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동영상입니다.

이것도 카드뉴스 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 낙산 성곽길: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걷기 좋은 길로 유명하다.  






* 성곽: 모자이크처럼 올려진 성벽돌. 각 시기마다 축조된 성벽돌이 달라 모자이크 같은 느낌을 준다.  






* 성북동: 성북동에 있는 와룡공원 부근에서 한성대역 방면으로 사진을 찍었다.






* 동대문 부근: 동대문 부근에서 성곽길을 찍어봤다. 동대문 부근 성벽은 2015년에 복원됐다.  






* 벽화: 낙산의 아랫동네가 바로 이화동이다. 그 유명한 이화동 벽화마을이 있는 이화동. 






* 성북동: 성벽 넘어에 있는 성북동을 찍어 봤다. 성벽 넘어에 있다고 성북동이다.  

 








선바위 앞 기도, "역사트레킹 잘 되게 해주세요!"

역사트레킹 카페를 오픈하며


17.03.20 13:56   최종 업데이트 17.03.20 13:57





             


    

        
▲ 선바위 기도발이 잘 받기로 유명한 인왕산 선바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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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우리 인생!"

필자가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격언이다. 예를 들어보자. 필자는 트레킹 코스(물리적으로)를 잡을 때 50대 여성들의 수준에 맞춰 기획을 했었다. 너무 힘들지 않으면서 적당히 운동이 되는 지형을 타고 가자는 게 목표였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트레킹이니까 코스에 문화재가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그렇게 하면 젊은층들(특히 여성들)이 무리 없이 참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필자는 처음 트레킹의 주 타깃을 20~30대로 잡았었다. 그들이 답답한 일상을 박차고 나오길 바랐었다. 질풍노도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기에 가장 힐링이 필요한 세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선바위 선바위의 뒷모습이다. 사진 상단에 서울성곽이 늘어선 모습이 보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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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형 멘트가 아재개그로 변하다

하지만 보기 좋게 예상은 빗나갔다. 필자와 함께 보폭을 가장 많이 맞춘 사람들은 50~60대였다. 그 중에서도 여성분들이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상황이 바뀌다보니 강의 준비도 변화가 있게 됐다. 젊은 세대들을 위해 준비했던 맞춤형 멘트는 사라지고, 어느새 내 입에서는 '아재개그'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나마 웃기기라도 했으면 다행이었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서울 인왕산 서쪽을 가보면 일명 '스님바위'라고도 불리는 선바위가 있다.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 선바위는 멀리서보면 스님이 승복을 입은 형상으로 보인다. 그렇게 특이한 형상을 해서 그런지, 선바위는 '기도빨'이 잘 받는 명소로 알려졌다. 그런 선바위를 젊은층들과 함께 탐방을 했을 때, 필자는 이렇게 맞춤형 멘트를 날렸다.

"자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기도발이 잘 받는 곳 중에 한 곳입니다. 자신의 취업활동과 연예사업이 좀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하지만 중장년층들과 함께 탐방을 했을 때는 '아재개그'를 녹여 멘트를 날려야 했다.

"여기 선바위는 예전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이 정성스럽게 치성을 드렸던 곳입니다. 늦둥이를 원하신다면 시주함에 돈다발을 팍팍 넣으시고, 얼라를 점지해 달라고..."

필자가 저 멘트를 날리면 십중팔구는 이런 식으로 답이 돌아왔다.

"으이구 지금 있는 것들도 속 썩여 죽겠구먼. 늦둥이는 무슨 늦둥이..."

참고로 선바위는 쌍둥이 바위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한다. 그래서 늦둥이 이야기를 입에 올렸던 것이다.






 

        

▲ 백불 흰 색의 부처님. 옥천암에 있는 보도각 백불이다.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에서 만날 수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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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배우는 길 위의 인문학

어쨌든 트레킹의 주 타깃이 바뀌다보니 내심 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당혹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운 타깃으로 등장한 중장년층에게서 새로운 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트레킹에 대한 열성도가 뛰어났다는 것이다. 수업 태도도 좋았고, 관심도도 높았던 것이다. 호기심도 무척 많으셨다. 그들은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약칭:길인역)' 카페를 개설하게 됐다. 길인역은 그런 호기심들을 담아내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 함께 트레킹을 행하며 세상공부를 해보는 것이다. 답사여행을 통해서 배움을 실천하는 것이다. 책에서 배우는 지식보다 도보여행을 통해서 얻는 지식이 더 와 닿을 수 있으니까. 이보다 더 좋은 평생교육, 성인교육은 또 없을 것이다.

2017년 상반기 역사트레킹은 총 9개 강의가 개설된다. 지난 3월 12일에 첫 번째 강의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무사히 종료됐고, 두 번째 강의인 강원도 '영월서강 역사트레킹'이 3월 26일에 진행될 예정이다.

길인역 강의는 주로 수도권에 행해지지만 멀리가는 코스도 있다. 강원도 영월도 가고, 경남 함양도 갈 예정이다. 또 충남 공주도 간다. 특히 공주 코스는 동학농민전쟁 때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우금티를 탐방할 예정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도 기대가 무척 크다.

함께 누리는 평생교육이기에 역사트레킹 강의는 무척 자유롭다. 그래서 입학도 졸업도 없다. 시험도 없다. 그저 트레킹에 참여를 해서 즐기면 되는 것이다. 딱히 나이 제한도 없다. 물론 너무 어리거나 너무 연로하면 참여를 못한다. 앞서 주 타깃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 강의가 진행되면, 필자의 입에서는 맞춤형 멘트에서 아재개그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 기중기 남양주 정약용트레킹에서 만날 수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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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바위 앞에서 무슨 기도를 올렸나?

사실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카페는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전에 한 번 만들었다가 완전히 망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다른 각오로 임하고 있다. 답사도 더 많이 다니고, 교보재도 철저히 준비할 생각이다.

'기도빨'이 잘 받는 선바위에서 필자도 두 손 모아 기도를 했었다.

"예전에는 말아 먹었지만 이번에는 잘 하고 싶습니다. 패자도 부활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역사트레킹, 평생교육으로 매력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로또를 맞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었다. 하지만 필자는 더 이상 로또 기도를 올리지 않는다. 이제는 역사트레킹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그러니 기도 제목도 바뀔 수 있는 거다. 중요한 건 기도하는 만큼 더 열심히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노력도 안 했는데 기도한다고 하늘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떨어지지는 않으니까.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카페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 







 









지난 3월 12일 일요일에 행한 관악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후기입니다.


총 9강에 걸쳐 기획된 2017년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강의가 관악산에서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진행된 것입니다.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길인역)은 트레킹을 하며


역사를 배우자는 의미로 개설된 평생교육 카페입니다. 명소를 다니며 트레킹도 하고, 역사와 문화도 배우면


좋잖아요. 요즘처럼 인생 2막, 3막을 준비하는 시대라면 길인역 같은 프로그램은 더욱더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그동안 동장군이 얼마나 얄미우셨습니까? 엉덩이가 들썩들썩 거리는데 그 넘의 동장군이란 넘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그렇게 동장군을 몰아내는 봄기운이 관악산에도 찾아왔습니다. 그 기운을 맞으며 트레킹팀은 관악산을 누볐답니다.


웃고, 즐기고, 이야기하고... 맛나는 거 나눠 먹고.


사진을 보십시오. 얼굴에 모두 다 봄을 품고 있잖아요! 정말 멋지십니다!


길인역 트레킹팀은 강감찬 장군의 생가지인 낙성대, 그 분의 뜻을 기리는 안국사를 탐방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를 거쳐 가톨릭 성지가 있는 삼성산 성지도 답사를 했답니다.


아직 봄꽃들이 머리를 내밀지 않아 좀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지천으로 봄꽃들을 만나게 될 테지요. 그때 다시 한 번 관악산을 탐방했으면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답니다.


하여간 오랜만에 행하는 트레킹이라 정말 즐거웠답니다. 다음에는 더 즐겁고, 더 알차게 트레킹을 해보자고요! 






*** 참고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은 계속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길인역 카페를 방문해주세요!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








 

 






 





 
















 

사진을 보니 다 예술이네요... ^^


봄을 품고 있는 모습들이 다 좋아보입니다. 그런데 제 얼굴은 봄이 아니라 붕 떠보이네요. 그날 잠을 못 자서 그런가? ㅋ








* 절두산: 당산역에서 바라 본 절두산. 뒤에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이승만이 한강 다리를 끊었다고요?

 

- 한강 따라가는 한강역사트레킹

    

 


그게 정말이에요? 저 한강대교가 폭파됐었다고요? 그게 언젠데요?”

 

어느 가을날, 한강 역사트레킹을 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참가자 중 한 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저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다른 분들의 표정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강대교와 한강철교가 폭발해서 폭삭 주저앉았다는 제 설명에 대한 반응들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KTX 한 대가 미끄러지듯 한강철교 위로 속도를 내고 지나가고 있더군요. 강제적(?)으로 묶인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저는 입을 뗐습니다.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폭발시킨 주체가 인민군이 아닌 우리 국군이었다는 점입니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다리를 폭파시킨 거죠. 전쟁 때는 일부러 시설물을 파괴해서 적군의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강대교 폭파는 문제가 아주 많았어요. 다리 폭파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거든요.”

 

무슨 피해가 있었는데요?”

 

사전 예고 없이 폭파가 실시돼서 당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들이 많이 죽었어요.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더 황당한 일은 다리가 끊기기 몇 시간 전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힘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는 겁니다.”

 




* 노들텃밭: 노들섬, 노들텃밭에서 바라 본 한강대교 아치형 교각.






그럼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끊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들은 멀리 대전까지 피난을 간 상태였습니다. 미리 녹음했던 음성으로 계속 돌려 됐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 방송 내용을 믿고 피난을 안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웃기는 거죠.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간 건 그렇다 쳐도 왜 거짓말을 합니까? 서울에 있지도 않으면서 서울에 있다고 구라쳐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마지막 설명을 할 때는 저도 비속어를 써가며 좀 흥분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침도 튀기면서... 마지막 설명이 끝나자 분위기가 좀 가라앉는 듯 보이더군요. 그래서 영화이야기로 방향을 좀 틀어봤습니다.

 

“<웰컴투 동막골>이라는 영화 기억나시죠? 그 영화에서 신하균이 육군 소위로 나오잖아요. 영화에서 신하균은 탈영을 하고 자살까지 시도를 했는데 그게 다 죄책감 때문에 그랬더라고요. 피란민들이 몰려든 다리를 폭파시켰는데 담당자가 신하균이었던 거죠. 그래서 신하균은 죄책감에 시달렸던 거고요. 그 부분은 한강대교 폭파에서 모티브를 따온 게 아닌가 하네요.”

 

그때 다시 한강철교 위로 무궁화호가 한 대 지나가더군요. 무궁화호가 느린 걸음을 하는 동안 트레킹 팀은 또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풍 같은 역사트레킹이라는 리딩 원칙이 어긋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아픈 우리 현대사네요.”

 









 * 샛강생태공원: 여의도에 숨어 있는 보물인 샛강생태공원.

 







 

# 선유도가 되어버린 선유봉?

 

한강. 매일 보는 한강인데. 매일 같이 출근하러 다리를 넘고, 퇴근하면 복실이랑 같이 산책하는 그런 곳인데. 그런 한강에도 역사트레킹을 할 곳이 있는 걸까요? ,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한강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도착지는 절두산 성지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선유도부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선유도와 절두산은 하나의 권역으로 묶일 수 있기에 선유도부터 이야기하는 전개 방식이 틀린 것만은 아니죠.


원래 선유도는 섬이 아니었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렸던 봉우리였습니다. 높이는 해발 40미터 정도였습니다. 해발 40미터면 썩 높은 편은 아니지요. 하지만 푸른 나무들을 품고 있는 봉우리가 강가 가까운 쪽에 우뚝 서 있었으니,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중국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선유봉이 있는 양화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도 선유봉을 사랑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선생도 한 풍류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겸재 선생이 선유봉이 자리잡고 있는 양천현의 현령으로 부임을 하게 됩니다. 그때가 1740, 조선 영조 때였죠

 

겸재 선생은 1741년에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3편의 진경산수화를 화폭에 담았답니다. 지금의 선유도 일대의 한강 유역을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낸 것이죠. 특히 <양화환도>에서는 선유봉과 함께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절두산이 등장합니다. 또한 그 잠두봉 아래에는 양화진(지금의 합정동)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의 물길을 느긋하게 노를 저으며 건너가는 뱃사공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양화환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에 뛰어들어 신선놀음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은 한자 풀이대로 신선이 노닌다는 봉우리입니다. 만약 진짜 그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면 선유봉 꼭대기에 서 있는 노송 아래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네요. 막걸리 말고.


그렇다면 왜 선유봉은 졸지에 선유도로 내려앉았을까요? 누가 파먹었나요?

일제에 의해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설 무렵이었습니다. 일제는 활주로를 닦고 제방을 쌓는다며 명목으로 선유봉을 깎아냈습니다. 채석을 한 것이죠. 그렇게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봉우리는 점점 더 깎여나갔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선유봉은 계속해서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선유봉에서 캔 돌들은 지금의 강변북로 공사 등에 이용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깎이다보니 선유봉은 납작하게 되어버렸고, 이후 한강이 개발되어 강폭이 넓어졌을 때 영등포쪽과 분리되어 결국 섬이 되고 맙니다.


그러고보면 선유도는 참 사연이 많은 섬이네요. 깎이고, 부서지고, 졸지에 섬이 되고... 그렇게 섬이 된 선유도는 지금 서울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식처 중에 한 곳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와서 신선놀음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척화비: 절두산 성지에 있다.







 

# 절두산으로 개명한 잠두봉

 

이제 절두산 이야기를 해보죠. 앞서 언급한 <양화환도>에서 절두산, 즉 잠두봉은 선유봉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제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살벌한 이름으로

   

1866.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절두산이 아닌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죽었습니다.


이 병인박해가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이까지 올라온 것이죠.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대원군은 아주 격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며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든 것입니다. 잠두봉이 양화진이나 서강과 가깝다는 이유로 그렇게 된 것이죠. 그렇게 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의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150년 전, 그렇게 절두산은 수 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감시견처럼 서 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런 흐름은 흥선대원군도 막을 수는 없었겠지요.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꿔다둔 보릿자루 마냥 껑뚱하게 서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우리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습니다. 절두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 쯤은 가볼만한 곳입니다. ‘피의 역사가 서린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소인 만큼 직접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척화비를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고요

 

그러고 보면 절두산이나 선유도나 공통점이 많네요. 예전에 사랑을 많이 받은 것도 똑같고, 본의 아니게 이름이 바뀐 것도 똑같고.

 






* 한강철교: 63빌딩 쪽에서 바라본 한강철교. KTX가 지나고 있다.







 

 

# 이승만이 끊은 한강대교

 

다시 한강대교 이야기.

한강대교 폭파로 인해 군사적인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한강 북부에 남아 있던 국군의 퇴각로가 봉쇄됐기 때문입니다. 만약 순차적인 퇴각이 이루어졌다면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950714일에 전격적으로 이양된 전시작전통제권도 그렇게 쉽게 이양되지 않았을 겁니다. 아직까지도 우리에게는 전시작전권이 없습니다.


분명 한강대교 폭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모르고 있더군요. 대다수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리가 끊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절단한 주체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교량이 폭파되지 않았냐고 물었던 참가자도 있었으니까요.


좋은 역사든 아픈 역사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름이 바뀌었으면 왜 바뀌었는지, 다리가 끊어졌다면 왜 끊어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막을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한강역사트레킹을 마칠 때 항상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인민군의 남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강대교 폭파에 대한 면죄부가 부여될 수 없지요. 자기는 안전하게 대전에 내려가 있으면서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이나 해대고... 그게 바로 이승만입니다.”

 





 

한강역사트레킹

 

1. 코스: 절두산성지 양화대교 선유도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63빌딩 한강철교 노들텃밭(한강대교)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정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지하철 2호선 합정역 / OUT - 노들텃밭 노들텃밭에서 노량진역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할 수 있음.

 

 

 

 

 


 

 

 

 

 

 

 

 

 

* 공산성: 공산성 금서루

 

 

 

 

* 지난 6월 중순 경에 '공산성-우금티'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고자 충남 공주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공산성과 우금티는 직선거리로 3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간 하나의 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는 없었답니다. 그래서 공산성과 우금티의 탐방도 버스 투어 형식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부분에 주목을 했고, 어떻게 해서든 두 지점을 연결하여 도보여행을 할 수 있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왜냐? 공산성과 우금티는 공주의 대표적인 역사유적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이 탄생했습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공산성과 우금티는 물론 중동성당, 영명학교, 송장배미 등의 근현대유적들을 탐방할 수 있답니다. 각 코스를 연결하면 둥근 원형을 띈다고 해서 '공주역사둘레길'이라는 명칭을 붙여 보았습니다. 공주역사둘레길은 역사, 풍광, 동식물 등...

 

세 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명품트레킹 코스입니다. 정식 개통이 되지 않아 무척 아쉽지만 저도 빨리 여러분들과 함께 이 길에서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답니다!

 

 

 

*** 이 포스팅은 그와 관련된 사진포스팅입니다.

 

 

 

 

 

 

 

 

 

 

 * 공산성: 공산성 진남루. 진남루는 공주지역 삼남길의 관문이다.

 

 

 

 

 

 

* 공산성: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 만하루.  파란색 천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중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2013년 11월 경에 찍은 사진이다. 필자가 올해 6월에 공산성을 방문했을 때도 만하루 일대는 공사중이었다.  

 

 

 

 

 

 

 

 * 우금티: 우금티는 황량하다. 얼핏보면 우금티 벌판으로 보일 수도 있다.

 

 

 

 

 

 

 * 우금티: 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쓰러져 있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 마음이 무척 착잡했다. 

 

 

 

 

 

* 우금티: 실제로 동학농민군들이 죽음을 당한 곳은 저 아래 쪽이다. 도로가 보이는 곳이다.  

 

 

 

 

 

* 우금티: 나무를 엮어 만든 조형물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사이로 잡풀들이 파고 올라왔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씁쓸했다.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농민 혁명과 잘 어울리는 탑인가?

 

 

 

 

 

 

 * *동학혁명군위령탑: 이 탑도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고 낡아지고 있다.

탑신 중간 부분의 벽돌이 깨어졌다.

 

 

 

 

 

 

*동학혁명군위령탑: 탑두 부분의 빨간 벽돌은 그나마 잘 남아 있다.  

 

 

 

 

 

* 우금티 터널: 현재 우금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이 우금티 터널이다.  

 

 

 

 

 

 

 

* 공산성: 공산성은 산성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 공산성 만하루: 만하루 옆에는 연지라는 연못이 있다. 옆으로 흐르는 강은 금강이다.

멀리 금강교가 보인다. 이렇듯 공산성은 산성트레킹과 강변트레킹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 우금티 대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쓰러져 있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___2편

 

 

 

 

 

---> 1편에 이어

 


황량한 우금티 벌판, 어떻게 채울까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우금티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에 의해 크게 패배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연합부대보다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죽창을 든 동학군은 개틀링 기관총 등 최신무기로 무장한 연합부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만다. '우금티 전투'가 아닌'우금티 학살'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동학농민군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우금티 전투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최정점에 위치한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농민군의 역량이 총집결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민군은 패배했고, 뒤이어 전봉준도 사로잡혀 한성으로 압송된다. 이렇게 갑오년의 뜨거운 함성이 메아리치는 우금티. 하지만 그 우금티를 바라보는 필자는 좀 엉뚱한 생각부터 들었다.

'음 여기서 족구 한 판 뜨면 재밌겠군!'

역사적인 장소를 두고 너무 불경한 말을 한 것인가? 사실 필자는 공주여행에서 우금티를 따로 추천하지 않는다. 왜? 너무 한적하기 때문이다. 우금티에 올라서면 이곳이 역사적인 장소가 맞나, 할 정도로 황량함이 몰아친다. 그 흔한 비석조차 없다. 예전에 세워졌던 조형물들은 쓰러져 있고, 여름이면 그 사이를 잡초들이 파고 들어가 무성하게 피어난다. 잡초가 파고 들어간 조형물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안타까움만 더 커질 뿐이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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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대나무를 엮어 만든 조형물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사이로 잡풀들이 파고 올라왔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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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농민 혁명과 잘 어울리는 탑인가? 한편 이 탑은 건립된지 40년이 넘어서 그런지 무척 낡아보인다. 탑두의 빨간 벽돌은 그런대로 잘 붙어 있지만 탑신 부분의 벽돌은 제거가 됐고, 그 부분이 흉터처럼 남아있다. 좀 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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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고개 아래쪽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은 더 형편없어 보인다. 유신시대에 건립된 탑이라 그런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담아낼 수 있을지 의구심부터 앞서는 게 사실이다. 또한 건립된 지 오래되어 그런지, 탑이 무척 낡아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탑신 중간의 벽돌이 떨어져 나가 흉해 보인다.

현재 우금티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조형물(?)은 바로 우금티 터널이다. 2006년에 개통된 우금티 터널은 국도 40호선의 4차선 확장 반대 투쟁의 산물로 등장하였다. 우금티를 가로지르던 기존 2차선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 우금티 고개는 원형이 손상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공주지역 시민단체들은 도로 확장 반대를 주장하며 대안으로 터널형식을 제안하였고, 그것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터널이 개통되었고 그 위로는 작은 벌판이 생겨났다. 일명 '우금티 벌판'.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은 그저 황량한 벌판일 뿐이다. 족구가 하고 싶어지는 그런 벌판인 것이다.

이 황량한 우금티 벌판을 무언가로 채워야 하지 않겠나? 언제까지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그저 쓸쓸한 공간으로 남겨둘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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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터널 현재 우금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이 우금티 터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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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해본다. 이 우금티 벌판에 돌로 만든 튼튼한 석상 조형물을 올려놓아 보자는 것이다. 큰 동상을 하나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우금티를 못 넘은 동학농민군의 한을 담아 사람 크기의 동상들을 여러 개 세워보자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진시황의 병마용으로 보일 수 있는 동학농민군 동상들이 우금티 벌판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를 돌이 되어서나마 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직접 현장에 가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 공산성이든 우금티든 한번 떠나보자. 공산성에서는 즐겁게 산성 트레킹을 해보고, 우금티에서는 갑오년 동학농민군의 결기를 느껴보자. 공산성에서는 백제시대를 떠올려 보고, 우금티에서는 구한말의 상황을 되새겨보자.

그렇게 살아있는 역사 지식을 쌓다보면 머릿속이 튼튼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s. 다음 편에는 공산성과 우금티를 직접 연결하여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에 대한 기사를 작성할 생각이다.

 

 

 

 

 

 

 

 

 

 

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주장] 우금티에 동학농민군들의 동상을 세우자

14.07.07 11:13l최종 업데이트 14.07.07 11:5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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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진남루. 진남루는 삼남길과 연결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논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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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금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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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는 경북 경주와 마찬가지로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그만큼 공주는 도시 자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공산성, 우금티, 무령왕릉, 석장리 유적, 황새울 성지 등등… 이들 중에서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곳은 공산성과 우금티일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장소는 공주를 대표하는 곳이다.


한편 공산성과 우금티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웅진성에서 산성공원까지, 공산성의 이름 변천사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뒤로는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王城)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당나라가 옛 백제땅에 세운 웅진도독부가 있던 곳도 공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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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은 산성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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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기 공주는 신라 9주의 하나인 웅천주였고, 공산성의 이름도 웅천성으로 바뀌게 된다.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공산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였다. 940년(태조 23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게 되는데 웅천에서 공주(公州)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때 비로소 공산성(公山城)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다. 공(公)자형 산에 성이 축조됐다고 하여 공산성이 된 것이다. 공산성이 자리잡은 산은 '공산'이다. 변산반도의 '변산'처럼 '공산'도 한 글자 산이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고 볼 수 있다.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다. 이후 공주는 호서지방의 중심 고을이 되었고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이 튼튼한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것도 조선시대였다.

한편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신을 왔는데 그 이후로는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하여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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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 만하루. 파란색 천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중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2013년 11월 경에 찍은 사진이다. 필자가 올해 6월에 공산성을 방문했을 때도 만하루 일대는 공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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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는 공산성에 공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곳에서는 각종 체육대회나 야유회가 개최되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산성공원(山城公園)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조선의 궁궐을 격하시켰듯 공산성에 공원을 만들어 그 위엄을 깎아내렸던 것이다.


공산성이 수많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성을 둘러싼 역사가 '드라마틱' 했다는 뜻일 것이다. 현재의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벽 일부가 내려앉아 등재까지는 가시밭길이다.

 



공주성, 동학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그 성

왕성, 웅천성, 쌍수산성 등등… 지금까지 공산성과 관련된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빠진 명칭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공주성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894년 10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은 논산을 출발하여 기세등등하게 북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곳은 공주성이었다. 그렇다. 지금의 공산성인 공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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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우금티전투가 있었던 우금티. 사진에서도 보이듯 무척 황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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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공주는 감영이 있던 충청지방의 중심지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도청(都廳)소재지이다. 조선시대 크고 작은 변란이 있었지만 이괄의 난을 제외하고는 한 도(道)의 감영이 함락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들이 전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조선 정부는 깜짝 놀라 '멘붕'에 빠졌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을 한다.

청나라는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파병 요청을 받고 아산만에 출병을 한다. 이에 일본도 텐진조약을 빌미삼아 인천으로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그나마 청나라는 출병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은 왜 우리 땅에 들어왔나? 들어왔으면 전주성이 있는 남도로 진격을 해야지, 왜 인천으로 향했단 말인가?

뚱딴지같은 일본의 출병은 6월 하순에 있은 경복궁 점령으로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평안을 위해 이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그저'침략군'이었을 뿐이다. 경복궁 점령 이후,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벌인 것을 보면 그 침략야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뒤이어 발발한 청일전쟁에 대해 동학농민군은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2차 봉기에 나서게 됐고 공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우금티에서 관군(3천명)과 일본군(2천명)의 연합부대와 맞서게 된 것이다.

 

 

 

 

 

 

 

 

 

 

문창극은 조선총독부 총리로 지명됐는가?

 

 

'야동 학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야한 동영상들이 탄압을 받는다는 거야?'

아니었다. '아동학대'를 '야동학대'로 잘못 본 것이다. 요즘 들어 난독증 때문에 뒷골을 몇 번 잡은 적이 있다. 아직까지는 팔팔한 청춘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필자도 점점 주름살이 짙어지는 나이 대에 진입한 것이다.
한편 언론인 문창극 씨가 총리로 지명된, 당일 날에는 이런 일까지 겪었다.

'총리 후보자? 일본의 아베 총리가 권좌에서 물러났나? 얼마전에 북한과 스톡홀롬에서 납치피해자에 대한 당국간 회담을 했잖아. 또 요즘은 집단자위권 문제 때문에 발바닥에 불나고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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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극 총리 지명자에 대한 착시현상


착시현상이었다. 인터넷 창을 여러 개 띄어놓고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면 뉴스를 번갈아 가면서 봤더니 그런 착시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고, 문창극 지명자에 대해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아무리 그가 나와 반대편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아베 신조와 엮어,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억지로 엮는다면 필자는 '적폐'로 낙인찍힐 것이다. 말 그대로 '개조'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필자는 문 후보자에게 미안한 감정을 덜어내고 가뿐한 마음으로 이 기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시다시피 문 후보자가 온누리교회 강연에서 '일본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히 언급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문 후보자는 이를 특종보도한 KBS를 향해 고소를 준비한다고 했다.
이렇게 문 후보자가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니 필자가 착시현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레이크 없이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아베 신조 정권, 그 정권에서 잊혀질 만 하면 쏟아져 나오는 망언들과 동영상에서 드러난 문창극 후보자의 발언이 대동소이했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자립심 부족한 우리 민족 DNA'
'일본지배,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
'일본이 이웃인 건 지정학적인 축복'
'제주 4․3은 폭동'

 

 

 


# 비겁하게 윤치호 뒤에 숨지 마시라!

제주 발언을 제외하고는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우익세력들의 주장과 거의 일치하지 않은가? 조선은 고대 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스스로 문명개화를 할 수 없으니 일본인들이 '시혜'를 베풀어 문명국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100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나?

문 후보자 측은 위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윤치호가 말한 것이고 자신은 그것을 인용했을 뿐이라며, KBS에 대해 악의적인 편집을 했다면서 고소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다.

"왜 하필 친일 매국노인 윤치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인용하셨는가? 왜 솔직하지 못하고 윤치호 뒤로 숨으시는가? 제주 4․3 폭동 발언도 윤치호가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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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문 후보자는 '강연은 종교인으로서 교회 안에서 한 것이어서 일반인 정서와 다소 거리가 있다'고 반론을 한다. 필자는 이런 시각이 무척 우려스럽다. 문 후보자 말에 의하면 교회 정서와 일반인의 정서 사이에는 간극이 명확해진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를 더욱 확장하면 교회는 친일 매국노들과 매카시즘의 '해방구'가 될 수도 있다는 해석을 얻게 된다. 왜? 교회 안과 일반인들의 정서가 다르니까. 무엇을 하더라도 교회가 방패막이가 된다는 뜻이 아닌가?

한편 필자는 그 강연을 들었던 온누리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문창극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쌍수 들고 환영할, 그런 강연을 할 때 여러분들은 뭐하셨습니까? 혹시 '아멘'하고 화답한 거 아닙니까?"

 

 


# 총독부 총독으로 지명 받으셨나?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사과 받을 필요 없다'는 올해 4월, 문 후보자의 서울대 강연 내용을 12일 밤 인터넷 기사로 읽었다. 그 기사를 읽은 후, 필자는 착시현상의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필자가 착시현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제대로 봤던 것이다.

아무리 주어가 빠졌다고 하더라도 광운대 강연 동영상으로 MB는 BBK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윤치호의 뒤에 숨는다고 하더라도 문창극의 발언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 할 수밖에 없다.

올해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 되는 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어선 동학군들이나 혹은 독립군들이 문창극의 발언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시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게으르고 자립심 부족한 우리 민족 DNA, 일본지배는 하나님의 뜻,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사과 받을 필요가 없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지명 받었어? 총리가 아니라 총독으로 착시현상 겪고 있는 거 아니야?"    

 

 

 

 

 

 

 

 

 

 

 

 

 

태어나면서 가장 많은 사과했던 그 날, 잊지 못해요

속초해변길 역사트레킹에서 있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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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초해수욕장 속초해수욕장 앞에 있는 조도. 처음에는 이런 낭만적인 여행, 낭만적인 트레킹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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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우쭐해 있었다.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지난 6월 3일, 오랜만에 필자의 기사가 <오마이뉴스> 메인(오름)에 게재됐던 것이다.  그 글을 작성한 필자의 의도가 표심으로 연결된 것 같아 무척 의기양양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서울시교육감선거에서 고승덕 후보가 물을 먹지 않았던가! (관련기사 : 스스로를 폭로한 루소, 딸이 폭로한 고승덕)

"푸하핫! 선거의 여왕이 있다는 데 난 이제부터 선거의 왕이다! 그럼 나도 정치컨설턴트나 해볼까?"

하지만 선거는 끝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필자도 다시 역사트레킹을 리딩해야 했다. 선거가 끝난 이틀 후인, 6월 6일에 강원도 속초에서 '속초해변길 역사트레킹'을 주최해야 했던 것이다. 

<집밥> 소셜다이닝 홈페이지서 속초 해변길 트레킹 모집

속초해변길 트레킹은 <집밥>이라는 소셜다이닝 홈페이지에서 모집했다. <집밥>은 홀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1인 가족이나 자취생들을 위한 모임으로, 파편화된 도시적인 삶을 극복하고, 서로 식사를 나누며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해 보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공유기업이다. 그렇다고 <집밥>이 밥만 먹는 모임은 아니다. 자전거 타기나 버스투어, 악기 연주 같이 음식과는 상관없는 모임들도 개설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필자도 <집밥>에서 속초해변길 역사트레킹 모임을 개설했다. 모임 회비로는 1만 7천원을 책정했다. 이렇게 회비를 걸어놓아야 중구난방식의 참여를 막을 수 있을뿐더러 참가자들에게 행동식도 제공할 수 있다. 6월이었지만, 30℃에 육박하는 날씨가 많았던 터라 일찍 모집완료가 되었다. 초여름, 동해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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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초해수욕장 외옹치에서 바라본 속초해수욕장. 푸른 동해바다와 황토빛 모래사장이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 눈을 즐겁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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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 정도 참가 신청했는데, 출발 전날 그 인원에 맞춰 간식을 샀다. 장시간 트레킹에 필요한 영양바, 초코바, 영양갱, 소시지, 육포, 음료수 등을 샀다. 품목이 다양해서 그랬는지 무게도 엄청나서 비닐봉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마트에서 사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그렇게 저렴하게 샀더니 머리 한 구석에서는 이런 '창조'적인 생각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 이렇게 구매를 해도 돈이 남네! 그러고 보니 다 지출해도 고속버스비, 저녁식사비, 담배값 정도가 더 남잖아. 야 이거 남는 장사네. 창조경제가 따로 없구나! 푸하핫~ 이거 완전 창조경제야! 창조경제!' 

모임의 집결지는 속초시 동명동 시외버스터미널이었다.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만나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그럼 서울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으로 전락 될 수 있기에 일부러 속초시에서 직접 만나기로 했다. 이 말은 모임의 마스터인 필자를 포함한 참가자 전부가 다 다른 고속버스로 개별적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버스로 이동을 할 때는 오직 문자나 카톡(모바일 메신저)으로만 대화가 가능할 뿐이었다. 또한 그 대화의 주관자도 리더인 필자라는 것이다. 왜? 해당 참가자들의 연락처는 모임지기인 필자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울터미널에서 강남터미널로 

6월 6일, 오전 8시.

날씨는 화창했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동서울터미널이 있는 강변역으로 향하는 전철은 한산했다. 10인분에 가까운 간식과 음료를 넣은 배낭이 무겁기는 했지만 그래도 느긋하게 전철에 앉아 갈 수 있었다.

'간만에 동해바다도 보고, 돈도 벌고... 오늘 제대로 창조경제 좀 해보자고!'

필자는 전철을 타는 내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겼다. 총 얼마나 이익을 보려나? 

오전 9시경, 동서울터미널 매표소.

"예? 표가 없다고요?"
"지금 당장 떠나는 건 없고 2시간 정도 지난 후에 출발하는 건 있어요."
"두 시간 후면...?"
"오전 11시 차에요."
"왜 이런 거에요. 왜 이렇게 빨리 매진 됐어요?"
"오늘이 연휴잖아요. 강원도 쪽은 차들이 매진된 게 많아서 증차한 노선도 있어요. 끊으실 거에요?"
".... 그거라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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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갯배 유명한 아바이마을의 갯배. 속초해변길 트레킹에서는 갯배를 타고 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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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결 시간은 오후 1시경이었다. 속초까지 거의 2시간 정도니 꾸역꾸역 가도 좀 늦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모임의 주관자가 지각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2시간 동안 터미널 대합실에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차라리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10시 이전에 차만 타면 그래도 해볼 만한 '게임'이었다.

"이거 환불해주세요."
"수수료 10%가 공제되고 환불됩니다."
"......."


터미널마다 다른가? 다른 지역터미널에서는 수수료를 받지 않던데... 그래도 수수료보다는 시간 약속이 더 중요했다. 환불을 하고 그 길로 20분 거리에 있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속초까지 가는 제일 빠른 차표 하나 주세요."
"제일 빠른 게 10시 50분차인데 괜찮으세요?"
"예? 그보다 빠른 건요?"
"다 마감됐어요."


터미널에 나타난 관광버스

그냥 동서울터미널에 있을 걸 그랬다. 외형적으로는 10분을 번 것처럼 보였으나 강남보다는 동서울터미널이 더 동쪽인데다 강원도로 진입하는 길이 더 수월하기에 결과적으로 오히려 더 시간을 잃어버린 셈이 되어버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네. 참가자들한테 집합시간을 늦춰달라고 해야겠다. 미안하지만 말야.'

참가자들은 흔쾌히 수락해 줬다. 그런데 이구동성으로 차가 많이 밀린다는 멘트를 남겼다.

'밀리면 얼마나 밀리겠어. 5일 빼면 투표일부터 8일까지 계속 연휴인데. 여행객들이 많이 분산됐겠지. 난 오늘 트레킹 리딩만 잘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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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포항 속초해변길의 종착지는 대포항이다. 대포항은 어시장이 잘 발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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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버스 출발시각이 되자 그 마음은 우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속초 예상 도착시간이 4시간 30분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플랫폼에 서 있는 버스는 정식 고속버스가 아니라 'XX관광'이라는 로고가 선명한 일반관광버스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났으면 터미널에서 일반 관광버스까지 '대절'하여 승객을 실어 나르겠나! 

서울을 빠져나가기 전부터 정체가 시작됐다. 가다 서다를 반복한 버스는 서울-춘천간 고속도로에서부터는 아예 도로에 멈춰 섰다. 그렇게 가다가는 오늘 내로 못 도착할 것만 같았다. 일이 완전 꼬이게 된 것이다. 

6일 현충일을 맞아 속초 동명항 입구에 서 있는 '수복기념탑' 앞에서 설명하려 했던 한국전쟁과 현재의 동북아 정세는 저 멀리로 사그라지는 느낌이었다. 속초해수욕장 옆에 불쑥 튀어나온 외옹치에서 설명하려 했던 무동력선을 이용한 재래식 문어잡이 방식도 역시 저 멀리로 흩어져버리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속초해변길 역사트레킹 카톡 단체 채팅방은 무기력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말들에 휩싸인 필자는 가시 방석 위에 있는 느낌이었다. 언제 그런 무기력 말들이 칼날이 되어 필자를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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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옹치항 작은 항구인 외옹치항.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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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칼날이 날라 왔다. 유독 날카로운 카톡 메시지를 날렸던 참가자가 있었는데 그 분이 결국 이런 멘트를 날렸던 것이다.

"환불해줘요!"

그 분은 왜 '교통량 예측을 하지 못했냐'는 원망의 메시지도 함께 남겼다. 필자는 죄인처럼 연거푸 사과의 멘트를 날려야 했다. 교통량을 예측하지 못한 것까지도 사과해야 했다. 모바일 상이기는 했지만 태어나서 그렇게 사과를 많이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속초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0분이었다. 무려 6시간이 넘게 걸렸던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편을 알아봐야 할 처지였다. 참가자들에게 둘러싸인 필자는 청문회에 불려나온 것처럼 진땀을 흘리며 말을 이어나가야 했다. 다행인건지 아닌지, 그 날카로운 멘트를 날린 분은 미리 서울로 올라갔다고 했다. 

그렇게 하여 속초해변길 트레킹은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도 못하고 종료가 됐다. 참가자들의 원망이 섞인 환불명세서를 받아들고... 10인 분에 가까운 행동식은 현지에서 풀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울로 가져왔다. 간식들을 먹으며 계산기를 두들겼다. 참가비를 환불하고, 은행수수료를 부담하다보니 적자였다. 내 고속버스비에 저녁식사는커녕 5만 원 이상이 마이너스가 된 것이다. 

'이걸 어쩌냐. 마이너스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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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옹치 모임이 깨진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이렇게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뒤로 보이는 곳이 외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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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십니까?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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