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샛강 생태공원: 샛강 생태공원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   * 샛강 생태공원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거의 3년 만에 처음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10월 4일에 행한 한강 역사트레킹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선유도에서부터 여의도에 있는 샛강 생태공원까지 이어지는 길을, 저는 한강 역사트레킹이라고 부른답니다.


이 한강 트레킹을 마지막으로 행했을 때가 2013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저도 이 길을 걷지 않았답니다. 그래서인지 이날 트레킹을 앞두고 좀 긴장을 했답니다.


"잘 되야 하는데... 또 오늘이 4학기 첫 수업이잖아!"


그렇습니다. 그날은 2016년 4학기의 첫 수업이었습니다. 렛츠런 문화센터의 2016년 4학기의 첫 수업이었죠. 3학기가 잘 끝났으니 4학기는 더 잘 해야 하잖아요. 그런 심적 부담을 좀 안고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첫 수업이라서 그랬는지 수강생들도 거의 다 참석을 해주신 것 같더군요. 약 20명에 가까운 인원들이 모였답니다.


10월의 하늘은 참 맑고 청명했습니다. 햇살이 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걷기에 좋은 날씨였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


한강 역사트레킹은 서울에 있는 트레킹 코스치고는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합니다. 선유도를 걷는 것도 좋고, 샛강 생태공원을 걷는 것도 좋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의도 옆에 위치한 샛강 생태공원은 빌딩 숲과 푸른 수목이 어우러져 있어 무척 이색적인 풍광을 자아낸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색적인 트레킹 코스지만 한가지 단점이 있답니다. 바로 소음 때문입니다. 길 옆 쪽으로 88도로가 지나가는데 그래서 자동차 소음이 상당히 심하다는 것이죠. 리딩하는 내내 그 점이 마음이 걸리더군요.


그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트레킹은 무사히 잘 종료가 됐답니다. 수강생들의 만족도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그렇게 호평으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4학기는 가을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트레킹하기 정말 좋은 학기라고 생각합니다. 수강생들도 많은 기대를 가지고 트레킹에 임하시는 것 같더군요. 그런 만큼 제 어깨도 무척 무겁답니다.


더 열심히 해야겠죠. 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제 역할이니까요. 다음 강의 때도 날씨가 받혀줬으면 정말 좋겠네요~

 







​ * 샛강교: 샛강교에서 한 컷. 뒤로 여의도 금융가의 빌딩 숲들이 보인다.


 



   * 뱀 조심: 뱀 조심 표지판. 샛강 생태공원에 뱀이 나타나는가 보다. 하지만 난 한 번도 샛강에서 뱀을 본 적이 없다.















9월 25일 일요일.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제 발걸음은 분주했습니다. 이날은 안산 역사트레킹을 하는 날이었으니까요.


안산 트레킹은 처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좀 긴장이 되더군요. 처음하는 트레킹도 아닌데 긴장을???



저는 현재 다음 스토리펀딩에 <함께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전에 올린 포스팅에도 기술되어 있지요. 이날 오신 분들은 모두 다 <함께걷는 서울트레킹>을 통해 참가를 해주신 분들입니다.

한마디로 저는 제게 후원해주신 분들과 함께 리워드 트레킹에 나선 것입니다.


크라우드 펀딩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저처럼 후원자들과 직접 만나는 창작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간단한 티타임이나 강연 형식이 아닌 저처럼 서너시간을 함께하는 창작자는 더더욱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참가자 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행운아에요. 이렇게 후원자분들을 직접 만나서 오랜시간을 함께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2348












 
























9월 24일 토요일.


제게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예전에 포스팅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이 날은 제가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트레킹 강의를 첫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한겨레 문화센터면 왠만한 백화점 문화센터보다도 더 인지도가 있지 않습니까!


날씨도 좋더군요. 수강생들도 많이 오셨고. 저를 포함해서 총 19명이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시간에 맞춰 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광화문을 지날 때, '아차'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가을날의 광화문은 축제의 연속입니다. 그 축제의 장으로 트레킹팀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소음과 번잡함 속으로 들어갔으니 정신이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제가 좀 말려버렸습니다. 9월의 광화문에 대해서 미리 판단을 했어야 했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니 참가자분들도 제가 좀 미더웠을 겁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상황은 좀 나아지는 것 같더군요. 일단 길이 예쁘고, 한적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트레킹의 묘미는 한적함입니다. 한들한들 거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야 참가자들도 저도 숨통이 트이니까요.


첫 트레킹은 그저그렇게 끝났지만 다음부터는 더 잘해보고 싶네요. 수강생들의 열화가 같은 박수를 받는


그런 강사가 되고 싶습니다.


추신: 한겨레문화센터 강의에 너무 신경을 곤두 세웠나 봐요. 그날 트레킹 끝나고 그냥 뻗어버렸답니다.~ 

트레킹 한 두 번 한 것도 아닌데 신경을 많이 썼나 봅니다. 잘해보려고 하는 욕심도 컸고요.  











 



 



 








* 공주역사트레킹: 공산성 위에 선 후원자님. 뒤로 보이는 강이 금강이다.  





* 관악산 역사트레킹: 장승들 앞에 선 후원자분들.







9월 3~4일.


그날도 어김없이 저는 트레킹을 했습니다. 어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열심히 걸었지요. 하지만 그날 트레킹에 참가한 분들은 남다른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냐?


바로 제게 후원금을 내주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들은 제 후원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108일 동안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이라는 펀딩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 스토리펀딩이라는 플랫폼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죠. 크라우드 펀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들은 '리워드'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리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창작자가 후원자들에게 주는 답례입니다.


통상적으로 리워드로 많이 지급되는 것이 엽서, 머그컵, 에코백 등등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저런 것들을 리워드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트레킹이라는 이름으로 펀딩을 한 만큼 트레킹에 초대하는 것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관악산 역사트레킹: 후원자분들과 함께 서 있는 나. 맨 오른쪽. 땀으로 범벅이 됐다-_-







* 공주 역사트레킹: 우금티 고개에 선 나. 그날 햇살이 강해서 그랬는지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렇습니다. 리워드를 트레킹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리워드 트레킹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리워드 트레킹이 9월 3일과 4일에 진행됐습니다.


3일에는 공주 역사트레킹이 실시됐고, 4일에는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진행됐습니다. 두 날 모두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좀 아쉽기는 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오셔서 함께 걸었으면 좋았을텐데...


특히 공주 역사트레킹 같은 경우는 쉽게 행할 수가 없답니다. 일단 제가 미리 가서 답사를 해야 합니다. 또 이동시간도 꽤 깁니다. 서울에서 하는 트레킹보다 적어도 1시간 이상 더 걸리니까요. 그러니 참가자들도 부담, 저도 부담이 되지요. 비용도 만만치 않고요. 어쨌든 더 많은 분들이 오셨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_-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나름의 특색이 있는게 트레킹의 매력입니다. 공주 역사트레킹 같은 경우는 1:1 맨투맨으로 트레킹을 했습니다. 관악산 역사트레킹의 경우는 3명의 후원자와 함께 행했습니다.





* 공주 역사트레킹: 공산성 광복루에 선 후원자 분. 저 광복루라는 이름은 김구 선생께서 직접 붙이신 것이다.








* 공주 역사트레킹: 공주성당.








트레킹 하기 좋은 가을날 후원자분들과 함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습니다. 후원자들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펀딩이 사실 많지가 않답니다. 실제로 만난다고 해도 티타임이나 강연 정도이고요. 후원자가 능동적인 입장이 되어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행운아입니다. 후원자들과 직접 만나 트레킹을 행했으니까요. 서너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었으니까요. 저같은 창작자도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함께 걷는 길 서울 트레킹>이라는 펀딩을 또 하고 있답니다. 후원자들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또 펀딩을 개설한 것이죠. 이번 펀딩에는 리워드 트레킹을 5개를 배치해서 후원자들들 5번 이상 만날 계획입니다. 5번 이상 그들과 만나 웃고 떠들고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가을은 은근히 바쁠 것 같습니다. 소출이 기대되는 올가을입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8179  <--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


 



* 관악산 역사트레킹: 메타세콰이어 숲에 선 후원자분들.













* 수표교: 장충단 공원 안에 있는 수표교 앞에 선 참가자들.










"소나기라도 안 내리나? 이런 날씨에 무슨 트레킹이야! 더워 죽겠구만!"



2016년 8월 16일.



찌는 듯한 폭염이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광복절 전후로 폭염이 꺾인다는 기상청의 발표는 그저 무색할 따름이었죠. 정말 망설였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에 무슨 트레킹입니까!


그래도 약속은 약속입니다. 아무리 덥다고 해도 일정을 변경을 할 수는 없겠죠. 중간에 에어컨이 빵빵한 커피숍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발걸음을 떼야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덥더라고요. 오죽했으면 제가 소나기가 내렸으면 하는 기원까지 드렸겠습니까!


앞선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렛츠런 문화공감센터에서 역사트레킹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16일은 서울내부 역사트레킹이 행해진 날이었습니다. 폭염에 대한 염려의 마음을 한가득 안고 집합장소인 청구역에 도착했습니다.


렛츠런에서 행하는 트레킹은 모임 인원이 20명인데 이날은 9명이 오셨더군요. 아무래도 날씨 때문에 참가율이 저조했던 것 같습니다.


두둥~ 드디어 첫걸음을 옮겼습니다. 태양은 뜨겁게 내려째고 있었고, 지열은 이글이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서울내부 역사트레킹 코스는 응봉이라고 불리는 산등성이를 타고 갑니다. 산등성이라고 하지만 해발이 낮아서 누구나 다 오를 수 있는 코스죠. 그래도 산을 오르려면 오르막 길을 올라야 하잖아요. 그런 오르막이 초반에 있답니다. 그 초반 오르막을 지나면 숲길을 지나는 터라 걷기는 편하죠. 참가자 분들이 도보여행에 익숙한 분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초반 오르막 길을 무사히 잘 오르시더군요.







*버티고개: 버티고개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참가자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날 트레킹도 모든 분들이 완주를 해주셨답니다. 땀을 뻘뻘 흘리기는 했지만... 그래서 옷이 완전 젖었지만... 아참 출발하기 전에 제가 참가자 분들에게 손수건을 나눠 드렸습니다. 일명 '역사트레킹 손수건'이었는데 나름대로 디자인이 예쁘다고 하시더군요. 그 손수건으로 땀도 닦으시고 그러더군요. 하여간 잘 나눠드린 것 같습니다.


저도 다른 모임 때보다 아주 천천히 리딩을 했답니다. 사실 저도 무척 힘들었으니까요. 사실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요.


하여간 쉽지 않은 트레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했더니 기억에 많이 남는 모임이 되었답니다. 보람도 컸습니다.


그래도 9월 달 트레킹은 좀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성곽: 서울성곽 구간에 선 참가자들.













 









*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참가자 분들.






 

​   * 전단: 역사트레킹을 알리는 렛츠런문화공감센터의 전단 










7월 12일 화요일.


일기예보에는 분명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진다고 했지만... 날씨가 화창했습니다. 기상청 예보대로 움직였으면 그날 트레킹을 못할 뻔했지요.


이날 저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했습니다. 제가 7월 달부터 렛츠런문화공감센터에서 역사트레킹을 런칭했는데 이날이 첫 시작일이었습니다.  사실은 일주일 전인 5일 날이 첫 개강일이었지만 그날 호우경보가 내려서 한 주 연기가  것이지요. 


어렵게 시작한 만큼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제가 문화센터 강의는 처음이라 긴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는 역사트레킹을 많이 리딩을 했지만요...


좀 덥기는 했지만 그래도 트레킹 하는데 양호한 날씨였습니다. 또한 인왕산 트레킹의 특징이 전반부만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숲길로 갑니다. 그래서 초반 30분 정도만 버티면 때양볕 걱정은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죠.


이날 참가를 해주신 분들은 트레킹에 대한 이해도가 무척 높으셨습니다. 제가 바짝 긴장을 할 만큼...^^;


트레킹에 적극적으로 임해주셔서 제가 다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부족한 저의 설명도 경청을 해주셔서 감사했고요. 그래서인지 한 분의 낙오자도 없이 모든 분들이 다 완주를 해주셨습니다.


또한 얼마나 저를 잘 챙겨주시는지... 먹을 것도 엄청 얻고 먹었습니다. 또 어떤 분께서는 제게 모자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날 제가 모자를 쓰고 가지 않았거든요. 제가 챙겨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제가 넉넉한 인심을 누리고 온 것이죠.


보람찬 하루였습니다. 이 맛에 트레킹 리딩을 하는 거겠죠! 카아~!



이 포스팅은 간략한 스케치입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정식 포스팅이 궁금하신다면


 

클릭 ☞ http://blog.naver.com/kwakmaster/220736534015


 









* 성곽길: 곡선미가 넘치는 서울성곽






* 수성동 계곡: 수성동 계곡에서. 뒤로 인왕산이 보인다.





​*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 뒤쪽에 있는 시인의 언덕에서.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강남주민 오들오들 떨게 한 우면산 '그 물건'

 

[여행] 남태령-우면산 '안보 트레킹'

 

15.03.19 09:08    최종 업데이트 15.03.19 09:08

 

 

 

 

 

 

* 남태령

 

 

 

 

 

 

 

 

 
▲ 지뢰지대 과거에 지뢰지대였음을 알리는 경고판. 아직 미수거된 지뢰들이 남아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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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적대적 공생관계, 공포의 균형, 안보상업주의 같은 냉전시대 맹위를 떨쳤던 개념들이 어지럽게 난무해 있으면서도 그 나름대로 질서를 갖추고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는 적대관계에 있는 두 세력들이 서로를 비방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강경파와 이란의 강경파들이 서로에게 비난을 해대며 자신들의 몸집을 불리는 것이 좋은 예이다.


공포의 균형은 공포나 두려움을 통해서 쌍방 간에 균형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냉전시대 미소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들은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녔다. 그래서 핵무기의 발사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두 괴멸된다. 그런 공포감이 역설적으로 '균형자' 역할을 하게 됐는데 이를 두고 공포의 균형이라고 칭했다. 안보상업주의는 문자 그대로 안보를 가지고 상품화 시켰다는 의미이다.

남한의 강경파와 북한의 강경파가 서로 윽박을 질러 자신들의 입지를 키우고,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한의 전력 70%, 북한의 전력 90%가 몰려 있고, 안보를 상품화하여 계속해서 송출하는 방송국들이 있으니 앞서 언급한 필자의 판단이 꼭 억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그것들이 어지럽게 난무하지만 '종북몰이'에서는 진영을 갖춰 질서정연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공포의 균형 정도만 최신무기 획득이라는 방향으로 변주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최근 회자와 되고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THAAD)가 바로 그 예일 수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남태령 옛길 남태령 옛길을 알리는 표지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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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으로 개명한 여우고개


자자, 서설이 너무 길어졌다. 뚱딴지같이 여행기사에 냉전시대에나 통용되던 개념들을 끌어와 어지럽히지 말라는 독자들의 원성도 들리는 듯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이 좋아 주말에 갈 봄 소풍 장소를 알아보려고 <오마이뉴스>에 접속했는데 '종북' 같은 신물 나는 단어를 여행면에서까지 볼 줄이야, 하고...

필자가 이번에 소개할 곳은 서울 남태령-우면산 구간이다. 남태령(南泰嶺)은 관악산과 우면산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은 183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 워낙 해발이 높은 고개들이 많아 183m의 높이면 명함도 못 내미는 게 맞지만, 한자어에서도 보이듯 이 고개는 당당히 '남쪽의 큰 고개'로 명명되어 있다.

처음에 이 곳은 여우고개, 혹은 여시고개로 불렸다. 한자어 명칭도 '여우호'자를 써서 호현(狐峴)이라고 쓰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는 여우가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그 옛날 관악산과 우면산의 울창한 수풀은 여우들이 서식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여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우 굴들이 발견됐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이곳에는 천 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다녔다는 '전설의 고향'도 전승된다.

 
▲ 과천루 남태령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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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곳은 왜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개명을 하게 됐을까? 가장 유력한 설은 정조대왕 시대에 행했던 화산 능행차와 관련이 있다.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을 한 후, 정조대왕은 참배에 나서게 된다. 이를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이 고개의 이름을 정조대왕께서 물으셨다. 이때 과천현의 이방이 여우고개라는 이름 대신 남태령이란 명칭으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상감께서 행차하는 고개가 '여우고개'라는 요망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여우고개가 토속적인 이름이기는 하지만 요망스러운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더불어 고개의 명칭이 한 사람에 의해 급작스럽게 변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대왕 이전 시대부터 여우고개가 아닌 남태령으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한강 이남에는 정조대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혹시 남태령도 그에 편승된 것이 아닐까? 정조대왕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태령은 이미 보통 이상의 고개가 될 수 있으니까.

정조대왕이 남태령을 넘어서 다닌 기간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1794년 이후부터 능행차 노선이 시흥-안양 방면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과천에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어 일부러 남태령-과천 코스를 버렸다고 한다. 김상로는 영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자이다.

 

 



 
▲ 벙커 벙커 입구를 막아 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저런 벙커나 참호에 쓰레기를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용변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몰상식한 사람들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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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생활 생각나게 하는 남태령 참호와 벙커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러 다녔던 남태령. 현재 남태령 곳곳에는 참호가 놓여 있다. 벙커도 있다. 서울 인근에서 이렇게 많은 참호와 벙커들이 정열되어 있는 곳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안보(?)시설들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남태령-우면산 코스다. 그 참호와 벙커들을 파고,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인 아저씨들이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시설들을 무심히 지나치기는 했지만 필자도 군대 생활이 생각나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군대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필자는 요즘에도 가끔 이등병 시절의 꿈을 꾼다. 군복을 벗고, 예비군도 끝난 지가 한참인데 아직까지도 그런 꿈을 꾸고 있다. 그런 꿈을 꾸고 난 뒤에는 항상 식은땀을 닦으며 이런 혼잣말을 하곤 했다.

"혹시 죽을 때까지 이등병 꿈을 꾸는 거 아니야?"

 
▲ 우면산 참호 서울시계인 우면산쪽의 참호는 저렇게 나무데크로 덮어 놓았다. 유사시에 나무데크는 열리고, 그 참호에 군인들이 배치된다. 나무데크가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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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뒷산에 걸려 있는 지뢰표식


남태령의 많은 참호와 벙커들을 뒤로 하고 우면산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소가 졸고 있다는 뜻의 우면산(牛眠山)은 해발 293m로, 이웃산인 관악산(620m)보다 훨씬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보다 오르기도 수월하고 코스도 짧다.

우면산은 '서울보다 더 서울'적인 강남의 뒷산이다. 그래서 전망대에 오르면 관악산에서 보는 광경과는 좀 차이가 있다. 관악산이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고시촌의 풍광을 품고 있다면 우면산은 타워팰리스 같은 초고층 주거시설을 보여준다.

 

 

 

* 우면산 벙커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욕망이 발현되는 곳이자 가장 먼저 앞서가는 곳의 뒷산이기에, 그 표식을 우면산에서 봤다는 것만으로도 필자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강남과 그 표식이 우리사회의 냉혹한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언제든지 파괴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다는 그 엄혹한 현실!

그럼 그 표식이 무엇이냐? 바로 '지뢰' 지대를 알리는 표식이었다. 우면산 정상부에는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부대의 방어를 위해 1980년대 대인지뢰가 매설됐다. 이후 순차적으로 지뢰가 제거됐지만 그 중 일부가 수거가 안 돼 울타리를 쳐놓고 지뢰 표식을 걸어둔 것이다.

지난 2011년 7월, 우면산에 큰 물난리가 났다. 물난리로 큰 고초를 겪은 인근 주민들은 혹시나 있을지 모를 지뢰 유실까지 이중고에 시달렸다고 한다. 민통선 인근에서나 일어날 줄 알았던 지뢰 유실을 강남 주민들이 걱정했던 셈이다. 

 

 



 
▲ 지뢰밭에 토끼 토끼 한 마리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곳이 지뢰밭인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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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본 것처럼 남태령-우면산 코스는 '안보 트레킹'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당장이라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자리를 잡을 것 같은 참호와 벙커들, DMZ이나 민통선 인근에서나 볼 수 있는 '지뢰' 표식까지... 더군다나 트레킹을 마치고 강남에 가서 맛집 탐방도 할 수 있다.


그 참호와 벙커가 실전에서 작동되는 순간 한반도는 석기시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남북한이 모두 공멸할지 모른다. 그러니 그 시설물들은 계속 '안보 트레킹'으로만 쓰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원히!

 


 
▲ 남태령-우면산 트레킹 남태령-우면산 트레킹 코스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호젓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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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령-우면산: 이 코스는 산악자선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다.

 

 

 

 

 

◆ 도움말

1. 코스:  선바위 미술관 ▶ 삼거리 ▶ 남태령 ▶ 군부대 ▶ 약수터 ▶ 예술의 전당
2. 이동거리: 약 7km / 이동시간: 약 3시간 (쉬는 시간 포함)
3. 교통편: 시작점 - 지하철 4호선 선바위역  / 종료점 - 3호선 남부터미널역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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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공주역사트레킹 2편

 

14.10.31 09:39  최종 업데이트 14.10.31 09:39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과 겹쳐져, 좀 서글퍼 보인다.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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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이든 수평이든, 장염 걸린 사람에게는 힘들다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 지형을 기반으로 도보 여행길을 개척했기에 해변가나 강변을 걷는 길보다는 좀 험하다. 본격적인 등산보다는 덜해도 급경사가 있는 구간이 몇몇 있다는 것이다.

등산이 수직적인 개념이라면, 트레킹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트레킹도 지형을 타고 가야하기에 일정 부분에서는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 반대로 등산도 봄소풍 가듯 평평한 길을 걸을 때도 많다.

개념 정의에서는 수직과 수평으로 나누어지지만 지형이라는 구체적인 물리적 공간에서는 중첩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스 캠프로 삼고 있는 관악산 둘레길의 경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등산로였다. 그런데 걷기 열풍을 타고 '둘레길'로 변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지형적, 개념적 정의들도 컨디션이 좋을 때나 귀에 들어올 것이다. 장염 때문에 배앓이를 하는 사람에게 수직이든 수평이든 힘든 것은 매한가지 일 테니까. 그랬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서게 되니 공주토박이 분보다는 장염에 걸린 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장염 특성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공복인 상태로 장시간 걸으면 자칫 탈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분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자신은 완주를 할 수 있다고 강하게 의사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또 나름대로 아웃도어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고 해서 그분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에서 우금티로 향해가는 역사트레킹 팀. 가는 도중에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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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금티로...

 


가는 중간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을 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 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다.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밤송이가 바로 그것이다.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다. 선두에 선 필자는 이렇게 외쳤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유독 장염에 걸린 참가자 분이 가장 많이 밤송이에 찔렸다. 트레킹화가 아닌 가벼운 신발을 신고 와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건, 밤송이 지뢰밭 통과 이후부터 그 분이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에 가시가 찔리면서 복통이 완화된 것인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역사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염으로 고생한 분도 무사히 완주를 해주셨다. 공주토박이 분은 '공주 사람도 모르는 길을 개척하고 안내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모두 다 완주를 해주고, 저런 칭찬을 들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 우금티 우금티.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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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주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잘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참가자들이 이번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이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다.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년이 한 갑자이니 120년이면 두 갑자가 되는 것이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선 역사트레킹 팀. 그곳에서 갑오년을 떠올렸다. 단순히 트레킹을 소비(?)했던 것이 아니라 발전적이고 확장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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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11월 초에는 우금티 추모제가 개최된다.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되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진지한 숙고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건과 발언들이 넘쳐난다. 그 중에서 요즘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이인호 KBS 이사장이 해주었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아니다.(10월 22일, 한국방송 국정감사)"
"(조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타협하면서 사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9월 9일,<한겨레신문>과의 전화통화)"


자신의 조부를 구명하고자 김구 선생까지 매도하는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에 앉아 있다. 이렇듯 '친일매국'의 후손들은 요직에 앉아 느긋하게 부모세대들의 친일에 대해 항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무슨 일본의 군국주의 침탈에 대해 왈가불가 하는가? 일본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정과 친일파 후손들의 항변이 서로 맥락이 다른 것인가? 이인호 같은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부비판은 그저 쇼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쇼!

우금티에서 돌아가신 영령들은 그런 쇼를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 혹시 이런 말씀들을 하지 않을까?

"아이고~ 재미없다!"

 

 

 



덧붙임
<공주역사둘레길>은 아직 정식으로 개통되지 않은 길입니다. 내년 봄을 목표로 표식 작업을 완성한 후 개통할 예정입니다. 제 사비를 털어서 표식 작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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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와 공산성을 이어서 걷다! 공주역사둘레길 탐방기

 

공주역사트레킹 1편

 

14.10.28 11:36 최종 업데이트 14.10.2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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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성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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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공산성을 연결하여 사람들과 걷고 싶었다

 


필자는 올해 초에 세웠던 계획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실행했다. '2014년 버킷리스트' 중에 한 가지를 달성한 것이다. 작심삼일로 깨진 계획들을 보며, 항상 뒷맛이 개운치 않은 연말을 맞이했는데 올해는 나름대로 흡족하게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충남 공주에 있는 우금티와 공산성을 연결하는 도보여행길을 개척하고, 그 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이 그토록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와 그토록 가고자 했던 공주성(공산성)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 사람들과 함께 트레킹을 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제주올레와 지리산둘레길 등, 이미 600개가 넘는 도보여행길이 있음에도 굳이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새로 연결하고자 했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다. 사실 필자는 도보여행을 하고, 트레킹 코스를 개척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달리 말하면 도보여행만큼은 남들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재능을 살려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고자 했다. 문인들이 시나 소설로, 예술인들이 춤이나 노래로 갑오년의 정신을 계승했듯이 필자는 도보여행길을 만들어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했다. 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길을 트레킹을 통해 직접 걸어보는 것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도보여행자들이 역사의 한 장면을 걸을 수 있게, 우금티-공산성 구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필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명감은 '공주역사둘레길'로 결실을 맺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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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남루 공산성 금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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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다마? 시작부터 이상 징후가...

 


지난 10월 18일. 역사트레킹 팀은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공주 공산성에 도착했다. 트레킹을 하기에 '딱'인 날씨였다. 가을 햇살이 좀 강한 것 외에는 활동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웃도어에서 날씨가 좋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하지만 청명한 가을 하늘과 달리 필자의 머릿속은 잿빛이었다. 트레킹 시작부터 좀 이상 징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가자 중에 한 명은 충남 공주 토박이였고 또 다른 참가자는 시작부터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장염에 걸렸던 것이다. 그 참가자는 공주 시내에 있는 병원에까지 다녀왔다.

'호사다마인가? 이번 트레킹 성사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다고 해도 장염에 걸린 참가자는 어쩌지... 미리 구급차 길이라도 봐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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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트레킹 참가자 공산성 성곽을 걷고 있는 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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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역사둘레길'의 시작점은 공산성이다.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나라 소정방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
"앗!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예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

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금강 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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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

 



 

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린다.

이후 영조 11년,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이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사람이 떡을 받쳤대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예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

또 그 토박이 분이었다. 이번에는 필자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다. 필자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ㅁ'이 'ㄴ'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예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

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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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성당 공산성 다음 코스가 바로 이 중동성당이다. 중동성당은 1937년도에 완공된 유서가 깊은 성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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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향의 한용운 집... '돌집' 증오 때문이다 1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2편] 역사 의미 생각하며 걷는 길

 

14.10.19 20:38 최종 업데이트 14.10.19 20:38

 

 

 

 

 

 

 
▲ 백사실 계곡 백사실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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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읽기]

 

 


 

사실 '홍지문 - 석파랑 - 세검정' 구간은 재미가 없다. 모두 다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 자동차들의 소음을 들으며 탐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사실 계곡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짜 트레킹을 하는 맛이 난다.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이전까지 들리던 소음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길이 탐방객들을 반긴다. 백사실 계곡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도롱뇽 서식지다. 수질이 맑다는 뜻이다. 그만큼 청정하기 때문인지 멧돼지도 가끔 출몰하나 보다.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으니까.

사실 백사실 계곡은 실개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수량이 적다. 필자는 이곳을 여러번 방문했지만 계곡다운 면모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백사실 계곡을 방문하고 실망한 분들도 많다고 한다. 대성동이나 천불동 계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게는 분명 아쉬울 듯하다.

 


그런 아쉬움은 계곡 입구에 있는 현통사 앞, 너럭바위에 앉아 주위풍광을 둘러보면서 씻어버릴 수 있다. 전면으로는 인왕산이 보이고 뒤쪽으로는 울창한 숲길이 펼쳐져 있으니 아쉬움은 그대로 남겨두고 가볍게 숲길 걷기를 할 수 있으니까.

백사실 계곡의 숨은 매력은 울창한 숲길이다. 서울 종로에 이렇게 걷기 편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벤치도 여러개 갖춰져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 백석동천 이항복 별서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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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 이항복과 백사실 계곡

 

그렇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인다. 숲길 한편에 자리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종로구 부암동 일대는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았던 명승지였다. 그래서 세검정, 석파정 등 이름난 정자와 별장이 지어졌고,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풍류를 즐겼다. 이항복의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 계곡도 부암동에 있으니 이항복도 그 풍류객 대열에 합류했던 셈이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 '백석'은 '백악'을 뜻한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한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백사실 계곡 인근에 있는 세검정은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많은 곳이다.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반정을 획책하고 칼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항복도 광해군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 이항복 별서터 이항복 별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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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으로 더 잘 알려진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과의 재기 넘치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중에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이항복은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이항복이 당쟁에 물들지 않고, 초연하게 자신의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냈기에 이런 신임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항복은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원군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생기자, 그 자신이 직접 명나라에 가 오해를 풀고 오기도 했다. 이렇듯 이항복은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관료로서 업적도 뛰었지만 오성대감의 진면목은 의리다, 의리! 전란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대북파로 분류됐던 문홍도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했다. 그러자 오성대감은 자신도 그 의견에 동조를 했다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영의정이었던 1600년에는 기축옥사(1589년)와 관련하여 성혼을 변호하다가 반대파들에게 정철 비호자로 몰렸고, 그래서 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렇듯 의리가 강했던 그는 인목대비 폐위(1617년)에 대해서도 반대하다 삭탈관직을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618년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돼 그곳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만다. 오성대감이 그렇게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5년 뒤, 광해군도 인조반정에 의해 퇴위당하고 유배길에 오르고 만다. 그러다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호젓하게 숲길트레킹을 하며, 오성대감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자신의 말을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게 뒤집어 버리는 정치인들, 그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오성대감이 사랑한 백석동천을 거닐며 날려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광해군과 연관된 유적지가 두 곳이나 있는 부암동 일대를 뒤로 하고, 역사트레킹 팀은 북악산 산책로로 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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