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산티아고에 한국인이 많냐고? 스트레스 사회라서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⑤] 산티아고를 걷는 한국인들

 

15.01.06 13:18 최종 업데이트 15.01.06 13:18

 

 

 

 

 

 

 

 

 

 
▲ 멜리다 중심부에 위치한 성당 멜리다는 내륙에 위치했지만 문어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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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7일, 여행 5일째다.


"저 고백할 게 있습니다."

필자의 뜬금없는 말에 순례팀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저, 사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스페인어였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따가운 시선과 함께 핀잔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렇게 스페인어를 몰라!"

 

 



 
▲ 개 신기한 듯 필자를 쳐다보고 있는 개. 그러고보니 '아니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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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말(animal)'들은 일단 맞고 시작했다


그 말이 맞다. 필자가 아는 스페인어라고는 CASA(집)와 ANIMAL(동물) 같은 간단한 단어들뿐이다. 아예 회화는 불가능하고 저런 간단한 단어들 정도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제대로 스페인어를 공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대신 몽둥이찜질을 당한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스페인어 선생님은 단어 암기를 무척이나 강조하셨다. 그래서 매일같이 단어 쪽지 시험을 봤다. 스페인어는 발음 기호가 없어 로마자를 그대로 발음한다. 예를 들면, bar를 '바르'로 animal을 '아니말'로 읽는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며 줄을 세우셨다.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은 아니말입니다. 아니말들은 일단 맞고 시작합시다."

필자는 스페인어 시간마다 '아니말'이 되어 두들겨 맞는 줄에 세워졌다. 그외에 스페인어 학습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저 '동물적 감각'으로 그 시간을 회피하고 싶었다는 것과 볼기짝의 아픈 트라우마가 있을 뿐.

저토록 형편없는 스페인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 트레킹을 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물론 스페인어 뿐 아니라 영어까지 능통하면 여행이 더 윤택해질 수 있고,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나 영어가 완숙되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만큼 산티아고 순례길은 외국어가 짧은 사람도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도보여행자들이 순례를 떠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 개와 순례자 개 한 마리가 순례팀 막내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막내는 너무 발에 꽉 끼는 트레킹화를 신어 고생을 많이 했다. 결국에는 트레킹화를 벗고 슬리퍼를 신고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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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물집을 터뜨리며 '아니말'이 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의 현실이란 바로 육체적인 괴로움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깨와 무릎 통증, 더불어 물집이다. 그런데 어깨와 무릎 통증은 각 개인별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물집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순례자의 숙소인 알베르게에서는 밤마다 물집을 터트리는 순례자들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자도 그런 신음 소리 대열에 참가했다. 잘잘한 건 그래도 터트리는 맛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대왕 물집을 터트릴 때는 인간이 아닌 '아니말'이 되어 비명을 내질렀다.

"아, 읔"

 

 

 



 
▲ 신라며 컵라면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저런 광고문구를 내건 기념품 가게도 있었다. 그나저나 저 광고문구를 보니 입 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계란 탁, 파 송송 썰어 김치 한조각 올려 후르륵~ 필자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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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 서구권 순례자들은 우리에게 물었다. "왜이리 한국인들이 많이 오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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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스트레스가 많아서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보면 많은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아마도 비유럽권 순례자들 중에서는 한국인들이 단연 압도적일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 현지인들과 서구에서 온 순례자들은 이렇게 많이 물어왔다.

"왜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그들이 보기에 한국은 불교나 유교 국가일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라는 가톨릭 성인을 기리는 순례길 곳곳에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난다는 건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서구인들이 물어왔을 때마다 필자는 못하는 영어로 떠듬떠듬 설명을 했다.

한국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척 많이 알려졌고, 이 길을 걷고 싶어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넣은 사람들이 많다고. 필자의 영어가 짧아서 그런지 흔쾌히 납득했던 표정을 지은 사람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미국 알래스카에서 온 노부부와 함께 잠깐 휴식을 취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왔어요. 이제 곧 목표한 지점에 도달합니다."
"대단하세요. 그런데 힘들지 않으세요?"
"아니요. 우리는 쌩쌩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은 거죠?"


필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한국이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노부부는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는 '스트레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보온병을 꺼내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씩씩하게 걸어가라고 주는 차 한 잔이었다.

 

 

 


 
▲ 멜리데 저 다리를 넘으면 멜리데 시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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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요리로 유명한 내륙도시 멜리데


순례팀의 목적지는 아르주아(Arzúa)였는데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멜리데(Melide)라는 도시를 지나야했다. 멜리데는 바닷가와 많이 떨어진 곳임에도 문어(pulpo)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이 도시에 들러 꼭 문어 요리를 맛 본다고 한다.

그날은 트레킹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트레킹이든 자전거여행이든 3일째가 제일 힘겨운 법이다. 그 순간을 넘기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완주를 할 수 있다. 그만큼 고비라는 뜻이다. 여행 수첩에도 그날 무척 힘들어다는 기록이 구구절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필자는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후미에 섰는데 말이 사진사 역할이었지 다리가 후들거려서 자연스럽게 뒤로 처졌던 것이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힘겨운 날에 멜리데 인근에서 철웅이를 만났다. 대학생이었던 철웅이는 다국적 팀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영어를 잘해서 그런지 일행들과 능숙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 그대로 다국적으로 '놀고' 있었다. 얼마나 부럽던지!

거의 한 시간 이상 철웅이와 이야기를 하며 걸은 것 같다. 홀로 걸었으면 그냥 주저앉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격려를 하며 걸어가니 훨씬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격언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그렇게 동행이 되어준 철웅이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딱히 해줄 건 없고 해서, 내륙에 위치한 멜리데가 왜 수산물(문어)의 산지인지를 알려주었다.

"혹시 충남 논산에 강경이라는 곳 알아요? 거기도 내륙 안쪽에 있는 곳인데 젓갈 산지로 유명해요. 예전에는 쌀과 수산물 집산지로도 유명했고요. 그게 다 금강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 강을 따라 배들이 올라왔던 겁니다. 이 곳도 마찬가지에요. 대서양에서 잡은 문어를 옛날에는 내륙수운을 통해서 여기까지 가지고 온 거죠."

실제로 멜리데 주위로 카타솔 강(rio catasol)과 프레로스 강(rio furelos)이 흐르는데 이 두 강은 합수되어 울라 강(rio ulla)이 된다. 이 울라 강은 대서양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강경도 이와 비슷하다. 금강은 옥녀봉 인근에서 논산천을 합수하여 더 큰 강폭을 자랑한다. 그리고는 유유히 서해바다로 빠져나간다.

 

 


 
▲ 철웅이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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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워도 아니말이 되지 말자!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아직 철웅이처럼 대학생 신분이거나 과감히 사직서를 쓰고 온 20대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은 아직 스트레스 사회의 중심에 섰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본격적인 스트레스 사회 진입을 위해 준비중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이 직면해야 하는 현실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갑보다는 을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 사회의 중심에 놓이게 되면 대왕 물집을 터트리며 걷는 순례길의 현실을 무척이나 그리워 할지 모른다. 그런 척박한 현실이 싫다고 도망갈 수 없다. 그러면 정말 '아니말'이 되는 것이다. '아니말'이 되지 않기 위해 파이팅 한 번 해보자. 좀 늦었지만 2015년 새해 각오도 다지면서...

"힘들고 외로워도 파이팅입니다! 가야할 길이면 가야 하는 게 운명이잖아요. 여행이든 현실이든..."

 

 



 
▲ 메모 한국인 순례자가 적어 놓은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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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장거리 도보여행을 할 때에는 일반 운동화보다는 트레킹화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 예행연습을 하며 미리 국내에서 길을 들여야 한다.

 


2. 트레킹화는 자신의 발보다 5㎜ 정도 큰 것을 장만하는 게 좋다. 그 여유 부분은 양말이나 끈 조임으로 조절할 수 있다. 한편 개인적인 건강에 따라 발이 부을 수도 있기 때문에 트레킹화는 꽉 끼지 않는 것이 좋다.

 


3. 우리팀의 막내는 너무 꽉 끼는 트레킹화를 가지고 왔는데 현지에서 신어보고야 그걸 알았다고 한다. 국내에서 예행연습을 하지 않아 이후 큰 고생을 하게 됐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독재자 프랑코가 우리에게 유신을 알려줬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4편] 산티아고를 걷는 유럽인들

 

14.12.27 15:51l최종 업데이트 14.12.27 15:51

 

 

 

 

 

 

 
▲ 순례자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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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동료의식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또다른 볼거리는 바로 '사람'이다. 길을 걷다보면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고를 수없이 반복한다. 순례자들의 일일 이동거리가 뻔하기 때문에 계속 동선이 겹쳐지고, 그러다보니 보는 얼굴이 계속 보이게 된다. 아침에 같은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출발한 사람과 점심 때 같은 바르(bar)에서 만나고, 그러다 저녁에 또 같은 알베르게에서 1박을 하고.

그래서인지 순례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동료의식이 생긴다. 아예 팀처럼 움직이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며 일정 자체를 공유했다. 심지어 그들은 빨래도 같이 했다. 알베르게에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의 요금은 보통 3유로 정도인데 개별적으로 하는 것보다 모아서하면 훨씬 저렴하기에 그들은 세탁물을 한 통에 넣어 세탁을 했다.

순례길을 걷기 전까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순례길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옷들이 한 통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 속옷, 여자 속옷 가릴 것 없이 세탁기에서 원심 운동을 하고 있었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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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피레네에서 끝났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국적이었지만 역시 자국민인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유럽권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듯했다.

유럽권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특히 히피처럼 보이는 순례자들을 보니 그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중세는 그렇다 치고, 현대에 와서는 언제부터 유럽 사람들이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로 몰려들었지? 프랑코 독재에 진절머리 쳤던 유럽 사람들인데 말야. 아직까지 스페인에 프랑코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 있다면 그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까?'

<1984>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로 유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의 역사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

조지 오웰은 1950년, 46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고 그때까지도 스페인은 프랑코가 통치를 했다.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내전(1936~1939)에 참여해 목에 관통상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생을 했던 조지 오웰이었기에 절대로 프랑코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런 말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조지 오웰처럼 서구 사람들은 스페인에 대해서 고운 시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끌어들여 선거로 들어선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시켰던,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이 계속 존속했던 한 서구인들에게 스페인은 논외의 국가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었다.

"유럽은 피레네(산맥)에서 끝났다."

이렇듯 피레네 산맥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가상 경계선으로 인식됐다. 뻔히 피레네 산맥 아래에 스페인이 존재함에도 그들은 애써 이베리아반도를 유럽 대륙에서 떼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피레네를 들었다 놨다 했던 프랑코

그렇게 가상의 경계선이었던 피레네 산맥은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점이 돼 전세계 순례자들이 모이는 집합소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피레네는 20세기 들어 유럽과 스페인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큰 장벽처럼 경계선이 되기도 하는 등 그 역할이 빈번했다.

그렇듯 피레네가 가교가 되던 장벽이 되던 그 중심에는 항상 프란시스 프랑코가 있었다. 프랑코의 파시즘을 막기 위해 유럽인들은 피레네를 넘었고,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게 되니 피레네를 경계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피레네를 통해 이베리아반도를 방문했다.

 

 



 
▲ 프란시스 프랑코 프란시스 프랑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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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가 사망을 했다고 군부중심의 독재체제가 일거에 해소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프랑코 체제가 하루아침에 민주체제로 변환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판타지적인 상상일 뿐이다. 그래서 서구 국가들은 스페인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을 근심어린 시각으로 바라봤다.


살얼음판 같았지만 '스페인의 봄'은 민주주의 체제로 착실히 이행되어 갔다. 정치개혁법 제정,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의 합법화, 신헌법 제정 등, 39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법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디나 구체제를 신봉하는 수구세력들이 있는 법! 역사의 수레바퀴가 언제나 순탄하게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1981년 2월 23일, 민주화 이행에 불만을 가진 군부세력들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프랑코 사후에 진행된 민주주의 개혁 덕택에 희미해졌던 피레네의 경계가 다시 'DMZ'처럼 선명하게 되돌려 질 판이었다.

 

 

 

쿠데타에 단호히 반대한 후안 카를로스 국왕


프랑코 체제에 향수를 갖고 있던 일부 군부 세력들은 공산당 합법화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부터 40년간 반공을 국시로 삼고 스스로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군부였다. 그래서 공산당까지 합법의 테두리로 끌어들이는 정당 개혁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스페인의 봄'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됐다. 또다시 프랑코 시대와 같은 독재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민주화는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좀 싱거웠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왜? 6시간 만에 쿠데타 상황이 '종결'됐기 때문이다.

"조국의 단합과 영원함의 상징인 왕실은... 민주적인 정치 과정을 무력에 의해 파괴하려고 하는 어떠한 행동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 후안 카를로스 후안 카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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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자 군 최고사령관인 후안 카를로스는 단호하게 쿠데타를 반대했고, 그들 세력의 그릇된 야망을 좌절시켰다.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지만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내세워 개혁을 이끌게 했고, 쿠데타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결단력을 발휘하여 스페인이 구체체로 복귀하는 것을 막아냈다.


한편 후안 카를로스는 우리하고도 인연이 있다. 왕세자시절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게르니카>와 산티아고 순례길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정부의 요청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것을 맡겼다. 자유의 상징인 <게르니카>를 파시스트 독재자 손에 건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만약 1981년 2월에 있은 군부 쿠데타가 성공을 했다면 <게르니카>가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페인이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순례길도 북적거리지 못했을 것이다. 

<게르니카>가 환대를 받으며 귀향했듯,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봄바람이 불어왔다. 1982년 교황 바오르 2세의 방문, 1987년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출간,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더욱더 북적북적 해진 것이다. 또다른 중흥기를 맞이한 것이다.

 

 

* 게르니카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사극 찍어도 되겠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태권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듯 프란시스 프랑코도 우리와 관련이 있다. 유신 헌법이 바로 그 '인연의 끈'이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영구집권을 획책했을 때, 관련 학자들을 스페인과 대만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당시 두 나라는 총통이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었고, 유신헌법은 총통제를 목표로 했기에 '적절한' 파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일인 것 같다. 약 40여년 전, 총통제를 가르쳐줬던 스페인은 입헌군주국으로서 착실히 민주주의를 실천해 갔고,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기소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총통제를 배워갔던 우리나라는 그 유신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에 임하고 있다. '기춘대원군'이라는 매우 봉건 왕조적인 별명을 가지고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십상시'와 '문고리 3인방'도 있다.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이 정도 캐릭터면 사극 영화 하나 찍어도 될 듯하다. 누가 아는가? <광해>나 <왕의 남자> 빰칠 정도의 흥행몰이를 할지!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필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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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산티아고 순례길, 밥도둑들에게 도시락을 빼앗기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③] 버렸더니 채워졌다

 

14.12.22 10:14 최종 업데이트 14.12.22 10:14

 

 

 

 

 

 

 

 
▲ 포르토마린(Portomarin) 포르토마린을 흐르고 있는 미뉴(Minho)강. 강 한가운데 로마시대에 지어진 다리의 잔해가 있다. 서기 2세기에 지어진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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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5일, 여행 3일째


순례팀은 전날 기차를 타고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사리아(Sarria)에 도착했다. 사리아는 순례길의 종료점인 산티아고 시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굳이 사리아에서 순례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완주증' 때문이었다. 100km만 걸어도 정식으로 발급되는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하면 순례길의 메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의 전 구간, 즉 800km를 다 걸은 이에게만 완주증이 발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00km 이상 걸은 이에게도 발급한다는 건 그만큼 더 순례길을 대중화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여건상 전 구간을 종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에 도달하면 '완주'를 인정해주겠다는 뜻이다.

 

 



 
▲ 사리아 사리아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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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짐은 고행의 지름길


아침부터 계속 비가 오락가락했다. 우비를 부실한 걸 챙겨와서 그런지 입어도 변변찮았다. 트레킹 첫날 오전부터 '삐끄덕'거리는 느낌이다. 비도 그랬지만 가장 문제였던 건 짐이었다.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배낭에 한 가득이었다. 배낭을 제대로 못 닫을 정도로 짐이 넘쳤다. 인천공항 수하물 코너에서 무게를 체크 할 때는 12㎏이었다. 그때는 그럭저럭 버틸 만 했는데 오전에 배낭을 매어보니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전날 마트에서 과소비(?)를 해서 그랬던 것이다.

스페인의 물가는 다른 유럽국들보다 더 저렴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식료품을 구매한 것이다. 우유, 치즈, 버터, 요거트, 빵 등은 한국보다 더 저렴해서 그런지, 한가득 집었는데도 8유로(1유로: 약 1400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필자는 자칭 빵돌이, 치즈돌이인 터라 매우 흐뭇하게 마트에서 나올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콧노래를 부르며 그것들로 저녁을 먹었고, 다음 날 점심에 먹을 도시락도 준비했다. 버터를 바르고 치즈도 넣고, 딸기잼으로 마무리 한 특선 도시락을 넉넉히 준비하였다. 또 남는 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배낭 속에 넣었다.

'무겁더라도 다 가져가야지. 어떻게 먹을 것을 버리고 가나!'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고 있는 순례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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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배낭이 무겁지! 배낭 무게는 자신의 몸무게의 10%를 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배낭이 30리터든 60리터든 빈 공간을 다 채우려고 드는 것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심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것저것 다 챙겨 넣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필자는 원래 짐에다 부식까지 잔뜩 더 짊어졌기에 어깨를 늘어뜨리며 걸어야 했다.


과도한 짐들은 어깨를 내리 누르고, 허리와 무릎에 부담을 가중시킨다. 즐거워야 할 도보여행길은 고행길로 바뀌게 된다. 물론 순례자라면 일정 정도 고행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과도한 고행은 도보여행 자체를 망칠 수도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길을 여행하려고 스페인에 왔지, 골병들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니까. 

 

 

 



어깨는 짓눌리고, 뱃속은 부글부글...

어쨌든 필자는 첫날, 고행과 더불어 고역을 겪어야 했다. 과도한 짐무게로 어깨는 내려앉을 것 같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배까지 아파왔기 때문이다. 유제품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엄청 배불리 먹었다가 탈이 난 듯싶었다. 과유불급이라고 적당히 사고, 적당히 먹었어야 했는데...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뱃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그러다보니 주위 풍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무척 아름다운 풍광이 연이어 이어졌지만 필자의 눈은 그저 화장실을 찾는 데 혈안이 됐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노상방변(?)까지 심각하게 고려를 했을까.

 

 



 
▲ 바르(bar) 사장 바르(bar) 사장과 '밥도둑'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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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점까지 100km가 남았다는 표지석을 뒤로 하고 바르로 내달렸다. 'bar'를 영어로는 '바'라고 하지만, 스페인어는 발음 기호가 없이 로마자 그대로 읽어 '바르'라고 한다. 스페인도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공공화장실 개념이 희박하다. 마드리드 지하철역에도 화장실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행 중에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바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아주 시원하게 일을 처리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밀려나가듯 무척 후련했다. 박재동 화백이 저술한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에서는 아침 인사말이 '화장실을 잘 갔냐?'였다. 해외여행을 하면 긴장감 때문에 일을 시원하게 못 보기에 그런 인사말이 오갔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순례길을 걷는 첫날부터 아주 유쾌하게 처리했다. 역시 도보여행은 화장실 '도우미'다.

 

 



'밥도둑'들에게 도시락을 빼앗겼다

비웠으니 다시 속을 채울 때였다. 전날 준비했던 특선 도시락이 빛을 발했다. 1유로 짜리 커피 한 잔과 함께 도시락을 펼쳐놓았다. 이제 맛있게 점심을 즐길 시간이었다. 그런데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밥도둑'들이 몰려들었다. 그 녀석들은 순식간에 주위를 감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길 닦아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고, 도시락 뚜껑을 여니까 누렁이랑 야옹이가 먼저 달려드네!'

 

 


 
▲ 밥도둑 누렁이 표정이 참 거시기해서 빵조각을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었다. 앉은 자세도 참 거시기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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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치즈, 잼을 골고루 넣은 빵맛이 좋았나 보다. 한두 점 떼어주면 그것만 먹고 돌아설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다. '밥도둑'들은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도시락 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녀석들 빵맛을 아는구먼!'

그런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안양 삼막사에 있는 토종개 삼총사가 생각났다. 밥 때에 맞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공양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 토종개들...

그렇게 버릴 건 버리고, 채울 건 채웠더니 그제야 주위 풍광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다. 순례팀이 도보여행을 시작했던 사리아와 대성당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모두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속해 있다. 갈리시아는 이베리아반도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왼쪽 면에는 대서양과 맞닿아 있고, 기후는 다른 스페인 지역과 달리 대체로 습하다. 또한 비도 많이 내리는 지역이다.

 

 



 
▲ 소몰이 한 지역 주민이 소떼를 몰고 있다. 소들도 이런 산책(?)이 익숙한 듯 나름대로 진영을 갖춰 이동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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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제주 올레길을 떠올리다


필자도 나름대로 도보여행가라 이 곳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봤다. 갈리시아 지역은 대체적으로 산악지형이었다. 여행기 2편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에 의해 서고트 왕국이 멸망당했고, 옛 귀족들이 규합하여 반도 북부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설립했다고 언급했다(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가까스로 막아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 곳의 지형은 경사도가 가파르지 않고 무척 순했기 때문이다. 산악지형이긴 했지만 산들은 완만한 언덕배기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급격한 경사도를 나타내는 지형은 거의 없어 보였다. 방어력을 높여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천혜의 요새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험준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코르도바 왕국은 반도 북부지역을 점령할 의지가 없었다고 기술한 역사책도 있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지형을 방패삼아 방어를 잘 한 것이 아니라 애초 이슬람인들에게 북부지역은 관심권 밖이었다는 이야기다.

 

 


 
▲ 돌담 너머 보이는 목초지 넓은 평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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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만한 지형과 풍부한 강수량 때문인지 갈리시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목축업이 잘 발달되었다.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에서 소와 말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는 풍광은 갈리시아 지역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아름답고, 시원스러웠다.


순례팀은 약 25km를 걸어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도착했다. 미뉴(minho river)강을 넘어 다다른 포르토마린은 그 자체로 절경이었다. 미뉴강의 흐름으로 생성된 완만한 협곡 지형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현대식 교량으로 미뉴강을 넘지만 중세시대의 순례자들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교량을 넘어 도시로 진입했다. 그 교량은 서기 2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아직도 강 한복판에는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정겨움이 가득한 돌담들 너머 소와 말들이 한가롭게 초원을 누비는 모습, 미뉴강이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고 있는 포르토마린까지 보고 있자니 제주도가 생각났다. 또한 자연스럽게 올레길도 연상됐다. 필자가 산티아고에서 제주 올레를 떠올리듯, 유럽 출신 순례자들이 제주 올레를 걷는다면 산티아고 카미노를 떠올릴지 모른다. 필자는 평소에 지론이 하나 있다.

'아무리 지역이 다르더라도 아름다움은 서로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 포르토마린 포르토마린에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다리가 있었다. 중세시대 순례자들은 그 다리를 넘어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사진에서 보는 잔해물들이 그 다리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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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필자는 짐을 꾸릴 때 3-3-3 원칙을 썼다. 속옷 3, 양말 3, 상의 3. 이런 식으로 짐을 꾸렸다. 순례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서 그런지 일부 순례자들 중에는 '단벌신사'들도 있었다. 하여간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 옷을 너무 많이 휴대하지는 말자. 가벼운 짐은 순례여행을 더 알차게 만들 것이다.

2. 배낭이 커지면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고 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러니 배낭은 40리터가 넘지 않는 것을 구매하는 게 좋다. 여성순례자들이라면 30리터짜리 배낭을 메는 것도 좋을 듯싶다. 

3. 스페인의 11~12월은 우기라고 한다. 하루에도 비가 계속 오락가락한다. 그러니 꼭 우비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침낭도 필수다. 침구류가 없는 알베르게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4. 도시락용 플라스틱 용기를 준비하자. 의외로 많은 순례자들이 자신이 만든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대신했다. 바르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먹는 도시락도 그럭저럭 괜찮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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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2부

 

 

 

 

 

 

---> 전편에 이어서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 스페인 가족은 포르투갈과 인접한 지역인 비고(Vigo)에서 왔는데 순례길을 걷는 내내 자주 마주치게 됐다. 동선을 함께한 것이다. 야고보 성인을 캐릭터화한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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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대로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된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무려 800km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넣는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필자의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다 책 <새 유럽의 역사>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됐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 성인인 야곱(기자 주. 야고보)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했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좇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인가?

 

 

 

 


국토 회복 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 무어인을 무찌르는 야고보 17세기 작품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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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9세기 초,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 중 유일하게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 12세기 경의 스페인: 북부 지방을 제외하면,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코르도바 왕국의 영역이다. 코르도바 왕국은 이슬람 무어인들이 세운 나라다.

 

 

 

 

 


이런 국토 회복 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 회복 운동은 이슬람 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 회복 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 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큰 역할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와 관련해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의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것이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돼주었던 것이다.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 산티아고 대성당 산티아고 대성당에 선 필자. 대성당은 당시 공사중이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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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대성당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한편 고생 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 순례길 팀에도 '어떻게 그 당시 항해 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냐'고 말씀한 분도 계셨다.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로 판단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짜 순례자들이라면 몸은 고달프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그릇된 배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돼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사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야고보가 묻힌 것이 맞냐'라는 필자의 의구심은 해소가 됐는가? 그걸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물음표는 그저 물음표로 남겨 두겠습니다. 어쩌면 느낌표가 대신 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관촉사 은진미륵에서 선한 감흥을 받았을 때도, 56억 7천만 년 후에 부처님이 도래한다는 미륵불 신앙을 기계적으로 믿어서 얻은 불심이 아니었거든요. 산티아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야고보가 묻혀 있든 아니든 저는 대성당에서 성소를 체험했기에 그 감흥을 느낌표로 간직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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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1부

 

14.12.19 10:47 최종 업데이트 14.12.19 14:03
 


 

 

 


 
▲ 산티아고 카미노 순례자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는 야고보를, 카미노는 길을 뜻한다. 즉, 산티아고 카미노는 '야고보 길'이라는 뜻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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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한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열두 제자였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왔다. 고된 사역 길 이후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 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년 7월 25일에 참수를 당하고 만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된 것이다.

 

 



민중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 성인 야고보 산티아고 대성당 벽면에 새겨진 야고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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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하게 됐다고 한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 만큼 그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그 먼, 당시는 로마 지배하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것이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다.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 속에서 '부활'한 것은 8세기경이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 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당시 스페인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한다. 그렇게 해서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이후 대성당이 있는 곳에 도시가 들어서니, 그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 스페인어로 '길')에 녹아 있는 역사적 스토리텔링이다. 이 내용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언론들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 책자에도 기술돼 있다.

 

 

 

 

 



정말 산티아고 대성당에 성인 야고보가 잠들어 있을까? 

 

 
▲ 산티아고 순례길 지도상에 표기된 길은 순례길의 메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길이다. 프랑스 길 이외에도 북부길, 포르투갈길 등 다양한 지선들이 있다. 산티아고 정보를 담은 현지 홈페이지 자료이다.
ⓒ 산티아고홈페이지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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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린다. 말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종교다원론자(?)인 필자도 200km 남짓 되는 순례길을 걸으며 짧게나마 필그림이 됐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그 영감은 예전에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봤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다. 그러한 '신성한 느낌'에 이끌려서 그랬는지, 필자는 이후 계속된 스페인 여행에서 일부러 각 지역에 있는 성당들을 골라 탐방하기도 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필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노숙하고 경찰서 가고... 그렇게 스페인에 왔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①] 산티아고 순례길, 확 질러버렸다

 

14.12.13 20:46  
최종 업데이트 14.12.13 20:46
곽동운(artpunk)

 

 

 

 

 

 

 

 

지난 11월 3일~25일까지, 22일 동안 스페인과 핀란드를 여행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수도 마드리드와 그 인근에 있는 도시들을 방문했습니다. 스톱오버로 방문한 핀란드에서는 헬싱키를 탐방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약 10회에 걸쳐 담아보려고 합니다.... 기자말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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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그 곳을... 그 돈이면 국내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돈인데...'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여행을 제안 받았을 때 필자는 좀 멈칫했다. 도보여행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고 싶어 하는 곳을 제안 받았는데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트레킹 '바닥'에서 먹고 살려면 분명히 한 번 이상은 가야 할 곳이고, 버킷리스트에도 상위에 링크돼 있는 그 산티아고 순례길 트레킹을 확 낚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인생사 타이밍, 갈 수 있을 때 가자!


왜? 일단 돈이 없어서 그랬다. 달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 '카드 귀신'을 물리치기도 역부족인데 해외여행이라니! 또한 아직 국내도 가본 곳보다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은 터라, 국내에서 내공을 많이 쌓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와 서로 비교대조를 하면서 길을 걸어야 할 테니 더 많은 내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갈 수 있을 때 가! 나중에는 여건이 돼도 못 갈 수도 있어!"   

주저하는 필자에게 여행 제안을 했던,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이 일침을 가했다.

그 말이 맞다. '인생사 타이밍'이라고, 이거다 싶으면 확 낚아채야 한다. 질질 끌다가는 손에 남는 건 그저 허송세월뿐이다. '카드 귀신'이야 허리띠 졸라매면서 틀어막으면 되는 것이고, 국내와의 비교대조는 그간 역사트레킹 리딩을 하며 익힌 지식을 써먹으면 될 테니까!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에 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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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일.


필자는 스페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여정이라 비행기에서만 약 15시간 정도 머물러야 했다. 좀이 쑤시고, 발이 저려오는 것을 참으며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수하물을 찾고, 화장실을 가고 했더니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스페인이 남부유럽이라고 하지만, 11월 마드리드의 밤공기는 무척 차가웠다. 필자의 마음속에도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공항에서 노숙을 해야 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손성일 대장을 위시한 본진들은 그 다음날 오전 비행기로 도착할 예정이었고, 필자는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홀로 선발대(?)가 되어 공항 벤치에 자리를 깔아야 했다. 픽업을 해주는 한인민박집에서 1박을 하면 만사 '오케이'가 되겠지만 첫날부터 과소비(?)를 할 수는 없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마드리드 공항에서 노숙을


공항보안 요원들이 필자의 앞을 지나다니며 '쑥떡쿵' 거리기는 했지만 못 본 척하고 그냥 자리를 깔았다. 공항 내부는 춥지가 않아 그럭저럭 버틸 만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벤치에 있는 손잡이가 바로 그것이었다. 벤치를 침대처럼 쓸 생각이었는데 칸칸이 있는 손잡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몸을 옆쪽으로 꾸부정하게 만들어 배낭을 앉고 잠을 청했다. 

11월 4일.

필자는 터미널 4(T4)에서 노숙을 했는데, 이 T4는 건축가인 리처드 로저스(Richard George Rogers)의 작품이다. 리처드 로저스는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1977), 영국 그리니치 밀레니엄 돔(1999)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들을 많이 설계했다.

 

 


 
▲ 마드리드 공항 마드리드 공항에서 자리를 깔고 노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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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완공된 T4는 매우 독특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건물 전체를 '통유리'로 감싼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자연광을 듬뿍 받을 수 있을 뿐더러 유리 너머로 이착륙하는 항공기들도 감상할 수 있게 설계됐다. 로저스의 건축 철학은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들이 반영되어 T4는 시야가 확 트인 공항청사로 태어난 것이다. 


'사람'을 우선시한 로저스의 건축 철학 때문인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너무 맛있게 잠을 자서 예정시간보다도 더 늦게 일어날 정도였다. 그래서 서둘러 본진이 도착하는 터미널 2(T2)로 이동해야 했다.

EU 지역은 하나의 존(zone)으로 묶여, 나라가 다르더라도 국내선 개념으로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다. T4는 국내선 청사로 분류되었는데 그래서 필자는 별다른 절차 없이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보안검색대를 거치지 않고 너무 쉽게 게이트를 빠져나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핀란드 헬싱키에서 스페인 입국심사를 받았던 것이다. 핀란드 출입국 직원이 차가운 음성으로 '왜 스페인과 핀란드를 방문하냐'는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그렇다 쳐도 스페인은 지가 무슨 상관이야? 지가 핀란드 사람이지, 스페인 사람이야?"

그때는 이렇게 투덜댔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진이 도착할 T2는 비유럽권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도착하는 터라 따로 입국수속을 밟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은 단일청사라 항공편에 따라 터미널을 이동하는 불편이 없어서 좋다. 공항 벤치에 개별손잡이가 없어 노숙하기도 편하고.

 

 


 
▲ 마드리드 지하철 전동차 내에 광고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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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미가 있는 마드리드 지하철

 


늦잠을 자서 그랬는지 본진과 합류하여 지하철을 탔을 때는 한창 출퇴근 시간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 일행이 가야 할 곳은 마드리드 북쪽에 위치해 있는 차마르틴(Chamartin)이었다. 그곳에는 차마르틴 역이 있는데 거기서 기차를 타고 사리아(Sarria)로 가야했다.

우리나라 지하철과 달리 마드리드 지하철은 광고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성형광고들로 점령(?)된 우리나라 전동차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짭짤한 광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공간을 그냥 여백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며 성형수술을 '권장'받는 한국인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혼자 속삭였다.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지... 외모가 전부냐!'

드디어 차마르틴 역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에서 우리의 서울역에 해당되는 곳은 중앙역이라 불리는 아토차(Atocha)역이고, 차마르틴 역은 청량리역 정도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 역은 주로 스페인의 북부지역과 연결된다.

 

 


 
▲ 스페인 경찰서 스페인에서는 경찰을 폴리시아(policia)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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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부터 스토리를 만들었다!


"어, 내 스마트폰?"

시차적응이 안 된 건지, 아니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게 한 것인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분실했다. 배낭까지 다 들어내서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 곳이 좀 도둑이 들 끊는 마드리드라는 사실을, 더군다나 혼잡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탔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대는 필자에게 손성일 대장이 이런 말을 했다.

"첫날부터 스토리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빨리 잘 찾아봐!"

그 말대로 스토리를 만들고 말았다. 그냥 소매치기들한테 스마트폰을 헌납할 수가 없어 경찰서를 찾아갔다. 스페인어도 못하면서 그냥 찾아갔다. 그냥 분실신고서 하나 작성하고 나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찾아들어간 것이다.

사무실에 있던 현지 경찰관은 자신은 영어를 못한다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돌려,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순간 긴장했다.

'나도 영어 못하는데!'

전화를 받는 내내 식은땀이 흘렀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어 전화상으로 심문을 받는 듯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스페인 경찰의 한숨 소리가 이렇게 들리는 듯했다.

'어이 동양친구, 왜 이리 영어를 못 해. 너 영어실력 다 바닥났어!'

결국 스마트폰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여행 내내 필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하고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그것조차도 적응이 되었다.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만큼은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보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첫날부터 스토리가 작성됐다. 하지만 그건 서막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필자 앞에 펼쳐졌으니까.

 

 


 
▲ 스페인의 땅끝 스페인의 대서양쪽 땅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Fiste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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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교 로마시대에 건립된 수도교. 마드리드 인근인, 세고비아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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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센 눈꽃산행: 뜻하지 않게 일본에서, 겨울 산행의 백미인 눈꽃 산행을 했다.

 

 

 

 

▲ 다이센의 설국: 산 중턱 부근에 오르자 저렇게 설국(雪國)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겨울 눈꽃 산행을 제대로 해보았다.

 

 

 

 

# 겨울산행은 만만치가 않아!

 

하지만 필자도 한 가지 고민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겨울산행인데, 그에 걸맞은 장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 흔한 스틱도 안 챙겨왔고, 신발도 등산화가 아닌 그냥 트래킹화를 신고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행 진입로를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낙엽이 많이 쌓여 있어서 그렇게 미끄러울 것 같지 않았고 쿠션감도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대충 지형을 파악해보니 특별히 난코스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까짓것 아웃도어맨이 어디를 못 가겠는가? 낙엽 쌓인 산길을 사뿐히 갔다가 내려오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리고 하산하면 상금이 기다리고 있는데. 푸하하!'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일정 정도 고도에 이르자 눈길이 시작됐다. 난 좀 당황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는 겨울 산행에 필요한 장비들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리! 세상의 모든 일들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예상외의 난관들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고도가 높아질수록 적설량도 많아졌다. 눈이 발목 이상으로 쌓여 있던 것이다. 덕분에 내 바지 밑단은 다 젖어있었다. 계속 나아가다보니 아예 눈 속에 발이 푹푹 들어가는 것이었다. 전날 비가 내렸는지 어떤 곳은 물웅덩이도 있었다. 눈길에 빠져, 물웅덩이에 빠져, 진흙탕에 빠져... 내 바지는 아주 거지꼴이 되어 갔다.

 

산길을 오르면 오를수록 세상은 새하얀 설국(雪國)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세상이 흰색으로 변해갈수록 상금에 대한 생각도 서서히 희석되어 갔다. 이미 페이스 조절은 실패했고 선두권과의 격차도 상당히 벌어진 상태였다.

 

 

 

 

 

▲ 미즈키시게로 로드: 돗도리현 미즈키시게로 거리에서 만난 일본 처자들. 이 거리는 요괴만화로 유명한 미즈키시게로 화백의 작품에 등장한 요괴들을 형상화한 거리다. 미즈키시게로 로드에는 총 134개의 요괴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다이센을 등반 하기 전에 잠깐 그 곳을 방문했었다. 그나저나 저 요괴들은 무섭기보다는 우수꽝스럽다. 사람을 혼비백산 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들이 사람들한테 놀라서 줄행랑을 칠 거 같다. 

 

 

 

 

 

 

▲ 외눈박이 요괴: 미즈키시게로 로드에서 만난 외눈박이 요괴. 역시 이 요괴도 무섭기보다는 좀 우수꽝스럽다

 

 

 

 

 

 

 

# 상금을 포기하니, 설국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아니 벌써 반환점 찍고 내려오시는 거예요?"

"예. 쫌만 올라가면 반환점이에요. 고생하세요."

 

1등으로 보이는 분이었다. 마치 산악마라톤을 하듯 쏜살같이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얼마 안 남 았어요. 고생하세요."

 

2등 권으로 보이는 분들이 재빨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분들도 산악 마라톤 하는 것처럼 빠른 스피드로 하산을 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시네. 저런 분들을 어떻게 이겨!'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고, 나는 그 분들에 비하면 아주 세 발의 피였던 것이다. 선두권 분들이 대여섯 명이었으니까 이미 상금은 물 건너 간 셈이었다.  울고 싶은데 빰 때려준 격이라고, 나는 그 분들이 미운 게 아니라 아주 고마웠다. 상금에 대한 생각을 싹 다 정리를 해주셨으니까. 그렇게 상금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니 제대로 겨울 눈꽃 산행을 즐길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진짜 느긋하게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중간 중간에 멈춰 서서 사진도 찍고, 꼬마 눈사람도 만들며 느릿느릿하게 산행을 했다. 느리게 산행을 하다 보니 더 많은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고, 더 즐겁게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상금도 좋지만 산행이 목적이라면 빠름보다는 느림이 더 알찬 산행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됐다.

 

등반대회가 끝나고 난 후에 대충 필자 나름대로 등수를 매겨보았다. 다행히 난 중간 순위 정도에 들었다. 맨 마지막으로 출발을 했고, 겨울산행 장비도 갖추지 않은 것치고는 나름대로 선전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의 다이센 등반대회는 무사히 종료가 됐다. 참가상으로 만족을 해야 했지만 나름대로 기억에 남을 산행이었다. 자연 앞에 겸손하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격언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려보았던 산행이었으니까.

 

 

 

 

 

 

 

 

 * 요괴들: 이 녀석들도 별로 변변치가 않은 듯~ㅋ

 

 

 

 

▲ 우리나라 도깨비: 아무리 미즈키시게로 화백의 요괴들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난 이 도깨비 녀석들이 더 좋다. 거창귀농학교 복도에 걸려 있는 도깨비들.

 

 

 

 

 

 

 

 

 

▲ 다이센 등산로: 등산로 입구에는 저렇게 낙엽이 쌓여 있었다.

 

 

 

 

 

 

▲ 일본의 순시선: 앗! 일본의 순시선이다. 혹시 저 배도 우리의 독도 인근에 출몰 한 적이 있었을까?

돗도리현의 서쪽은 시마네현이다. '다케시마'의 날로 유명한 그 시마네현이다.

 

 

 

 

 

# 14시간동안의 기나긴 항해

 

나는 느긋해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재빠르게 계산기를 작동시켰다.

 

'등반대회에서 1등을 하면 50만원 주니까, 그 돈으로 여행 경비를 충당하면 되겠군. 남는 돈으로는 돼지고기 사 먹어야지!'

 

이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건 내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아웃도어 여행가인데 등반대회 1등 하나 못 하겠는가! 5600Km짜리 무동력 여행 기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아니면 누가 1등상을 받겠는가! 이렇게 나는 주위사람들에게 호언장담을 했다. 여행도 하고, 상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강원도 동해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강원도 동해시 동해항에서 DBS호를 타면 일본 돗도리현 사카이미코항에 갈 수 있다. 동해항-사카이미나코항 항로는 450Km에 달하는데, 그 거리를 DBS호는 14시동안 달린다. 비행기로 한 두 시간 정도면 닿을 거리를 14시간을 달리니 만만치 않은 항해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는 재미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어둠 속에서 한 점의 빛을 점멸하는 고기잡이배들의 모습까지 더해지면, 자연스럽게 '로맨틱'하고 '센티멘털'한 감정이 스며들게 된다. 야간에 설악산 대청봉 부근 산행을 하시다 동해바다에 떠있는 오징어잡이 배들의 불빛들을 보신 분들은 필자의 감정을 잘 이해하실 것이다.

 

그렇게 선상에서 로맨틱한 감정이 돋우어지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놀이가 하나 있다. 바로 '타이타닉' 놀이다. 안 그래도 그날 '타이타닉' 놀이에 흠뻑 빠져있던 커플이 하나 있었다. 아랫배가 출렁거리는 어떤 남자가 디카프리오 흉내를 내며 포즈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포즈는 상당히 어색했다. 애초 의도는 영화 타이타닉이었지만 그 결과물은 <코미디빅리그>처럼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포즈였다.

 

 

 

 

 

 

 

 

▲ DBS호의 항로: DBS호는 우리나라 동해항을 기점으로 일본 돗도리현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정기적으로 운항한다.

일본 사카이미나코항에서 찍은 사진이라서 그런지, 일본을 우리나라보다 위쪽으로 올려놓았다. 우리가 보는 통상적인 동아시아 지도가 아니었다.

 

 

 

 

 

▲ DBS호의 항로: 사진편집기를 이용하여 사진을 돌려봤다. 사실 이게 더 눈에 잘 들어온다.

 

 

 

 

 

 

# 등반대회 1등은 나의 것이다!

 

내가 그렇게 긴 항해를 감내하며, 돗도리현에 갔던 이유는 '다이센(大山) 등반 대회'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등반대회는 지난 11월 24일에 개최됐었다. 다이센은 일본인들이 가장 등반하고 싶어 하는 산들 중에서 세 번째로 꼽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 선호도가 거짓이 아님을 입증하듯, 다이센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멀리서 다이센을 보면 마치 후지산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현지인들은 다이센을 후지산의 '짝퉁'으로 부르기도 한다.

당시 나는 <아름다운 도보여행>이라는 도보여행 카페 회원분들을 비롯한 여러 산악인들과 함께 다이센 산행에 나섰다.

 

다이센은 일본 혼슈의 서쪽 주고쿠 산지의 핵심을 이루는 산이다. 다이센은 해발 1729m로 우리나라의 설악산(1708미터)와 비슷한 높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난 좀 더 느긋해졌다. 10년 전, 지리산 천왕봉 근처에서 홀로 침낭 깔고 잠을 잤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리산 천왕봉이 1915미터인데, 그 보다 작은 산이라면... 푸하하! 1등은 내 것이다!'

 

한국산이든 일본산이든 자연 앞에 겸손하라고 하는데 나는 상금에 눈이 멀어 '시건방'을 떨었던 것이다. 또 얼마나 등반대회를 우습게 봤는지 맨 마지막으로 산길에 진입을 했다. 한 사람이 겨우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다이센의 등산로는 아주 좁았다. 하지만 난 곧바로 치고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등산로 입구에서 관계자와 잡담도 하고, 노상방뇨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맨 마지막으로 등산로에 진입했던 것이다. 대신 뒤에서 대회 참가자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음... 내가 여기서 젊은 축에 속하는군. 페이스 유지하다가 중간 부분에서 확 치고 나가면 되겠군!'

 

 

 

 

 

 

 

 

 

 

 

 

 

 ▲ 미즈키시게로 로드: 돗도리현 미즈키시게로 거리에서 만난 일본 처자들. 보아하니 이 분들도 다른 지역에서 돗도리현으로 탐방을 온 것 같습니다. 온천에서 만난 마주친 분들이 아니니 절대 오해하시지 말기를~ㅋ 그나저나 저 요괴들이 무척 재밌네요.

무섭기보다는 우수꽝스럽다고 해야 하나?

 

 

 

---> 1편에 이어서

 

 

 

한국에서는 아무리 나이가 어린 여아들이라고 해도 아빠의 손을 잡고 남탕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난 아웃도어 여행가라 전국 각지의 목욕탕과 찜질방을 두루 다녀봤지만 여아가 남탕에 들어온 경우는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는 빈번하다.

나이 어린 남아가 엄마의 손에 이끌려 여탕에 가는 일은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나름대로 필자는 문화적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몸이 노곤한 상태에서 그런 광경을 목격했으니 더욱더 그럴 수밖에.

난 온천욕을 마치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어떤 여아가 툭 튀어 나오더니 내 허벅다리를 붙잡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난 뒷걸음을 치다 그만 바닥에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렇게 '사고'를 유발시킨 여아는 '카와이'라는 말을 남기고, 또 신나게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카와이? 일본말로 귀엽다는 말인데, 도대체 뭐가 귀엽다는 것인가? 나한테 하는 소리가 아니었나?

그렇게 일본 꼬마숙녀의 '습격'을 받은 후, 나는 라커룸으로 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난 수건을 마련하지 않았기에, 좀 곤혹스러운 처지였다. 기념품으로 받은 손수건으로 몸을 닦아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눈을 맞았는지 손수건도 젖어 있었다. 기왕 그렇게 된 거, 난 탕 입구 쪽에서 뜀뛰기를 하며 물기를 털어내기로 했다. 현지분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난 개의치 않고 열심히 뜀뛰기를 했다.

그런데 그때 평상복 차림으로 라커룸을 정리하시는 분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60대로 보이는 분이었는데 물기에 젖은 깔판들을 교체하고 있었다. 그 분도 나를 봤을 것이다. 욕탕 앞에서 혼자 폴짝폴짝 뛰고 있는데 그걸 못 봤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슬며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남자가 아닌 것 같은데…."

 

 

 

* 고토부기성의 떡집 아저씨: 고토부기성은 돗도리현 서부 방면 관문에 있는 과자의 성입니다. 고토부기성이라고 무슨 역사유적이 아니고 과자의 성이라는 것이지요. 그 곳에는 일본 전통 방식의 과자가 제조,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시식코너도 있었고요.

저도 시식코너를 잘 활용했답니다. 그나저나 저 아저씨는 일본아저씨가 아니라 왕서방 같어~ㅋ

 

 

 

 


내 시력이 안 좋아서 그랬는지, 분명 남자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다시 나는 혼동에 휩싸였다. 그래서 현지 남성들의 행동을 살펴보았다. 현지인들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 라커룸 관리원이 자기 주위에 있든 말든 각자 자신의 일을 하기에 바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나만 괜히 혼자 부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정신을 가다듬고 내 할 일을 했다. 말린 건 말려야 했기 때문이다. 뜀뛰기로 대충 몸에 있는 물기는 제거가 됐으나 머리는 젖어 있었다. 그래서 헤어드라이기 앞에 가서 전원을 켰다. 그런데 작동을 안 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30엔 하는 동전을 넣어야 작동하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대며, 동전을 찾아다 헤어드라이기를 이용했다. 나는 30엔 이상으로 '뽕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에 헤어드라이기를 온 몸에 들이댔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바로 그 라커룸 관리자였다. 그 분은 내게 손수건을 하나 내밀었다. 그 손수건은 내 것이었다. 동전을 가지고 갈 때 흘렸던 것 같았다. 그 때 자세히 봤는데 그 분은 확실히 남자가 아니었다. 골격이나 체형을 보나 확실히 여자였다. 그 분은 아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순간 내 몸을 다 봤을 것이다.

난 좀 억울했다. 뭐 똥배도 있고, 울퉁불퉁한 몸매지만 그래도 소중한 내 몸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쩌다 처음 보는 일본 아줌마 앞에서 몸을 다 노출시키게 됐단 말인가!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난 나름대로 '대범하게' 복수할 생각을 했다. 그것이 무엇이냐? 볼 테면 봐라, 하는 식으로 당당하게 그 아줌마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안경을 찾아 쓰고 그 관리자 앞을 아주 당당하게 지나갔다. 주위를 끌기 위해 두어 번 왔다 갔다 했다. 그 아줌마의 반응은? 콧방귀도 안 뀌더라. 아니 나를 얼빠진 놈처럼 취급하는 것 같았다. 그랬다. 내 '대범한' 복수는 씨알도 안 먹혔다.

나는 그렇게 일본 온천에서 무서운 '일본 여자'들을 만났던 것이다. 그 사람들로 인해 난 그 곳에서 엉덩방아를 찧었고, 얼빠진 놈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재미있었다. 나름대로 일본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고 왔기 때문이다.

날씨가 한겨울로 접어들어서 그런지, 뜨끈한 아랫목이 생각난다. 이번주 주말에는 공짜로 수건을 쓸 수 있고, 공짜로 헤어드라이기를 쓸 수 있는 우리 동네 찜질방에 갈 생각이다. 일본 온천이 괜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난 우리동네 신도림 찜질방이 더 좋다.     

 

 

 

 

 

 *일본 목선: 어느 큰 호텔 옆에 있는 장식용 배더군요. 뭐 저기서 큰 연회라도 열릴까요?

 

 

 

 

▲ 미즈키시게루 로드: 입만 살아 있는 요괴가 참 익살스럽습니다. 이 거리는 요괴만화로 유명한 미즈키시게로 화백의 작품에 등장한 요괴들을 형상화한 거리입니다. 미즈키시게로 로드에는 총 134개의 요괴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일본 온천에서 당한 일을 잘 표현해주는 요괴 조형물이네요!

 

 

 

 

 

 

 

 

 

 

▲ 일본 돗도리현 다이센(大山): 올해 첫 눈을 일본에서 맞았네요. 생각지도 않은 설국(雪國)을 만나서 좀 어리둥절 했습니다.

 한편 별다른 장비없이 이 정도까지 산행을 했다면, 온천에서 몸 좀 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제목이 상당히 선정적이다. 굳이 이렇게 선정적인 제목을 거는 이유가 뭐냐고 필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제목에 언급된 단어들만으로도 충분히 '일본산 AV' 하나 정도는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시고, 은근슬쩍 하드디스크의 '비밀폴더'에서 비슷한 제목의 동영상을 찾으시는 분들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강원도 동해시 동해항에서 DBS호를 타면 일본 돗도리현 사카이미나코항에 갈 수 있다. 동해항-사카이미나코항 항로는 450km에 달하는데, 그 거리를 DBS호는 14시 동안 달린다. 비행기로 한두 시간 정도면 닿을 거리를 14시간을 달리니 만만치 않은 항해임에 틀림없다.

내가 그렇게 긴 항해를 감내하며, 돗도리현에 갔던 이유는 '다이센(大山) 등반 대회'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등반대회는 지난 11월 24일에 개최됐었다. 다이센은 해발 1729m로, 일본인들이 가장 등반하고 싶어 하는 산들 중에서 세 번째로 꼽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 선호도가 거짓이 아님을 입증하듯, 다이센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난 올해 첫 눈을 다이센에서 맞았다. 등산 초입에서는 눈이 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산 중턱부근에 오르자 눈발이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등산로에 쌓인 적설량도 상당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왜? 난 눈꽃 산행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젠은커녕 그 흔한 스틱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또 우비도 없었다. 하지만 난 목표지점까지 완등을 했다. 그런 악조건 하에서도 목표지점까지 무사히 도달한, 내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산행을 마치자 난 오들오들 떨었다. 그럴 만했다. 눈을 맞아서 옷이 많이 젖었기 때문이다. 목욕탕 생각이 간절했다. 이심전심인지 가이드도 급작스럽게 일정을 변경하여 온천 탐방을 추가시켰다.

 

 

 

▲ DBS호 동해항-사카이미나코항-블라디보스토크항을 연결하는 국제여객선입니다.

 동해-사카이미나코 항로의 거리는 450Km 정도인데, 그 거리를 DBS는 14시간을 달려갑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온천에서 따뜻하게 몸을 지지고 나오십시오!"

그렇게 하여 난 문제의 온천에 입장하게 된 것이다. 온천의 입장료는 500엔으로, 우리나라 돈으로 약 7000원 정도였다. 최근의 환율은 100엔당 1400원 정도다. 입장료는 저렴했지만 수건은 공짜가 아니었다. 우리돈 2000원을 주고 수건을 따로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껏 수건을 쓸 수 있는 우리동네 찜질방을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댔다. 그리고는 그냥 맨 몸으로 들어갔다. 등반대회에서 기념품으로 받은 손수건으로 대충 닦을 생각을 하면서.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눈꽃 산행을 해서 그랬는지 온천물은 무척 달았다. 몸에도 미각을 느낄 수 있는 기관이 있었으면 그렇게 감별을 했을 것이다. 밝고, 탁 트인 느낌의 온천 내부도 상당히 호감이 갔다. 뗏국물이 둥둥 떠 있는 후미진 동네 목욕탕 하고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그 곳은 노천 온천도 있었다. 노천온천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몸을 '지질'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었다. 얼굴에는 찬바람이 불어댔지만 목 아래쪽은 후끈했었다.

그렇게 온천에서 몸을 지지니 노곤해졌다. 난 잠시 눈을 감고 향후 일정들에 대해서 곱씹어 보고 있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남자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소리에 놀라, 난 눈을 떴다. 그때 꼬마 숙녀들이 정신없이 욕탕을 뛰어다니고 있는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이 그리 신났는지 대여섯 살로 보이는 여아들이 '깔깔'거리며 온천 내부를 헤집고 다녔던 것이다. 그 뒤로는 아버지로 보이는 어떤 일본 남자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순간 나는 어리둥절 해졌다.

'여기 남녀 혼탕인가? 아닌데… 분명 남녀 갈라서 들어갔는데….'

 

 

 

 

* DBS호의 항로:  우리나라 동해항을 기점으로 일본 돗도리현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정기적으로 운항합니다. 일본에서 찍은 사진이라서 그런지, 자국 중심으로 지도를 배치했군요.

 

 

 

 

 

* DBS호의 항로: 그래서 이렇게 사진을 돌려봤습니다. 사실 이게 더 눈에 잘 들어오지요. 이게 실제로 맞는 거지요!

 

 

 

 ▲ 다이센 등반대회 처음 진입했을 때는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산 중턱 부근에 오르자 저렇게 설국(雪國)으로 바뀌어 있더군요.

 강설량도 상당했습니다. 한편 아이젠이나 스틱 같은 별다른 겨울산행 준비도 없이 눈꽃 산행을 했더니 곤혹스러웠더군요.

하산하다 엉덩방아도 찌었습니다. 산행할 때는 안전이 가장 우선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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