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해 해상요새에서 DMZ를 생각하다!

 

[22일간의 여행 마지막편] 핀란드 헬싱키

 

15.02.12 16:35 최종 업데이트 15.02.12 16:46

 

 

 

 

 

 

 

 
▲ 수오멘린나 수오멘린나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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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싱키 대성당: 핀란드 루터교의 대본산이다.

독립 전에는 성 니콜라우스 성당이라고 불렸다.

 

 

 

 

 

 

신나고 재미났던 산티아고 순례길과 마드리드 근교 여행을 마친 후 필자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귀국편 항공기인가? 아니다. 스페인을 떠난 필자가 닿은 곳은 북유럽의 핀란드였다. 핀에어(FINN AIR)라는 핀란드 국적기를 이용해 여행을 했는데 '스톱오버(stopover)'를 통해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 3일간 머물기로 한 것이다. 스톱오버는 '단기체류'를 말하는데 직항이 아닌 갈아타는 비행기를 탔을 때 이용할 수 있는 제도로, 갈아타는 공항이 위치한 국가를 잠깐 동안 여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2014년 11월  21일, 여행 19일째

역시 핀란드는 산타클로스의 나라였다. 헬싱키 반타 공항에 도착했더니 세상은 설국으로 변해 있었다. 주기장은 물론 활주로에도 많은 양의 눈이 쌓여 있었지만 '이 정도 적설량'은 끄떡없다는 듯, 공항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필자는 지난 겨울의 첫눈을 고국이 아닌 낯선 핀란드에서 맞이한 셈이다.

솔직히 핀란드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후회가 막심했다. 변변한 겨울옷도 없이 러시아 모스크바보다도 더 위도가 높은 핀란드에 도착했으니 그럴 수밖에... 처음 느껴보는 북유럽의 추위에 몸이 적응이 안 됐다. 당장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귀국 비행기는 3일 후에 있었다.

'그래, 한 번 버텨 보자. 발트해 추위가 어떤지 한 번 겪어보는 거야. 우리나라 동장군도 만만치 않지만 매년 잘 버텨왔잖아!'

 


 
▲ 설국 산타클로스의 고향이라서 그런지 핀란드는 눈이 많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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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들 사이에 낀 핀란드

역사적으로 내내, 핀란드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샌드위치' 신세였다. 서쪽으로는 스웨덴, 동쪽으로는 러시아가 수백 년 동안 핀란드 땅을 압박해 왔다. 핀란드는 비교적 뒤늦은 13세기경에 유럽 문화권에 편입되는데 이때도 독자적으로 유럽 중심부와 교류했다기보다는 강대국 스웨덴의 일부 지역으로 편입됐다고 봐야 한다.

유럽권으로 편입됐지만 핀란드가 독립국가가 되기까지는 무려 75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했다. 650년간의 스웨덴 지배, 그 이후 100년간의 러시아 지배를 겪은 이후인 191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핀란드는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고 세계에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걸로 핀란드의 시련이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1917년의 독립이 러시아 혁명 와중에 이루어졌듯, 동쪽에 국경을 맞댄 러시아는 핀란드 근현대사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나라였다. 독립 이후에도 핀란드는 러시아와 2번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두 차례에 걸친 핀란드-소련(러시아) 간의 전쟁은 모두 2차 세계대전 중에 발발했는데 1차 전쟁은 1939년, 2차 전쟁은 1941~1944년에 일어났다. 두 번에 걸친 전쟁은 핀란드의 국토를 황폐화 시켰고, 그런 역사적 아픔 때문인지 핀란드인들은 러시아에 대해 썩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벙커 수오멘린나 섬은 사진과 같은 벙커가 곳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벙커 안에서 관광객들을 찍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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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요새 수오멘린나

다음날 필자가 방문한 수오멘린나(Suomenlinna) 섬은 강대국들의 위세에 눌려 샌드위치 신세로 살아야했던 핀란드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이다.   

수오멘린나는 헬싱키 항구에서 뱃길로 10여 분 간 달리면 도착할 수 있다. 수도 헬싱키의 관문 역할을 하는 이곳은 1748년 스웨덴에 의해 해상 요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핀란드를 점령한 스웨덴은 발트해에서 세력 확장을 꾀하던 러시아에 대해 큰 위협을 느꼈고, 이에 헬싱키 앞바다에 떠 있는 섬 6개를 연결해 축성했다. 또한 대포를 설치해 말 그대로 바다에 떠있는 해상 요새를 만들기에 이른다.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한 대규모의 작업이었던 만큼 수오멘린나 요새는 거의 4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그렇게 어렵게 요새를 만들었지만 스웨덴이 이곳을 제대로 사용한 시기는 약 2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 1808년 러시아가 핀란드를 점령한 이후부터는 수오멘린나도 러시아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핀란드가 그렇듯 수오멘린나도 스웨덴과 러시아의 자취를 동시에 품고 있는 섬이다. 요새의 기본 골격은 스웨덴 지배 시절에 지어진 것들이지만 일부는 크림전쟁(1853~56년) 때 영국과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재건됐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47시간 동안 수오멘린나를 공격했는데 그때의 함포사격으로 섬의 일부가 크게 훼손됐다고 한다.

 

 



 
▲ 한 겨울에 반팔 현재 수오멘린나에는 주민들이 거주를 하고 있다. 그들을 위해 슈퍼마켓도 운영되고 있다. 그나저나 사진에 등장한 저 핀란드 청년은 춥지도 않나 보다. 한겨울인데도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왼쪽에는 대포들이 눈이 쌓인 채로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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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에서 DMZ를 떠올리다

바다를 향해 포신을 세운 대포들에도 흰 눈이 쌓여 있었다. 그 옛날 발트해를 향해 맹렬히 불을 뿜었을 그 대포들은 이제 관광객들의 사진 속 배경에 빠지지 않고 감초처럼 등장한다. 국제역학 관계의 변화와 무기체계의 현대화로 이제 수오멘린나도 '요새'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게 됐다.

대신 그 섬에 스며있는 역사적 가치와 발트해를 품은 아름다운 주위환경 때문에 이제는 헬싱키를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들러야 하는 필수 관광 코스가 된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수오멘린나는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상대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세워진 철옹성이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 애초의 의도에서 벗어나 역사적, 문화적 현장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DMZ도 훌륭한 역사적, 생태적 학습의 장으로 떠오를 것이다. 현재의 DMZ은 남북한의 갈등 때문에 살벌한 철책선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나중에는 그 철책선도 관광객들의 사진 속에 빠지지 않는 감초로 등장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올 것이다.

흑야는 백야와 달리 해가 빨리지는 것을 말하는데 필자가 핀란드를 방문했을 때는 흑야 시즌이었다. 그래서인지 오후 4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서쪽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수오멘린나에서 발틱해를 바라보면서 감상하는 낙조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무언지 모를 감상에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싸구려라도 좋으니 와인 한 병이 필요한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 발트해의 낙조 수오멘린나 섬에서 본 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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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리더십'의 할로넨 대통령

섬에서 돌아오는 길에 대통령 궁을 지나갔다. 대통령 궁은 수오멘린나 행 여객선을 타는 선착장과 가까웠는데,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일반 건물인 줄 알았다. 딱히 삼엄한 경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방이 열려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대통령 궁에서 타르야 할로넨이라는 여성 대통령이 2000년부터 12년 동안 집무를 했고 지난 2012년에 명예롭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재임 중에 '엄마 리더십'을 펼쳤던 할로넨은 퇴임 후에도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했다. 재활용 수집함에서 쓸 만한 물건을 수거해가는 모습이 목도될 정도로 할로넨은 소탈했다.

열려 있는 핀란드의 대통령 궁과 타르야 할로넨을 떠올리자니 그저 부러움이 앞설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무슨 국정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리더십을 국민들에게 보여줬나? 그렇게 이어지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나머지 생각들은 그냥 발틱 해에 버리고(?) 왔다.

 

 



 
▲ 대통령 궁 핀란드 대통령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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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 중앙 광장 인근에서 진행되던 축제. 개량형 포크레인이 루돌프를 대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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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필자의 여행기는 여기까지다. 이제껏 15편에 걸쳐 여행기를 작성했다. 실제 여행 일수가 22일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좀 길게 늘어진 게 사실이다. 필자도 애초 10편 정도로 작성할 생각이었지만 쓰다 보니 글 욕심이 생겨 5편 정도가 더 늘어나게 됐다. 기사를 작성하면서 좀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다.

우리나라에 스페인과 관련된 역사서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꽃보다 할배>의 영향 때문인지 스페인 여행서는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스페인 역사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존에 나왔던 책들은 절판된 지 이미 오래고, 헌책방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현지에서 보고 느낀 감흥을 귀국 후에 방문국의 역사서로 채울 수 있다면 정말 알찬 여행 '뒤풀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 역사서들이 다시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간 필자의 여행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별 재미도 없는 여행기였을 텐데 몇몇 분들이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이 자리를 빌려 그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그런 조언들을 채찍질 삼아 더 열심히 글을 쓸 생각이다.

 

 

 

 

 * 거리의 예술가: 병을 이용하여 음악을 연주하는 특이한 거리의 음악가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레알마드리드 홈구장 가보니... 상암구장이 낫겠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14] 허탕만 친 마드리드 탐방기

 

15.02.09 11:22   최종 업데이트 15.02.09 14:10

 

곽동운(artpunk)

 

 

 

 

 

 

 

 

 

 
▲ 알칼라 문 알칼라 문(Puerta de Alcala). 1778년 카를로스 3세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문으로 한때는 마드리드의 동쪽 경계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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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0일, 여행 18일째. 내일이면 스페인을 땅을 떠나게 된다. 작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쉬움과 함께 후련함이 몰려왔다. 분명 나중에는 다시 스페인 땅을 그리워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빨리 여행의 종착역으로 향해가고 싶었다.

후련하다는 감정이 든다는 건 무언가 확실히 뽑아냈다는 뜻일 것이다. 정확히 어떤 것을 뽑아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똥배'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포함해서 계속 강행군을 했더니 '똥배'가 쏙 들어간 것이다. 여행 기간 동안 화장실을 잘 갔더니 배가 홀쭉해졌던 것이다.

역시 도보여행은 다이어트의 지름길이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건 똥배뿐이었고, 그에 따라 허리띠도 길어졌다. 그런데 짧은 기간이나마 허리띠가 줄어드는 신기한 경험도 해보았다. 물론 서울에 돌아와서는 다시 원상복구가 됐지만...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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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 홈구장보다 상암구장이 더 좋더라

스페인에 와서 정작 수도인 마드리드를 돌아보지 못했던 탓에 그날은 작정하고 마드리드 일대를 탐방하기로 했다. 마드리드 구도심은 도보로 이동을 해도 끝에서 끝까지, 약 1시간 정도 밖에 소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도로 중요 지점을 찍어가면서 시내 탐방을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길을 잡은 곳은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이 있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였다. 스페인 프리메가리그의 팬이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팬인 필자에게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방문은 그 자체로 흥분거리였다. 그곳은 구도심에서 좀 멀기에 지하철을 탔는데 이동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쿵쾅' 거렸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도착했다. 경기가 없는 날이라 시합 구경은 못하더라도 구장 일대를 탐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중심가에 서 있어서 그런지 레알마드리드 홈구장은 차도로 둘러싸여 있었다. 차도로 꽉 막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FC서울의 홈구장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나 맨체스터 유나이티트의 올드 트레포드처럼 공원형 구장을 상상했는데... 그 공원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실 생각이었는데... 그런 기대들이 무참히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잔디라도 한 번 밟아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매표소에서 구장 투어 가격을 알아봤다. 무려 19유로(한화로 약 2만3천 원)였다. 19유로면, 톨레도 왕복 차비에다 점심까지 먹을 수 있는 돈이다.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댔다.

 


'FC 서울이랑 할 때는 당연하고, 레알 마드리드랑 맨유랑 붙었을 때도 맨유 응원해야지! 상암 구장이 훨씬 낫네. 인근에 하늘공원도 있고 말야.'

 


 
▲ 고야 프라도 미술관 앞에 서 있는 고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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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에는 '게르니카'가 없더라

다음 이동 장소는 프라도 미술관이었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고 불리는 프라도 미술관은 1819년 개관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등등...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유명 화가들의 작품 6천여 점을 보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미술관이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가 프라도 앞을 서성였던 건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기 위해서였다. 화가 피카소를 좋아하고, <게르니카>의 가치를 잘 아는 만큼 직접 작품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미술관 앞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프라도 앞에서 그려야 '그림빨'이 사는지 열심히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는 예비 화가들, 느긋하게 잔디에 누워 늦가을 햇볕을 쬐고 있는 커플 등등... 그 중에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역시 이곳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여기 게르니카가 없다고요? 왜요? 프라도면 당연히 게르니카가 있어야 되지 않나요?"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에서처럼 필자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연히 세계 3대 미술관이라는 프라도 미술관에 <게르니카>가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충격과 함께 창피함이 몰려왔다.

현재 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게르니카>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피카소가 1937년 6월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해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고국 스페인관에 내걸 벽화를 의뢰받았다. 당시는 스페인 내전 초기였는데 여기서 '고국'이라하면, 당연히 프랑코 정권이 아닌 인민전선 정부를 말한다.

처음 피카소는 작품 구상에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4월 28일 바스크 지역에 있는 게르니카에 독일군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혼신을 다해 그 참상을 화판에 담아낸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게르니카>였다.

 

 



 
▲ 게르니카 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게르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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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에서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전된 게르니카

예전 일이다. 필자는 게르니카가 당연히 카탈로니아(동부) 지역인 줄 알았다. 스페인 내전 중에 카탈로니아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고, 이후에도 분리독립 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르니카는 바스크(북부) 지역이었다. 필자가 번지수를 잘못 안 것이다.

프라도의 명예 관장이었던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에 대한 항거의 뜻으로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보내지 않았다. 이후 <게르니카>는 조건이 하나 붙여진 상태로 뉴욕 근대 미술관으로 보내졌다.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프라도에 내건다는 조건이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다. 그렇다고 프랑코 체제가 일거에 사라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게르니카>는 1981년 9월 9일 고국 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또 문제가 하나 생겼다. 프라도 미술관은 20세기 이후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1937년도에 탄생한 <게르니카>를 소장한다면 스스로의 원칙을 깨게 되는 셈이다.

결국 <게르니카>는 왕립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결국 <게르니카>는 왕립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 소피아 미술관이 현대미술을 전문적으로 소장 전시하는 곳이기에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프라도가 19세기 이전의 작품만 소장한다는 원칙과 소피아 미술관이 현대미술의 보고라는 것만 알았어도 허무하게 발길을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실수를 발판 삼아 미학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무식하다'는 쓴소리를 밑천 삼아서 더 열심히 책을 뒤적거려야겠다.

 

 


 
 해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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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이 아쉽다... 스페인 해군 박물관에서

다음 탐방지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해군 박물관이었다. 원조(?) 무적함대의 나라 스페인에 왔으니 해군 박물관까지 걸음을 하게 됐지만 이곳은 한국인 방문객들에게는 큰 인기가 없는 곳인 듯싶었다. 민박집 추천 리스트 중에서도 이곳은 빠져 있었다.

앞선 두 탐방지에서 허탕을 쳤기에 이곳에서는 좀 진득하게 둘러봤다. 공항 검색대를 뺨칠 정도로 까다로운 보안 검색을 통과 한 후 입장을 했다. 입장료 3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전시물들이 다양했다. 해군이나 배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면 한 번쯤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배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축소된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포나 총기류, 칼과 같은 비교적 소형 장비들은 실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동양관에는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의 전통 함선들도 전시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 그 곳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뒤로 하고 마드리드 시내를 가로질러 숙소로 향했다.

전체적으로 마드리드 여행은 허탕을 쳤고, 그만큼 아쉬움도 컸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왜? 다음에 다시 오면 되니까. 그때는 좀 더 알차게 탐방하면 되니까. 

 

 

 

 

 

 

 

* 해군 박물관: 마드리드 해군 박물관
   

 

 


 
▲ 솔 광장 마드리드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솔 광장. 각양각색의 희극인들이 쇼를 선보이며 관광객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사진 중앙에 빨간색 옷을 입은 광대는 공중부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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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페 2세 동상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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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그 골목길마다 숨 쉬는 역사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⑬] 역사도시 톨레도를 가다

 

15.02.05 12:19   최종 업데이트 15.02.05 12:19

 

 

 

 

 

 

 

 

 

 

 

 

 
▲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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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 코스는 이 로마시대 다리를 건너서 저기 궁전으로 넘어가면 좋을 것 같군. 그런 후에는 강변길을 걸으면서 트레킹을 마무리 해보는 거야.'

직업병인가? 필자는 스페인 도시여행을 하는 내내 머릿속으로 트레킹 코스를 짜고 있었다. 어느 코스로 가야 역사 유적을 연이어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길이 사람들의 시선을 더 사로잡을 수 있을까, 어느 바르(bar)에 가야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등등... 그러면서 실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나중에 리딩 할 일 있으면 반값에 한 번 해봐야겠다. 해외여행이라고 비싸게 할 필요가 있나? 반값에도 충분하지.'

고도 톨레도(Toledo). 로마시대에는 자치 도시가 있었고, 서고트 왕국 시절에는 도읍지였던 곳. 이슬람 무어인들도 요새로 사용한 곳이다. 이렇듯 2000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톨레도를 탐방하다보니, 서울과 충남 공주에서 행한 역사트레킹이 생각났다.

동선을 잡기 위해 답사를 하면서 애를 먹던 일, 해당 유적지에서 무슨 설명을 해야 하나 하며 답답해했던 일. 그렇게 시작 전에는 전전긍긍했지만 트레킹이 종료됐을 때는 참가자들과 즐겁게 뒤풀이를 했던 일 등등... 그런 것들이 필자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고추장 비벼먹고 톨레도를 향해

 
▲ 세르반테스 톨레도 성 인근에 서 있는 세르반테스 동상. 톨레도는 세르반테스의 주 활동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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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9일, 여행 17일째

한인 민박집에서 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터미널로 향했다. 안주인께서 특별식으로 닭백숙을 해놔서 고추장에 발라 먹었다. 닭백숙을 고추장에다 비벼서 밥과 함께 먹었더니, 속이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든든했다. 빵이나 치즈, 커피 등을 좋아하지만 필자도 역시 별 수 없는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져 있다. 무정차 버스로 약 50분이면 도착할 수 있고 왕복 버스비도 약 10유로 정도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도시로 여겨진다.

 

 



 
▲ 톨레도 톨레도는 예로부터 철제 산업이 발달했다. 그래서인지 중세시대 기사들이 쓰던 칼과 방패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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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차창 밖의 풍광에 매료되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벌써 종착지였다. 역시 톨레도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터미널에서 내려 구도심 쪽을 바라보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었다. 옛 건축물과 성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 여행의 시작은 언덕길을 올라가 비사그라 문을 통해 톨레도 구 시가지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 비사그라 문은 카를로스 1세가 1550년에 축조한 문으로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도 불린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카를로스 1세는 이 문의 정면에다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았다.

 

 

 

독일 출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

 



 
▲ 알칸타라 다리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알칸다라 다리. 다리 끝 부분에는 방어를 위해 성채가 올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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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가 문장에도 보이듯 카를로스 1세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독일 지방을 통치하는 황제가 스페인 국왕을 겸임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통해 왕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정복왕' 윌리엄 1세(1028~1087) 같은 경우도 프랑스 노르망디 공이면서 영국의 왕이었다. 그는 영국의 왕이면서도 주로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다. 영어도 못했다고 한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불렸다. 그는 합스부르크 출신답게(?) 스페인보다는 독일 지역을 우선시 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의 집권 초기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의 원인 중에는 외국 출신 왕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을 정도였다. 코무네로스 반란과 관련된 이야기는 앞선 여행기(관련 기사 : "<백설공주>에 나오는 세고비아성, 직접 보니...")에 잠깐 언급이 되어 있다.

집권 40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시기가 고작 1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지만 그는 스페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아들로 두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였다.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곳, 톨레도 성

 



 
▲ 톨레도 성 스페인 내전 당시 격전지였던 톨레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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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그라 문을 지나 톨레도 성(Alcázar of Toledo)으로 향했다. 톨레도가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곳에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다는 뜻일 게다. 그런 분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성이었다.

톨레도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데 멀리서보면 빈틈이 없는 단단한  하나의 성채처럼 보인다. 로마시대부터 궁성이 있었던 이곳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현재 톨레도 성의 원형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때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지금의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 본 성의 형상은 고풍스럽지만 실제 외관의 벽돌 하나하나는 비교적 때가 덜 묻어 있었다.  

이렇듯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개를 해보겠다.

1936년 7월 27일. 당시 톨레도 성은 프랑코 휘하의 호세 모스카르도(José Moscardó) 대령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방어를 하고 있었다. 외곽에서는 인민전선이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한 상태였다. 인민전선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16살 아들을 인질로 잡고, 톨레도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와 관련된 전화 통화 내용이다.

"나는 인민전선군 대장 바르델로 소령이오.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일 것이오."
"항복은 없소."
"최후통첩이란 말이오."

(중략)

"아버지. 저 루이스에요."
"아들아, 스페인 국민으로, 기독교인으로 만세 두 번을 외쳐라. 한 번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
"예, 아버지. 신이여 만세! 스페인 만세!"


탕탕

어린 소년의 죽음 때문인지 성 안에 있던 프랑코 군은 70일간 지속됐던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톨레도 성은 복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진다. 70일간 계속된 인민전선의 혹독한 포위를 견뎌내고, 성을 지키는 최고 사령관의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까지... 이곳은 이후 '스페인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린다. 독재자 프랑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톨레도 성을 선전장으로 활용하게 된다. 

 
▲ 비사그라 문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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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먼저 대령의 아들이 전화 통화 중에 죽지 않고 한 달 후에 벌어진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공습 때 총격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민전선의 잔악성을 고발함으로써 프랑코 측의 만행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당시 '가디아 시빌(Guardia Civil)'이란 공안조직이 다수의 남성 인질들을 죽였는데 그 만행을 덮기 위해 어린 아들의 죽음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또한 서양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톨레도 성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책무일 것이다.

 

 

 



정신 없었던 톨레도 성당

 


 
▲ 톨레도 성당 톨레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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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근현대사의 아픔까지도 품고 있는 성을 지나, 필자는 톨레도 성당을 향해갔다. 아주 좁은 골목길을 따라서 갔다.


"예? 8유로요?"

멈칫했다. 무슨 성당 입장료가 그렇게 비싸단 말인가. 8유로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표를 끊었다.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대며 말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페르난도 3세 재위시절인 1226년에 짓기 시작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완공 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됐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이곳은 톨레도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핵심 코스라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같은 규모의 세고비아 성당은 한산했지만 톨레도 성당은 자칫하면 줄서서 관람해야 할 정도로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8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톨레도 대성당은 훌륭했지만 인파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다음 탐방지로 향했다.

 

 



천혜의 요새 톨레도

 
▲ 좁은 골목길 톨레도의 골목길은 무척 좁다. 그런데 저 좁은 곳으로도 자동차가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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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방지는 톨레도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타호강과 알칸타라(Alcantara) 다리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덕분이다. 톨레도의 구도심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간다. 그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이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칸타라 다리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다.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이다.

톨레도를 탐방을 하니 중세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다. 물론 스페인 내전 같은 현대사도 떠올리기도 했다. 덕분에 유익한 해외 역사트레킹을 행했던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톨레도에서 지인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다. 대신 그때는 인원파악을 하느라 애를 좀 먹을 것 같다. 작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 타호강: 타호강에 있는 또 하나의 오래된 다리. 산 마르틴 다리.

 

 

 

 

* 기러기 떼: 톨레도에서 본 기러기 떼.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 한 컷.

 

 

 

 

 

 

 

* Monastery of San Juan de Los Reyes: 산 후안 수도원. 외벽에는 이슬람

왕국에 사로잡힌 기독교 포로들을 결박하기 위해 사용된 체인들이 걸려있다.

 

 

 

 

 

 

 

 

* Monastery of San Juan de Los Reyes: 외벽에 걸린 포로 결박용 체인.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세고비아의 자랑, 세고비아 성과 세고비아 성당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12편] 세고비아 2부

 

15.01.30 14:38 최종 업데이트 15.01.30 14:38

 

 

 

 

 

 

 

 

 
▲ 세고비아 성 일명 백설공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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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교의 지상 구간 관찰과 원거리 수원지 조망 등등... 세고비아 신시가지 일대 탐방은 상당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내친김에 '호랑가시 숲'이라고 불리는 수원지까지 가서 시작점을 직접 관찰해 보고 싶었으나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대충이나마 시작점을 조망했으니 이제 종료점을 향해 가야 할 차례였다. 수도교의 종료점은 일명 '백설공주성'이라 불리는 세고비아 성(Alcázar of Segovia)이다.

 

 



'큰 시장'보다 더 북적거리는 '작은 시장'

 


세고비아 성은 구시가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을 가려면 수도교와 아조구에호(Plaza de Azoguejo) 광장을 다시 거쳐 가야 했다. 스페인어로 '아조구에호(azoguejo)'는 '작은 시장'을 뜻하고, 마요르 광장(Plaza de Mayor)할 때 '마요르(mayor)'는 '큰 시장'을 뜻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조구에호 광장보다 마요르 광장이 더 크고 북적거려야 하지만 세고비아에서는 좀 달랐다. 수도교 때문인지 '작은 시장'이 '큰 시장'보다 사람들이 더 붐비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가는 데 돈 간다고, 실제로 작은 시장 쪽이 상권도 더 발달했다. 그러고 보면 건축물에도 새옹지마라는 속담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수도교를 두고 옛날 세고비아 사람들은 악마의 작품이라고 의문을 표시하며 경원시했지만 지금은 세고비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수도교가 잘 보이는 그 작은 시장에는 '코치니요'로 유명한 맛집이 있었다. 코치니요는 새끼 통돼지 요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통구이라면 고기를 나무꼬치에 꽂아 돌리는 것을 생각하지만 코치니아는 화덕에다 구운 요리다. 이 요리는 세고비아에 가면 꼭 한 번은 맛보아야 할 이 지역의 명물이라고 한다.

 

 

 


 
▲ 세고비아 성당 마요르 광장 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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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맛집 앞에서 필자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걸었던 순례팀과 재회를 한 것이다. 순례팀은 막 점심식사를 하려는 순간이었고 필자는 광장을 가로 질러 그 맛집 앞을 지날 때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여기서 또 만나네요. 역시 만날 사람은 만난다니까요!"

헤어진 지 겨우 3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정말 반가웠다. 단체여행을 하다가 갑자기 뚝 떨어져 나가듯 단독여행을 했으니 더 그 외로움이 더 컸고, 그래서 더 반가웠던 것이다. 순례팀도 마드리드 인근 도시를 탐방 중이었다. 마드리드 민박집을 베이스캠프 삼아 인근 세고비아나 톨레도 같은 인근 도시들을 당일치기로 여행하고 있었다.

필자도 자리를 꿰차고 앉아 고기를 뜯고 싶었지만 이미 식사를 한 터라 다음을 기약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대신 그날 밤에는 필자도 마드리드 민박집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밤에 봬요! 집에서!"

 

 


 
▲ 세고비아 성당 세고비아 성 방면에서 바라본 모습. 아래쪽에는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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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 들의 놀이터 세고 비아 성당

 



세고비아 성을 가기 위해 먼저 들러야 할 곳은 마요르 광장에 있는 세고비아 대성당이었다. 세고비아 대성당은 1525년부터 1577년까지, 52년 동안 건축된, 규모가 상당히 큰 성당이다. 노을이 질 무렵, 작은 첨탑들이 황새들의 놀이터로 이용될 만큼 세고비아 대성당은 뾰족한 고딕양식이 일품인 곳이다. 

현재의 세고비아 대성당은 옛 성당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옛 성당은 세고비아 성 인근에 있었는데 1520년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 때 파괴됐다. 코무네로스 반란은 당시 집권자인 카를로스 1세의 과중한 세금 부담 등에 반대하여 세고비아, 톨레도, 바야돌리드 등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이 봉기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 도시에서는 자치조직인 '코무니다드'가 만들어졌는데 그 구성시민들을 '코무네로스'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따서 코무네로스 반란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반란군들은 옛 성당을 접수하여 세고비아 성의 성벽부근을 방어하고 있는 카를로스 1세군을 격파할 생각이었다. 그런 공방전 끝에 옛 성당은 파괴되고, 5년 후 현재의 자리에 대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듯 현재의 대성당은 건축 당시에는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자 지어졌고, 지금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대성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성당을 위에서 보면 3층짜리 아치형 지붕이 층층이 쌓아 올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사이에는 수많은 스테인글라스들이 성당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세고비아 대성당에서 가장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높이가 90m인 종탑이다. 이 종탑은 1614년에 세워졌는데 멀리서 보면 왕관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곳에 올라서면 세고비아 시내를 시원스럽게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 세고비아 좁은 세고비아의 구 시가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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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였던 세고비아  성

 



대성당을 뒤로 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일명 '백설공주 성'이라고 불리는 세고비아 성을 향해갔다. 세고비아 성은 월트디즈니사의 <백설공주>에 나오는 성의 모델이 됐다고 해서 그런 별명을 얻게 됐다.

애니메이션의 배경 모델이 될 만큼 세고비아 성은 매우 아름다웠다. 또한 독특했다. 하지만 이곳이 처음부터 그런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공간은 아니었다. 성이 들어서기 전에는 요새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 기원은 로마 점령기 이전의 셀티베리안(Celtiberians)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다.

이곳은 수도교의 종착점이 될 정도로  로마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전략적 요충지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즉, 거의 2000년 전부터 중요한 거점으로 쓰였다는 뜻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코무네로스 반란 때에도 이 일대는 격전지였다.

 

 

 


 
▲ 해자 세고비아 성의 해자.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변을 판 후 물을 채워넣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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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 성을 두고 안내책자에는 배 모양을 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 표현이 적합한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이 성이 '붕' 떠 있다는 것이다. 에레스마 강(Eresma)과 클라모레스 강(Clamores)이 휘돌아나가는 작은 협곡에 위치해 있는 이 곳은 연결다리를 폐쇄시키면 외부와는 격리가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였던 셈이다. 한편 그 옆을 흐르는 강들은 유량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수도교를 건설해 그 먼 곳에서 물을 끌어 왔던 것이다.

그렇게 협곡 요새로 기능하던 곳이 13세기 이후부터는 왕이 거주하는 왕궁으로 변모 했고, 그 이후부터 수세기동안 증개축이 거듭되었다. 세고비아 성은 감옥으로도 쓰였는데 마드리드에 있던 왕실 법정이 옮겨옴에 따라 죄수들을 격리할 공간을 마련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세고비아 성은 1862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거의 모든 게 파괴되는데, 20년 후 대대적으로 복원 공사에 나서게 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은 1882년에 재건축된 것이다. 한편 세고비아 성은 현재 왕립 포병학교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한쪽 면에는 각종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세고비아 성 성 앞에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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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면 고생, 하지만 떠나야 하는 운명

 



세고비아 탐방을 마친 후 필자는 마드리드행 버스를 탔다. 이제 순례팀이 묵고 있는 한인 민박집을 향할 차례였다. 한인 민박집에서 순례팀을 다시 만나니 마치 가족들과 상봉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와중에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집 나가니까 고생이지?"

필자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런 말을 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떠나야지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게 우리의 운명이잖아요!"

 

 



 
▲ 세고비아 성 세고비아 성에 전시된 중세 기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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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까지는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다. 버스로는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2. 추천여행 노선: 터미널 → 수도교 → 세고비아 성당 → 세고비아 성
천천히 둘러보면 3~4시간 정도 소요된다. 

3. 시간이 되신다면 신시가지 방면에 있는 수도교 지상 구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정수장 안쪽의 정수시설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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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 수도교에서 느낀 절대음감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11편] 세고비아 1부

 

15.01.28 11:09   최종 업데이트 15.01.28 11:09
곽동운(artpunk)

 

 

 

 

 

 

 

 

 

 
▲ 수도교 구시가지 방면에서 본 수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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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와 '세고비아'는 무슨 관계?

 


평생 그곳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친숙한 도시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카사블랑카> 때문에 유명해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재즈의 발상지인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 등등. 필자도 그런 도시가 있다. 이번에 소개할 세고비아가 바로 그곳이다. 

예전에 통기타가 하나 있었다. 지인한테 물려받은 것인데 아무리 조율해도 그 음이 그 음 같은 그런 통기타였다. 그래도 열심히 튕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유시인까지는 못되더라도 좋아하는 후배 앞에서 폼 좀 잡아보겠다고... 그때 튕기던 기타가 바로 '세고비아 기타'였다. 그런 기억 때문에 세고비아는 필자에게 전혀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세고비아 기타는 유명 기타리스트인 안드레아 세고비아의 이름을 따서 상품명으로 삼았다. 안드레아 세고비아는 다른 악기용으로 작곡된 음악들을 기타 연주에 적합하게 편곡을 하는 등 현대 기타 연주의 대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안드레아 덕택에 '세고비아 기타'가 이름을 얻게 됐고, 그 상품명 덕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가 우리 귀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세고비아에 가면 안드레아와 관련된 기타 박물관 같은 것이 있는 줄 알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시 세고비아와 안드레아 세고비아와는 별 관계가 없다. 그는 남부인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데뷔도 안달루시아에서 했다. 그냥 그의 이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 이름이 들어간 것뿐이다. <강철군화>의 저자 잭 런던처럼 그냥 사람 이름에 도시명이 포함된 것이다.

 


 
▲ 수도교 야경 상상력을 고조시켰던 수도교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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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교와 절대음감

 


2014년 11월 17일, 여행 15일째

오후 6시에 발라돌리드에서 세고비아행 버스를 탔다. 두 도시의 직선거리는 90km도 채 되지 않아 늦어도 1시간 20분 정도면 도착할 줄 알았다. 그래서 세고비아에서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행이 계획대로만 진행되는가? 버스가 인근 동네 구석구석을 다 정차하고 다녔다. 심지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더 가관인 것은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는 점이다. 옆쪽에 있던 마드리드 청년이 일러주지 않았으면 아마 다른 행선지로 갔을지도 몰랐다.

결국 오후 8시가 넘어 세고비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긴장을 했는지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세고비아의 명물이라는 수도교(aqueduct)를 찾아갔다. 어차피 갈 거 미리 알아두고 다음날 꼼꼼히 살펴보자는 속셈이었다.  

"이야, 정말 환상적이네"

수많은 아치들로 이루어진 수도교의 장엄한 모습이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책에서나 보던 로마시대의 수도교를, 그것도 조명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한밤 중에 보는 수도교의 아치는 리듬감이 살아 있는 듯했다. 로마네스크 기둥을 타고 오르는 선율이 아치에서 곡선을 그린 후 위층으로 올라가 고음을 잡는 그런 모습... 그렇게 아치 기둥을 타고 나온 음악은 어떤 것일까? 한 밤의 세레나데일까 아니면 카이사르 군대가 불렀을지도 모를 행진곡? 세고비아에 세고비아가 없다지만 필자에게는 수도교가 '절대음감'처럼 보였다. 시각의 청각화를 통한 음악 연상해보기! 어쩌면 이런 것도 여행의 재미다. 해당 유적에 상상력을 더해 본다.

 

 



 
▲ 수도교 신시가지에서 바라 본 수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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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의 기술력이 집약된 거대한 수도교

기둥: 120개
아치: 167개
관로: 25*30*30cm
총길이: 16,220km
최고높이: 28.10m
교량구간: 728m

수도교의 스펙이다. 수도교는 로마시대인, 기원 후 1~2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인들은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는데 세고비아도 그 중 하나였다. 정착지는 세워졌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세고비아는 넓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터라 대규모로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수원지와 거리가 멀었다. 수도교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로마인들은 외곽에 있는 프리오 강(Rio Frio)에서부터 중심부까지 수로(水路)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무려 16km에 달하는 수로가 만들어졌다.

수도교는 그 수로의 교량구간이다. 즉 16km 송수관 중 728m 정도가 아치형 다리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은 왜 수도교라는 교량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냥 수로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하물며 시멘트도 없던 시대에 그런 거대한 구조물을 축조한다는 건 엄청난 공사였기 때문이다.

수도교를 잘 즐길 수 있는 곳은 아조구에호(Plaza de Azoguejo) 광장인데 그곳을 중심으로 양 옆쪽을 보면 왜 로마인들이 거대한 아치형 교각을 세웠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양 옆의 언덕으로 인해 광장은 협곡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껏 수로를 타고 온 물이 협곡으로 떨어지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 것이다. 협곡을 넘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인위적인 구조물을 연결하여 최종목적지까지 물을 도달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양편을 이으려고 하니 거대한 구조물이 나타났고, 교량 형식이니 아치가 그려졌다. 또한 협곡의 높이가 있으니 복층까지 올려 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고비아의 수도교가 탄생됐던 것이고, 그 가치를 높이 사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 세고비아 세고비아 외곽에서 바라본 사진. 뒤쪽에 보이는 산에서 물길이 시작된다. 전날에 눈이 왔는지 봉우리에 눈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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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만든 수도교?

옛날 옛적에 이 거대한 교량은 악마의 구조물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접착제도 없이 큰 돌조각들이 무지개를 그리며 놓여 있으니, 눈앞에서 보고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전설이 하나 있다.

 

매일같이 물 주전자를 들고 비탈진 길을 오르내려야 했던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일이 고된 나머지 소녀는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자신의 집까지 물길을 내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기에 이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소녀는 비극적인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열렬히 기도를 하게 된다.

그동안 악마는 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태풍이 발생하여 일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새벽닭이 울게 됐는데 그때 악마는 돌조각 하나만을 세우지 못한 채 건축물을 다 완성시킨 상태였다. 돌조각 하나 때문에 거래는 무산됐지만, 수도교는 온전히 그 자리에 생성됐고 소녀의 영혼도 빼앗기지 않게 됐다.

소녀는 마법 같았던 지난밤의 일을 세고비아 시민들에게 실토하게 됐고, 이에 사람들은 아치를 통과한 물은 유황 성분이 제거된 성수라고 여기며 새로운 건축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전설에도 내포되어 있듯이 옛날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대한 수도교가 경외적인 존재였을지 모른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축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수도교가 자신들의 식수를 공급해주고 있으니, 그 존립 자체를 인간 영역 밖에서 끌어오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교를 두고 거대한 '마법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고비아 시민들은 19세기 중반까지 그 '마법덩어리'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 수로 수로의 지상구간. 수도교의 맨 위쪽에도 이런 관로가 놓여 있다. 사진 중앙, 관로가 끝나는 부분에 있는 건물이 정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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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장 시설까지!

기둥들을 따라서 가봤다. 수로의 지상구간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세고비아는 수도교를 중심으로 그 안쪽은 구시가지이고, 그 밖은 신시가지로 분류된다. 수로의 지상 구간은 신시가지쪽에 있었다.

한 10분 정도를 걷다보니 정수장과 함께 드디어 지상구간이 나왔다. 전설에 유황이 제거됐다고 언급됐듯이 정수장도 수도교와 함께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정수는 이물질을 물에 침전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정수장에는 심도가 깊은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그 물탱크에 모래나 황 같은 불순물들을 침전시키고, 깨끗한 윗물만 빠져나가는 식으로 정수시스템을 만들었던 것이다. 간단한 구조였지만 그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상 구간의 수로는 말 그대로 수로였다. 화강암을 깎아내고 그 위에 25*30*30cm 규격의 홈을 파 내 관로를 삼은 것이다. 수도교의 맨 위 부분도 그렇게 관로가 놓여 있다. 고대 로마인들의 건축기술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했던 대목이었다.

지상 구간을 탐방하다 길을 잃고 말았다. 궁금했던 것들이 풀려나가는 재미에 빠져 있다 보니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덕분에 세고비아의 신시가지를 갈지(之)자로 마구마구 돌아다녔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수로가 시작되는 산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눈이 왔는지 산봉우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전날에는 수도교에 상상력을 더했다면, 그날은 수도교를 더 면밀하게 탐구한 날이 됐다. 문화유적 앞에서 멋지게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 문화유산에 상상력도 더해 보고, 더 꼼꼼히 관찰해 보는 것도 재미다. 여행의 큰 재미. 세고비아 여행은 다음편으로 계속 이어진다.   

 

 

  

 
▲ 정수장 신 시가지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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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옛 도시에 남겨 놓은 물음표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⑩] 바야돌리드 2부

 

15.01.26 17:02  최종 업데이트 15.01.26 17:04

 

곽동운(artpunk)

 

 

 

 

 

 

이전 여행기에서 'Valladolid'를 '발라돌리드'라고 표기를 했으나 어떤 독자분이 그 표기가 합당하지 않다는 고견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기부터는 '바야돌리드'로 표기를 수정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기사작성에 임하겠습니다. 고견을 주신 독자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 기자말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바야돌리드는 유서가 깊은 도시다. 그래서 이 도시와 관련된 역사 인물들도 많다. 먼저 펠리페 2세가 있다. 그는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쿠를 물리쳐, 유럽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한 스페인 함대를 두고 무적함대라는 별명이 붙었다. 스페인 축구대표팀을 두고 '무적함대'라고 칭하는 데 그 명칭의 기원은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 함대였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는 전 유럽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봤던 결혼식도 거행됐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자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위 계승자 페르난도 2세가 그 결혼식의 주인공들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것은 방해자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왕실의 결혼식이었지만 그들은 추격자들을 따돌리며 예식을 올렸어야 했다. 그만큼 이 결혼식은 '세기'의 웨딩마치였다.

이런 정치인들 이외에도 대문호인 세르반테스와 탐험가 콜럼버스가 바야돌리드와 인연을 맺고 있다.

 

 

 

산타크루즈 궁과 '황금' 도서관

 


 
▲ 산타 크루즈 궁 산타 크루즈 궁(Santa Cruz Place). 수도원의 회랑식으로 지어진 궁. 사진 사진 아래에는 해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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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산타크루즈 궁(Santa Cruz Place)로 향했다. 1486년 멘도사 추기경에 의해 건립이 된 산타크루즈 궁은 4년여의 기간 동안 지어진 건물이다. 산티아고 대성당이 완공되는 데 150년 이상 걸렸던 것에 비하면 무척 빨리 시공된 셈이다.


공사기간이 짧았음에도 이 궁전은 건축 중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게 된다. 처음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지다가 이후에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전환됐다. 그러다 18세기에는 벤츄라 로드리게스가 신 고전양식을 가미하여 궁을 손보게 된다.

산타크루즈 궁은 반원형의 아치가 인상적인 3층 건물이다. 각층은 수도원 형식의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왕이 거주했던 궁치고는 상당히 소박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박함 중에서도 사치스러운 공간은 있었다.

2층에 예배당과 함께 도서관이 있었는데 고 장서들이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금테를 두른 황금 도서관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장서들은 그레고리 페르난데즈가 모은 것들이란다. 책값만 해도 엄청나다고 한다.

 

 

 

 

 

▲ 황금 도서관 산타크루즈 궁에 있는 도서관.

유리 너머로 찍어서 좀 깨지게 나왔다.  

 

 

 

 



대학도시 바야돌리드와 세르반테스

 


산타크루즈 궁의 화원을 가로 질러가면 바야돌리드 대학의 입구가 나온다. 바야돌리드 대학은 1241년에 건립됐는데 1254년에 등장한, 그 유명한 살라망카 대학보다 더 오래된 대학이다. 사실 바야돌리드 대학의 모태는 팔렌시아(Palencia : 동부에 있는 '발렌시아'와 다른 도시) 대학이었다. 팔렌시아 대학은 1212년에 건립됐다. 이후 바야돌리드로 이전하여 더 큰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시가지에는 바야돌리드 단과대들이 분산되어 있다. 또한 2002년에는 대문호인 세르반테스 이름을 딴 미구엘 세르반테스 대학(Miguel de Cervantes European University)이라는 사립대학도 세워졌다. 그래서 이 도시 자체는 커다란  캠퍼스 같다는 느낌이 든다.

 



 
▲ 세르반테스 생가 바야돌리드에 있는 세르반테스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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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는 세르반테스의 생가도 있다. 세르반테스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무능했다. 그 여파로 고향을 등지고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바야돌리드도 그 중 하나였다.


세르반테스도 앞서 언급한 레판토 해전에 참전했다. 전투 중에 그는 왼쪽 팔에 큰 부상을 당한다. 그 때문에 평생 왼쪽 팔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레판토 외팔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설상가상이라고 그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타고 있던 배가 납치되어 5년 동안 포로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도 세비야에 있는 감옥에서 구상을 했다고 하니, 세르반테스의 삶도 그 자체로 한 편의 소설인 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필자가 생가를 방문했을 때는 휴관을 하고 있었다. 안타까웠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한편 이 도시에는 학교만 많은 게 아니다. 궁전도 많다. 앞서 언급한 산타크루즈 궁외에도 피멘텔 궁(Palace Pimetel)이나 비베로 궁(Palace Vivero) 등 여러 궁전 건물이 있다. 특히 비베로 궁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 콜럼버스 동상 거대한 콜럼버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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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9년 행한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인해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은 더욱더 활기를 띠게 된다. 이후 마침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들이 축출되기에 이르는데 그때가 1492년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아 떠난 그 해였다.


바야돌리드는 콜럼버스가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기차역 앞에 있는 콜론 광장이라는 곳에는 그의 동상이 크게 세워져 있었다. 워낙 동상이 커서 그런지, 철없는 동네 아이들은 그 동상에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바야돌리드 대성당

 

 


 
▲ 바야돌리드 대성당 바야돌리드 대성당(Valladolid Cathedral). 뒤쪽으로는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교회가 보인다.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고, 안티구아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두 건물이 잘 보이는 카페가 있는데 그곳에 앉으면 서양미술사 공부가 저절로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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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돌리드 대성당 재정난에 휩싸여 아직까지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정돈되지 않은 성당의 뒤편을 담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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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소개할 곳은 바야돌리드 대성당(Valladolid Cathedral)이다. 이 대성당은 우여곡절이 많은 건물로 아직까지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1595년 9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승인에 의해 바야돌리드에 새롭게 주교 관할구가 설치된다. 이에 시 위원회는 에스파냐 땅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짓기로 결의 한다.


당시는 국왕 펠리페 2세가 바야돌리드에 거주하며 에스파냐를 통치하던 시기였다. 펠리페 2세의 고향은 이곳 바야돌리드였다. 왕이 거주하니 이 도시는 사실상의 도읍지였던 셈이다. 도시에 주교 관할구가 생성됐고, 도읍지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에스파냐 땅에서 가장 큰 성당을 짓겠다는 시 위원회의 결의가 결코 허망한 것은 아니었다.

 

 

 


 
▲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산타마리아 안티구아 교회(Santa Maria Antigua).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다. 언뜻보면 예배당이 아니라 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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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겠는가? 1606년, 펠리페 3세는 수도를 마드리드로 이전한다. 이에 도시의 정치적 위상도 추락하게 된다. 중심권에서 벗어나니 시 재정도 그만큼 타격을 입게 됐고, 대성당의 건립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됐다. 결국 대성당 건립은 미완으로 남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바야돌리드 대성당 뒤편에는 산타마리아 안티구아(Santa María Antigua) 교회도 있다. 필자는 그 두 건물이 잘 보이는 바르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대성당은 에레라(Herrerian)라는 스페인식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반면, 안티구아 교회는 길쭉한 종탑이 인상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 둘을 비교하면서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참고로 안티구아 교회는 마요르 광장에 서 있는 콘데 안스레스에 의해 12세기에 첫 삽을 떴다.

 

 

 

 



정교한 석조 양식으로 유명한 산 파블로 교회


 
▲ 산 파블로 교회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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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방지는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건물인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다. 섬세한 조각상들이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 건물은 1270년 경에 처음으로 짓기 시작했다. 이후 1550년 경에는 건물 정면을 섬세한 조각들로 새겨 넣게 된다.


이렇게 건물 정면을 정교하게 꾸미는 기법을 두고 파사드(facade)라고 한다. 파사드는 건물을 돋보이게 할뿐더러 자체의 위엄을 높이는 형식으로 작동된다. 이렇듯 파사드가 적용된 산 파블로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몇몇 석조상들은 훼손이 된 상태였다. 인물을 형상한 조각들이었는데 어떤 것은 팔다리가 잘려나가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목이 없기도 했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석조상들에도 적용됐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산 파블로 교회 떨어져 나간 장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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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파블로 교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쇠락한 제국의 한 귀퉁이를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저런 화려한 장식들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당시 스페인 백성들의 노고를 떠올리기도 했다.


'저런 화려한 건축물이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이 필요했을까? 또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수탈은 어떻고?'

솔직히 필자는 바야돌리드 대해서 잘 몰랐다. 하지만 그곳에 가지 않았으면 무척 후회했을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 상자를 얻은 느낌이 들 정도로 흥미로운 여행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화려한 유물들을 탐방하며 감탄사만 연발하지는 않았다. 많은 물음표도 남기고 왔다. 그런 물음표들은 다음 여행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을 생각이다. 단순히 사진을 찍기 위해 옛 도시를 가는 것은 아니니까….

 

 



도움말

 

1. 바야돌리드는 마드리드에서 버스로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마드리드 국제 공항에서 출발하는 공항버스도 있다. 그 버스는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

2.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시티투어를 할 수 있다. 소요 시간은 3~4시간 정도. 단 길이 좀 복잡하니 주의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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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귀로 만든 음식, 혀를 녹이는 맛이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9] 발라돌리드 ①

 

15.01.25 21:30   최종 업데이트 15.01.25 21:30

 

곽동운(artpunk)

 

 

 

 

 

 

 
▲ 산 파블로 교회 산 파블로 교회(San Pablo Church)는 정교한 석조물로 정면을 꾸몄다. 발라돌리드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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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6일, 여행 14일째.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 여행을 마친 후, 필자는 순례팀과 작별하고 개별 배낭여행 형식으로 일정을 이어갔다. 함께 북적북적대며 여행하는 재미와도 작별해야 했다. 이제부터는 고독한 '단독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여태껏 단체 여행의 장점을 누렸으니 이제는 단독 여행을 누려볼 차례였다.

 



배낭여행의 첫 목적지, 발라돌리드

여행 동선을 크게 잡지는 않았다.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중부권 영역 일대만 여행 대상으로 삼았다. 스페인에 가면 꼭 들러야 한다는 바르셀로나와 이슬람의 역사가 남아 있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은 제외하기로 했다. 그렇게 골랐더니 발라돌리드, 세고비아, 톨레도 등 세 개의 도시가 정해졌다.

 

 


 
▲ 발라돌리드 중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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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돌리드(Valladolid)가 그 첫 번째 여행지였다. '바야돌리드'라고도 불리는 이 도시는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다. 마드리드에서 버스로 약 2시간 30분 정도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이곳은, 중세 시대에 대학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도시다.


마드리드에서 16유로를 주고 발라돌리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페인 버스는 우리나라 버스보다 더 크고, 좌석도  많았다. 화장실까지 갖춘 곳도 있었다. 심지어 국제선 여객기에서나 볼 수 있는 개별 모니터가 장착된 버스도 있었다. 그 모니터로 음악을 듣기도 하고, 영화도 볼 수도 있다. 게임도 가능하다. 아무래도 국토가 넓고, 주행 시간이 길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스페인에서 한반도를 떠올리다


한편, 장애인이 고속버스를 타는 데 용이하도록 리프트 장비가 설치된 버스도 있었다. 그냥 '보여주기'식으로 한 두 대 정도가 배치된 것이 아니었다. 꽤 많은 리프트 버스가 운행되고 있었고, 또한 그 노선도 다양했다. 우리나라의 리프트 버스 배치 상황을 생각해보면 정말 부러운 광경이었다. 이동권 약자들도 당당하게 대중교통을 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스페인 고속버스 스페인의 고속버스는 직행버스 개념이다. 논스톱으로 가지 않고 몇 군데를 들렀다 가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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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돌리드 행 버스에도 개별 모니터가 있어 필자도 음악을 들으며 차창 밖을 응시했다. 창문 밖에는 시원스런 풍광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은 카스텔라 레온(Castilla y León) 지역인데 이곳은 드넓은 평원 형태를 띠고 있었다. 광활한 평원이 드문 국토, 거기다 남북이 갈려 섬처럼 고립된 우리땅이 생각났다. 그렇게 좁은 국토에 살면서도 지역 감정이니, 동서 갈등이니 하는 식으로 감정의 골이 패니 그저 착잡한 심경이 들 뿐이었다.


바스크와 카탈루냐의 분리 운동으로 유명한 스페인에서, 한국의 지역 감정에 대해 떠올리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일일지 모른다. 잘 알려지다시피 스페인에 비하면 한국의 지역감정은 양호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바스크와 카탈로니아 문제는 1천 년 이상의 시간이 녹아 있다. 그 시간 속에는 이슬람 세력과의 항쟁 과정 속에서 나온 부산물도 또아리를 틀고 있다. 분리주의 운동이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국인은 나 혼자


주위 풍광에 매료되는 걸 멈추고, 문득 버스 안을 둘러봤다. 자세히보니 오직 필자만 동양인이었다. 마드리드에서도 산티아고에서도, 심지어 땅끝이었던 피스테라에서도 동양인은 물론 한국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만큼 한국인이 해외 여행을 많이 다닌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발라돌리도에서는 가는 버스뿐 아니라 현지에서도 한국인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고독한 단독 여행을 위한 장치(?)들이 제대로 갖춰진 셈이다.

'그래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 곳에서 진정한 배낭여행자가 돼 주지! 어차피 배낭여행도 숙식만 해결되면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가는 거잖아!'

그렇게 다짐한 후 남은 여비를 생각해봤다. 순례길에서 워낙 저렴하게 숙식을 해결해서 그런지 여행 14일째인데도 300유로 밖에 지출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4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2주 정도를 버틴 것이다. 이것만 봐도 산티아고 순례길이 얼마나 도보 여행자에게 친화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캄포 그란데에서 새들과 옥신각신


 
▲ 캄포 그란데 공작새가 노닐던 캄포 그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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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도시답게 발라돌리드는 여러 문화 유적이 산재해 있다. 하지만 시가지가 크지 않아 그 유적들을 도보로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일단 버스 터미널에서 빠져 나온 후 처음 방문한 곳은 캄포 그란데(Campo Grande)라는 공원이었다. 스페인어로 'Campo'는 '초원' 혹은 '들판'이란 뜻이고, 'Grande'는 '큰'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캄포 그란데는 '큰 들판'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삼각형의 틀을 가진 캄포 그란데는 이 도시 사람들이 무척 사랑하는 공원이다. 이곳은 새들의 천국으로, 공작새를 비롯한 비둘기, 오리, 거위들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특히 공작새가 눈에 많이 띄었는데 어떤 녀석은 갈 길 바쁜 필자 뒤를 졸졸 따라 오기도 했다. 먹이를 달라는 것이다.

"가라! 나 먹을 것도 없어!"

그래도 공작새는 양반이었다. 연못에 사는 거위 한 마리는 아예 필자의 손가락을 낚아챌 듯 덤벼들었다. 괘씸한 생각에 계속 먹이를 주는 척하며 손을 거두기를 반복했다. 그랬더니 신경질을 내듯 "꽥꽥"대며 물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필자의 승리였다. 이렇듯 새들과 옥신각신하는 재미 때문인지 캄포 그란데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김치와 고추장이 동시에 생각나는 요리

 


 
▲ 오레자 갈레가 (Oreja Galle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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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시청 건물이 있는 마요르 광장(Plaza Mayor)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발라돌리드 마요르 광장은 상당히 규모가 큰 광장으로, 이 도시 사람들이 모임 장소로 애용하는 곳이다. 노천 카페가 광장을 둘러싸듯 즐비해 있고, 인근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도 많았다. 여행 안내소에서도 마요르 광장 거리에는 맛 좋은 바르(bar)와 카페가 많다며, 꼭 거기서 식사를 해보라고 권할 정도였다.


필자도 광장 인근에 있는 바르에서 오레자 갈레가(Oreja Gallega)라는 음식을 주문했다. 가격이 4유로로 무척 저렴했기에 그 요리를 택한 것이다. 값이 싸기에 그저 간단한 샐러드 요리가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무슨 비계 껍데기가 나왔는데 외관부터가 아주 비호감이었다. 딱 봐도 느끼함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아까운 음식을 버릴 수도 없지 않은가? 보기에는 그래도 맛은 별미일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음... 김치와 고추장이 동시에 생각나는 요리는 난생 처음이야. 아주 느끼한 맛이 혀 전체를 녹여버리는 느낌이군... 젠장!'

 

 


 
▲ 케밥 이 케밥도 느끼해 보이시나? 좀 느끼하긴 했어도 케밥은 먹을만 했다. 양도 많아서 반은 먹고, 반은 남겨서 도시락을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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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큼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도 오레자 갈레가를 맛본다면 분명 필자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레자 갈레가는 소의 귀를 잘라서 만든 요리였다. 그리고 그 느끼한 맛을 음미하며 먹는 요리라고 했다.


달리 이야기하면 한국 사람이 요리를 먹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소 귀 요리인 줄도 모르고 덥석 주문했다가는 느끼함으로 아주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억지로 식사를 마친 후문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옆 카페에 붙은 광고지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앗! 옆에 일식집이 있었네. 초밥이 비싸지 않네...'

 

 

 

고독함을 뼛속까지 체험한 밤

 


 
▲ 야경 발라돌리드 시가지의 야경. 캄포 그란데 입구쪽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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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식사는 해결됐다. 이제 문제는 잠잘 곳이었다. 지금까지 산티아고 순례길의 알베르게 요금에 익숙한 터라 호스텔 비용이 걱정이었다. 그나마 호텔은 눈에 잘 띄었는데 호스텔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도시가 오래돼서 그런지 발라돌리드는 좁은 골목길이 많았다. 어둠이 내리자 골목길이 더 좁게 느껴졌다. 골목길을 헤매며 값싼 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호스텔 파리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뭐요? 40유로요?"

필자는 멈칫했다. '호스텔 비용이 40유로나 하다니! 조금 더 보태서 호텔에 들어가는 게 낫지!' 그냥 두 말 없이 발길을 돌렸다. 6유로로 1박을 할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가 무척이나 그리운 순간이었다. 

저렴한 숙박지를 찾아 열심히 발라돌리드를 걸어 다녔다. 밤 길이라 그런지 계속 같은 골목을 뱅뱅 도는 느낌이었다. 설상가상이라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낯선 타국의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호스텔 리마라는 곳을 찾아냈고, 25유로를 주고 1박을 할 수 있게 됐다. 발품을 팔았더니 그나마 저렴한 숙소를 찾아낸 것이다.

고독한 단독 여행의 특징을 뼛속까지 체험한 밤이었다. 북적북적하던 알베르게가 그리운 밤이었다. 냄새는 났지만 서로 간의 격려가 넘치던 알베르게로 돌아가고 싶은 밤이었다. 발라돌리드의 문화유적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진다.

 

 


 


 
▲ 마요르 광장 발라돌리드 마요르 광장. 꼰데 안수레스(Conde Ansurez) 동상이 있다. 페드로 안수레스라고도 불리는 이 인물은 에스퍄냐 북서부 지역의 유명한 백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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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에 작은 다짐을 실어보내며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8]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15.01.22 08:25 최종 업데이트 15.01.22 08:28
곽동운(artpunk)

 

 

 

 

 

 

 

 
▲ 피스테라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바위 위에 철로 만든 신발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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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2일, 여행 10일째.


이전 여행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스페인의 땅 끝 마을인 피스테라(Fisterra)의 길은 확실히 개발이 덜 된 느낌이었다. 황무지 같이 방치된 곳들도 있었고, 간간이 버려진 집들도 눈에 띄었다. 스페인의 농어촌도 도시로의 인구 유출이 심각해 보였다.

그렇게 개발도 안 됐고 인적도 드물다 보니,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중 인상적인 지형도 눈에 띄었다. 아침에 올베이로아(Olveiroa)에서 출발을 한 후, 1시간 정도 이동했을 때였다. 길 옆쪽으로 살라스 강(rio xallas)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는데 감입곡류 형태였다.

 

 

 


 
▲ 살라스 강 감입곡류형 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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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입곡류는 하천이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뱀처럼 꾸불꾸불하게 감겨 나가는 것을 말한다. 감입곡류 일부 구간에서는 강물이 350도로 휘돌아 나가기도 한다. 그런 살라스 강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월의 한반도 지형과 예천의 회룡포가 생각났다. 사실 한반도 지형을 담은 서강과 회룡포를 만든 내성천에 비하면 살라스 강의 꾸불꾸불함은 새발의 피였다. 이렇게 남의 것을 바탕삼아 우리 것을 비교해 보는 것도 해외 도보여행의 장점 중에 하나다. 


뱀처럼 휘감겨 흐르는 살라스 강처럼, 강은 있는 그대로 흐르게 해야 한다. 괜히 직선화를 한다, 보를 세운다 하면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그럼 강은 역습을 하게 된다. 지금의 4대강을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360도 전체를 보는 도보여행

 


 
▲ 피스테라 스페인의 북서부, 갈리시아 지역. 피스테라, 묵시아(Muxia), 산티아고 콤푸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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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의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가? 걷고 또 걷다 보니 배터리가 방전되듯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수그려서 걸으니 정면만 응시했다. 시야가 무척이나 좁아진 것이다. 그날 여행수첩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도보여행은 앞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위사방 360도 전체를 보고 가는 것이다. 길을 가다 잠시 멈춰 서서 꽃과 나무를 감상하고, 시냇물 소리도 듣고, 바람도 느끼는 것이 진정한 도보여행이다."

 


여행수첩에는 "도보여행은 360도"라고 적어 놓았지만 정작 필드에서는 시야각이 겨우 45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는 자신이 적어 놓은 것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니 결국 목적지인 피스테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보여행의 마지막을 아주 화끈하게 불태운 듯싶었다. 발바닥이 불이 난 듯 아주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본 대서양에 발을 담가 열을 식히고 싶을 정도였다.

4년 전 행한 국토종단 여행도 무척 힘들었다. 해남 땅끝 마을을 방문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태풍을 만나고, 텐트가 망가지고... 하지만 결국에는 국토종단 여행을 무사히 종료 됐다. 그렇게 고생스러운 여정 때문이었는지 아직까지도 그 여행은 필자의 뇌리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피스테라 길을 포함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도 마찬가지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고 또한 많이 배운 여행이라서 그런지 여운이 아주 길게 갈 것 같다. 

 

 



피스테라와 야고보는 관련이 없다?

 

 


 
▲ 오레오 곡물 창고인 오레오. 습기와 설치류들을 피하기 위해 기둥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둥은 끝 마무리를 둥글게 했다. 기둥 마무리 부분이 둥그니 아무리 쥐들이 기둥을 타고 올라와도 끝 부분에서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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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대개 그곳을 유럽대륙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피스테라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피스테라는 필자가 반복해서 기술한 대로 스페인의 땅끝이지 유럽 대륙의 땅끝은 아니다.


정확히 유럽 대륙의 땅끝은 호카 곶(Cabo de Roca)이다. 호카 곶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깎아질 듯한 해안절벽이 일품인 곳이다.

 

 



 
▲ 피스테라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에 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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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테라에 대한 환상(?)을 한 가지 더 깨보자. 앞선 여행기 2편
(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에도 언급했듯이, 야고보 성인은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래서 야고보의 시신이 담긴 배가 예루살렘에서 피스테라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항해 기술은 둘째 치고, 사역을 하지도 않은 곳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전도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스테라가 왜 야고보와 연결이 됐을까? 아무래도 야고보의 존재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피스테라가 동원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로마인들은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도착하여 별들의 들판이라는 산티아고 콤프스텔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정리될 수 있다. 이런 전개 과정 자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익사이팅'한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 챔피언 이 스페인 사람은 피스테라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필자에게 큰 감흥을 주어서 이번 여행기에 사진을 올려본다. 이 분의 왼쪽 다리를 보시라. 의족이다. 저런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더 당당했다. 저 자전거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물론 이베리아 반도 순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챔피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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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 깨졌다고는 해도, 피스테라는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곳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안절벽들을 따라 가다보면 땅끝 등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의 모습은 일품 중에 일품이다. 특히 이곳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띄우는 의식을 행한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자신의 것들을 산화 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등대 근처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태운 신발과 옷가지의 흔적들이 널려 있었다.

피스테라는 그런 장소였다. 무언가 의식을 행하거나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마치 해남 땅 끝에 가면 무언가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필자도 대서양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 유럽대륙을 자전거로 피스테라에서 만난 한국 여대생. 터키에서부터 스페인 피스테라까지 무려 5000km 넘는 거리를 단독으로 여행 했다고 한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진짜 강철같은 에너지를 가진 청년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자전거로도 순례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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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 앞에서 다짐을 한 말치고는 무척 소박한가? 그래도 상관없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한다는 것이 평소 필자의 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허상과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일들을 척척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고 생각한다.


지나간 과거를 괴롭게 되새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서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기 하다. 대신 너무 현실적으로 살지는 말자. 가능한 꿈은 얼마든지 꾸자!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도보여행은 끝이 났다. 도합 200km 정도를 걸었는데도 성취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서인지 <오마이뉴스>에 여행기를 작성해 송고할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였다. 당장 배낭을 꾸려서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꾹 참아야 했다. 그만큼 순례길은 필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남북한 순례자들이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

글을 마치기 전에 순례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본다.

순례길은 화합의 길이었다. 지역감정으로 유명한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 순례길이었다. 스페인 내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앙숙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발트3국) 청년들이 서로 의지를 하며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었다.

도보여행을 하는데 국적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소용이 없다. 순례자의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열심히 즐기며 도보여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필자도 일본인 친구들과 짧게나마 즐겁게 걸었다. 니가타 출신이라는 처자는 필자에게 한국말로 '오빠'라고 칭해 주었다. 필자도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응답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재미다.

산티아고 카미노에서 북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일일 것이다. '통일대박' 시대에 자연스러운 남북한의 인적교류가 이루어지는 거니까!

순례팀은 차량을 통해 피스테라에서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또 다른 바닷가 마을 묵시아(Muxía)로 이동을 했다. 묵시아도 풍광이 무척 아름다운 어촌 마을 중에 하나였다. 묵시아 여행을 끝으로 필자는 개인 배낭여행 형식으로 스페인 중부권 일대를 탐방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가겠다.

 

 



 
▲ 묵시아 묵시아는 풍광이 아름다운 어촌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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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땅끝 가는 길에 만난 '빤스' 할아버지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7]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 길

 

15.01.13 11:00최종 업데이트 15.01.13 13:51

 

 

 

 

 

 

 

 

 
▲ 피스테라 가는길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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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창피해서 명함을 못 내밀겠네요."

"뭐가요?"
"800킬로 찍은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겨우 100킬로 밖에 못 뛰었으니까요."
"에이, 그래도 100킬로도 적은 거리가 아니죠."

 


산티아고 대성당 인근에서 만난 한국 순례자들과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100km도 적은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풀코스인 800km를 마친 순례자들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필자도 국내에서는 무동력 여행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누볐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그저 1/8만 채운 순례자였을 뿐이다. 그런 자격지심 때문인지 성취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서 다음 목표를 향해 당장이라도 발을 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감정은 필자 혼자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순례팀 전체가 느끼고 있었다.

 



 
▲ 피스테라 가는길 피스테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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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땅끝마을 '피스테라'


2014년 11월 10일, 여행 8일째. 아침 일찍, 순례팀은 피스테라(Fisterra)로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피스테라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한다.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다. 

'이번에는 종단을 했으니까 다음에는 남해안을 휙 가로질러 횡단을 해야겠군. ' 

 


 
▲ 산티아고 대성당 피스테라 길의 시작점인 산티아고 대성당. 중앙에 있는 이는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이다. 순례팀이 방문했을 때, 대성당은 공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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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가 필요한 피스테라 길


산티아고-피스테라 구간은 확실히 순례객들이 적었다. 전날까지 북적거리던 길은 한산하다 못해 인적이 뜸하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순례팀을 이끌었던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완주자들은 프랑스 국경에서 800km를 걸어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온 거예요. 그래서 성취감과 함께 공허함 같은 것이 밀려 와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울기도 해요. 또 어떤 이들은 식사를 하다가 눈물을 닦기도 하고 그래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심경에 놓이는 거죠. 한편으로는 몸에서 진이 빠진 것도 있고요."

손성일 대장은 이번으로 해서 순례길만 벌써 3번째인데 자신도 처음 순례길을 완주했을 때 식당에서 갑자기 울컥한 적이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진이 빠진 사람들이 굳이 90km 남짓한 거리를 또 걸어서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산티아고 시내에서 피스테라까지는 직행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그걸 타면 편안히 이동할 수가 있다. 요금은 약 10유로(약 1만4천 원)정도라 저렴하고, 시간은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피스테라 구간은 순례객들이 적은 만큼 편의 시설도 적다. 당연한 것이다. 사람 가는 데 돈 간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으니 바르(bar)나 알베르게(albergue)도 드물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좀 더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알베르게 위치를 고려하여 하루 이동거리를 정확히 산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야간 트레킹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피스테라 가는 길 피스테라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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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갈리시아 지방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아 올려진 형태다. 

여행기 2편(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 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선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섰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을 것이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다. 그때마다 배낭에서 판초우의를 꺼냈다, 넣었다도 반복됐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봤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걸은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다.

 



 
▲ 무지개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많이 그런지 무지개도 자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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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두 번의 '폭풍우'를 만나다


11월 11일에는 짧은 순간이나마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기도 했다. Olveiroa라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 우박을 동반한 집중호우를 만났는데 무슨 태풍이 온 줄 알았다. 빗줄기는 따가울 정도로 세게 내려치지, 강풍으로 몸은 휩쓸려 갈 것 같지. 그날의 폭풍우가 얼마나 거셌는지 여행수첩에 이렇게 기록해 놓을 정도였다.

"서울 촌놈 스페인 깡촌에 와서 듣도 보도 못한 '스페인 폭풍우'에 휩쓸려 갈 뻔했네."

순례팀은 몸이 싹 다 젖은 상태로 사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사립 알베르게는 10~15유로 정도인데 공립보다는 좀 더 시설이 쾌적하다. 이날 1박을 한 사립 알베르게는 바르까지 함께하는 곳이라 숙식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침대도 깨끗하고 안락했다.

하지만 그렇게 쾌적한 알베르게에서, 필자는 또 한 번의 작은 '폭풍우'을 만나야 했다. 예상치 못한 엄청난 폭풍우를 만난 터라 몸이 피곤했고, 또한 배도 살살 아파왔다. 그래서 화장실을 좀 오래 썼다. 이곳도 화장실과 샤워실이 붙어 있는 곳이었는데 그날따라 '폭풍우'처럼 시원하게 화장실을 봤다. 변기가 넘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들 정도로 아주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며, 비에 젖은 속옷과 양말 등을 빨려고 세면대에 담가두었다. 화장실도 오래 보고, 샤워도 오래했더니만 밖에서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들겼다.

"쾅쾅쾅"

다른 쪽도 두들긴다.

"쾅쾅쾅"

단순히 노크가 아니라 아주 감정이 실린 듯 세게 두들겼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스페인어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온 말들이 마치 폭풍우처럼 필자의 몸을 감싸왔다.

"아임 쏘리, 아임 쏘리(I'm sorry, I'm sorry)."

 

 



 
▲ 사립 알베르게 저 곳에서 연타석(?)으로 폭풍우를 만났다. 도착하기 전에 한 번, 그 곳 화장실에서 또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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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미안하다고 말했다. 괜히 '폭풍우'와 맞설 필요가 없으니까. 대충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문을 여니 어느 스페인 할아버지가 '빤스'바람으로 시계를 가리키며 필자에게 또 속사포를 쏴댔다. 이에 필자는 합장을 한 후 다시 '아임 쏘리'라고 했더니, 그분은 무언가 울분 같은 걸 삼킨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또 폭풍우를 하나 넘기게 됐다.


바르에서 치킨샐러드와 와인으로 맛있는 저녁을 즐긴 후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폭풍우 때문에 진이 빠졌기에 몸이 아주 노곤했다.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침실로 돌아왔을 때 좀 당혹스러웠다. 속사포로 작은 '폭풍우'를 일으켰던 '빤스' 할아버지가 맞은편 침대에서 느긋하게 '빤스' 바람으로 누워있던 것이 아닌가! 대신 이번에는 뭐가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 다혈질이라는데 '빤스' 할아버지를 보니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이렇듯 스페인의 땅끝마을로 가는 길도 역시 알콩달콩한 에피소드가 넘쳐났다. 폭풍우를 연이어 만났으니...

 

 



 
▲ 사이 좋은 개와 고양이 개와 고양이는 서로 앙숙이라는데 저 녀석들을 보니 그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편 필자도 저 사진에서처럼 그 스페인 '빤스' 할아버지와 다정(?)하게 1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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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산티아고-피스테라 구간은 약 90km 정도다.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이 구간은 바르나 알베르게 같은 편의시설이 메인 루트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 심지어 3시간 만에 겨우 바르를 하나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러니 하루 이동거리를 적절히 계산하여 움직여야 할 것이다.

2. 바르가 부족하다보니 한두 끼 정도의 식량은 항상 몸에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 좋다. 필자는 이 구간에서는 거의 3인분 정도 되는 식량을 계속 지니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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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처먹고 할일 없어서"... 걷다 보면 이런 소리도 듣네요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6편] 도보여행자 반기는 산티아고 주민들은 달랐다

 

15.01.11 19:42  최종 업데이트 15.01.12 08:22

 

곽동운(artpunk)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구시가지. 사진 중앙에 있는 첨탑이 바로 산티아고 대성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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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hola)."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보면 저런 말들을 숱하게 듣게 된다. '올라'는 스페인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인데 'h'가 묵음이 되어 '홀라'가 아닌 '올라'가 됐다. 부엔 카미노에서 '부엔'은 '좋은'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좋은 길'이 된다.

이런 말들은 순례자들은 물론이고 현지 주민들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들은 처음 보는 낯선 순례객들에게도 스스럼 없이 인사말을 건넸다. 그런 모습들은 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얼마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였다. 현지인들의 자부심은 순례길을 걷기 위해 다른 지방에서 온 스페인 자국민들도 인정할 정도였다.

 


 
▲ 자원봉사자 알베르게 자원봉사자. 공립 사리아 알베르게의 자원봉사자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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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방문지는 환대를 받은 곳과 일치한다

국내에서 도보여행을 하다보면 간혹 이런 소리를 듣곤 한다.

"밥 처먹고 할 일들이 없으니 저렇게 다니지!"

현지인들의 태도에 의해 그 동네에 대한 친밀도가 요동치기 마련이다. 현지분들이 환대를 해주었으면 그 동네에 대한 호감 지수가 급상승하고 차후에 다시 방문을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인지 필자의 재방문 예정지는 환대를 받았던 곳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저런 소리를 들으면 여행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된다. 그러면 그곳을 다시 방문할 여지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이제는 단련이 됐지만 처음 저런 소리를 들었을 때는 무척 서운했었다. 나름대로 민폐를 끼치지 않고 여행을 다닌다고 자부를 했었던 터라 그 서운함의 강도는 좀 심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잔상들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이 무척 부러웠다.

 

 


 
▲ 공립 알베르게 이모님 알베르게의 이모님. 저 이모님이 필자한테 판초우의를 건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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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자부심은 단순히 말로 그치지 않았다. 행동으로 이어졌다. 여행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는 크게 공립과 사립으로 나뉘는데, 공립 알베르게는 보통 6유로 정도에 이용할 수 있다. 1박을 하는 데 겨우 8000원 정도 밖에 들지 않는 셈이다. 아무리 순례객을 위한 시설이라지만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숙박을 할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헌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공립 알베르게의 관리자들이 그렇게 헌신을 했는데 그들은 무급을 원칙으로 하는 자원봉사자들이다. 무급인데도 공립 알베르게 자원봉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 구간 순례를 마친 사람들만이 봉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후배 순례자들을 위해 선배 순례자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셈이다.

순례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오전 8시경, 그들은 침대를 정돈하고, 화장실을 청소한다. 외관상 숙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유사한 작업을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언제나 밝았다. 조금이라도 더 후배 순례자들을 챙겨주려는 마음이 엿보였다.

돈도 안 생기는 작업을 하면서도 그렇게 너그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들의 순례길을 방문하고 있다는 자부심, 그 순례객들을 잘 거두어 보내겠다는 자부심. 그런 자부심은 그곳을 재방문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11월 9일, 여행 7일째. 순례팀은 페드로조(O Pedrouzo)에 있는 한 공립 알베르게를 출발하였다. 페드로조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는 약 17km 남짓 떨어져 있다.

그날도 역시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했다. 필자는 순례팀을 다 보내고 알베르게에서 제일 늦게 나올 생각이었다. 후미 대장을 자처한 탓도 있지만 '빨리 가서 뭐하냐' 하는 생각이 있어서 그랬다. 어차피 도보여행이라는 건 속도보다는 방향이 아니겠는가. 속도를 내서 빨리 가려면 그냥 자동차를 타고 가면 되지 굳이 배낭을 짊어 메고 걸어갈 필요가 없다는 게, 도보여행에 대한 필자의 강한 신념이다.

 

 



 
▲ 스페인 사람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스페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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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욕'을 하며 눈물을 보였던 마드리드 처자

꾸물꾸물한 스페인의 11월 날씨를 감상하며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이미 순례자들은 거의 다 떠나고 없어 알베르게에는 정적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필자도 배낭을 둘러메고 문을 나서려고 했는데 젊은 처자가 화장실에서 나와 자신의 침대로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마드리드에서 왔다는 이 처자를, 사실 전날부터 유심히 지켜봤었다. 예뻐서(?) 지켜 본 것도 있었지만 발목에 큰 붕대를 메고 있어서 한 눈에도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페드로조에서 순례길의 종료점까지는 반 나절 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알베르게에 머무르는 순례객들은 들떠 있었다. 이제 곧 산티아고 대성당에 들어설 수 있다는 설렘이 그들 표정에서 묻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척 슬픈 표정을 지었고 눈물까지 보였다.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순례 여행의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눈물이 되어 흘러 내렸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녀는 이런 말까지 내뱉었다.

"Fu*****"

스페인의 젊은 처자에게 저런 '욕'을 들으니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느낌이었다. '욕'을 들어먹었지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의 배낭을 들어 아래층까지 내려주기로 했다. 그녀와 필자가 함께 있던 룸은 2층이었고, 절뚝거리는 다리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아래층까지 오기에는 좀 버거웠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나름대로 착한 일을 한 것이다. 참고로 알베르게는 남녀 공용이다.

 

 



 
▲ 스페인 사람들 이 스페인 친구는 길을 걷는 내내 우리 순례팀과 동선이 겹쳤다. 이 친구는 비고(vigo) 출신인데 축구선수 박주영을 좋아한다며 셀타비고 유니폼을 뽐내고 있었다. 셀타비고는 비고를 연고지로 한 축구클럽이다. 잠시 박주영 선수가 뛰기도 한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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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전날처럼 영락없이 몸이 젖을 판이었다. 우비를 가지고 가긴 했지만 다 찢어진 상태였다. 안일하게 1회용 우비로 준비한 게 패착이었다. 이미 우비는 비닐봉지보다도 더 못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착한 일을 해서 그런가?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로 ARCA 알베르에서 자원봉사를 하시는 이모님(그냥 한국에서 잘 쓰는 호칭을 써봤다) 이 판초 우의를 하나 건네주신 것이다. 전날 신발이 젖었다는 필자의 몸짓에 이모님은 수더분한 미소를 보내며 직접 신발 말리는 장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는 필자가 따로 요청한 것도 아닌데 흔쾌히 판초 우의를 건네주셨던 것이다.

선배 순례자로서 후배 순례자를 잘 챙겨준 셈이다. 물론 그 판초 우의는 누군가가 두고 간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새 것 이상으로 고마운 물품이었다. 덕분에 그 이후부터는 비 걱정은 하지 않게 됐다.

 

 



 
▲ 십자가 길을 걷다 목숨을 잃은 순례객들을 위해 세워진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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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결국 사람이다

 


도보여행가 김남희씨가 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스페인 산티아고 편>을 보면,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는 지은이를 독일인인 아그네스 아줌마가 치료를 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치료를 마친 후에 아그네스 아줌마는 김남희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를 도울 수 있어서 정말 기뻐."

필자는 배려와 친절도 순례길의 일부분이라고 판단한다. 필자도 그런 배려와 친절을 듬뿍 받고 왔다. 또한 할 수 있는 대로 받은 만큼 베풀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름답다. 주위 풍광이 아름답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도 아름답다. 그래서 그 길 위에는 좋은 기운들이 넘쳐난다. 저토록 사랑과 인심이 넘쳐나기에 나쁜 기운이 스며들 틈이 없다.

그래서인지 순례길 곳곳에는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다. 길을 걷다가 죽음을 맞이한 순례객들을 추모하기 위해 후배 순례자들이 세운 십자가들이다. 볼거리, 먹거리, 쇼핑거리를 다 거쳐 온 여행의 최종지점에는 항상 사람이 서 있었다. 앞에 것들이 다 좋아도 마지막에 사람이 별로면 그 동네의 친밀도도 별로가 된다. 반면 앞에 것들이 미진해도 사람이 좋으면 그럭저럭 다 무마가 된다. 그러고 보면 여행도 결국 사람이다.

"밥 처먹고 할 일들이 없으니 저렇게 다니지!"

웬만하면 이런 발언들은 삼가주셨으면 한다. 대신 이렇게 바꿔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밥 맛있게 드시고, 우리 고장도 좀 다녀가세요. 우리 고장에도 좋은 것들이 많아요. 대신 여행자의 매너는 잊지 마시고요!"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하는 나라들의 국기를 그려 넣은 그림. 우리나라는 맨 아래쪽에 있는데 'korea'가 아닌 'corea'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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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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