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귀로 만든 음식, 혀를 녹이는 맛이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9] 발라돌리드 ①

 

15.01.25 21:30   최종 업데이트 15.01.25 21:30

 

곽동운(artpunk)

 

 

 

 

 

 

 
▲ 산 파블로 교회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는 정교한 석조물로 정면을 꾸몄다. 발라돌리드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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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6일, 여행 14일째.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 여행을 마친 후, 필자는 순례팀과 작별하고 개별 배낭여행 형식으로 일정을 이어갔다. 함께 북적북적대며 여행하는 재미와도 작별해야 했다. 이제부터는 고독한 '단독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여태껏 단체 여행의 장점을 누렸으니 이제는 단독 여행을 누려볼 차례였다.

 



배낭여행의 첫 목적지, 발라돌리드

여행 동선을 크게 잡지는 않았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중부권 영역 일대만 여행 대상으로 삼았다. 스페인에 가면 꼭 들러야 한다는 바르셀로나와 이슬람의 역사가 남아 있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은 제외하기로 했다. 그렇게 골랐더니 발라돌리드, 세고비아, 톨레도 등 세 개의 도시가 정해졌다.

 

 


 
▲ 발라돌리드 중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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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돌리드(Valladolid)가 그 첫 번째 여행지였다. '바야돌리드'라고도 불리는 이 도시는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 마드리드에서 버스로 약 2시간 30분 정도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이곳은, 중세 시대에 대학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도시다.


마드리드에서 16유로를 주고 발라돌리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페인 버스는 우리나라 버스보다 더 크고, 좌석도  많았다. 화장실까지 갖춘 곳도 있었다. 심지어 국제선 여객기에서나 볼 수 있는 개별 모니터가 장착된 버스도 있었다. 그 모니터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영화도 볼 수도 있다. 게임도 가능하다. 아무래도 국토가 넓고, 주행 시간이 길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스페인에서 한반도를 떠올리다


한편, 장애인이 고속버스를 타는 데 용이하도록 리프트 장비가 설치된 버스도 있었다. 그냥 '보여주기'식으로 한 두 대 정도가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 꽤 많은 리프트 버스가 운행되고 있었고, 또한 그 노선도 다양했다. 우리나라의 리프트 버스 배치 상황을 생각해보면 정말 부러운 광경이었다. 이동권 약자들도 당당하게 대중교통을 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스페인 고속버스 스페인의 고속버스는 직행버스 개념이다. 논스톱으로 가지 않고 몇 군데를 들렀다 가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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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돌리드 행 버스에도 개별 모니터가 있어 필자도 음악을 들으며 차창 밖을 응시했다. 창문 밖에는 시원스런 풍광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은 카스텔라 레온(Castilla y León) 지역인데 이곳은 드넓은 평원 형태를 띠고 있었다. 광활한 평원이 드문 국토, 거기다 남북이 갈려 섬처럼 고립된 우리땅이 생각났다. 그렇게 좁은 국토에 살면서도 지역 감정이니, 동서 갈등이니 하는 식으로 감정의 골이 패니 그저 착잡한 심경이 들 뿐이었다.


바스크와 카탈루냐의 분리 운동으로 유명한 스페인에서, 한국의 지역 감정에 대해 떠올리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일일지 모른다. 잘 알려지다시피 스페인에 비하면 한국의 지역감정은 양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바스크와 카탈로니아 문제는 1천 년 이상의 시간이 녹아 있다. 그 시간 속에는 이슬람 세력과의 항쟁 과정 속에서 나온 부산물도 또아리를 틀고 있다. 분리주의 운동이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국인은 나 혼자


주위 풍광에 매료되는 걸 멈추고, 문득 버스 안을 둘러봤다. 자세히보니 오직 필자만 동양인이었다. 마드리드에서도 산티아고에서도, 심지어 땅끝이었던 피스테라에서도 동양인은 물론 한국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만큼 한국인이 해외 여행을 많이 다닌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발라돌리도에서는 가는 버스뿐 아니라 현지에서도 한국인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고독한 단독 여행을 위한 장치(?)들이 제대로 갖춰진 셈이다.

'그래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 곳에서 진정한 배낭여행자가 돼 주지! 어차피 배낭여행도 숙식만 해결되면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가는 거잖아!'

그렇게 다짐한 후 남은 여비를 생각해봤다. 순례길에서 워낙 저렴하게 숙식을 해결해서 그런지 여행 14일째인데도 300유로 밖에 지출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4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2주 정도를 버틴 것이다. 이것만 봐도 산티아고 순례길이 얼마나 도보 여행자에게 친화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캄포 그란데에서 새들과 옥신각신


 
▲ 캄포 그란데 공작새가 노닐던 캄포 그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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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도시답게 발라돌리드는 여러 문화 유적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시가지가 크지 않아 그 유적들을 도보로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일단 버스 터미널에서 빠져 나온 후 처음 방문한 곳은 캄포 그란데(Campo Grande)라는 공원이었다. 스페인어로 'Campo'는 '초원' 혹은 '들판'이란 뜻이고, 'Grande'는 '큰'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캄포 그란데는 '큰 들판'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삼각형의 틀을 가진 캄포 그란데는 이 도시 사람들이 무척 사랑하는 공원이다. 이곳은 새들의 천국으로, 공작새를 비롯한 비둘기, 오리, 거위들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특히 공작새가 눈에 많이 띄었는데 어떤 녀석은 갈 길 바쁜 필자 뒤를 졸졸 따라 오기도 했다. 먹이를 달라는 것이다.

"가라! 나 먹을 것도 없어!"

그래도 공작새는 양반이었다. 연못에 사는 거위 한 마리는 아예 필자의 손가락을 낚아챌 듯 덤벼들었다. 괘씸한 생각에 계속 먹이를 주는 척하며 손을 거두기를 반복했다. 그랬더니 신경질을 내듯 "꽥꽥"대며 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필자의 승리였다. 이렇듯 새들과 옥신각신하는 재미 때문인지 캄포 그란데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김치와 고추장이 동시에 생각나는 요리

 


 
▲ 오레자 갈레가 (Oreja Gall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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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시청 건물이 있는 마요르 광장(Plaza Mayor)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발라돌리드 마요르 광장은 상당히 규모가 큰 광장으로, 이 도시 사람들이 모임 장소로 애용하는 곳이다. 노천 카페가 광장을 둘러싸듯 즐비해 있고, 인근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도 많았다. 여행 안내소에서도 마요르 광장 거리에는 맛 좋은 바르(bar)와 카페가 많다며, 꼭 거기서 식사를 해보라고 권할 정도였다.


필자도 광장 인근에 있는 바르에서 오레자 갈레가(Oreja Gallega)라는 음식을 주문했다. 가격이 4유로로 무척 저렴했기에 그 요리를 택한 것이다. 값이 싸기에 그저 간단한 샐러드 요리가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무슨 비계 껍데기가 나왔는데 외관부터가 아주 비호감이었다. 딱 봐도 느끼함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아까운 음식을 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보기에는 그래도 맛은 별미일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음... 김치와 고추장이 동시에 생각나는 요리는 난생 처음이야. 아주 느끼한 맛이 혀 전체를 녹여버리는 느낌이군... 젠장!'

 

 


 
▲ 케밥 이 케밥도 느끼해 보이시나? 좀 느끼하긴 했어도 케밥은 먹을만 했다. 양도 많아서 반은 먹고, 반은 남겨서 도시락을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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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큼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도 오레자 갈레가를 맛본다면 분명 필자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레자 갈레가는 소의 귀를 잘라서 만든 요리였다. 그리고 그 느끼한 맛을 음미하며 먹는 요리라고 했다.


달리 이야기하면 한국 사람이 요리를 먹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소 귀 요리인 줄도 모르고 덥석 주문했다가는 느끼함으로 아주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억지로 식사를 마친 후문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옆 카페에 붙은 광고지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앗! 옆에 일식집이 있었네. 초밥이 비싸지 않네...'

 

 

 

고독함을 뼛속까지 체험한 밤

 


 
▲ 야경 발라돌리드 시가지의 야경. 캄포 그란데 입구쪽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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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식사는 해결됐다. 이제 문제는 잠잘 곳이었다. 지금까지 산티아고 순례길의 알베르게 요금에 익숙한 터라 호스텔 비용이 걱정이었다. 그나마 호텔은 눈에 잘 띄었는데 호스텔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도시가 오래돼서 그런지 발라돌리드는 좁은 골목길이 많았다. 어둠이 내리자 골목길이 더 좁게 느껴졌다. 골목길을 헤매며 값싼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호스텔 파리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뭐요? 40유로요?"

필자는 멈칫했다. '호스텔 비용이 40유로나 하다니! 조금 더 보태서 호텔에 들어가는 게 낫지!' 그냥 두 말 없이 발길을 돌렸다. 6유로로 1박을 할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가 무척이나 그리운 순간이었다. 

저렴한 숙박지를 찾아 열심히 발라돌리드를 걸어 다녔다. 밤 길이라 그런지 계속 같은 골목을 뱅뱅 도는 느낌이었다. 설상가상이라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낯선 타국의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호스텔 리마라는 곳을 찾아냈고, 25유로를 주고 1박을 할 수 있게 됐다. 발품을 팔았더니 그나마 저렴한 숙소를 찾아낸 것이다.

고독한 단독 여행의 특징을 뼛속까지 체험한 밤이었다. 북적북적하던 알베르게가 그리운 밤이었다. 냄새는 났지만 서로 간의 격려가 넘치던 알베르게로 돌아가고 싶은 밤이었다. 발라돌리드의 문화유적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

 

 


 


 
▲ 마요르 광장 발라돌리드 마요르 광장. 꼰데 안수레스(Conde Ansurez) 동상이 있다. 페드로 안수레스라고도 불리는 이 인물은 에스퍄냐 북서부 지역의 유명한 백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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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에 작은 다짐을 실어보내며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8]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15.01.22 08:25 최종 업데이트 15.01.22 08:28
곽동운(artpunk)

 

 

 

 

 

 

 

 
▲ 피스테라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바위 위에 철로 만든 신발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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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2일, 여행 10일째.


이전 여행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스페인의 땅 끝 마을인 피스테라(Fisterra)의 길은 확실히 개발이 덜 된 느낌이었다. 황무지 같이 방치된 곳들도 있었고, 간간이 버려진 집들도 눈에 띄었다. 스페인의 농어촌도 도시로의 인구 유출이 심각해 보였다.

그렇게 개발도 안 됐고 인적도 드물다 보니,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중 인상적인 지형도 눈에 띄었다. 아침에 올베이로아(Olveiroa)에서 출발을 한 후, 1시간 정도 이동했을 때였다. 길 옆쪽으로 살라스 강(rio xallas)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는데 감입곡류 형태였다.

 

 

 


 
▲ 살라스 강 감입곡류형 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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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입곡류는 하천이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뱀처럼 꾸불꾸불하게 감겨 나가는 것을 말한다. 감입곡류 일부 구간에서는 강물이 350도로 휘돌아 나가기도 한다. 그런 살라스 강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월의 한반도 지형과 예천의 회룡포가 생각났다. 사실 한반도 지형을 담은 서강과 회룡포를 만든 내성천에 비하면 살라스 강의 꾸불꾸불함은 새발의 피였다. 이렇게 남의 것을 바탕삼아 우리 것을 비교해 보는 것도 해외 도보여행의 장점 중에 하나다. 


뱀처럼 휘감겨 흐르는 살라스 강처럼, 강은 있는 그대로 흐르게 해야 한다. 괜히 직선화를 한다, 보를 세운다 하면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그럼 강은 역습을 하게 된다. 지금의 4대강을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360도 전체를 보는 도보여행

 


 
▲ 피스테라 스페인의 북서부, 갈리시아 지역. 피스테라, 묵시아(Muxia), 산티아고 콤푸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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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의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가? 걷고 또 걷다 보니 배터리가 방전되듯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수그려서 걸으니 정면만 응시했다. 시야가 무척이나 좁아진 것이다. 그날 여행수첩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도보여행은 앞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위사방 360도 전체를 보고 가는 것이다. 길을 가다 잠시 멈춰 서서 꽃과 나무를 감상하고, 시냇물 소리도 듣고, 바람도 느끼는 것이 진정한 도보여행이다."

 


여행수첩에는 "도보여행은 360도"라고 적어 놓았지만 정작 필드에서는 시야각이 겨우 45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는 자신이 적어 놓은 것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니 결국 목적지인 피스테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보여행의 마지막을 아주 화끈하게 불태운 듯싶었다. 발바닥이 불이 난 듯 아주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본 대서양에 발을 담가 열을 식히고 싶을 정도였다.

4년 전 행한 국토종단 여행도 무척 힘들었다. 해남 땅끝 마을을 방문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태풍을 만나고, 텐트가 망가지고... 하지만 결국에는 국토종단 여행을 무사히 종료 됐다. 그렇게 고생스러운 여정 때문이었는지 아직까지도 그 여행은 필자의 뇌리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피스테라 길을 포함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도 마찬가지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고 또한 많이 배운 여행이라서 그런지 여운이 아주 길게 갈 것 같다. 

 

 



피스테라와 야고보는 관련이 없다?

 

 


 
▲ 오레오 곡물 창고인 오레오. 습기와 설치류들을 피하기 위해 기둥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둥은 끝 마무리를 둥글게 했다. 기둥 마무리 부분이 둥그니 아무리 쥐들이 기둥을 타고 올라와도 끝 부분에서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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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대개 그곳을 유럽대륙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피스테라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피스테라는 필자가 반복해서 기술한 대로 스페인의 땅끝이지 유럽 대륙의 땅끝은 아니다.


정확히 유럽 대륙의 땅끝은 호카 곶(Cabo de Roca)이다. 호카 곶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깎아질 듯한 해안절벽이 일품인 곳이다.

 

 



 
▲ 피스테라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에 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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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테라에 대한 환상(?)을 한 가지 더 깨보자. 앞선 여행기 2편
(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에도 언급했듯이, 야고보 성인은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래서 야고보의 시신이 담긴 배가 예루살렘에서 피스테라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항해 기술은 둘째 치고, 사역을 하지도 않은 곳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전도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스테라가 왜 야고보와 연결이 됐을까? 아무래도 야고보의 존재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피스테라가 동원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로마인들은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도착하여 별들의 들판이라는 산티아고 콤프스텔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정리될 수 있다. 이런 전개 과정 자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익사이팅'한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 챔피언 이 스페인 사람은 피스테라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필자에게 큰 감흥을 주어서 이번 여행기에 사진을 올려본다. 이 분의 왼쪽 다리를 보시라. 의족이다. 저런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더 당당했다. 저 자전거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물론 이베리아 반도 순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챔피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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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 깨졌다고는 해도, 피스테라는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곳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안절벽들을 따라 가다보면 땅끝 등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의 모습은 일품 중에 일품이다. 특히 이곳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띄우는 의식을 행한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자신의 것들을 산화 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등대 근처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태운 신발과 옷가지의 흔적들이 널려 있었다.

피스테라는 그런 장소였다. 무언가 의식을 행하거나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마치 해남 땅 끝에 가면 무언가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필자도 대서양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 유럽대륙을 자전거로 피스테라에서 만난 한국 여대생. 터키에서부터 스페인 피스테라까지 무려 5000km 넘는 거리를 단독으로 여행 했다고 한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진짜 강철같은 에너지를 가진 청년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자전거로도 순례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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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 앞에서 다짐을 한 말치고는 무척 소박한가? 그래도 상관없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한다는 것이 평소 필자의 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허상과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일들을 척척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고 생각한다.


지나간 과거를 괴롭게 되새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서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기 하다. 대신 너무 현실적으로 살지는 말자. 가능한 꿈은 얼마든지 꾸자!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도보여행은 끝이 났다. 도합 200km 정도를 걸었는데도 성취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서인지 <오마이뉴스>에 여행기를 작성해 송고할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였다. 당장 배낭을 꾸려서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꾹 참아야 했다. 그만큼 순례길은 필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남북한 순례자들이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

글을 마치기 전에 순례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본다.

순례길은 화합의 길이었다. 지역감정으로 유명한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 순례길이었다. 스페인 내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앙숙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발트3국) 청년들이 서로 의지를 하며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었다.

도보여행을 하는데 국적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소용이 없다. 순례자의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열심히 즐기며 도보여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필자도 일본인 친구들과 짧게나마 즐겁게 걸었다. 니가타 출신이라는 처자는 필자에게 한국말로 '오빠'라고 칭해 주었다. 필자도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응답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재미다.

산티아고 카미노에서 북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일일 것이다. '통일대박' 시대에 자연스러운 남북한의 인적교류가 이루어지는 거니까!

순례팀은 차량을 통해 피스테라에서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또 다른 바닷가 마을 묵시아(Muxía)로 이동을 했다. 묵시아도 풍광이 무척 아름다운 어촌 마을 중에 하나였다. 묵시아 여행을 끝으로 필자는 개인 배낭여행 형식으로 스페인 중부권 일대를 탐방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가겠다.

 

 



 
▲ 묵시아 묵시아는 풍광이 아름다운 어촌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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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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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브로큰>과 광복 70주년

 

15.01.16 18:46   최종 업데이트 15.01.16 18:46

 

 

 

 



"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 태평양에서의 47일간의 조난, 그 조난 생활보다 더 혹독했던 포로수용소 생활 등등... 영화 <언브로큰(unbroken)>의 실제 인물인 루이 잠페리니가 겪은 고난들은 저 격언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강도가 심한 것들이었다.

그런 고난들은 끊임없이 저승사자처럼 앞에 나타나 주인공 뒤편에 죽음의 그림자를 길게 늘여 놓았다. 전투 중에는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가 저승사자였고, 태평양의 망망대해에서는 상어떼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런 저승사자 중에서 가장 악랄했던 건, 일명 '새'라고 불렸던 포로수용소장 와타나베였다. 저승사자들은 주인공의 명줄을 조여 왔다. 그런 생지옥과 같은 상황이 계속 펼쳐지니, 필자의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수녀님 한 분이 연신 이런 말을 내뱉었다.

"세상에... 세상에..."

필자는 침묵을 지켰지만, 마음 만은 똑같았다. 신에 가호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주인공에게 크게 감정이입이 됐던 것이다. 


 
▲ 언브르큰 포스터
ⓒ 언브로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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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지옥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격언

"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는 청년 멘토 프로그램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좀 '말랑말랑'한 격언이다. 하지만 그 격언은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에게 숨을 불어넣어줬고, 그가 역경을 극복할 수 있게 큰 버팀목이 되었다. 작은 말 한 마디가 생지옥을 벗어나게 하고, 저승사자들을 따돌리게 만든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사실 저 격언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문장인데, 루이에게 그의 형이 말한 것이다. 루이는 우유통에다 술을 숨겨 먹을 정도로 삐딱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루이의 형은 동생에게 달리기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육상을 권하게 된다. 하지만 반항아인 그가 순순히 달리기에 맛을 들였겠는가? 형은 투정을 부리던 루이에게 일침을 가하며 저 격언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 격언을 밑거름 삼아 루이는 열심히 달렸고, 결국 미국 육상 대표로까지 선발된다. 맛보기(?)로 참가한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큰 두각을 나타냈던 루이는 다음 올림픽을 기약한다. 다음 올림픽은 1940년 도쿄 올림픽이었다. 물론 도쿄 올림픽은 2차 대전으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다.

루이에게 도쿄 올림픽은 꿈의 무대였다. 하지만 그 꿈은 아주 비극적으로 현실화가 된다. 국가대표로 올림픽 주경기장에 선 것이 아니라 도쿄 외곽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끌려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루이는 무려 850일 동안 총 3번의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콰절런 섬(먀샬제도 인근)의 야전수용소에서 시작한 생활은 오모리(도쿄 인근)를 거쳐 역사상 최악이라는 나오에츠 수용소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나오에츠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용소였는데 이곳에서 포로들은 석탄 운반 노역에 처하게 된다. 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을 정도로 포로들은 엄청나게 혹사를 당한다. 한마디로 그곳은 죽음의 수용소였던 것이다.  

 

 
▲ 와타나베 와타나베 역할을 한 배우는 록밴드 출신인 미야비이다. <언브로큰>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던 일본 우익들은 미야비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그가 재일동포 3세라는 것을 트집잡았던 것이다.
ⓒ 언브로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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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익들을 불편하게 한 포로수용소 장면

주인공이 석탄 노역에 시달린 북방의 수용소 장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1944년에 사할린으로 징용된 필자의 외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강제로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간 외조부께서는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셨다고 한다. 죽도록 고생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상황을 돌이키시는 것이 괴로우셨는지, 외조부께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을 아꼈다.

외조부께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을 아끼셨지만 <언브로큰>에서는 순화시켜서 이야기를 전개시켰다. 원작에서는 포로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되기도 했고, 심지어 인육까지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감독인 안젤리나 졸리는 그런 부분을 전혀 담아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순화된 내용조차도 일본 우익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언브로큰>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회자되는 부분은 이 포로수용소 장면이다. 이미 많은 내외신 언론보도에도 언급됐듯이 일본 우익들은 이 포로수용소 장면을 무척 불편해 한다. 포로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강제노역 부분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도쿄수용소부터 저승사자처럼 굴었던 와타나베의 악독함을 완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뿐이겠는가? 사실 그들이 부정하는 것들이 어디 한 두 가지인가? 2014년 9월에 있은 고노 담화 흔들기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벌였던 731부대는 아예 존재자체도 부정하고 있다. 외조부가 당한 강제 징용이나 근로정신대에 대해서도 한일청구권 소멸을 들어 그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 안젤리나 졸리 <언브로큰>의 감독.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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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가 더욱더 칭송받을 수 있는 건 그가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라디오 방송에 나가 써준 대로 읽기만 하면, 안락한 삶을 제공한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혹독한 포로수용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루이는 저승사자들의 위협과 안락한 삶의 유혹을 참아냈고 끝까지 견뎌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된다. 비록 도쿄가 아닌 나가노 동계올림픽이었지만 그는 성화 봉송주자로 나서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는 "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는 격언을 입에서 중얼거렸다. 영화관 밖에 나와서는 새삼스럽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소중히 여겼고, 또한 한 끼 식사도 감사히 먹었다. 물론 그런 작은 것들에 대한 감사를 언제까지 이어갈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 격언이 벌써부터 필자의 입에 감긴다는 것이다. 덕분에 좋은 격언을 입버릇으로 삼게 됐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올해는 2차 대전 종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더불어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월만 흘렀지 일본 우익들의 사고는 아직도 욱일승천기가 펄럭이는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일관계도 아직 그 자리를 계속 맴도는 것 같다. 일본의 과거사 부정이 계속된다면 70주년이 되든, 100주년이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한편 일본에게 비판의 화살을 날리듯 우리 자신에게도 그 화살을 날려야 할 것이다. 왜? 광복된 지 70년이 넘도록 아직 친일매국노 청산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과 같은 일도 못 처리하면서 일본에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이중적인 행보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일본 출신 '와타나베'에 대한 청산을 요구하려면 우리 안에 있는 조선 출신 '와타나베'에 대한 청산이 우선이다. 제대로 청산해야 일본 우익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지 않겠나.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스페인 땅끝 가는 길에 만난 '빤스' 할아버지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7]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 길

 

15.01.13 11:00최종 업데이트 15.01.13 13:51

 

 

 

 

 

 

 

 

 
▲ 피스테라 가는길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길.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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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창피해서 명함을 못 내밀겠네요."

"뭐가요?"
"800킬로 찍은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겨우 100킬로 밖에 못 뛰었으니까요."
"에이, 그래도 100킬로도 적은 거리가 아니죠."

 


산티아고 대성당 인근에서 만난 한국 순례자들과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100km도 적은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풀코스인 800km를 마친 순례자들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필자도 국내에서는 무동력 여행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누볐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그저 1/8만 채운 순례자였을 뿐이다. 그런 자격지심 때문인지 성취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서 다음 목표를 향해 당장이라도 발을 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감정은 필자 혼자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순례팀 전체가 느끼고 있었다.

 



 
▲ 피스테라 가는길 피스테라 가는길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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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땅끝마을 '피스테라'


2014년 11월 10일, 여행 8일째. 아침 일찍, 순례팀은 피스테라(Fisterra)로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피스테라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한다.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다. 

'이번에는 종단을 했으니까 다음에는 남해안을 휙 가로질러 횡단을 해야겠군. ' 

 


 
▲ 산티아고 대성당 피스테라 길의 시작점인 산티아고 대성당. 중앙에 있는 이는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이다. 순례팀이 방문했을 때, 대성당은 공사중이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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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가 필요한 피스테라 길


산티아고-피스테라 구간은 확실히 순례객들이 적었다. 전날까지 북적거리던 길은 한산하다 못해 인적이 뜸하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순례팀을 이끌었던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완주자들은 프랑스 국경에서 800km를 걸어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온 거예요. 그래서 성취감과 함께 공허함 같은 것이 밀려 와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울기도 해요. 또 어떤 이들은 식사를 하다가 눈물을 닦기도 하고 그래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심경에 놓이는 거죠. 한편으로는 몸에서 진이 빠진 것도 있고요."

손성일 대장은 이번으로 해서 순례길만 벌써 3번째인데 자신도 처음 순례길을 완주했을 때 식당에서 갑자기 울컥한 적이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진이 빠진 사람들이 굳이 90km 남짓한 거리를 또 걸어서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산티아고 시내에서 피스테라까지는 직행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그걸 타면 편안히 이동할 수가 있다. 요금은 약 10유로(약 1만4천 원)정도라 저렴하고, 시간은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피스테라 구간은 순례객들이 적은 만큼 편의 시설도 적다. 당연한 것이다. 사람 가는 데 돈 간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으니 바르(bar)나 알베르게(albergue)도 드물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좀 더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알베르게 위치를 고려하여 하루 이동거리를 정확히 산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야간 트레킹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피스테라 가는 길 피스테라 가는 길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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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갈리시아 지방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아 올려진 형태다. 

여행기 2편(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 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선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섰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을 것이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다. 그때마다 배낭에서 판초우의를 꺼냈다, 넣었다도 반복됐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봤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걸은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다.

 



 
▲ 무지개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많이 그런지 무지개도 자주 생겼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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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두 번의 '폭풍우'를 만나다


11월 11일에는 짧은 순간이나마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기도 했다. Olveiroa라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 우박을 동반한 집중호우를 만났는데 무슨 태풍이 온 줄 알았다. 빗줄기는 따가울 정도로 세게 내려치지, 강풍으로 몸은 휩쓸려 갈 것 같지. 그날의 폭풍우가 얼마나 거셌는지 여행수첩에 이렇게 기록해 놓을 정도였다.

"서울 촌놈 스페인 깡촌에 와서 듣도 보도 못한 '스페인 폭풍우'에 휩쓸려 갈 뻔했네."

순례팀은 몸이 싹 다 젖은 상태로 사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사립 알베르게는 10~15유로 정도인데 공립보다는 좀 더 시설이 쾌적하다. 이날 1박을 한 사립 알베르게는 바르까지 함께하는 곳이라 숙식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침대도 깨끗하고 안락했다.

하지만 그렇게 쾌적한 알베르게에서, 필자는 또 한 번의 작은 '폭풍우'을 만나야 했다. 예상치 못한 엄청난 폭풍우를 만난 터라 몸이 피곤했고, 또한 배도 살살 아파왔다. 그래서 화장실을 좀 오래 썼다. 이곳도 화장실과 샤워실이 붙어 있는 곳이었는데 그날따라 '폭풍우'처럼 시원하게 화장실을 봤다. 변기가 넘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들 정도로 아주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며, 비에 젖은 속옷과 양말 등을 빨려고 세면대에 담가두었다. 화장실도 오래 보고, 샤워도 오래했더니만 밖에서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들겼다.

"쾅쾅쾅"

다른 쪽도 두들긴다.

"쾅쾅쾅"

단순히 노크가 아니라 아주 감정이 실린 듯 세게 두들겼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스페인어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온 말들이 마치 폭풍우처럼 필자의 몸을 감싸왔다.

"아임 쏘리, 아임 쏘리(I'm sorry, I'm sorry)."

 

 



 
▲ 사립 알베르게 저 곳에서 연타석(?)으로 폭풍우를 만났다. 도착하기 전에 한 번, 그 곳 화장실에서 또 한 번...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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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미안하다고 말했다. 괜히 '폭풍우'와 맞설 필요가 없으니까. 대충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문을 여니 어느 스페인 할아버지가 '빤스'바람으로 시계를 가리키며 필자에게 또 속사포를 쏴댔다. 이에 필자는 합장을 한 후 다시 '아임 쏘리'라고 했더니, 그분은 무언가 울분 같은 걸 삼킨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또 폭풍우를 하나 넘기게 됐다.


바르에서 치킨샐러드와 와인으로 맛있는 저녁을 즐긴 후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폭풍우 때문에 진이 빠졌기에 몸이 아주 노곤했다.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침실로 돌아왔을 때 좀 당혹스러웠다. 속사포로 작은 '폭풍우'를 일으켰던 '빤스' 할아버지가 맞은편 침대에서 느긋하게 '빤스' 바람으로 누워있던 것이 아닌가! 대신 이번에는 뭐가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 다혈질이라는데 '빤스' 할아버지를 보니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이렇듯 스페인의 땅끝마을로 가는 길도 역시 알콩달콩한 에피소드가 넘쳐났다. 폭풍우를 연이어 만났으니...

 

 



 
▲ 사이 좋은 개와 고양이 개와 고양이는 서로 앙숙이라는데 저 녀석들을 보니 그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편 필자도 저 사진에서처럼 그 스페인 '빤스' 할아버지와 다정(?)하게 1박을 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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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산티아고-피스테라 구간은 약 90km 정도다.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이 구간은 바르나 알베르게 같은 편의시설이 메인 루트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 심지어 3시간 만에 겨우 바르를 하나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러니 하루 이동거리를 적절히 계산하여 움직여야 할 것이다.

2. 바르가 부족하다보니 한두 끼 정도의 식량은 항상 몸에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 좋다. 필자는 이 구간에서는 거의 3인분 정도 되는 식량을 계속 지니고 다녔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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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처먹고 할일 없어서"... 걷다 보면 이런 소리도 듣네요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6편] 도보여행자 반기는 산티아고 주민들은 달랐다

 

15.01.11 19:42  최종 업데이트 15.01.12 08:22

 

곽동운(artpunk)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구시가지. 사진 중앙에 있는 첨탑이 바로 산티아고 대성당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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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hola)."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보면 저런 말들을 숱하게 듣게 된다. '올라'는 스페인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인데 'h'가 묵음이 되어 '홀라'가 아닌 '올라'가 됐다. 부엔 카미노에서 '부엔'은 '좋은'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좋은 길'이 된다.

이런 말들은 순례자들은 물론이고 현지 주민들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들은 처음 보는 낯선 순례객들에게도 스스럼 없이 인사말을 건넸다. 그런 모습들은 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얼마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였다. 현지인들의 자부심은 순례길을 걷기 위해 다른 지방에서 온 스페인 자국민들도 인정할 정도였다.

 


 
▲ 자원봉사자 알베르게 자원봉사자. 공립 사리아 알베르게의 자원봉사자 할아버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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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방문지는 환대를 받은 곳과 일치한다

국내에서 도보여행을 하다보면 간혹 이런 소리를 듣곤 한다.

"밥 처먹고 할 일들이 없으니 저렇게 다니지!"

현지인들의 태도에 의해 그 동네에 대한 친밀도가 요동치기 마련이다. 현지분들이 환대를 해주었으면 그 동네에 대한 호감 지수가 급상승하고 차후에 다시 방문을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인지 필자의 재방문 예정지는 환대를 받았던 곳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저런 소리를 들으면 여행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된다. 그러면 그곳을 다시 방문할 여지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이제는 단련이 됐지만 처음 저런 소리를 들었을 때는 무척 서운했었다. 나름대로 민폐를 끼치지 않고 여행을 다닌다고 자부를 했었던 터라 그 서운함의 강도는 좀 심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잔상들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이 무척 부러웠다.

 

 


 
▲ 공립 알베르게 이모님 알베르게의 이모님. 저 이모님이 필자한테 판초우의를 건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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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자부심은 단순히 말로 그치지 않았다. 행동으로 이어졌다. 여행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는 크게 공립과 사립으로 나뉘는데, 공립 알베르게는 보통 6유로 정도에 이용할 수 있다. 1박을 하는 데 겨우 8000원 정도 밖에 들지 않는 셈이다. 아무리 순례객을 위한 시설이라지만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숙박을 할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헌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공립 알베르게의 관리자들이 그렇게 헌신을 했는데 그들은 무급을 원칙으로 하는 자원봉사자들이다. 무급인데도 공립 알베르게 자원봉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 구간 순례를 마친 사람들만이 봉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후배 순례자들을 위해 선배 순례자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셈이다.

순례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오전 8시경, 그들은 침대를 정돈하고, 화장실을 청소한다. 외관상 숙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유사한 작업을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언제나 밝았다. 조금이라도 더 후배 순례자들을 챙겨주려는 마음이 엿보였다.

돈도 안 생기는 작업을 하면서도 그렇게 너그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들의 순례길을 방문하고 있다는 자부심, 그 순례객들을 잘 거두어 보내겠다는 자부심. 그런 자부심은 그곳을 재방문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11월 9일, 여행 7일째. 순례팀은 페드로조(O Pedrouzo)에 있는 한 공립 알베르게를 출발하였다. 페드로조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는 약 17km 남짓 떨어져 있다.

그날도 역시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했다. 필자는 순례팀을 다 보내고 알베르게에서 제일 늦게 나올 생각이었다. 후미 대장을 자처한 탓도 있지만 '빨리 가서 뭐하냐' 하는 생각이 있어서 그랬다. 어차피 도보여행이라는 건 속도보다는 방향이 아니겠는가. 속도를 내서 빨리 가려면 그냥 자동차를 타고 가면 되지 굳이 배낭을 짊어 메고 걸어갈 필요가 없다는 게, 도보여행에 대한 필자의 강한 신념이다.

 

 



 
▲ 스페인 사람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스페인 사람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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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욕'을 하며 눈물을 보였던 마드리드 처자

꾸물꾸물한 스페인의 11월 날씨를 감상하며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이미 순례자들은 거의 다 떠나고 없어 알베르게에는 정적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필자도 배낭을 둘러메고 문을 나서려고 했는데 젊은 처자가 화장실에서 나와 자신의 침대로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마드리드에서 왔다는 이 처자를, 사실 전날부터 유심히 지켜봤었다. 예뻐서(?) 지켜 본 것도 있었지만 발목에 큰 붕대를 메고 있어서 한 눈에도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페드로조에서 순례길의 종료점까지는 반 나절 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알베르게에 머무르는 순례객들은 들떠 있었다. 이제 곧 산티아고 대성당에 들어설 수 있다는 설렘이 그들 표정에서 묻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척 슬픈 표정을 지었고 눈물까지 보였다.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순례 여행의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눈물이 되어 흘러 내렸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녀는 이런 말까지 내뱉었다.

"Fu*****"

스페인의 젊은 처자에게 저런 '욕'을 들으니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느낌이었다. '욕'을 들어먹었지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의 배낭을 들어 아래층까지 내려주기로 했다. 그녀와 필자가 함께 있던 룸은 2층이었고, 절뚝거리는 다리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아래층까지 오기에는 좀 버거웠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나름대로 착한 일을 한 것이다. 참고로 알베르게는 남녀 공용이다.

 

 



 
▲ 스페인 사람들 이 스페인 친구는 길을 걷는 내내 우리 순례팀과 동선이 겹쳤다. 이 친구는 비고(vigo) 출신인데 축구선수 박주영을 좋아한다며 셀타비고 유니폼을 뽐내고 있었다. 셀타비고는 비고를 연고지로 한 축구클럽이다. 잠시 박주영 선수가 뛰기도 한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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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전날처럼 영락없이 몸이 젖을 판이었다. 우비를 가지고 가긴 했지만 다 찢어진 상태였다. 안일하게 1회용 우비로 준비한 게 패착이었다. 이미 우비는 비닐봉지보다도 더 못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착한 일을 해서 그런가?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로 ARCA 알베르에서 자원봉사를 하시는 이모님(그냥 한국에서 잘 쓰는 호칭을 써봤다) 이 판초 우의를 하나 건네주신 것이다. 전날 신발이 젖었다는 필자의 몸짓에 이모님은 수더분한 미소를 보내며 직접 신발 말리는 장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는 필자가 따로 요청한 것도 아닌데 흔쾌히 판초 우의를 건네주셨던 것이다.

선배 순례자로서 후배 순례자를 잘 챙겨준 셈이다. 물론 그 판초 우의는 누군가가 두고 간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새 것 이상으로 고마운 물품이었다. 덕분에 그 이후부터는 비 걱정은 하지 않게 됐다.

 

 



 
▲ 십자가 길을 걷다 목숨을 잃은 순례객들을 위해 세워진 십자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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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결국 사람이다

 


도보여행가 김남희씨가 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스페인 산티아고 편>을 보면,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는 지은이를 독일인인 아그네스 아줌마가 치료를 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치료를 마친 후에 아그네스 아줌마는 김남희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를 도울 수 있어서 정말 기뻐."

필자는 배려와 친절도 순례길의 일부분이라고 판단한다. 필자도 그런 배려와 친절을 듬뿍 받고 왔다. 또한 할 수 있는 대로 받은 만큼 베풀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름답다. 주위 풍광이 아름답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도 아름답다. 그래서 그 길 위에는 좋은 기운들이 넘쳐난다. 저토록 사랑과 인심이 넘쳐나기에 나쁜 기운이 스며들 틈이 없다.

그래서인지 순례길 곳곳에는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다. 길을 걷다가 죽음을 맞이한 순례객들을 추모하기 위해 후배 순례자들이 세운 십자가들이다. 볼거리, 먹거리, 쇼핑거리를 다 거쳐 온 여행의 최종지점에는 항상 사람이 서 있었다. 앞에 것들이 다 좋아도 마지막에 사람이 별로면 그 동네의 친밀도도 별로가 된다. 반면 앞에 것들이 미진해도 사람이 좋으면 그럭저럭 다 무마가 된다. 그러고 보면 여행도 결국 사람이다.

"밥 처먹고 할 일들이 없으니 저렇게 다니지!"

웬만하면 이런 발언들은 삼가주셨으면 한다. 대신 이렇게 바꿔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밥 맛있게 드시고, 우리 고장도 좀 다녀가세요. 우리 고장에도 좋은 것들이 많아요. 대신 여행자의 매너는 잊지 마시고요!"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하는 나라들의 국기를 그려 넣은 그림. 우리나라는 맨 아래쪽에 있는데 'korea'가 아닌 'corea'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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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왜 산티아고에 한국인이 많냐고? 스트레스 사회라서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⑤] 산티아고를 걷는 한국인들

 

15.01.06 13:18 최종 업데이트 15.01.06 13:18

 

 

 

 

 

 

 

 

 

 
▲ 멜리다 중심부에 위치한 성당 멜리다는 내륙에 위치했지만 문어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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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7일, 여행 5일째다.


"저 고백할 게 있습니다."

필자의 뜬금없는 말에 순례팀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저, 사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스페인어였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따가운 시선과 함께 핀잔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렇게 스페인어를 몰라!"

 

 



 
▲ 개 신기한 듯 필자를 쳐다보고 있는 개. 그러고보니 '아니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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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말(animal)'들은 일단 맞고 시작했다


그 말이 맞다. 필자가 아는 스페인어라고는 CASA(집)와 ANIMAL(동물) 같은 간단한 단어들뿐이다. 아예 회화는 불가능하고 저런 간단한 단어들 정도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제대로 스페인어를 공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대신 몽둥이찜질을 당한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스페인어 선생님은 단어 암기를 무척이나 강조하셨다. 그래서 매일같이 단어 쪽지 시험을 봤다. 스페인어는 발음 기호가 없어 로마자를 그대로 발음한다. 예를 들면, bar를 '바르'로 animal을 '아니말'로 읽는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며 줄을 세우셨다.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은 아니말입니다. 아니말들은 일단 맞고 시작합시다."

필자는 스페인어 시간마다 '아니말'이 되어 두들겨 맞는 줄에 세워졌다. 그외에 스페인어 학습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저 '동물적 감각'으로 그 시간을 회피하고 싶었다는 것과 볼기짝의 아픈 트라우마가 있을 뿐.

저토록 형편없는 스페인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 트레킹을 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물론 스페인어 뿐 아니라 영어까지 능통하면 여행이 더 윤택해질 수 있고,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나 영어가 완숙되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만큼 산티아고 순례길은 외국어가 짧은 사람도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도보여행자들이 순례를 떠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 개와 순례자 개 한 마리가 순례팀 막내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막내는 너무 발에 꽉 끼는 트레킹화를 신어 고생을 많이 했다. 결국에는 트레킹화를 벗고 슬리퍼를 신고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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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물집을 터뜨리며 '아니말'이 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의 현실이란 바로 육체적인 괴로움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깨와 무릎 통증, 더불어 물집이다. 그런데 어깨와 무릎 통증은 각 개인별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물집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순례자의 숙소인 알베르게에서는 밤마다 물집을 터트리는 순례자들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자도 그런 신음 소리 대열에 참가했다. 잘잘한 건 그래도 터트리는 맛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대왕 물집을 터트릴 때는 인간이 아닌 '아니말'이 되어 비명을 내질렀다.

"아, 읔"

 

 

 



 
▲ 신라며 컵라면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저런 광고문구를 내건 기념품 가게도 있었다. 그나저나 저 광고문구를 보니 입 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계란 탁, 파 송송 썰어 김치 한조각 올려 후르륵~ 필자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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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 서구권 순례자들은 우리에게 물었다. "왜이리 한국인들이 많이 오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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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스트레스가 많아서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보면 많은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아마도 비유럽권 순례자들 중에서는 한국인들이 단연 압도적일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 현지인들과 서구에서 온 순례자들은 이렇게 많이 물어왔다.

"왜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그들이 보기에 한국은 불교나 유교 국가일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라는 가톨릭 성인을 기리는 순례길 곳곳에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난다는 건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서구인들이 물어왔을 때마다 필자는 못하는 영어로 떠듬떠듬 설명을 했다.

한국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척 많이 알려졌고, 이 길을 걷고 싶어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넣은 사람들이 많다고. 필자의 영어가 짧아서 그런지 흔쾌히 납득했던 표정을 지은 사람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미국 알래스카에서 온 노부부와 함께 잠깐 휴식을 취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왔어요. 이제 곧 목표한 지점에 도달합니다."
"대단하세요. 그런데 힘들지 않으세요?"
"아니요. 우리는 쌩쌩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은 거죠?"


필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한국이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노부부는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는 '스트레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보온병을 꺼내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씩씩하게 걸어가라고 주는 차 한 잔이었다.

 

 

 


 
▲ 멜리데 저 다리를 넘으면 멜리데 시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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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요리로 유명한 내륙도시 멜리데


순례팀의 목적지는 아르주아(Arzúa)였는데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멜리데(Melide)라는 도시를 지나야했다. 멜리데는 바닷가와 많이 떨어진 곳임에도 문어(pulpo)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이 도시에 들러 꼭 문어 요리를 맛 본다고 한다.

그날은 트레킹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트레킹이든 자전거여행이든 3일째가 제일 힘겨운 법이다. 그 순간을 넘기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완주를 할 수 있다. 그만큼 고비라는 뜻이다. 여행 수첩에도 그날 무척 힘들어다는 기록이 구구절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필자는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후미에 섰는데 말이 사진사 역할이었지 다리가 후들거려서 자연스럽게 뒤로 처졌던 것이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힘겨운 날에 멜리데 인근에서 철웅이를 만났다. 대학생이었던 철웅이는 다국적 팀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영어를 잘해서 그런지 일행들과 능숙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 그대로 다국적으로 '놀고' 있었다. 얼마나 부럽던지!

거의 한 시간 이상 철웅이와 이야기를 하며 걸은 것 같다. 홀로 걸었으면 그냥 주저앉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격려를 하며 걸어가니 훨씬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격언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그렇게 동행이 되어준 철웅이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딱히 해줄 건 없고 해서, 내륙에 위치한 멜리데가 왜 수산물(문어)의 산지인지를 알려주었다.

"혹시 충남 논산에 강경이라는 곳 알아요? 거기도 내륙 안쪽에 있는 곳인데 젓갈 산지로 유명해요. 예전에는 쌀과 수산물 집산지로도 유명했고요. 그게 다 금강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 강을 따라 배들이 올라왔던 겁니다. 이 곳도 마찬가지에요. 대서양에서 잡은 문어를 옛날에는 내륙수운을 통해서 여기까지 가지고 온 거죠."

실제로 멜리데 주위로 카타솔 강(rio catasol)과 프레로스 강(rio furelos)이 흐르는데 이 두 강은 합수되어 울라 강(rio ulla)이 된다. 이 울라 강은 대서양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강경도 이와 비슷하다. 금강은 옥녀봉 인근에서 논산천을 합수하여 더 큰 강폭을 자랑한다. 그리고는 유유히 서해바다로 빠져나간다.

 

 


 
▲ 철웅이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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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워도 아니말이 되지 말자!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아직 철웅이처럼 대학생 신분이거나 과감히 사직서를 쓰고 온 20대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은 아직 스트레스 사회의 중심에 섰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본격적인 스트레스 사회 진입을 위해 준비중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이 직면해야 하는 현실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갑보다는 을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 사회의 중심에 놓이게 되면 대왕 물집을 터트리며 걷는 순례길의 현실을 무척이나 그리워 할지 모른다. 그런 척박한 현실이 싫다고 도망갈 수 없다. 그러면 정말 '아니말'이 되는 것이다. '아니말'이 되지 않기 위해 파이팅 한 번 해보자. 좀 늦었지만 2015년 새해 각오도 다지면서...

"힘들고 외로워도 파이팅입니다! 가야할 길이면 가야 하는 게 운명이잖아요. 여행이든 현실이든..."

 

 



 
▲ 메모 한국인 순례자가 적어 놓은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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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장거리 도보여행을 할 때에는 일반 운동화보다는 트레킹화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 예행연습을 하며 미리 국내에서 길을 들여야 한다.

 


2. 트레킹화는 자신의 발보다 5㎜ 정도 큰 것을 장만하는 게 좋다. 그 여유 부분은 양말이나 끈 조임으로 조절할 수 있다. 한편 개인적인 건강에 따라 발이 부을 수도 있기 때문에 트레킹화는 꽉 끼지 않는 것이 좋다.

 


3. 우리팀의 막내는 너무 꽉 끼는 트레킹화를 가지고 왔는데 현지에서 신어보고야 그걸 알았다고 한다. 국내에서 예행연습을 하지 않아 이후 큰 고생을 하게 됐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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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빗>을 통해 톨킨이 말 하려고 했던 것!

 

판타지를 통해 본 인간 근원의 문제

 

15.01.03 15:07 최종 업데이트 15.01.03 15:07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 호빗 영화 <호빗> 포스터
ⓒ 호빗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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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네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 영화는 좀... 그거 판타지 영화 아니에요. 애들 보는 거요?"


<JSA 공동경비구역>, <박하사탕>, <7월 4일생> 등등 필자가 그런 영화들을 감명 깊게 봤다고 하면 상대방도 흔쾌히 수긍한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이르면 꼭 부연 설명이 필요했다.

"원작이 워낙 탄탄해요. J.J. 톨킨 박사가 원작자인데 이 사람이 북유럽 신화에 아주 능통하거든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화 자체가 하나의 잘 짜인 신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신화라는 텍스트에 인간의 욕망을 담아냈으니 하나의 대서사시가 되는 것이죠. 앞으로 이렇게 기승전결이 잘 떨어지는 판타지영화는 나오기 힘들 겁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는 건, 필자와 상대방의 시각이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판타지 영화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애들이 보는 영화라 취급하며 낮잡아 보기까지 한다. 리얼리티가 강조될수록 후한 별점을 주는 풍토에서 요정이 활을 쏘고 용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판타지물은 그저 아이들의 영역으로만 자리매김 될 뿐이다.

 

 

 

 
▲ 호빗 엘프족 여전사 타우리엘
ⓒ 호빗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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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통해 인간의 근원을 들쳐보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백색의 마법사 간달프의 주술은 로또 1등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중간계를 짓누르는 악의 화신 사우론의 눈빛보다 옆에 있는 김 팀장의 시선이 더 싸늘해 보인다. 그래서 판타지 영화에서는 <레미제라블>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아예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판타지를,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냉혹한 현실을 빗대어보는 하나의 원초적 도구로 바라본다. 철천지원수인 엘프족의 레골라스와 난쟁이족의 김리가 당면한 목적을 위해 오월동주(吳越同舟)가 되는 모습, 더 큰 욕심 때문에 난쟁이 왕 소린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하들을 의심하는 모습 등을 보고 있자면,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들쳐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정족, 난쟁이족 같은 비현실적인 종족들이 오히려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을 더 명징하게 표출했다고 판단한다.

SF영화와 달리 판타지영화는 물리적으로 현실화 될 수 없는 것들을 담아 놓았다. 기술이 발전하면 <스타워즈>에 등장했던 광선검 같은 무기들도 '실전배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등장한 엘프족이나 호빗들은 스크린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대신 그들은 탐욕과 무소유, 신뢰와 배신, 전쟁과 평화 같은 우리 현실세계에서 빈번하게 회자되는 개념들을 스크린에 뿌려 놓는다.

 

 

 

 

 

 

 

 

 

 

 

▲ 제복을 입은 톨킨 1차대전에 참전했던 톨킨.

풀네임은 John Ronald Reuel Tolkien 이다.  

위키피다 출전. 

 

 

 

 

 

 

 

물질문명을 지독하게 혐오했던 톨킨


원작자 톨킨은 1차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에 하나였던 솜 강 전투에 초급 장교로 참전했다. 그 전투에서 친구를 잃은 톨킨은 전쟁, 더 나아가 세계대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현대문명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후 현대문명과 과학기술에서 멀찌감치 자신을 떼어 놓았다.

문헌학자였던 톨킨은 각 나라들의 언어 변천과정을 연구했는데 각 언어들에 내포되어 있는 신화적인 요소들에 매료됐다. 기계문명의 빈자리를 고대의 신화가 채웠던 셈이다.

그렇게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호빗>을 톨킨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태어난 지 3년 만에 아버지를 여윈 톨킨은, 그 자신이 평생 가질 수 없었던 부성애를 자식들의 침대 곁에서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그런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잠이 들었던 아이들은 꿈에서 엘프 혹은 용을 만났을지 모른다. 

 

 

 

 


<호빗 3: 다섯 군대의 전투>

2014년 12월에 개봉된 <호빗 3: 다섯 군대의 전투>는 호빗 시리즈의 최종판이다. 자신들의 왕국이었던 에르보르를 탈환하기 위해 난쟁이의 왕 소린은 원정대를 꾸린다.

원정대에는 호빗 종족의 빌보 배긴스도 포함되는데 빌보의 역할은 스마우그라는 용에게서 난쟁이들의 최고의 보물인 '아르겐스톤'을 훔쳐 오는 것이었다. 험준한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에르보르는 원래 난쟁이들이 만든 요새였지만, 사악한 스마우그라는 용이 그곳을 파괴하고 수많은 금은보화 속에서 '꽈리'를 틀게 된다.  

결국 스마우그는 죽고, 난쟁이들은 꿈에도 그리던 잃어버린 땅을 되찾게 됐다. 소린이 자신의 왕국을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용이 죽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악에 의해 이루어진 균형이, 그 악이 제거됐다고 바로 선의 의한 균형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후세인이 제거되자 정파주의에 의해 이리저리 찢기고, 결국에는 IS(이슬람국가)가 꽈리를 튼 이라크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에르보르의 전략적 가치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황금을 차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군대들이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 군대들은 오크족이나 괴수족 같은 어둠의 세력뿐만이 아니었다. 엘프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 호빗 영화 <호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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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지만, 난쟁이 왕 소린은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다. 최고의 보물이라는 아르켄스톤을 부하 중에 한 명이 미리 빼돌렸다고 의심을 했던 것이다. '황금의 저주'로 인해 눈이 멀게 된 것이다. 탐욕 때문에 생사고락을 함께 한 부하들을 다 도둑놈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반지의 제왕 3>편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지닌 프로도가 절대반지의 힘에 눈이 멀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스스로 반지의 주인으로 선언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프로도였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반지를 용암에 던지지 못하고 주인 행세를 하려 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원작자인 톨킨 박사는 탐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유도했는지 모른다. 채워지지 않는 무한한 욕구로 인해 인간이 궁극적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일깨워주었다고나 할까? 난쟁이였던 소린은 피붙이와 같은 자신의 부하와 친구들에게 불신을 얻게 됐고, 호빗인 프로도는 절대반지를 끼었던 검지손가락 한마디를 잃게 됐다. 그것이 바로 현대 물질문명을 혐오했던 톨킨이 판타지를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대망의 2015년이 시작됐다. 유난히 사건과 사고가 많았던 지난 2014년과 달리 올해는 좀 더 달라질 수 있을까? 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인간들이 탐욕에 눈이 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질에서 좀 더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이런 언급은 '판타지'적이라고 욕을 먹을지 모른다.

"장그래로 대변되는 비정규직들이 넘쳐나고, 최저 시급의 굴레에 사로잡힌 알바생들 좀 봐! 탐욕에서 자유로워지라니, 탐욕을 부릴게 있어야 탐욕을 부리지!"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안전한 겨울 눈꽃 트레킹을 위하여!

 

눈길에서 '방탄조끼' 기능 톡톡히 해... 기능성 내의로 체온 조절 신경써야

 

14.12.31 14:51l최종 업데이트 14.12.31 14:51

 

곽동운(artpunk)

 

 

 

 

 

 

 

 

 
▲ 눈꽃트레킹 겨울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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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뚝뚝 떨어질수록 야외 활동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시기에는 '집 나가면 고생'이란 말을 절감하게 된다. 그렇다. 겨울철에는 아웃도어 활동도 비수기에 접어든다.

 

 



겨울에만 즐길 수 있는 눈꽃 트레킹

 



하지만 아무리 눈발이 날리고 북풍이 불어도 배낭을 짊어지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그들에게 으뜸으로 꼽는 트레킹이나 산행을 물어보면 이렇게 답할지 모른다.

"눈꽃 트레킹, 눈꽃 산행!"

봄꽃 산행, 가을철의 단풍 산행도 좋지만 산악인들이 으뜸으로 꼽는 산행은 바로 겨울철 눈꽃 산행이다. 도보여행도 마찬가지다. 눈꽃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겨울철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도보여행가들이 상당히 많다.

그렇다면 겨울 트레킹의 특징은 무엇일까? 동상에 걸릴 수도 있는 등 위험천만한 상황들이 발생할 수 있는데도 무엇이 신발끈을 조여 매게 만드는 걸까?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덮인 산길을 걸을 때의 느낌은 겨울철 이외에는 맛볼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가을철 단풍 트레킹이 알록달록한 비주얼을 감상하는 것이 재미라면, 눈꽃 트레킹은 흰 색으로 통일된 세상을 걷는 오묘한 맛이 있다. 그렇게 흰색으로 단일화된 세상을 말없이 걷다보면 도보여행자 자신의 내면도 하얗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겨울철 트레킹만큼 위험한 트레킹도 따로 없다. 예기치 못한 폭설을 만난다면 조난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저체온증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겨울트레킹을 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 상고대 눈꽃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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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고, 벗기를 잘 하자!

 


두 말 하면 잔소리겠지만 겨울에는 든든하게 입어야 한다. 보온에 충실해야 한다. 그렇다고 옷을 마구 껴입어서는 안 된다. 입기와 벗기를 적절히 해야 한다. 트레킹을 할 때에는 몸을 움직이므로 신체에서 열이 난다.

이때는 옷을 벗어 몸에서 과도하게 땀이 분출되지 않게 해야 한다. 반대로 휴식 중에는 옷을 꺼내 입어 보온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열 관리'를 했느냐에 따라 겨울트레킹의 성패가 갈린다고 할 수 있다.

내의를 입을 때도 고려점이 있다. 면 소재 제품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면 소재 내의들은 땀을 흡수만 했지 방출을 하지 못한다. 그럼 땀으로 범벅이 된 찝찝한 면 수건을 몸에 두르고 트레킹을 하는 셈이 된다.

이런 상황을 맞지 않으려면 건조성이 뛰어난 기능성 내의를 입는 게 상책이다. 한편 봄이나 가을에도 기능성 내의를 입고 트레킹에 나서는 게 좋다. 일교차가 큰 계절인 만큼 대비를 해야 한다.  

 

 

 



배낭이 방탄조끼?

 


이런 말이 있다.

'겨울 아웃도어 활동은 장비가 반이다'

그런 장비들 중에는 배낭도 포함된다. 독자들 중에는 트레킹을 하면 당연히 배낭을 메는데 무엇 때문에 배낭을 목록에 올려놓았는지 의아해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산악회처럼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트레킹을 하는 도보여행 카페가 많다.

관광버스를 이용한 트레킹은 장비를 차내에 놓고 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배낭도 없이 그저 맨 몸으로 도보여행에 나서기도 한다.

겨울철에 배낭은 단순 짐 가방으로 쓰이지 않는다. 방탄조끼처럼 자신을 보호해주는 장비로 쓰인다. 빙판길에 미끄러져 몸이 뒤로 넘어질 때 배낭은 쿠션 작용을 해준다.

잘못 넘어져 뒷머리가 곧장 땅바닥에 부딪치는 불상사를 막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배낭을 메고 넘어졌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것이다.

이 때 배낭 속에는 여분의 옷(재킷)이나 무릎 담요, 여분의 양말 같은 것들로 채운다. 무릎담요는 식사 시간에 사용하자. 양말이 젖으면 동상에 걸릴 염려도 있으니 여분의 양말도 꼭 챙기자. 이렇게 방어용 배낭은 뾰족한 것이 아닌 푹신한 것들로 채워야 한다. 

 

 



 


 
▲ 겨울트레킹 겨울트레킹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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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트레킹의 필수 장비들


겨울 트레킹에 아이젠이 필수이듯이 '스패츠'도 필수로 착용해야 한다. 스패츠(spats)는 눈이나 비, 흙 등이 들어가지 않게 발목에 차는 각반을 말한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긴 스패츠는 따로 게이터(gaiter)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시간 눈길을 걷다보면 신발의 끈 부분과 발목 상단 부분으로 눈이 스며든다. 그렇게 신발 안쪽으로 들어온 눈은 양말을 젖게 하여 동상을 유발시킬 수 있다. 하지만 스패츠를 착용하면 조금이라도 눈이 덜 스며들게 할 수 있다. 스패츠를 착용했다고 안심할 수 없으니 앞서 언급했듯이 꼭 여분의 양말을 챙기자.

평소 스틱을 사용하지 않는 분들도 겨울에는 스틱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물웅덩이가 진 곳이나 살얼음이 진 곳을 스틱으로 먼저 체크한 후에 이동을 하면 보다 더 안전하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

한편 장비를 제대로 갖추었다면 아이스 트레킹에 도전해 볼 수도 있다. 아이스 트레킹은 꽁꽁 언 강물 위에서 트레킹을 하는 것을 말한다. 빙하 트레킹은 아이슬란드 같은 극지방에서만 할 수 있기에 제약이 많이 따르지만 아이스 트레킹은 강원도에서도 할 수 있다.

평소에는 강물 때문에 갈 수 없었던 부근을 얼음을 지치며 나가는 것이 아이스 트레킹의 매력이다. 빙하 트레킹을 못하는 아쉬움을 아이스 트레킹이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을 것이다.

 

 


 

 

▲ 영월: 한 겨울 강원도에서 아이스 트레킹을 할 수도 있다.

 

 

 




팩으로 따뜻한 음식 준비하기

 


겨울에는 행동식 준비도 제약을 받는다. 김밥이나 떡 같은 대표적인 행동식은 강추위에 꽁꽁 얼기 일쑤다. 이렇게 언 음식물을 먹다 보면 체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보온밥통과 보온병을 이용해서 따뜻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조금 번거롭지만 이런 방법을 써보자. 수건에 음식물과 함께 핫팩을 돌돌 말아 여분의 옷가지 깊숙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다. 이때 음식물은 핫팩과 함께 묶여도 좋은 것들이어야 한다.

한편 요즘은 전투식량을 민간용으로 만들어 시중에서 판매한다. 그 중에는 발열 기능이 있는 것들도 있다. 발열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엄동설한에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발열 전투식량의 장점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조심해라', '하지 마라'라는 식의 경고형 문구들이 눈에 많이 띈다. 여행면에 쓰는 글이라면 좀 더 진취적이고 밝은 내용을 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경고형 문구가 반복됐다는 건 그만큼 겨울트레킹이나 겨울산행이 무척 위험하다는 반증이다.

유비무환이라고 철저히 준비를 하는 사람은 설국에서 겨울을 만끽할 수 있다. 그렇게 새하얀 세상을 사뿐히 걷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 속에 있는 검은 때가 씻겨 내려갈지 모른다. 하얀 세상이 공짜로 자신을 정화시켜주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독재자 프랑코가 우리에게 유신을 알려줬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4편] 산티아고를 걷는 유럽인들

 

14.12.27 15:51l최종 업데이트 14.12.27 15:51

 

 

 

 

 

 

 
▲ 순례자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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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동료의식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또다른 볼거리는 바로 '사람'이다. 길을 걷다보면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고를 수없이 반복한다. 순례자들의 일일 이동거리가 뻔하기 때문에 계속 동선이 겹쳐지고, 그러다보니 보는 얼굴이 계속 보이게 된다. 아침에 같은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출발한 사람과 점심 때 같은 바르(bar)에서 만나고, 그러다 저녁에 또 같은 알베르게에서 1박을 하고.

그래서인지 순례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동료의식이 생긴다. 아예 팀처럼 움직이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며 일정 자체를 공유했다. 심지어 그들은 빨래도 같이 했다. 알베르게에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의 요금은 보통 3유로 정도인데 개별적으로 하는 것보다 모아서하면 훨씬 저렴하기에 그들은 세탁물을 한 통에 넣어 세탁을 했다.

순례길을 걷기 전까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순례길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옷들이 한 통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 속옷, 여자 속옷 가릴 것 없이 세탁기에서 원심 운동을 하고 있었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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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피레네에서 끝났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국적이었지만 역시 자국민인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유럽권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듯했다.

유럽권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특히 히피처럼 보이는 순례자들을 보니 그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중세는 그렇다 치고, 현대에 와서는 언제부터 유럽 사람들이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로 몰려들었지? 프랑코 독재에 진절머리 쳤던 유럽 사람들인데 말야. 아직까지 스페인에 프랑코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 있다면 그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까?'

<1984>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로 유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의 역사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

조지 오웰은 1950년, 46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고 그때까지도 스페인은 프랑코가 통치를 했다.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내전(1936~1939)에 참여해 목에 관통상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생을 했던 조지 오웰이었기에 절대로 프랑코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런 말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조지 오웰처럼 서구 사람들은 스페인에 대해서 고운 시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끌어들여 선거로 들어선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시켰던,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이 계속 존속했던 한 서구인들에게 스페인은 논외의 국가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었다.

"유럽은 피레네(산맥)에서 끝났다."

이렇듯 피레네 산맥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가상 경계선으로 인식됐다. 뻔히 피레네 산맥 아래에 스페인이 존재함에도 그들은 애써 이베리아반도를 유럽 대륙에서 떼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피레네를 들었다 놨다 했던 프랑코

그렇게 가상의 경계선이었던 피레네 산맥은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점이 돼 전세계 순례자들이 모이는 집합소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피레네는 20세기 들어 유럽과 스페인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큰 장벽처럼 경계선이 되기도 하는 등 그 역할이 빈번했다.

그렇듯 피레네가 가교가 되던 장벽이 되던 그 중심에는 항상 프란시스 프랑코가 있었다. 프랑코의 파시즘을 막기 위해 유럽인들은 피레네를 넘었고,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게 되니 피레네를 경계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피레네를 통해 이베리아반도를 방문했다.

 

 



 
▲ 프란시스 프랑코 프란시스 프랑코
ⓒ 위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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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가 사망을 했다고 군부중심의 독재체제가 일거에 해소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프랑코 체제가 하루아침에 민주체제로 변환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판타지적인 상상일 뿐이다. 그래서 서구 국가들은 스페인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을 근심어린 시각으로 바라봤다.


살얼음판 같았지만 '스페인의 봄'은 민주주의 체제로 착실히 이행되어 갔다. 정치개혁법 제정,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의 합법화, 신헌법 제정 등, 39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법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디나 구체제를 신봉하는 수구세력들이 있는 법! 역사의 수레바퀴가 언제나 순탄하게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1981년 2월 23일, 민주화 이행에 불만을 가진 군부세력들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프랑코 사후에 진행된 민주주의 개혁 덕택에 희미해졌던 피레네의 경계가 다시 'DMZ'처럼 선명하게 되돌려 질 판이었다.

 

 

 

쿠데타에 단호히 반대한 후안 카를로스 국왕


프랑코 체제에 향수를 갖고 있던 일부 군부 세력들은 공산당 합법화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부터 40년간 반공을 국시로 삼고 스스로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군부였다. 그래서 공산당까지 합법의 테두리로 끌어들이는 정당 개혁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스페인의 봄'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됐다. 또다시 프랑코 시대와 같은 독재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민주화는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좀 싱거웠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왜? 6시간 만에 쿠데타 상황이 '종결'됐기 때문이다.

"조국의 단합과 영원함의 상징인 왕실은... 민주적인 정치 과정을 무력에 의해 파괴하려고 하는 어떠한 행동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 후안 카를로스 후안 카를로스
ⓒ 위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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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자 군 최고사령관인 후안 카를로스는 단호하게 쿠데타를 반대했고, 그들 세력의 그릇된 야망을 좌절시켰다.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지만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내세워 개혁을 이끌게 했고, 쿠데타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결단력을 발휘하여 스페인이 구체체로 복귀하는 것을 막아냈다.


한편 후안 카를로스는 우리하고도 인연이 있다. 왕세자시절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게르니카>와 산티아고 순례길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정부의 요청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것을 맡겼다. 자유의 상징인 <게르니카>를 파시스트 독재자 손에 건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만약 1981년 2월에 있은 군부 쿠데타가 성공을 했다면 <게르니카>가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페인이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순례길도 북적거리지 못했을 것이다. 

<게르니카>가 환대를 받으며 귀향했듯,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봄바람이 불어왔다. 1982년 교황 바오르 2세의 방문, 1987년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출간,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더욱더 북적북적 해진 것이다. 또다른 중흥기를 맞이한 것이다.

 

 

* 게르니카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사극 찍어도 되겠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태권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듯 프란시스 프랑코도 우리와 관련이 있다. 유신 헌법이 바로 그 '인연의 끈'이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영구집권을 획책했을 때, 관련 학자들을 스페인과 대만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당시 두 나라는 총통이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었고, 유신헌법은 총통제를 목표로 했기에 '적절한' 파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일인 것 같다. 약 40여년 전, 총통제를 가르쳐줬던 스페인은 입헌군주국으로서 착실히 민주주의를 실천해 갔고,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기소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총통제를 배워갔던 우리나라는 그 유신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에 임하고 있다. '기춘대원군'이라는 매우 봉건 왕조적인 별명을 가지고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십상시'와 '문고리 3인방'도 있다.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이 정도 캐릭터면 사극 영화 하나 찍어도 될 듯하다. 누가 아는가? <광해>나 <왕의 남자> 빰칠 정도의 흥행몰이를 할지!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필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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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산티아고 순례길, 밥도둑들에게 도시락을 빼앗기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③] 버렸더니 채워졌다

 

14.12.22 10:14 최종 업데이트 14.12.22 10:14

 

 

 

 

 

 

 

 
▲ 포르토마린(Portomarin) 포르토마린을 흐르고 있는 미뉴(Minho)강. 강 한가운데 로마시대에 지어진 다리의 잔해가 있다. 서기 2세기에 지어진 다리였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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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5일, 여행 3일째


순례팀은 전날 기차를 타고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사리아(Sarria)에 도착했다. 사리아는 순례길의 종료점인 산티아고 시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굳이 사리아에서 순례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완주증' 때문이었다. 100km만 걸어도 정식으로 발급되는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하면 순례길의 메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의 전 구간, 즉 800km를 다 걸은 이에게만 완주증이 발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00km 이상 걸은 이에게도 발급한다는 건 그만큼 더 순례길을 대중화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여건상 전 구간을 종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에 도달하면 '완주'를 인정해주겠다는 뜻이다.

 

 



 
▲ 사리아 사리아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져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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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짐은 고행의 지름길


아침부터 계속 비가 오락가락했다. 우비를 부실한 걸 챙겨와서 그런지 입어도 변변찮았다. 트레킹 첫날 오전부터 '삐끄덕'거리는 느낌이다. 비도 그랬지만 가장 문제였던 건 짐이었다.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배낭에 한 가득이었다. 배낭을 제대로 못 닫을 정도로 짐이 넘쳤다. 인천공항 수하물 코너에서 무게를 체크 할 때는 12㎏이었다. 그때는 그럭저럭 버틸 만 했는데 오전에 배낭을 매어보니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전날 마트에서 과소비(?)를 해서 그랬던 것이다.

스페인의 물가는 다른 유럽국들보다 더 저렴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식료품을 구매한 것이다. 우유, 치즈, 버터, 요거트, 빵 등은 한국보다 더 저렴해서 그런지, 한가득 집었는데도 8유로(1유로: 약 1400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필자는 자칭 빵돌이, 치즈돌이인 터라 매우 흐뭇하게 마트에서 나올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콧노래를 부르며 그것들로 저녁을 먹었고, 다음 날 점심에 먹을 도시락도 준비했다. 버터를 바르고 치즈도 넣고, 딸기잼으로 마무리 한 특선 도시락을 넉넉히 준비하였다. 또 남는 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배낭 속에 넣었다.

'무겁더라도 다 가져가야지. 어떻게 먹을 것을 버리고 가나!'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고 있는 순례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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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배낭이 무겁지! 배낭 무게는 자신의 몸무게의 10%를 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배낭이 30리터든 60리터든 빈 공간을 다 채우려고 드는 것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심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것저것 다 챙겨 넣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필자는 원래 짐에다 부식까지 잔뜩 더 짊어졌기에 어깨를 늘어뜨리며 걸어야 했다.


과도한 짐들은 어깨를 내리 누르고, 허리와 무릎에 부담을 가중시킨다. 즐거워야 할 도보여행길은 고행길로 바뀌게 된다. 물론 순례자라면 일정 정도 고행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과도한 고행은 도보여행 자체를 망칠 수도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길을 여행하려고 스페인에 왔지, 골병들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니까. 

 

 

 



어깨는 짓눌리고, 뱃속은 부글부글...

어쨌든 필자는 첫날, 고행과 더불어 고역을 겪어야 했다. 과도한 짐무게로 어깨는 내려앉을 것 같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배까지 아파왔기 때문이다. 유제품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엄청 배불리 먹었다가 탈이 난 듯싶었다. 과유불급이라고 적당히 사고, 적당히 먹었어야 했는데...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뱃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그러다보니 주위 풍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무척 아름다운 풍광이 연이어 이어졌지만 필자의 눈은 그저 화장실을 찾는 데 혈안이 됐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노상방변(?)까지 심각하게 고려를 했을까.

 

 



 
▲ 바르(bar) 사장 바르(bar) 사장과 '밥도둑'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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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점까지 100km가 남았다는 표지석을 뒤로 하고 바르로 내달렸다. 'bar'를 영어로는 '바'라고 하지만, 스페인어는 발음 기호가 없이 로마자 그대로 읽어 '바르'라고 한다. 스페인도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공공화장실 개념이 희박하다. 마드리드 지하철역에도 화장실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행 중에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바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아주 시원하게 일을 처리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밀려나가듯 무척 후련했다. 박재동 화백이 저술한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에서는 아침 인사말이 '화장실을 잘 갔냐?'였다. 해외여행을 하면 긴장감 때문에 일을 시원하게 못 보기에 그런 인사말이 오갔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순례길을 걷는 첫날부터 아주 유쾌하게 처리했다. 역시 도보여행은 화장실 '도우미'다.

 

 



'밥도둑'들에게 도시락을 빼앗겼다

비웠으니 다시 속을 채울 때였다. 전날 준비했던 특선 도시락이 빛을 발했다. 1유로 짜리 커피 한 잔과 함께 도시락을 펼쳐놓았다. 이제 맛있게 점심을 즐길 시간이었다. 그런데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밥도둑'들이 몰려들었다. 그 녀석들은 순식간에 주위를 감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길 닦아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고, 도시락 뚜껑을 여니까 누렁이랑 야옹이가 먼저 달려드네!'

 

 


 
▲ 밥도둑 누렁이 표정이 참 거시기해서 빵조각을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었다. 앉은 자세도 참 거시기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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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치즈, 잼을 골고루 넣은 빵맛이 좋았나 보다. 한두 점 떼어주면 그것만 먹고 돌아설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다. '밥도둑'들은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도시락 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녀석들 빵맛을 아는구먼!'

그런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안양 삼막사에 있는 토종개 삼총사가 생각났다. 밥 때에 맞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공양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 토종개들...

그렇게 버릴 건 버리고, 채울 건 채웠더니 그제야 주위 풍광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다. 순례팀이 도보여행을 시작했던 사리아와 대성당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모두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속해 있다. 갈리시아는 이베리아반도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왼쪽 면에는 대서양과 맞닿아 있고, 기후는 다른 스페인 지역과 달리 대체로 습하다. 또한 비도 많이 내리는 지역이다.

 

 



 
▲ 소몰이 한 지역 주민이 소떼를 몰고 있다. 소들도 이런 산책(?)이 익숙한 듯 나름대로 진영을 갖춰 이동을 하고 있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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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제주 올레길을 떠올리다


필자도 나름대로 도보여행가라 이 곳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봤다. 갈리시아 지역은 대체적으로 산악지형이었다. 여행기 2편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에 의해 서고트 왕국이 멸망당했고, 옛 귀족들이 규합하여 반도 북부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설립했다고 언급했다(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가까스로 막아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 곳의 지형은 경사도가 가파르지 않고 무척 순했기 때문이다. 산악지형이긴 했지만 산들은 완만한 언덕배기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급격한 경사도를 나타내는 지형은 거의 없어 보였다. 방어력을 높여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천혜의 요새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험준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코르도바 왕국은 반도 북부지역을 점령할 의지가 없었다고 기술한 역사책도 있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지형을 방패삼아 방어를 잘 한 것이 아니라 애초 이슬람인들에게 북부지역은 관심권 밖이었다는 이야기다.

 

 


 
▲ 돌담 너머 보이는 목초지 넓은 평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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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만한 지형과 풍부한 강수량 때문인지 갈리시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목축업이 잘 발달되었다.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에서 소와 말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는 풍광은 갈리시아 지역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아름답고, 시원스러웠다.


순례팀은 약 25km를 걸어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도착했다. 미뉴(minho river)강을 넘어 다다른 포르토마린은 그 자체로 절경이었다. 미뉴강의 흐름으로 생성된 완만한 협곡 지형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현대식 교량으로 미뉴강을 넘지만 중세시대의 순례자들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교량을 넘어 도시로 진입했다. 그 교량은 서기 2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아직도 강 한복판에는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정겨움이 가득한 돌담들 너머 소와 말들이 한가롭게 초원을 누비는 모습, 미뉴강이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고 있는 포르토마린까지 보고 있자니 제주도가 생각났다. 또한 자연스럽게 올레길도 연상됐다. 필자가 산티아고에서 제주 올레를 떠올리듯, 유럽 출신 순례자들이 제주 올레를 걷는다면 산티아고 카미노를 떠올릴지 모른다. 필자는 평소에 지론이 하나 있다.

'아무리 지역이 다르더라도 아름다움은 서로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 포르토마린 포르토마린에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다리가 있었다. 중세시대 순례자들은 그 다리를 넘어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사진에서 보는 잔해물들이 그 다리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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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필자는 짐을 꾸릴 때 3-3-3 원칙을 썼다. 속옷 3, 양말 3, 상의 3. 이런 식으로 짐을 꾸렸다. 순례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서 그런지 일부 순례자들 중에는 '단벌신사'들도 있었다. 하여간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 옷을 너무 많이 휴대하지는 말자. 가벼운 짐은 순례여행을 더 알차게 만들 것이다.

2. 배낭이 커지면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고 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러니 배낭은 40리터가 넘지 않는 것을 구매하는 게 좋다. 여성순례자들이라면 30리터짜리 배낭을 메는 것도 좋을 듯싶다. 

3. 스페인의 11~12월은 우기라고 한다. 하루에도 비가 계속 오락가락한다. 그러니 꼭 우비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침낭도 필수다. 침구류가 없는 알베르게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4. 도시락용 플라스틱 용기를 준비하자. 의외로 많은 순례자들이 자신이 만든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대신했다. 바르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먹는 도시락도 그럭저럭 괜찮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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