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학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재미나게 보고 있다. 역시 사극은 퓨전 사극이 아니라

정통 사극이다. 퓨전 사극이 젊은 연기자들의 비주얼을 전면으로 드러낸다면 정통 사극은

노련함을 앞세운 중년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력이 돋보인다.

 

강감찬 역으로 최수종이 캐스팅됐다고, 또 수종이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최수종이 사극

연기에 진심이기에 캐스팅이 된 게 아닐까?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왜 강감찬 장군 역으로 최수종일까?

거란과의 3차 전쟁에서 거란군을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찍어눌렀던 강감찬 장군이었는데...

좀 더 강인한 얼굴을 한 연기자가 강감찬 장군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이를테면 마동석?ㅋ

 

사실 강감찬 장군은 문관 출신이었다. 잠시 역사 시간을 생각해보자! 고려 시대 무관을 뽑는

과거 시험은 후기에나 실시됐다. 강감찬이 활약을 했던 고려 전기에는 문신을 뽑는 과거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면 왜 문신 출신이면서 최전방에서 군대를 지휘한 것일까?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이들을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말한다. 나가서는 장수요, 안에서는 재상의 역할을 하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말하는 것이다.

 

강감찬은 출장입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김종서, 권율, 이순신 장군 등도 출장입상형

인재들이다.

 

강감찬 장군은 관악산 낙성대에서 출생을 하셨다. 관악산은 필자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그런 이야기를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10꼭지 '관악산 역사트레킹'편에 담아봤다.

드라마에 편승해서 이런식으로 숟가락을 올리는군~^^

 

 

 

 

 

● 문관 출신 최전방 사령관, 강감찬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아, 그렇군요!”

 

필자의 설명에 하나같이 참석자들은 놀랬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이 아닌가?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 보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던 것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국사 뜰 안에는 그런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삼층석탑이 서있다. 상륜부라고 불리는 맨 꼭대기는 무너져 내렸지만 나머지는 천 년 가까운 세월을 잘 버텨내고 있다. 이 탑은 원래 장군의 생가에 있던 것을 안국사가 만들어지면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필자는 계속 ‘강감찬 장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감찬은 문신 출신이었다. 한국사 시간을 곱씹어 보시라. 과거에서 무관을 뽑았던 건 고려 후기 이후였다. 고려 초기 사람이었던 강감찬은 당연히 문관 출신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강감찬은 문·무에 모두 능한 인재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하는데 ‘나가서는 장수(將帥)요,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라’는 뜻이다.

 

도교에서는 문(文)을 관장하는 별을 문곡성(文曲星)이라고 칭한다. 문(文)이 뛰어난 사람을 두고도 문곡성이라는 말한다. 그런데 강감찬도 문곡성이라고 불렸다. 최전방 사령관이자 문곡성이었던 강감찬!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헌공 강감찬은 84세에 천수를 누리다 영면하셨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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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악산 정기 아래~

 

관악산이 올려다 보이는 지역에서 초중고를 모두 다녔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교가에 ‘관악산 정기 아래’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었다. 마치 누구 한 사람이 작사한 것처럼 모두 다 ‘관악산 정기 아래~’였다. 그때는 그런 교가가 우스웠고 한편으로는 싫었다. 학창시절 12년 동안 조회시간만 되면...

 

‘도대체 관악산과 내가 무슨 상관인가? 관악산의 정기가 시험 문제에 나오기라도 하던가?’

 

그런데 지금은 보시다시피 관악산에 있는 낙성대 탐방기를 작성하고 있다. 필자에게 관악산은 중요한 존재가 됐던 것이다. 정기가 있는지 없는지는 입증할 수 없으나 어쨌든 관악산은 필자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베이스캠프 같은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럼 교가대로 된 것인가?

 

 

● 서울의 남주작, 관악산

 

누구나 다 동의하듯이 서울의 으뜸산은 북한산이다. 그럼 그 다음 순번은 어느 산일까? 당연히 관악산(冠岳山)이다. 한강 이북에 북한산(837m)이 버티고 있다면 이남에는 관악산(632m)이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가까이에 있는 청계산이 618미터로 그 아성에 도전해보지만 역시 관악산의 관록에는 당해낼 수가 없다.

 

조선이 건국된 후 관악산은 북한산과 함께 외사산(外四山)이 되었다. 한자에서도 보이듯 외사산은 서울 외곽을 두르고 있는 4개의 산을 말한다. 남쪽 관악산, 북쪽 북한산, 동쪽 아차산, 서쪽 덕양산이다. 덕양산은 좀 낯선 이름일지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실 것이다. 행주산성.

 

그렇게 한양의 남쪽 외곽에 자리잡은 관악산은 주작이 되었고, 북한산은 북쪽의 현무가 되었다. 그 위상에 맞는 옷을 입은 것이다. 참고로 서울의 좌청룡은 낙산이고, 우백호는 인왕산이다. 낙산은 이화동 벽화마을을 품고 있는 작은 산이다. 낙산공원으로 유명한 그 산이다.

 

 

 

 

 

* 안국사

 

 

 

 

 

 

 

● 별이 떨어진 곳, 낙성대

 

서론이 길어졌다. 본격적으로 관악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낙성대((落星垈)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자.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라는 뜻의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생가이다. 서울 남부권에서 학창시절을 보내셨던 분들은 소풍 때문이라도 낙성대 인근을 몇 번 가보셨을 것이다. 필자도 여러 번 가봤다.

 

강감찬 장군의 집안은 호족이었다. 5대조인 강여청이 경주에서 관악산 아래로 이주를 해왔던 것이다. 지금이야 낙성대가 있는 곳이 서울시 관악구이지만 예전에는 금주(衿州)로 불렸었다. 옆 동네인 금천구(衿川區)에 옛 지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강감찬의 아버지는 강궁진이었는데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일조를 했고, 그에 따라 삼한벽상공신이 되었다. 이렇듯 강감찬 장군은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강감찬 장군과 관련해서는 꽤 많은 설화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일단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는 낙성대부터 그렇다.

 

- 어떤 사신이 어두운 밤에 금주 일대를 거닐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고, 사신은 별이 떨어진 집에 찾아가게 됐는데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아이를 낳은 것이다. 이에 사신은 아이를 데려가 길렀는데 그 아이가 바로 강감찬이었다.

 

뻥이다. 말 그대로 설화일 뿐이다. 감히 누가 삼한벽상공신의 아들을 몰래 빼돌리겠는가. 또 이런 설화도 있다.

- 당시 삼각산(북한산) 일대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호환 피해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한양부 판관이 된 강감찬이 부적을 써서 두 명의 승려에게 전하며, ‘무리를 이끌고 가라’라고 명했다. 이에 승려는 호랑이로 변한 후 사라졌고 이후 호랑이에 의한 피해도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도 역시 설화일 뿐이다. 부적을 알아먹는 호랑이가 있을까? 더군다나 강감찬이 관직에 있을 때는 한양부라는 명칭이 없었다. 남쪽의 서울이라는 남경(南京)이 등장할 때가 1067년(문종21)이었다. 강감찬은 서기 948년에 태어나서 1031년에 돌아가셨다.

 

이외에도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설화들은 상당하다. 84세에 돌아가셨으니 그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장수를 하셨다. 그래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다. 이렇게 민간설화들이 많다는 것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강감찬 장군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낙성대 3층 석탑

 

 

 

 

 

 

 

 

* 낙성대 3층 석탑: 기단과 1층 탑신을 확대해보았다.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보인다. 기단부는 간극이 보이는 등 정교해보이지 않는다.

 

 

 

 

 

 

 

● 낙성대3층 석탑

 

일단 먼저 생가터를 탐방해보자. 현재 생가터는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데 딱히 주목할 만한 문화재가 있지는 않다. 생가터임을 알리는 유허비와 오래된 향나무가 탐방객을 맞이할 뿐이다. 하지만 이곳이 오리지널 낙성대이다. 별이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낙성대로 알고 있는 곳, 필자가 소풍을 갔던 곳은 생가터에서 약 300미터 떨어진 곳인 안국사(安國祠)이다. 사당사(祠)에서도 보이듯 안국사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일대를 낙성대 공원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이곳을 낙성대라고 착각한다. 안국사는 장군이 거란을 물리치고 받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이라는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안국사의 외삼문을 지나면 낙성대3층 석탑이 탐방객들을 맞이한다. 낙성대3층 석탑은 약 4.5미터에 달하는데 사찰이 아닌 공간에서 이렇게 큰 석탑을 볼 수 있다는 게 흥미롭다. 임진왜란 때 위쪽인 상륜부를 비롯한 탑 일부가 훼손됐다고 하니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훨씬 더 우람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탑은 강감찬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사리탑 형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3세기경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800년 이상 관악산의 정기를 받았다는 뜻이 된다.

 

석탑은 사찰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건립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장군을 위해 큰 석탑이 만들어졌다는 건, 당시 고려 사람들이 강감찬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래 이 탑은 앞서 언급한 생가터에 있었다. 그러다 1974년 안국사가 세워진 후, 현재의 자리로 이동을 했다.

 

“이 탑이 몇 층일까요?”

“4층 아니에요?”

“땡! 3층입니다. 하단에 큰 네모 부분은 기단입니다. 기단은 층수로 안 쳐줘요. 탑의 층수 맞추기가 아리송하면 저기 옥개석의 개수를 세어보세요. 옥개석 개수가 층수에요. ”

 

옥개석은 지붕처럼 탑신을 덮어주는 부분을 말한다. 어쨌든 낙성대3층 석탑은 탑신에 비해 아주 거대한 기단부가 인상적이다. 가까이 가서 볼 수 있으니 꼼꼼히 관찰해보자. 1층 탑신에 적혀 있는 姜邯贊落星垈(강감찬낙성대)라는 각자도 잘 살펴보자. 탑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기단석과 1층 탑신 사이에 별도로 올린 괴임돌을 잘 한 번 살펴보자. 그렇게 괴임돌 처리를 한 석탑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기마상: 말은 역동적으로 잘 표현됐는데 장군님의 다리가...

 

 

 

 

 

 

 

● 강감찬 장군을 만나다!

 

이제 내삼문을 지나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친견하러 간다. 잘 알려지다시피 강감찬 장군은 거란과의 항쟁에서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런 장면들을 그림으로 담아 장군의 영정과 함께 걸어두었다. 

 

고려는 개국 초부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에 거란은 993년(성종12) 1차 침입, 1010년(현종1) 2차 침입, 1018년(현종9) 3차 침입 등 세 번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입 때 상원수가 되어 최전방 사령관으로 전쟁에 임하게 됐는데 이때가 70세였다. 대단한 노익장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이야기는 잘 아실 것이다.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전멸에 가깝게 몰살시킨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보신 후 건물 뒤편 후원으로 잠시 눈을 돌려보자. 울타리 넘어 보이는 숲이 아주 울창하다. 후원은 가을에 가면 더 좋다.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필자도 낙성대 역사트레킹을 주로 가을에 행했었는데 그때 트레킹팀과 함께 가을 단풍사진을 찍었었다.

 

공원 앞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기마상도 꼭 보고 가자. 말이 아주 역동적으로 잘 표현됐다. 적토마같다. 그에 비해 장군의 발은 너무 짧게 표현했다. 너무 숏다리다.

 

이렇게하여 낙성대 탐방이 종료가 됐다. 끝내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계속 강감찬 ‘장군’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정말 장군이 맞으신가? 정확히 강감찬은 문신 출신이다. 983년(성종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셨다. 한마디로 문무를 겸비하셨던 것이다.

 

뒤쪽에 늠름하게 서있는 관악산이 듬직해 보인다. 낙성대공원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관악산의 정기가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교가 한 번 부르면서 관악산의 정기 좀 느껴볼까?

 

 

 

 

 

 


 

 

 

 

 

■ 낙성대

1. 코스: 낙성대역 ▶ 생가터 ▶ 안국사(낙성대공원) ▶ 잣나무숲

2. 가는법: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하차한 후 인헌초등학교 방면으로 이동하면 생가터에 닿을 수 있음. 이후 낙성대공원으로 이동함.

3. 같이 가면 좋을 곳: 잣나무숲 ☞ 안국사 외곽부에 자리함. 느긋하게 삼림욕을 하기에 좋음.

 

 

 

 

 

 

* 낙성대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지난 3월 12일 일요일에 행한 관악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후기입니다.


총 9강에 걸쳐 기획된 2017년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강의가 관악산에서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진행된 것입니다.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길인역)은 트레킹을 하며


역사를 배우자는 의미로 개설된 평생교육 카페입니다. 명소를 다니며 트레킹도 하고, 역사와 문화도 배우면


좋잖아요. 요즘처럼 인생 2막, 3막을 준비하는 시대라면 길인역 같은 프로그램은 더욱더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그동안 동장군이 얼마나 얄미우셨습니까? 엉덩이가 들썩들썩 거리는데 그 넘의 동장군이란 넘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그렇게 동장군을 몰아내는 봄기운이 관악산에도 찾아왔습니다. 그 기운을 맞으며 트레킹팀은 관악산을 누볐답니다.


웃고, 즐기고, 이야기하고... 맛나는 거 나눠 먹고.


사진을 보십시오. 얼굴에 모두 다 봄을 품고 있잖아요! 정말 멋지십니다!


길인역 트레킹팀은 강감찬 장군의 생가지인 낙성대, 그 분의 뜻을 기리는 안국사를 탐방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를 거쳐 가톨릭 성지가 있는 삼성산 성지도 답사를 했답니다.


아직 봄꽃들이 머리를 내밀지 않아 좀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지천으로 봄꽃들을 만나게 될 테지요. 그때 다시 한 번 관악산을 탐방했으면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답니다.


하여간 오랜만에 행하는 트레킹이라 정말 즐거웠답니다. 다음에는 더 즐겁고, 더 알차게 트레킹을 해보자고요! 






*** 참고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은 계속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길인역 카페를 방문해주세요!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








 

 






 





 
















 

사진을 보니 다 예술이네요... ^^


봄을 품고 있는 모습들이 다 좋아보입니다. 그런데 제 얼굴은 봄이 아니라 붕 떠보이네요. 그날 잠을 못 자서 그런가? ㅋ








* 트레킹팀.









관악산은 내 베이스캠프

 

둘레길 따라가는 관악산 역사트레킹

 



 

당신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입니까?

 

산악인인 엄홍길 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키운 건 도봉산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같은 으리으리한 산들이 아니라 동네 뒷산인 도봉산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목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엄홍길 대장의 베이스캠프는 도봉산?’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있으신가요? 트레킹이나 등산을 즐겨하시는 분들은 각자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하나씩 있을 겁니다. 물론 여기서의 베이스캠프는 사전적인 의미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다리 근육을 키운 곳을 말하는 겁니다. 통을 키우고, 잔뼈를 궂게 해 준 그런 곳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아웃도어 지수를 높여준 곳을 뜻하는 것이죠.


그럼 저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일까요? 바로 관악산입니다. 동네 뒷산은 아니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던 관악산이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곳을 걸어 다니며 다리근육을 키웠고, 아웃도어 지수를 높였던 것입니다.

 





* 관악산 장승


 



 

남부 서울의 진산관악산

 

서울에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렇게 두 산은 서울의 남북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북한산을 서울의 최고 산으로 인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관악산은 항상 넘버 2’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강 이남으로 국한을 시키면 관악산이 당당히 진산의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서울 남부권에 관악산만한 산이 없거든요.


이미 삼국시대부터 관악산의 중요성은 부각되었습니다.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을 얻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의 남쪽 방어를 위한 산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듯 관악산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이런 역사성 때문인지 관악산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광화문에 해태상이 조각된 이유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편이라는 이야기, 조선 태종이 셋째 세종에게 양위를 할 것을 눈치 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도성을 빠져나와 왕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했다던 연주대이야기.


하지만 연주대(戀主臺)는 그 한자 이름에도 나타났듯이 왕좌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던 공간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럼 관악산을 누비며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 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힘들게 등산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수월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강감찬 장군 기마상: 말은 역동적으로 잘 조각됐다. 하지만 장군의 다리를 보라. 너무 짧지 않은가? 기왕하는 거 잘 만들지. 장군을 숏다리(?)로 만들어 버렸다.


 




 

노익장을 발휘한 문신 출신, 강감찬 장군

 

트레킹팀도 떠났습니다. 일명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하기 위해서!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성대였습니다. 수많은 관악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과 그의 생가인 낙성대(落星垈)일 것입니다. 낙성대라는 의미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굳이 신화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역사적인 인물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군사정권 시절, 성역화 작업의 한 대상자였던 강감찬에 대해 외면하고 싶은 시각도 존재할 것입니다. 현재의 낙성대는 1974, 유신헌법이 한참 맹위를 떨칠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 그래요!”

 

제 설명에 참가자들이 좀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놀랐습니다.





* 안국사: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낙성대 공원 안에 있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들이 아니었습니까?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보죠.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기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답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습니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낙성대 3층 석탑 좀 보세요.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인데요. 12세기 경에 건립됐으니 천 년의 세월을 버틴 탑이라네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탑이라는 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아 놓는 조형물이잖아요. 그런데 강감찬 장군은 부처님도 아니고 유명한 고승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곳에 탑이 세워졌습니다. 아무래도 강감찬 장군의 위엄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던 것 같아요.”

 

 




* 낙성대 3층 석탑





 

삼성산 성지

 

낙성대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시작됐습니다. 트레킹 팀은 서울대 입구를 지나 삼성산 성지로 향했습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으로 원효, 의상, 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삼성산에 있는 천년고찰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삼성산에 성지가 있는데 불교 성지가 아니라 천주교 성지입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입니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하여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습니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 세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 삼성산 성지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되었습니다.


삼성산 성지는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입니다. 성지라서 그런지 다른 탐방객들도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경건하게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트레킹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께서는 잠깐 동안 기도를 올리더군요.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입니다. 트레킹팀도 삼성산 숲에서 신선한 피톤치드를 온 몸으로 맞으며 기분 좋게 삼림욕을 했답니다

 

관악산의 또다른 자랑인 메타세쿼이어 숲 탐방을 끝으로 관악산 역사트레킹도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수도 없이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오를 생각입니다. 지겨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관악산에 발을 디디면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지금도 다음에 행할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떠올렸는데 벌써부터 흥분이 되네요. 역시 자신의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항상 즐거운 일인 듯싶습니다.

 

 



* 삼성산 성지: 한 중년 남성께서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관악산역사트레킹

 

1. 코스: 낙성대역 낙성대 서울대입구 헬기장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당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3월 15일 일요일에 관악산으로 역사트레킹 하러 갑니다.

같이 가실 분 있으신가요? 아래 신청하러를 꾹 눌러주세요!

 

 

관악산둘레길 역사트레킹  ---> 신청하러 가기

 

 

 

 

 

 

 

 

 

 

 

 

 

 

 

 

 

 

 

 

* 낙성대: 낙성대 3층 석탑을 바라보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석자들 

 

 

 

 

 

* 삼성산 숲: 메타세쿼이어 군락지 앞에 선 참석자들.

 

 

 

 

* 삼성산 숲: 위쪽 사진에 있는 메타세쿼이어 숲이 무성해진 모습.

 

 

 

 

 * 코스명: 낙삼성길 ( 낙성대와 삼성산에서 글자를 조합하여 네이밍을 했음. 한편 이 곳은

일명, 관악산 A코스임 . 경기도 안양 방면에서 이동하는 관악산 B코스도 개척할 예정임.)  

 

* 이동경로: 낙성대역 ▶ 낙성대 ▶ 서울대입구 ▶ 장승마을 ▶ 헬기장 ▶ 삼성산 성지 ▶삼성당 성당

 

* 역사유적: 

1. 낙성대: 강감찬 장군의 업적에 대한 설명. 거란과 송나라 등 당시 동북아 지역 상황에 대한 설명. 낙성대 3층 석탑과 옛 백제계 석탑에 대한 비교 설명 등

2. 삼성산 성지: 기해박해(1839년)에 대한 설명. 병인박해 등 우리나라 천주교의 핍박의 역사에 대한 설명.

3.  기타: 김종서 장군 등 문신 출신 명장에 대한 설명.  

 

 

* 특징: 서울 근교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이 용이함. 봄에는 철쭉이 만개하여 장관을 이룸.

 

* 이동거리: 약 8km

 

* 예상 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휴식시간 포함)

 

* 난이도: 중 ---> 오르막 길이 있으나 그렇게 험하지 않음.

 

* 방향찾기(표식물): 있음. 관악산 둘레길 표식을 찾아 가면 됨. 단 '낙성대역 ▶ 낙성대' 구간과   '삼성산 성지 ▶삼성당 성당' 구간은 수정구간임.

 

* 이용불가 계절: 겨울. 단, 겨울 장구들을 준비하면 탐방이 가능함.

 

* 특이사항: 관악산 둘레길 A와 B코스 위주로 이동하지만 둘레길과 동일하게 걷지 않고 좀 수정하여 탐방함.

 

 

* 교통편: IN - 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3번 출구 이용 / OUT - 삼성산 성당 아래에 위치해 있는 미림여고 앞에서 시내버스 탑승 후 2호선 신림역 등을 이용함.   

 

* 후기:  후기보러 가기 ---> 클릭

 

 

 

 

 * 낙성대: 강감찬 장군 동상 앞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한 컷

 

 

 

 

 

* 관악산 둘레길 

 

 

 

 

 

* 관악산 둘레길 사진: 공식 관악산 둘레길 지도임.

 

 

 

 

* 낙성대 3층석탑: 12세기 경에 건립된, 낙성대 3층 석탑을 바라보고 있는 참가자들. 낙성대 3층석탑은 고려시대 건립된 탑으로

강감찬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한편 석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그래서 석탑은 대개 사찰이나

폐사지에 세워진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낙성대는 사찰이 아니다. 사찰이 아닌 곳에 석탑이 세워진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낙성대 3층 석탑은 강감찬 장군의 위상을 나타내주는 징표가 아닐까?

 

 

 

 

* 강감찬 장군 동상: 작년 여름경에 촬영한 사진임.

 

 

 

 

 

제목: 관악산둘레길 역사트레킹

일시: 2014년 3월 8일 일요일 오후 1시

이동경로: 낙성대역 ▶ 낙성대 ▶ 서울대입구 ▶ 장승마을 ▶ 헬기장 ▶ 삼성산 성지 ▶삼성당 성당

일행: 총 7명. <집밥>에서 모객을 했음.

 

 

 

 

 

 

 

 

 

 

 

 * 단체사진

 

 

 

 

 

 

 

 

* 삼성산: 삼성산 바위턱에 올라 서울대학교를 바라보고 있는 참가자들.

 

 

 

 

* 삼성산: 참가자 한 분이 서울대를 바라보고 있다. sue님이다.

 

 

 

 

* 삼성산 성지: 참가자 한 분이 삼성산 성지(천주교)에 있는 팻말을 촬영하고 있다. 재섭님이다. 

 

 

 

*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숲길: 아직은 황량하지만 이제 곧 짙은 녹음으로 울창한 수림을 이룰 것이다. 왼쪽에 있는 나무들은 메타세쿼이어다. 메타세쿼이어들이 울창해질 때 다시 한 번 이 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 삼성산 성지: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분의 모습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사전 답사때 촬영한 사진이다.

 

 

 

 

 

* 트레킹: 관악산둘레길 역사트레킹에 참석한 참가자 분들. 발걸음들이 가볍다. 한가지 안타까웠던 건 아직은

겨울산의 자취가 남아 있어 녹음이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꽃도 피고, 새싹도 파릇파릇하면 시각적으로도 훨씬 더 풍성하게 트레킹을 할 수 있을 듯싶다. 

 

 

 

 

* 메타세쿼이어: 관악산에도 저런 울창한 수림이 있다. 이 사진은 2012년 5월에 찍은 사진이다.

 

 

       * 2코스 숲 : 2코스가 끝날 무렵 저렇게 울창한 숲을 만날 수 있다.

나도 관악산을 많이 다녔는데 이런 나무 숲은 처음이었다.

 

 

 



 

* 손성일 대장님과 아도행 회원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아름다운 도보여행 회원분들과 함께한 관악산 둘레길 걷기>

 

 

 

일시: 2012년 5월 16일 수요일

장소: 관악산 둘레길 1~2코스

소요시간: 약 4시간 30분 정도( 식사시간, 휴식시간 포함)

인원: 손성일 대장님을 비롯한 아도행 회원님

기타: 날씨 맑음. 사진빨 잘 받는 날씨였음!

 

 


 

 

* 1코스를 걷고 있는 아도행 회원들: 1코스를 지나면 낙성대가 나온다.

 

 

 

 


 

단독으로 지리산에 가고, 단독으로 자전거 전국여행을 다녀오고, 단독으로 트레킹을 하고...

그러고보면 난 계속 단독으로만 아웃도어를 즐긴 것 같다. 왜 단독으로만 아웃도어를 하고 다녔냐는 상대방의 물음에 항상 머뭇거렸었다. 특별히 모범 답안 같은 것도 없을 뿐더러, 괜히 '친구도 없는 왕따라서 혼자 다녀요!'라고 실토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ㅋ

 

내가 아도행을 알게되고 관심있게 지켜본 계기는 2010년도에 있었던 삼남길 개척단 때문이었다. 난 삼남길 개척단 1기였고 거기서 손성일 대장을 처음 만났는데 손대장님이 개척단들에게 아도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나야 등산, 자전거, 트레킹을 골고루 하는 짬뽕 아웃도어 맨이지만 한편에서는 항상 이런 생각들이 맴돌았다.

 

'아웃도어의 종착점은 어딜까? 결국 그많은 아웃도어 마니아들은 다 어디로 회귀를 할까?'

 

 



 

 * 1코스: 1코스를 누비는 아도행 회원들 

 

 

 


 

내가 내린 답은 도보, 즉 걷기였다. 결국에는 도보로 돌아올 거라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난 작년에 재밌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7월 경이었는데, 당시 난 제2차 자전거 국토종단 여행중이었다.


전북 진안을 지나고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걷기 국토종단을 나선 어떤 분을 만난 것이다. 나처럼 단독여행자였는데 그 분은 나를 무자게 부러워하더라~ 20kg짜리 배낭을 메고 이동을 한 것 자체가 고역이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내가 무척 부러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난 그 도보여행자 분이 정말 부러웠는데. 무동력(No-moter)여행 중에서 가장 최고봉은 아무래도 걷기가 아닐까 한다. 자전거여행도 만만치 않게 힘들긴 하지만 도보여행자 앞에서는 그저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잠깐! 그럼 당시, 나와 그 도보여행자는 서로서로를 부러워 한 셈인가? ㅋ

 

내 아웃도어는 차후에 도보여행으로 종결지어질 것 같다. 어차피 내가 그렇게 체력이 강한 편도 아니지 않은가. 분명 피지컬적인 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신체가 허락하는 한, 난 계속해서 아웃도어를 즐기고 싶은 만큼 도보여행이 가장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든다.

 

 



 

* 낙성대: 관악산 둘레길 덕분에 낙성대도 오랜만에 가봤다!

 

 

 

* 강감찬 장군상: 강감찬 장군의 기상이 느껴지는 동상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번 아도행 회원분들과의 관악산 둘레길 걷기는 참 좋은 시간이었다. 나보다 훨씬 더 연배가 높으신 분들과 함께 걷기를 한 것도 참 오랜만에 일이었다. 역시 아름다운 길은 혼자 가는 것보다 여러명이서 함께 걷는 것이 더 좋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일행 모두가 동시에 감탄사를 외쳤을 때의 느낌이란!


축구에서 우리가 응원하는 팀이 골을 넣었을 때,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것과 대동소이하다고 할까나?




관악산은 서울 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명산이지만 관악산에 둘레길이 개설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관악산 둘레길을 걷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당시 우리가 이동했을 때가 주중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관악산 주 등산로를 이동하는 사람들과 비교를 해보면 확실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홍보의 미흡함도 있겠고, 아직 전 구간이 다 개통되지 않은 점 등 미비점들이 있긴 하다.

 

 



 

* 2코스: 2코스 입구에는 장승들이 줄지어 서 있다. 2코스는 예전에는 무척 지저분했었다. 등산로도 정비가 안 됐고

쓰레기들도 많았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저렇게 정비가 잘 된 길로 변했다.

 

 

 



 

또한 손 대장님이 지적을 한 것인데 둘레길이라고 하면, 높아봐야 5부 능선 사이에서 길이 개설되어야 하는데 애초에 관악산 둘레길은 7부 능선 이상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구상됐다고 한다. 등산을 즐겨하는 사람들은 5부든 7부든 상관은 없겠지만 아웃도어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7부보다는 5부 이하에서 걷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래야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덜하지.

 

토르님도 1코스 시작지점이 급경사가 아니냐는 의문을 던지셨다. 하긴 내가 봐도 1코스의 시작점은 좀 경사도가 높긴 했다. 또한 협소하기도 하다. 그래서 팀으로 이동하는 분들은 따로 준비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어찌댔든 애초 기획안보다는 현재의 노선이 좀 더 걷기 편해졌다고 한다.

 

역시 관악산 둘레길도 등산하는 느낌을 준다. 단지 수직적인 개념이 아닌 수평적인 개념을 전해준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번 도보여행은 1~2코스만 행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1~3코스까지 통으로 한 번 다 걸어보고 싶다. 아카시 꽃이 만발한 관악산이 집근처에 있어서 참 좋다. 조만간 또 한 번 가봐야겠다.

 

 



 

 

*2코스: 장승들 사이를 걷고 있는 손 대장님

  

 

 

 

 

* 관악산 둘레길 지도: 관악산 메인 등산로 하고는 많이 차이가 난다.

'A코스',  'B코스'라는 표시는 내가 임의 편집하여 만든 것이다.

 

 


 

 

 *** 4년 전에 쓴 글인데... 이번에 블로그 정리하면서 다시 재정열, 갈무리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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