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선정 절벽소나무

 

 

 

 

 

 

* 요선암 돌개구멍

 

 

 

 

 

 

강원도 영월군 탐방은 계속이어졌다. 영월군 주천면의 허름한 모텔에서 1박을 한 후 다시 무릉도원면으로 이동했다. 주천면은 서부 영월의 중심지로 충북 제천시까지 들어가는 시내버스도 있다.

 

이번 탐방은 무릉도원면에 있는 요선정, 무릉리마애여래좌상, 돌개구멍계곡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요선정이 자리잡고 있는 주천강 일대는 명소들이 많은 곳이다. 유명한 한반도지형과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가 바로 그것이다. 주천강은 평창강 혹은 서강이라고도 불리는데 영월읍에서 동강과 합수되어 남한강으로 흐른다. 강원도 남쪽 골짜기 곳곳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들이 동강과 서강으로 모여들었고, 이후 영월읍에서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어 남한강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동강은 래프팅으로 유명한 그 동강을 말한다.

 

그렇게 주천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에 요선정(邀仙亭)이 있으니 그뜻 그대로 신선이 노닐던 정자라고 할만하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요선정은 요선암이라고도 불린다. 요선정에 올라서면 절벽 위에 반쯤 누워있는 소나무를 볼 수 있다. 그 절벽 소나무 뒤로 펼쳐진 주천강의 모습은 절경중에 절경이라고 할만 하다. 아찔한 절벽 위에 걸쳐있는 소나무, 그리고 큰 계곡같은 강이 어우러지니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감탄사를 내뱉은 이 중에 양사언이라는 조선 중기 시대를 살아간 이도 있었다. 문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은 조선 전기 4대 명필에 속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다. 특히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그런 양사언이 평창군수 시절 이곳을 방문하여 요선암(邀僊岩)이라는 글씨를 요선정 아래 바위에 썼다. 그 글씨가 요선정의 유래가 된 것이다.

 

 

 

 

 

 

* 요선정과 석탑

 

 

 

 

 

 

 

양사언은 관직생활을 약 40년 정도 했는데 특이하게도 외관직, 즉 지방관을 주로 맡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평창군수, 철원군수,함흥부윤 등등... 일설에 의하면 풍류를 좋아하여 일부러 외관직을 자처했다고 한다. 그런 풍류객의 면모는 금강산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회양군수 시절에 금강산을 자주 방문했던 양사언은 만폭동에 봉래풍악원화동천(逢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 여덟글자는 지금도 남아있다.

 

참고로 조선 전기 4대 명필은 안평대군, 김구, 한호, 양사언이다. 한호는 그 유명한 한석봉이다. 양사언 선생이 어떤 위치에 있는 분인지 가늠이 되실 것이다. 그나저나 양사언 선생 글씨보러 금강산에 가고 싶다...ㅋ

 

요선정은 1913년에 건립됐으니 수백년의 세월을 버틴 정자는 아니다. 하지만 숙종, 영조, 정조 세 분의 각기 다른 임금께서 쓴 어제어필시문(御製御筆詩文)이 있는 뜻깊은 곳이다. 숙종은 유배지인 영월에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을 복위시켰다. 이후 단종의 유배지에서의 행적을 살펴보다 시 하나를 지어 강원 감사에게 보냈는데 이 시가 주천현의 누각인 청허루에 현판으로 걸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청허루는 불타게 된다. 이후 영조가 숙종의 어제시를 다시 쓰고, 거기에 더해 자신도 시를 써서 복원된 청허루에 걸게 했다. 또 이후 정조께서 두 선대왕의 어제시를 잘 간직하고자 하는 의미로 시를 써서 내려보내니 주천현 청허루에는 무려 세 분 임금의 어제시가 걸려있게 된 것이다.

 

그럼 왜 청허루에 있어야 할 어제시 세 편이 요선정에 있을까? 시간이 흘러 누각은 무너져 내렸고 어제시 세 편을 담아낼 새로운 둥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13년, 현 위치에 요선정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 무릉리마애여래좌상

 

 

 

 

 

 

 

* 무릉리마애여래좌상

 

 

 

 

 

사실 요선정 일대는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이다. 인근 무릉도원면 사자산에는 적멸보궁인 법흥사가 있다. 법흥사는 후기 신라시대에 선종 9산 선문 중에 하나인 사자산문의 근본도량이다. 사자산문을 열고 계승한 이는 철감국사 도윤과 징효대사 절중인데 그들이 요선정 일대를 자주 방문을 했다는 것이다. 법흥사의 부속 암자가 지금의 요선정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다.

 

마애불 앞에 놓인 허름한 삼층석탑이 이곳에 암자가 있었다는 흔적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이제 시선을 돌려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을 살펴보자. 사실 이 곳에는 요선정, 삼층석탑, 마애불이 오밀조밀하게 자리잡고 있다. 한 눈에 그 3개의 문화재가 다 들어올 정도로 촘촘히 들어서있다.

 

강원도에는 큰 사찰은 많지만 마애불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철원군 동송읍 금학산에 위치한 마애불과 무릉리마애불(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 문화재로 등록됐을 뿐이다. 그런 의미로 무릉리마애불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얼핏보면 오리배처럼 보인다. 그런 바위 한쪽면에 약 3.5미터 크기로 석각을 해놓았다. 사람을 처음 볼 때 얼굴을 보듯 마애불도 얼굴을 비롯한 상체부터 보기 마련이다. 그런면에서 탐방객들은 시원시원한 마애불의 용안을 보게 된다. 무릉리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고부조高浮彫)로 조각되어 있는데 특히 얼굴 부분이 아주 도톰하게 묘사되어 있다. 눈,코,입이 아주 큼직큼직하다. 달덩이처럼 둥글게 표현된 얼굴 모습이 참으로 복스럽다.

 

하지만 무릉리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떨어진다. 하체는 결가부좌를 했는데 상체보다 더 크게 묘사되어 있다. 바위 크기에 맞춰 석각을 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원래 하체를 크게 묘사하려는 의도로 그랬던 것인가? 어쨌든 복스럽게 그려진 얼굴을 보다 오버하듯 새겨진 하체를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손은 아담하게 잘 묘사됐지만 발바닥은 곰발바닥처럼 아주 커다랗게 조각을 해놓은 것이다.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은 독립된 통바위에 그려져 있어 그 전체적인 형상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강한 인상까지 풍긴다. 하지만 전체적인 비례미를 고려하지 않아 균형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개성미를 강조했던 고려 전기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 돌개구멍: 앗 사람이 빠져있나? 자연이 만들어놓은 신비한 형상이다.

 

 

 

 

 

 

요선정과 마애불 탐방을 마쳤으니 이제 돌개구멍을 보러 가자. 강가로 내려가면 되니 엎어지면 코닿을 곳이다. 돌개구멍이 있는 바위들을 보면 그 형태 하나하나가 다 특이하게 보인다. 큰 강이나 계곡에 있는 보통의 너럭바위들하고는 큰 차이가 난다. 너럭바위가 잔잔한 물길처럼 평평하게 다듬어졌다면 돌개구멍을 품은 바위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이다. 마치 전위 예술을 하고 있는 거 같다.

 

바위가 예술은 한다고?ㅋ

 

천연기념물 제543호로 지정되어 있는 요선암 돌개구멍은 포트홀(pot hole) 혹은 구혈(甌穴)이라고도 불린다. 그럼 왜 이런 형태가 도출됐을까? 하천에 있는 큰 바위에 작은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으로 작은 자갈이 담기는데 그 자갈이 깎기 역할을 한다. 자갈이 뱅글뱅글 돌면서 작은 구멍을 계속해서 깎아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깎인 돌은 평평한 작은 항아리 모양을 띄고 있다. 그래서 커피포트처럼 생겼다고 포트홀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돌개구멍은 쥐라기 시대에 생성된 지각작용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옛날 공룡이 뛰어놀고 다녔던 시기의 지각 작용이 지금까지 이어져 현대인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디 찾아보면 공룡 발자국이 있을지 모른다. ㅋ

 

답사를 다닐 때 항상 다른 관광객들의 말에 목소리를 귀기울이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이다.

 

"거대하지는 않은데... 우리나라는 참 아기자기해요."

"그게 바로 우리나라의 멋이잖아요."

 

필자의 생각하고 너무 똑같아서 이렇게 소리를 지를뻔 했다.

 

"맞아요. 제 생각이랑 똑같아요!"

 

 

 

 

 

* 돌개구멍

 

 

 

 

 

* 2021년 8월 11일에 탐방했음.

 

 

 

 

 

 

 

 

 

 

 

 

 

 

 

 

 

중부내륙자전거여행 5편: 강원도 영월의 여름과 겨울

 

 

14.01.07 14:06  최종 업데이트 14.01.0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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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지형 영월군 서면 선암마을 부근의 한반도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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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천강 기암괴석들이 열을 지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얼핏보면 물 속에 괴물이나 악어떼가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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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6일째: 2013년 8월 20일


겨울 다르고, 여름 다른 우리나라! 기후 온난화로 뚜렷한 4계절이라는 말이 퇴색되긴 했지만 그래도 봄·여름·가을·겨울이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나라! 그래서 누구는 이런 말을 한다. 방문한 여행지를 제대로 알려면 4계절을 다 맛(?)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일상에 쫓기는 생활인들이라면, 제대로 마음 놓고 여행하기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당지역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곳이 계절마다 '패션너블'한 옷을 갈아입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철마다 달라진 옷 색깔을 보기 위해 여행자들은 분주히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런 '패션쇼'를 경탄의 눈으로 감상하며 여행자들은 이런 말을 내뱉을 지도 모른다.

"계절 바뀌고 나서 또 와야지."

 

 


# 철이 바뀔 때마다 오고 싶은 영월

강원도 영월은 필자에게 그런 곳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고 싶은 곳이 바로 영월인 것이다. 봄에는 꽃들이 만발해서 좋고,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서 좋고, 가을에는 단풍여행 해서 좋고, 겨울에는 얼음놀이 해서 좋은 곳이다.

이전까지 영월에서는 주로 트레킹을 했었다. 영월은 유명한 동강 뿐아니라 서강과 주천강 등도 흐르고 있는데 이런 강들은 하나 같이 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필자는 이런 곳에서 강변트레킹을 했었다. 꾸불꾸불한 강변길을 걷다보면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꼭 '철 바뀔 때마다' 다시 올 것을 다짐했었다. 그래서 중부내륙 자전거여행에서도 일부러 영월을 코스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트레킹을 했던 곳을 자전거여행으로 다시 찾았을 때의 그 느낌이란 참으로 묘했다.  감정이 오묘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다시 왔군. 다시 왔어. 이번에는 혼자 오지 않고 자전거랑 같이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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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천강 강물에 누군가가 돌로 금을 그은 것 같다. 멀리서보면 괴물의 등지느러미나 악어떼처럼 보이는데 자세히보니 차별침식을 받은 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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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강이 흐르는 주천면에서 1박을 한 후, 물길을 따라 한반도 지형이 있는 선암마을 부근에 도착했다. 주천강은 태기산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한반도면에서 평창강과 합수되어 서강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다시 서강은 영월읍내에서 동강과 합수되어 남한강을 이루어 충북 단양으로 물길을 잡는다.

한편 주천강은 기이한 풍광을 품고 있었다. 물 속에 잠겨 있는 암석들이 일렬로 늘어진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등지느러미 같이 생긴 것들이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강물 속에 엄청난 괴물(?)들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네스호에 괴수가 살 듯... 혹시 주천강에도?

 

 



#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어느덧 필자는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에 도달하게 됐다. 청령포 선착장 인근에다 베이스캠프를 꾸렸다. 24시간 개방되는 화장실도 있고 텐트를 칠 공간도 넉넉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청령포 베이스캠프에서 삼 일을 머물면서 본격적인 영월 탐방에 나섰다.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배후면에는 가파른 산이 놓여 있어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린다. 그래서 청령포는 지금도 배가 없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1457년 6월 초순, 단종을 복위시키겠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단종도 그 사건에 연류된다. 불똥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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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청령포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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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청령포의 겨울. 이렇게 강물이 꽁꽁 얼 때는 배가 운항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음 위를 걸어서 청령포에 간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이 바로 청령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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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에서 졸지에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청령포로 유배를 오게 된다. 하지만 단종은 청령포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해 여름 홍수를 피해 영월 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해 10월 하순에 관풍헌에서 숙부인 세조에 의해 사사됐다. 그때는 그나마 있던 '노산군'이라는 지위도 박탈되고 서인 신분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넉 달 정도 밖에 안 되는 단종의 유배생활. 그의 짧은 생애만큼 유배생활도 아주 짧았던 셈이다.


단종의 탄식과 절규가 곳곳에 베어 있는 청령포지만 그 모습은 절경중의 절경이다.
깎아질 듯 급경사를 이룬 육륙봉과 청정한 서강의 모습이 어우러진 청령포의 모습은 누가 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다. 350도로 청령포를 휘돌아 나가는 서강의 물줄기 또한 힘이 넘친다. 이런 모습들이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생각해 보시라! 그 모습은 분명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광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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