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좋은 산, '머리 잘리는 산'이 되다___ 1편

 

서울에서 가까운 천주교 성지는? 절두산, 삼성산 그리고 마재성지

 

14.08.13 11:29 최종 업데이트 14.08.13 11:29

 

 

 

 

 

 

 

 

 
▲ 절두산 성지 당산역 방면에서 바라본 절두산 성지. 뒤로는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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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4일부터 266대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호세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라는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의 방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천주교 신자들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

비천주교 신자들도 그의 방문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로 그간 활발한 대외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노숙인을 초청하고, 분배의 정의를 역설하는 등 전임 교황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역사 트레킹을 통해 천주교 성지 답사를 꾸준히 해왔다. 천주교 성지 탐방은 사찰 탐방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지금까지 천주교 성지 답사를 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생각보다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성지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 기사는 서울 인근에 있는 천주교 성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맞춰, 우리 땅에서 천주교가 어떤 식으로 뿌리를 내렸고 또한 어떤 수난을 겪어 왔는지 공부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산, 절두산

 
▲ 척화비 절두산 성지 한 쪽 편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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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지나다 보면 절두산과 선유도를 볼 수 있다. 절두산은 옛날에는 '잠두봉'이라 불렸는데 선유봉(선유도)과 함께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곳이다. 양천 현감이었던 겸재 정선은 <양화환도>를 통해 화폭에 이 풍광을 담아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해 이름이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재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렸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인 절두산(切頭山)으로.

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뤄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아홉 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병인박해가 원인이 돼 병인양요가 발생한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로즈 프랑스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그런데, 당시 로즈 제독의 침공은 자국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병인양요는 국가 대 국가간의 분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한 곳까지 올라왔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격분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라면서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을 가진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리게 됐다. 병인박해는 1866년을 시점으로 1871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약 150년 전, 절두산은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우뚝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서 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세 프랑스 신부가 운명 달리한 곳,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지 왼쪽부터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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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삼성산은 원효·의상·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다. 그런 삼성산에도 삼성산 성지라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한 것이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 탄압에 앞섰다. 그렇게 해서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로 넘어갔다. 그런 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혔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했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조성됐다.

이 성지는 산 중에 있어서 그런지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이다.

 

 

 

 


 

 

 

내 똥에 그만 '철퍽'하고 넘어졌다 2편

[공모- 더러운 이야기]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서 벌어진 일, 그만 웃어버렸다

 

 

 

 

 


 

 
▲ 자전거여행 2009년 여름에 행한 1차국토종단 자전거여행. 면도를 안 해서 지저분하다. 무릎쪽에는 그날에 난 그 상처때문에 큰 거즈가 붙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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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편에 이어서

 

 

 

 

무릎은 깨졌지, 다리는 풀렸지, 그래서 뒤로 넘어갔지!

상처부위를 직접 눈으로 보니 아픈 게 더 크게 느껴졌다. 잠시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통증에 다리도 더 후들거릴 정도였다. 그 때 때마침 무언가가 제 앞을 휙~ 지나가는 것이었다. 귀신인가?

"악!"

머리는 띵하지, 다리는 풀렸지, 귀신인지 뭔지 때문에 갑자기 중심을 잃었다. 그렇다. 그냥 뒤로 넘어졌다. 이번에는 '꽝'이 아니라 '철퍽'하고 넘어졌다. '철퍽'하고 소리가 우렁차게 난 만큼 다 묻었다. 그 날 제주산 똥돼지 먹었다고 크게 일을 봤었는데 그게 다 필자의 엉덩이로 옮겨왔던 것이다. 무릎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지 엉덩이에는 철퍽하고 다 묻었지! 정말 난감했다. 이러려고 자전거 여행을 한 게 아니었는데.

'이게 다 뭐냐! 제주도에서 한 밤 중에 뭐하는 짓이냐!'

그래도 별 수 있는가, 이미 다 묻어버렸는데. 빨리 빡빡 닦아내야지. 정신을 가다듬고 뒤처리에 나섰다. 그리고는 크게 한 번 웃었다. 뭐가 좋아 웃었냐고, 묻지 마시라! 그 상황에서 울음을 터뜨릴 수도 없지 않은가?

덕분에 아주 시원하게 샤워도 하고 비데도 하게 됐다. 그것도 전신으로 하게 됐다. 저녁을 해먹은 코펠통으로 물을 받아 시원하게 내려 부었다. 깨진 무릎팍이 쓰라렸지만 참았다. 아주 빡빡 문질렀는데도 냄새가 잘 안 지워졌다. 코펠통으로 수없이 물을 뿌려댄 후에야 겨우 샤워를 끝낼 수 있었다. 그때서야 무릎의 피도 어느 정도 지혈이 됐다.

여행을 하다보면 별의별 일들이 다 있지 않던가. 어쩌면 그렇게 지저분한 일들을 당하는 것도 여행의 일부일지 모른다. 한라산 중턱 이름 모를 야영장에서 홀로 샤워 겸 비데를 마음껏 즐겼으면 그만 아닌가! 또 덕분에 이렇게 '더러운 이야기' 공모에 쓸 '꺼리'도 생기지 않았던가! 이런 것도 다 여행의 재미다. 더러워서 문제지만.

 

 

 

 
▲ 제주도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보시며, 필자의 더러운 이야기 때문에 지저분해진 눈과 마음을 정화하시길!

 

 

 

 

 

 

 

 

 

 

내 똥에 그만 '철퍽'하고 넘어졌다 1편

 

[공모- 더러운 이야기]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서 벌어진 일, 그만 웃어버렸다

 

14.08.10 14:54  최종 업데이트 14.08.10 14:54
 

 

 

 

 

 

 

 
▲ 화장실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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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여름.


당시 필자는 1차 국토종단 자전거여행을 행하는 중이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여행은 목포를 찍고 제주까지 이어졌다. 무려 17일 동안 계속된 여행이라 재밌는 일도 힘든 일도 많았다. 그래서 에피소드도 넘쳐났다. 특히 그날의 에피소드는 정말 '거시기'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지저분한 일이었다.

장기간의 여행이었지만 식사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똥'이었다. 평소에는 화장실을 자주 가지 않았었는데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서 그런지 여행 중에는 무척 자주 가게 됐다. 자전거 타기가 장운동에 좋아서 그런가? 화장실을 갈 때마다 아주 넉넉하게 일을 처리했다. 변기가 막혀 조마조마한 적도 있었다. 자전거 타기가 숙변제거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골에는 화장실 시설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야산에다 일을 처리 한 적도 있었다. 야삽으로 터를 잡고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렇게 일을 볼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점이다.

 

 


 

 
제주산 똥돼지로 배를 채웠던, 그날 밤

제주도의 한 아영장.

문제의 사건은 여행의 끝무렵이었던 제주도에서 발생했다. 필자는 그날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있는 한 야영장에다 텐트를 쳤다. 야영장이라고 하지만 폐쇄가 됐는지 시설은 다 노후화 된 곳이었다. 다행히 근처에 몸을 씻을 수 있을 정도의 수도 시설은 있었다.

그 날 그 곳에는 필자 혼자였다. 달빛이 있었지만 어두웠다. 가로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좀 쓸쓸한 밤이었다. 한라산 중턱 부근에 홀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쓸쓸함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문제의 그 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낮에 '똥돼지'로 불리는 제주산 돼지를 배불리 먹었더니 신호가 오는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아주 큰 녀석이 배출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욱신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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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여행 2009년에 행한 1차국토종단 자전거여행. 주렁주렁 매달고 지저분하게 하고 다녔다. 정신이 없었는지 뒤쪽 받침대도 안 올리고 타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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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게 뭐야!'


화장실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건 화장실이 아니었다. 그 곳은 귀신도 줄행랑을 칠 정도로 아주 최악의 화장실이었다. 냄새는 그렇다 치고 두 발로 자세잡기도 힘든 곳이었다. 아영장에 왜 사람이 없었는지, 왜 그렇게 시설이 낙후됐는지 깨닫게 되는 대목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자연을 벗 삼아 일을 치르기로 결심 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데 이게 딱 그거네. 오늘 따라 무척이나 비데있는 좌변기가 그리워지는구나!'

서둘러 땅 팔 곳을 찾았다. 허겁지겁 일을 치를 곳을 물색했는데, 그만 사고가 나고 말았다. 그만 '쾅'하고 돌에 부딪혀 오른쪽 무릎이 크게 다치게 된 것이다. 야영장이 어두웠던 데다 장기간의 여행 여파로 피로가 누적됐는지, 그만 다리 힘이 풀렸고 바위를 들이 받은 것이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엄청 세게 다쳤지만 아파도 별 도리가 없었다. 그저 빨리 일을 처리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당시 필자는 인간의 배설욕구가 외상의 고통 정도는 쉽게 불식시킨다는 것을 온 몸으로 습득하였다.

그렇게 볼일을 봤다. 정말 시원했다. 그렇게 원초적인 순간이 지나가니 자연스럽게 무릎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출혈이 심했던 것이다. 상처 부위도 상당히 넓었다. 그렇게 큰 상처가 났을 줄은 정말 몰랐다.

 

 

 

 

 

 

 

 

 

캠핑할 때 만난 밥도둑들___ 2편

예천 밥 '할매'와 검은 고양이


 


 

 
▲ 경북 예천의 삼막주막 예천에는 삼막주막이라는 유명한 주막터가 있다. 그 곳은 하천 세 곳이 만나는 곳이라 수로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룻터가 생기고 주막거리가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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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편에 이어서
 

 

 

 

# 예천 '할매'가 주신 밥 한 그릇

 

 

 

2012년 7월 18일.

당시 필자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하고 있었다. 경북 안동을 거쳐 내성천이 흐르는 예천군으로 향했을 때다. 유명한 회룡포를 가려고 열심히 페달을 밟아댔지만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기에 다음날을 기약하며 예천군 풍양면에 있는 작은 마을로 진입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좀 불안했지만 다행히 마을회관 앞에 있던 오두막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낯선 여행객이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이슈'가 되는 걸까? 다음날 아침부터 '할매'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어디서 왔노?"
"밥은 묵고 다니나?"

할매들의 그런 관심이 고마웠다. 외로운 여행길을 도닥여주는 할머니들의 아름다운 관심들이었으니까. 그런데 할매들은 이구동성으로 식사문제를 물었다. 그러면서 옥수수나 고구마 같은 간식거리들을 주시기도 했다. 어떤 분들은 밑반찬까지 건네줄 정도였다.

"이거 괜히 제가 와서 마을분들한테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입으로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손으로는 감사히 받았다. 애써 집에서 가져오신 귀한 음식을 그냥 돌려보낸다면 그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그런 할매중에는 아예 밥을 주신 분도 계셨다. 족히 2인분이 넘을 것 같은 밥을 그릇에 담아 전해주셨다. 보관을 잘 하라고 랩으로 잘 덮어주시기까지 했다. 정말 감사했다. 하지만 그때 필자는 아침을 막 먹었던 터라 밥그릇을 오두막 한편에 잘 놓아두었다.

"할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녁 밥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렇게 감사를 표시한 후 간단히 짐을 꾸려 회룡포로 향할 준비를 했다. 전날은 비가 와서 그냥 텐트에서 대기를 했지만 그날은 햇살이 센 것 이외에는 자전거 타기 '딱' 좋은 날씨였다. 오두막 주위에다 묵혀 놓았던 빨래들을 널어놓고 출발했다. 

 

 

 





 

 
▲ 회룡포 색깔이 있는 벼를 심어 저렇게 논에다 '벼그림'을 그렸다. 논을 도화지 삼아 벼로 모양을 내다니, 정말 대단하다! 당시 내가 예천군을 방문했을 때는 <예천 곤충엑스포>를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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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내 밥을 도둑질 했나?

 

 

 

회룡포로 향하는 길에는 유명한 삼강주막과 내성천이 있었다. 내성천의 금빛 모래에 경탄하며 회룡포를 향해 열심히 페달을 굴렸다. 삼강주막, 내성천, 회룡포 탐방까지 했더니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게 다시 텐트로 돌아왔다.

'아까 할머니가 주신 밥이 있었지. 그거 잡탕국에다 말아먹으면 되겠다. 따로 밥 하기 귀찮았는데 잘됐네!'

텐트로 돌아왔더니 좀 이상했다. 널어두었던 빨래는 한 쪽에 쌓아 있었고, 밥그릇은 내가 애초 놓았던 자리에서 빗겨나 있었다. 또 랩은 살짝 벗겨져 있고 누군가 한 숟가락 크게 떠먹은 듯 밥이 덜어져 있었다.

'동네 분들 중에 배고픈 분이 한 숟가락 드셨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내 밥을 먹었지?'

그 순간 필자의 시야에 확 들어오는 물체가 하나 있었다.

'저 녀석이다! 저 녀석이 분명 내 밥을 훔쳐 먹었을 거야!'

시커먼 고양이 녀석이었다. 어제부터 내 텐트 근처를 기웃기웃 거린 녀석이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어. 대낮에도 밥도둑들이 들끓을 줄이야!'

길 닦아 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고, 할매들이 나 먹으라고 한 밥을 정체불명의 고양이가 먼저 입을 댄 것이다. 분노(?)를 삭이며 나머지 밥을 잡탕국에다 말아서 맛있게 먹었다. 할매들이 주신 귀한 밥이니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입 댄 자리를 덜어내 버릴까 하다가 그것도 다 말아먹었다. 그날만큼은 그 고양이와 한솥밥 식구라고 생각하고 밥을 먹었던 것이다.

그 당시 검은 고양이는 억울했을지 모른다. 심증만 있지 확실한 물증이 있냐고 성토했을지 모른다. '시커먼 고양이가 나 혼자 뿐이냐!'며 앙칼지게 반론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밥도둑이라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팩트였다. 그건 다음날 내게 밥을 주신 할매가 직접 말씀해주셨다. 

 

"이제 가려고?"

나는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게 밥을 주신 할매가 다시 오셨다.

"예 이제 가려고요. 덕분에 밥도 잘 먹고 잘 쉬었다 갑니다. 근데 어제 제 빨래 걷어주셨죠? 안 그러셔도 됐는데... 정말 감사했습니다. "
"뭘 그거 가지고... 근데 어제 시커먼 고양이가 밥을 훔쳐 먹더라고."
"그렇죠. 고양이가 먹은 거 맞죠? 어쩐지 사람이 먹은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내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다음부터는 절대 밥도둑들에게 밥을 빼앗기지 말자고, 굳게 다짐을 하며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난 밥도둑들의 계속된 타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도 먹고, 너도 먹자'라는 식으로 생각을 고쳐먹기도 했다.

이렇게 현지분들에게 환대를 받고, 또한 음식물을 빼앗기는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있기에 여행은 항상 나를 설레게 한다. 그래서 또 배낭을 꾸리고 지도를 살펴보는 것이 아닐까? 이번에는 어떤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를 가지며...

 

 

 

 
▲ 내성천 황금빛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내성천. 내륙 하천에서 저렇게 고운 모래사장을 보기가 쉬운 일인가? 그런데 영주댐이 건설된다면 저런 금빛모래사장도 사라질지 모른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다.

 

 

 

 

 

 

 

 

 

 

 

 

 

캠핑할 때 만난 밥도둑들___ 1편

 

예천 밥 '할매'와 검은 고양이

 

14.08.09 14:46l최종 업데이트 14.08.09 14:46

 

 

 

 

 

 

 

 

 

 

 

▲ 추자도 필자는 저렇게 캠핑을 하고 다녔다. 저렇게 다녔으니 야생동물들에게 밥을 많이 빼앗기지... 이 곳은 추자도다. 2011년 여름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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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다니면 캠핑도 많이 하겠다."

"그렇지 뭐."
"어디서 캠핑하는 게 좋냐? 그냥 강가 같은 데서 하는 게 좋냐, 아니면 정식 캠핑장 가서 하는 게 좋냐?"

여행을 많이 다니다보니 지인들이 이런저런 아웃도어 정보를 물어온다. 하지만 나는 속시원한 대답을 해줄 입장이 못 된다.

 

 

 

# 술판 벌이는 캠핑장보다는 궁벽진 곳에다 야영을...

 


그간 텐트를 쳤던 장소들은 공동묘지, 동네 야산, 마을회관 공터 등이었다. 정식 캠핑장을 잘 이용하지 못했던 건, 돈이 없어 그러기도 했지만 시끌벅적한 캠핑장이 싫어서 일부러 피하기도 했었다.

"위하여! 먹고 죽자!"
"피박에 쓰리고네! 거기다가 독박까지 썼어!"

다음날 가야 할 길이 멀고도 먼데 옆 텐트에서 이런 소리가 나면 그날은 잠을 다 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이 오지 않는 궁벽진 곳에다 텐트를 구축했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잘 만했다. 서울에서는 들을 수 없는 산새소리들을 벗 삼아 잠을 청하면 그만이었다. 샤워문제나 식수조달 문제가 걸리기는 했지만 궁벽진 곳에서의 캠핑은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하지만 내 캠핑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제동이 걸리곤 했었다. 사람이 제동을 건 게 아니었다. 동물들이 방해를 한 것이다. 녀석들은 항상 내 텐트 주위를 맴돌았다. 텐트 안에 있던 침낭에 느긋하게 누워있던 너구리, 내 텐트가 자기 집인양 열심히 거미줄을 치고 있던 왕거미 등등.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다. 너구리는 쫓아버리면 되고, 거미줄은 날려버리면 됐으니까.

 

 

 


 
▲ 경북 예천군 풍양면 풍양면 청운리에서 인심 좋은 '할매'들을 만났다. 저렇게 묵은 빨래들을 널어두고 회룡포를 다녀왔는데 할매가 빨래까지 거두워주셨다. 정말 몸둘 봐를 모를 정도로 감사했다. 그런 사람냄새나는 인심이 그리워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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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탕국을 맛있게 먹던 누렁이

 

 

문제는 내 음식물을 노리는 녀석들이었다. 어차피 필자나 동물들이나 배고픈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녀석들에게 내 음식을 빼앗길 수 없었다. 자비심을 베풀 수 없었다. 가뜩이나 가난뱅이 여행을 하는데 음식물까지 녀석들에게 빼앗겨 봐라. 얼마나 서글프겠는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녀석들에게 많이 빼앗겼다. 어느 동네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저녁을 준비할 때 다음날 아침밥까지 같이 준비한다. 그래야 아침 시간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저녁을 지어 먹고, 나머지 음식물이 담긴 코펠들을 한쪽 구석에 놔두었다. 그리고는 동네 한 바퀴를 걷고 왔다.

그런데 다시 텐트로 돌아올 때 어떤 누렁이 한 마리가 코펠에 고개를 쳐박고 맛있게 음식물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녀석이 먹고 있던 것은 잡탕국이었다. 몇몇 장거리 여행자들은 점심을 식당에서 해결한 후 먹고 남은 반찬들을 쓸어 담아온다.

그렇게 담아온 음식물들은 저녁시간에 라면과 어우러져 잡탕국이 된다. 이 잡탕국은 그날 점심에 어떤 반찬들을 쓸어 담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데 얼큰할 때도 있고, 시원할 때도 있다. 그래서 잡탕국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먹을 것을 고려해 넉넉하게 준비를 했는데 그 누렁이 녀석이 아침용 잡탕국을 '짭짭'거리며 먹고 있었던 것이다.

"저 망할 녀석 같으니! 감히 내 아침 음식을 건드려!"

아쉽지만 나머지 잡탕국을 버려야 했다. 정체 모를 누렁이와 같은 음식을 먹기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아예 텐트 안에다 남은 음식물이 담긴 코펠을 들여 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방법도 유용하지 않았다. 밤에 뒤척이며 자다가 코펠을 건드려 잡탕국이 침낭에 쏟아진 것이다. 가뜩이나 좁은 텐트에 코펠까지 들여놨다가 그렇게 낭패를 당한 것이다.

 

 

 

 


 

 

 

 

* 경남 거창군 고제면: 고제면은 사과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앞에 보이는 산은 백두대간 삼봉산의 줄기다.  

 

 

 

 

 

 

 

 

이 포스팅은 지난 8월 1일, 경남 거창군 고제면에서 행해진 <제25회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대한 사진포스팅입니다.    저는 <제25회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스태프로 참여를 했습니다. 당일 비가 내려서 공연자들은 수중전을 치러야했고, 스태프들도 애를 먹었답니다. 하지만 공연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아쉬움이 남는 자리였지만 그런 만큼 내년에는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더 크게 활성화 될 수 있게 더 활발히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 경기민요

 

 

 

 

 

 

* 난타공연: 우리문화연구회

 

 

 

 

 

* 극강을 넘어서다: 민족무예단 삼족오.

 

 

 

 

 

* 첨탑 위 꽃과 나비: 조옥형

 

 

 

 

* 조갑녀류 승무: 서정숙

 

 

 

 

 

 

* 만석중놀이: 여의주를 두고 용과 잉어가 다투는 장면에서  '운심게작법'을 추고 있는

 한대수 거창귀농학교 교장. 귀농학교 교장이면서 연극인인 한대수 선생은 민속

전통무의 대가로 불리고 있다. 

 

 

 

 

* 만석중놀이: 만석중놀이보존회. 막 오른편에 서 있는 만석중 인형.

용과 해 인형이 함께 등장했다.

 

 

 

 

 

 

▲ 제주도의 푸른 바다 제주도 구좌읍의 바닷가를 걷고 있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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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그 섬에 다녀오다!__ 2편

2014 이어도 해양아카데미를 다녀와서 2번째 이야기

14.08.01 13:11l최종 업데이트 14.08.01 13:21

 

 

 

 

 

초토화작전으로 사라진 곤을동 마을

제주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곤을동 마을이란 곳이 있었다. 이 곤을동 마을은 화북포구 서쪽에 있었는데 멸치잡이로 유명한 곳이었다. 70여 가구가 옹기종기 살았던 곤을동 마을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곤을동 마을이 사라진 날은 제주 4·3사건이 한창이었던 1949년 1월 4일이었다. 그날 오전 무장대와 군인들 간에 교전이 있었는데 무장대 중 한 명이 곤을동 마을 쪽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 곤을동으로 도망 온 무장대는 곤을동 마을 주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군인들은 곤을동을 '폭도의 마을'로 지목하고, 주변을 포위한다. 군인들이 마을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학살이 일어났고, 곤을동은 불태워졌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4·3사건 당시, 군경의 초토화 작전은 중산간 지역에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곤을동 마을처럼 해안지역도 초토화 작전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워낙 중산간지역의 피해가 커서 그렇지 해안지역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 곤을동 제주 4.3사건 때 군경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 마을 전체가 사라진 곤을동 마을.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돌담 사이로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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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만 남아 있는 곤을동 마을을 보고 있자니 폐사지에서나 느껴졌던 황량함이 밀려왔다. 집채는 온데 간데 없고 마당을 둘렀던 돌담들만 외롭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화로운 마을이 한 순간에 사라질 정도로 곤을동 마을 주민들이 큰 잘못을 한 것일까? 인간의 내면에는 자비심보다 파괴욕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인가?'

 


다크 투어리즘과 제주도

돌담을 타고 오른 넝쿨들과 마당 자리에 피어난 잡초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안타까운 감정만 들었다. 곤을동 마을 탐방처럼 전쟁이나 학살, 천연재해를 당한 곳을 방문하는 것을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 부른다. 다크 투어리즘은 아픈 기억을 가진 지역을 탐방함으로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199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테마 여행의 한 형태다. 아우슈비츠, 체르노빌 같은 곳을 탐방한다면 다크 투어리즘 여행을 하는 것이다.

다크 투어리즘에 빗대서 생각해보면 제주도 곳곳이 다 탐방지에 속할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진행된 옥쇄 작전,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4·3, 한국전쟁 당시 때 일어난 예비검속 등등...

 

 

 
▲ 곤을동 돌담들이 이 곳이 집 터였음을 알리고 있다. 사진 중앙의 오른편에는 곤을동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거욱대가 보인다. 곤을동 사건은 1949년 1월 4일 오후 3시경에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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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만 그러겠는가? 육지도 다크 투어리즘 천지다. 5·18, 노근리, 서대문형무소 등등... 동학농민군이 몰살을 당한 공주 우금티도 다크 투어리즘의 최적지일 것이다.

밀물 때는 들어갈 수 없는 구좌읍 세화리 갯것이 할망당(해신당) 방문 등 제주해양문화유적 탐방은 짧았지만 무척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주강현 박사의 입담과 강은정 박사의 꼼꼼함이 잘 결합되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더군다나 한 여름 제주의 바다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잠의 림프' 따위가 찾아올 틈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돌아오는 비행기는 창문측에 앉을 수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제주도는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아름다운 제주도를 떠난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그렇게 하여 산 사나이의 제주도 해양문화 나들이는 무사히 종료가 됐다.

 

 


 

 
▲ 제주도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바라본 제주 시내. 용두암 일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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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그 섬에 다녀오다!__ 1편

 

2014 이어도 해양아카데미를 다녀와서 2번째 이야기

 

14.08.01 13:11l최종 업데이트 14.08.01 13:21

 

 

 

 

 

 

 

 
▲ 우도 제주 우도의 명소. 검멀레동굴과 검멀레 해수욕장. '검멀레동굴'은 검은 모래가 있는 동굴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자세히보면 동굴과 해수욕장의 모래는 검은빛을 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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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가 들썩였다. 아무리 이어도 해양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강연들이 흥미로웠다지만 좀이 쑤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도어(indoor)보다는 아웃도어(outdoor)에 강한 필자에게, 어떤 강연은 지루하다 못해 '잠의 림프'까지 만나게 해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주강현, 강은정 박사가 진행한 제주해양문화유적 탐방은 필자의 눈에 붙은 '잠의 림프'를 내쫓아주기에 충분했다. 푸른 바다에 위치한 탐방지들을 시원하게 둘러보았기 때문이다.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원장인 주강현 박사는 인문학, 민속학, 해양학 등 전방위적인 지식인으로 유명한 분이고, 연구원인 강은정 박사는 국내에서는 최초로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분이다. 다크투어리즘은 전쟁이나 학살, 천연재해를 당한 곳을 탐방하면서 역사적인 반성과 성찰을 해보는 새로운 형식의 테마여행을 말한다.

 

 

섬 속의 섬, 우도


제주해양문화유적 탐방의 첫 번째 목적지는 '섬 속의 섬'이라고 불리는 우도였다. 우도는 소가 드러누운 형상이라 하여 우도(牛島)라고 불린다. 여의도보다 조금 더 큰 우도는 '우도 8경'이 있다. 작은 섬이지만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해양아카데미 탐방단은 유명한 우도 등대에 올라가 우도와 바다건너 성산 일출봉 일대를 조망하였다. 우도 등대는 섬의 남쪽 쇠머리오름에 있는 등대로 1906년에 처음으로 점등되었다. 2003년에 새롭게 개축하였고, 일대를 등대공원으로 만들어 지금은 우도를 찾는 이들이 꼭 방문해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 우도 우도 등대에서 참가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제주대 명예교수 주강현 박사. 사진 중간에 물병을 든 이가 주강현 박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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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등대 앞에서 주강현 박사는 우리나라의 등대 문화에 대해서 문화해설을 하였다. 초기 등대는 일제가 우리해양을 수탈하기 위해서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당시 등대 관리자들은 전부 일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칼을 차고 근무를 했어요. 관헌들이었죠. 그만큼 일제는 등대를 전략 시설로 본 것입니다."

우도 제일의 명소인 검멀레 동굴 탐방이 이어졌다. 우도봉 아래에 있는'검멀레동굴'은 검은 모래가 있는 동굴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옆에 있는 검멀레 해수욕장은 검은빛을 띄는 모래사장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검은색의 현무암이 오랜 세월 깎이고 깎여 검은색 모래로 변한 것이다.  

 


 

신이 내린 황금그물, 갯담


탐방단은 제주도 구좌읍 하도리로 향했다. '신이 내린 황금그물'이라는 갯담을 보기 위해서였다. 갯담은 밀물과 썰물의 차를 이용하는 재래식 어로작업을 말한다.

바닷가에 빌레(너럭바위)로 둑을 쌓아 놓으면, 밀물 때 밀려 들어온 물고기들이 썰물 때에 못 빠져나가고 그 둑 안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갇힌 물고기를 걷어 들이는 방식이다. 원시적인 어업형태지만 가장 친환경적인 어로 형태가 바로 갯담인 것이다. 

 


 

 
▲ 갯담 갯담은 재래식 어로방식이다. 제주에서는 갯담을 원담이라고 불렀다. 밀물을 타고 온 물고기들이 갯담(돌)에 막혀 썰물때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들을 어획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조석간만의 차를 이용한 어업 형태다. 충청지역에서는 독살이라고 불린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무두망개 갯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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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담을 두고 제주에서는 원담이라고 불렀다. 원담에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어획됐는데 그 중에서 멸치가 가장 요긴하게 쓰였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멸치를 '멜'로 부르는데 이 '멜'은 식용 뿐아니라 토지의 거름으로도 쓰였다. 척박한 현무암 토양에 밑거름으로 뿌려진 것이다.


탐방단이 찾은 구좌읍 하도리 무두망개 갯담은 넘실대는 제주의 푸른 바다와 잘 어우러져 있었다. 자연미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인공미였다. 만약 주강현 박사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냥 바다쪽에 쌓여진 돌무더기 정도로만 인식했을 것이다. 그만큼 무두망개 갯담과 거기서 이루어진 어로작업은 자연 그 자체였던 것이다.

주강현 박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탐방단은 운이 좋았다. 밀물일 때는 갯담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인생이든 여행이든 '때'를 잘 맞춰야 하는 것 같다. 밑바닥이 보이는 청정 제주바다 위에 올려진 무두망개 갯담을 바라보니 이국적인 모습이었다. 열대지방에 온 듯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이가 이런 말을 했다.

"꼭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아요. 뭐 몰디브나, 남태평양 같은데요..."

 

 

 

 
▲ 무두망개 갯담 한 참가자가 갯담 밖에서 발을 담그고 있다. 얼핏보면 남태평양의 한 휴양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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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도: 우도 등대 가는 길

 

 

 

 

 

 

 

 

 

 

 

◆ 우도: 성산포항에서 우도행 배를 기다리며...

 

 

 

 

 

 

<제주> 3일간의 제주도 둘러보기___ 사진이야기

 

 

 

 

 

지난 7월 21~23일까지, 2박 3일간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사단법인 이어도 연구회와 한겨레 교육문화센터가

주최하는  <2014년 이어도 해양아카데미>에 참석하기 위하여 제주도를 다녀온 것이지요. 올해로 6회째를

맞는 이어도 해양아카데미에는 새내기 대학생들부터 백발이 성성한 분들까지,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60여명의 분들이 참가를 했답니다.

이어도 문제에서부터 제주도의 해양문화와 생활방식까지... 강연과 현장답사로 이루어진 이번 아카데미에서

많은 것을 배웠답니다. 예전에는 그냥 스쳐지나갔던 것들도 설명을 들으며 관찰을 하니 새롭게 보이더군요.

이 포스팅은 그런 해양 아카데미의 맛보기입니다. 

 

 

 

 

 

 

 

◆ 우도: 우도 등대에서 참가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는 제주대 명예교수 주강현 박사.

사진 중간에 물병을 든 이가 주강현 박사임.

 

 

 

◆ 우도 등대

 

 

 

 

◆ 우도: 우도 올레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 우도: 제주 우도의 명소. 검멀레동굴과 검멀레 해수욕장.

'검멀레동굴'은 검은 모래가 있는 동굴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자세히보면 동굴과 해수욕장의 모래는 검은빛을 띄고 있다.

 

 

 

 

◆ 갯담: 갯담은 원담이라고도 불리는 재래식 어로방식이다.

밀물을 타고 온 물고기들이 갯담(돌)에 막혀 썰물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여 어획을 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조석간만의 차를 이용한 어업 형태다.

충청지역에서는 독살이라고 불린다.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무두망개 갯담.

 

 

 

◆ 무두망개 갯담: 한 참가자가 갯담 밖에서 발을 담그고 있다.

얼핏보면 남태평양의 한 휴양지의 모습을 담은 사진 같다.

 

 

 

 

곤을동: 제주 4.3사건 때 군경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 마을 전체가 사라진

곤을동 마을.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돌담 사이로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 곤을동: 돌담들이 이 곳이 집 터였음을 알리고 있다. 사진 중앙의

오른편에는 곤을동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거욱대가 보인다.

곤을동 사건은 1949년 1월 4일 오후 3시경에 발생했다.  

 

 

 

 

 

◆ 제주공항: 제주공항에서 대기실에서 바라본 제주공항 활주로.

 

 

 

 

◆ 제주도를 떠나며: 제주도를 떠나며 한 컷.

운이 좋았는지 서울로 올라오는  좌석은 비즈니스급(?)이었다.

또한 창측에 앉을 수 있었다. 창측에 앉아 열심히 사진을 찍어봤다.

 

 

 

 

 

 

 

 

  

 

 

▲ 배 우리는 해양강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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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 섬 '이어도' 보고 목숨 잃었던 이유___ 2편

 

 

---> 전편에 이어서

 

 

신비의 섬 이어도와 이어도해양과학기지

이어도는 국토의 최남단인 마라도에서 서남쪽으로 149km에 위치한 수중암초다. 가장 위쪽으로 솟아 오른 부분이 해수면에서 -4.6m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10m 이상의 높은 파도가 일어나야 이어도의 실체가 드러난다.

하지만 옛날의 뻔한 선박기술로는 10m짜리 집채만한 파도를 견딜 수 있었던 고깃배가 없었고, 그래서 난파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즉 옛날에 이어도를 보았다는 것은 자신이 탄 고깃배가 큰 파도에 휩쓸렸다는 뜻이다. 큰 파도가 일어나야 이어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파도가 제주 어부들의 목숨을 집어삼켰던 것이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곳. 가려면 이승의 삶을 내려놓아야 하는 곳. 그런 곳이 이어도였다. 남겨진 이들은 파도에 휩쓸려 이 세상을 등진 이들에게, 이어도가 안식처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자연사보다는 해난사고가 많아 시신을 찾지 못했던 제주도의 장례 문화 특성이 이어도 전설에 고스란히 스며들어간 것이다. 한마디로 제주도민들에게 이어도는 해원(解寃)의 장소였다.

 

 

 

 

▲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국립해양조사원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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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환상의 섬으로만 인식됐던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가 들어섰다. 이어도 수역은 명량해전이 있었던 울돌목만큼이나 조류가 심한 곳이라 해양기지를 만드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집채만한 큰 파도가 끊임없이 몰아쳤지만 당시 건설진들은 그런 난관들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8년 만인 지난 2003년, 드디어 이어도해양과학기지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도 기지는 태풍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하기 8∼12시간 전에 이동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이어도 수역은 우리나라 해상 운송의 대동맥과 같은 곳이다. 그런 중요한 곳에 이어도 과학기지가 들어선 것이다.

 

이어도기지와 한국 방공식별구역의 확장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어도 해양기지의 건립은 순탄하지 않았다. 작업공간의 한계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의 반대도 심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은 쑤옌자오(이어도의 중국명)가 전통적으로 자국의 관할에 속한다며 강하게 반발했었다. 실제로 중국이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에는 이어도가 포괄되고 있다. 참고로 한국과 중국간에는 해상경계 조약을 맺지 않고 있다.

2012년 11월. 시진핑-리커창 체제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제18차 당 대회에서 중국 정부는 '해양강국 건설'을 천명하였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역설했던 시진핑의 담화는 2013년에는 중국 공군의 방공식별구역(CADIZ) 선포로 현실화 됐고, 2014년에는 남중국해 시사군도에서의 석유시추로 강행됐다.

현재 일본과 분쟁을 빚고 있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는 제쳐놓더라도, 중국이 해상강국으로 도약한다는 건 주변국들과의 마찰이 불가피하하다는 뜻일 것이다. 황해바다부터 동중국해, 남중국해까지. 중국과 인접국들은 바다를 두고 서로 얽히고 설켜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거친 파도 위에 우뚝 서 있는 이어도 해양기지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태풍의 진로를 미리 파악하여 육지에서 대비책을 강구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고, 우리나라 해상물류의 대동맥에서 등대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에 대항하여 한국의 방공식별구역이 재설정 됐을 때도 이어도해양과학기지는 큰 역할을 해주었다. 만약 이어도 기지가 없었다면 방공식별구역의 확장도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 이어도 해양아카데미 이어도 해양아카데미 참가자들. 우도 등대를 탐방한 후 우도 올레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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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해양강국인가

이와 같이 해양아카데미에서는 이어도 문제와 우리의 해양문화에 대한 강연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명확히 개념이 잡히지 않았던 이어도 문제와 제주지역의 해양문화에 대해 스스로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큰 도움을 받은 시간이었다.  

대다수의 강의는 흥미진지해서 한 시도 강연자의 말을 놓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떤 강의는 필자를 깊은 '졸음의 심연'으로 인도하기도 하였다. '졸음의 심연'에 빠지기 않으려고 빰을 때리고, 허벅지를 꼬집고. 그런 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난 인도어(indoor)보다는 아웃도어(outdoor) 체질이야!'

글을 마치기 전에 독자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다.

"우리나라가 해양강국인가?"

예전 같았으면 필자는 우리가 해양강국이라고 말을 했을 것이다. 세계에서 몇 개국 밖에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이지스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고, 축구장 몇 배에 달하는 거대한 유조선도 척척 만드는 나라이기에 당연히 해양강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세월호 때문이다. 엄청난 해양사고가 일어난 지 100일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사고에 대해서 명쾌하게 밝혀진 게 하나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해양강국인가. 엄청난 해양사고가 일어났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해양강국인가.

 

 ◆ 이어도의 위치
 
   

 

◆ 배타적경제수역(EEZ): 한국과 중국, 양국이 주장하는 배타적경제수역이

서로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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