있는 절은 호암산에 있는 호압사입니다. 호암산은 관악산의 지산입니다. 규모가 커서 그런지 관악산은 여러 지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암산은 호랑이의 기운이 있다고 전해지는 산입니다. 그래서 조선 건국 초기, 무학대사가 이 곳에 사찰을 짓습니다.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사찰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 절이 바로 호압사입니다. '호압', 즉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이죠.
이 호압사는 앞서 언급했듯이 관악산의 지산인 호암산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위 세가지가 다 관악산과 연관이 있네요. 안양예술공원도 관악산의 지산인 삼성산 아래에 있고, 호암산도 그렇고... 나중에 기회되면 이 곳으로 함께 역사트레킹을!!! ^^;





 









지난 3월 12일 일요일에 행한 관악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후기입니다.


총 9강에 걸쳐 기획된 2017년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강의가 관악산에서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진행된 것입니다.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길인역)은 트레킹을 하며


역사를 배우자는 의미로 개설된 평생교육 카페입니다. 명소를 다니며 트레킹도 하고, 역사와 문화도 배우면


좋잖아요. 요즘처럼 인생 2막, 3막을 준비하는 시대라면 길인역 같은 프로그램은 더욱더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그동안 동장군이 얼마나 얄미우셨습니까? 엉덩이가 들썩들썩 거리는데 그 넘의 동장군이란 넘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그렇게 동장군을 몰아내는 봄기운이 관악산에도 찾아왔습니다. 그 기운을 맞으며 트레킹팀은 관악산을 누볐답니다.


웃고, 즐기고, 이야기하고... 맛나는 거 나눠 먹고.


사진을 보십시오. 얼굴에 모두 다 봄을 품고 있잖아요! 정말 멋지십니다!


길인역 트레킹팀은 강감찬 장군의 생가지인 낙성대, 그 분의 뜻을 기리는 안국사를 탐방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를 거쳐 가톨릭 성지가 있는 삼성산 성지도 답사를 했답니다.


아직 봄꽃들이 머리를 내밀지 않아 좀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지천으로 봄꽃들을 만나게 될 테지요. 그때 다시 한 번 관악산을 탐방했으면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답니다.


하여간 오랜만에 행하는 트레킹이라 정말 즐거웠답니다. 다음에는 더 즐겁고, 더 알차게 트레킹을 해보자고요! 






*** 참고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은 계속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길인역 카페를 방문해주세요!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








 

 






 





 
















 

사진을 보니 다 예술이네요... ^^


봄을 품고 있는 모습들이 다 좋아보입니다. 그런데 제 얼굴은 봄이 아니라 붕 떠보이네요. 그날 잠을 못 자서 그런가? ㅋ









* 공주역사트레킹: 공산성 위에 선 후원자님. 뒤로 보이는 강이 금강이다.  





* 관악산 역사트레킹: 장승들 앞에 선 후원자분들.







9월 3~4일.


그날도 어김없이 저는 트레킹을 했습니다. 어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열심히 걸었지요. 하지만 그날 트레킹에 참가한 분들은 남다른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냐?


바로 제게 후원금을 내주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들은 제 후원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108일 동안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이라는 펀딩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 스토리펀딩이라는 플랫폼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죠. 크라우드 펀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리워드'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리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창작자가 후원자들에게 주는 답례입니다.


통상적으로 리워드로 많이 지급되는 것이 엽서, 머그컵, 에코백 등등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저런 것들을 리워드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트레킹이라는 이름으로 펀딩을 한 만큼 트레킹에 초대하는 것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관악산 역사트레킹: 후원자분들과 함께 서 있는 나. 맨 오른쪽. 땀으로 범벅이 됐다-_-







* 공주 역사트레킹: 우금티 고개에 선 나. 그날 햇살이 강해서 그랬는지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렇습니다. 리워드를 트레킹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리워드 트레킹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리워드 트레킹이 9월 3일과 4일에 진행됐습니다.


3일에는 공주 역사트레킹이 실시됐고, 4일에는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진행됐습니다. 두 날 모두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 아쉽기는 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오셔서 함께 걸었으면 좋았을텐데...


특히 공주 역사트레킹 같은 경우는 쉽게 행할 수가 없답니다. 일단 제가 미리 가서 답사를 해야 합니다. 또 이동시간도 꽤 깁니다. 서울에서 하는 트레킹보다 적어도 1시간 이상 더 걸리니까요. 그러니 참가자들도 부담, 저도 부담이 되지요. 비용도 만만치 않고요. 어쨌든 더 많은 분들이 오셨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_-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나름의 특색이 있는게 트레킹의 매력입니다. 공주 역사트레킹 같은 경우는 1:1 맨투맨으로 트레킹을 했습니다. 관악산 역사트레킹의 경우는 3명의 후원자와 함께 행했습니다.





* 공주 역사트레킹: 공산성 광복루에 선 후원자 분. 저 광복루라는 이름은 김구 선생께서 직접 붙이신 것이다.








* 공주 역사트레킹: 공주성당.








트레킹 하기 좋은 가을날 후원자분들과 함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습니다. 후원자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펀딩이 사실 많지가 않답니다. 실제로 만난다고 해도 티타임이나 강연 정도이고요. 후원자가 능동적인 입장이 되어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행운아입니다. 후원자들과 직접 만나 트레킹을 행했으니까요. 서너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었으니까요. 저같은 창작자도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함께 걷는 길 서울 트레킹>이라는 펀딩을 또 하고 있답니다. 후원자들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또 펀딩을 개설한 것이죠. 이번 펀딩에는 리워드 트레킹을 5개를 배치해서 후원자들들 5번 이상 만날 계획입니다. 5번 이상 그들과 만나 웃고 떠들고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가을은 은근히 바쁠 것 같습니다. 소출이 기대되는 올가을입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8179  <--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


 



* 관악산 역사트레킹: 메타세콰이어 숲에 선 후원자분들.









* 트레킹팀.









관악산은 내 베이스캠프

 

둘레길 따라가는 관악산 역사트레킹

 



 

당신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입니까?

 

산악인인 엄홍길 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키운 건 도봉산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같은 으리으리한 산들이 아니라 동네 뒷산인 도봉산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목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엄홍길 대장의 베이스캠프는 도봉산?’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있으신가요? 트레킹이나 등산을 즐겨하시는 분들은 각자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하나씩 있을 겁니다. 물론 여기서의 베이스캠프는 사전적인 의미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다리 근육을 키운 곳을 말하는 겁니다. 통을 키우고, 잔뼈를 궂게 해 준 그런 곳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아웃도어 지수를 높여준 곳을 뜻하는 것이죠.


그럼 저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일까요? 바로 관악산입니다. 동네 뒷산은 아니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던 관악산이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곳을 걸어 다니며 다리근육을 키웠고, 아웃도어 지수를 높였던 것입니다.

 





* 관악산 장승


 



 

남부 서울의 진산관악산

 

서울에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렇게 두 산은 서울의 남북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북한산을 서울의 최고 산으로 인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관악산은 항상 넘버 2’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강 이남으로 국한을 시키면 관악산이 당당히 진산의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서울 남부권에 관악산만한 산이 없거든요.


이미 삼국시대부터 관악산의 중요성은 부각되었습니다.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을 얻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의 남쪽 방어를 위한 산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듯 관악산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이런 역사성 때문인지 관악산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광화문에 해태상이 조각된 이유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편이라는 이야기, 조선 태종이 셋째 세종에게 양위를 할 것을 눈치 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도성을 빠져나와 왕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했다던 연주대이야기.


하지만 연주대(戀主臺)는 그 한자 이름에도 나타났듯이 왕좌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던 공간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럼 관악산을 누비며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 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힘들게 등산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수월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강감찬 장군 기마상: 말은 역동적으로 잘 조각됐다. 하지만 장군의 다리를 보라. 너무 짧지 않은가? 기왕하는 거 잘 만들지. 장군을 숏다리(?)로 만들어 버렸다.


 




 

노익장을 발휘한 문신 출신, 강감찬 장군

 

트레킹팀도 떠났습니다. 일명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하기 위해서!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성대였습니다. 수많은 관악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과 그의 생가인 낙성대(落星垈)일 것입니다. 낙성대라는 의미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굳이 신화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역사적인 인물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군사정권 시절, 성역화 작업의 한 대상자였던 강감찬에 대해 외면하고 싶은 시각도 존재할 것입니다. 현재의 낙성대는 1974, 유신헌법이 한참 맹위를 떨칠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 그래요!”

 

제 설명에 참가자들이 좀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놀랐습니다.





* 안국사: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낙성대 공원 안에 있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들이 아니었습니까?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보죠.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기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답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습니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낙성대 3층 석탑 좀 보세요.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인데요. 12세기 경에 건립됐으니 천 년의 세월을 버틴 탑이라네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탑이라는 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아 놓는 조형물이잖아요. 그런데 강감찬 장군은 부처님도 아니고 유명한 고승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곳에 탑이 세워졌습니다. 아무래도 강감찬 장군의 위엄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던 것 같아요.”

 

 




* 낙성대 3층 석탑





 

삼성산 성지

 

낙성대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시작됐습니다. 트레킹 팀은 서울대 입구를 지나 삼성산 성지로 향했습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으로 원효, 의상, 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삼성산에 있는 천년고찰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삼성산에 성지가 있는데 불교 성지가 아니라 천주교 성지입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입니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하여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습니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 세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 삼성산 성지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되었습니다.


삼성산 성지는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입니다. 성지라서 그런지 다른 탐방객들도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경건하게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트레킹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께서는 잠깐 동안 기도를 올리더군요.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입니다. 트레킹팀도 삼성산 숲에서 신선한 피톤치드를 온 몸으로 맞으며 기분 좋게 삼림욕을 했답니다

 

관악산의 또다른 자랑인 메타세쿼이어 숲 탐방을 끝으로 관악산 역사트레킹도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수도 없이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오를 생각입니다. 지겨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관악산에 발을 디디면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지금도 다음에 행할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떠올렸는데 벌써부터 흥분이 되네요. 역시 자신의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항상 즐거운 일인 듯싶습니다.

 

 



* 삼성산 성지: 한 중년 남성께서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관악산역사트레킹

 

1. 코스: 낙성대역 낙성대 서울대입구 헬기장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당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관악산 둘레길 따라 가는 ‘역사탐방’

 

 

 

프로필이미지 곽동운

 

 

서울에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다. 그렇게 두 산은 서울의 남북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북한산을 서울의 최고 산으로 치고 있다. 그래서 관악산은 항상 ‘넘버 2′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한강 이남으로 국한을 시키면 관악산이 당당히 ‘진산’의 지위를 누릴 것이다.

관악산의 중요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부각되었다.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을 얻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의 남쪽 방어를 위한 산으로 삼았다. 그렇듯 관악산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럼 관악산을 누비며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 보자. 어렵지 않다. 힘들게 등산을 할 필요도 없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수월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낙성대와 강감찬 장군 이야기

 

앞서도 언급했듯이 관악산은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곳이다. 그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두드러진 곳은 바로 낙성대(落星垈)다. 낙성대는 고려 초기의 명장인 강감찬 장군의 생가로 한자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을 때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 기마상과 낙성대 3층석탑

 

 

 

10만 거란군을 맞아 귀주에서 큰 승리를 이끌었던 인헌공 강감찬(948~1031년)은 사실 문신 출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시대에는 광종(925~975년)시기부터 과거시험이 시작됐는데 당시 과거는 문신을 등용하는 창구였다. 무신을 뽑는 과거는 고려 후기에 가서야 정례화 됐다. 즉 강감찬 장군은 문신 출신이었지만 귀주대첩이라는 큰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귀주대첩을 지휘할 당시, 강감찬 장군의 나이는 무려 70세였다는 것이다. 칠순의 나이에 최전방 사령관인 상원수가 되어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렇듯 노익장을 발휘하며 문무에 능통했던 인헌공 강감찬은 천수를 누리다 84세에 영면하게 된다.

 

 

 

사색하기 좋은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

 

 

 

 

관악산 둘레길 역사탐방은 서울대 정문을 지나 삼성산 성지로 길을 잡아 볼만하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으로 천주교 성지이다. 헌종 5년에 발발한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참수를 당하게 된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을 거쳐 이곳 삼성산에 가매장 되는데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다. 현재 그들의 주검은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

 

기해박해는 같은 세도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안동 김씨 집권기에는 천주교에 대해서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기해박해가 일어나게 됐고, 박해 이후로는 풍양 조씨 가문으로 권력의 추가 넘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관악산 주 등산로와 달리 삼성산 성지 일대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다. 더군다나 성지 인근에는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진 ‘삼성산 숲’이 있고, 또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메타세콰이어 숲’도 있다. 한적하게 숲길을 거닐며 사색하기 좋은 환경을 가졌다는 뜻이다.

 

 

 

둘레길 탐방로

 

 

 

역사를 따라 둘레길 탐방도 하고, 한들한들 봄바람을 느끼며 사색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관악산 둘레길이다. 주 등산로와는 달리 한적해서 더 좋은 곳이 바로 관악산 둘레길인 것이다.

 

 

■ 도움말
 1. 필자가 행한 관악산둘레길 역사탐방은 관악산둘레길 1, 2코스에서 이루어졌다.
 2. 코스: 낙성대역 ▶ 낙성대 ▶ 서울대입구 ▶헬기장 ▶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당
 3. 이동거리: 약 7km / 이동시간: 3시간 정도 예상(쉬는 시간 포함)
 4. 교통편: 출발-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 종료- 삼성당 성당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철 2호선 신림역행 버스 탑승. 약 10분 정도 소요됨.

 

 

 

 

 

 

 

 

 

 

 

 

 

 

3월 15일 일요일에 관악산으로 역사트레킹 하러 갑니다.

같이 가실 분 있으신가요? 아래 신청하러를 꾹 눌러주세요!

 

 

관악산둘레길 역사트레킹  ---> 신청하러 가기

 

 

 

 

 

 

 

 

 

 

 

 

풍경 좋은 산, '머리 잘리는 산'이 되다___ 1편

 

서울에서 가까운 천주교 성지는? 절두산, 삼성산 그리고 마재성지

 

14.08.13 11:29 최종 업데이트 14.08.13 11:29

 

 

 

 

 

 

 

 

 
▲ 절두산 성지 당산역 방면에서 바라본 절두산 성지. 뒤로는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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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4일부터 266대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호세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라는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의 방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천주교 신자들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

비천주교 신자들도 그의 방문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로 그간 활발한 대외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노숙인을 초청하고, 분배의 정의를 역설하는 등 전임 교황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역사 트레킹을 통해 천주교 성지 답사를 꾸준히 해왔다. 천주교 성지 탐방은 사찰 탐방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지금까지 천주교 성지 답사를 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생각보다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성지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 기사는 서울 인근에 있는 천주교 성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맞춰, 우리 땅에서 천주교가 어떤 식으로 뿌리를 내렸고 또한 어떤 수난을 겪어 왔는지 공부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산, 절두산

 
▲ 척화비 절두산 성지 한 쪽 편에 서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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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지나다 보면 절두산과 선유도를 볼 수 있다. 절두산은 옛날에는 '잠두봉'이라 불렸는데 선유봉(선유도)과 함께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곳이다. 양천 현감이었던 겸재 정선은 <양화환도>를 통해 화폭에 이 풍광을 담아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해 이름이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재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렸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인 절두산(切頭山)으로.

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뤄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아홉 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병인박해가 원인이 돼 병인양요가 발생한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로즈 프랑스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그런데, 당시 로즈 제독의 침공은 자국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병인양요는 국가 대 국가간의 분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한 곳까지 올라왔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격분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라면서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을 가진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리게 됐다. 병인박해는 1866년을 시점으로 1871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약 150년 전, 절두산은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우뚝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서 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세 프랑스 신부가 운명 달리한 곳,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지 왼쪽부터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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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삼성산은 원효·의상·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다. 그런 삼성산에도 삼성산 성지라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한 것이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 탄압에 앞섰다. 그렇게 해서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로 넘어갔다. 그런 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혔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했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조성됐다.

이 성지는 산 중에 있어서 그런지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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