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작가’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글을 참 늦게 쓴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본인 이름 걸고 쓴 책다운 책이 없다. 물론 글을 빨리 쓴다고 좋은 건 아니다. 속필이 명필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가 않으니까. 그 느릿느릿한 글쓰기는 필자의 성격과 닮아 있다. 느긋한 문장에서는 빠릿빠릿함보다는 게으름이 잔뜩 묻어있다.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배 쭉 깔고 단 잠에 빠져있는 누렁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필자는 의외로 꼼꼼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려면 생각보다는 많은 지식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지식노트를 만들었는데 우연하게 그 노트를 본 참가자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

 

“보기와는 다르게 참 꼼꼼하세요.”

 

사실 그런 꼼꼼함은 필자의 방어 기재다. 외부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완벽주의. 그렇게 완벽주의에 물들어 있다 보니 삶이 진도가 안 나간다. 살다보면 앞뒤 안 재고, 확 치고 나갈 때도 분명 필요하다.

 

본성이 게으른데 완벽주의에까지 물들어 있으니 글을 빨리 못 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필자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완벽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완벽주의에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없지!

 

 

 

 

 

 

* 정약용 선생 상

 

 

 

 

 

 

 

● 트레킹 강의명도 ‘섹시한 제목’이 필요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역사트레킹도 제목을 잘 지어야한다. 눈에 확 띄는 ‘섹시한’ 제목으로 나가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문화센터에서 트레킹 강의를 진행하는데 매학기 마다 제목 짓는 걸로 골머리를 썩어야했다.

 

수많은 쟁쟁한 강의들 사이에서 필자의 강의를 ‘잘 팔기’ 위해서는 제목으로 승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끌어다 쓸 수는 없었다. 내용성과 완전히 어긋나는 제목은 욕먹기 ‘딱’이기 때문이다.

 

“제 강의 커리큘럼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네이밍이 있나요?”

 

매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저렇게 물어보곤 했다. 그 중에서 단연 이 강의가 수강생들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요!”

 

그렇다.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본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 여유당: 정약용 선생 생가

 

 

 

 

 

 

 

● 2018년은 다산 정약용의 해배 200주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2018년과 다산 정약용 선생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본다. 시간을 좀 돌려보자. 2018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에서 해배(解配)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배’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한다. 정약용 선생은 1801년 11월에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1818년 10월에 고향인 마재(현 남양주)로 돌아온다.

 

정약용 선생은 유독 ‘18’이란 숫자와 연관이 많은 분이다. 유배를 18년 동안 당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 18년을 더 사신 후에 돌아가셨다. 또 관직 생활도 18년 동안 하셨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됐다. 폐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한결같이 다 즐거운 표정들을 하고서. 그래서인지 어떤 참가자는 이런 말까지했다.

 

“여기는 정말 딴 세상 같아요. 다들 즐거워 보여요.”

 

그런 딴 세상 같은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 능내역

 

 

 

 

 

 

 

●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위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됐을 정도였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된다.

 

 

 

 

 

 

 

* 마재성지

 

 

 

 

 

 

 

●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하게 된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쓰기에 이른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됐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죽음에 이르게 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 거중기: 다산 생가 앞에 전시되어 있음.

 

 

 

 

 

 

●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다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필자의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 마디 더 설명을 보탰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필자는 트레킹팀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필자에게 슬며시 말을 건넨 분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필자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다.

 

 

 

 

 

 

 

* 다산생태공원

 

 

 

 

 

 

 

 

● 귀에 확 꽂히는 이름,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여유당을 뒤로 한 트레킹팀은 자전거도로 옆에 놓인 인도를 따라 운길산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 길은 옛 중앙선 철로였다. 중앙선이 복선화되면서 옛날 단선 구간을 리모델링하여 자전거도로와 인도로 변신시킨 것이다. 이 길은 아름다운 한강변을 옆에 끼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전거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단점도 있다.

 

무섭게 페달을 밟아대는 일부 자전거족들이 이 구간에 많기에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걸어야한다. 하긴 필자도 예전에 자전거를 탔을 때, 특히 한강변을 달릴 때는 무식하게 페달을 밟았었다. 그래서 이런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자전거 폭주족이냐! 그 고물자전거로 애쓴다 애써!”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터)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 양수대교: 마진산성 터에서 바라본 양수대교. 강 건너편이 양수리다.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는 완벽주의의 허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완벽하지도 않은 인간이 완벽주의로 위장을 하고 있으니 정체성에 혼란만 올 뿐이다. 더군다나 나답게 살기를 원한다면서 자신을 완벽주의로 방어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다.

 

이렇게 필자의 허울을 벗겨주시는데 정약용 선생의 역할이 컸다. 무슨 소리인가? 정약용 선생도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배에서 풀려나기 위해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 쪽과 접촉했던 것, 제자들 중에 큰 사상가가 나타나지 않은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민족의 큰 스승인 정약용 선생도 이렇듯 개인적인 흠결이 있었다. 하물며 고만고만한 삶을 살고 있는 필자가 어설픈 완벽주의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일 뿐!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느릿느릿하게라도 꾸준히 쓸 것이다. 열심히 쓰다 글이 어느 정도 무루 익으면 과감하게 원고를 출판사에 보낼 것이다. 전에는 완벽한 원고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허울에 빠져있던 예전의 내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에 완벽한 원고가 있을까? 그렇게 했다가는 평생 책 낼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지. 완벽한 원고만 찾다가는 완벽하게 평생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걸!”

 

 

 

 

 

 

 

* 다산생태공원: 청명한 가을날의 다산생태공원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생가(정약용묘) ▶ 다산생태공원 ▶ 마진산성(터)

2. 이동거리: 약 10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팔당역 ☞ 팔당역에서 능내리행 버스 탑승(약 15분간 이동) / OUT: 운길산역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남양주정약용역사트레킹

 

 











* 능내역. 작은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 있다.









정약용 선생 만나러 갑시다_ 1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서울내부트레킹, 속초해변트레킹. 솔직히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누가 그런 명칭을 지었습니까?”

 

트레킹 참여자들 중에는 간간이 이렇게 문의를 해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제가 직접 지었습니다. 코스에 담긴 내용성을 전달하려고 그런 이름을 지었어요.”

 

제 대답을 듣고 물음표를 거두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물음표를 몇 개 더 가져다 붙인 표정을 지으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그런가하면 이렇게 더 묻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럼 귀에 확 꽂히는 명칭 같은 건 없나요?”

 

당시 저는 잠시 망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답을 했지요.

 

! 이건 어떻습니까?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정확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 그래요? 귀에 확 꽂히네요. 다산 선생은 저도 좋아하는데... 그 명칭 잊어버리지 않겠는데요.”

 








* 능내역.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있는 능내역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보겠습니다. 귀에 확 꽂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을 소개하겠습니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습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됩니다. 폐역이 된 것이죠.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습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무척 차분했습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입니다.

 

 






* 마재성지. 한옥성당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입니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입니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요?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습니다. 바로 위형이었습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1791(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됩니다. 신유박해(1801)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 마재성지.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 다산생가 가는 길.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습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지요.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요? 정약용이 1순위였습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다산선생 묘.





벽파는 꼼수를 썼습니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습니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됩니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18006월이었습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습니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됩니다. 1801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되었죠.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 거중기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습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릅니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입니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 다산 선생 동상.





 

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제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마디 더 설명을 보탰습니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저는 참가자들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습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저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답니다. 그러고보면 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드네요.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죠.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답니다.


정약용역사트레킹은 그 명칭이 귀에 확 꽂힙니다. 또한 눈도 확 뜨이게 하지요. 양수리일대가 수도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에 한 곳이니까요. 그 아름다운 양수리 일대를 다산 선생을 생각하며 걸을 수 있기에 정약용역사트레킹은 더욱더 재밌는 것이겠지요.

 

 



* 마진산성. 마진산성에서 바라 본 양수리. 앞에 보이는 다리는 신 양수대교이다.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폐역)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마진산성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옛 선인의 길을 따라...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 능내역 2008년 복선화된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능내역은 폐역사가 됐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듯 능내역은 많은 나들이객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공간으로 재탄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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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의 생가다. 대개 천주교 성지는 순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절두산, 새남터, 황새울 등등... 하지만 이 곳은 독특하게도 한 인물의 생가가 성역화 됐다. 그만큼 우리 천주교에서 정약종의 업적과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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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의 코스는 다음과 같다.

팔당역 ▲(시내버스 이동) ▲능내역(폐역) ▲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운길산역

2008년 중앙선 복선화로 인하여 폐역이 된 능내역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우리는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데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윗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 다산 정약용 선생

 


 

 

 


 

안타깝게도 형제들조차도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다.

그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뒤로 하고, 역사트레킹 팀은 마재성지에 있는 '한복 입은 예수상' 앞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묵념을 올렸다. 참가자 중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분도 있었고, 무신론자도 있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종교를 뛰어 넘어 경건의 시간을 함께했다. 필자도 나지막이 묵념을 올렸다.

'희생자들 모두 좋은 곳으로 가시길, 그리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말길. 나도 당할 수 있는 이런 참사가 다시는 이 땅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역사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 생가(여유당)에 연꽃 공원까지, 이들 지역이 도보로 20분 이내의 거리에 묶여 있다. 이런 명소들이 집중적으로 밀집해 있으니, 앞서 언급한대로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찾는 것이다.


 

 

 
▲ 정약용 동상 정약용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 이날은 햇살이 강해서 그랬는지, 참가자들은 선글라스나 창모자 등으로 햇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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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과 정약용

매번 와도 느낌이 좋은 곳.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쉬운 곳. 다산 선생의 뜻을 되새기고 싶은 곳... 필자는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좋은 감흥을 받았고, 그런 감흥을 다른이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다. 결국, 그 날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썼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 연꽃 공원 팔당호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뒤편으로 보이는 곳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진 정약종 선생이 따로 떨어져 살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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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매진하게 된다.

"다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 진둥산 남한강 자전거 도로만 따라가면 재미가 없다. 잘 닦인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이런 비포장 도로를 걸어야 진정한 트레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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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필자의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마디 더 설명을 보탰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입니다."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필자는 참가자들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이번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필자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다. 그러고보면 필자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릿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다산 선생을 뵈러갈 생각이다. 남양주든 강진이든 상관없다. 그냥 가서 위로를 받고 올 생각이다. 역시 다산 선생은 멘토 중에 멘토인 듯싶다. 난 힘들 때마다 항상, '다시 다산 정약용선생'에게로 갈 생각이다.    


 


 

 

 

 


 



● 도움말

1.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코스: 팔당역 ▶(시내버스 이동) ▶ 능내역(폐역)▶ 마재성지 ▶ 다산 생가(여유당) ▶ 연꽃 공원 ▶ 다산 삼거리 ▶ 조안면사무소 ▶ 진둥산 ▶ 솔개고개 ▶ 운길산역



2. 이동거리: 약 9.5km / 소요시간: 약 4시간 30분(쉬는 시간포함)



3. 교통편: 중앙선 팔당역에서 하차하여 능내1리행 버스에 탑승함. 능내역이 능내1리임. 버스로 약 10분 정도 이동함.

 

 

 

 

풍경 좋은 산, '머리 잘리는 산'이 되다 2편

서울에서 가까운 천주교 성지는? 절두산, 삼성산 그리고 마재성지


 


 

 
▲ 마재성지 마재성지 한옥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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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선생 동상. 다산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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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생가와 함께 둘러보는 마재성지

 

 

이제는 서울을 조금 벗어나 중앙선 전철을 타고 이동해 보자. 목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 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앞서 언급한 절두산을 비롯해 새남터, 해미읍성, 황새울(충남 공주)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다수다. 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일단 정약종에 대해서 알아보자. 정약종은 정약용의 바로 윗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 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했다. 하지만 그는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 마재성지 이 곳 뒤편에 한복 입은 예수상이 있다. 이 사진에서는 가운데 부분에 작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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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형제들조차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 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교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다.

마재성지에 있는 한옥 성당은 가톨릭과 한옥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옥 성당 옆으로 산책을 할 수 있는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에는 한복을 입은 예수상이 서 있다. 한복을 입은 예수상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동상이다.

마재성지에서 다산 정약용 생가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마재성지 그리고 정약용 생가까지 연결해서 탐방할 수 있다. 마재성지와 정약용 생가 일대는 수도권 일대에서도 손꼽히는 역사트레킹 코스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이 기대되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왔던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가르침을 한국에서 어떻게 실천할까'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의 '낮은 곳'은 어디일까. 당장 십자가를 둘러메고 순례를 떠났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떠오른다. 또 단식을 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도 떠오른다.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다른 낮은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파파'의 손길을 기다릴 것이다. 당장 '젖과 꿀'이 흐르게 해주지는 않을지라도 그가 내미는 손길을 따뜻하게 받고자 하는 사람이 아주 많을 것이다.

 


 

수도권 천주교 성지, 어떻게 가나요?

 

1. 절두산 성지 : 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에서 하차. 합정역에서 절두산까지는 도보로 약 10분 정도 소요됨. 절두산 성지 탐방 후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 탐방을 해보는 것도 좋음.

2.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지는 관악산둘레길 2코스를 통해 탐방하는 방법이 좋음. 관악산둘레길은 서울대입구에서 시작됨. 산길을 약 1시간 30분 정도 이동을 하면 삼성산 성지에 도착할 수 있음. 서울대입구까지는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함.

3. 마재성지 : 마재성지는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전철을 이용함. 중앙선 팔당역에서 하차하여 능내 1리행 버스에 탑승. 능내 1리가 능내역임.

 

 

 

 

 

 

 

 

 

 

 

 

 

 

 

 

 

세월호 참사, 위로받고 싶어서 걸었다 ___2편

식구들과 함께 한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 전편에 이어서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매진하게 된다.

"다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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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둥산 남한강 자전거 도로만 따라가면 재미가 없다. 잘 닦인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이런 비포장 도로를 걸어야 진정한 트레킹이 될 것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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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필자의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마디 더 설명을 보탰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입니다."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필자는 참가자들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이번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필자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다. 그러고보면 필자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릿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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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개 고개 진둥산 인근에 있는 얕은 고개. 이 구간은 동네 마을길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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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로

다산 선생께서 세월호 사건을 보셨으면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자기만 살겠다고 배를 버리고 달아난 선장과 선원들에 대해서 서릿발 같은 호통을 내리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와 정치권에 대해서는 어떤 호통을 내리셨을까?

'전원구조'에서 300명이 넘는 생때같은 인명이 익사하거나 실종처리 된 상황을 보고 어떻게 판단하셨을까? 링거에 의존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실종자 가족들은 기력이 떨어져 있는데, 그 옆에서 냄새를 풀풀 풍기며 맛있게 라면을 드셨던 교육부 장관을 보며 어떤 감정을 가지셨을까? 또 그 교육부 장관이 계란을 풀어먹은 것도 아닌데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는 청와대 대변인의 발언에 대해 어떤 인식을 하셨을까? 더불어 청와대는 재난 콘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강변을 하는 발언에 어떤 느낌을 받으셨을까? 조문객을 유가족으로 바꿔치기하며, '분향소 빅 쇼'를 연출한 대통령과 경호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그만하자. 그만해! 더 이상 말하면 누구말대로 '미개'해질지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같이 상상해 보길 바란다.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당연히 큰 호통을 내리셨을 것이다. 아니 역정을 내며 회초리를 드셨을지도 모른다. 다산 선생 같은 강직한 분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니까.

다산 선생께서 그렇게 준엄하게 꾸짖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무언가 막힌 곳이 좀 뚫리는 느낌이었다. 다산 선생께서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느낌이었다. 물론 이런 감정은 지극히 필자의 주관적인 감흥이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다산 선생을 뵈러갈 생각이다. 남양주든 강진이든 상관없다. 그냥 가서 위로를 받고 올 생각이다. 역시 다산 선생은 멘토 중에 멘토인 듯싶다. 난 힘들 때마다 항상, '다시 다산 정약용선생'에게로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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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선생 동상 다시 정약용 선생에게로... 만약 다산 선생이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도 호통을 치셨을 것 같다. 그것도 아주 크게 서릿발 같은 큰 호통을 치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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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코스: 팔당역 ▶(시내버스 이동) ▶ 능내역(폐역)▶ 마재성지 ▶ 다산 생가(여유당) ▶ 연꽃 공원 ▶ 다산 삼거리 ▶ 조안면사무소 ▶ 진둥산 ▶ 솔개고개 ▶ 운길산역


2. 이 코스는 기본적으로 남양주시에서 개설한 <다산길>을 이용함. 단 진둥산과 솔개고개 코스는 필자가 개설한 곳임.


3. 이동거리: 약 9.5km / 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포함)


4. 교통편: 중앙선 팔당역에서 하차하여 능내1리행 버스에 탑승함. 능내역이 능내1리임. 버스로 약 10분 정도 이동함.

 

 

 

 

 

 

 

 

 

 

 

 

 

 

 

세월호 참사, 위로받고 싶어서 걸었다 ___1편

 

식구들과 함께 한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14.05.02 19:00l최종 업데이트 14.05.02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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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내역 2008년 복선화된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능내역은 폐역사가 됐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듯 능내역은 많은 나들이객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공간으로 재탄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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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6일 토요일.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을 행하는 길. 마음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발걸음에 미안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수 백 명의 꽃다운 생명들이 차디찬 물 속에서 삶을 마감했는데 팔자 좋게 트레킹이라니! 또 그 내용을 기사화해서 <오마이뉴스>에 송고를 하다니! 그런 무거운 자책들이 필자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다산 선생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비판의 화살이 날아올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이번 트레킹을 강행하였다. 그것도 홀로 행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끌어 모아 함께 트레킹을 했다.

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받은 충격을 어떤 식으로든 누그러뜨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위로의 손길을 같이 받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손길에 의탁했는가? 누구에게 그런 마음의 짐을 풀어 놓았는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다산 선생에게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다산 선생의 손을 붙잡고, 치유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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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의 생가다. 대개 천주교 성지는 순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절두산, 새남터, 황새울 등등... 하지만 이 곳은 독특하게도 한 인물의 생가가 성역화 됐다. 그만큼 우리 천주교에서 정약종의 업적과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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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한 사람은 총 7명이었는데 소셜다이닝 사이트 <집밥>에서 만난 이들이다.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의 코스는 다음과 같다.

팔당역 ▲(시내버스 이동) ▲능내역(폐역) ▲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운길산역

2008년 중앙선 복선화로 인하여 폐역이 된 능내역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우리는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데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윗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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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재성지 마재성지에 있는 예수상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묵념을 하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이 예수상은 특이하게도 한복을 입은 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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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형제들조차도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다.

그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뒤로 하고, 역사트레킹 팀은 마재성지에 있는 '한복 입은 예수상' 앞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묵념을 올렸다. 참가자 중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분도 있었고, 무신론자도 있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종교를 뛰어 넘어 경건의 시간을 함께했다. 필자도 나지막이 묵념을 올렸다.

'희생자들 모두 좋은 곳으로 가시길, 그리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말길. 나도 당할 수 있는 이런 참사가 다시는 이 땅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역사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 생가(여유당)에 연꽃 공원까지, 이들 지역이 도보로 20분 이내의 거리에 묶여 있다. 이런 명소들이 집중적으로 밀집해 있으니, 앞서 언급한대로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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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동상 정약용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 이날은 햇살이 강해서 그랬는지, 참가자들은 선글라스나 창모자 등으로 햇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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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과 정약용

매번 와도 느낌이 좋은 곳.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쉬운 곳. 다산 선생의 뜻을 되새기고 싶은 곳... 필자는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좋은 감흥을 받았고, 그런 감흥을 다른이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다. 결국, 그 날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썼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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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꽃 공원 팔당호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뒤편으로 보이는 곳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진 정약종 선생이 따로 떨어져 살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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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내역: 2008년 복선화된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능내역은 폐역사가 됐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듯 능내역은 많은 나들이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재탄생(?) 되었다.

 

 

 

 

 * 마재성지

 

 

 

 


즐겁게 트레킹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감정이 스며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나라 전체가 슬픔에 휩싸여 있는데 뭐가 좋다고 트레킹 행하는지...

더군다나 혼자도 아니고 여러명이서 같이했으니...


하지만 저도 무언가 멍~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여객선을 많이 타야 하는 팔자인지라

언젠가는 저도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제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번 남양주 정약용 트레킹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다산 선생 앞에서 미주알 고주알, 

제 감정들을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다산 선생 앞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을 입밖으로 꺼내는 것도 가능했을 겁니다.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정약용 선생! 

다산 선생께서는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셨을까요?

독자분들의 한 번 상상해 보시죠?

 









 

 

*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의 생가다. 대개 천주교 성지는 순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절두산, 새남터, 황새울 등등...

하지만 이 곳은 독특하게도 한 인물의 생가가 성역화 됐다. 그만큼 우리 천주교에서 정약종의 업적과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 마재성지: 마재성지에 있는 예수상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묵념을 하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이 예수상은 특이하게도 한복을 입은 상이다.   

 

 

 

* 정약용 동상: 정약용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 이날은 햇살이 강해서 그랬는지, 참가자들은 선글라스나 창모자 등으로 햇살을 가렸다.

 

 

 

 

 

 

 *연꽃 공원: 팔당호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뒤편으로 있는 곳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진 정약종 선생이 따로 떨어져 살았던 곳이다.  

 

* 진둥산: 남한강 자전거 도로만 따라가면 재미가 없다. 잘 닦인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이런 비포장 도로를 걷는 것이 더 재미나다.

 

 

 

* 솔개 고개

 

 

* 연꽃공원: 연꽃 공원에 서 있는 다산 선생의 저작을 모은 조형물 

 

 

* 정약용 선생: 다시 정약용 선생에게로... 만약 다산 선생이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도 호통을 치셨을 것 같다. 그것도 아주 크게 호통을 치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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