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내역. 작은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 있다.









정약용 선생 만나러 갑시다_ 1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서울내부트레킹, 속초해변트레킹. 솔직히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누가 그런 명칭을 지었습니까?”

 

트레킹 참여자들 중에는 간간이 이렇게 문의를 해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제가 직접 지었습니다. 코스에 담긴 내용성을 전달하려고 그런 이름을 지었어요.”

 

제 대답을 듣고 물음표를 거두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물음표를 몇 개 더 가져다 붙인 표정을 지으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그런가하면 이렇게 더 묻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럼 귀에 확 꽂히는 명칭 같은 건 없나요?”

 

당시 저는 잠시 망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답을 했지요.

 

! 이건 어떻습니까?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정확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 그래요? 귀에 확 꽂히네요. 다산 선생은 저도 좋아하는데... 그 명칭 잊어버리지 않겠는데요.”

 








* 능내역.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있는 능내역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보겠습니다. 귀에 확 꽂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을 소개하겠습니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습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됩니다. 폐역이 된 것이죠.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습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무척 차분했습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입니다.

 

 






* 마재성지. 한옥성당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입니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입니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요?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습니다. 바로 위형이었습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1791(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됩니다. 신유박해(1801)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 마재성지.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 다산생가 가는 길.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습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지요.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요? 정약용이 1순위였습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다산선생 묘.





벽파는 꼼수를 썼습니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습니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됩니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18006월이었습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습니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됩니다. 1801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되었죠.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 거중기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습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릅니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입니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 다산 선생 동상.





 

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제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마디 더 설명을 보탰습니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저는 참가자들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습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저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답니다. 그러고보면 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드네요.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죠.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답니다.


정약용역사트레킹은 그 명칭이 귀에 확 꽂힙니다. 또한 눈도 확 뜨이게 하지요. 양수리일대가 수도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에 한 곳이니까요. 그 아름다운 양수리 일대를 다산 선생을 생각하며 걸을 수 있기에 정약용역사트레킹은 더욱더 재밌는 것이겠지요.

 

 



* 마진산성. 마진산성에서 바라 본 양수리. 앞에 보이는 다리는 신 양수대교이다.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폐역)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마진산성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서소문과 서소문공원, 광희문과 신당동

 

시체가 나간 두 개의 문, 서소문과 광희문

 

15.04.14 13:52   최종 업데이트 15.04.14 16:20

 

 

 

 

 

 

 

 

 
▲ 서소문 공원 서소문 공원에 있는 순교자현양비.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조선시대 한양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무슨 문? 시체가 나가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소의문이라고 불렸던 서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남소문 역할을 했던 광희문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에서는 도성 안과 도성 인근 십리 안에는 묘를 쓰는 것을 금지했다. 도성 인근 십리 부근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했는데, 도성과 성저십리는 한성부의 관할이었다. 만약 도성 안에도 묘를 썼다면, 아마도 남산 같은 경우는 공동묘지가 됐을지 모른다. 그럼 '남산골 샌님'이 아닌 '남산골 처녀귀신'이 같은 괴담이 퍼져 나갔을까?

 

 

 

* 소덕문 터: 지금의 중앙일보 주차장 입구.

 

 

 

 



처형장으로 쓰인, 서소문

서울 시청역에서 <중앙일보> 사옥 방면으로 가다보면 철도건널목이 보인다. 그 건널목을 건너면 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서소문 공원이다. 서소문 공원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린공원 규모의 작은 공원이지만 그 역사성만큼은 대단한 곳이다.

서소문은 소덕문(昭德門) 혹은 소의문(昭義門)으로 불린 사소문 중 하나다. 1396년 태조 3년, 이 문이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이라 불렸다가 1744년(영조 20)에 문루를 세우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자리에서 좀 벗어난 곳에 서소문 공원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소문은 광희문과 함께 시체가 나가는 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광희문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처형장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서소문, 정확히는 서소문 밖이 처형장으로 쓰였는데 이는 유교 오경 중 <예기>에 언급된 가르침을 적용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예기>에는 '형장은 사직단의 우측이어야 한다'고 적어 놓았는데 서소문 밖이 그 말에 일치되어 조선의 공식 처형장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 서소문 공원 입구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유교 경전식 해석 말고 다른 해석도 있다. 서소문에서 의금부나 전옥서(죄수를 관장하는 관서) 등이 가까운 터라 서소문이 처형장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사직단이나 서소문이나 둘 다 거의 동일선상에 있는 터라 후자의 의견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게 서소문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이 이승훈, 최창현 등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때 정약종의 첫째 아들 정철상도 함께 목숨을 잃게 된다.

기해박해(1839년) 때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서소문에서 처형을 당하게 됐다.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정하상과 딸인 정정혜가 이때 참수를 당했다. 처형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정약종의 아내이자 하상, 정혜의 어머니인 유소사도 기해박해 때 목숨을 잃게 됐다.

서소문에서는 신유박해 때부터 병인박해까지 1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을 당한다. 그래서 서소문은 천주교 최고의 성지 중에 한 곳이다. 그래서 현재 서소문 공원에는 순교자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서소문 공원을 방문했다. 

 

 

 



 
▲ 서소문 공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기념하여 동판을 새겨 놓았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서소문을 둘러싼 갈등들

현재 서소문 공원 일대는 '역사공원'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지하에 성당을 만들고, 천주교 순교 성인을 위한 기념전시관을 만드는 데 약 500억 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 '천주교 성역화' 사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서소문공원 바로 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아래 범대위)>가 바로 그들이다. 범대위는 서소문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이 천주교인들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동학농민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개남,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 홍경래 난에 연루된 관련자들, 사육신인 성삼문, <홍길동전>의 허균 등이 모두 서소문에서 이승과 작별을 했다고 강조한다. 즉, 서소문 공원이 천주교만의 성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대위 측과 천주교 측의 입장이 절충될 수는 없을까? 서소문 공원에 천주교 성지 건물과 동학(천도교)을 비롯한 민족 종교의 건물이 동시에 등장할 수는 없을까? 이런 식으로 말이다. A구역은 천주교, B구역은 동학, C구역은 인물 역사관 등등...

자, 이제까지 필자는 서소문 공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서소문 자체보다는 서소문 공원에 대해서 훨씬 더 길게 설명했다. 왜? 서소문은 현재 없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철거됐다. 그래서 현재의 서소문 공원이 옛 서소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 복원된 성벽 한양 도성의 성곽 중 평지 부분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다 훼손되고 만다. 평지에 있던 서소문도 철거가 되고 만다. 사진에 복원된 성벽은 중앙일보 뒤편에 있는 것들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서소문역사공원범국민대책위원회: 현수막

 

 

 

 

 

우사단 길도 공동묘지?

도성 안에 매장을 하지 말라는 원칙은 잘 지켜진 반면, '성저십리' 원칙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래서 시체가 나가던 서소문과 광희문(光熙門) 인근에는 공동묘지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게 됐다. 서소문으로 나갔던 시체들은 지금의 아현동 부근에 묻히게 됐다. 광희문에서 나가는 시체들은 신당동이나 왕십리, 이태원 쪽으로 매장됐다. 그러고 보니 언급된 동네들은 야트막한 언덕배기로 되어 있어 공동묘지가 되기에 안성맞춤(?)인 곳들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지금 한창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는 이태원 우사단길도 예전에는 공동묘지가 아니었는지?"

신당동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지금이야 신당동하면 떡볶이로 유명하지만 예전에는 무당들이 모여 산 곳으로 유명했다. 광희문 밖으로 나온 망자들을 위해, 유족들은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며 넋을 달랬다고 한다. 광희문 밖은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신당이 늘어나게 됐고, 이후 신당이 많다 하여 신당동(神堂洞)으로 불렸다. 이후 갑오개혁 때부터는 한자어가 신당동(新堂洞)으로 바뀌어 이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광희문도 서소문처럼 천주교의 성지다. 옥사를 한 천주교인들의 시신이 광희문 밖에 버려졌고 그 곳이 성지화된 것이다.

이제까지 시신들이 나갔던 두 개의 문에 대해서 알아봤다. 죽은 자들은 그 문을 통해 다시는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죽은 자들은 도성에서 '거주'할 자격이 없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서소문은 언제 복원이 될까?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소문 공원에 500억이 투입된다는데 서소문 복원이 우선이 아닐까?

 
▲ 광희문 평지에 있던 광희문도 훼손됐다, 지난 1975년에 다시 복원 됐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광희문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풍경 좋은 산, '머리 잘리는 산'이 되다 2편

서울에서 가까운 천주교 성지는? 절두산, 삼성산 그리고 마재성지


 


 

 
▲ 마재성지 마재성지 한옥성당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선생 동상. 다산 생가.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다산 정약용 생가와 함께 둘러보는 마재성지

 

 

이제는 서울을 조금 벗어나 중앙선 전철을 타고 이동해 보자. 목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 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앞서 언급한 절두산을 비롯해 새남터, 해미읍성, 황새울(충남 공주)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다수다. 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일단 정약종에 대해서 알아보자. 정약종은 정약용의 바로 윗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 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했다. 하지만 그는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 마재성지 이 곳 뒤편에 한복 입은 예수상이 있다. 이 사진에서는 가운데 부분에 작게 나타나 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안타깝게도 형제들조차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 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교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다.

마재성지에 있는 한옥 성당은 가톨릭과 한옥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옥 성당 옆으로 산책을 할 수 있는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에는 한복을 입은 예수상이 서 있다. 한복을 입은 예수상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동상이다.

마재성지에서 다산 정약용 생가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마재성지 그리고 정약용 생가까지 연결해서 탐방할 수 있다. 마재성지와 정약용 생가 일대는 수도권 일대에서도 손꼽히는 역사트레킹 코스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이 기대되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왔던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가르침을 한국에서 어떻게 실천할까'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의 '낮은 곳'은 어디일까. 당장 십자가를 둘러메고 순례를 떠났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떠오른다. 또 단식을 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도 떠오른다.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다른 낮은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파파'의 손길을 기다릴 것이다. 당장 '젖과 꿀'이 흐르게 해주지는 않을지라도 그가 내미는 손길을 따뜻하게 받고자 하는 사람이 아주 많을 것이다.

 


 

수도권 천주교 성지, 어떻게 가나요?

 

1. 절두산 성지 : 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에서 하차. 합정역에서 절두산까지는 도보로 약 10분 정도 소요됨. 절두산 성지 탐방 후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 탐방을 해보는 것도 좋음.

2.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지는 관악산둘레길 2코스를 통해 탐방하는 방법이 좋음. 관악산둘레길은 서울대입구에서 시작됨. 산길을 약 1시간 30분 정도 이동을 하면 삼성산 성지에 도착할 수 있음. 서울대입구까지는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함.

3. 마재성지 : 마재성지는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전철을 이용함. 중앙선 팔당역에서 하차하여 능내 1리행 버스에 탑승. 능내 1리가 능내역임.

 

 

 

 

 

 

 

 

 

 

 

 

 

 

 

세월호 참사, 위로받고 싶어서 걸었다 ___1편

 

식구들과 함께 한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14.05.02 19:00l최종 업데이트 14.05.02 19:01
 

 

 

 

 

 

기사 관련 사진
▲ 능내역 2008년 복선화된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능내역은 폐역사가 됐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듯 능내역은 많은 나들이객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공간으로 재탄생(?) 하였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지난 4월 26일 토요일.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을 행하는 길. 마음은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발걸음에 미안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수 백 명의 꽃다운 생명들이 차디찬 물 속에서 삶을 마감했는데 팔자 좋게 트레킹이라니! 또 그 내용을 기사화해서 <오마이뉴스>에 송고를 하다니! 그런 무거운 자책들이 필자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다산 선생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비판의 화살이 날아올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이번 트레킹을 강행하였다. 그것도 홀로 행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끌어 모아 함께 트레킹을 했다.

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받은 충격을 어떤 식으로든 누그러뜨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위로의 손길을 같이 받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손길에 의탁했는가? 누구에게 그런 마음의 짐을 풀어 놓았는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다산 선생에게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다산 선생의 손을 붙잡고, 치유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기사 관련 사진
▲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의 생가다. 대개 천주교 성지는 순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절두산, 새남터, 황새울 등등... 하지만 이 곳은 독특하게도 한 인물의 생가가 성역화 됐다. 그만큼 우리 천주교에서 정약종의 업적과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이번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한 사람은 총 7명이었는데 소셜다이닝 사이트 <집밥>에서 만난 이들이다.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의 코스는 다음과 같다.

팔당역 ▲(시내버스 이동) ▲능내역(폐역) ▲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운길산역

2008년 중앙선 복선화로 인하여 폐역이 된 능내역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우리는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데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윗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기사 관련 사진
▲ 마재성지 마재성지에 있는 예수상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묵념을 하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이 예수상은 특이하게도 한복을 입은 상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안타깝게도 형제들조차도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다.

그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뒤로 하고, 역사트레킹 팀은 마재성지에 있는 '한복 입은 예수상' 앞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묵념을 올렸다. 참가자 중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분도 있었고, 무신론자도 있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종교를 뛰어 넘어 경건의 시간을 함께했다. 필자도 나지막이 묵념을 올렸다.

'희생자들 모두 좋은 곳으로 가시길, 그리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말길. 나도 당할 수 있는 이런 참사가 다시는 이 땅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역사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 생가(여유당)에 연꽃 공원까지, 이들 지역이 도보로 20분 이내의 거리에 묶여 있다. 이런 명소들이 집중적으로 밀집해 있으니, 앞서 언급한대로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찾는 것이다.


 

 

기사 관련 사진
▲ 정약용 동상 정약용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 이날은 햇살이 강해서 그랬는지, 참가자들은 선글라스나 창모자 등으로 햇살을 가렸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정조대왕과 정약용

매번 와도 느낌이 좋은 곳.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쉬운 곳. 다산 선생의 뜻을 되새기고 싶은 곳... 필자는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좋은 감흥을 받았고, 그런 감흥을 다른이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다. 결국, 그 날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썼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기사 관련 사진
▲ 연꽃 공원 팔당호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뒤편으로 보이는 곳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진 정약종 선생이 따로 떨어져 살았던 곳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능내역: 2008년 복선화된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능내역은 폐역사가 됐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듯 능내역은 많은 나들이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재탄생(?) 되었다.

 

 

 

 

 * 마재성지

 

 

 

 


즐겁게 트레킹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감정이 스며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나라 전체가 슬픔에 휩싸여 있는데 뭐가 좋다고 트레킹 행하는지...

더군다나 혼자도 아니고 여러명이서 같이했으니...


하지만 저도 무언가 멍~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여객선을 많이 타야 하는 팔자인지라

언젠가는 저도 사고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제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번 남양주 정약용 트레킹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다산 선생 앞에서 미주알 고주알, 

제 감정들을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다산 선생 앞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을 입밖으로 꺼내는 것도 가능했을 겁니다.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정약용 선생! 

다산 선생께서는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셨을까요?

독자분들의 한 번 상상해 보시죠?

 









 

 

*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의 생가다. 대개 천주교 성지는 순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절두산, 새남터, 황새울 등등...

하지만 이 곳은 독특하게도 한 인물의 생가가 성역화 됐다. 그만큼 우리 천주교에서 정약종의 업적과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 마재성지: 마재성지에 있는 예수상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묵념을 하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이 예수상은 특이하게도 한복을 입은 상이다.   

 

 

 

* 정약용 동상: 정약용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 이날은 햇살이 강해서 그랬는지, 참가자들은 선글라스나 창모자 등으로 햇살을 가렸다.

 

 

 

 

 

 

 *연꽃 공원: 팔당호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뒤편으로 있는 곳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진 정약종 선생이 따로 떨어져 살았던 곳이다.  

 

* 진둥산: 남한강 자전거 도로만 따라가면 재미가 없다. 잘 닦인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이런 비포장 도로를 걷는 것이 더 재미나다.

 

 

 

* 솔개 고개

 

 

* 연꽃공원: 연꽃 공원에 서 있는 다산 선생의 저작을 모은 조형물 

 

 

* 정약용 선생: 다시 정약용 선생에게로... 만약 다산 선생이 이번 세월호 참사를 보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아마도 호통을 치셨을 것 같다. 그것도 아주 크게 호통을 치셨을 것 같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