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작성한 <혁명적인 루소와 보수적인 고승덕의 공통점>이라는 기사가 오마이뉴스 메인에 배치됐더군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스스로 폭로한 루소 딸이 폭로한 고승덕>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발행이 됐네요. 더군다나 본문 내용도 많이 바뀌어졌더군요. 메인에 걸어줘서 고맙기는한데 그래도 최대한 원작성자의 의도대로 원문을 살려줘야 하지 않을까?

 

제가 작성한 원문글은 원고지 21매 분량으로 감상적인 면이 많은 에세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마이뉴스에서는 <정치적 주장>으로 바꿔버렸더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그 신문사의 편집권을 존중하지만 필자의 의도대로 글을 최대한 살려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합니다. 힘없는 시민기자의 서러움이라고 할까요?

 

위에 보시면 빨간색 네모난 박스처리를 된 것이 제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캡처를 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더 큰 것들이고요. 

 

 

 

 

 

 

 

 

 

 

 

 

 

 

20년도 넘은 잡지책...가, 이젠 가란 말야!

아끼던 <월간항공> 버리던 날

 

14.04.05 15:48l최종 업데이트 14.04.05 15:48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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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항공 20년도 더 지난 비행기 잡지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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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헤어질 때가 됐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20년이란 시간을 함께했으니 이제는 떠나보낼 때가 된 것이다. 헤어질 때는 냉정해지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그런 독한 놈이 되는 거야!

"이제 넌 나한테 필요 없어. 가란 말야! 떠나버리라고!!!"

 

 


책벌레들의 커다란 고통: 책 버리기

예전에 지인분이 쓰신, 책과 관련된 에세이를 본 적이 있다. 책과 관련된 에세이라, 얼핏 '독서 예찬'과 같은 통상적인 주제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책장에 가득한 책들 중에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남겨둘지에 대한 단상들을 풀어낸 글이었다.

책벌레들에게 책을 버리는 일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책을 쌓아둘 곳은 한정되어 있기에 어쩔 수없이 책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있다. 모든 이들을 다 만족시킬 수가 없듯이 모든 것들을 다 담아둘 수도 없는 법이니까!

그 분 말에 의하면 잡지책이나 소설류들을 버리는 데는 큰 고민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전공서적이나 학술서적 코너에 들어서면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것이다. 처분을 해야겠는데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고민이라는 것이다.

한편 에세이들 중에서도 저자 사인이 적혀 있는 것들은 쉽게 처분 대상에 올리지 못해 곤혹스럽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사실 그 지인 분은 대학교수다. 그래서 그 분의 서재는 일반적인 독서인들의 서재와는 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독서인이든 대학교수든 책을 버리는 순서는 비슷해 보인다. 처분 일순위로 잡지가 지목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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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항공 오른쪽은 1991년 5월호다. 노태우 정권 때 진행된, KFP 사업에 선정됐던 F-16에 대한 사진을 메인으로 걸어놓았다. F-15K를 넘어 이제 F-35가 우리공군에 차세대 전투기로 쓰일 예정이라 사진이 무척 낯설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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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순위로 지목된 잡지를 필자는 20년이 넘게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최근 10년 동안은 단 한 번도 펴보지 않고 그냥 그대로 한쪽 구석에 잘 모셔두었다. 그러다보니 10년치 먼지가 그대로 쌓이게 됐고 그 뒷면은 바퀴벌레 등의 좋은 안식처가 됐다.

 



'비행'소년의 욕구를 받아주었던 <월간항공>

그 잡지들은 <한겨레21>이나 <창작과 비평>같은 유명한 시사, 문예잡지가 아니었다. <월간항공>이라는 비행기 잡지였다. <월간항공>은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에 창간된 잡지로 우주항공 분야의 전문지로 탄생했다. 지금이야 자동차, 아웃도어, 뷰티, IT 등등 각양각색 다양한 분야의 잡지가 발간되어 세세한 정보들을 독자들에게 실어 나르고 있지만 1989년 당시에는 그렇지가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지난 지 겨우 2년 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이라 그랬는지 아직 세상은 다양한 욕구를 담아낼 그릇들이 준비되지 않았었다. 영화잡지인 <씨네21>이 1995년에 창간됐듯 사회구성원의 다양한 욕망들이 본격적으로 잡지형식의 매체로 투영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이후부터였다.

그런 의미로 <월간항공>의 등장은 상당히 신선했다. 당시는 인천공항도 없었고, 비행기 여행도 일반적이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멋진 비행기 사진이 걸린 <월간항공>를 보고 있던 필자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다. 이미 옆구리에서 날개가 뻗어져 나와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필자도 한 때는 '비행'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왔던 이카로스처럼 크게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비행'소년이었다. 

그런 '비행' 소년의 욕구를 <월간항공>이라는 잡지가 채워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욕구'들이 쉽게 채워지지는 않았다. 잡지 내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필자의 지식으로는 <월간항공>의 전문 용어들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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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항공 20년도 넘게 집에 있다보니 먼지도 많이 쌓이고, 때도 많이 탔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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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문제였다. 하긴 당시 고등학생이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래서 필자는 헌책방 투어에 나섰다. 어차피 속보성을 획득하려고 비행기 잡지를 구매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당시 헌책방에서 비행기 잡지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인아저씨가 '그런 잡지도 있냐?'고 반문할 때도 많았다. 어렵게 구한 잡지들도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한 쪽 면이 찢어져 있거나 라면국물이 묻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심지어 곰팡이까지 피어 있는 것들도 있었다.

 

 



비행기가 있던 자리

그렇게 어렵게 사 모으고, 애지중지하게 모셔두었던 그 비행기 잡지들을 얼마 전 떠나보냈던 것이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잡지들은 이미 정보성이 사라진 지 오래됐다. 현재 동북아 허브 공항으로 우뚝 선, 인천공항의 착공식을 소개하고 있는 20년 전의 잡지라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또한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된 F-16(노태우 정권 때 있은 KFP 차세대 전투기 사업 기종으로 당시 F-16이 선정됨)'에 대한 기사를 담은 잡지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F-15K를 넘어 F-35가 우리 공군에 도입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 잡지들이 자리 잡고 있어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공간이 마땅치 않아 곤혹스러기도 했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새롭게 들어올 책들은 줄을 서야 했기 때문이다.

1차로 몇 권의 <월간항공>을 버렸던 날, 20년 전의 일들이 필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서울에 있는 헌책방들을 찾아 동분서주 하며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던 일, 헌책들의 뭉치 속에 파묻힌 잡지를 끄집어내다 책탑을 쓰러뜨려 주인장에게 엄청 혼났던 일 등등. 그런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 순간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과감하게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이제 넌 나한테 필요 없어. 가란 말야. 떠나버리라고! 20년도 넘게 있었으면 이제 갈 때가 됐잖아!"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올라 날개가 녹아내린 이카로스처럼 필자의 마음속에서 펄럭이던 날개도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굿바이 비행소년!'

 

 

 

 

*관촉사 은진미륵: 비행기 잡지가 떠난 자리에는 역사책들과 미학책들이 그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역사트레킹 마스터를 하려면 방대한 역사책들과 미학책들을 '마스터'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3년 4월에 찍은 사진이다.

 

 

 


그렇게 비행기 잡지가 있던 공간에는 이제 새로운 것들이 들어와 그 곳을 메우고 있다. 역사책과 미학책들이 빠르게 그 자리를 치고 들어왔던 것이다. 마치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비행기'가 빠진 공간에 '정약용 선생'과 '마애석불'이 떡 하고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렇게 새롭게 자리 잡은 역사책과 미학책들을 자양분 삼아 필자는 역사트레킹을 진행한다. 한마디로 '비행기가 있던 자리'에 '역사트레킹'이 들어온 것이다.

봄날이라서 그런가? 요즘은 새롭게 다시 날개가 돋아나는 것 같다. 아름다운 봄꽃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미 마음은 산과 들에 가 있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읊조리며 트레킹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날개가 한 번 꺾여도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왜? 새로운 날개가 생기니까!

*추신: 최근 발생한 무인기에 의한 청와대 촬영 사건으로 인해 정국이 혼란스럽다. 청와대의 방공망이 뚫렸다고 여론이 매섭게 질책을 한다. 그런데 정부가 정국 수습용으로 꺼내든 카드가 무척 당혹스럽다. 바로 모형비행기 동호회에 대한 규제이기 때문이다. 뚱딴지같이 엉뚱한 곳에 불똥이 튄 것이다.

북한에서 '인간어뢰'나 '로봇물고기'로 우리 해역을 침범을 한다면 해녀나 스쿠버 다이버들에 대해서 규제를 내릴 텐가? 무인기에 의한 방공망 침범이 있다면 무인기를 무력화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뚱딴지같이 애꿎은 동호회에 대해 규제의 덫을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박 대통령께서 연일 '규제 완화'에 대해 역설하는 판에 규제의 덫을 놓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역설적인 일이니까!    

 

 

 

*** 오마이뉴스에 '비행기가 있던 자리'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입니다. 그나저나 분명히 제가 송고할 때는 맨 마지막 사진인, 은진미륵 사진을 같이 송고했는데 지금보니 발행된 기사에서는 사진이 누락됐네요. 일부러 은진미륵에 대한 사진을 넣어 비행기에서 역사트레킹으로 넘어갔다는 걸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게 오마이의 한계인가??? 좀 거시기하네~~~ㅋㅋㅋ
제 블로그에 담긴 송고본과 오마이뉴스의 발행본을 비교해 보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제 송고본에는 있는 은진미륵 사진이 발행본에는 없어졌고, 그래서 글의 완성도가 감소됐다는 것입니다.

오마이뉴스 발행본 바로가기 http://omn.kr/7p74

 

 

 

 

 

 

 

 

 

 

 

* 지리산: 정렴치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리산에서는 태풍 '무이파'를 만났다.  자전거에 걸린 노란색 깃발이 강풍에 날라갈 것 같다!  사진 촬영 기능이 고장이 나서 동영상에서 찍은 걸 사진으로 뽑아내었다. 그만큼 여러면에서 애로점이 많은 여행이었다. 그나마 무위파 때문에 디카는 완전히 망가져 지리산 이후로는 사진이 남는게 없다. 태풍을 맞으니 디카, 자전거속도계, 휴대전화 등 모든 전자기기가 고장이 났던 것이다. 역시 자연재해 앞에 인간은 그저 초라한 존재일 뿐!

 

 

 

 

"이거 뭐야? 여기 텐트가 왜있어?"
"왜 그래요? 거기 뭐가 있어요?"

"응. 누가 여기서 야영을 하나봐. 아무튼 깜짝 놀랐네!"

깜짝 놀란 건 오히려 나다. 당신의 오줌 소리에 단잠을 깼기 때문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왜 내 텐트 옆에다 노상방뇨를 하는 것인가? 비타민을 복용했는지 그 남자의 소변 냄새는 참 '거시기'했다. 나는 억울했지만 그래도 꾹 참아야 했다. 팔자려니 해야지 별 수 있겠는가. 이게 다 돈이 없어서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는가.

누구는 캠핑을 자연 속에서 누리는 '웰빙'이라고 표현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하룻밤 보내기'에 불과했을 뿐이다. 매일 같이 야영지를 물색하는 것이 곤욕이었고 그저 하룻밤을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다. 누구는 나에게 이렇게 툭 질문을 내던질지 모른다.

"캠핑장 가면 되잖아. 요즘 캠핑장이 얼마나 싸고 좋은데..."

 

 

 

 

 

 

 

* 순천만: 요즘은 일반 민박보다는 한옥 팬션이 인기가 좋다고 한다. 한적한 시골에서 전통 가옥 체험도 하니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필자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저 텐트에 비가 안 세고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으니까.

 

 

 

 

 

무척 공포스러웠던 새벽의 폭우



2011년 여름. 나는 제2차 국토종단자전거여행을 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여정은 충남을 거쳐 전북, 그리고 지리산으로 이어졌다. 위의 '텐트 노상방뇨' 에피소드도 그때 발생했다.

7월, 장마철 한복판에 행했던 여행이었던 터라 웬만한 비는 맞을 각오를 했다. 하지만 비도 비 나름이다. 수인한계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적당량의 비는 찌는 듯한 더위를 날려주는 청량제가 되지만 엄청난 폭우는 여행객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더군다나 나처럼 여행 중 매일같이 텐트생활을 해야 하는 자전거여행자들에게, 물폭탄과 같은 폭우는 정말 지긋지긋한 '악귀'와도 같은 존재다. 돈이 없어 싸구려 텐트를 들고 다녀야 했던 나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벽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나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마치 호러영화에서 핏방울이 주인공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엄청난 공포!

그만큼 나의 텐트는 방수가 안 됐고 비가 오는 날, 특히 새벽에 비가 오는 날은 비상이 걸렸다.

'이거 오늘도 좋게 잠자기는 땡이구만!'

이런 상황이니 캠핑장에 간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캠핑장에서 비를 맞나, 야산 같은 곳에서 비를 맞나 결론은 같았다. 그 다음날은 수해복구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한편 자전거여행이나 장거리도보여행을 해보신 분들은 생각보다 캠핑장 찾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아실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이 그렇다. 마음먹은 것처럼 딱딱 안 맞아 떨어진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 수도 있고, 일정이 변경될 수도 있는 게 여행이다. 그래서 장거리 무동력여행을 하실 분들은 공동묘지에서도 잘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시고 떠나시는 게 차라리 속 편하실 것이다.

 

 

 

 

 

 

 * 평택: 평택에서는 저렇게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가 있었다.

 

 

 

 

 

충남 서산에서 맞은 물폭탄

'텐트 노상방뇨' 에피소드도 전북 전주에 있는 한 공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늦은 시각까지 야영지를 못 찾다가 한적한 공원이 있기에 눈을 딱 감고 텐트를 쳤던 것이다. 다행히 그날은 비를 안 맞았지만 웬 낯선 남자의 노상방뇨 세례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에피소드는 그렇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캠핑을 하다보면 일상생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게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2011년 여행 당시 나는 충남 서산에서 제대로 물폭탄을 맞았다. 해미읍성을 탐방한 후 기포리라는 곳에 베이스캠프를 꾸렸을 때였다. 저녁을 지어먹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수많은 별들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가끔 별똥별도 떨어지고.

'이야 별 뜬 거 보니까 비가 안 오겠네. 푸하핫! 오늘은 편하게 잘 수 있겠어!'

하지만 여행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딱 맞아 떨어지겠나? 그날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단순히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었다. 거의 2~3시간에 걸쳐 양동이로 쏟아 붓듯이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텐트 안에도 빗물이 흘러 넘쳤고, 그날 밤 나는 뜬 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자기 전에 봤던 그 초롱초롱한 별들이 정말 미웠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어차피 젖은 옷가지 등은 햇볕에 말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텐트의 위쪽 폴대에 금이 갔다. 예비 폴대도 없던 터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제발 지리산까지만 버텨라. 서울 가면 정말 멋진 텐트로 바꿔주마!'

하지만 그건 나만의 기원이었을 뿐이다. 날이 갈수록 폴대의 금은 더 깊어졌고 텐트의 모양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갔다. 원래 삼각형이 되어야 할 텐트가 형태를 잃고 주저앉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지붕 부분이 내 얼굴에 내려 앉아 깜짝 놀라 잠에서 깨기도 했다. 마치 비닐로 만든 관 속에 내가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은 텐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새로운 텐트를 하나 구매를 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돈이 문제였다. 누구는 방수력이 빵빵한 텐트를 구매하고 싶지 않겠나?

 

 

*** 원래는 8월 14일에 2013년 여름정기 투어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정에 생겨서 하루를 미뤄 8월 15일에 떠납니다.

그러고보니 광복절에 여행을 떠나네요!

 

 

 

 

 

 

 

 

 

 

 

 

 

 

 

 

 

 

 

 

 

 

 

 

 

 

 

 

 

 

 

 

 

 

 

 

 

 

 

 

 

 

 

 

 

 

 

 

 

 

 

 

 

 

 

 

 

 

 

 

 

 

 

 

 탱크킬러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미공군의 A-10 공격기. 2009년 서울에어쇼에서 촬영.

 

 

 

 

작년 가을. 필자는 강월도 영월의 동강을 거닐고 있었다. 동강 최고의 비경이라는 어라연을 탐방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느긋해하고 있었다. 단풍철도 지난 시기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유유히 흐르는 동강만이 필자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푸아항~! 그런 호젓한 정적을 깨는 강력한 엔진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비행기 한 대가 동강의 골짜기 사이를 유유히 스쳐지나갔다. 탱크킬러라고 불리는 A-10 공격기였다. 미 공군 마크가 선명했다. 필자는 좀 어리둥절했다. 왜 이 아름다운 곳에 저 공격기가 비행을 하고 있을까? 난 순간 반사적으로 사진기를 잡았지만 이미 엔진소리는 저 골짜기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참 이 근처에 공군 사격장 있지. 그런데 거기 백두대간 허리축이라던데….'

한때 필자의 마음 속에는 비행기가 있었다. 푸른 창공을 가르며 나는 비행기들이 좋았고, 그 비행기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함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하늘을 날아보겠다고 보자기를 둘러쓰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었다. 그러다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필자가 본격적으로 비행기에 대해 '구애 작전'을 벌였던 때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둘씩 비행기 사진을 모으다가 나중에는 항공잡지 세계에 뛰어들었다. 항공잡지를 모으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없으니 잡지를 구입하는 데도 제약이 많았다. 하긴 당시 고등학생이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용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자는 헌책방 투어에 나섰다. 어차피 속보성을 획득하려고 항공잡지를 구매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헌책방에서 항공잡지를 찾아보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와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 항공잡지가 귀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잡지들도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곰팡이가 피고, 냄새나고.

 

 

 

 

▲ 동강 어라연 동강 최고의 풍광이라고 불리는 어라연이다.

 

 

 



'어린왕자' 꿈꾸던 그 시절... 지금도 그립다

그렇게 부실한 잡지들은 한 번씩, 꼭 손을 거쳐야 했다. 햇볕에 내다말려야 했던 것이다. 한번은 옥상에서 잡지들을 펼쳐놓고 잠시 일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햇볕이 쨍쨍하기에 느긋하게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 와중에 엄청난 소나기가 내렸다. 허겁지겁 다시 돌아왔더니 옥상에 있던 항공잡지들은 이미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빗방울이 컸고, 강수량도 많았던 터라 내 잡지들은 소나기의 맹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난 멍하게 잡지 파편들을 보고 있었다. 그 잡지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뛰어다니고 움직였던가! 동쪽 하늘에 예쁘게 드리워졌던 무지개가 얄미웠다.

그런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던져주던 나의 비행기 사랑은 이제 많이 무뎌진 게 사실이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세월이 흘러가면 첫사랑의 짜릿함도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심경의 변화가 꼭 시간의 흐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몇 년 전, 필자가 그토록 좋아하던 비행기들이 민간인 학살에 동원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세력들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내던 용맹스럽고 멋진 비행기들이 우리 땅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사실들은 내게 큰 혼란을 주었다. 전쟁통에 무장한 세력끼리 적대행위를 하는 건 별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가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동강 산소길 영월 동강의 산소길. 비행기가 떠난 자리에 아웃도어가 들어왔다.

 

 


무언가가 있던 자리에는 또 무언가로 채워지는 게 순리인 걸까? '비행기'가 떠난 자리에 '아웃도어 여행'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 번, 두 번 떠난 여행이 쌓이고 쌓여 내 인생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더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아웃도어 여행으로 인해 인생의 지향점까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동강 어라연에서의 일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백두대간 걱정부터 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이러다가 아웃도어에 대한 애정도 '있다 없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이든 그것이 있었던 시간이 무척 소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있었기에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이고, 또 옛 기억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가끔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비행사 생텍쥐페리와 함께 '어린왕자'를 만나러 가던 그 시절, 그 동경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 천지연 폭포: 비가 온 뒤라 유량이 아주 풍부했다. 낙수 소리가 우레와 같이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뒤쪽으로는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제주도] 빗물로 지은 밥

한편 제주도에서는 추자도 때와는 다른 경험을 했다. 제주도에서는 입도하는 첫 날부터 비를 맞기 시작했다. 워낙 비가 많이 내려 주행을 포기한 날도 생길 정도였다.

천지연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서귀포시 외곽의 한 공원. 유량이 풍부해져서 그랬는지 천지연 폭포는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폭포는 꽤 먼 곳에 있었지만 그 낙수 소리는 세상을 울리는 듯, 쩌렁쩌렁했다. 엄청난 유량을 자랑하는 천지연 폭포를 감상하는 것은 좋았지만 난 비가 싫었다. 정말 싫었다. 제주도에서 비를 하도 많이 맞아서 이제 비라면 신물이 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텐트를 간이 팔각정 밑에 칠 수 있다는 것.

시간이 지나도 빗줄기는 잦아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거세졌다. 라디오에서도 서귀포지역 일대에 호우주의보가 발령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꼼짝없이 팔각정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빗줄기가 멈추길 기원하면서 점심을 지어먹으려 식수를 찾았다.

 

 

 

 

 

* 꽃이 핀 야영지: 사진에서처럼 지붕이 달리고, 바닥에 데크가 깔린 나무 정자가 가장 이상적이다.

강한 폭우도 막아주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도 막아주니 가난뱅이 여행객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곳이 바로 저런 곳이다.

2011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뿔싸! 이걸 어째!'

아침에 식사 준비를 하면서 식수를 다 써버린 것이다. 누가 점심 때까지 팔각정에 갇혀 있을 줄 알았나! 생수 한 통을 사오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대비를 뚫고 마트까지 갔다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필자는 장대비를 맞을 몸 상태가 아니었다. 장기간의 여행으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던 우비도 구멍이 뻥뻥 난 상태라 입으나마나였다. 우산은 아예 없었다.

하늘이 뚫린 듯, 빗방울이 거세게 내렸지만 정작 내게는 밥 해 먹을 식수가 한 방울도 없는 상황이었다. 추자도에서는 바닷물을 앞에 두고 씻을 물이 없어 안타까워했는데 제주도에서는 장대비를 바라보면서 밥 해 먹을 물을 갈구하다니! 세상을 집어 삼킬 듯 천지연 폭포에서는 폭포수가 떨어지는데 정작 난 밥 해먹을 물이 없어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니! 그러고보면 그 상황은 정말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언가 방도가 필요했다. 무슨 수가 없을까?

 

 

 

 

 

 

 

 

* 한계령 창고에 친 텐트: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지만 한계령은 한계령이었다. 원통리에서 출발했을 때가 낮 12시였는데 한계령에 도착했더니 밤 10시였다.

안개가 가득찬 한계령에서는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밤안개처럼 당시 내 처지는 우울했다. 설악산에서 노숙할 판이었으니까. 그러다 저 창고를 발견했는데,

 한 겨울 제설장비 차량 차고로 쓰이는 곳이었다. 덕분에 하룻밤 잘 지냈다. 2012년 백두대간자전거여행 당시의 사진이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푸하핫!'

얼마 후 묘안이 떠올랐다. 생각을 달리하니 금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랬다. 그 빗물을 받아서 밥을 짓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팔각정 처마 밑에다 코펠을 펼쳐 놓았다. 어차피 며칠간 계속된 비로 대기는 아주 깨끗한 상태였다. 그건 팔각정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곳은 청정지역 제주도 서귀포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런가, 빗물로 지은 밥은 정말 맛있었다. 꿀맛이었다. 서귀포의 청정한 빗물로 밥을 지어 먹었으니 꿀맛일 수밖에!

사실 필자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필자가 아웃도어 여행을 많이 했어도 빗물로 밥을 지어 먹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여행이 아니겠는가. 언제 어떤 돌발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게 여행이라는 말이다. 더군다나 필자는 돈이 없는 관계로 가난뱅이 여행을 해야 하니 더욱더 그럴 수밖에!

몇 시간 후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던 공원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우산을 받쳐 들고 나오고 있었다. 필자는 저 멀리에 있는 한라산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으로 휘감긴 한라산은 무언가 모를 영험함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고즈넉한 분위기는 깨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저기 봐. 서귀포에서도 노숙자가 있나 봐요."
"그러게요. 근데 요즘 노숙자는 텐트도 치고 자나 봐요. 밥도 해먹고. 그나마 서울보다는 낫네."

올레길을 걷는 올레꾼들이었다. 필자를 노숙자로 본 것이다. 하긴 당시 나는 노숙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말들을 그냥 웃어 넘겼다. 왜? 청정수 빗물로 밥을 해 먹었으니까! 이런 경험은 아무나 못하는 거니까!

 

 

* 대통령의 자전거와 내 자전거: 고 노무현 대통령이 타고 다녔던 자전거다. 필자의 자전거만큼이나 싸구려 철TB였다.

대신 내 자전거는 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대통령의 자전거는 아주 단출하다. 그 분이 생전에 계셨다면 필자에게 쌀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불쌍하다고.

 생각해보니 당시 봉화 마을에서 통김치를 얻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한동안 김치 걱정은 안했다. 2010년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 수해복구: 텐트가 망가져 임시방편으로 저렇게 모기장 텐트를 쳤다. 하지만 모기장 텐트 쳤다 폭우를 만났다.

침낭 양 옆으로 물고가 생겼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를 만났었다. 2011년 전북 완주에서 찍은 사진이다.

 

 

 ▲ 청량산 베이스캠프: 낙동강가에 세운 청량산 베이스캠프. 청량산을 병풍 삼고, 낙동강 끌어 안을 수 있었던 최고의 캠핑지였다!

한편 저렇게 정자 아래에 텐트를 치니 밤새 비가 내려도 물난리를 겪을 일이 없었다. 이 사진은 2012년에 행한 백두대간자전거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 충남 천안: 2009년, 천안에 있는 풍세천이란 곳에서 캠핑을 했을 때의 모습이다.

장거리 여행이 익숙지가 않아서 그랬는지 모든 것이 어설펐을 때다.

위험천만하게 하천변에 텐트를 쳤을 정도로 어설펐다. 이 풍세천을 따라가면 호두나무 산지로 유명한 광덕산이 나온다.

광덕산 입구에는 천년고찰인 광덕사가 있다.

 

 

 

 

2010년 여름. 필자는 단독으로 L자형 자전거여행을 행하고 있었다. 이동한 지역을 선으로 이어보면 알파벳 L자와 비슷한 형상이 나와서 L자형 여행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짐을 앞·뒤로 주렁주렁 매달고, 한 여름 뙤약볕 속에서 질주를 한다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옷은 싹 다 젖었다. 티셔츠는 등짝에 척 붙었고, 팬티까지 흥건했다.
다음은 필자가 추자도와 제주도에서 겪은 이야기들이다. 둘 다 물과 관계된 에피소드들이다.

필자는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을 때가 제일 싫었다. 매일같이 야영지를 확보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캠핑장은 갈 수가 없었다. 물론 이동 경로에 캠핑장이 없기도 했다.

야영지 확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었다. 바로 밥 지을 물과 씻을 물을 확보 하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다보면 온 몸은 땀으로 범벅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씻을 물을 확보하는 것은 먹는 물을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전라남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추자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서해안 노선을 타고 가느라 바다는 언뜻언뜻 바라보았다. 그런데 추자도에 도착할 당시까지 바다에 발 한 번 담그질 못했다. 그게 좀 억울했다. 여름여행이라 수영복도 준비를 해갔는데….

 

 

 

 

* 추자도: L자형 여행 당시 방문했던 추자도. 추자도는 제주 본섬이나 전남지역과는 다른 멋이 있었다. 한편 이곳은 상추자도 지역의 고개마루였는데

어떤 주민 한 분이 아침에 쓰윽 오시더니, 우려섞인 눈빛으로 '전날 잠을 잘 잤냐'고 물으셨다. 귀신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오싹한 말을 하면서...  

 

 

 

 

 

 

[추자도] 몸을 벅벅 긁으면서 잔 이유

여객선에서 내려 자전거로 추자도 일대를 내달렸다. 추자도에 입도하는 날 안개가 짙게 끼어 좀 불안했지만 주행을 하는 데는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추자도의 바닷물은 육지 해수욕장에서 보던 바닷물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정말 깨끗했다. 

넋을 잃고 섬 구경을 했다. 그러다 서쪽 하늘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추자도 구경 삼매경에 빠지다가 야영지를 잡을 시간을 놓친 것이다. 조바심이 났다. 추자도 바닷바람이 장난이 아니라는데… 해풍을 맞으며 노숙할 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느 해수욕장 근처에 텐트를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씻을 물이 없었다.

수도시설이 있을 줄 알고 일부러 야영지를 해수욕장으로 정했는데… 요즘은 웬만한 해수욕장은 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추자도의 해수욕장은 화장실은커녕 수돗가도 없었다. 왜냐? 추자도는 아직도 제한급수를 할 만큼 급수시설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하도 물 부족에 시달리니 몇 해 전에 빗물을 보관하는 저장시설을 완공했다 한다.

어쩌겠는가? 씻을 물이 없는데. 땀에 찌든 몸으로 그냥 잘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눈앞에는 시원한 바닷물이 출렁거리는데 내 한 몸 씻을 물이 없어, 필자는 그냥 바닷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바닷물에 빠져보자. 페트병에 물이 좀 남아 있으니까 그걸로 몸 좀 닦아내고.'

그래서 그냥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나? 땀으로 범벅 된 몸보다는 바닷물로 범벅된 몸이 낫다는 생각에 그냥 뛰어들었다. 그날 밤 필자는 자다가 벅벅 긁었다. 염분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잤더니 자는 내내 너무 가려웠던 것이다. 정말 샤워물이 간절한 밤이었다.

 

 

 

 

* 한옥집과 텐트: 요즘은 한옥 펜션이 많다고 하는데... 저런 펜션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전남 순천에서 2011년에 찍은 사진이다.

 

 

 

 

 

 

 

 

* 수해복구: 싸구려 텐트를 치고 다녔던 터라 비가 오면 항상 물날리를 겪었었다. 그래서 비온 뒤에는 항상 저렇게 수해복구를 해야했다.

2011년에 충남 서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 필자는 역사트레킹 마스터


필자는 삼남길 개척단 이외에도 직함이 하나 더 있다. 역사트레킹 마스터가 바로 그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최근에 카페(http://cafe.daum.net/historytrekking)도 하나 개설했다.

역사트레킹? 숲길트레킹이나 오지트레킹이란 말은 들어보셨어도 역사트레킹이라는 용어는 생소하실 것이다. 하지만 역사트레킹은 익숙한 것들의 결합체이다. '역사'와 '트레킹'이 '화학적 결합'을 이루는 형태라는 것이다. 즉, 유물답사를 한 후에 10Km 정도 되는 거리를 걷는 것이다.

자동차를 이용하여 문화재를 관람하면 편리하다. 느긋하게 맛집 탐방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트레킹은 그런 수학여행식의 '버스 뺑뺑이'를 자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해당 문화재를 방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보여행을 통해 몸과 마음을 넉넉히 살찌우자는 것이 역사트레킹의 대원칙이다.

하지만 필자가 역사트레킹을 해보겠다고 다짐하기까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능력도 없는데 괜히 나섰다가 트레킹에 나선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고등학생의 뉴스 인터뷰를 보았고, 그 이후 필자는 역사트레킹의 마스터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야스쿠니 신사요? 야스쿠니 젠틀맨을 말하는 거예요?'

 


기사 관련 사진
▲ 제주의 현무암 이진 항구에는 저렇게 제주산 현무암이 즐비했다. 이 돌들은 제주도에서 군마를 실어올 때 배에 함께 실린 돌들이라고 한다. 항해에 익숙지 않은 말들이 요동을 치면 배가 전복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부러 배의 중량을 늘이려고 저런 돌들을 갑판 아래에 실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저 현무암들은 중심돌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해남에 와서 역할을 다한 현무암은 이진 항구의 갯벌에 버려졌다. 그래서 이진항 일대는 제주도가 아닌 육지 항구에서 가장 많은 현무암들이 발견된다.
ⓒ 곽동운

 

 

 

 


자신이 TV에 나온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떴는지 그 학생의 표정은 무척 밝아보였다. 하지만 필자의 마음은 무척 어두웠다. 아무리 역사 교육이 내팽겨 쳐졌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던 것 중, 또 하나가 걸그룹 시크릿의 멤버인 전효성의 '민주화' 발언이었다. '민주화'라는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알고 있고, 또한 '농락'거리로 내뱉었던 그녀의 언사에 경악했다. 그녀의 말대로 그 말이 부정적인 말이라면, 민주화를 요구하며 피를 흘렸던 북아프리카의 재스민 혁명은 무엇이었나? 또한 얼마전에 방한했던 아웅산 수치 여사는 1991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민주화'라는 부정적인 일을 한 사람에게 어떻게 노벨상이 수여되는가?

 

 

 

기사 관련 사진
▲ 이진성터 이진성터는 현재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속한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된 옛 이진성은 해안방어 기지로 이용되었다. 이 담장은 성의 일부였다고 판단되는 석축인데 지금은 농가의 돌담으로 쓰이고 있다. 사진 왼쪽처럼 석축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역사트레킹은 이런 현장들을 탐방한다.
ⓒ 곽동운

 

 

 

 

 


#역사트레킹의 예시: 삼남길 '해들길'에서



문화재 앞에서는 역사해설가가 되고, 트레일에서는 대장 역할을 해야 하는게 마스터의 주된 임무다. 또한 준비운동이나 응급처치도 마스터의 몫이다. 이렇듯 역사트레킹 마스터의 어깨는 무척 무겁다. 하지만 제일 곤혹스러운 것은 트레킹 코스의 개발이다. 필드가 있어야 역사트레킹이 가능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삼남길은 필자에게 좋은 필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왜? 현재 삼남길은 옛 삼남대로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곡창지대였던 삼남(전라, 경상, 충청)지역이 조선왕조 물산의 중심축 역할을 했듯, 한양에서 해남 지역으로 향했던 삼남대로는 매우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그렇게 때문에 옛 삼남대로 인근에는 역사적인 유물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렇다. 현재의 삼남길은 옛 삼남대로를 계승하고 있기에 느긋하게 트레킹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역사공부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삼남길은 역사트레킹을 하기에 매우 적합한 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남길에서 역사트레킹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짤막한 예를 들어 보이겠다.

 

 


기사 관련 사진
▲ 해들길 해들길은 삼남길 전남구간 3코스의 애칭이다. 삼남길은 서울에서 해남까지 600Km에 걸쳐 조성되는 국토종단형 트레킹 코스로 도보여행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걷기여행길이다.
ⓒ 곽동운

 

 

 

 

 


전남 해남군 북평면에는 이진성터가 있다. 현재 이진성터는 삼남길 전남구간 3코스(해들길)에 놓여 있다. 옛 이진성은 이진항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된 방어기지였는데 항구는 제주도를 향하는 배가 출항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진 항구 위쪽으로는 남창이라 하여 제주도에서 수취한 공물들을 축적하는 창고가 있었다. 현재의 지명은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이다.

조선시대 삼남대로의 종점은 옛 이진성이었다. 땅끝 전망대가 있는 땅끝마을이 삼남대로의 종점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땅끝 개념은 근래에 들어선 개념이다. 해남 사람들은 땅끝을 갈두리로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굳이 땅끝 개념을 쓸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이진항이 더 좋은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진항 바로 옆으로 완도의 부속섬인 달도가 있고, 그 뒤쪽으로는 완도 본섬이 있기 때문이다. 완도로 내왕하기도 편했고 제주도로 나아가기에도 수월했던 곳이 바로 옛 이진항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삼남대로의 종착점도 이진항이었던 것이다. 옛 이진성은 그런 전략적 요충지인 이진항을 보호하기 위해 축성됐다고 한다. 또한 조선 후기에 수군만호부가 자리잡았다고 한다. 그러다 제주도로 출발하는 배가 수심이 더 깊은 목포항 쪽으로 바뀌고, 완도에 다리가 놓이게 되니 이진항의 위상은 급격하게 추락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삼남길 전남구간 3코스(해들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역사공부도 되고, 느긋하게 트레킹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거리가 10Km 남짓 정도 된다.

 

 

 

기사 관련 사진
▲ 공구가방을 두른 필자 지난 3월 16일자 기사에 쓰인 사진이다. 사진 왼쪽이 손성일 대장이고, 오른쪽이 필자다. 허리에 공구가방을 두르고 작업을 하고 있다. 계속된 작업에 지쳐서 그랬는지 뒷모습이 좀 '껑뚱'하다. 방송은 이런 길을 만드는 '하드웨어 작업'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어떤 방식으로 길이 개척되고, 어떻게 작업이 진행되는지에 대해 집중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럴만도 한게 우리나라에 도보여행 길이 600개가 넘지만 '하드웨어 작업' 자체가 소개된 길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개척하는 주체도 관리하는 주체도 불분명하여 개통 이후 방치된 트레킹코스가 많은게 우리의 현실이다.
ⓒ 곽동운

 

 

 

 

 

 


# 오마이뉴스에 기사 썼다, 방송물 먹었다!

 

이런 삼남길에 대한 역사성과 개인적인 작업 참여 등을 종합하여, 필자는 지난 3월 16일에 <당신이 걷기 좋았던 그 길, 누군가에겐 골병의 길> 이라는 기사를 작성했었다. 당시 기사는 개척이 아닌 보수작업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풀어냈었다. 그 기사에서 필자는 일부러 사람 얼굴이 나오지 않은, 등 돌린 사진만 게재를 했었다. 제목처럼 무척 힘든 작업이 연속됐기에 사진을 찍을 겨를도 없었지만 실제로 확인해보니 얼굴이 정면으로 응시된 사진도 쓸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다시 그 기사를 읽어봤을 때는 좀 낯선 감이 있었다. 필자의 예전 기사들이 사물에 근접하게 포커스를 맞췄다면, 그 기사는 좀 멀찍이 떨어져서 초점을 맞춘 셈이었다. 한 발짝 떨어져서 사안을 바라보니 작성 범위도 넓었던 것 같았다. 분량이 무려 원고지 34매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런 노고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걷기 좋았던 그 길, 누군가에겐 골병의 길>은 메인탑, 즉 오름기사로 당당히 자리매김을 하게 됐다. 흥미로운 것은 필자가 작성한 그 기사를 보고 <MBC 시사매거진 2580> 측에서 손성일 대장에게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내 기사가 디딤돌이 되어 또 하나의 콘텐츠가 생성됐고, 덕분에 '바람잡이'였지만 필자도 나름대로 TV에 등장했던 것이다.

삼남길 관련 기사를 써서 <오마이뉴스> 메인톱에도 게재가 됐고, 또한 거기에 더해 '방송물'도 먹었더니 마음 한구석에서 이런 생각이 자리 잡는다.

'이 기사도 메인에 오르면, 다른 방송국에서 섭외 들어오는 거 아니야? 푸하핫!'

 

 

 


# 도보여행길 개척이 토목공사?



글을 마치기 전에 걷기 열풍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한 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600여 개에 달하는 도보여행길이 있다. 제주 올레의 열풍을 타고 전국 각지에 트레킹 코스가 앞 다투어 개설된 것이다. 최근에 한 풀 꺾였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개설중인 길들이 많이 있다.

그런 길들 중에는 명품 코스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면, 도보여행에 적합하지 않은 길들도 부지기수다.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거나 아스팔트 비율이 높은 곳들이 바로 그런 길들이다.

 

 

 

 

기사 관련 사진
▲ 점재 삼나무 숲길 아스팔트를 계속 걷는다면 도보여행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 여름에 아스팔트의 열기를 느끼며 트레킹을 한다면 자칫 일사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트레킹은 숲길을 걷는게 제격이다. 사진은 삼남길 전남구간 6코스 점재다. 저 길을 걸으면 그윽한 삼나무 향을 느낄 수 있다.
ⓒ 곽동운

 

 

 

 


한편 '친환경 사업'이라고 불리는 트레킹 코스 개설에 너무 많은 예산이 소요된 사례도 있다. 해파랑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해파랑길은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연결된 해안걷기 길인데 그 거리만도 770Km에 이를 예정이라고 한다. 해파랑길은 2014년, 완전 개통을 목표로 개척되고 있다.

아웃도어 여행가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해파랑길 개척에 긍정적인 시각을 보냈다. 삼남길과 같이 국토종단형 도보여행길이 개설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려 770Km에 이르는 대장정이 아닌가? 하지만 필자는 해파랑길의 예산 투입 금액을 보고 경악했다.

'무슨 4대강 사업하나? 도보여행 길 개척에, 왜 170억원이란 엄청난 거금이 집행돼야 하지?'

삼남길 전라도 구간(228Km)과 경기도 구간(91Km) 개통에 총 3억 남짓한 돈이 든 것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차이가 나는 셈이다. 이런 추세를 감안하면 삼남길 600Km 개척에 채 8억도 안 드는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예측된다.

물론 도보여행 길 개척이 삼남길처럼, 개척단의 희생을 발판 삼아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엄청난 혈세가 트레킹 코스에 투입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된다. 더군다나 해파랑길은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해안누리길과 거의 일치하여 예산의 중복투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파랑길은 '낭만가도'라고 불리는 7번 국도를 기반 삼고 있기에 특별하게 수백억의 예산이 집행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도보여행길 개척이 또다른 형식의 토목공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평소 지론이다. 돈은 적게 들이고, 효과는 증대시켜야 한다는 것이 도보여행을 바라보는 필자의 기본 시각인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필자가 삼남길 개척단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돈은 아주 적게 들면서 여행의 효과도 있고, 역사트레킹도 할 수 있으니까.
 

 

 

 

 

 

 

 

 

 

 

 

 

 

 

 

 

 

 

 

 

 

 

 

 

 

 

 

 

 

 

 

무식한 내가 미술관에서 느낀 평화

 

 

 

 

[오마이뉴스 곽동운 기자]친구! 자네는 미술관을 자주 찾는가?

 

아니, 이렇게 물어보는 게 어리석은 질문일지 모르지. 자네도 바쁜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 아닌가. 더군다나 미술에 대해서는 나처럼 문외한이니깐.  미술관에서는 누구나 강한 동질성을 강요받는다고 할 수 있지. 현대 미술의 추상성은 일반인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거든. 뜻 모를 형상을 그려놓고, 예술 작품이라고 걸어놓았으니, 나 같이 미술에 몽매한 사람들은 곤혹스러울 밖에.

 

어쩌면 난해한 추상성으로 가득한 미술작품에서 내 자신과 일맥상통하는 동질성을 찾는다는 건 매우 가혹한 일일지도 몰라. 그 곤란함을 겪으면서도 미술작품 앞에 서는 건 미술관을 방문한 관람객들의 운명이겠지.

 

 

그러나 그런 추상성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결국에 그 작품들이 동질성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쾌감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네. 하나씩 실타래를 풀어내듯 난해함이 익숙함으로 다가오는 맛이란! 그런 면에서 미술관에서 받는 강요는 매우 유쾌한 강요라고 할 수 있지. 그 맛을 느끼려고 미술관을 찾는 거고.

 

 

▲ 안젤름 키퍼, <영리한 소녀들>(1996)
ⓒ2004 곽동운

 

 

 

 

그런데 여기 동질성의 강요를 덜 받는 전시회가 하나 있네. 물론 난해한 작품들이 있기는 하지만 여타 전시회들에서 밟는 단계들이 몇 개로 줄어들었으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 그 전시회에 걸린 작품들은 내 자신과 거의 완벽할 정도로 코드가 일치하더군. 바로 <평화선언 2004 세계 100인 미술가>(이하 평화선언) 전시회가 그것이라네.

 

물론 내 자신 속에서 꿈틀거리는 평화의 의미와 해당 작품이 담지하고 있는 평화가 꼭 동등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평화선언 몇몇 작품들도 내게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더군. 나와 작가가 느끼는 평화를 바라보는 시각차이라고 정리하는 게 좋을 듯싶네.

사실 평화선언은 7월 31일부터 전시되었더군. 이번 달 15일에 다녀왔으니, 나도 무척 늦게 다녀온 셈이지. 뒷이야기를 보려고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를 검색해보니,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10월 24일까지 2주간 연장 전시를 한다더군.

 

 

평화선언은 크게 3분야로 전시를 해. 1번 테마는 전쟁의 잔혹성, 2번 테마는 우리 민족이 처한 분단의 고통, 일상적 폭력과 억압을 다루었고, 3번 테마는 평화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다고 안내를 하더군.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1, 2, 3의 큰 차이는 없어 보였어. 아니, 이 코너에서 저 코너로 발걸음은 옮기고 있었지만, 작품에서 전달하는 메시지와 감흥은 하나였지. '전쟁반대! 우리에게 평화를!' 'No War! We want Peace!' 자네도 똑같았을 감정이었을 걸.

 

보도에 의하면 평화선언은 약 1년여간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더군. 국내 작가들은 둘째치고 53명의 해외작가들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란 쉽지 않은 일이겠지. 어쩌면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사람들은 한 가지 교훈을 얻었을 거라 생각하네.

 

 

평화의 힘을 모으는 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이 축나는 일이지만 그만큼 복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수많은 관람객들이 다녀가고 언론매체에서도 호평을 쏟아냈고, 결국 연장 전시까지 하게 됐으니 말이야.

 

앞에서 말했듯이 평화선언에 전시된 160여점의 작품들 모두가 내게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서 내 정신을 순간 멍하게 할 정도로 느낌이 확 다가오는 몇 몇 작품이 있었네.

 

 

그 중 하나가 설치미술가 임옥상의 <철의 꿈>(2001)이었다네. 매향리 사격장에서 주워 모은 불발탄에 숟가락과 포크를 엮어 독수리의 형상을 만들어낸 임옥상의 빼어난 작품성이 돋보였어. 그 불발탄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인살상용 클러스터 폭탄과 대전차용 폭탄이었어. 죽음과 파괴로 그 쓰임새가 명확한 물건들을 가지고 비상하는 독수리의 형상을 나타냈다는 게 정말 기막히지 않은가?

 

 

▲ 시아 시아오 롱, <남경대학살>, 2004
ⓒ2004 곽동운

 

 

 

 

폭탄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작품도 꼭 짚고 넘어가야겠군. 강요배의 <스텔스-부메랑>(2004년)은 이라크 침공에서 모티브를 얻었더군. 평화선언의 많은 작품들이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겠지.

 

 

강요배는 초승달을 머리 위에 두고 비행하는 스텔스기를 그렸지. 그 초승달이 마치 부메랑처럼 보이더군. 초승달을 보며 거대한 초승달 지역의 하나인 이라크로 폭격 임무를 떠나는 미군 조종사와 그 초승달을 지켜보며 신의 가호를 비는 이라크 주민들의 모습이 동시에 떠오르더군.

 

어쩌면 강요배의 의도는 적중했는지 몰라. 영국의 유력 일간지 <인디펜던트지>는 현재 이라크에서는 '세컨드 워(Second War)'가 진행 중이라고 했고, 미군 전사자가 이미 1000명을 넘어섰다고 하지 않은가. 미국은 부메랑을 맞은 거야. 이미 이라크는 제2의 베트남이 되었다고 여겨진다네.

 

 

스텔스 폭격기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네. 아니 씁쓸한 이야기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군. 1999년 코소보 내전 당시였어. 미 본토 미주리 주에서 출격한 B-2A 스텔스 폭격기가 옛 유고연방까지 원정 폭격을 하고, 다시 기지로 귀환했다네.

 

폭격기 조종사는 전쟁 중에 출퇴근을 한 셈이지. 대서양을 건너 전쟁을 치르고 온 셈인데 무심한 아내는 퇴근하고 온 조종사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었다고 하지 않나.

 

 

무기가 최첨단으로 발전되면 될수록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방을 죽이는, 자기 눈앞에서 적이 쓰러지는 '낭만적인' 전쟁은 사라지는 듯싶네. 어둠이 깔린 만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리고 다시 바다 건너 퇴근하는 폭격기 조종사가 전쟁의 광기에 대해서 자각을 갖는다는 건 힘든 일일 테지.

 

 

마지막으로 안젤름 키퍼의 <영리한 소녀들>(1996)이라는 작품을 이야기하려 하네. 그 그림은 사전 설명이 좀 필요한 작품이야. 얼핏 보면 해바라기 사이에 벌거벗은 노인이 한 명 서 있는 시시한 그림이거든. 그런데 그 이면을 보면 내용이 달라진다네.

 

세르비아 내전 당시 강제 징집으로 마을 젊은 남자들이 모두 다 전쟁터로 갔는데, 전쟁이 길어져 징집도 계속됐다더군. 마을 남자들 씨가 마를 정도였는데도 징집은 계속되었고, 그림 속에 노인도 그냥 집에 있었으면 징집됐을 테지. 그래서 영리한 소녀들이 징집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할아버지를 해바라기 밭에 데려다 놓았다지 뭔가. 믿어지지 않지만 실화라네.

 

 

▲ 평화에 대한 염원이 쓰여진 종이로 만든 장식물. 마치 인디언들이 주술 의식에 쓰이는 장식 같기도 하다.
ⓒ2004 곽동운

 

 

 

 

친구!

 

 

20일에 자이툰 부대 본대가 주둔지 아르빌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하더군. 무려 1100㎞의 거리를 어둠을 이용하여 이동했다고 하니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지. 그 무더위 속에서 사막을 종단했다고 생각해 보게나.

 

그러나 난 무엇을 하려고 그렇게 고생을 하나, 라는 생각뿐이라네. 가뜩이나 경제도 어려운데 스스로 수천억이나 되는 돈을 쏟아부으면서까지 전투병을 파병하다니! 또 평화재건 부대가 가는데, 왜 미군의 공격헬기와 전투기의 호위를 받느냐 이 말이야. 그래 이 정도로 하자고. 말을 하면서 내가 화를 내는군.

 

 

이제 추석연휴가 지나면 추위가 성큼 더 다가오겠지. 친구! 깊어가는 가을에 전시회장 한 번 찾아가는 게 어떤가? 유쾌한 동질성의 강요를 받아보는 건 삶의 여유를 이끌 수 있지 않겠나. '평화선언'을 관람하고 자네가 가지고 있는 평화사상과 내가 가진 평화사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을 거야.

 

 

난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다 다른 평화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전쟁이 아닌 평화를 원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겠지.

 

친구! 다음에 또 편지 쓰지. 잘 지내게나. 추석연휴 잘 보내고.

/곽동운 기자

- ⓒ 2004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앗! 이 기사는 무려 8년 전에 작성된 것이네요! 시간이 참 빠릅니다!ㅋ

 

 

 

 

 

 

 

 

 

 

 

 

 

 

 

 

 

 

 

 

 

 

 

 

 

공선옥,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의 표지

 

 

 

 

 

*** 예전에 기고했던 기사를 여기다 올려봅니다. 날짜를 보니 벌써 7년 전이군요!

에궁~ 이제 한 달 후면, 2013년인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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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

 

 
[오마이뉴스 곽동운 기자]안녕하세요? 공선옥 작가님!

 

녹음이 짙어지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평안하신지요? 지금 춘천은 참 아름답겠네요. 아아! 곧 전주로 이사를 간다고 하셨지요. 전주도 참 멋들어진 곳이지요. 비빔밥도 맛있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형식에 대해 한마디 합니다. 서평을 이렇게 편지글 형식으로 작성해 보는 게 처음입니다. 서평을 편지 형식으로 쓴다고 해서 누가 뭐랄 사람은 없겠죠? 객관성을 중시하며 각종 자료들이 동원되는 서평 글은 서평자의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아 균형감이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딱딱한 문체가 별로죠. 서평을 꼭 논문 쓰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 공선옥 산문집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 표지
ⓒ2005 당대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전편에 흘러넘치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작가님의 시선은 너무나 따사로웠습니다. 그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카드 빚에 내몰리고, 재개발에 내몰리고, 가정 파탄으로 내몰리고… 우리네 고단한 서민들의 아픔을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당신의 착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작가님은 '아름다운 노래 따위 나는 부를 수 없다'고까지 하셨지요. 작가님은 "나도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 예술 한번 하고 싶었다. 예술. 그러나 나는 그렇게도 소원이던 예술을 이제와 포기하여 한다"며 괴로워하셨지요. 또,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아, 백죄 그러지 말아라.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아, 입 좀 닥쳐라"라고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그건 소외받은 이웃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절대 외칠 수 없는 절규입니다.

 

 

<사는 게...> 중에서 제가 가장 숨죽이며 읽었던 부분은 "사랑은 가고 '러브'만 남은 이 휘황한 밤에"였습니다. 가난한 열여덟 살 청년이 택시기사의 사납금 10만원을 뺏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또 이혼한 장애 여성이 단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랑하는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부분에서는 제 입술을 깨물어야 했습니다.

 

 

 

 

이 책 전반에 흐르는 키워드는 빈곤과 소외, 그에 따른 고단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 이외에 사람들은 이 책에 등장하지 않더군요. 뭐 작가님 자신과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는 몇몇 분이 계시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사는 게...>는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 속에서도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은 인생'들도 꿈틀거린다고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서평이라고 할 수 없겠죠. 책에 대한 냉엄한 평가는 오간데 없고, 칭찬 일색이니. 일반독자에 의한 주례사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음 부분부터는 작가님을 위한 제 나름대로의 쓴소리를 적어보았습니다. 작가님과 제가 사회를 보는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이 책을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듯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신문 사회면 중에서 '경악스러울'만한 팩트를 추리고 거기에 '좋은 생각'을 접목해 놓은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고통스런 환경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대미를 장식하는 식이지요.

 

 

여기에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 고단한 이웃들의 삶 자체가 사색의 대상이 되는 만큼 그에 따른 합당한 대안 제시도 필요합니다. '그게 지식인의 책무'라는 말은 너무 흔하죠?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혹자는 작가님에게 빈곤을 이용해먹는다고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전 작가님이 그 비난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 못지않게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끈을 던져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생생한 현장 기록들을 폄하하는 게 아닙니다. 또 전 결코 대안 지상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작가님에게 합당한 대안 제시를 요구하는 건, 대안이 빠진 <사는 게...>의 내용은 자칫 신문 사회면의 동어반복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그 나름대로의 생명력이 충만함에도 작가님의 기록들과 사색이 2% 부족 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모습은 빈곤에 대한 지식인의 알량한 연민으로 내비칠 수 있습니다. 작가님이 그렇게 꺼리는 '예술'을 하고 있다고 오해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짧게 한 이야기만 더 할게요. 작가님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인정미가 넘치는 당신의 어린 시절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더군요. 그 시절은 항상 아름답게 떠올리셨어요. 그러나 그런 유년시절의 시골풍경들이 2005년에 휘돌고 있는 수많은 복잡한 일들의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복잡하고 골머리 썩이는 현실이 싫다고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시선들로 독자들의 시야를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제가 한 비판들이 작가님에게는 섭섭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서운해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저 한 독자의 애정 어린 비판으로 받아주셨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소외되고, 외로운 이웃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건강조심하시고요.

 

 

건필 하십시오!

/곽동운 기자

 


덧붙이는 글
서평전문 사이트 리더스 가이드에도 올립니다(www.readersguid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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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 투구바위

 

 

*** 언론 기고문이라는 폴더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제가 언론에 기고한 콘텐츠를 게시할 예정입니다. 저는 언론사에 기고를 할 때 블로그에다 원문글을 작성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일단 개인 블로그에서 작성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편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현재 자전거여행기를 기고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도 기사작성 하는 것이 편리하지가 않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인터넷 신문인데도 기사 작성하는데 순탄치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제 개인블로그에다 초고를 작성합니다. 그런 후에 완성본을 오마이뉴스에 송고하는 식입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면 다음 블로그의 웹기반 성에 대한 찬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실지 모를 일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다음블로그의 웹기반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블로거들에 대한 대접은 다음이 네이버에 비해 한참 못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있는 현실이겠죠.

 

각설하고.

 

이 코너에 게재되는 기사들은 이미 제 블로그에 올라온 것들입니다. 블로그의 포스팅과 차이는 있습니다. 블로그 글보다 신문기사 글이 훨씬 더 깁니다. 기사글이 한 편이면 블로그 글은 3편으로 쪼개 놓았습니다. 길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요. 우리는 스코롤의 압박을 싫어하잖아요!

 

저는 블로그 글과 기고문을 좀 다르게 작성해 왔습니다. 아무리 인터넷 신문이라지만, 제 기명으로 발행되는 것이기에 나름대로 게이트키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최대한 블로그 원문글과 신문기사글을 일치시키려고 노력을 했었지요.

 

블로그에는 쪼개서 작성하였지만 기사에는 한 편으로 올라갔다, 이것이 가장 핵심일 것 같습니다.

 

 

 

 

 

 

 

 

▲ 울릉도 울릉도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곳곳이 절경이라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그곳이 최고의 출사지가 되는 곳이다. 사진 왼쪽 하단에 있는 흰색 구조물은 작은 터널이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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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와 자전거 일명 '철TB'라 불리는 '막강한 자전거'를 끌고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다녔다. 한편 울릉도는 자전거를 타기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해안도로가 놓여 있기는 했지만 가파르게 형성된 구간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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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부터 거창하다. 그냥 자전거여행이면 자전거여행이지, 뭐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고? 요즘은 백두대간이라는 명칭이 맥주 광고에도 차용될 정도로 대중화 됐다지만 자전거를 타고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거나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지 못했다면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는 명칭은 한마디로 '낚시용' 제목이 아닌가.

그렇다.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난 이번 여행을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고 이름지었고, 다른 분들에게도 그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난 백두대간을 너댓번 정도 오르락내리락했다.

한계령을 넘어 울릉도에 입도했고, 태백산 야영장에 자전거를 주차(?)시켜 놓고 천제단까지 등산을 했다. 남덕유산 아래에 있는 육십령 고개를 통해 전라북도 장수에서 경상남도 거창으로 이동을 했다. 또한 각종 장비로 중무장한 철TB를 끌고 지리산 성삼재와 노고단까지 다녀왔다. 이 정도면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질책을 그나마 덜 당하지 않을까.

 

 


▲ 청량산에 위치한 청량사 청량사는 정말 시원한 배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저기에 계신 부처님은 참 행복한 부처님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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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필자가 여행한 코스와 산악인들이 언급하는 백두대간의 코스는 다르다. 앞서도 말했듯이 자전거를 끌고 대청봉에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경북 지역에서 봉화와 안동지역을 여행했는데 이곳은 차라리 낙동정맥과 더 가까웠다.

어쨌든 나는 자전거를 타고 백두대간과 가장 근접한 지역을 여행을 했고, 지금은 무사히 서울로 돌아와 이렇게 여행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산악지역을 다니느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여행 일수가 소요됐고, 체력적인 부담도 무척이나 컸다. 더군다나 올 여름은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지 않았던가.

지난 56일간의 여행에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 느꼈다. 더불어 아쉬움도 스쳐갔다. 이번 여행이 국내에서 행하는 장거리 자전거여행의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만 거의 1200km 정도를 주행했는데 지난 5년간 누적된 거리만 따지고 보면 한 5400km 정도가 된다. 그렇다. 필자는 자동차나 기차처럼 동력을 이용하지 않고, 무동력(No-motor)으로 5000km 이상을 여행했다. 국내에서 축적한 5000km 이상의 자전거여행 경력을 이제는 해외로 발산할 순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기는 제대로 잘 기록해 둘 셈이다. 구슬도 잘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던가. 장거리 여행을 한 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획득한 엄청난 스펙을 스스로 차버리는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필자도 그런 우를 범하지 않게 지난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 생각이다. 여행 내내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있었고, 살벌한 이야기도 있었다. 또 폭염에 지쳐 황천길로 갈뻔한 이야기도 있었으니 통상적인 여행기보다는 좀더 '서프라이즈'한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 강원도 화천의 평화의 댐과 평화의 종 평화의 댐 부근은 DMZ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이게도 천혜의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왼쪽에 보이는 타원형에 평화의 종이 걸려있다. 평화의 종은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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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노고단 부근 힘든 여정이 있었기에 지리산에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은 것일까? 동이 트고 있을 때라 좀 어둡기는 하지만 지리산의 영험함이 느껴지는 사진이다!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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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 여행기간: 2012년 6월 14일~ 8월 8일

2. 주행거리: 약 1200km

3. 이동경로: 서울 -> 강원도 춘천 -> 화천 -> 양구 -> 인제 -> 설악산(한계령) -> 양양 -> 강릉 -> 경상북도 울릉군 -> 강릉 -> 동해 -> 삼척 -> 태백 -> 경상북도 봉화 -> 안동 -> 예천 -> 구미 -> 김천 -> 경상남도 거창 -> 함양 -> 지리산(성삼재, 노고단) ->전라남도 구례 -> 전라북도 남원 -> 장수 -> 거창

* 원래는 지리산에서 여행을 종료할 예정이었으나, 경남 거창에 볼 일이 생겨 다시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음. 거창에서는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서울로 복귀함.


이기사는 제 블로그(http://blog.daum.net/artpunk)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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