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리파성: 타리파성에서 해안가 방면의 모습. 왼쪽 상단에 또다른 성이 하나 있다. 산타카탈리나성이다.

 

 

 

<재미난 스페인 3편> 타리파

땅끝마을에 해적이 나타났다!

 

"당연한 말인데요, 서울에도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있어요. 우백호는 인왕산이고, 좌청룡은 낙산입니다. 낙산공원으로 유명한 그 낙산이에요. 남주작은 관악산이고, 북현무는 북한산입니다. 좌청룡우백호가 서울 안쪽에 위치한다면, 남주작북현무는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죠. 그렇게 각각의 방위를 지키는 네마리 동물을 사신수라고 부릅니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강의를 할 때 종종 저런 설명을 했었다. 서울의 공간적인 면을 알기 위해서는 서울의 동서남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신수와 함께 언급을 하면 흥미를 유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학습효과는? 그게 참 쉽지가 않다. 필자가 열심히 지도를 그리는 이유가 있다.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타리파(Tarifa)라는 곳에 갔는데 이곳이 스페인의 남쪽 땅끝마을이었다. 예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피스테라라는 곳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스페인의 서쪽 땅끝마을이었다. 여차저차해서 스페인의 남쪽과 서쪽의 땅끝마을을 탐방했던 것이다. 기왕이렇게 된 거 스페인의 동서남북을 땅끝에 초첨을 맞춰서 알아보았다. 사신수는 없어도 땅끝마을은 존재하니까.

일단 피스테라(Fisterra)부터 좀 더 살펴보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들은 피스테라(Fisterra)에 대해서 잘 아실 것이다.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서쪽 땅끝으로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다. 북쪽 땅끝은 바레스(Bares)라는 곳으로 피스테라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다.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바레스와 피스테라는 둘 다 갈리시아 지방에 속한다. 동쪽 땅끝은 크레우스(Creus)라는 곳이다. 정확히는 크레우스(Cap de Creus)곶인데 바로셀로나에서 북동쪽으로 약 160km 정도 떨어져 있다.

여기서 용어 정리를 해보자. 바다쪽으로 땅이 많이 튀어나온 지형을 두 가지로 나눠서 부른다. 크게 튀어나오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곶(串)'이 된다. 포항의 호미곶을 생각하시면 된다. 북한쪽에는 백령도와 마주하고 있는 장산곶이 유명하고 유럽쪽에서는 포르투갈의 호카곶이 유명하다. 호카곶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맨 끝지점이다. 포르투갈의 서쪽 땅끝마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곶은 영어로는 케이프(cape)로 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cape town)은 직역하면 '곶마을'이 될 거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서는 카보(cabo)로 쓰는데 바로셀로나가 속해 있는 까딸루냐에서는 캅(cap)으로 적는다.

 

 

 

* 타리파섬: 흰색 등대가 보이는 곳이 타리파섬이다. 그 앞으로 타리파항이 있다. 모로코에서 출항한 배가 입항하고 있다.

 

 

 

다시 스페인 남쪽 땅끝마을인 타리파(Tarifa)에 대한 이야기다. 타리파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카디스주에 속해 있는 도시다. 앞으로 지브롤터해협이 펼쳐져 있고, 그 건너로 북아프리카 모로코땅이 보이는 곳이다. 지브롤터에서 봤던 풍광하고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북아프리카가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보일 정도였다.

한편 타리파라는 지명은 711년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한 무어인 장군인 타리크 이븐 말릭(Tarif ibn Malik)의 명칭에서 나온 것이다.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떠나 가장 먼저 도달한 곳에 타리크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렇듯 무어인들의 지배를 가장 오랫동안 받은 안달루시아 지방은 곳곳에 무어인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타리파에는 구즈만 엘 부에노(Castillo de Guzman el Bueno)라고도 불리는 타리파성이 있다. 스페인어로 성을 카스티요(Castillo)라고 부른다. 워낙 스페인에 성이 많으니 앞으로도 '카스티요'에 대한 언급이 많을 것이다.

타리파가 스페인의 땅끝인만큼 타리파성은 스페인의 가장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성이기도 하다. 북아프리카 모로코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5km 정도에 불과할 정도다.

타리파성은 960년에 무어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문명에 십자로상에 놓여 있다보니 타피라성은 지정학적으로 역사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앞서 언급한 구즈만 엘 부에노도 그런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1294년에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무어인들까지 끌어들여 왕위를 쟁취하려고 했다. 레콩키스타, 즉 국토회복전쟁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때 구즈만 엘 부에노가 지키고 있던 타리파성이 격전지가 됐는데 반란군들은 성을 포위하며 항복을 요구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반란군들은 구즈만의 아들을 포로로 잡고 있었고,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아들을 죽인다고 협박했었다.

 

 

 

*구즈만 엘 부에노상: 단검을 들고 있다.

 

 

 

이에 구즈만은 반란군측에 단검을 던지며, 그 단검으로 아들을 죽이라고 말했다. 아들이 아닌 국가를 선택한 것이다. 읍참마속보다도 더한 일이지 않은가? 만약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떤 판단을...?

타리파성에 올라가면 타리파항이 바로 앞에 보인다. 타리파항에서는 모로코에 있는 탕헤르로 향하는 여객선을 탈 수 있다. 타리파항 너머로는 흰 등대가 우뚝 서 있는 타리파섬이 보이는데 육지와 워낙 가까워 이곳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타리파섬은 이베리안반도의 최남단이자 유럽의 최남단이기도 한다. 여러모로 의미가 큰 섬이지만 필자가 갔을 때는 쇠사슬로 문이 잠겨있었다. 알고보니 몇 년째 문이 잠겨 있다고 했다.

한 때 타리파섬은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비좁은 지브롤터해협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만큼 해적질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약탈한 보물이 캐리비언 해적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면 타리파섬의 해적들은 통행세를 챙겼다. 어차피 길목을 차단하면 두고두고 보호비(?)를 뜯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캐나다 출신 역사학자 데이빗 데이는 자신의 저서인 <Smugglers and Sailors: The Customs History of Australia 1788-1901>(밀수업자와 선원: 호주의 관세 역사 1788~1901)에서 관세(tariff)의 어원이 타리파섬의 해적행위에서 기원한다고 언급했다. 15세기 이후 아메리카 및 인도로 가는 신항로가 개척되자 지중해 무역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힘의 무게를 쏟게 된다. 지브롤터 인근 해역에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해적들이 신날 일이었다.

해적들이 물러간 타리파는 현재 서핑족들의 천국이 되었다. 여름이면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서핑족들로 물반서핑족반이라고 할 정도다. 로스란세스 해변이 그 중심인데 대서양의 거친 파도가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서핑족들이 보기에는 물질하기 딱일 듯싶었다.

수영복도 없고 해서 필자는 그냥 모래사장을 걸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무언가가 씻겨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바람을 해남 땅끝탑에서도 맞은 적이 있었는데 바람을 맞으며 무언가 다짐을 했었다. 그 다짐들이 잘 이루어졌을까?

 

 

 

* 타리파성

 

 

 

 

* 유럽의 최남단: 타리파는 스페인의 땅끝이자 유럽의 최남단이기도 하다. 더 가고 싶어도 더 나아갈 수가 없다.

 

 

 

* 스페인의 동서남북 땅끝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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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브롤터암벽: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재미난 스페인 2편> 지브롤터

신화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먹방적 상상력!

 

 

지브롤터 VS 세우타

둘 중 어느 곳이 더 익숙한가? 당연히 지브롤터일 것이다. 지브롤터해협이란 지명이 워낙 유명하니까. 이에 비해 세우타는 새우탕과 발음만 비슷하지 처음 접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세우타보다는 지브롤터를 앞세우는 것이 맞다. 하지만 본 매거진의 명칭이 명색히 <재미난 스페인>이 아닌가? 아무리 인지도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하더라도, 스페인 땅이 아닌 지브롤터를 앞쪽에 배치할 수가 없었다.

세우타가 모로코 땅에 있는 스페인령 비지라면, 지브롤터는 스페인 땅에 있는 영국령 비지이다. 지브롤터는 우뚝 솟아있는 암벽이 인상적인데 이를 두고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칭한다. 이외에도 '자발 타리크'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타리크의 산'이라는 뜻으로 지브롤터의 어원이 됐다.

지브롤터에서 건너편 아프리카까지는 채 20km도 되지 않는다. 폭이 협소한 지브롤터해협을 두고 북쪽으로는 지브롤터, 남쪽으로는 세우타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런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고대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1700년, 스페인왕 까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1700)가 사망한다. 그는 4살에 재위에 올랐는데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왕위를 이을 자식도 없었다. 카를로스 2세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공 펠리페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루이 14세는 카를로스 2세의 매형이었다. 유명한 펠리페 2세를 포함한 16~17세기 스페인왕들은 합스부르크 혈통이었지만 이제 부르봉 왕가로 왕위가 넘어갈 판이었다.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든 태양왕 루이 14세! 루이 14세의 혈통이 스페인땅도 통치할 기세였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황제의 아들인 카를 대공이 왕위 계승권을 요구했다. 레오폴트 황제도 역시 카를로스 2세의 매형이었다. 정리하자면 첫번째 누이는 루이14세, 두번째 누이는 레오폴트 황제에 시집을 간 것이다. 어쨌든 프랑스가 더욱더 강성해지는 걸 두려워한 유럽의 주요국들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를 두고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1701년부터 1714년까지 이어졌다.

 

 

 

 

* 넬슨제독상: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스페인-프랑스 함대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웠다. 트라팔가 해전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아니라 나폴레옹과의 전쟁 중(1805년)에 벌어졌다. 트라팔가와 지브롤터는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영국은 어느 편에 섰을까? 프랑스-스페인 연합의 반대편에 섰다.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1704년에 영국은 지브롤터를 점령하게 된다. 유럽을 뒤흔든 전쟁은 1714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인해 일단락 됐고 스페인은 큰 영토의 손실을 입게 됐다.

왕위는 어떻게 됐을까?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공이 스페인왕 펠리페 5세가 됐다. 대신 프랑스왕을 겸임할 수 없다는 조건이 걸렸다. 루이 14세가 간절히 원했던 프랑스와 스페인이 결합되는 연합왕국은 탄생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때부터 스페인 왕실은 부르봉 왕가가 된다.

가까이에서 바라다보니 지브롤터 암벽은 삼각뿔 형태로 암반면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인왕산 역사트레킹이 생각났다.

"인왕산 치마바위쪽을 보세요. 암반면이 잘 노출됐죠? 계속 보시다보면 에너지 넘치는 돌산의 기운이 느껴질 겁니다!"

강의에 집중시키기 위해 저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오히려 더 떠들썩해졌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돌산의 강한 기운 때문인가? 이곳 지브롤터는 세우타와 함께 헤라클레스(Heracles)가 괴력을 발휘했던 곳이다.

힘의 상징인 헤라클레스는 서양에서는 허큘리스라고도 불린다. 그는 제우스가 바람을 펴서 낳은 아들이라 제우스의 정실 부인인 헤라의 시기를 태어날 때부터 받게 된다. 헤라의 저주는 헤라클레스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는데 급기야는 그가 광기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다. 미쳐버린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손으로 부인과 아이들을 죽이고 만다.

처자식을 죽인 죄를 씻기 위해서 그는 12가지 과업을 이행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서쪽 바다에 있는 에리페리아라는 섬에 가서 게리온의 소를 빼앗아 오는 것이었다. 게리온은 머리가 3개, 몸통도 3개인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하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게리온이 사는 에리페리아는 가기도 험난했다. 가는 길목에 험준한 아틀라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헤라클레스의 괴력이 발휘된다. 아틀라스 산맥의 산줄기를 지워버린 것이다. 이때 바다를 막고 있던 산맥이 둘로 갈라지면서 새로운 바닷길이 열린다. 그 바다가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지브롤터해협이었다. 둘로 갈라진 산 기둥은 하나가 유럽쪽 지브롤터이고, 또 하나가 아프리카쪽 세우타이다. 그 두 기둥은 스페인 국기에도 그려져 있다.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을 때려잡았고, 그의 소를 끌고 갔다. 이후 나머지 과업들도 잘 마무리했는데 죽어서는 승천하여 올림포스의 신이 된다.

 

 

 

* 지브롤터 헤라클레스 기둥: 세우타에 있는 기둥상보다 못하다.

 

 

 

한편 그리스 신화를 통해 옛 그리스인들의 지리적 세계관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들은 서쪽으로는 아틀라스 산맥, 동으로는 캅카스 산맥까지를 인식 범위로 두고 있었다. 캅카스 산맥은 코카서스 지방에 있는데 그곳에는 프로메테우스가 있다고 전해진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줘 제우스의 미움을 사게 됐고, 벌로 독수리에 의해 심장이 쪼이는 형벌을 받게 된다. 나중에 헤라클레스가 그 독수리를 때려잡아 프로메테우스를 자유롭게 해 준다.

아틀라스 산맥에는 아틀라스가 우주를 떠받드는 형벌을 받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과업중에 아틀라스의 딸들이 지키는 황금사과를 얻어오라는 과제가 있었다. 이에 아틀라스는 우주를 떠받드는 일을 잠시 헤라클레스에게 맡기고 황금사과를 얻어온다.

케이블카를 타고 지브롤터 암벽 정상부에 올라섰다. 푸른빛의 지중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왜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인지 알 수 있었다. 바다건너 북아프리카 모로코가 보였다. 스페인령 세우타도 보였다.

모로코가 세우타의 반환을 요구하듯이 스페인도 지브롤터의 반환을 요구한다. 프랑코 정권 시절인 1969년에는 경제적 고립을 노리고 국경을 봉쇄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은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2002년에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영국령 잔류에 대한 비율이 98%가 나왔다. 지브롤터 주민들은 스페인의 정치적 혼란, 경제적 불확실성을 이유로 들어 잔류에 표를 던진 것이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있던 지브롤터 갈등이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말하는 브렉시트로 다시 부상했다. 지브롤터 주민들은 본국과는 달리 95%가 유럽연합 잔류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공동주권을 주장하며 'EU 잔류'를 회유책으로 제시했다. 영국정부는 당연히 반발했다.

스페인 땅에 있는 영국령 지브롤터에서 모로코 땅에 있는 스페인령 세우타를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든다. 자신의 기둥이 박힌 두 도시가 모두 영유권 분쟁에 휩싸여 있다니! 헤라클레스는 어떤 느낌을 가질까? 이건 신화적 상상력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일일테지...

답사를 열심히했더니 배가 고프다. 지브롤터 암벽이 삼각김밥처럼 보인다. 신화적 상상력은 빈약하더라도 먹방적 사고가 넘쳐나는 순간이다.

 

 

 

* 지브롤터해협 일대 지도

 

 

 

 

* 헤라클레스기둥: 세우타항 방파제에 있다. 왼쪽에 바다 건너 봉우리 두 개가 보인다. 지브롤터다.

 

 

 

<재미난 스페인 1편> 세우타

매운맛일줄 알았는데 섞인맛이었네!

 

'세우타? 새우탕이 아니고?'

처음 세우타(Ceuta)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의 반응이었다. 평소에 워낙 새우탕 사발면을 좋아해서 저런 반응이 나온 것이다. 입맛을 다시며 스페인이 포함된 이베리아 반도 지도를 찾아보았다. 마드리드, 바로셀로나, 세비야, 빌바오 등등...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팀들의 연고지 위주로 찾아보았다. 없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서 찾아보았다. 팜플로냐, 부르고스, 레온 등등... 역시 없다. 옆나라 포르투갈까지 샅샅이 찾아보았다. 하지만 도대체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다.

'니가 거기 왜 있어. 그러니까 찾기가 힘들지!'

세우타는 이베리아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었다. 정확히는 모로코 땅 한 켠에 섬이 아닌 섬처럼 고립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 나라의 영토이지만 다른나라 안에 있는 땅을 두고 비지(飛地)라고 부른다. 한자 '날비(飛)'가 쓰인 것처럼 본국과는 떨어져 있는 영토다. 참고로 비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있는 러시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다.

세우타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지브롤터(Gibraltar)해협에 위치해 있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쪽으로는 영국령 지브롤터가 있고, 북아프리카쪽으로는 세우타가 있는 것이다. 지브롤터 해협은 좁은 곳은 폭이 20km가 안 될 정도다. 대서양과 지중해가 교차하고, 유럽과 아프리카가 손에 닿을 듯 바라다보이니 지브롤터해협 일대가 얼마나 중요하겠나! 지정학적인 눈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딱보면 알 정도일 거다.

그런 세우타에 항구를 건설한 이들은 카르타고인들이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데 그게 바로 포에니 전쟁이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그 유명한 한니발이 활약한다. 한니발이 기세를 올렸지만 카르타고는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다. 세우타도 로마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된다.

대륙과 대륙이 만나는 문명의 교차점이어서 그랬나? 세우타는 반달족들이 쳐들어 오기도 했고, 비잔틴제국이 점령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가 이슬람화가 된 이후에는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더불어 711년, 이베리아반도에 이슬람 무어인들이 침공하여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게 된다. 이때부터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그리스도교 왕국들은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에 나선다.

15세기가 됐고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먼저 돛을 높이 달고 대서양으로 향한 건 스페인이 아니라 포르투갈이었다. 당시 스페인 남부에는 이슬람 무어인들의 나라가 계속해서 항전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그라나다 왕국이 바로 그것이다.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으로 향한 때가 1492년이었다. 이 해에 그라나다 왕국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레콩키스타도 종료된다.

1415년 세우타는 포르투갈에 의해 점령된다. 세우타 공략에는 항해왕 엔히크(Henrique)가 앞장섰는데 그는 포르투갈왕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이었다.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통해 북아프리카에서의 세력 확장에 나서게됐다.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이다. 참고로 엔히크는 '항해왕'이었지만 진짜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다음 왕위는 첫째 아들인 두아르테가 이어받았다.

 

 

 

* Royal Walls: 직역하면 '왕립장벽'이 될 것이다. 애초 이 성벽은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스페인이 세우타를 점령했고, 왕립장벽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계속 보강되었다. 성체에 여기저기 탄환의 흔적들이 있다. 보기만해도 참 치열하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카르타고는 왜 나왔고, 레콩키스타는 또 무엇인가? 더군다나 스페인 땅이라면서 포르투갈 항해왕은 왜 또 불쑥나왔는가?

익숙지 않은 지명에 낯선 이름까지... 세계사 공부를 제대로 안 했던 값을 제대로 치르고 있다. 그래도 세우타로 가는 여객선은 지브롤터 해협을 시원스럽게 내달리고 있었다. 객실밖으로 나갔더니 그 유명한 지브롤터 암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1578년이었다.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가 모로코인들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만다. 당시 세바스티앙 1세의 나이가 24살이었는데 결혼을 하지 않아 왕비도 없었고, 후사도 없었다.

1580년, 이런 권력 공백을 틈타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을 병합하기에 이른다. 이후로 세우타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놓인다. 60년간의 합병을 뒤로 하고, 1640년에 포르투갈이 스페인에서 독립했을 때도 세우타는 계속 스페인령으로 남게 된다.

미끄러지듯 여객선이 세우타항에 들어선다. 그런데 방파제 끝단 부분을 보니 기둥 두 개를 들고 서있는 헤라클레스(Heracles)상이 보였다. 좀 작았다. 이게 전부인가? 육중한 몸매에 천하장사의 기운을 가진 헤라클레스의 동상을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알고보니 세우타의 중심지역에 큰 동상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의 국기를 보면 기둥 두 개가 들어가있는데 그게 바로 헤라클레스가 들고 서 있는 기둥들이다.

세우타말고도 모로코땅에는 멜리야(Melilla)라는 스페인의 비지가 하나 더 있다. 멜리야도 지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곳에 위치해있다. 스페인이 영국으로부터 지브롤터의 반환을 요구하듯이 모로코는 스페인에게 세우타와 멜리야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까지 세우타에 대해서 이야기해봤다. 처음에는 새우탕면처럼 얼큰한 맛을 기대했는데 온갖 재료가 뒤섞인 잡탕면을 먹은 느낌이다. 대륙이 교차하고 해양이 연결된 문명의 십자로여서 그런 풍미가 발현됐을 것이다. 매운맛이든 섞인맛이든 맛나게 즐겨보자 배고프면 여행도 잘 안되는 법이니까!

 

 

 

 

* 세우타 헤라클레스 기둥: 이게 진짜 헤라클레스 기둥 조형물이다. 세우타항 방파제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다.

 

 

 

* 이베리아반도 지도: 글씨를 제외하고 직접 손으로 그렸다.

 

 

 

 

 

 

 

 

 

* 지중해: 지브롤터해협

 

 

 

☞ 지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1월 26일까지 스페인과 튀르키예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은 크게 3단계로 나눠서 했는데 1단계는 산티아고 순례길, 2단계는 스페인 도시여행, 3단계는 튀르키예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포스팅들은 그 여행일지 노트를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여행일지를 중심에 두고 작성된 포스팅이라 그렇게 재미진 포스팅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지브롤터해협: 뒤로 타리파 도심과 항구가 보인다.

 

 

 

 

* 2024년 1월 10일 수요일: 28일차 / 맑음

- 어제는 비가 엄청내렸지만 이날은 날씨가 화창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쇼를 했다. 개인 사물함에 카메라를 넣고 잠궈두었는데 열쇠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저기 계속 찾았는데도 없는 것이다. 패킹한 배낭을 싹 다 다시 꺼내 주머니마다 검사를 했다. 침대 주변을 비롯해 손이 닿는 곳을 전부 다 뒤졌다. 하지만 없는 것이다. 결국 스태프에게 '절단기가 있냐'고 물을 지경까지 됐다. 하지만 절단기가 없다고 했고, 공구상에 가서 구매를 해야할 판이었다.

- 아침에 일어나서 움직인 곳이 뻔한데 더군다나 내가 물건을 잘 잃어버리지 않는데... 도대체 어디있는가? 마지막으로 침대 아래부분을 찾아보려 매트리스까지 들어보았다. 그냥 공구상에 가서 절단기를 사야겠다 하고, 다시 매트리스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손에 닿았다. 잃어버린 열쇠였다. 이거 찾느라, 정말 이거 찾느라 1시간을 허비했다. 그런 내 모습에 스태프들이 좀 한심하게 보더라~ㅋ

- 검색을 해보니 근처에 로마시대의 신전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곳을 탐방하기로 했다. 왕복 1시간 정도 거리인 듯해서 무작정 길을 나섰다. 호스텔에서 벗어나 해안길로 접어 들었다. 순례길 표식이 있어 그걸 길잡이 삼아 이동했다. 잠시 숲길을 지나니 멋진 풍광이 펼쳐진 해안길이 나타났다. 푸른 바다를 벗삼아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깎아질듯한 해안 절벽 위로 길이 이어졌는데 바다 너머로 북아프리카 모로코 땅이 가깝게 보였다. 직선거리로 대충 20킬로 정도 밖에 안 떨어져 있는 듯했다.

- 해안가 절벽 위를 걷다보니 여수 금오도 비렁길도 생각나고, 제주 올레길도 떠올랐다. 이곳이 지브롤터해협 일대이다보니 곳곳에 벙커들이 산재해있었다. 전략적으로 엄청 중요한 곳이다보니 그런 시설물들이 있던 것이다. 오래된 군사보호구역 표지판도 보았는데 예전에는 이곳을 민간인이 출입하지 못하게 막아 놓았을 것이다. 옛 유물처럼 군사시설물들은 방치되고 훼손됐다. 지브롤터해협 일대의 중요성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그곳을 지키는 감시시스템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 열쇠 소동 때문에 정신없이 체크아웃을 해서 그런지 준비가 소홀했다. 생수도, 행동식도 챙기질 못했다. 1월이었는데 스페인 남부의 햇살은 뜨거웠다. 마시지 못하고, 먹지 못한 상태로 2시간 이상을 걸으니 좀 아니다 싶었다. 배낭 무게도 무시 못했다. 줄인다고 줄였어도 순례길 구간 때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는 듯했다. 아니 기념품 사느라 더 무거워진 듯했다.

- 신전 건물 찾는 것은 일단 접고, 다시 타리파 호스텔로 돌아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호스텔에 연박을 하고, 배낭도 두고 올 걸... 열쇠 소동부터 신전 건물 못 찾는 거까지 이날은 좀 일정이 꼬였다. 내일은 좀 좋아지려나?

 

 

 

* 지브롤터해협: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곳곳에 해안 벙커가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사용을 하지 않음. 바다 멀리 보이는 곳이 북아프리카임.

 

 

 

* 2024년 1월 11일 목요일: 29일차 / 맑음

- 전날 해안가 길을 가다가 중단한 것이 영~ 찜찜했다. 준비 소홀로 가던 길을 되돌아 간 게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지브롤터 해협을 위시한 지중해 일대를 마음껏 둘러보기로 했다.

- 전날 탐방을 중단한 '개조심'집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호스텔에서 개조심 집까지는 꽤 멀었다. 약 4~5km 정도 떨어져 있는 듯싶었다. 자세히보니 이 길은 윗길, 아랫길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랫길은 말그대로 좁은 소로길로 절벽 바로 옆을 걷는 길이다. 이에 비해 윗길은 자전거는 물론 자동차도 운행이 가능한 길이었다. 대신 비포장길이었다. 그래서인지 산악자전거를 타는 자전거족들이 많이 보였다.

- 윗길은 예전에 군사작전도로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해안 벙커를 비롯한 시설물들은 폐쇄됐고, 도로도 관광, 레저용으로 그 기능이 변형됐다. 푸른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옛 군사시설물 위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평화로운 풍광 속에 숨은 그림처럼 군사실설물들이 숨어 있는 모습이었다.

- 이 해안길은 트라팔가(Trafalgar) - 타리파(Tarifa) - 알헤시라스(Algeciras)로 연결된다. 그 중 타리파에서 알헤시라스 구간을 걸었던 것이다. 트라팔가에서 타리파가 약 60km, 타리파에서 알헤시라스까지가 약 25km 정도다. 트라팔가는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 스페인 연합함대를 패퇴시킨, 그 트라팔가 해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 날씨가 좋아서 사진도 많이 찍었다. 그중에서 과달메시탑(Torre de Guadalmesi)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두드러지게 잘 나오더라. 지중해를 향해 늠름하게 서있는 과달메시탑을 보니 첨성대가 생각이 났다. 과달메시탑은 수백년간 지중해의 해풍을 묵묵히 다 맞으면서도 보존 상태는 꽤 좋았다. 그런데 출입구가 안 보이는 거다. 있긴 있는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높이 있었다.

- 과달메시탑 이후로는 해안가에서 벗어나 산길로 들어섰다. 전날 준비소홀을 만회하려고 음료수, 행동식을 듬뿍 준비했더니 배낭이 뚱뚱했다. 그 뚱뚱한 배낭을 메고 산길을 오르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파이팅이다.

- 역시 20km가 넘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알헤시라스로 진입할 무렵 해가져 세상이 컴컴했다.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1시간 이상 산길이 이어졌다. 그나마 포장도로였다. 불빛 하나없는 산길을 1시간 이상 걸으니 눈이 감길 정도로 피곤해졌다. 그렇게 피곤한 상태였지만 열심히 걸었고, 결국은 알헤시라스 도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충 8시간 정도 걸은 거 같다. 물론 사진을 찍으며 느릿느릿 걸어서 그렇게 오래 소요된 거 같다.

- 알헤시라스에 있는 호스텔로 갈까하다가 그냥 타리파행 버스를 탔다. 8시간 동안 걸었던 거리를 버스를 타니 약 40분 만에 도달하더라. 읔~ 허탈함!ㅋ

- 그냥 스쳐갈 거라고 생각했던 타리파에서 3박을 하게됐다. 타리파 호스텔 스태프가 또 왔냐는 식으로 씨~익 웃더라!

 

 

 

* 과달메시탑: 1588년 경에 만들어진 과달메시탑. 해안 감시용 망루로 만들어졌다. 오래됐지만 훼손되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 해안경비시설

 

 

 

* 지브롤터해협: 과달메시탑이 보인다.

 

 

 

* 지브롤터해협: 저 배낭을 메고 27킬로 정도를 걸었으니...ㅋ

 

 

 

 

 

* Royal Walls: 직역하면 '왕립장벽'이 될 것이다. 애초 이 성벽은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스페인이 세우타를 점령했고, 왕립장벽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계속 보강되었다. 성체에 여기저기 탄환의 흔적들이 있다. 보기만해도 참 치열하다.

 

 

 

☞ 지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1월 26일까지 스페인과 튀르키예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은 크게 3단계로 나눠서 했는데 1단계는 산티아고 순례길, 2단계는 스페인 도시여행, 3단계는 튀르키예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포스팅들은 그 여행일지 노트를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여행일지를 중심에 두고 작성된 포스팅이라 그렇게 재미진 포스팅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항해클럽등대(Faro del Club Nautico): 세우타항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오래된 등대. 항해클럽에는 값비싼 요트들이 즐비했다.

 

 

 

 

 

* 2024년 1월 8일 월요일: 26일차 / 맑음

- 알헤시라스에 있는 hospedaje Lisboa Algeciras 호스텔에 또 1박을 하기로 했음. 이날은 세우타(Ceuta)에 가기로 했는데 세우타에서 1박을 하기보다 그냥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것이 좋을 거 같아 그렇게 했음.

- 오전 10시 배편을 타고 약 1시간 30분 정도 지브롤터 해협을 가로질러갔다. 항구에서 떠날때보니 어제 탐방한 지브롤터가 한 눈에 펼쳐졌다. 해안선 위에 거대한 암벽이 불쑥 솟아오른 형상이었다. 반대편에서 보니 왜 지브롤터가 그렇게 중요한 곳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 알헤시라스 항구에서 여객선을 탈 때 공항과 동일한 수속을 밟았다. 테러 방지 때문인가?

- 세우타에 내리니 날씨가 더운 것이다. 스페인 남부보다 더 더웠다. 그렇다, 아곳은 북아프리카다. 세우타는 Foso de san Felip 해자를 통해 구도심과 신도심으로 나뉘었다. Royal Walls라는 도시장벽이 있었는데 그곳에 바닷물이 드나들고 있었다. 해자를 지중해 바닷물로 채운 셈이다.

- 일부 구간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Royal Wall는 철옹성의 이미지를 하고 있었다. 해안가와 맞닿아 있는 성벽의 모습이 어떤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고보면 Royal Walls은 그냥 도시장벽이기 보다는 도시장벽과 전략적 요새가 합쳐진 모습이었다.

- 세우타 대성당과 그 앞쪽에 서 있는 아프리카 광장을 탐방한 후 해안가 방면으로 이동했다. 세우타에 있다는 헤라클래스 기둥상을 찾았다. 지브롤터에서 본 헤라클래스 기둥상은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세우타 기둥상에 대해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세우타 항구 방파제에 헤라클래스 기둥상이 있긴 했다. 배를 타고 방파제를 지날 때, 저거 말고 다른게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 요트 선착장 앞 벤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는데 헤라클래스 기둥상이 떡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레카였다! 지브롤터 기둥상이나 세우타 항구 앞 기둥상과는 다른 힘찬 기운이 감돌았다. 사실 세우타에 온 이유가 헤라클래스 기둥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 시계를 보니 시간이 좀 남았다. 돌아가는 배편은 밤 8시 30분이었다. 구글 지도를 보니 Monolith Llano Amarillo Ceuta라는 조형물이 있었다. 원래 모로코 땅에 있었던 것인데 1962년 세우타로 옮겨졌다고 한다. 대충 찾아보니 1936년에 있은 군사반란과 관련된 조형물이라고 했다. 딱 봐도 좀 헛군기가 들어가 있는 조형물이었다. 그런데 그 주위가 너무 더러웠다. 낙서도 있었고... 이것이 군사반란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생각일지 모른다. 1936년에 있던 군사반란이 스페인 내전의 시초였다.

- 세우타가 모로코로 둘러쌓여 있긴 했지만 이곳이 아프리카 땅이라는 사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스페인 남부의 어느 도시를 거닐고 있는 느낌이었다. 지브롤터가 유로파를 강조하며 유로화도 유통되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 밤 8시 30분경 세우타항에서 알헤시라스행 여객선을 탔다. 왕복으로 끊으니 약 60유로였는데 운항거리가 편도로 약 30km에 달하는 거에 비해서는 좀 비싼편이었다.

- 지중해의 야경, 특히 지브롤터의 야경에 취해있었는데 누가 내 배낭의 지퍼를 열었던 거 같다. 당시 난 큰 배낭을 호스텔에 두고, 작은 배낭을 둘러메고 있었다. 배 뒤쪽 모서리에서 바람을 맞으니 뒤에서 누가 뭐를 해도 모를 정도이긴 했다. 별로 돈 값어치도 없는 것들만 배낭에 넣어두었는데... 도대체 왜?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담배 핀 그 놈이 그랬나?

참고) 세우타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스페인령으로 모로코에 둘러쌓여 있다. 지브롤터가 스페인에 둘러쌓인 영국령인 것과 같은 이치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지브롤터와 세우타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그만큼 이 지역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뜻이다. 한편 세우타 이외에도 모로코 땅에 있는 스페인령 도시가 하나 더 있다. 멜리야(Melilla)라는 도시이다. 멜리야는 이전에 탐방했던 알메리아에서 가는 배편이 있다.

 

 

 

* 헤라클래스기둥: 세우타항 방파제에 있다. 아차하면 놓칠 수 있다. 바로 왼쪽에 바다 건너 봉우리 두 개가 바로 지브롤터이다.

 

 

 

* 세우타 헤라클래스 기둥: 이게 진짜 헤라클래스 기둥 조형물이다. 세우타항 방파제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다.

 

 

 

 

* 2024년 1월 9일 화요일: 27일차 / 비

-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오랜만에 우비를 꺼내 입었다. 전날 밤에 잠시 보았던 유적지를 가려고 알헤시라스의 중심인 알타광장(plaza Alta)으로 갔다. 그 광장 앞에는 parroquia of our lady of la palma 교회가 있었다. 알헤시라스가 북아프리카와 가까워서 그런가? 알타광장은 화려한 타일로 장식된 벤치가 늘어서 있었다. 이후 마리아 크리스티나 공원(parque maría Cristina)에서 빗물에 젖은 나무들을 바라본 후 Murallas Merinies로 향했다. 유적들을 복원하지 않고 발굴한 채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곳의 성 이름이 지브롤터문(puerta de Gibraltar)이다.

- Murallas는 스페인어로 '벽'이란 뜻이다. 영어로 Wall이 스페인어로는 Murallas이다.

- 그냥 그칠 비가 아니었다. 빵 가게에서 빵과 커피를 사 먹은 후 고민을 했다. 다음 일정은 카디스(Cadiz)였는데 알헤시라스에서 카디스까지는 약 10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멀리가기 보다 가까이에 있는 타리파(Tarifa)로 가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리파는 이베리아반도의 최남단으로 우리나라 땅끝마을과 비슷한 개념의 도시이다.

- 알헤시라스에서 타리파까지는 약 25km 정도 떨어져있다. 가까워서 그런지 소요시간은 약 40분 정도였고, 요금도 2.5유로였다. 또 시외버스가 아니라 시내버스 개념이었다. 안 갈 이유가 없었다.

- 타리파에 있는 La cocotera boutique hostel & coworking에 체크인을 했다. 비가 좀 그치는 것 같았다. 근처에 해수욕장이 있어서 한 번 가봤다. 타리파가 서핑의 성지라고 불리던데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치카해수욕장(playa chica)이 있는데 서핑보드를 타는 서퍼들이 많이 보였다. 아무리 남부 스페인이라고 하지만 1월, 한 겨울이 아닌가! 더군다나 바람도 세게 불고, 파도도 크게 일렁이는데...

- 파도 넘어 섬이 하나 있었다. 타리파섬(Isla de Tarifa)이었다. 요새와도 같은 이 섬에는 이베리아반도의 최남단 끝점(punto masal al sur de la peninsula iberico)이 있다.

- 치카해수욕장 뒤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성(castillo de Santa Catalina)와 타리파항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구스만성(castillo de Guzman de Bueno)을 탐방한 후 호스텔로 돌아왔다.

- 이 타리파 호스텔은 협업(coworking) 공간이 있어서 그런지 호스텔 죽돌이들이 있는 거 같았다. 호스텔이 무척 소란스러웠다. 뭐 호스텔이 다 그런거지만...

 

 

 

* Royal Walls: 독특하게도 해자를 지중해 바닷물로 채웠다.

 

 

 

* Royal walls: 끝단에 달린 둥그런 초소(sentry box)가 이색적이다.

 

 

 

* Monolith Llano Amarillo Ceuta: 1936년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그걸 기념하기 위해 모로코땅에 세운 조형탑. 모로코땅에 있다 1962년경에 세우타로 이건을 했다. 좀 외떨어져 있는데다 주변도 지저분했다. 낙서도 많았다. 1936년 군사반란은 스페인 내전의 도화선과 같은 역활을 했다.

 

 

 

* 알헤시라스 알타광장(plaza Al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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