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삼재: 성삼재에서 전남 구례 방면을 찍어보았다.

 

 

 

 

# 인생사 타이밍, 여행기 작성도 타이밍

 

인생사는 타이밍이다. 여행기의 작성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콘텐츠가 있다고 하더라도 발표 시기를 놓친다면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여행기는 묵혀 놓으면 놓을수록 가치가 상승하는 골동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행 기사는 시급을 다퉈 발표하는 성격의 뉴스가 아니다. 사진도 잘 선별해야 하고, 이동 중에 기록한 메모들도 잘 정리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사를 송고할 때까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장거리 여행에 대한 여행기이면 더더욱 그렇다.

문제는 그 지점에 있다. 시간의 소요가 느긋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느긋함을 부리다가 기사 작성이 계속 뒤로 미뤄지고, 그러다 아예 전체 기사분에서 누락되는 원고가 생기게 된다. 내가 연재 아닌 연재를 하고 있는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여행기에도 그렇게 누락분이 발생했다. 삼척·동해·예천·거창·김천 등등 시간에 쫓기다 보니 좀 더 오래 머물고, 좀 더 많은 에피소드를 경험한 지역을 취사선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뜀뛰기를 하듯 여행기를 작성했지만 한 번 꼬인 '스텝'은 잘 풀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다녀왔던 이야기가 엄동설한에 발표됐던 것이다. 계절감이 전혀 맞지 않게 된 것이다.

 

 

 

* 지리산 관통도로: 꼬불꼬불 구절양장 같은 지리산 관통도로

 

 

 

 

# 한파주의보에 보는 반소매 사진
 

 

특정 주제를 놓고 공모를 하는 여행기 공모전이나 옛 추억을 회고하는 방식의 포토에세이라면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처럼 특정 시기에 행하고 동선이 명확한 여행기는 계절감이라는 족쇄에 묶일 수밖에 없다. 2012년 12월 31일에 발행된 <태백산 주목, 혹시 당신이 산신령?>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 여행기를 본 지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글도 사진도 꽤 쓸 만한데, 반소매 입은 사진은 좀 추워 보인다. 지금 한파주의보라는데…."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아무리 멋진 사진을 게재하더라도 한파주의보를 체감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반소매 사진은 '아니올시다'를 유발시킬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필자도 이런 변명 아닌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뜀뛰기를 하듯 여행지를 취사선택을 할 필요도 없게 됐다. 이번 편이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마지막 편이기 때문이다.

 

 

 


# 2011년 여름에 만난 태풍의 기억

여행 43일 차 2012년 7월 26일

나는 경남 함양군을 출발했다. 이제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리산!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민족의 영산. 나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마지막 관문인 지리산. 그렇게 필자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마무리 짓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나는 이미 2011년에 관통도로를 통해 지리산을 넘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국토종단 자전거여행 중이었는데 성삼재에서 태풍을 만났다. '죽음의 도로'라고 불리는 지리산 관통도로를 힘들게 올라갔는데 나를 반긴 것은 '덴무'라는 태풍이었다.

무척 억울했다. 여러 번에 걸친 위기를 넘기고 성삼재에 도착했더니, 태풍이 필자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구절양장 같은 꾸불꾸불한 지리산 관통도로를 40시간에 걸쳐 이동을 했는데 말이다.

겨우 태풍이나 만나려고 그 고생을 하며 성삼재에 올랐던 것인가. 힘 좋은 4륜 구동 자동차로도 오르기 힘들다는 지리산 관통도로를 자전거로, 그것도 40kg나 되는 짐을 싣고 올라섰건만. 이름도 이상한 태풍이나 만났으니! 더군다나 당시 내 자전거의 브레이크는 둘 다 작동 불능 상태였다. 지리산 성삼재에서 태풍을 만났지, 자전거 브레이크는 망가졌지, 체력은 다 빠졌지.

 

 

 

 

* 도계삼거리: 달궁삼거리를  도계삼거리라고도 부른다. 저 표지판처럼 그 곳은 분명 아름다운 곳이지만... 필자에게는 너무나 험난한 곳이었다!

 

 

 

 

그런 면에서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종결점을 다시 지리산 성삼재로 잡은 것은 2011년의 '리벤지 매치'의 성격이 강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성삼재에 올라서 등산객들에게 제대로 환대와 격려도 좀 받고, 노고단에도 오를 생각이었다. 지리산 관통도로에서 블루야크(내 자전거의 애칭)를 끌고 가는 내내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푸하핫, 태풍도 안 오고 날씨 참 좋네. 이번에는 성삼재에 올라가서 목에 힘 좀 주고 다녀도 되겠군. 백두대간자전거 여행의 마지막이 지리산이라고 등산객들한테 자랑하고 다녀야지!'

나는 시간 계산을 잘못해, 야간주행을 하는 위험천만한 짓을 했지만 당시 마음은 뭔지 모를 뿌듯함이 넘쳤다. 불빛 하나 없는 산 한복판에서 오직 달빛에 의존해 주행하는 것도 '판타스틱'했고, 그런 '판타스틱'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 지리산이라는 점도 내 마음을 기쁘게 했다. 당시 여행일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여행을 해서 그런지 몸이 무척이나 피곤하다. 그냥 눈이 감길 정도다. 하지만 기분은 좋다. 몸은 피곤해도 기분은 상쾌하다. 왜? 이곳은 지리산이니까! 민족의 영산 지리산이니까!"(7월 26일 오후 11시 뱀사골 야영장에서)

 

 



# 땀 뻘뻘 흘리며 페달 밟는데, 옆에서는 맥주가...

다음날. 지리산 산신령께서 단잠을 내려 주셔서 그랬는지, 나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까지 잠이 들었다. 여행 막바지라고 여유를 좀 부렸던 것이다. 어차피 내가 그곳 지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시간당 이동 거리도 가늠할 수 있었기에 그런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 전년도의 경험도 한몫했다.

한여름의 지리산은 생기가 흘러넘쳤다. 덩달아 탐방객들이나 캠핑족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흘러넘쳤다. 달궁 캠핑장을 지날 때였다. 한무리의 가족들이 둘러앉아 수박을 쪼개 먹고 있었다. 시원한 맥주도 한 잔 걸치면서... 불타오르는 아스팔트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꼈던 나로서는 그런 광경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천하절경 속에서 음식과 술잔이 도니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지만 술 한 잔 받아먹지 못하는 내 처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느긋한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서편으로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리산 지리를 안다고 하지만, 야간에 지리산 관통도로를 이동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성삼재에 오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 노고단에서의 아침: 노고단 가는 길에 있는 전망대에서 한 컷. 일출 즈음이라 그런지 사진이 잘 안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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