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스테라: 더 걷고 싶어도 더 걸을 수 없는 곳. 순례자들은 대서양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순례길을 되돌아 본다.

 

 

<재미난 스페인 16편> 갈리시아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스테라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점은 갈리시아(Galicia) 지역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다. 약 800km의 순례길을 마친 순례자들은 비노(vino)잔을 기울이며 완주를 자축한다. 스페인에서는 와인을 비노라고 부른다. 이때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다음 일정을 계획한다. 스페인의 서쪽 땅끝마을인 피스테라로 가는 사람도 있고,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의 포르투로 가는 이들도 있다.

일단 서쪽으로 길을 잡아보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를 가면 피스테라(Fisterra)가 나온다. 이곳을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부르는데 순례길의 영향으로 다른 방위의 땅끝마을보다 훨씬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참고로 북쪽 땅끝은 바레스(Bares), 동쪽 땅끝은 크레우스(Creus), 남쪽 땅끝은 타리파(Tarifa)다. 피스테라와 바레스는 둘 다 갈리시아 지역에 속하고, 크레우스는 카탈루냐, 타리파는 안달루시아 지역에 속한다.

순례길 본선 구간인 800km를 걷고도 성이 차지 않은, 혹은 에너지가 넘치는 순례자들은 피스테라까지 3일을 더 걸어간다. 그조차도 부족한 순례자는 피스테라에서 북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묵시아(Muxía)라는 어촌 마을까지 또 걷는다. 거의 900km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옛 로마인들은 이베리아반도 지역을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불렀는데 그중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세상의 끝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돌배에 실려 왔다. 이후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발견됐고, 그 자리에 산티아고 대성당이 건립되니 유럽 각지에서 성지 순례를 오게 됐다. 이 스토리에 의거하면 피스테라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밑돌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 산티아고대성당

 

 

 

제자들이 돌배에 야고보의 시신을 실어 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석관을 말하는 듯싶다. 로마시대에는 돌로 만든 관, 즉 석관(石棺)을 많이 사용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 먼 예루살렘 지역에서 그 험한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 피스테라까지, 그들은 어떻게 올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돌로 만든 배가 물에 뜰 수 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에 호감을 느끼고 계시는 분들에게는 이런 의문들이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도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객관성은 순례자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니까...

갈리시아는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독자적인 언어와 고유한 풍습을 가지고 있는 터라 일각에서는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서쪽과 북쪽은 바다에 접해 있고, 내륙은 산지로 이루어졌는데 전체적으로 척박하다. 비도 많이 내리고, 습하다. 갈리시아 지역의 순례길을 걸을 때 소나기를 엄청 많이 만났는데 그때마다 우비를 썼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그때 본 무지개들은 정말 예뻤다.

갈리시아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아직도 농업이나 축산이 중심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비해 가난한 편이다. 갈리시아인들은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고향을 떠나 유럽이나 남아메리카로 이주를 많이 했다. 가예고(gallego)는 ‘갈리시아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 ‘가예고=스페인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얼마나 많이 이주했으면 그런 도식이 생겼을까! 참고로 갈리시아의 이주민 후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켰던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있다.

 

 

 

* 묵시아: 피스테라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다.

 

 

 

갈리시아는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면해 있다. 지도에서 그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꽤 익숙한 윤곽선을 마주하게 된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들쑥날쑥한 해안선이 마치 우리나라 서해와 남해를 보는 듯싶다. 얼핏 봤을 때 충남 태안과 서산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다.

갈리시아 지역과 우리나라 서해, 남해의 복잡한 해안선을 두고 리아스(rias)식 해안이라고 부른다. 리아스식 해안은 과거에 육지로 되어있던 부분이 지각운동으로 인해 가라앉거나 해수면이 상승하여 나타난 해안선이다. 산이나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온 형태니, 외형적으로 해안선이 들쑥날쑥하며 복잡하게 생겼다.

섬들도 많은데 과거 산의 정상부였던 부분만 바닷물 위로 남아 섬이 됐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아기자기하다 보니 빼어난 자연경관을 선사한다. 우리나라의 한려해상 국립공원이나 다도해상 국립공원을 생각해보시라! 전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다.

이런 리아스식 해안의 어원이 갈리시아 지역에서 나왔다. 스페인어로 리아(ria)는 ‘강의 하구’를 말하는데 이런 복잡한 해안을 말할 때 쓰인다. 뒤에 ‘s’가 붙어 복수형이 되어 리아스로 칭한다. 참고로 노르웨이에서 볼 수 있는 피오르(fjord) 지형도 매우 복잡한 해안선을 나타낸다. 피오르는 빙하에 의해 형성된 지형으로 바닷물이 U자 형태로 내륙 깊숙이 들어온 형태를 보인다. 갈리시아에 대해 알아보다가 세계지리까지 공부하게 됐다. 어쩌면 이것도 또다른 재미다.

 

 

* 피스테라: 0km 표지석. 뒤쪽으로 등대가 보인다.

 

 

 

피스테라로 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겨울이라 그랬는지 순례자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을도 듬성듬성 있었다. 그런 만큼 지형은 척박해 보였다.

갈리시아를 위시한 스페인의 북부지역은 711년, 북아프리카의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했을 때도 미점령지로 남거나 그들의 지배를 비교적 짧게 받았다. 이슬람교도였던 무어인들에 맞서 그들은 718년, 아스투리아스(Asturias)왕국을 건립하여 가톨릭 국가 재건을 위한 구심점으로 삼게 된다. 이런 저항이 가능했던 밑바탕에는 북서부 지역의 험준함이 큰 몫을 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군은 아스투리아스 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잘 이용하여 722년, 코바동가 전투에서 이슬람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사실 서북부 지역은 로마도 가장 늦게 점령한 곳이다. 지형은 험준하고, 기후는 변덕스러우니 딱히 점령할 매력을 느끼지 못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의 원주민들이 로마의 영역으로 넘어와서 약탈해대니 아예 근원을 도려내고자 점령을 하게 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글 중에는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잘못됐다.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이지 세상의 땅끝은 아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호카곶(Cabo de Roca)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유럽 대륙의 서쪽 끝으로 리스본과 가까워 한국인들도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해안절벽이 우뚝 서 있고 대서양의 세찬 파도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호카곶이 바로 ‘세상의 끝’이다.

 

 

 

*호카곶: 포르투갈 리스본 인근에 있는 호카곶.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이다.

 

 

로마인들은 호카곶이 아닌 피스테라를 서쪽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세상의 끝으로 첫 번재 순교자였던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들어왔고, 이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옮겨졌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일반적인 어촌 마을보다 피스테라로 들어온 것이 상징성이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피스테라가 아닌 호카곶을 세상의 끝으로 생각했다면? 호카곶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밑돌 역할을 했을까? 이런 상상을 해봤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걷고 싶어도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그 앞에 대서양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은 기쁨 반, 아쉬움 반의 마음을 품고 땅끝 등대 아래로 향한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순례자들의 온 몸을 깨끗이 씻어주는 듯하다. 그 바람을 맞으며 무언가 다짐을 했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기에 순례에 사용했던 물품들을 등대 아래에 내려놓기도 한다. 신발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예전에는 불에 태우기도 했다는데 요즘은 환경 문제 때문에 그런 모습은 보기 어렵다고 한다.

오래전 국토종단을 끝내고 해남 땅끝마을에 갔을 때다. 그때도 바람이 많이 불었다. 대서양 못지않은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 무언가 다짐을 했었다. 그렇게 땅끝마을들은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곳이다.

 

 

 

 

* 순례자: 갈리시아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서 우비를 썼다 벗었다를 자주해야 한다.

 

 

 

 

* 갈리시아지도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16편으로 종료가 됐다. 이제 두 편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필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들은 넘치고 넘치지 않았던가. 필자까지 거기에 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간의 통념을 깨려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제목도 저렇게 지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읽으신다면 그 환상이 깨질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 산티아고 순례길

 

●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이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지금은 2만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엄청난 영향을 준 셈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니까.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꼭 한 번은 다뤄봐야 하지 않겠나?

 

* 산티아고 순례길

 

 

●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한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온다.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년 7월 25일에 참수를 당한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이베리아반도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한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던 것이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한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길’)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여행기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장식된 야고보 성인.

 

●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린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종교다원론자(?)인 필자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필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바로셀로나가 있는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산티아고 대성당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하였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

 

 

* 산티아고 순례길: 저렇게 평원길을 많이 걷는다.

 

●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건립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침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던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셈이다.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위치. 구글 지도 변형.

●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한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

 

* 산티아고 순례길: 용서의 언덕에 선 필자.

ps. 이렇게 기존의 통념을 깨는 글을 쓰고 있지만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할 생각이다. 왜?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매력 있는 길이니까. 실제로 필자는 2014년 첫 방문 이후, 2018년과 2019년 연이어 방문을 했었다. 그 시간이 참 뜻 깊었다.

어떤 식으로든 필자는 야고보 성인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다. 뜻하지도 않은 짐을 지고 있는 야고보 성인의 어깨를 가볍게 해드리고 싶어 이 글을 쓴 것이다.





* 피스테라(fisterra):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스테라의 초입. 항구마을.

☞ 지난 2019년 12월 17일부터 2020년 2월 11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및 유럽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전년도에도 다녀왔으니 2년 연속 탐방을 한 셈입니다. 순례길 탐방이 종료된 이후에는 20대에 못해봤던 배낭여행을 행했답니다.

독일 - 오스트리아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스위스 -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 위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못 갔지만 먼 발치에서나마 알프스 일대를 둘러보았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습니다. 여행일지는 수첩(기자수첩 사이즈)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들을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겨 놓는거라 재밌는 포스팅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 개인의 여행기가 이 공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작은 기록이 올라가지만 그것 자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역사로 이어질테니까요!




* 피스테라

* 2020년 1월 16일 목요일: 31일차 / 폭우가 쏟아짐

1.어제는 hostal forest라는 곳에서 1박을 했다. 25유로 호스텔이었는데 정확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방은 단독으로 사용했는데 화장실은 공용. 아스트로가(astroga)에서 묵었던 호스텔과 구조가 비슷했다. 할매 주인장이 리셉션도 하고 관리도 하는 그런 호스텔이었다. 뭐 시설은 우리나라 여인숙?ㅋ

2. hostal forest에서 오전 9시경에 체크아웃함. 바로 산티아고콤포스텔라 버스터미널로 갔다. 오전 10시발 피스테라(fisterra)행 버스를 타기 위해.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서쪽 땅끝마을이다.

3. 10시 버스인데 10시 4분에 출발하더라. 탑승 위치도 정확하지 않고. 그런데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피스테라까지 무려 3시간 정도 걸린다는 것이다. 10시에 출발한 버스가 12시 55분경에 도착한단다. 오전 9시 버스는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는데 거기서 거기지. 산티아고콤포스텔라에서 피스테라까지는 직선거리로 100km도 안되는데 말야.

4. 어제까지만 해도 좋았던 날씨가 변했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바람도 거세고.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까지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는데 바다에서는 큰 파도가 일어나고 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몰아쳤지만 편하게 버스에 앉아 그 풍광을 바라보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드넓은 대서양을 바라본 것이다.

5. 2014년에 이곳을 지날 때는 잠을 자서 그랬는지 차창밖 풍광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바라본 풍광은 정말 절경이었다. 울릉도로 생각나고 제주도도 생각이났다.

6. 이것도 전화위복이라고 오늘의 피스테라 버스여행은 망설였던게 사실이다. 억수같이 비도 많이 오고 하니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미 2014년에 피스테라를 갔으니까.

7. 오늘은 피스테라의 초입에서만 머물렀다. 등대가 있는 곳까지 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초입에서만 놀아도 좋고 버스 차창 밖을 보는 대미도 좋았다. 특히 ezaro라는 동네는 매우 특이한 해안가 절벽을 지니고 있었는데 버스에서 내려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을 정도였다.

8. 오후 3시 버스를 타고 6시경 산티아고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3시간이 걸렸다. albergue o fogar de teodomiro에 오후 7시 30분경에 입실함.





* 마드리드: 이날 거리축제가 있었다. 말들이 도심 대로변을 활보한다.

* 2020년 1월 17일 금요일: 32일차 / 맑음

1. 마드리드로 가기 위해 albergue o fogar de teodomiro에서 오전 9시경에 나옴.

2. 마드리드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를 18일에 타는터라 마드리드에서 1박을 하기로 함.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는 산티아고에서 예매를 했음.

3. 산티아고콤포스텔라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는 우리나라의 ITX급 정도의 기차였다. KTX는 아니고 새마을호보다 조금 더 빠른...

4. 중간에 오우렌세(ourense)에서 기차를 갈아탔다. 오우렌세는 어차피 한 번은 왔어야 하는 곳이었나보다. 정확히 기술하자면 saintago de compostela - ourense / ourense - madrid 이런 경로로 갔다. 오전 9시 50분경 출발, 마드리드 오후 3시경 도착.

5. 역시 마드리드는 정신이 없다. 대도시는 대도시였다. 아참 오는 기차에서 엄청 졸았다. 정말 오랜만에 기차에서 단잠을 잤다. 그동안 정말 많이 피곤했었나보다.

6. 마드리드에 온 김에 데카트론에 들러 우비, 신발, 접는가방, 잠바를 하나 샀다. 전부 합쳐 약 100유로. 한국이었으면 훨씬 비쌌을 것이다. 아참 감기약도 하나 샀다. 약 9유로 정도. 약값은 우리나라보다 좀 비싸다.

7. sol 광장 바로 인근에 있는 i love madrid hostal에 오후 5시경 입실함. 부킹 닷컴에는 12유로로 적혀있는데 15유로를 달라고 했음. 더 움직이기 귀찮아서 그냥 결제했음. 근데 바로 후회했음. 솔 광장이랑 가까워서 그런지 투숙객들이 많았음. 다음에는 솔 광장하고 좀 떨어진 곳으로 숙소를 잡아야 할 것 같음.




* 프랑크푸르트: 마인강의 야경.

* 2020년 1월 18일 토요일: 33일차 / 마드리드 비옴, 프랑크푸르트 비오다 갬

1. 오늘은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로 이동한다. 마드리드 바라하스 2터미널에서 독일 루프트한자 편으로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향함. 오후 1시 30분 비행기고 약 2시 30분 정도 비행한다.

2. 항공편 결제를 스마트폰으로 했는데 안내 메일에 이상한 내용이 적혀이었었다. 위탁수하물이 포함 안 됐다고, 수하물을 붙이려면 또 다른 결제가 필요하다고. 루프트한자가 라이언에서 같은 저가 항공사도 아닌데 위탁수하물이 포함이 안 된다? 이게 말이 되나?

3. 무려 200유로 가까운 돈을 주고 끊은 항공권인데... 위탁수하물로 또 돈을 내라고?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체크인과 동시에 내 배낭을 위탁수하물 컨베이어벨트에 던져놓았다. 직원은 자연스럽게 내 배낭에 화물스티커를 붙여주더라. 그리고 다음 손님을 받으려고 하더라. 그럼 돈 더 안 내기 작전은 성공한 것인가?

4. 확인하는 차원에서 직원에게 물어봤다. "Is my luggage free?" / "yes"

마치 당연한 걸 왜 물어보느냐는 식으로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ㅋ

5. 피곤해서 그랬나? 비행기에서도 엄청 잘 잤다. 내 옆에 있던 스페인 노부부도 함께 잘 잤다. 기차에서도 그렇게 맛나게 잘 잤는데 비행기에서도 잘 잤으니... 이제 내게 시차적응이란 말은 없는거다!

6.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오후 4시경에 도착해서 짐을 찾은 후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이동했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은 frankfurt hauptbahnhof라고 불린다. 공항에서 멀지 않아서 좋았다. s9 노선을 타고 4정거장 정도 오니 중앙역이었다. 20분도 안 걸렸다.

7. 프랑크푸르트에는 마인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곳이 바라보이는 jugendherberge frankfurt -hausder jugend라는 긴 이름의 호스텔에 체크인했다. 부킹닷컴에는 22유로라고 적혀있었는데 25유로를 부르더라. 조식도 준다는데 그냥 25유로를 결제했다. 돈 값을 하긴 하더라. 시설이 꽤 괜찮았다. 라인강이 아닌 마인강의 야경도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좋고. 오후 6시경 입실.




* 유로조형물: 프랑크푸르트에는 유럽 중앙은행이 있다. 그 앞쪽에 유로화 기념물이 있음. 유럽 여행 중에는 주머니에 유로화가 가득있으면 행복함. 그래서 저 조형물을 떼갈까 하는... 그런 생각이...ㅋ









* santiago de compostela: 산티아고콤푸스텔라 대성당



☞ 지난 2019년 12월 17일부터 2020년 2월 11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및 유럽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전년도에도 다녀왔으니 2년 연속 탐방을 한 셈입니다. 순례길 탐방이 종료된 이후에는 20대에 못해봤던 배낭여행을 행했답니다.

독일 - 오스트리아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스위스 -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 위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못 갔지만 먼 발치에서나마 알프스 일대를 둘러보았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습니다. 여행일지는 수첩(기자수첩 사이즈)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들을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겨 놓는거라 재밌는 포스팅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 개인의 여행기가 이 공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작은 기록이 올라가지만 그것 자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역사로 이어질테니까요!


* 2020년 1월 13일 월요일: 28일차 / 맑음, 강풍이 붐

1. o cebreiro에 있는 공립알베르게에서 오전 8시 30분경에 나옴. 어제 저녁식사를 한 곳에서 아침식사를 했음.

2. 오늘은 triacastela까지 가는 코스임. 약 22km 정도이 거리임. 주로 내리막길이라 어렵지 않음.

3. 오늘은 난이도가 양호하고 주위 풍광이 아름다웠음. 하지만 바람이 좀 세게 불었다. 역시 변화무쌍한 기후를 보이는 갈리시아 지방에 온 게 맞군!

4. 오늘은 오르막도 별로 없고 길도 양호해서 목적지인 triacastela에 오후 3시경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에 입실했음. 이곳도 역시 작년에 1박을 했던 곳이다.

5. 작년에도 느낀 거지만 갈리시아 지역의 공립 알베르게는 대체로 양화하더라.

* 이동거리: 약 22km

* 누적거리: 585km



* ourense: 로마석교. 오우렌세는 동네 자체가 아름답다.





* ourense: 오우렌세에는 특이한 모습의 다리들이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즐겁다.





* 2020년 1월 14일 화요일: 29일차 / 맑음, 강풍이 붐

1. triacastela 공립알베르게에서 오전 8시 30분경에 나옴. 어제 저녁을 먹은 바르에서 아침식사를 함. 어제 저녁은 치킨샐러드 비슷한 것을 먹었는데 아주 거하게 잘 먹었음. 사실 이곳도 작년에 식사를 했던 곳임.

2. 오늘은 사리아(sarria)까지 가는 길임. triacastela에서 사리아까지는 약 18km 정도 걸림. 그리 먼 길은 아님. 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거세게 불었음. 감기 걸리기에 딱 좋은 날씨였음. 그래서 감기 몸살에 걸렸음.

3. 이 코스는 곳곳에 마을이 있지만 식사할 곳이 없다는게 가장 큰 문제임. 바르가 다 문을 닫았음. 작년에도 그랬음.

4. 오후 2시경에 사리아 입구에 도착했고 바르에 들러 허겁지겁 식사를 했음. 정말 맛나게 거하게 잘 먹음. 그런데 디저트까지 먹었는데도 겨우 7유로 밖에 나오지 않았음. 너무 저렴해서 어리둥절했음. 그러고보니 커피까지 마셨음.

5. 드디어 사리아에 도착했음. 이 도시는 이번을 포함해 3번이나 방문했음. 산티아고콤포스텔라까지 약 110km를 앞두고 있는 이 도시는 완주증을 받을 수 있는 거리에 딱 위치해 있음. 완주증은 도보로 100km 이상을 걸어야 받을 수 있기에 이곳 사리아에서 순례길을 나서는 사람도 있을 정도임.

6. 어떤 이들은 사리아에서 순례길을 시작하지만 난 이곳에서 순례길을 마쳤음. sarria - santiago de compostela 구간은 약 110km로 2014년과 2019년 1월, 이미 두 번이나 걸었음. 특히 2019년에 빡세게 걸어서 굳이 올해까지 걸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됨.

7. 이리하여 내 자전거여행 대신 행해진 순례길 여행도 막을 내림. 이제는 배낭여행자 모드로 변심함.

8. 어쨌든 큰 사고없이 순례길 여행이 잘 종료됐다. 그걸로 족하다! 사리아에 있는 credencial 알베르게(사설)에 오후 3시경 입실함.

* 이동거리: 18km

* 누적거리: 603km


* 2020년 1월 15일 수요일: 30일차 / 비오다 갬

1. 이제 도보여행으로의 순례길은 종료가 됐다. 전체적으로 컨디션도 안 좋고 다리상태도 나빠서 사리아(sarria)에서 멈춘 것이다. 이 선택에 후회는 없다. 문제는 언제 마드리드로 돌아가서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타냐였다.

2. 기왕가는 거라면 빨리 가는게 좋다는 생각에 사리아역까지 서둘러 움직였다. 전날 사리아역을 가보았기에 망정이지... 기차를 놓칠뻔했다.

3. 사리아역은 잠겨있었다. 역무원도 없었고, 티켓발권기도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발권을 하냐 이 말이다. 이때 플랫폼에 있는 현지인 부부에게 물어보니 기차를 타고 직접 승무원에게 직접 발권을 하라고 하더라! 이게 말이 되는건가? 기차도 선로를 억지로 건너가서 타아했다. 선로 무단횡단이라고 할 만 했다. 우리나라였으면 벌금감이었다. 하여간 상업운영을 하는 기차역에 역무원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4. 기차를 타서도 문제였다. 도대체 역무원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티켓을 구매하고 싶어도 구매할 방법이 없었다.

5. 기차는 약 40분 가량을 달려 ourense라는 도시에 닿았다. 기분도 그렇고 해서 그냥 하차했다. 결국 무임승차를 하게 된 것이다. 알고보니 이 기차는 갈리시아 서쪽을 달리는 지역 노선이었다. 그래서인지 객차도 2량 밖에 되지 않았다. 마드리드를 가려면 오우렌세(ourense)에서 우리나라 새마을호급으로 기차를 갈아타야했다. 어쨌든 내리긴 내려야 했다.

6. 오우렌세는 산티아고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그런데 이곳에 로마시대에 만든 다리가 있는게 아닌가! 더군다나 아직까지 현역으로 쓰이고 있다.

7. ponte roman de ourense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로마시대의 다리. 그 아래를 시원스럽게 미뉴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미뉴강을 쭈욱 타고 상류로 가면 portomarin에 닿는다. 반대로 하류로 내려가면 포르투갈과의 국경을 이룬다. 그러고보면 이 미뉴강은 갈리시아 지역과 푸르타갈 북부에서 무척 중요한 수로 역할을 하는 거 같다.

8. 로마시대 다리가 아니더라도 오우렌세는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도시 자체가 상당히 예쁘니까! 하여간 의도치 않게 기차여행을 하게 됐고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진주를 발견하게 됐다. 인생사도 이런걸까? 의외적인 것에서 얻는 기쁨... 뭐 그런거...!

9. 여기까지 와서 산티아고콤포스텔라를 안 간다는 건 무언가 마침표를 안 찍는 느낌이 들었다. 점핑을 하든 안하든 마침표는 찍어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오우렌세에서 산티아고콤포스텔라까지는 약 100km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까.

10. 그래서 마드리드행 대신 산티아고콤포스텔라행 티켓을 끊었다. 약 40분 정도 소요.

11. 딱 1년 만에 다시 찾은 산티아고 대성당! 벌써 세번째다. 하지만 다시 와도 좋다. 어쨌든 나는 다시 이곳에 서 있다. buen camino!





* santiago de compostela: 대성당 앞에서 한 컷






* 오우렌세: 로마석교. 아직도 현역으로 쓰이고 있음.






* 오우렌세: 특이한 형식의 다리. 저 맨 위쪽에 올라갈 수 있다. 전망대 역할을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

- 마음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번에는 국내를 넘어 스페인으로 이야기를 확장해볼까 합니다. 스페인에는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내용이 아닐 겁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입니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지금은 2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입니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많은 영향을 준 셈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이 역사트레킹펀딩에서도 꼭 한 번은 다뤄봐야겠지요.

    

 







 

 * 산티아고 콤포스테라라 시가지. 사진 중앙 상단에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합니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습니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지요.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습니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입니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습니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725일에 참수를 당합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겁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겁니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습니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습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습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우리언론들 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조각된 야고보.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립니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입니다. 종교다원론자(?)인 저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습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지요. 그 영감은 예전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보았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답니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저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한국 컵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많기에 저런 광고문구가 나왔으리라...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됩니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의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습니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지요.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집니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수준으로 서술하였더군요.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요?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요?

 

 




* 이베리아 반도 지도. 야고보의 제자들이 이베리아에 가려고 했다면 바로셀로나 같은 동부 지역에 닻을 내렸을 것이다. 뭐하러 지르롤터를 거쳐 대서양까지 나갔다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먼 길을 돌아갔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이 탄 배는 나룻배 수준이었을텐데. 한편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포함하는 서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습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611,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습니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습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합니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를 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릅니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됩니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입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을 겁니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습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답니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 산티아고 개: 산티아고 도심 입구 쪽에 있는 대저택에서 기르던 개. 무척 귀여워서 한 컷!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저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저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죠.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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