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만큼 답사여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도 드물 것이다. 5천 년에 걸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문화재가 국토 곳곳에 산재해있으니 답사여행에 ‘딱’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인프라가 갖추어져있다는 말이다.

사실 광활한 영토보다는 적당히 규모 있는 영토가 답사여행하기에는 더 낫다. 영토가 넓으면 그만큼 교통이나 숙박, 편의시설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수 백 킬로미터를 가야 겨우 마을을 만날 수 있는 곳에서는 답사여행이 원활이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높은 것도 답사여행이 활성화되는데 한 몫 했다. 역사와 문화에 목말라한 많은 소비자들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답사여행을 흥하게 하는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귀면: 오간수문에 조각되어 있다.

● 직접 가서 봐야지 그려볼 수 있다!

그럼 답사여행의 장점은 무엇일까? 텍스트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그 중 하나의 장점으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안에서는 읽어낼 수 없는 지식들을 답사여행을 통해서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곽과 같은 축조물들은 해당 유적과 함께 주위 사방의 지형을 함께 둘러보아야 그 진면목을 명쾌하게 인지할 수 있다.

가파른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성곽이 어떤 방면의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탐방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적들의 예상 침입로를 짐작해보고, 해당 성곽이 그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축조됐는지 나름대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도 있다.

이런 과정들은 역사책이나 위성지도 같은 텍스트로는 구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답사여행은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격언을 가장 잘 실천하는 행위인 듯싶다.

이번에 소개할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그런 격언에 잘 어울리는 답사 트레킹이라고 할 만하다. 그 길을 따라가면 탕춘대성은 물론 고려시대 마애불을 볼 수 있다. 또한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의 남사면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탕수육을 잘하는 중국집이 아닌, 방어용 산성이었던 탕춘대성! 그 길을 따라 걸어가 본다.





* 옥천암: 왼쪽 첫번째 건물이 백불이 모셔진 보도각이다. 홍제천이 바로 앞에 흐르고 있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상명대 옆쪽에 자리잡은 홍지문(弘智門)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울에는 큰 성곽이 두 개가 있다. 일명 서울성곽이라고 불리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바로 그것이다. 한양도성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동쪽의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을 둘러쌓아 축조한 것이다. 이 네 개의 산은 내사산이라 불린다. 안쪽에 있는 네 개의 산이란 뜻이다. 전편에서도 계속 언급을 했었다.

한양도성이 도읍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다면,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불릴 수 있다.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손꼽히는 요충지였다.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도 여러차례 북한산에 있는 산성을 수리·축조했다. 그만큼 북한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어 거점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룬 조선은 국방력 강화와 도성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1704년(숙종 30)부터 1710년까지 도성 성곽을 재정비했다. 또한 다음해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됐다.

약 8km 달하는 북한산성은 기공에서 완공까지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규모에 비해 무척 빨리 축조된 것인데 청나라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공사를 서둘러 완료시켰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의 축조와 수축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울성곽은 내사산을 둘러 만든 성이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있는 성이고. 그래서 두 성곽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두 성곽 사이가 좀 ‘붕 떠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보조성이 축성됐는데 그것이 바로 탕춘대성(湯春臺城)이다. 성이 세워진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湯春臺)가 있다하여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탕수육을 잘하는 중국집이 아니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약 4km에 걸쳐 연결한 탕춘대성도 1719년, 조선 숙종 시기에 만들어졌다. 인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성벽은 홍제천(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북한산 쪽으로 숨 가쁘게 비탈을 탄다. 그러다 북한산 서남쪽 비봉 인근에서 북한산성과 합류된다. 북한산 비봉은 진흥왕 순수비(555년 건립)가 있던 곳이다.






* 홍지문





●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이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트레킹팀 멤버 중에도 그렇게 오해를 하신 분이 계셨다. 이번 편에서는 예전 트레킹팀과 동행한 이야기들이 종종 언급될 것이다. 대화체로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북대문은 숙정문이라고 따로 있습니다. 홍지문은 북대문이 아니에요.”

한 번 더 이야기하지만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智’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이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다. 1921년에 있은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간 것이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만에 복원한 것이다.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 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오간수문과 홍지문: 오간수문 아래로 통행이 가능하다.





● 컬러풀한 부처님? 컬러풀한 보도각 백불!

앞서도 언급했듯이 홍지문 아래로는 오간수문이 있다. 최근에 산책로가 정비되어 그 오간수문을 직접 통과해서 걸을 수 있다. 수문은 홍예문, 즉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홍예문의 맨 위쪽 부분을 홍예종석이라고 부르는데 홍지문 오간수문에는 귀면이 장식되어 있다.

“저 아치의 꼭대기에 있는 돌에 괴상하게 장식된 것이 있죠. 저걸 귀면이라고 하는데 저는 편의상 치우천왕이라고 부릅니다.”

“저걸 왜 장식했어요?”

“물을 타고 들어오는 악귀가 저 괴상한 귀면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라고 그렇게 한 거죠?”

“풋, 정말 악귀가 도망갈까요?”

“글쎄요. 도망은 안 가도 한참 여기 서 있을 거 같아요. 무서운 거 같기도 하고, 웃긴 거 같기도 해서요. 절에 있는 사천왕을 생각해 보세요. 무서운데 우스꽝스럽잖아요.”

트레킹팀은 건강과 답사를 중시하는 ‘복덩이들’이기에 치우천왕의 보호(?)를 받으며 오간수문을 통과했다. 이제부터는 홍제천을 따라 걷는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이동을 하니 보도각 백불(白佛)을 만날 수 있었다. 정확한 명칭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인 보도각 백불은 지난 2014년 3월 11일에 보물 1820호로 승격했다.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불이 2014년에 와서야 보물로 승격됐다는 건 좀 늦은 감이 있다. 그 전에는 서울시지정문화재였다. 옥천암은 백불 바로 옆에 위치한 사찰이고, 보도각은 백불을 보호하기 위해 올린 기와 건물을 말한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이스턴 석상을 빰칠 정도로 큼직큼직한 석불들이 많이 등장하는 시기다. 발걸음이 많이 오가는 곳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던 석불들은 지나가는 이들의 수호신이자 이정표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석불들은 돌장승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됐다. 고려 전기시대에 유명한 석불들은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안동 이천동 석불, 파주 쌍미륵 등이 있다.

길이가 약 5미터에 달하는 보도각 백불도 홍제천을 따라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던 이들의 이정표이자 수호신 역할을 했다. 또한 많은 이들의 기도처이기도 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부처님과 달리 ‘화이트컬러’를 한 부처님인데 당연히 많은 이들이 왔겠지!

“그런데 왜 백불이에요? 흰색이 아닌데요. 회색인데요.”

“그렇죠. 화이트가 아니죠. 호분이라는 안료를 바른 건데요. 조개껍질에다 흰 색 성분이 섞인 안료로 바위에 칠을 했습니다. 목걸이나 팔찌, 보관들은 적색이고요.”

보도각 백불은 정확히 부처님 상도 아니다. 머리에 쓴 보관이 눈에 띄는 관음보살상이다. 부처상이 남성적인 면으로 그려졌다면 보살상은 여성적인 면으로 그려진다. 보관, 목걸이, 팔찌들에 색깔이 입혀져서 그런지 백불은 다른 보살상들보다도 더 여성적으로 보인다.

흰색이든 회색이든 무슨 상관인가? 또 부처상이든 보살상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건 거기에 거대한 돌장승 같은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고,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그네들은 잠시 시름을 달래며 기원을 드렸다는 점이다.

그렇게 컬러풀한 백불 아래 많은 이들이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 중에는 태조 이성계도 있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할 때쯤에 이곳에 와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트레킹팀도 각자 하나씩 기원을 올렸다. 무슨 기원을 드렸을까? 궁금해서 물어봤다.

“뭘 비셨어요? 로또 대박?”

사실 로또 대박은 필자의 기원이었다. 1편 선바위에서도 똑같이 빌었던 기원이었다.





* 보도각 백불




● 방치되어 있는 탕춘대성 암문


이후 트레킹 팀은 탕춘대성 암문을 향해 이동했다. 암문은 말 그대로 적 몰래 은밀하게 성 밖으로 나가는 출구이다.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고, 특공대를 파견하고, 식량을 조달하는 통로이다. 그래서 암문의 존재는 일급비밀이었다. 지도상에도 그려 넣지 않았다. 탕춘대성 암문은 한양도성 암문과 달리 좀 방치된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아직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탕춘대성 암문을 지난 후부터는 드문드문 북한산의 남쪽면이 나타난다. 북한산 남쪽면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보현봉이다. 북한산의 원래 이름은 삼각산인데 세 개의 봉우리가 삼각뿔 형태를 나타낸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 세 개의 봉우리는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인데 북한산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해 비해 보현봉을 위시한 비봉 등은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렇게 트레킹 팀은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의 남쪽면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북한산 남쪽 봉우리들이 진짜 손에 잡힐 거 같아요. 정말 멋지네요!”




* 탕춘대성 암문





● 현장에 답이 있다!


홍지문과 오간수문, 보도각백불, 탕춘대성 암문 등등...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마당바위 전망대까지.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답사패키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탐방한다.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교통카드 비용만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물을 만날 수 있는데다 숲길 탐방도 행할 수 있어 참 매력적이다. 전망은 또 어떤가. 트레킹이 마무리될 즈음에 방문하는 마당바위의 전망은 산과 도심지가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라 독특한 풍광을 선사한다. 마당바위에 앉아 포즈를 취하면 그것 자체가 인생샷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 사람들은 참 복 받은 사람들이다.


탕춘대성 역사트레킹 코스를 만들기 위해 필자는 그 인근을 수십 번씩 오갔다. 물론 사전답사는 숙명 같은 것이다. 10km 코스를 만들기 위해 100km 이상을 오가야 하는 것이 필자의 임무인 것이다. 갔던 길 또 가고, 또 갔다가 다시 고치고. 이런 식으로 수없이 발걸음을 하다 보니 결국 호평 받는 코스가 나오더라.


발바닥에 땀나도록 걸어 다녀야 제대로 된 결과물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말이다.


“현장에 답이 있다!”






*탕춘대성 성벽





■ 탕춘대성 역사트레킹


1. 코스: 홍지문(오간수문) ▶ 보도각백불 ▶ 탕춘대성 암문 ▶ 마당바위 ▶ 실록어린이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홍지문 / Out: 실록어린이공원 ☞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버스 탑승, 상명대 하차 / 실록어린이공원에서는 3호선 홍제역이 가까움.






* 탕춘대성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2019년 12월 12일 목요일.

올해의 마지막 트레킹 강의가 있었던 날이다. 뭐하느라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갔는지, 봄학기 개강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마무리를 해야하다니! 

내게 2019년도는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한 해였다. 

1. 60개 이상의 트레킹 코스 확정, 목표달성함.
2. 햄스트링 건염이 발생하여 병원 신세를 졌음.
3. 6년 만에 다시 여름 장기 여행을 실시함.
4. 커뮤니티 체제로 트레킹 강의를 진행함.
5. 산티아고 순례길을 또 갔음.

이렇게 작성하다보니 2019년을 그렇게 허투르게 보내지는 않은 듯싶다. 물론 가슴 한 구석에는 아쉬움이 한가득이다. 무언가 된 거 같지만 허허로운... 그런 감정? 뭐 그런 허허로움을 채우는 것도 내 몫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올 해의 마지막 트레킹은 홍은골 역사트레킹이었다. 3호선 홍제역에서 시작하는 이 코스는 탕춘대성을 따라 걷는다. 그렇게 탕춘대성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북한산 비봉이 한 눈에 보이는 구간까지 갈 수 있다. 

이 코스는 두드러지는 문화재가 없어 그냥 예비 코스로 잡았다. 탕춘대성이 있긴 하지만 눈에 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묵언 수행을 하면서 걷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홍은골 역사트레킹은 인공 전망대는 없지만 천연의 바위전망대는 두군데가 있다. 이곳에서 지난 1년 동안 함께 트레킹을 해왔던 분들의 사진을 찍어드렸다. 수려한 풍광 아래에서 미소를 띄우고 있는 그 분들의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내년에도 이런 멋진 미소들을 많이 보고 싶다. 그게 내 2020년의 소망이다!

2019년 한 해동안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가오는 2020년에는 더욱더 알차고 재밌는 트레킹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4월 4일 목요일


3월 14일부터 영등포 50플러스센터에서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강의를 진행합니다. 어라,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어디다 팔아 먹고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이 된 거죠? ^^; 그렇게 됐습니다...ㅋ
이번 이야기는 4강 인왕산성곽길 역사트레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벌써 종강이네요. 역시 4강짜리 특강은 시작과 동시에 끝나는 느낌입니다. 그런 아쉬운 마음 때문일까요?
인왕산 일대를 탐방하는 트레킹팀 앞에 개나리가 만개를 했습니다. 

사실 제가 인왕산을 얼마나 많이 탐방했겠습니까! 정말 수도 없이 탐방을 했었지요. 그런데 인왕산이 개나리 천지라는 걸 그날에서야 깨달았답니다. 정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개나리는 처음이었어요. 

지형의 영향도 있는 듯싶습니다. 우리는 서촌에서, 그러니까 수성동 계곡 방면의 인왕산에 익숙하잖아요. 그런데 인왕산성곽길 트레킹은 서촌 쪽이 아니라 반대편인 홍제동 방면으로 탐방을 한답니다. 그런데 홍제동 방면 인왕산에는 개나리가 집중적으로 심겨져 있더군요. 하여간 눈이 호강한 하루였답니다.

트레킹팀은 고려시대 마애불이 있는 환희사를 탐방한 후 탕춘대성이 지나가는 인왕산 기차바위에 올라섰습니다. 기차바위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서울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 북한산의 남쪽 면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봄꽃 때문에 눈이 호강하고, 기차바위에 올라 눈이 호강하고... 하여간 이날은 눈이 많이 호강한 날이네요...ㅋ
























지난 일요일 오후 1시 30분경.


경복궁역에 반가운 얼굴들이 모였습니다.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을 하기 위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카페 회원 분들이 모인 것이죠.


두 달 만에 다시 트레킹을 행하느라 제 마음도 좀 셀랬답니다. 여름 동안 답사는 많이 다녔어도 다시 프로그램을 행하려고 하니 좀 두근거렸답니다. 더군다나 이 날은 새로 제작한 우리 카페의 명찰과 깃발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날이었으니...ㅋ


경북궁역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몇 방울씩 빗방울이 내리더군요. 그래서 몇몇 분들은 우비를 준비하느라 급하게 다이소를 다녀오시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이후로는 비가 내리지 않았답니다. 다이소에 다녀오신 분들은 비상용 우비를 준비했다고 생각하심이...^^


트레킹팀의 첫 번째 탐방지는 탕춘대성과 홍지문이었습니다.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서로 연결하기 위한 익성이었습니다. 약 4km 정도 되는 성인데 도성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성이라고도 불렸답니다. 홍지문은 그 탕춘대성의 성문이었습니다. 성이 있으면 당연히 성문이 있어야 하잖아요. 성문이 없으면 그냥 성벽을 뛰어넘어야 했나... ㅋ


홍지문 옆으로는 사천이라고 불리는 홍제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탕춘대성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을 하지요.


"인왕산에서 내려온 성벽이 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북한산 줄기를 따라 급하게 올라갑니다."


홍지문 아래로는 오간수문이 있는데 트레킹팀은 오간수문 통과하여 홍제천을 따라 이동했습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이동을 하니 보도각 백불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보도각 백불! 한마디로 흰 부처님을 만난 것입니다. 보도각 백불은 자연 암반에 부처님을 새긴 것으로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답니다. 다른 마애불과는 달리 보도각 백불은 조개껍질에다 흰 색 성분이 섞인 안료로 바위에 칠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보도각 백불은 '백불'이지만 살짝 회색빛을 띄고 있답니다. 


이 백불은 예로부터 유명한 기도처 중에 한 곳이었습니다. 태조 이성계도 이 곳에서 기원을 많이 드렸습니다. 우리 트레킹팀도 각자 기원을 올렸습니다. 무슨 기원을 올렸을까요? 좋은 기원? 로또 대박? ㅋㅋㅋ


이후 트레킹팀은 탕춘대성 암문을 탐방했습니다. 탕춘대성 암문은 한양도성 암문과 달리 좀 폐허로 방치된 느낌입니다. 한편으로는 아직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고요.


트레킹은 계속됐습니다. 산책로가 좋다고 칭찬들을 많이 하시더군요. 리딩자로서 기분이 좋더군요...ㅋ


트레킹팀은 장군바위(?)에 올라서서 인생사진(?)들을 찍었습니다. 풍광이 너무 좋아 셔터를 누르면 바로 명품사진이 되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이 필요있겠습니까! 사진이 다 말을 해주는데!


그렇게 하여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잘 종료가 됐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함께 트레킹을 행한 것이 좋았고, 맛나게 저녁 식사를 한 것도 좋았습니다. 커피도 맛있었고요. 


이 맛에 트레킹 하는 것 같습니다~! 





일시: 2017년 8월 27일 

참가자: 우보님, 도토리님, 봄맞이님, 심스틸러님, 곽작가

이동거리: 약 8km

이동시간: 약 4시간






























안녕하세요?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시원한 수박 한 덩이가 생각나는 계절입니다. ^^;

더워도 트레킹은 계속됩니다. 덥다고 트레킹을 안 할 수가 있나요. 산이 있고, 숲이 있는데... 더군다나 여름은 치노치드가 다른 계절보다도 훨씬 더 많이 생산되는 시기이니까요. 그래서 여름숲이 좋은 거지요.

태양이 작렬하는 계절인 만큼 숲을 방패 삼아 움직인다면 여름 트레킹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떠납니다. 어디로?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을 하러요. 탕춘대성과 보도각 백불, 그리고 울창한 숲길까지... 역사와 숲길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환영합니다!!!












● 탕춘대성 역사트레킹

 
조선 숙종 시기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길이 4km의 성이 만들어집니다이 성을 두고 탕춘대성(湯春大城)이라고 불렀습니다성 이름이 중국집 이름 같나요인근에 탕춘대라는 돈대가 있다 해서 탕춘대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중국집 이름이 아니라...
 
성이 들어섰으니 성문도 있어야 했습니다그래서 생긴 것이 홍지문입니다인왕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탕춘대성의 성벽은 홍제천에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으로 그 형태를 달리합니다홍제천을 건넌(?) 이후에는 가파른 비탈을 타고 북한산 방면으로 향합니다.

홍지문에 서면 지형을 따라 오르는 성곽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답니다홍지문 탐방을 마친 트레킹팀은 옥천암에 있는 백색의 부처님을 만나게 됩니다백색의 부처님은 처음 보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백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합니다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합장을 하게 만듭니다슬쩍 시주함에 시줏돈을 넣게까지 합니다

처음 보는 백불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기도를 하실 생각입니까사업성공로또대박저는 역사트레킹에 참가하시는 모든 분들의 안전과 재미유익함을 위해 기도를 할 생각입니다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까요.  





 



















* 각자석: 한양도성은 공사실명제를 도입했다. 각 구간마다 책임자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 넣었다. 2015년에 복원된 흥인지문 북쪽 구간에 새겨진 각자들. 당시에 새겨진 글자를 본떠서 새로운 돌에 새긴 듯하다.

          









알고보면 더 재밌는 길, 서울성곽길


성돌에 맺힌 백성들의 피와 땀을 기억하며




17.04.10 11:12   최종 업데이트 17.04.10 11:12





             





    

        

      ▲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두고 걸으면 두 발이 아프다!"
 
한양도성, 즉 서울성곽을 두고 기자가 역사트레킹에 참가한 분들에게 했던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유명한 명언을 빗대서 저런 말을 했던 것이다.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서울성곽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서울성곽은 네 개의 산(낙산-인왕산-남산-북악산)을 연결해서 만든 방어용 시설이다. 지금처럼 성곽길 트레킹을 하라고 만든 관광 자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애초 목적이 방어용 시설이었기에 경사도가 급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목적의 산성으로 축성됐기에 경사도가 급하면 급할수록 방어력은 더 높아졌던 것이다. 물론 구간에 따라서는 아주 완만한 길도 있다.

어쨌든 산을 연결해서 만든 성곽이기에 한양도성을 걸을 때는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하다.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옆으로 메는 가방이 아닌 아웃도어 배낭을 준비하고, 생수와 행동식도 넉넉히 준비하고...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를 한 후 떠나야 더 알차게 서울성곽 트레킹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적인 준비뿐만 아니라 지식적인 준비도 해보자. 알고 떠나면 더 재밌는 성곽길 투어가 될 테니까.  




 ▲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500명 이상이 죽었다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도성을 쌓으라고 명한다. 그래서 1396년(태조5)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한양도성이 축성된다. 서울의 네 개의 산을 연결하여 만든 성곽은 그 길이가 무려 18.6km에 달했다. 49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18km가 넘는 성곽을 쌓았던 것이다.

그렇게 빨리 도성 축조가 가능했던 이유는 많은 백성들을 공사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약 11만 명이 넘는 인원이 현장에서 땀방울을 쏟아냈으니 50일도 안 되는 시기에 그렇게 엄청난 결과물을 도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한양 인구를 10만 명 남짓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징발된 인원수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조시기에 쌓은 성은 7할 이상이 토성(土城) 구간이었다. 돌이 아닌 흙으로 축성했으니 빠르게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성은 석성(石城)보다는 견고함이 떨어진다. 성체의 형상도 반듯하지 않고, 비바람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여장 같은 방어력을 증대시키는 시설을 설치하기도 어렵다.





* 탕춘대성: 탕춘대성의 성돌. 돌의 앞면부와 뒷면부가 다르다. 모양이 마치 사람 이빨처럼 생겼다. 뒷면부에는 잡석과 흙을 채워 성돌을 고정시킨다. 탕춘대성은 숙종 때 쌓은 성으로 북한산성과 도성을 연결하는 익성이었다.






* 탕춘대성: 탕춘대성은 숙종 때 쌓은 성이다. 사진 아래부분에 다듬어진 성돌을 보라. 숙종시기에 쌓은 성돌과 비슷하다.  







이런 단점들은 축성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문제시되었고, 도성을 수축하자는 의견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대규모의 수축은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나 이루어졌다. 1422년(세종4) 1월 16일, 태조 시기보다 훨씬 더 많은, 무려 32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대적인 도성 수축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작업을 이끈 최종결정권자는 당시 태상왕으로 있던 태종 이방원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백성들이 징발된 만큼 그때 수많은 인명들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공사 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네요. 전쟁 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인원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죠."
 
필자가 이런 설명을 하면 트레킹 참가자들은 십중팔구 무척 놀랬다.
 
"한편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은 자기 먹을거리를 자기가 준비해야 했습니다. 험한 공사에 징발된 것도 못마땅할 판에 자기가 식량까지 가져가야 했으니 아주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이런 설명을 하면 십중팔구 혀를 차며 어이없어했다.






        

▲ 성벽돌 정조 이후 양식이다. 성체의 위쪽 부분이 여장이다. 여장 하나를 '타'라고 부른다. 한 타에는 총 3개의 구멍이 뚫렸는데 가운데는 근총안, 양 옆에는 원총안이 뚫려 있다. 근총안에서는 가까운 적을 향해, 원총안에서는 멀리 있는 적을 향해 화포를 발사한다.







'사극왕' 숙종의 다른 모습

서울성곽의 대대적인 보수는 숙종 시기에 다시 이루어진다. 도성을 다시 쌓자는 의견은 숙종 즉위 초부터 개진되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 것은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숙종 30년(1704년)에 시작된 한양도성 다시 쌓기는 1710년까지 이어진다.

숙종은 그다음 해인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한다.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길이가 약 8km에 달하는 산성을 반년 만에 쌓게 한 것이다. 이렇게 '초스피드'로 북한산성을 쌓게 한 건 청나라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을 새로 쌓지도, 기존의 성을 보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양도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30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진행된 이유 중의 하나도 청나라의 감시 눈초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TV 속의 숙종은 항상 인현왕후, 장희빈과 함께 등장한다. 숙종 시기는 사극계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그는 '사극왕'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사극 프레임으로만 숙종을 바라보지 않았나? 한양도성의 대대적인 보수, 북한산성 축성, 이에 더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축성 등 숙종 시기에는 국방력이 크게 신장된다. 자신의 여인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만들었던 숙종이었지만 이렇듯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타 속의 고양이 '타'는 여장 하나의 단위를 말한다. 또한 여장과 여장 사이의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타에서는 주로 활로 공격을 했다. 사진속 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활을 쏘았다는 것이다.








후기로 갈수록 돌이 커졌고, 더 잘 다듬었다 

"여기 돌은 세종시기에 쌓았어요. 옥수수처럼 생겼죠? 아니 메주처럼 생겼나요?"
 
세종 때 쌓은 돌들을 보면 생긴 것은 옥수수처럼 생겼고, 크기는 메주 정도만 하다.
 
"여기 숙종 때 쌓은 돌들은 조선 전기 때보다 더 크죠. 전체적으로 더 매끈하게 떨어지고요."
 
숙종 시기에 쌓은 성돌은 세종 때에 쌓은 성돌보다 모양도 더 크고, 다듬기도 더 많이 다듬었다.
 
"이 큰 성돌들은 정조 이후에 쌓은 돌들입니다. 숙종 시기보다도 더 크죠?"
"이 돌들은 확실히 크네요. 이거는 딱 봐도 알겠네."



        

▲ 성돌 사진에서 오른쪽이 정조 이후의 양식이다. 사진 왼쪽 하단부 검은색을 띈 돌들은 세종 시기의 양식이다. 왼쪽 상단부와 오른쪽 여장은 근래에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정조 이후에 쌓은 돌들은 숙종 때보다도 훨씬 크고, 치석(治石)도 훨씬 더 세밀하다. 성돌과 성돌의 이가 잘 맞물려 빈틈이 작다. 빈틈이 작다는 것은 그만큼 빗물이 침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치석은 한자어 그대로 '돌을 간다'는 말이다.
 
"맞습니다. 저 성돌은 확실히 눈에 띄죠. 크니까."
"적어도 정조 이후 성돌들은 잊어버리지 않겠네요."
"저렇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돌이 커진 건 방어력을 높이려고 그랬던 거죠. 화포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려고요.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이 홍이포라는 대포로 남한산성을 공격했는데 그걸 교훈 삼아 성돌들을 더 크게 만든 것이죠."

 
이렇게 정리가 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돌의 크기가 커지고, 치석의 강도도 세진다. 왜? 당시 세계는 대포로 성벽을 부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포 공격을 이겨내려면 성돌을 대형화시켜야 했고, 대형화된 성돌을 이가 잘 맞물리게 쌓으려면 치석을 잘해야 했다.
 
"두 가지를 알면 훨씬 더 재밌게 성곽길 탐방을 할 수 있어요. 후기로 갈수록 돌이 커진다. 돌을 다듬는 정밀도도 높아진다. 이 두 가지요."


성돌을 시기별로 구분할 줄 모른다고 해도 성곽길을 걷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왕 하는 성곽 순성길이라면 좀 알고 가면 좋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서울성곽도 아는 만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서울성곽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 속에는 일반 백성들의 땀방울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성돌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 그런 피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순성놀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성벽을 쌓았던 이들의 노고를 잊지 않으며 성곽길을 걷는 것도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한다.




 * 훼손부분: 서울성곽의 훼손부분. 한 빌라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 중에서.











덧붙임

지난 3월 21일,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무산됐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아래 이코모스)는 한양도성을 대상으로 패널심사를 진행했는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등재 불가'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부득이하게 철회하며, 2020년 등재로 목표 수정을 했다고 밝혔다.

이코모스의 결정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양도성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납득이 안 된다. 한양도성은 자연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방어력을 극대화시킨 성으로 평지에 축성된 다른 나라 성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협의회의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넘치겠지만,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꼼꼼히 챙겨 2020년에는 꼭 등재에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2020년 서울성곽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원하며...



역사트레킹 카페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














서울성곽은 숙종 시기에 대대적인 보수를 한다. 도성을 다시 쌓자는 의견은 숙종 즉위 초부터 개진되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 것은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숙종 30(1704)에 시작된 한양도성 다시 쌓기는 1710년까지 이어진다.


숙종은 그 다음해인 1711,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한다.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길이가 약 8km에 달하는 산성을 반 년 만에 쌓게 한 것이다. 이렇게 초스피드로 북한산성을 쌓게 한 건 청나라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을 새로 쌓지도, 기존의 성을 보수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양도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30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진행된 이유 중의 하나도 청나라의 감시의 눈초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TV 속의 숙종은 항상 인현왕후, 장희빈과 함께 등장한다. 숙종 시기는 사극계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그는 사극왕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사극 프레임으로만 숙종을 바라보지 않았나?


한양도성의 대대적인 보수, 북한산성 축성, 이에 더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축성 등 숙종 시기에는 국방력이 크게 신장된다. 자신의 여인들을 들었다 놨다하며,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만들었던 숙종이었지만 이렇듯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기짱이었던, 북악산 역사트레킹!

호감도 높았던 북악산 역사트레킹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라는 속담처럼, 제게 역사트레킹 코스 하나하나는 모두 다 보배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달랐습니다. 유난스럽게 참가자들이 환영하는 코스가 몇몇 있었습니다. 그런 코스들은 아름다운 풍광과 풍부한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화에 소개할 북악산 역사트레킹도 참가자들이 크게 선호했던 코스 중에 하나입니다. 모객을 하기가 무섭게 매번 조기마감이 됐으니까요. , 그럼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하러 떠나볼까요? 진짜 인기 있는 코스가 맞는지 확인해 볼까요?

 


 



* 탕춘대성 성벽.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상명대 옆쪽에 자리잡은 홍지문(弘智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서울에는 큰 성곽이 두 개가 있습니다. 일명 서울성곽이라고 불리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바로 그것이지요. 서울성곽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동쪽의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을 둘러쌓아 축조한 것입니다. 이 네 개의 산은 내사산이라고 불립니다. 안쪽에 있는 네 개의 산이란 뜻이죠.


서울성곽이 도읍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다면,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손꼽히는 요충지였습니다.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요. 고려시대에도 여러 차례 북한산에 있는 산성을 수리·축조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북한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어 거점이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시기에 축조된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룬 조선은 국방력 강화와 도성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1704(숙종 30)부터 1710년까지 도성 성곽을 재정비했습니다.





* 홍지문





또한 다음해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조하기에 이릅니다. 8km 달하는 북한산성은 기공에서 완공까지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규모에 비해 무척 빨리 축조된 것인데 청나라가 간섭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공사를 서둘렀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의 축조와 수축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서울성곽은 내사산을 둘러 만든 성입니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있는 성이고요. 그래서 두 성곽 사이에는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두 성곽 사이가 좀 붕 떠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간극을 메울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축조된 것이 바로 바로 탕춘대성(湯春臺城)입니다. 성이 세워진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湯春臺)가 있어서 그렇게 명명된 것입니다.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성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약 5km에 걸쳐 연결한 탕춘대성도 1719, 조선 숙종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인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성벽은 홍제천(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북한산 쪽으로 숨 가쁘게 비탈을 타고 올라갑니다. 그러다 북한산 서남쪽 비봉 인근에서 북한산성과 합류합니다. 북한산 비봉은 유명한 진흥왕 순수비(555년 건립)가 있던 곳입니다.

 

 





* 홍지문. 성벽이 잘려나간 홍지문.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입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중에도 그렇게 오해를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아닙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입니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입니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가지고 있습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입니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입니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습니다. 1921년에 있은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갔던 것입니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습니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만에 복원을 한 것이지요.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 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 세검정. 옆으로 사천이 흐르고 있다.






 

이항복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 계곡

 

다음 탐방지는 백사실 계곡입니다.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이전까지 들리는 소음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길이 탐방객들을 반겨줍니다. 백사실 계곡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도롱뇽 서식지가 있는 곳입니다. 그만큼 수질이 맑다는 뜻이겠죠. 그렇게 청정함을 자랑(?)해서 그런지 멧돼지도 가끔 출몰하는 것 같습니다.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인상적이더군요.


사실 백사실 계곡은 실개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유량이 적다는 겁니다. 저는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계곡다운 면모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백사실 계곡을 방문하고 실망한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대성동이나 천불동 계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게는 분명 아쉬운 대목이겠지요





* 북악산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백사실계곡 숲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백사실 계곡은 숨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울창한 숲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울 종로에 이렇게 걷기 편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랍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벤치도 여러 개 갖춰져 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입니다. 숲길 한편에 자리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습니다. ‘백석백악을 뜻합니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 백석동천: 별서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석동천이라는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산 산책로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9월에 완공됐습니다. 이 도로는 그해 121일에 있었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습니다. 서울방어목적으로 개통됐던 것입니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습니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사산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까지도 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악산 팔각정입니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입니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위치를 이동을 하여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겁니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죠.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60~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습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한편 북악산 산책로는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과는 좀 다릅니다.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이 동서로 이어졌다면 산책로는 남북으로 연결됩니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습니다.

 


 



* 북악산 역사트레킹팀. 북악산 팔각정에서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는 트레킹팀. 백사실 사진에 등장한 팀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만해 한용훈이 싫어한 돌집은 사라졌지만...

 

마지막 탐방지는 성북동입니다.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이 트레킹의 종료점입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심우장은 남향으로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남향으로 하면 돌집을 봐야하기에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것입니다. 돌집은 조선총독부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집짓기의 기본까지 어겨가며 그렇게 하셨을까요?


만해선생이 그렇게 보기 싫어했던 돌집’, 그 조선총독부는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뿌려놓았던 식민 잔재들까지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요?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만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요?

 

심우장 탐방을 끝으로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보셨습니까? 매번 조기마감이 된 이유가 이해가 되셨는지요? 이해가 안 되셨다면 이번 주말에 당장 배낭을 꾸려서 떠나보세요. 직접 걸으면서 판단해주시길!

 




 

* 뮤지컬 심우. 심우장에서 뮤지컬 심우를 야외극 형식으로 공연하고 있었다. 2014년 가을경에 촬영한 사진임.






 

북악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홍지문 세검정 백사실계곡 북악산팔각정 북악산산책로 심우장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홍지문과 역사적 상상력

 

 

 

 

 

 

 

홍지문 현판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 근방에는 역사적인 명소가 많다. 유명한 백사실 계곡에는 오성 이항복 대감의 별서 터가 있고, 너럭바위가 펼쳐진 세검정은 광해군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꿈틀대고 있다. 또, 흥선대원군의 별서 터도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창의문 밖에는 홍지문도 있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인데 역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다. 일단 홍지문과 탕춘대성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탕춘대성을 새로 나온 ‘중국 음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

 

 

 

홍지문과 오간수문

 

 

 

 

탕춘대성과 홍지문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주는 보조 성으로 지어졌다. 한양도성은 조선 초기시대에 축조된 것에 비해 북한산성은 후기인 숙종 때 만들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정묘호란을 통해 처참한 피해를 입었던 조선은 한성 방어를 위해 성곽들을 정비하게 됐고, 그렇게 하여 북한산성이 완공되기에 이른다.

 

이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길이 4km의 성이 만들어졌으니, 이 성을 두고 탕춘대성(湯春大城)이라고 불렀다. 탕춘대성의 이름은 성곽이 자리 잡은 곳 인근에 탕춘대라는 돈대를 따라 지었다고 한다. 축조 된 순서를 정리해보면 ‘한양도성(조선 초기) ▶ 북한산성(조선 후기) ▶ 탕춘대성(조선 후기)’ 순이다.

 

홍지문은 그런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비록 4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성이었지만 탕춘대성도 있을 건 다 있는 성채였다. 홍지문 옆으로는 홍제천이 흐르기에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만들어졌다.

 

 

 

홍지문과 북한산 방면의 성벽. 수풀이 무성하지 않은 계절에 가야 성벽을 관찰할 수 있음.

 

 

 

 

상상력으로 홍지문 성벽을 ‘복원’ 해보자!

 

 

지금의 홍지문은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1921년 홍제천이 범람하여 홍지문을 비롯한 오간대수문을 싹 다 쓸어버리고 간 걸, 1977년에 복원했다. 하지만 복원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왕산 방면의 성벽이 훼손이 됐고, 그 위로는 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지문의 한쪽은 단절되어 있고, 그 옆으로는 지금도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고 있다.

 

 

 

경사가 급격한 인왕산 성벽

 

 

 

역사책으로 해보는 상상력은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래서 역사적 상상력은 현장에 있을 때 가장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다. 그런 역사적 상상력을 홍지문 앞에서 발휘해보자. 자동차들을 지워버리고, 도로도 걷어내보자. 그런 후에는 끊어진 성벽을 이어보자. 인왕산에서 급하게 내려온 성벽이 북한산 방면으로 또 급격하게 오를 수 있게 홍지문의 끊어진 성벽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복원’해 보자.

 

이런 것도 하나의 재미다. 이런 재미가 있기에 서울 역사탐방은 언제나 필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끊어진 곳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다!

 

홍지문, 동십자각, 광희문... 이 건축물들은 왜 끊어졌을까

 

 

15.04.03 11:15  최종 업데이트 15.04.03 14:58

 

 

 

 

 

 

 
▲ 홍지문 끊겨진 성벽 위로 도로가 닦였고, 그 위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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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언가를 항상 연결하고 이으려고 한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려고 길을 닦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과의 인맥을 다시 잇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연결과 이음은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와 달리 끊김은 회피하려고 한다.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한강 다리가 끊겨 수많은 피난민이 수장되었다. 상호 간에 왕래가 끊겼다는 것은 서로 소원해 졌다는 뜻이다.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건축물이 끊겼다는 건 좋은 뜻이 아니다. 그 정체성이 훼손되어 원래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런 '끊어진 건축물'들을 소개해보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다.

 

 



 
▲ 동십자각 도로 위에 섬처럼 떠있는 동십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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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처럼 떠 있는 동십자각


광화문에서 동쪽, 삼청동 방면으로 가다보면 누각 하나가 '껑뚱'하게 떨어져 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광화문 인근이라서 그런지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그 앞을 지난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대형 버스들도 많이 지나간다. 도로 한복판에 툭 튀어 나온 누각을 보고 있다 보면 마치 도로 위에 섬이 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도로 한복판에 외떨어져 나온 누각은 동십자각이다.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동쪽의 방위 초소 역할을 했던 곳이다. 보통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것을 지칭한다. '궁'은 말 그대로 궁이다.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올려놓은 것을 말한다. 이 둘을 합쳐 '궁궐'이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궐'이 없다면 궁궐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궁이라고 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동십자각, 서쪽으로는 서십자각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춘 것이었다. 즉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의 위상을 궐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현재 동십자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담벼락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 왜 지금처럼 끊겨 있는 걸까? 일제에 의해 끊기게 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남쪽 담벼락을 다 헐어버렸다. 그리고 광화문도 원래 위치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쪽으로 옮겨버렸다. 지금의 민속박물관 부근이다. 돌담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철책선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구한말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십자각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단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한편 동십자각은 감시초소였던 만큼 그 역할은 무척 중요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인 자객들도 동십자각을 점령한 후 경복궁 내부로 진입했다.

그래도 동십자각은 서십자각보다는 상황이 더 낫다. 서십자각은 아예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 사이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는데 그때 서십자각을 철거했던 것이다. 멀쩡한 광화문을 옮겨버리고, 담장을 헐고, 누각도 철거시키고... 그러고 보면 일제도 반달리즘을 저지른 셈이다. 반달리즘은 로마의 유적들을 파괴했던 반달족들의 반문명적인 행위를 빗댄 명칭이다.

 

 

 


홍지문을 보며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다

 


조선시대의 도성 방어는 이중 방어 형식을 띠었다. 1차 방어라인은 내사산(북악산-낙산-목멱산-인왕산)이었고, 2차 방어라인은 외사산(북한산-아차산-관악산-덕양산)이었다. 조선 초기, 내사산에는 한양도성이 축조되어 그 방어력을 더 배가시켰다.

이후 숙종 시기에 북한산성의 축조로, 한성 북쪽 지역은 이중방어 체제가 더 공고해졌다. 여기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길이 4km의 성이 만들어졌으니, 이 성을 두고 탕춘대성(湯春大城)이라고 불렀다. 탕춘대성은 성곽이 자리 잡은 곳 인근에 탕춘대라는 돈대가 있어 탕춘대라고 명명됐다고 한다. 탕춘대는 지금의 세검정 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해 있다.

 

 



 
▲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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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들어섰으니 성문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홍지문이다. 인왕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탕춘대성의 성벽은 홍제천에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으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 홍제천을 건넌(?) 이후에는 가파른 비탈을 타고 북한산 방면으로 향한다.


앞서 탕춘대는 돈대라고 언급했다. 돈대는 경사면을 자르거나, 혹은 채워서 평평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돈대는 주위를 관망하기에 좋다. 그래서 주로 군사시설에 쓰였다. 하지만 탕춘대는 유희 공간으로 쓰였다. 연산군이 세웠던 탕춘대는 앞으로 홍제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는 북악산이 위치해 있으니 놀기(?)에 적당한 곳이었을지 모른다.    

홍지문은 동십자각과는 달리 자연재해를 입어 '끊기게' 됐다. 풍유를 즐기게 해주었던 홍제천이 범람하여 홍지문을 비롯한 오간대수문을 싹 다 쓸어버린 것이다. 그때가 1921년이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이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건 1977년이었다. 56년 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다시 그 자리를 찾은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50년이면 세상이 5번이나 바뀔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홍지문은 복원이 됐지만 인왕산 쪽의 성벽은 단절되었다. 그 위로 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늘도 홍지문 옆으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나마 옛 모습을 복원해본다. 그 자동차들을 제거하고, 아스팔트도 들어내 본다. 그리고는 그 위로 성벽을 연결하여 끊어진 구간을 연결시켜 본다.

 

 



 
▲ 광희문 도심의 확장으로 인해 '끊겨진'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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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확장으로 '끊긴' 광희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위치해 있는 곳에서 신당동쪽으로 살짝 코너를 돌면 광희문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 중에는 간간이 광희문(光熙門)과 광화문(光化門)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광희문'과 '광화문'의 한글 명칭에도 차이가 있듯, 이 두 문은 전혀 다른 개념의 문이다. 광화문은 동십자각 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경복궁의 정문이다. 궁궐의 대문(大門)이라는 말이다. 이에 비해 광희문은 소문(小門)이다.

도성에는 사대문 이외에도 작은 문 4개를 만들었는데 이를 사소문이라고 하였다. 광희문은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 사이에 있다하여 남소문이라 불리기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흥인지문 쪽에 훨씬 더 가깝게 위치해 있다. 그래서 광희문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동대문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빛나는 빛의 문'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었다. 그래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다. 광희문을 나선 장례 행렬은 지금의 신당동과 왕십리로 이어졌는데, 그곳에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광희문 2014년 2월, 39년 만에 광희문이 개방됐다. 그 전에는 낮은 철책이 쳐져서 문 안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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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크게 훼손됐다. 현재의 광희문은 1975년에 복원된 것인데 원래 위치보다 남쪽으로 15미터 가량 떨어져 세워졌다. 도로 확장 때문에 제자리에서 벗어나 복원된 것이다.


이와 같이 광희문의 '끊김'은 서울의 확장과 연관이 있다. 도심지가 확장될수록 성벽이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성벽 위로는 도로가 닦였다. 집이 지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운동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제까지 '끊어진' 것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끊어진' 것들을 알아봤으니 이제는 연결을 해보자. 무엇으로? 역사적 상상력을 이용해서.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3D를 그려내어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보는 것이다.

 


"머리가 돌처럼 굳어 상상력이 떨어졌다고요? 그럼 현장에 가보세요. 유적 앞에서면 없던 상상력도 자연스럽게 떠오를 겁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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