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2부

 

 

 

 

 

 

---> 전편에 이어서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 스페인 가족은 포르투갈과 인접한 지역인 비고(Vigo)에서 왔는데 순례길을 걷는 내내 자주 마주치게 됐다. 동선을 함께한 것이다. 야고보 성인을 캐릭터화한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촬영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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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대로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된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무려 800km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넣는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필자의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다 책 <새 유럽의 역사>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됐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 성인인 야곱(기자 주. 야고보)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했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좇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인가?

 

 

 

 


국토 회복 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 무어인을 무찌르는 야고보 17세기 작품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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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9세기 초,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 중 유일하게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 12세기 경의 스페인: 북부 지방을 제외하면,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코르도바 왕국의 영역이다. 코르도바 왕국은 이슬람 무어인들이 세운 나라다.

 

 

 

 

 


이런 국토 회복 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 회복 운동은 이슬람 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 회복 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 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큰 역할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와 관련해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의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것이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돼주었던 것이다.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 산티아고 대성당 산티아고 대성당에 선 필자. 대성당은 당시 공사중이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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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대성당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한편 고생 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 순례길 팀에도 '어떻게 그 당시 항해 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냐'고 말씀한 분도 계셨다.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로 판단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짜 순례자들이라면 몸은 고달프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그릇된 배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돼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사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야고보가 묻힌 것이 맞냐'라는 필자의 의구심은 해소가 됐는가? 그걸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물음표는 그저 물음표로 남겨 두겠습니다. 어쩌면 느낌표가 대신 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관촉사 은진미륵에서 선한 감흥을 받았을 때도, 56억 7천만 년 후에 부처님이 도래한다는 미륵불 신앙을 기계적으로 믿어서 얻은 불심이 아니었거든요. 산티아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야고보가 묻혀 있든 아니든 저는 대성당에서 성소를 체험했기에 그 감흥을 느낌표로 간직하고 싶네요!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1부

 

14.12.19 10:47 최종 업데이트 14.12.19 14:03
 


 

 

 


 
▲ 산티아고 카미노 순례자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는 야고보를, 카미노는 길을 뜻한다. 즉, 산티아고 카미노는 '야고보 길'이라는 뜻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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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한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열두 제자였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왔다. 고된 사역 길 이후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 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년 7월 25일에 참수를 당하고 만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된 것이다.

 

 



민중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 성인 야고보 산티아고 대성당 벽면에 새겨진 야고보상.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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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하게 됐다고 한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 만큼 그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그 먼, 당시는 로마 지배하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것이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다.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 속에서 '부활'한 것은 8세기경이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 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당시 스페인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한다. 그렇게 해서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이후 대성당이 있는 곳에 도시가 들어서니, 그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 스페인어로 '길')에 녹아 있는 역사적 스토리텔링이다. 이 내용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언론들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 책자에도 기술돼 있다.

 

 

 

 

 



정말 산티아고 대성당에 성인 야고보가 잠들어 있을까? 

 

 
▲ 산티아고 순례길 지도상에 표기된 길은 순례길의 메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길이다. 프랑스 길 이외에도 북부길, 포르투갈길 등 다양한 지선들이 있다. 산티아고 정보를 담은 현지 홈페이지 자료이다.
ⓒ 산티아고홈페이지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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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린다. 말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종교다원론자(?)인 필자도 200km 남짓 되는 순례길을 걸으며 짧게나마 필그림이 됐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그 영감은 예전에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봤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다. 그러한 '신성한 느낌'에 이끌려서 그랬는지, 필자는 이후 계속된 스페인 여행에서 일부러 각 지역에 있는 성당들을 골라 탐방하기도 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필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공주역사트레킹 2편

 

14.10.31 09:39  최종 업데이트 14.10.31 09:39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과 겹쳐져, 좀 서글퍼 보인다.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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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이든 수평이든, 장염 걸린 사람에게는 힘들다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 지형을 기반으로 도보 여행길을 개척했기에 해변가나 강변을 걷는 길보다는 좀 험하다. 본격적인 등산보다는 덜해도 급경사가 있는 구간이 몇몇 있다는 것이다.

등산이 수직적인 개념이라면, 트레킹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트레킹도 지형을 타고 가야하기에 일정 부분에서는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 반대로 등산도 봄소풍 가듯 평평한 길을 걸을 때도 많다.

개념 정의에서는 수직과 수평으로 나누어지지만 지형이라는 구체적인 물리적 공간에서는 중첩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스 캠프로 삼고 있는 관악산 둘레길의 경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등산로였다. 그런데 걷기 열풍을 타고 '둘레길'로 변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지형적, 개념적 정의들도 컨디션이 좋을 때나 귀에 들어올 것이다. 장염 때문에 배앓이를 하는 사람에게 수직이든 수평이든 힘든 것은 매한가지 일 테니까. 그랬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서게 되니 공주토박이 분보다는 장염에 걸린 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장염 특성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공복인 상태로 장시간 걸으면 자칫 탈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분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자신은 완주를 할 수 있다고 강하게 의사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또 나름대로 아웃도어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고 해서 그분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에서 우금티로 향해가는 역사트레킹 팀. 가는 도중에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가야 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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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금티로...

 


가는 중간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을 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 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다.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밤송이가 바로 그것이다.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다. 선두에 선 필자는 이렇게 외쳤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유독 장염에 걸린 참가자 분이 가장 많이 밤송이에 찔렸다. 트레킹화가 아닌 가벼운 신발을 신고 와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건, 밤송이 지뢰밭 통과 이후부터 그 분이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에 가시가 찔리면서 복통이 완화된 것인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역사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염으로 고생한 분도 무사히 완주를 해주셨다. 공주토박이 분은 '공주 사람도 모르는 길을 개척하고 안내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모두 다 완주를 해주고, 저런 칭찬을 들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 우금티 우금티.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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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주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잘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참가자들이 이번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이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다.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년이 한 갑자이니 120년이면 두 갑자가 되는 것이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선 역사트레킹 팀. 그곳에서 갑오년을 떠올렸다. 단순히 트레킹을 소비(?)했던 것이 아니라 발전적이고 확장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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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11월 초에는 우금티 추모제가 개최된다.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되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진지한 숙고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건과 발언들이 넘쳐난다. 그 중에서 요즘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이인호 KBS 이사장이 해주었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아니다.(10월 22일, 한국방송 국정감사)"
"(조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타협하면서 사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9월 9일,<한겨레신문>과의 전화통화)"


자신의 조부를 구명하고자 김구 선생까지 매도하는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에 앉아 있다. 이렇듯 '친일매국'의 후손들은 요직에 앉아 느긋하게 부모세대들의 친일에 대해 항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무슨 일본의 군국주의 침탈에 대해 왈가불가 하는가? 일본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정과 친일파 후손들의 항변이 서로 맥락이 다른 것인가? 이인호 같은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부비판은 그저 쇼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쇼!

우금티에서 돌아가신 영령들은 그런 쇼를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 혹시 이런 말씀들을 하지 않을까?

"아이고~ 재미없다!"

 

 

 



덧붙임
<공주역사둘레길>은 아직 정식으로 개통되지 않은 길입니다. 내년 봄을 목표로 표식 작업을 완성한 후 개통할 예정입니다. 제 사비를 털어서 표식 작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우금티와 공산성을 이어서 걷다! 공주역사둘레길 탐방기

 

공주역사트레킹 1편

 

14.10.28 11:36 최종 업데이트 14.10.28 11:36

 

 

 

 

 

 

 

기사 관련 사진
▲ 공산성 공산성 성곽길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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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공산성을 연결하여 사람들과 걷고 싶었다

 


필자는 올해 초에 세웠던 계획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실행했다. '2014년 버킷리스트' 중에 한 가지를 달성한 것이다. 작심삼일로 깨진 계획들을 보며, 항상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연말을 맞이했는데 올해는 나름대로 흡족하게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충남 공주에 있는 우금티와 공산성을 연결하는 도보여행길을 개척하고, 그 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이 그토록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와 그토록 가고자 했던 공주성(공산성)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 사람들과 함께 트레킹을 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제주올레와 지리산둘레길 등, 이미 600개가 넘는 도보여행길이 있음에도 굳이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새로 연결하고자 했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실 필자는 도보여행을 하고, 트레킹 코스를 개척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달리 말하면 도보여행만큼은 남들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재능을 살려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고자 했다. 문인들이 시나 소설로, 예술인들이 춤이나 노래로 갑오년의 정신을 계승했듯이 필자는 도보여행길을 만들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했다. 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길을 트레킹을 통해 직접 걸어보는 것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도보여행자들이 역사의 한 장면을 걸을 수 있게,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필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명감은 '공주역사둘레길'로 결실을 맺게 됐다.

 

 

 

 


기사 관련 사진
▲ 금남루 공산성 금남루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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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다마? 시작부터 이상 징후가...

 


지난 10월 18일. 역사트레킹 팀은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 공산성에 도착했다. 트레킹을 하기에 '딱'인 날씨였다. 가을 햇살이 좀 강한 것 외에는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웃도어에서 날씨가 좋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하지만 청명한 가을 하늘과 달리 필자의 머릿속은 잿빛이었다. 트레킹 시작부터 좀 이상 징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가자 중에 한 명은 충남 공주 토박이였고 또 다른 참가자는 시작부터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 참가자는 공주 시내에 있는 병원에까지 다녀왔다.

'호사다마인가? 이번 트레킹 성사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다고 해도 장염에 걸린 참가자는 어쩌지... 미리 구급차 길이라도 봐둬야 하나?'

 

 

 

 

기사 관련 사진
▲ 역사트레킹 참가자 공산성 성곽을 걷고 있는 참가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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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역사둘레길'의 시작점은 공산성이다.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
"앗!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예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

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금강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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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

 



 

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린다.

이후 영조 11년,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이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사람이 떡을 받쳤대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예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

또 그 토박이 분이었다. 이번에는 필자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다. 필자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ㅁ'이 'ㄴ'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예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

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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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성당 공산성 다음 코스가 바로 이 중동성당이다. 중동성당은 1937년도에 완공된 유서가 깊은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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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툰 연인들에게 특효약인 '단풍천국길'

 

오대산 선재길을 걸으며 얻은 깨달음

 

14.10.22 09:22l최종 업데이트 14.10.2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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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재길 오대산 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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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재길 오대산 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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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일로 기억한다. 당시 필자는 여자 친구와 심하게 다투었고, 화가 난 나머지 도망치듯 강원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분이 풀리지 않아 버스 안에서도 '씩씩' 거렸다.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였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이었다. 그 전부터 오대산에 가려고 단단히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그런 준비과정이 무색할 정도로 필자는 '멘탈 붕괴' 상태로 월정사 부근에 도착했던 것이다. 사찰에 들어서도 씩씩거렸던 걸로 기억한다. 산행을 하면서도 씩씩거렸다.

서로 다툴 수도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게 사랑 아닌가? 갈등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닐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주거리'도 안 될 만큼 사소한 다툼이었지만 당시는 상당히 심각했다. 월정사를 지나 상원사로 방향을 잡을 때까지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길을 터벅터벅 걸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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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사 상원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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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산까지 와서 티격태격하다니!


지난 12일. 정말 오랜만에 다시 오대산을 방문했다. 10월 중순을 향해가고 있던 시기라 그런지 오대산은 온통 오색찬란한 단풍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날씨도 화창해서 푸른 하늘과 울긋불긋한 산들이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 주는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단풍놀이하기에 제격이었다. 그래서인지 월정사부터 상원사 입구까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산악회 버스들과 승용차, 등산객들까지 서로 뒤엉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찰에서 사찰로 연결되는 도로인데 그 길을 사람과 차로 막아선 느낌이었다. 그렇게 붐비다 보니 다툼도 일어났다. 주차 문제로 서로 삿대질을 해대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오대산 하면 문수보살 신앙의 중심지이고, 문수보살하면 깨달음의 지혜를 품고 있는 분인데. 사람들 참 적당히 좀 하지! 여기까지 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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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재길 오대산 선재길. 푸른 하늘과 잘 어우러진 단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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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들이 걸었던 옛길, 선재길

 


도시에서 봤던 주차 문제를 오대산까지 와서 지켜보자니 저런 말이 나왔다. 하지만 이내 곧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선재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선재길은 2013년 가을에 개통된 도보여행길로 월정사와 상원사를 연결하는 트레일(오솔길)이다. 선재길은 스님들이 월정사와 상원사를 오갈 때 다니던 옛길이었다. 월정사가 643년, 상원사가 724년에 창건됐으니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길인 셈이다.

'선재'라는 말도 불교용어다. 동자인 선재는 지혜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표상으로 <화엄경>의 중심인물이다.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은 선재동자의 구도행각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뒤뜰에 53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53은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만난 선지자의 숫자였다. 정리를 해보면, 옛 스님들이 오가던 선재길을 걸으며 '나를 찾아보는' 깨달음의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안내문에도 선재길을 걸으며 선재동자처럼 깨달음을 얻어 보라고 적혀 있었다.

 

 


 

 

 
▲ 선재길 오대산 선재길. 선재길은 2013년 10월에 개통된 길이다. 오래전 스님들이 오가던 옛길을 되살려, 일반인들도 걷기 편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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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재길 계곡길을 따라가는 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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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천국 선재길, 여기가 혹시 무릉도원?

 


선재길을 걸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걷다보면 오색찬란한 단풍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단풍을 바라보며 집착과 번뇌를 잊어버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섶다리, 징검다리 같은 정겨움을 더하는 구조물들이 있었지만 선재길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계곡이다. 시원스레 물줄기를 뿜는 상원사 계곡길 주위로 울긋불긋하게 펼쳐진 단풍나무 숲을 지날 때의 매력이란! 그 매력에 빠지며 걷다보면 무아지경에 이를지 모른다. 맑은 계곡물 위로 붉은빛을 머금은 단풍잎 하나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니까.

오대산 선재길은 약 9km 정도에 달하는데, 계곡을 끼고 있는 길치고는 경사도가 상당히 완만했다. 그래서 넉넉히 휴식시간을 갖는다고 해도 3시간이면 완주가 가능하다. 대신 계곡길이란 한계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에는 폐쇄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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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재길 오대산 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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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관계는 깨달음의 영역이 아닌가?

 


10년 전 필자는 선재길을 걷지 않았다. 그때는 선재길은 없었으니 걸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월정사 쪽에서 상원사로, 또한 그 넘어 비로봉으로 올라가다보니 무언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는 봄날이었는데 상원사 계곡물에 봄꽃들이 흘러가는 모습에 무언가 큰 감흥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아름다운 장면을 보고도 계속 씩씩거린다면 오대산에 올 자격도 없지!"

문수보살의 깨달음이 전해졌는지,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여자친구에게 '백기투항'을 했다. 그 덕택인지 애정 전선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하지만 영구적인 평화는 없는 것인가? 어느 순간 그녀는 떠나버렸고, '전선'을 펼칠 대상조차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남녀 관계는 깨달음의 영역이 아닌가... 이 부분은 문수보살님도 어찌 하시지 못하는 건 아닌지...

10년 전 봄날과 올 가을을 빗대서 생각해 보니, 선재길은 가을도 좋고 봄에도 좋은 길인 듯싶다. 가을에는 단풍 트레킹, 봄에는 봄꽃 트레킹을 향유할 수 있으니까. 그럼 내년 봄 트레킹 목록에 선재길은 맨 앞쪽에 등재되겠군! 내년 봄에는 선재길을 걸으며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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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재길 오대산 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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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오대산 선재길: 약 9km / 예상이동시간 3시간 정도.

 


2. 동서울터미널에서 평창군 진부면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배차간격 1시간. 소요시간 2시간 20분.

 


3. 진부면 공용터미널에서 상원사 입구까지 군내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하루 6편 운행. 월정사행은 하루 12편 운행.

진부에서 상원사까지 약 55분 소요됨.

4. 월정사행이 버스편이 많음으로 상원사에서 월정사로 내려오는 코스를 추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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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향의 한용운 집... '돌집' 증오 때문이다 2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2편] 역사 의미 생각하며 걷는 길

 

 

 

 

 

 

 

 

* 북한산: 북악산 팔각정에서 북한산 보현봉 쪽을 바라본 모습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년 9월에 완공됐다. 이 도로는 그해 1월 21일에 있었던 청와대 습격 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서울방어와 관광목적으로 개통된 것이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 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사산(인왕, 낙산, 남산, 북악)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도 볼 수 있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이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이동해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이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1960~19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북악산 산책로는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과는 좀 다르다.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이 동서로 이어졌다면 산책로는 남북으로 연결된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된 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 뮤지컬 심우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심우>. 만해 선생이 지은 심우장에서 공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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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이 싫어한 '돌집'은 사라졌지만...


성북동으로 내려온 역사트레킹 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심우장으로 향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다. 그곳에 도착하니 마침 <심우>라는 야외뮤지컬이 공연되고 있었다. 조선 독립을 염원한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담장 너머로 본 공연이었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야외에서 뮤지컬 보는 게 쉬운 게 아니니까.

잘 알려졌다시피 심우장은 남향으로 집을 짓지 않았다. 남향으로 하면 '돌집'을 봐야하기에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 '돌집'은 조선총독부다.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집짓기의 기본까지 어겨가며 그렇게 하셨을까?

만해선생이 그렇게 보기 싫어했던 '돌집', 그 조선총독부는 이 땅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 곳에서 뿌려놓았던 식민 잔재들까지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 식민지근대화론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그 이론을 충실히 따르는 이들이 역사교과서를 집필하는 지금의 현실을, 만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실까?  

 

 

* 도움말

1. 북악산 역사트레킹 코스: 홍지문 - 석파랑 - 세검정 - 백사실 계곡 - 이항복 별서터 - 능금마을 - 북악산팔각정(북악스카이웨이) - 북악산산책로 - 한용운 생가(심우장)

2. 약 6k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옴. 버스정류장에서 세검정 방면 버스에 탑승한 후 상명대에서 하차. 버스 이동 시간 약 10분 내외.

4. 종료점: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에서 종료한 후,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으로 이동. 버스 이동 시간 약 5분 내외.

5. 이 코스는 지도상으로만 존재한다. 따로 표식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길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지도검색으로 탐방지들을 찾아갈 수 있다.

 

 

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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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향의 한용운 집... '돌집' 증오 때문이다 1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2편] 역사 의미 생각하며 걷는 길

 

14.10.19 20:38 최종 업데이트 14.10.19 20:38

 

 

 

 

 

 

 
▲ 백사실 계곡 백사실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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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읽기]

 

 


 

사실 '홍지문 - 석파랑 - 세검정' 구간은 재미가 없다. 모두 다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 자동차들의 소음을 들으며 탐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사실 계곡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짜 트레킹을 하는 맛이 난다.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이전까지 들리던 소음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길이 탐방객들을 반긴다. 백사실 계곡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도롱뇽 서식지다. 수질이 맑다는 뜻이다. 그만큼 청정하기 때문인지 멧돼지도 가끔 출몰하나 보다.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으니까.

사실 백사실 계곡은 실개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수량이 적다. 필자는 이곳을 여러번 방문했지만 계곡다운 면모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백사실 계곡을 방문하고 실망한 분들도 많다고 한다. 대성동이나 천불동 계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게는 분명 아쉬울 듯하다.

 


그런 아쉬움은 계곡 입구에 있는 현통사 앞, 너럭바위에 앉아 주위풍광을 둘러보면서 씻어버릴 수 있다. 전면으로는 인왕산이 보이고 뒤쪽으로는 울창한 숲길이 펼쳐져 있으니 아쉬움은 그대로 남겨두고 가볍게 숲길 걷기를 할 수 있으니까.

백사실 계곡의 숨은 매력은 울창한 숲길이다. 서울 종로에 이렇게 걷기 편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벤치도 여러개 갖춰져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 백석동천 이항복 별서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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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 이항복과 백사실 계곡

 

그렇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인다. 숲길 한편에 자리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종로구 부암동 일대는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았던 명승지였다. 그래서 세검정, 석파정 등 이름난 정자와 별장이 지어졌고,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풍류를 즐겼다. 이항복의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 계곡도 부암동에 있으니 이항복도 그 풍류객 대열에 합류했던 셈이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 '백석'은 '백악'을 뜻한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한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백사실 계곡 인근에 있는 세검정은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많은 곳이다.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반정을 획책하고 칼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항복도 광해군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 이항복 별서터 이항복 별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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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으로 더 잘 알려진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과의 재기 넘치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중에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이항복은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이항복이 당쟁에 물들지 않고, 초연하게 자신의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냈기에 이런 신임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항복은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원군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생기자, 그 자신이 직접 명나라에 가 오해를 풀고 오기도 했다. 이렇듯 이항복은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관료로서 업적도 뛰었지만 오성대감의 진면목은 의리다, 의리! 전란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대북파로 분류됐던 문홍도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했다. 그러자 오성대감은 자신도 그 의견에 동조를 했다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영의정이었던 1600년에는 기축옥사(1589년)와 관련하여 성혼을 변호하다가 반대파들에게 정철 비호자로 몰렸고, 그래서 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렇듯 의리가 강했던 그는 인목대비 폐위(1617년)에 대해서도 반대하다 삭탈관직을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618년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돼 그곳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만다. 오성대감이 그렇게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5년 뒤, 광해군도 인조반정에 의해 퇴위당하고 유배길에 오르고 만다. 그러다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호젓하게 숲길트레킹을 하며, 오성대감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자신의 말을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게 뒤집어 버리는 정치인들, 그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오성대감이 사랑한 백석동천을 거닐며 날려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광해군과 연관된 유적지가 두 곳이나 있는 부암동 일대를 뒤로 하고, 역사트레킹 팀은 북악산 산책로로 이동을 했다.

 

 

 

 

 

 

 


 

 

 

서울 도보여행, 이렇게 걸으면 즐거움 커진다  2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역사 알면 서울이 달라 보입니다

 

 

* 홍지문

 

 

 

 

 

---> 전편에 이어서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이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역사트레킹 팀에도 그렇게 오해를 한 참가자가 있었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아니다. 홍지문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탕춘대성이라는 보조성의 성문이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智'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이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다. 1921년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간 것이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 만에 복원을 한 것이다.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 석파랑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전통한옥과 중국풍이 어우러진 건축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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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역사트레킹 팀은 다음 탐방지인 석파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석파랑(石坡廊)은 석파정(石坡亭)에서 옮겨져 온 것인데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석파정은 대원군이 사랑한 별장이었다고 한다. 현재 요릿집으로 쓰이고 있는 석파랑은 벽에 둥근 만월창을 내는 듯, 전통한옥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전통 방식과 중국식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기법이다.


석파랑에서 조금만 이동을 하면 세검정이 나온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석파정과 세검정에서 보듯, 이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사천이라 불렸던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 세검정 세검정과 사천으로 불렸던 홍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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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 한 분이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홍지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숭례문 복원에서 보듯 부실하게 문화재를 복원하면 안 하는 것만도 못한 일이 된다. 특히 답사여행을 하는 사람들 앞에 놓인 것이 '불량 복원품'이라면, 그 답사여행자들은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필자 같이 자신의 두 발로 역사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더 크게 허탈함을 느낄 것이다.

문화재 복원에 대한 의문 혹은 아쉬움을 품고, 트레킹 팀은 이항복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계곡 쪽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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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티투어? 아니... 서울시티트레킹!  2편

자신의 두 발로 가는 서울 명소탐방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이었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 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무지개문)을 셋이나 내서 격식을 높였다.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인데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한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다.

경복궁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만다. 광화문 앞에 화기를 막으려고 세운 해태상이 있었음에도 불에 전소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임금의 피난)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간다. 그중 노비 신분에 있던 사람들은 장예원에 불을 놓는다. 장예원에 노비문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예원에서 일어난 불길은 사방으로 퍼져나가 경복궁 전체가 화마의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아무리 해태상을 세운다고 한들, 강력한 소방시설을 갖춘다고 한들 성난 민심 앞에서는 그저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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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다.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된 것이다. 1968년에 중수를 하게 되는데 그때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졌던 것이다.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들고 있다.

사직단은 경복궁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서촌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례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사직단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런 배치는 <주례고공기>에 의한 것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계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 인왕산과 서울성곽


사직단이 있는 서촌까지는 요즘 유행하는 동네걷기와 별 차이가 없다. 포장도로를 걷기 때문이다.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코스에 가야 트레킹다운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약 18km에 달하는 서울성곽은 조선의 도성이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기준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멱산(남산)을 둘러서 만든 성곽이다. 이 산들을 묶어 내사산이라 부른다. 북악산은 원래 백악산이라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북악'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 도성에는 4대문이 있는데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 북쪽에는 숙정문, 서쪽에는 돈의문(서대문)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서대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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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성곽 서울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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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 올라서면 성곽과 함께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가 보인다.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는 서울 중심부다. 이를 두고 필자는 '작은 서울'이라 칭했다. 그럼 '큰 서울'은 어딘가?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아차산(용마산), 서쪽으로는 덕양산(행주산성)을 두고 외사산이라 부르는데 그 외사산의 안쪽 지역을 '큰 서울'이라고 불렀다. 서쪽 지역만 빼놓고는 지금의 서울 행정권역과 얼추 비슷하다. 한양천도 이후, 서울의 확장은 계속됐지만, 지형적인 굴레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이다.

서울성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요새를 구축했다. 산사면의 급경사를 이용하여 적의 침략을 대비한 것이다. 한마디로 매우 급한 경사면에 성곽이 구축됐다는 뜻이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서울성곽길은 걷기가 만만치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걷다 보면 발바닥에 불이 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간혹 서울성곽길을 좀 만만하게 보는 분들이 있다. 우리 역사트레킹팀에도 그런 분이 있었다. 사전에 미리 공지를 올렸는데도 어떤 분께서 하이힐을 신고 오셨던 것이다. 트레킹 인도자로서 참 난감했다.

"읔! 제가 분명히 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고 오라고 당부드렸는데요."
"앞에는 그냥 평지고, 서울성곽길 걷는다면서요…."

 

 

 

 

 
▲ 서울성곽 '시간 퇴적층'이 새겨진 서울성곽 돌덩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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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신고 오신 분도 끝까지 완주를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필자는 무척 조마조마했지만….

서울성곽은 여러 번에 걸쳐 개축됐다. 조선 초기에는 토성이었고, 이후에는 주위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됐다. 그러다 조선 후기 숙종시대에는 두부 모양의 장대석이 쌓아올려지게 된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대에 또 한 번 개축된다.

이렇듯 서울성곽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마치 600년이란 시간이 퇴적층처럼 돌들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아랫돌은 옛날에 쌓여 '누릿누릿'한데 그 이후에 축성된 돌들은 하얀색이다. 윗돌과 아랫돌이 시각적으로 '시간 퇴적층'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역사트레킹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로 이동했다. 독립문은 잘 아시다시피 독립협회에서 자주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문이다.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든 문이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자주독립'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에 대한 독립의지는 확고했으나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서 무척 관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이권침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했으나 일본의 이권 침탈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 독립문 독립문을 탐방하는 서울시티트레킹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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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해 드리지는 않겠다. 너무나 잘 아시는 곳이겠기에 굳이 필자가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신 이 말은 하고 싶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 조국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현재 우리는 살고 있는가? 아베 총리의 우경화에 핏대 높여 반대를 하면서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끊임없는 나오는 나라를 그들은 꿈꾸었을까? '친일청산은 소련의 지령'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친일 매국노의 후손이 KBS 이사장을 맡는 현실을 그들은 꿈꾸었을까?"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려 있는 대형태극기! 저곳에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던 분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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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서울시티트레킹 코스: 조계사(우정국) ▶ 위안부 소녀상(일본대사관 앞)▶ 광화문(경복궁) ▶사직단(북촌)

▶ 인왕산(서울성곽) ▶ 서대문 형무소 ▶ 독립문

2. 약 6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하차 한 후 조계사로 이동. / 종료점: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이용.

4. 이 코스는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곳이다. 따로 표식작업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길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신다면 지도검색을 통해 해당 탐방지들을 찾아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서울시티투어? 아니... 서울시티트레킹!  1편

 

자신의 두 발로 가는 서울 명소탐방

 

 

14.10.12 17:56   최종 업데이트 14.10.12 17:56

 

 

 

 

 

 

 

 

 

 
▲ 광화문 취라척. 장악원(궁중에서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관청) 소속의 취라척. 수문장 교대식에서. 뒤에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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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지 620년이 되는 해다. 그때가 1394년이었으니, 조선을 개창한 지 겨우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당시는 궁(경복궁)도 완성되기 전이었다. 그만큼 천도는 다급하게 이루어졌다. 개경에 남아 있는 친(親) 고려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도성의 틀도 갖춰지기 전에 남행을 한 것이다.


2대 왕 정종 때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지만 이후 한양은 조선의 도읍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는다. 그만큼 서울은 유서 깊은 도시다. 그런 서울을 알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지도 한 장을 들고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는 외국인들. 당장 광화문이나 시청 쪽으로 나가보시라. 수많은 외국인들이 카메라에 서울 곳곳을 담고 있으니….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한국 사람인 우리는 서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역사트레킹을 실시하기로 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행하는 일명 서울시티트레킹.

서울시티트레킹은 '서울시티투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가면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이 버스를 타면 서울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2층 버스도 있다. 물론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면 좋겠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보려면 역시 자신의 두 발로 걸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제대로 볼 수 있다.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정상에 버스를 타고 올라갈 수는 없지 않은가!

 

 

 

 
▲ 서울시티투어버스 서울시티투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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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대사관 앞을 당당히 지키고 서 있는 위안부소녀상

 


지난 9월 28일. 서울시티트레킹은 조계사와 그 옆쪽에 자리 잡고 있는 우정국 탐방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정국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킨 곳이다. 일명 '3일 천하'로 불린 갑신정변은 임오군란(1882년)과 함께 개화기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이다.

정변 주동자들의 의견과 너무나 큰 간극을 보였던 당시의 조선 상황, 정변 당사자들의 과도한 일본 의존 등으로 갑신정변은 '그들만의 리그'로 막을 내렸고, 주동자였던 김옥균은 중국 상해에서 암살을 당하고 만다. 정변 주동자들은 일본을 맹주로 한 '대동합방론'과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후쿠자와 유키치의 충실한 모범생들이었다. 그들은 조선에 메이지유신을 '이식' 시키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 만 것이다.

갑신정변이 발생한 곳인 우정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대사관이 있고, 그 앞에는 위안부소녀상이 꿋꿋하게 자리 잡고 있다. 1992년부터 개최된 수요집회는 2012년에 1000회를 맞이하게 됐고, 그 기념으로 본 위안부소녀상이 건립되었다.

일본발 외신기사에서 보듯 일본 아베 정권의 우경화는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 7월 1일 자위대 창설 60주년 기념에 맞춰, 헌법해석결정으로 집단적자위권이 승인됐다. 현실적으로 전쟁을 금지한 평화헌법 9조를 개헌을 통해 수정하기가 어려워, 각의결정이라는 우회로를 써서 자위대에 집단적 자위권을 부여한 것이다.

1993년 8월에 있었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의 '고노담화'도 아베 정권에 의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지난 9월 <아사히신문>은 고노담화의 근간이 된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담은, 자사의 기사에 일부 오류가 있다며 해당 기사를 취소했다. 그것을 빌미 삼아 아베 정권과 우익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손가락질을 해댔다. <아사히신문>과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을 기사화한 전직 기자에게 도를 넘는 비난을 가한 것이다.

 

 



 
▲ 위안부소녀상 위안부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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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세이지 증언의 큰 골자는 제주도에서 조선인 여성들을 강제로 사냥하듯 위안부로 삼았다는 것이다. 작은 오류가 있을 수는 있지만, 요시다 증언과 수요집회에 선 할머니들의 증언이 큰 간극이 있는가? 백번 양보해서 요시다 증언이 오류를 포함했다고 해도 일본 황군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본질이 전복되는가? 또한 요시다 증언을 담은 30년 전의 <아사히신문> 보도만이 위안부 문제를 다룬 유일한 총체인가?


아베 총리는 요시다 증언 철회를 빌미 삼아 '일본 성노예 강제연행은 중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국제여론의 눈치를 보는지 '고노담화는 승계한다'는 이중적인 행보를 보인다. 누구는 위안부소녀상이 외롭고 처량하게 보인다고 한다. 2인용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본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 정치인들의 끊임없는 망언들을 생각하면 그 외로움이 더 커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소녀상이 외롭지 않아 보인다. 필자가 소녀상을 방문할 때마다 꽃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꽃이 아니라 매번 다른 꽃이 놓여 있던 것이다. 어떨 때는 과자나 그림 같은 것들이 놓여 있기도 했다. 소녀는 벤치에 홀로 앉아 있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위안부소녀상은 미국 몇몇 도시에도 설치되어 있다.

 

 

 

 
▲ 서울시티트레킹 서울시티트레킹 참가자들. 인왕산 서울성곽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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