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로입니다. 그간 아웃도어 활동을 하면서 숱하게 뱀도 만나고, 숱하게 들개를 만났지만 멧돼지는 처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어둠이 내린 산책로에서 홀로 멧돼지를 대면했답니다. 그 두려움이란! 올 여름에 공포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제대로 공포를 맛 본 셈이죠. 돈 한 푼 안들이고... ^^;

사건 개요를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10월 6일 오후 6시 20분 경이었습니다. 저는 북한산 둘레길 도봉산 구간 어느쯤을 걷고 있었습니다. 해가 많이 짧아져서 그런지 이미 산책로는 어두워졌더군요.

저도 하산점을 찾아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답니다. 대충 10분 정도만 더 걸으면 대로변으로 나와서 버스를 탈 수 있을 거 같더군요. 그런 계산을 하면서 계속 이동을 했습니다. 다행히 산책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더군요. 폭도 넓고 돌부리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동을 하다 나무데크 계단을 하나 마주했습니다. 뭐 나무데크 계단이야 둘레길에서는 흔하디 흔하게 만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로... 말입니다. 그때의 나무계단은 흔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층계가 많은 계단이 아니었는데 그 맨 상층부에 무언가 시커먼 것이 떡 하고 버티고 서 있더군요. 마치 고사상에 올라가는 돼지머리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커먼 것이 저를 주시하더군요! 순간 제 입에서는 이런 말이 맴돌았습니다.

멧.돼.지...!

천천히 뒷걸음을 쳤습니다. 멧돼지를 만났을 때의 행동수칙이 기억났던 것이죠.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저와 그 녀석 사이의 거리가 약 20~3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뒷걸음을 쳤는데 잠깐 녀석이 고개를 돌리더라고요. 이때다 싶었지요. 냅다 달렸습니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렸습니다. 제 자신이 기특할 정도로 정말 잘 달렸습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생각하지 했을까요?

'나한테 이런 초인적인 달리기 능력이 있었나? 올림픽 나가면 바로 금메달이겠네!'

그런 공포의 질주 덕택이었는지 저는 안전하게 대로변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동네 주민분을 만났는데 그쪽 일대가 '멧돼지 소굴'이라고 일러주더군요. 한마디로 저는 겁도 없이 홀로 멧돼지 소굴에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이번 추석 명절은 아주 기억에 많이 남을 거 같습니다. 그 고사상 돼지머리 같은 녀석 때문에 제 안에 잠재되어 있던 초인적인 능력이 제대로 발현이 됐으니까요.^^; 

전 기회되면 그 멧돼지 소굴에 다시 가서 고사상 돼지머리 녀석을 때려잡을 생각입니다. 휴대용 야삽을 가지고 갔으면 한 방에 때려잡을 수 있었는데... 그때 안 가지고 가서...ㅋ  때려잡으면 삼겹살 파티해요! 고기는 제가 쏠게요~^^;












추석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연휴를 맞이하여 열심히 답사를 다니고 있답니다. 놀면 뭐합니까! ^^;
요즘에는 북한산의 남쪽면을 집중적으로 답사하고 있답니다. 정확히는 성북구 정릉 일대이지요. 

이쪽 부근은 최근에 개통된 우이신설 경전철 덕분에 접근성이 무척 좋아졌답니다. 우리 같이 트레킹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희소식이지요.

그렇게 요즘 정릉 일대를 탐방하고 다녔답니다. 박경리 선생의 사진도 답사를 다니면서 찍은 사진이지요.

박경리 선생이 통영에서 서울로 왔을 때 북한산과 가까운 곳으로 이주를 하셨답니다. 소위 문화주택이라는 곳에 보금자리를 트셨는데 그곳이 정릉천 부근이었던 것이죠. 아래 사진처럼 정릉천을 쭈~욱 타고 가다가 살짝 골목으로 빠지면 박경리 선생이 사셨던 집이 나옵니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듯 선생과 관련된 표식이 아무것도 없답니다. 수성동 계곡 아래 윤동주 선생 하숙집은 안내판이라도 걸려 있는데... 이곳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딱 좋을 정도입니다. 

박경리 선생은 저 집에서 <토지>를 쓰기 시작하셨답니다. 물론 이후에는 원주에 가셔서 계속 집필을 하셨지만요. 그렇게 정릉골은 이야기거리도 많고, 볼거리도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 트레킹 코스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정릉골 역사트레킹! 

사실 이 코스를 메이킹 할 때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걸을 때마다 이런 말이 제 입에서 내뱉어집니다.

대박!!!















*** 추석 연휴 끝자락인 10월 8일 일요일에 백련산 역사트레킹 가보려고 합니다. 명절 연휴에서 온 피로를 숲길 걷기를 통해 날려 보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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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산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천년고찰 백련사가 자리잡고 있는 백련산은 서대문 안산과 무척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답니다. 그래서 백련사 역사트레킹도 안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한마디로 백련산 역사트레킹은 '안산-백련산'을 이어서 걷습니다.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탐방하는 곳은 안산의 북쪽 자락에 위치해 있는 봉원사입니다. 강남에 있는 봉은사 말고, 봉원사입니다. 태고종의 총본산인 봉원사는 그 역사가 천 년이 넘는 천년고찰입니다. 오래된 명찰이라서 그런가요? 봉원사는 수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습니다. 불교에 비판적인 정도전이 현판을 쓴 이야기, 흥선대원군이 충남 예산에서 가져온 범종 이야기, 한글학회가 최초로 열린 이야기 등등...

참 스토리텔링이 넘쳐나는 사찰이지만 산책하기도 참 좋은 절이 바로 봉원사입니다. 그렇게 봉원사를 탐방한 트레킹팀은 홍제천을 넘어 백련산에 진입하게 됩니다. 백련산에도 천년고찰이 있습니다. 바로 백련사입니다. 백련산에 있다고 백련사지요. 

백련사는 서울의 4대 비보사찰로 불립니다. 비보사찰이란 액운을 막고, 모자란 기운을 채운다는 뜻으로 도선국사가 저술한 <도선비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산천비보라고도 언급되는 비보사찰은 왕건의 훈요 10조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지력)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백련산은 해발 215미터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입니다. 백련사도 천년고찰 치고는 무척 아담합니다. 하지만 백련사가 품고 있는 역사적인 함의는 작지만은 않습니다. 더군다나 서울 중심부와 가까운 곳에 고즈넉한 명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일입니다. 봉원사도 마찬가지고요.

봉원사, 백련사 두 천년고찰을 부각시켰지만 백련산 역사트레킹에서의 백미는 숲길 탐방입니다. 능선길을 따라 쭈욱~ 펼쳐진 숲길을 걷다보면 스트레스가 확 날라갈 것입니다. 그러다 은평정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 올라서면 눈이 시원해질 것입니다. 

한 개도 아닌 두 개의 천년고찰을 탐방할 수 있고, 능선 숲길도 탐방하고, 전망대에도 오르는 백련산 역사트레킹! 그 재미나는 역사트레킹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많이 와 주실거죠?^^:
























*** 예전에 가려다 계속 실패했던 삼천사 역사트레킹 다시 시도해 봅니다. 

10월 22일에 실시 예정이오니, 그때 쯤에는 북한산이 오색단풍으로 물들어 있을 겁니다. 그 아름다운 풍광을 기대해보며~!!!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말산에서 시작됩니다. 재스민을 한자로 풀면 '이말'이라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이말산은 재스민이 만발한 산이라는 뜻이죠. 이말산에 재스민이 많이 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산에는 무언가가 확실히 많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요? 바로 무덤입니다. 


특히 이말산에는 내시들의 무덤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습니다. 북한산의 지산인 이말산은 한양도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저십리 밖이라 무덤을 쓸 수 있었던 곳입니다. 북한산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말산은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무덤을 쓰기에 적당했을 겁니다. 도성에서도 가깝고 하니... 

푸근한 동네 뒷산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현재 이 산의 무덤들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쓰러진 문인석, 뒹굴고 있는 묘비, 잘려나간 망주석 등등... 자신들의 '씨앗'을 남길 수 없었던, 그래서 후손들을 둘 수 없었던 그들이기에 그런 황량함이 더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예전 내시들 중에는 양자를 들여 자신의 제사를 받들게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양자도 고자였기에 한계가 분명하게 있었던 것이죠. 

이말산을 탐방한 후 트레킹팀은 삼천사로 향합니다. 천년고찰인 삼천사는 아주 시원한 풍광을 자랑합니다. 계곡 안쪽에 자리잡은 삼천사 뒤쪽으로 북한산의 고봉들이 트레킹팀을 반겨줄 것입니다. 장군봉, 나한봉, 나월봉, 보현봉 등등... 이웃한 진관사와는 또다른 느낌을 전해줄 것입니다. 


























*** 낙산 역사트레킹갑니다. 관심 있는 분들 클릭요! ^^;




●  낙산 역사트레킹


좌청룡우백호라는 말 아시죠서울에도 좌청룡우백호가 있답니다우백호는 인왕산이고좌청룡은 낙산을 말합니다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 때 도성방어를 위해서 성을 쌓기 시작합니다그것이 바로 한양도성입니다내사산(낙산인왕산남산북악산)을 연결하여 만든 한양도성은 이제 서울의 명물이 됐습니다.


그렇게 한양도성의 동쪽 축선은 낙산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키가 작은 낙산은 낙타산이라고 불리는데 혜화동의 뒤편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형상입니다낙산 성곽길 바로 아래에는 벽화로 유명한 이화동 벽화마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낙산 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정말 일품입니다서울시내는 물론 북한산까지 한 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시원스러운 풍광을 자랑하니까요. ‘북한산을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낙산에 올라야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낙산의 또다른 자랑은 성곽길입니다낙산 구간은 걷기 좋은 성곽길로 꼽힐 정도로 순성로가 잘 정비가 되었답니다그 순성로를 따라 걷다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른 성곽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답니다성곽의 나이테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낙산 성곽길 구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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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역사트레킹 합니다! 함께 하고 싶은 분들 클릭클릭!!!^^;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비밀의 화원’ 같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별서터가 있었던 백석동천그 백석동천을 흐르고 있는 백사실 계곡또한 북악산의 수려한 산세 등등... 누군가 꼭꼭 숨겨 놓은 화원을 걷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북악산 팔각정에 서면 앞으로는 서울 시내가 뒤로는 북한산이 한 눈에 펼쳐집니다특히 북악산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일품 중에 일품입니다북한산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한 번 그 풍광 앞에 서 보세요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팔각정에서 성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군인들의 보초로입니다그 길을 걷다보면 지금 자신이 서울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지 모릅니다그만큼 그 길 주변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 광교: 청계천에 있다. 






청계천이야기 1


청계천(淸溪川)은 똥물이었습니다맑을청()자를 품고 있는 명칭과는 달리 진짜 똥물이었습니다.


예전에 그만큼 더러웠다는 뜻이죠똥물처럼 탁하다는 뜻이요?”


저렇게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저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은 청계천이 똥물처럼 오염된 하천이라고 판단하셨을 겁니다워낙 오폐수로 뒤덮이다보니 똥물만큼 더럽다고 생각하신 것이겠죠.


청계천이 똥물이었다는 말은 진짜 청계천에 똥이 둥둥 떠다녀서 붙여진 이름입니다혼탁해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진짜 똥이 흘러흘러 떠내려가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청개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습니다. 청계천이란 명칭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사용되었지요태종은 자연 상태에 놓여 있던 개천을 준설합니다퇴적이 심각했던 터라 큰 비만 내리면 일대가 다 침수가 됐기 때문입니다이때가 1411(태종11)년이었는데 그 전 해에 큰 홍수가 나서 목교가 떠내려가는 등 도성 일대가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 광교: 석각신장이 뒤로 누워 있다. 필자가 일부러 사진을 돌린 것이 아니다. 





이 시기에 광교가 만들어집니다석교로 만들어진 광교는 나무다리로 만든 목교들과는 달랐습니다튼튼한 돌다리이기에 물살에 휩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그렇게 튼튼하게 만들어진 광교의 석재들은 신덕왕후의 능에서 가져온 것들입니다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지금의 자리(성북동)로 옮기고 석각신장 같은 석물들을 광교 건설에 사용했던 것입니다처음 정릉은 지금의 덕수궁 부근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능의 석물들을 다리를 만드는데 사용했을까요왜 태종 이방원은 망자를 욕되게 했을까요신덕왕후는 태조 이성계의 계비로 첫 번째 왕세자인 이방석의 어머니였습니다이방원과는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이었지요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부정해야 했을 겁니다자신이 신덕왕후의 소생 이방석을 죽였으니까요.


청계천변의 다리들은 백성들이 많이 이용했습니다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광교를 오갔을 겁니다짚신이든 가죽신이든 그 발걸음들이 신덕왕후 능에서 가져온 석물들을 밟고 갔습니다그렇게 걸음걸음이 오가는 것 자체가 신덕왕후를 욕보이게 하는 것이겠지요.


똥물이야기하다 갑자기 광교이야기를 하니 좀 혼란스러우시죠본격적인 똥물이야기는 다음편에... ^^;








* 한양도성: 남산구간.







이전 포스팅에서 체성 구간의 돌과 문루 구간의 돌이 다르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똑같이 돌이라는 재료를 쌓아 올렸지만 문루 구간에 있는 돌들이 훨씬 더 격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런데 문루 구간은 체성 구간과 또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


일단 한양도성이 어떻게 축조됐는지, 어떤 식으로 토목공사가 행하여 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양도성은 편축법이라는 방식으로 축조됐답니다. 편축법은 한쪽 면만 쌓는 방식인데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 합치되는 축조 방식입니다. 


밖에서 성곽을 보십시오. 5~6미터 이상 되는 성벽이 우뚝 서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 안에서의 눈높이는 여장 정도 잖아요. 이것이 바로 편축법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한쪽만 쌓았다는 겁니다. 


편축법으로 성벽을 쌓는다면 일단 산을 깎아내야 합니다. 이를 삭토법이라고 합니다. 뭐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적당하게 산을 깎아 성돌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할 테니까요. 


삭토법을 할 때는 맨 아래부분(시작점)과 맨 윗부분(종료점)의 위치는 달라집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뒤로 비스듬이 깎아낸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시작점과 종료점이 수직으로 일치한다면 그 성벽은 드립다 무너질 겁니다. 그럼 공사 책임자는 유배가고...ㅋㅋㅋ


그렇게 비스듬이 삭토하고, 또 비스듬이 성돌을 올리다보니 맨 아래와 맨 윗 부분의 각도 차이가 생긴답니다. 구간에 따라 다르지만 약 15도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편축법은 한쪽만 쌓으니 그만큼 공력이 덜 듭니다. 물자와 인력을 아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사산을 둘러쌓은 한양도성은 편축법의 전형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산과 어우러졌기에 한양도성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편축법 말고 협축법이라는 방식이 있는데 고거이는 다음편에... ㅋ







* 여장: 한양도성 안쪽에서 바라보면 여장이 우리의 시야를 꽉 채운다. 여장의 위치가 우리가 보는 위치다. 여장 앞쪽의 평평한 공간을 내탁부라고 한다. 이 공간에서 전투와 경계가 이루어진다. 









* 성벽: 밖의 순성로에 보는 성은 우뚝 선 성벽이다. 






* 서울성곽: 여장 옆 내탁부를 걷고 있는 참가자.









* 숭례문: 도미노 블럭을 옆으로 쌓은 듯 하다. 필자는 저 돌을 지우개처럼 생겼다 하여 지우개 돌이라고 불렀다. 벽돌을 쌓아 올린 면장은 여장보다는 높이가 낮아 성 밖을 보기에 용이하다. 2008년에 방화에 의해 불탄 숭례문은 2013년에 복원되어 시민의 품으로돌아왔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행하다보면, 흔히 성곽길을 따라 걷다 대문 혹은 소문으로 쏙 들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낙산 역사트레킹을 한다고 가정해 보죠. 트레킹팀은 낙산 성곽길을 유유자적 하게 걷다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 길로 쏙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성곽길을 걸을 때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성체라 불리는 체성 구간과 문 구간의 차이점을. 체성 구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보는 성곽 구간입니다. 우리는 그 옆에 난 순성로를 따라 성곽과 나란히 걷는 것이죠. 


문 구간은 앞서 언급한 혜화문이나 사진에 등장한 숭례문(남대문), 창의문을 말합니다. 

첫번째 숭례문 사진을 보십시오. 같은 돌로 쌓여져 있는 듯하지만 체성 구간의 돌 하고는 차이점이 있지요? 잘 보세요. 여러분들의 센스를 믿어요...ㅋ


숭례문과 창의문에 쌓여진 돌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대석들입니다. 얼핏보면 블럭들을 차곡차곡 쌓아둔 것처럼 보일 겁니다. 이 부분을 육축이라고 합니다. 그 육축 위에 벽돌로 올려진 부분은 면장이라고 불리지요. 체성 구간의 여장이 문 구간에서는 면장이 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면장은 여장보다는 키가 낮아서 안에서 밖을 관망할 수 있다는 점이 있지요. 아무래도 문루에서는 장수들이 지휘를 하다보니 밖이 보여야 하잖아요. 여장처럼 키가 크다면 밖이 안 보일테고, 그러다보면 적군이 왔는지 산타클로스가 왔는지 모를테니까요...ㅋ


하지만 체성 구간의 돌들은 육축 구간의 돌들처럼 잘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시기마다 다르잖아요. 태조 시기의 돌, 세종시기의 돌, 숙종시기의 돌, 영정조 이후 시기의 돌. 


그렇게 보면 문 구간에 있는 육축은 그냥 시기구분이 없어서 참 좋네요. 구분할 필요가 없어서 머리가 아프지 않아...ㅋ  


한양도성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생각이 나서 올려봤습니다. 다음에 또 관련 이야기를 올려볼게요!









* 체성: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 창의문: 홍예문이 잘 드러나 있다. 면장이 여장보다 확실히 낮아 보인다. 










* 체성: 문 구간의 육축과는 돌이 다르다. 


















요즘 계란과 관련해서 말이 참 많습니다. 항생제 계란이니, 닭 진드기니... 


달걀이야 워낙 우리한테 익숙한 식품인지라 그 충격이 더 클 수 밖에요. 다 아시다시피 문제의 원인은 공장식 축사 때문이지요. 그 좁은 케이지에서 기르다보니 닭들이 유해환경에 노출될 수 밖에요. 어쩌면 올 것이 온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포스팅은 전에도 한 번 올린 내용입니다. 


밥통을 같이 쓰는 고양이와 닭입니다. 전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동물들이 밥통을 같이 쓴다는 의미로 올렸었지요. 하지만 그보다는 공장식 축사가 아닌 오픈형 축사에서 생활하는 닭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올린답니다.


두 말 하면 잔소리지만 공장식 축사가 아닌 오픈형 축사에 기른 닭들이 훨씬 더 건강합니다. 수탉끼리 싸우고, 암탉끼리 싸우고, 어른닭이 병아리들 쪼아대고... 닭장은 아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 정신이 없는 닭장이 건강한 닭장입니다. 왜? 그것이 바로 원래 닭들의 본성이니까요. 


그런 닭들의 습성 중에 흙파기라는 것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닭들은 끊임없이 흙파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닭장 곳곳에는 땅굴도 생기고, 둔턱도 생기고 그러더군요. 그렇게 판 흙으로 닭들은 흙찜질을 즐기더군요. 파헤쳐진 흙을 자신의 날개에다 붓고 날개를 펴고를 반복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런 행위들이 바로 진드기들을 없애기 위한 행동이더군요. 아프리카 하마나 코뿔소가 진흙 찜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죠.


제가 경험했던 닭장은 오픈형 닭장이었습니다. 방사형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그랬다보니 닭들은 건강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렇게 신선한 계란을 잘 생산하더군요. 저 계란은 청란입니다. 색깔이 푸른빛을 돈다고 청란이라고 불렀지요.


가끔가다 그 청란들을 제가 한 개씩 슬쩍 했다는...ㅋ 


그 닭장이 있던 곳은 경남 거창에 위치한 거창귀농학교였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걸어둔 링크를 클릭 한 번 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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