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유로 속세의 근심이 밀려올 때, 우리는 도피처를 찾아갑니다. 수려한 자연 속에 자신을 맡기며 잠시나마 세상 시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선들이 산다는 무릉도원에서 시름을 달래면 좋겠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그 곳을 갈 수 없으니 '대타'를 찾아야겠지요. 여기 무릉도원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세상 시름을 달래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 위치한 '수승대(搜勝臺)'라는 곳입니다.
|
▲ 수승대 수승대 거북바위. 여름 사진. |
ⓒ 곽동운 | 관련사진보기 |
# 안의삼동이라고 불렸던 수승대 계곡
수승대는 널찍한 바위와 그 옆을 흐르는 맑은 물, 푸른 숲이 어우러져 일품 풍광을 자랑합니다. 그 물의 발원지는 덕유산이랍니다. 물과 바위와 숲이라... 그렇습니다. 수승대는 계곡 한복판에 있습니다. 정확히는 거북바위를 말합니다.
원학동(猿鶴洞)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수승대는 거창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한 곳입니다. 거창을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러야 하는 곳이 바로 수승대라는 뜻이죠. 원학동 계곡은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계곡, 용추계곡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한 심진동(尋眞洞) 계곡과 더불어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고 불렸습니다. 원학동, 화림동, 심진동이 안의 지방의 3대 계곡이라는 뜻입니다.
안의는 현재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으로, 면 단위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안의현이라 불리며 함양, 거창과 함께 그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합니다.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됐고, 그래서 현재 수승대는 거창군 소속이 된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를 논할 때, 흔히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여기서 '우 함양'을 '우 안의'로 바꿔도 될 만큼 안의 지역은 풍부한 선비문화를 창달했던 곳입니다. 수승대가 안의삼동이었던 만큼 수승대도 선비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라는 건 자명한 일입니다. 그 명칭을 둘러싼 이야기부터 아주 선비적(?)이었답니다.
|
▲ 수승대 구연교. 이 다리를 이용하여 계곡 반대편, 요수정으로 넘어갈 수 있다. |
ⓒ 곽동운 | 관련사진보기 |
# 수승대의 옛 이름 '수송대'
수승대의 옛날 명칭은 수송대(愁送臺)였습니다. 한자를 풀어보면 근심 수(愁), 보낼 송(送), 돈대 대(臺)입니다. 한자에서도 보이듯 수송대라는 명칭은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 보낼 송(送)자에서 보듯 '근심을 떨쳐낸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죠.
근심을 잊으려면 잊을 망(忘)를 썼겠지요. 풍류를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이 아름다운 장소에, 왜 '근심'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명칭에 드리워져 있었을까요? 무슨 이유로?
원학동 계곡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였습니다. 백제는 나날이 쇠락해졌고, 반대로 신라는 점점 더 강성해질 무렵이었습니다. 백제 사신들은 신라 조정에 가서 수모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목숨을 잃고 영영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먼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술 한 잔 건네며 위로해 주었던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국경과 가까운 곳에 풍광이 수려한 곳이 있으니, 그 곳에서 마지막(?)을 잘 챙겨 보내주었다는 것이죠. 그곳이 바로 수송대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일대에서 백제와 신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갔다는 사실입니다. 원학동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거열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산 정상부근에는 거열성이라는 산성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말기, 거열성은 신라군에 의해 함락되기도 했고, 이후에는 백제 부흥 운동이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일대는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하지만 거북바위는 그 이후로도 약 천 년 동안 수송대라고 불리게 됩니다.
|
▲ 구연서원 거북바위 옆쪽에 있다. |
ⓒ 곽동운 | 관련사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