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모천사성당(Church of Our Lady of the Angels)과 베르나드타워(Bernard So Tower): 성당과 타워는 인접해있지만 별개의 건물이다. 타워는 감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재미난 스페인 12편> 이비아

왜 프랑스 땅에 스페인 영토가 있어?

유럽을 여행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고풍스러운 건축물도,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아니었다. 바로 국경 넘기였다.

필자에게 기존의 국경이란 절대 넘을 수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날카로운 철조망이 2단으로 쳐져 있고, 각종 감시장비가 빽빽이 운영되어 있던 곳. 긴장감, 살벌함, 매서움 등등... 이런 이미지가 뇌리에 박힐 수밖에 없었던 건, 필자가 군복무를 DMZ 부근에서 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철책선이 국경선이었고, 그 철책선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선이었다.

전날 피레네산맥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 안도라에서 1박을 했다. 공기가 좋은 곳에서 잠을 잤더니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물론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때는 어김없이 오징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지만...

이번에 탐방할 곳은 이비아(Llivia)라는 곳이다. 리비아?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니다. 영어로 읽으면 ‘리비아’가 맞지만 스페인어로는 ‘이비아’로 발음한다. 안도라는 어찌어찌해서 이름을 들어본 분들이 있을 테지만 이비아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 대다수일 것이다. 이비아도 안도라처럼 피레네산맥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두 도시는 약 5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래서 두 지역을 묶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 이비아: 이비아성에서 바라본 모습. 하단 중앙에 천사성모 성당이 보인다.

 

 

 

그런데 그 낯선 이비아에는 뭐하러 갔는가? 이비아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갔다. ​이비아는 프랑스 영토 안에 있는 스페인 땅이다. 혹시 칼리닌그라드라는 지명을 들어보셨는가? 칼리닌그라드는 폴란드 동북쪽 국경과 면해 있는 곳으로 러시아의 고립 영토다. 바닷길을 제외하고, 칼리닌그라드에서 러시아 본토로 가려면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가야 한다.

이렇듯 다른 나라에 둘러싸여서 본토와 외떨어진 영토를 고립 영토라고 부른다. 스페인에 둘러싸여 있는 영국령 지브롤터도 대표적인 고립 영토다. 또한 북아프리카 모로코 영토에 둘러싸인 세우타와 멜리야도 스페인의 고립 영토다.

그래도 칼리닌그라드와 지브롤터는 바다와 면해 있어 바닷길로 본토에 닿을 수 있다. 세우타와 멜리야도 마찬가지로 여객선을 타면 스페인 본토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비아는 무조건 프랑스 땅 2km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 이게 참 재밌는 게 어쨌든 국경을 넘는 거라 스마트폰 통신사가 달라진다.

사실 이비아는 필자 같은 뚜벅이 여행자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래서 일부러 여행 초기에 배치해서 찾아갔다. ​먼저 안도라에서 스페인의 라세우두르젤(La Seu d'Urgell)로 갔고, 다시 프이그세르다(Puigcerdà)라는 도시로 이동했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필자도 두 도시의 이름을 발음하기가 버겁다. 차라리 ‘안도라’는 세글자로 떨어져서 발음하기가 편하기라도 하지... 이렇게 유명하지 않은 외국 답사지를 각인시키기가 쉽지 않다. 이런 어려움은 이 책을 쓰는 내내 필자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 천사성모성당: 중심거리에서 바라본 성당의 종탑

 

 

 

긴장을 풀고 찬찬히 살펴보자. 라세우두르젤은 안도라 편에서 언급이 됐었다. 안도라는 입헌공동군주제라는 독특한 형태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 대통령과 스페인의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그 공동군주들이다. 그 우르헬 교구가 있는 도시가 바로 라세우두르젤이다. 프이그세르다는 프랑스 국경과 맞닿아 있는데 이비아로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제격인 곳이다.

안도라 -> 라세우두르젤 -> 프이그세르다 -> 프랑스영토(유흐 / 부흑-마담므) -> 이비아

복잡해 보이지만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다. 총 이동 거리는 약 70km 정도이다. 스페인 영토인 프이그세르다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프랑스땅을 넘어 이비아로 갔다. 갈아탄 버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마을버스만한 크기였다. 그래도 나름 국경을 넘는 버스인데 아주 소박하고 정감 있어 보였다. 프이그세르다에서 이비아까지 프랑스 영토내에서 직선으로 도로가 연결되는데 그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동네가 부흑-마담므(Bourg-Madame)이고, 서쪽에 있는 동네가 유흐(Ur)이다.

이비아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세르다냐(Cerdaña)라는 지역을 알아야 한다. 스페인에 속한 이비아와 프이그세르다는 물론 프랑스령인 유흐와 부흑-마담므도 세르다냐에 속하기 때문이다. 세르다냐는 전체면적이 1,086㎢로 인천광역시(1,067㎢) 정도의 크기다. 지금은 남북이 갈려 있는데 남쪽은 스페인 영토로 바이샤 세르다냐(Baixa cerdanya)로 북쪽은 프랑스 영토로 알타 세르다냐(Alta cerdanya)로 불린다. 그 프랑스 세르다냐 지역 속에 스페인의 이비아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종교전쟁이라고 불렸던, 30년 전쟁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됐음에도 스페인과 프랑스는 계속 전쟁을 이어갔다. 그러다 1659년, 피레네조약에 의해서 종전을 하게 됐는데 이때 스페인은 세르다냐 북부지역을 프랑스에 넘겨주게 된다. 협정을 통해 프랑스는 북쪽 세르다냐의 33개 마을을 획득하게 됐다. 하지만 이비아는 제외되는데 스페인측에서 이비아가 ‘마을(village)’이 아닌 ‘도시(town)’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 이비아성: 많은 부분이 폐허로 남아 있다.

 

 

 

피레네조약을 통해 프랑스가 얻은 영토를 생각해보면 이비아는 작은 규모였다. 챙긴 전리품이 두둑한데 굳이 타운 하나 때문에 전쟁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이비아는 스페인영토로 남게 됐다.

이비아는 부메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 12.9㎢ 정도로 서울의 금천구(13㎢)와 비슷한 규모다. 인구는 2023년 기준으로 약 1,500명 정도에 달한다. 행정구역은 카탈루냐 지역, 지로나 주에 속한다.

사실 이비아는 로마시대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된 곳이었다. 이름도 이곳에 주둔했던 로마의 장군인 율리아 리비카(Julia Lybica)에서 따온 것이다. 이비아는 한때 세르다냐의 도읍지 역할을 했다.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중심가를 지나니 언덕을 향해 자리잡은 천사성모 성당이 보였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완성됐는데 도시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채가 당당했다. 성당의 입구에는 베르나드타워라는 탑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탑이 있어 성당의 외형이 더 다채로워 보였다.

이비아 탐방의 정점인 이비아성(castell de Llivia)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비아성은 상당 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상부에 올라서니 주위 풍광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었다. 로마시대부터 오랫동안 왜 이곳이 요충지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 이비아: 평원을 피레네의 고봉들이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분명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일대는 큰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피레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널찍한 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피레네의 고봉들이 평원을 숨겨놓고 있는 형상이었다. 평원과 고봉들을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꽤나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런 굉장한 풍광들이 이슬비와 함께 눈 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약간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DMZ에서 보초를 설 때였다. 어둠이 거치고 여명이 밝아올 무렵, 철책선 건너편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소총에 힘을 꽉 쥐고, 초소를 나와 철책선 너머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침투조인가? 아니었다. 멧돼지들이었다. 한 마리가 아니라 가족단위였다. 먹이를 찾아 철조망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중에는 고라니들도 보였다. 말 그대로 DMZ은 야생동물들의 천국이었다. 야생동물들은 자유롭게 DMZ 일대를 누비는데 왜 인간들은 날카로운 철책선으로 금을 그어 서로를 분리시키는가?

국경 같지도 않은 국경을 마을버스로 넘으며 필자의 20대 시절을 되돌아봤다. 프랑스에 있는 스페인 고립영토 이비아에서.

 

 

*이비아 지도

 

 

 

 

 

 

 

* 안도라베야: 안도라의 수도 안도라베야

 

 

 

 

 

<재미난 스페인 11편> 입헌공동군주제? 그런 말도 있어?

피레네의 작은나라 안도라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 내렸다. 그간 마드리드 국제공항은 많이 이용했지만 바르셀로나 공항은 처음이었다. 서울도 그렇지만 바르셀로나의 여름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무슨 6월 초순의 날씨가 이렇게 강렬한가! 이제껏 스페인, 포르투갈은 가을이나 겨울 시즌에만 와서 그랬는지 이베리아반도의 여름 맛(?)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뙤약볕이었다!

이후 바르셀로나 중앙역 옆쪽에 있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안도라(Andorra)로 이동했다. 총 비행시간이 16시간을 넘다 보니 버스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확실히 비행기보다는 버스가 잠자기에 딱이었다. 덕분에 시차 적응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피레네산맥에 있는 작은 나라다. 서울의 면적이 605㎢이고, 안도라가 468㎢이니 서울보다도 더 작은 곳이다. 인구는 2021년 기준으로 약 8만 명 정도에 달한다. 안도라의 공식 명칭은 안도라공국(Principality of Andorra)이다. 거칠게 말해 공작이 최고 수반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공작은 새가 아니라 백작, 공작할 때 그 공작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안도라인가? 안도라와 스페인이 무슨 관계가 있나? 안도라는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과 크게 연관을 맺고 있는 곳이다. 공용어로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고, 심지어 카탈루냐 지방에 속한 우르헬이라는 도시의 주교가 안도라의 공동 수반으로 봉직하고 있을 정도다.

 

 

 

*성 에스테베 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2세기에 지어졌다. 물론 그 이후로도 여러번 개축을 했다. 안도라베야에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한편 이 책의 제목이 <재밌는 스페인>이지만, 굳이 그 내용을 스페인으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페인, 포르투갈은 물론 영국령 지브롤터와 피레네산맥의 안도라까지... 이베리아반도 내에 있는 주권국가들이 모두 논의 대상 안에 포함된다.

​스페인에서 안도라로 입국(?)하려면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안도라가 솅겐 조약에 미가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문소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스페인에서 프랑스, 반대로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차들이 많았다. 졸다가 깨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창 밖으로 피레네산맥의 산들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구례 읍내에서 공영버스를 타고 올라갔던 지리산 성삼재가 연상됐다. 피레네도 산 넘어 산, 지리산도 산 넘어 산... 다를 거 없이 참 좋구나!

약 4시간 만에 안도라베야(Andorra la Vella)에 도착했다. 다른 작은 나라들은 도시 국가 형태인 경우가 많지만 안도라는 안도라베야라는 수도가 따로 있다. 수도답게(?) 안도라베야에는 이 나라 인구의 ¼인, 약 2만 명이 거주한다.

피레네의 험준함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척박함을 이겨낸 듯이 보였다. 절벽 위에다 집을 짓고 마을을 지은 것이다. 안도라 사람들은 지반 공사하기도 어려운 땅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거주 기반이 스위스와 비슷해 보였다. 하긴 안도라베야는 해발 약 1,023미터에 위치해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다.

 

 

 

*성 에스테베 성당: 왼쪽 건물이 성당이다. 오른쪽 건물은 리모델링 중인데 공사 가림막이 주위와 어울리게 만들어져 착시 효과를 내고 있다. 사진에서도 보이듯 뒤쪽에 있는 산은 민둥산이다. 안도라베야 일대의 몇몇 산들은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라는 두 개의 큰 나라에 끼어있는 작은 나라다. 그래서인지 입헌공동군주제라는 아주 독특한 방식의 정치 체제로 운영된다. 입헌군주제는 알겠는데 입헌공동군주제라니! 안도라는 프랑스 대통령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인,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공동으로 최고 권력 수반을 이루고 있다.

안도라의 건국이 13세기였으니, 중세 시기에 프랑스 측에서는 왕이 대표자였고, 현재는 대통령이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스페인 측에서는 계속해서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대표자였다. 이를 두고 입헌공동군주제라고 부른다. 물론 안도라에는 현재 총리가 실질적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스페인의 주교는 논외로 치고, 프랑스의 왕이 어떻게 공국의 수반이 될 수 있을까? 겸임하면 가능하다. 왕(king)이 공작(duke)도 겸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왕이라고 불린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국왕이자 안도라의 공작이 된다. 중세 시기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배경지로 유명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공국이 있었다. 바이킹이라고 불렸던 북유럽인들이 세운 노르망디 공국이었다. 그런데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은 영국에서는 국왕이었다. 정리하면 노르망디 공국의 수장은 프랑스에서는 공작, 영국에서는 왕이었던 것이다.

안도라는 1993년까지 헌법도 없었다. 규모가 작고, 인구도 적어서 헌법 없이도 통치가 가능했으리라. 1993년까지는 공동군주제였고, 이후로는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공동군주제라는 현재와 같은 정치 체제로 발돋움 한 것이다. 그해에 UN에 가입하기도 했다.

 

 

 

* 입헌공동군주제: 입헌공동군주제를 표현한 청동판. 의회 건물로 쓰였던 카사 데 라 발(Casa de la Vall)의 한켠에 서 있다.

 

 

 

안도라의 기원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샤를마뉴 대제는 이슬람 무어인들의 북상을 막기 위해 피레네산맥 일대에 에스파냐 변경령을 설치한다. 에스파냐 변경령은 프랑스 남부 지역을 방어하는 마지노선 역할을 했다.

다수의 변경령이 설치가 됐는데 우르헬 백작령도 그중 하나였다. 우르헬 백작이었던 보렐 2세는 안도라의 통치권을 우르헬 교구로 넘겼다. 우르헬 교구는 말 그대로 가톨릭의 일개 교구일 뿐이었다. 실질적으로 지역의 방위를 할 수 있는 물리력이 필요했다. 이에 우르헬 교구는 통치권의 일부를 유력 가문에게 넘기게 됐고, 그 통치권은 돌고 돌아 결국에는 프랑스 남부의 푸아 백작이 행사하게 됐다. 1278년, 푸아 백작과 우르헬 주교는 합의에 의해 안도라의 공동통치자로 나서게 된다.

스페인 측은 가톨릭 교구이기에 그 주체가 변함이 없었지만, 프랑스 측은 세속 정치에 엮여있기에 부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격변기에는 프랑스 측 공작이 공석이 되기도 했다. 또한 대혁명과 파리코뮌 같은 엄청난 대격변을 겪으며 봉건제를 폐지 시킨 프랑스인데, 정작 안도라에서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공작이 되는 특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정치 체제가 800년도 넘게 이어질 수 있었을까?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더군다나 피레네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안도라 사람들의 절박함이 그런 독특한 정치 체제를 만들고, 유지시킨 것이 아닐까?

 

* 안도라: 스페인과 프랑스에 끼어있는 안도라의 모습을 빗댄 것 같은 표지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안도라공국이라는 명칭 때문에 살짝 중세풍의 도심 풍경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안도라는 현대적인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옛 건물들도 있었지만.

안도라는 쇼핑과 레저·스포츠산업이 발달했다. 거의 모든 품목이 무관세라서 쇼핑의 천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지대에 있고, 눈도 많이 내리다 보니 스키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카지노로도 유명한 곳이다.

상류라서 그런지 강물이 엄청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발리라 오리엔트(valira d'orient)라고 불리는 강이었는데 그냥 계곡 같아 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유속이 빠른 도심지 강물은 처음 봤는데 물소리가 아주 시원했다.

그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예전에 천왕봉을 다녀온 후 거닐었던 지리산 대원사 계곡이 떠올랐다. 전날 비가 와서 그랬는지 그때 대원사 계곡은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계곡에 앉아 물소리를 들었었다. 계곡물 소리가 번뇌와 집착들을 씻어주는 듯했다. 그날의 지리산 대원사 계곡물 소리처럼 우렁찬 피레네 강물 소리에 귀가 다 시원해졌다. 시차에서 오는 피로감이 싹 다 날아가는 듯했다.

피레네 강물 소리에 번뇌와 집착이 씻겨 내려갔던 것일까? 그날은 아주 잘 잤다. 바르셀로나처럼 덥지도 않았다. 역시 피레네산맥!

 

 

 

* 피레네의 강물: 우렁찬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번뇌와 집착들이 싹 다 씻겨나가는 듯했다.

 

 

 

 

* 안도라: 시각적 효과를 위해 원래 크기보다 더 크게 표기했다.

 

 

 

 

 

*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아르굴산에서 바라본 시내와 콘차해변

 

 

<재미난 스페인 7편>

5억 명이 스페인어를 쓰고 있는데, 스페인어가 없다고?

명색히 필자가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그래서인지 숲길트레킹을 무척 좋아한다. 겸사겸사 나무에 대한 지식을 넓히겠다고 숲학교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참나무는 없습니다. 딱 이게 참나무라고 찍어서 부를 수 있는 나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 전날에 참나무 장작으로 구운 삼겹살을 먹었는데... 그 말대로 하면 난 존재하지도 않는 나무로 고기를 구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참나무라는 종은 없다. 참나무는 특정되는 나무가 아닌 참나무 종류를 모두 아우르는 통칭이다. 그룹을 연상하시면 좋을 듯싶다. 그룹명은 참나무이고, 보컬 갈참나무, 기타 굴참나무, 베이스 상수리나무, 드럼 졸참나무, 키보드 신갈나무, 퍼커션 떡갈나무... 여기서 언급된 여섯 나무를은 이른바 참나무 육형제라고 불린다. 그게 그 나무인 거 같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기가 쉽지가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였다. 스페인어가 배우고 싶어서 회화책도 사고, 동영상도 찾아보았다.

"세상에 스페인어는 없습니다. 애초에 스페인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참나무 때처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동영상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현재 스페인어는 전세계 인구 중 약 5억명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다. 영어를 뛰어넘어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스페인 본국을 필두로 스페인의 옛 식민지였던 중남미 국가와 아프리카 적도에 있는 적도 기니 등 20개국이 사용을 한다. 참고로 적도 기니(Equatorial Guinea)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1968년에 독립을 한다. 프랑스 식민지였다 1958년에 독립한 기니(Guinea)와는 구별되는 나라다.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 주권국 중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어는 미국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히스패닉'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실텐데 히스패닉은 미국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주로 중남미 출신자들인데 그 수가 약 5천 만명이 넘는다. 그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스페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마당에 스페인어가 없다고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바스크 이름인 도노스티아와 카스티야어인 산세바스티안이 병기됐다. 그나저나 맨홀 뚜껑이 사각형이다.

 

 

서기 711년, 북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였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무어인들의 무력 앞에 몰락하고 만다. 이후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이 1492년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무려 800년이란 시간이 소요된다. 그 오랜기간 동안 이베리아반도 내에서는 여러 왕국들이 등장한다. 그 왕국들이 자리잡은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있는 언어가 분화,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등장한 언어는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 등이다.

1479년, 이베리아반도 중앙에 위치한 카스티야왕국과 지금의 카탈루냐 지역에 위치한 아라곤왕국이 합쳐져 카스티야-아라곤 공동왕국이 형성된다. 이후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국토회복운동은 종료가 된다. 그해 콜롬버스는 신대륙을 찾아 돛을 올렸다.

스페인이 지금과 같이 통일된 형태를 갖춘 시기는 카를로스 1세(Carlos Ⅰ)가 즉위한 1516년 이후이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겸했는데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칼 5세(Karl Ⅴ)로 불렸다.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은 그 유명한 펠리페 2세다.

카스티야왕국의 주도로 통일된 스페인왕국이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언어도 카스티야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스페인이 어떤 나라인가? 그 어떤 유럽 국가들보다도 지역색이 강한 나라가 아니던가? 카스티야로 대변되는 중앙권력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크게 4대 언어 권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권역은 민족적인 분포와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카스티야어: 약 74%

카탈루냐어: 12%

갈리시아어: 8%

바스크어: 1%

기타

지금은 중심어이지만 카스티야어도 예전에는 북부 지방의 방언 중 하나였다. 이후 12세기 경, 스페인의 중북부 지역에 카스티야-레온왕국이 들어서게 됐는데 그때 궁중언어로 사용됐다. 15세기 후반 카스티야왕국은 이후 아라곤왕국과 병합했고, 카스티야어는 명실상부한 스페인의 가장 중심이되는 언어로 자리매김한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카탈란어라고도 불리는 카탈루냐어는 동북쪽에 위치한 카탈루냐,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사용되고 있다. 동북쪽의 중심 도시는 그 유명한 바르셀로나이다. 발렌시아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3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지중해에 있는 섬들인데 중심도시는 팔마이다. 발렌시아에서 약 280km 정도 떨어져 있다.

카탈루냐(Cataluña)는 프랑스와 근접해있어서 그런지 역사적으로 공유되는 점들이 꽤 많다. 언어도 그렇다. 카탈루냐어는 남부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프로방스어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카탈루냐어를 배운 이들 중에는 카탈루냐어가 카스티야어와 프랑스어를 섞어찌개를 한거 같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한다. 한편 위에 언급된 지역들 이외에도 피레네산맥에 있는 작은 나라 안도라도 카탈루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가예고(gallego)라고 불리는 갈리시아어는 이베리아반도 서북쪽에 위치한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갈리시아는 포르투갈의 바로 위쪽에 위치해있는데 포르투갈의 건국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포르투갈이 갈리시아 백작령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갈리시아어는 포르투갈어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에우스카라(euskara)라고 불리는 바스크어는 바스크(Basque) 지방에서 사용된다. 바스크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있는 피레네 산맥 서쪽에 위치하는데 스페인은 물론 프랑스에도 바스크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유럽 지역은 보통 라틴어의 영향을 받아 로망스어군을 이룬다.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들 모두 로망스어군이다.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도 로망스어군에 속한다. 하지만 바스크어는 로망스어군이 아닌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로망스어군이 사방으로 둘러쌓여 있지만 자신만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언어학상으로는 고립어라고 부른다.

바스크인들은 그들이 즐겨 쓰는 독특한 외형의 바스크베레모처럼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자부심의 토대를 이루는 것 중 하나가 바스크어이이다.

 

 

 

* 바르셀로나 지하철역: 카탈루냐광장역(plaça de catalunya). c자가 아닌 ç자다. 아래에 작은 갈고리가 달렸는데 이걸 두고 '세디유'라고 부른다. 발음이 〔프라카〕가 아닌 〔프라사〕가 된다.

 

 

 

여기서 각 언어를 비교해보자.

영어: hello / 카스티야어 hola / 카탈로냐어 hola / 갈리시아어 ola / 바스크어 kaixo

영어: plaza / 카스티야어 plaza / 카탈로냐어 plaÇa / 갈리시아 cadrado / 바스크 plaza

영어: see you later / 카스티야어 hasta luego / 카탈로냐어 fins després / 갈리시아어 vémonos despois / 바스크어 gero arte

영어: please / 카스티야어 por favor / 카탈로냐어 si us plau / 갈리시아어 por favor / 바스크어 mesedez

영어: how much? / 카스티야어 ¿Cuánto? / 카탈로냐어 quant? / 갈리시아어 canto? / 바스크어 zenbat?

영어: cheers! / 카스티야어 ¡salud! / 카탈로냐어 salut! / 갈리시아어 saude! / 바스크어 topa!

영어: thank you / 카스티야어 gracias / 카탈로냐어 gracies / 갈리시아어 gracias / 바스크어 eskerrik asko

다른 언어보다도 바스크어가 확실히 두드러지게 구별된다. 한편 카스티야어에서 의문문과 감탄문을 한 번 보자. ¡salud!(건배!), ¿Cuánto?(얼마에요?). 다른 언어와 달리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느낌표와 물음표를 앞에 하나 더 써주어야 한다. 그래야 문장이 완성된다. 그나저나 건배 너무 많이 하지 말자. 돈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이런 지역 언어들은 1978년에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카스티야어와 함께 공식적인 위치를 부여받는다. 지도나 도로명 같은 공공문서에 카스티야어와 각 지역어가 동시에 기재된다. 예를 들어 바스크 지역에 있는 도노스티아(Donostia)라는 도시는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án)이라는 명칭을 동시에 기재한다. 도노스티아가 바스크어고, 산세바스티안이 카스티야 명칭이다.

앞서 참나무 육형제처럼 스페인의 지역어를 그룹으로 빗대서 생각해봤다. 리더는 카스티야어일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멤버들이 만만치가 않다. 불화설이 계속나오고, 그룹을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멤버도 있을 정도다. 리더 입장에서는 꽤 골치가 아플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내가 스페인어, 정확히는 카스티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 하나를 써본다.

¡yo soy peregrino!(나는 순례자입니다!)

종교, 철학을 떠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길에 순례자가 아니던가!

 

 

 

 

* 스페인의 지역어 분포지도

 

 

 

 

#스페인어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

#로망스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스페인여행

#스페인의지역어

 

 

 

 

 

 

 

* 몬세라트: 쪽에 보이는 건물은 성모 마리아 수도원(Abadia de Montserrat)이다.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몬세라트

 

 

 

<핫한 유럽여행 5편> 돌산의 기운이 팍팍 느껴지네! _몬세라토

2024년 6월 14일 금요일: 7일차, 맑음

전날 가우디의 생가인 레우스를 방문한 후 바르셀로나 몬주익 부근에 있는 숙소에 체크인 했다. 역시 바르셀로나는 바르셀로나다. 무슨넘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그 사람들의 대다수가 관광객들이다. 그래서인지 숙소 가격이 널뛰기를 하더라.

냄새나는 군대식 도미토리 베드 하나가 35유로를 받더라. 우리나라 돈으로 약 5만 2천원 정도다. 칸막이가 있는 벙커 베드도 아니고... 한 20유로를 예상했는데...

분노를 삼키며 몬세라트로 향했다.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6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곳으로 가려면 교외선 전철을 탄 후, 다시 산악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좀 복잡할 수 있지만 외곽노선과 산악열차를 조합해서 구매할 수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티켓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내인들이 있어 티켓 구매를 도와줬다.

몬세라트는 한국말로 직역하자면 '세라트 산'이다. 스페인도 산이 많다. 피레네 산맥, 시에라네바다 산맥 등등...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 여행의 필수 코스 같은 곳이다. 어쩌면 몬세라트는 한국 사람들한테 가장 유명한 스페인 산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한국사람들이 바르셀로나를 많이 방문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난 6년 전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 이곳을 지나쳤다. 그래서 이번 바르셀로나 탐방의 핵심을 몬세라트로 정하게 됐다.

산악열차를 타고 몬세라트역에 딱~하고 내리면, 둥그스름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얼핏보면 북한산의 인수봉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다. 물론 우리 인수봉이 더 이쁘게 생겼다~^^

몬세라트에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 있다. 깎아질듯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데 산 봉우리들과 어우러진 모습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이런 모습 때문인지 몬세라트는 가우디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옥수수 같은 몬세라트의 봉우리들이 바르셀로나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에 구현된 것이다.

전망대에서 왼쪽을 바라보니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시설물이 있고 그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국기봉인가? 아니다. 십자가 탑이었다. 그 위로도 계속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임도 같은 길이었는데 약 30분은 더 올라가야 했다. 거기가 푸니풀라 종착점이 있다. 푸니쿨라는 산악열차와는 별개로 운영되는데 몬세라트의 윗부분까지 운행한다.

날씨가 화창해서 사진이 정말 잘 찍혔다. 하지만 정말 더웠다. 평소 때 같으면 걸어올라갔겠지만

이번에는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편도 약 11유로... 돈 벌레들! 푸니쿨라 타고 올라가니 더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돈값을 하는 듯했다. 올라가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빤헸다.

이렇게 멋진 곳이다보니 가우디가 몬세라트에서 영감을 얻게 됐던 것이다. 나도 이곳에서 기를 받은 느낌이다. 몬세라트의 돌산의 기운이 내게 확 다가오는 듯했다! 이제 멋진 결과물만 생산하면 되는건가!

ps. 우연히 주차장 아랫쪽을 걷다가 숲길 산책로에 진입하게 됐답니다. 몬세라트에 좋은 숲길이 있더라고요. 순례길하고도 연결되기도 하고요. 하여간 돌산의 기운도 받고 숲길도 알게 되서 참 좋았습니다.

 

 

 

* 몬세라트: 중앙에 산악열차 궤도가 보인다.

 

 

 

* 산 미구엘 철십자가 전망대(Creu de Sant Miquel): 또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 몬세라트: 이렇게 천하의 절경이니 가우디가 좋아할 수밖에!

 

 

 

 

#몬세라트

#몬세라트수도원

#스페인여행

#바르셀로나근교여행

#재미난스페인

 

 

 

* 가우디: 가우디의 작업실을 복제했다. 가우디 기념관.

 

 

 

<핫한 유럽여행 4편> 어라? 가우디 생가가 이것밖에 안 돼? _레우스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프림장군 기마상(Estatua del General Prim): 프림 광장에 있다. 프림장군은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진보적 군인으로 평가받는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을 지지했으며, 크림 전쟁에서도 활동을 했다.

 

 

2024년 6월 13일 목요일: 6일차, 맑음

건축가 가우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건축에 문외한이라도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미학을 건축에 담은 건축가 가우디!

그런 가우디의 고향을 다녀왔다. 언뜻 가우디의 고향이 바르셀로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생가는 레우스(Reus)라는 곳에 있다. 레우스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져있는데 수도교가 있는 타라고나의 바로 옆동네다. 그래서 레우스와 타라고나, 두 도시는 시내버스값 정도로 오갈 수 있다.

레우스 기차역에서 내려 대성당 방향으로 이동했다. 중심지역인 메르카달광장(Plaça del Mercadal)에 다다르니 카사나바스라는 무척 인상적인 건물이 눈에 띈다. 그래 가우디의 생가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하지만 카사나바스는 가우디의 생가가 아니란다. 조금 뒤편에 박물관과 안내소(Gaudí Museum & Tourist Office)가 있기에 가서 또 물어봤다. 여기가 가우디 생가인가요?

또 아니란다. 그럼 도대체 가우디 생가는 어디란 말인가? 안내소에 문의하니 생가가 표시된 지도 한 장을 주었다. 그러면서 가봐야 별거 없다는... 말을 했다. 가보니 진짜 별거 없었다. 초라했다. 현재 개인 소유의 집으로 그냥 입간판만 세워져 있던 것이다. 입간판도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서울 인왕산 수성동계곡 아래에 가면,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이 있다. 그런데 그곳도 그냥 입간판만 붙어 있다. 개인 소유의 다세대 주택이라 당연히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윤동주 하숙집이 외관상으로는 더 나아보일 정도로 가우디 생가는 방치되어 있었다.

가우디 생가라는 명칭의 끌림이 아쉬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레우스에 온 김에 발자취를 남겨야할 거 같아 가우디 박물관을 방문했다. 11유로(약 1만7천원)를 주고 티켓팅을 했다. 오디오 가이드가 포함됐는데... 한국어는 없고 영어로 된 걸 제공받았다. 그 영어로 된 걸 다 알아...들었냐?ㅋ

전시는 좋았다. 전체적으로 가우디의 건축철학을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하지만 입장료가 다소 비싼 느낌이었다. 빨리 보면 10분 안에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공간 자체가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곳이 있었다. 가우디의 작업실을 복제해서 만든 코너였다. 작업실 한켠에 때묻은 침대도 놓여있었다. 참 소박하고 검소한 공간이었다. 작고 소박한 공간에서도 대작이 나왔던 것이다.

내 작업공간도 작은 밥상인데 대작이 나올 수 있는 거야?ㅋ

ps. 사그리다 파밀리아가 2026년에 완공된다는데... 스페인넘들을 믿으십니까?ㅋ

 

 

 

* 카사나바스: 1908년에 완공된 건물로 실내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현란한 기둥으로 장식된 클러스터가 인상적인 건물이다. 가우디가 설계한 것은 아니다. 루이스 도메네츠라는 건축가가 설계했다.

 

 

 

* 레우스 대성당

 

 

 

* 메르카달광장: 왼쪽 사각형 건물이 가우디 기념관이다.

 

 

 

* 가우디 생가: 오른쪽 갈색문이 출입문이다. 개인 소유 건물이라 출입할 수가 없다.

 

 

 

 

* 타라고나 수도교

 

 

<핫한 유럽여행 3편> 숲 속에 숨어 있는 로마 수도교_ 타라고나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수도교: 수도교를 건설할 때의 상상도. 거대한 기중기를 이용하여 돌을 날랐다.

 

 

2024년 6월 12일 수요일: 5일차, 맑음

전날인 11일, 피레네 산맥에 있는 푸이그세르다에서 바로셀로나를 거쳐 타라고나(Tarragona)로 이동했다. 아직 본격적인 휴가 기간이 아님에도도 바로셀로나에는 만만한 객실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셀로나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타라고나로 바로 이동했다. 타라고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다.

바닷가에 접해 있는 타라고나는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한 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로 바르셀로나보다도 더 오래된 유서 깊은 곳이다. 옛 로마인들의 도시답게 타라고나에도 수도교가 있다. 수도교는 말 그대로 물이 흐르는 다리다. 용수 공급을 중시했던 로마는 점령지역 곳곳에 수도교를 건설했다. 그 중 하나인 타라고나 수도교를 찾아갔다.

타라고나 수도교는 페레레스 수도교가 정식 명칭인데 그 모습을 진귀하게 여긴 옛 사람들이 악마(The Ferreres Aqueduct, Pont del Diable) 수도교라고 별칭을 붙였다.

타라고나 중심가에서 수도교까지는 약 4km정도 떨어져 있다. 걸어갈만 하지만 그냥 시내버스를 탔다. 1.6유로(약 2300원). 버스 기사에게 현금박치기를 했다.

악마라는 명칭이 걸맞지 않게 수도교의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수도교는 자연공원 안에 있었던터라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세고비아 수도교하고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세고비아 수도교가 도심 구간을 걷다가 만난다면 타라고사 수도교는 숲길을 걷다가 딱~하고 만나게 된다.

타라고나 수도교는 당연히 그 기능이 정지됐다.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길은 끊어졌지만 수도교가 워낙 튼튼한터라 그 위로 물 대신 사람이 다닐 수 있게 정비해 놓았다. 2천년 전 로마인들이 만든 건축물 위를 직접 걸어보았다. 고대인들이 만든 건축물 위를 넘나드는 호사를 누리다니!

수도교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또다른 장관이었다. 이렇게 수도교를 건널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이제 타라고나 시민들은 상수도를 끌어다 마시기 때문이다.

 

 

 

* 타라고나 수도교: 물길은 끊겼지만 그 위로 사람이 보행할 수 있다.

 

 

 

 

* 타라고나 수도교: 사진에서 보듯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다.

 

 

 

수도교 탐방을 마친후 주변을 산책했다. 우리나라의 임도 같은 길이 순환형으로 되어 있어 걷기에 딱 좋았다. 그렇게 둘러보다 독특한 기념물을 만났다. 1811년의 영웅들(Monument als herois del 1811)이라는 조형탑이었다.

1811년에 나폴레옹 군대가 타라고나를 포위했는데 그 사건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조형물이었다. 숲 속에 이런 조형물이 있다는 것이 무척 진기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이 일대가 매우 중요한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수도교 탐방을 마치고 해변가에 있는 로마시대 원형경기장 일대를 둘러보았다. 지중해 옆에 로마시대 유적지라... 눈이 호강했다. 바다와 어우러진 로마 유적이라! 타라고나는 곳곳이 다 명소인 듯싶었다.

ps. 유럽의 해수욕장들은 아주 시원시원하더라고요.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는...ㅋ

 

 

 

* 1811년 영웅들 기념비(Monument als herois del 1811): 나폴레옹 군대의 타라고나 포위 공격을 막아낸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 타라고나 성벽: 로마시대 만들어진 도시성벽임. 성벽 안으로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다.

 

 

 

* 타라고나 원형경기장: 로마 원형경기장. 경기장 바로 옆이 지중해다.

 

 

 

* 타라고나 원형경기장

 

 

 

 

 

 

* 이비아 도심: 이비아성에서 바라본 모습

 

 

 

<핫한 유럽여행 2편> 왜 스페인 땅이 프랑스 영토에 있지?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성모천사성당(Church of Our Lady of the Angels)과 베르나드타워(Bernard So Tower): 성당과 타워는 인접해있지만 별개의 건물이다. 타워는 감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2024년 6월 10일 월요일: 3일차, 비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 안도라에서 1박을 했다. 피레네에서 하룻밤을 보냈더니 얼굴에 생기가...?

이날은 이비아(Llivia)라는 곳을 탐방했다. 리비아?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니다. 이비아다. 그래도 안도라는 어찌해서 들어봤을테지만 이비아는 처음 들어본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비아는 안도라에서 동쪽으로 약 5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피레네산맥 동쪽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럼 그 낯선 이비아에는 뭐하러 갔는가? 이비아의 독특한 위치 때문에 간 것이다. 가기가 쉽지 않은 곳인지를 알기에 일부러 여행 초기에 배치를 해서 찾아간 것이다.

이비아는 프랑스 영토 안에 있는 스페인 땅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바티칸을 생각해보시라! 이탈리아 로마에 바티칸이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어쨌든 스페인에서 이비아로 가려면 프랑스 땅을 약 2킬로 정도 거쳐가야 한다. 이걸 두고 고립영토라고 부른다. 이게 참 재밌는게 어쨌든 국경을 넘는거라 스마트폰 통신사도 달라지게 된다.

안도라에서 스페인의 라세우두르젤(La Seu d'Urgell), 프이그세르다(Puigcerdà)라는 도시를 거쳐 이비아에 도착했다.

안도라공국 -> 라세우두르젤(스페인) -> 프이그세르다(스페인) -> 프랑스땅 -> 이비아(스페인)

뭐 이렇게 정리를 하니 좀 복잡해보인다. 하지만 거리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약 70km 정도니까. 이비아는 부메랑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 12.9 km2 정도다. 서울의 금천구가 13km2, 동대문구가 14.2km2니 참고하시길...

이비아가 이렇게 프랑스 땅에 있는 고립 영토가 된 건 역사적 맥락들이 맞물려서 그런 것이다. 사실 이비아는 로마시대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된 곳이다. 이름도 이곳에 주둔했던 로마의 장군인 율리아 리비카(Julia Lybica)에서 따온 것이다.

프이그세르다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고 프랑스땅을 넘어 이비아로 갔다. 손님이 많이 없는건지 버스가 크지 않았다. 우리나라 마을버스만한 크기였다. 그래도 나름 국경을 넘는 버스인데 마을버스 수준이라니...ㅋ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비아 탐방의 정점인 이비아성(castell de Llivia)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비아성은 상당 부분이 파괴되어 있지만 그 정상부에 올라서면 왜 이곳이 로마시대부터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비아는 분명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일대는 큰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피레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널찍한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피레네의 고봉들이 평원을 숨겨놓고 있는 형상이었다. 평원과 고봉들을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꽤나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런 굉장한 풍광들이 이슬비와 함께 눈 앞에 펼쳐져 있으니... 뭐랄까 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다보니 이슬비가 폭우로 변했다. 매우 현실적이 됐다~ㅋ

ps. 지도에서 왼쪽은 안도라, 오른쪽은 이비아다. 둘 사이는 약 5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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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비아 타운

 

 

 

* 천사성모성당

 

 

 

* 천사성모성당

 

 

 

* 이비아성: 이비아성에서 바라본 모습. 스페인 방면이다.

 

 

 

* 이비아: 황소가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다.

 

 

 

* 이비아성: 겹성 형태를 띄고 있다.

 

 

 

 

 

 

*엔고르다니 다리 : 안도라의 수도인 안도라라베야에 있는 엔고르다니 다리(Pont d'Engordany). 발리라 오리엔트 강( valira d'orient) 위에 놓여져 있다. 보기만해도 아주 시원하다!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안도라의 수도 안도라베야: 안도라는 작은 소국이지만 도시국가는 아니다.

 

 

 

* 2024년 6월 8일 토요일: 1일차, 맑음 / 2024년 6월 9일 일요일: 2일차, 맑음

인천공항에서 UAE 아부다비행 에티하드 항공을 탔다. 유럽은 여러번 가봤는데 갈때마다 국내항공사나 핀에어 같은 유럽 현지 항공사를 이용했다. 최신형 B787 드림라이너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생각보다는 좀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예전에 대한항공에서 탔던 B787이 더 나았던 거 같다. 중동항공사여서 그런지 기내식도 나와는 안 맞았다. 그래도 그냥 주는대로 먹어야쥐~!

약 8시간 비행을 해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그런데 서울 촌놈이 비행기를 타서 그랬나? 비행중에 엄청난 두통에 시달렸다. 오죽했으면 승무원에게 두통약을 받아서 복용을 했을 정도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양 옆 좌석이 비어있었다는 것이다. 서울 촌놈 오랜만에 뱅기탔다고 티를 제대로 냈다.

이후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비행기로 환승했다. 아부다비에서 바르셀로나까지는 약 7시간 정도 소요됐는데 그때는 아주 멀쩡했다. 신나는 비행이었다. 같은 에티하드 항공 비행기인데 왜그리 차이가 났던지...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 내렸다. 그간 마드리드 국제공항은 많이 이용했지만 바르셀로나 공항은 처음이었다. 이후 바로셀로나 중앙역이라고 불리는 sant로 이동한 후 고속버스를 타고 안도라(Andorra)로 이동했다. 비행기에서 대충 15시간을 있다보니 고속버스를 타자마자 코를 골며 골아떨어졌다. 확실히 비행기보다는 고속버스가 자기에 좋은 듯하다. 덕분에 시차 적응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피레네 산맥에 소국으로, 그 면적이 서울보다도 더 작다.

안도라는 안도라공국이라고 불렸다. 공작령이라는 뜻으로 거칠게 말해 공작이 왕노릇 한다는 말이다. 공작은 새가 아니라 백작, 공작할 때 그 공작이다.

스페인에서 안도라로 입국(?)하려면 검문소를 지나야한다. 하지만 검문소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대신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넘어가는 차들이 많았다. 버스 차창 밖으로 피레네의 산들이 위엄을 드러내며 따라 오고 있었다. 드디어 안도라에 도착했다.

피레네의 험준함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안도라는 그런 척박함을 이겨낸 듯이 보였다. 절벽 위에다 집을 짓고 마을을 지은 것이다. 지반 공사 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스위스와 막상막하였다.

 

 

* 안도라: 북쪽으로는 프랑스, 남쪽으로는 스페인. 안도라의 위치를 말해준다.

 

 

* 안도라의 위치

 

 

안도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형태를 띄고 있는 곳이다. 안도라는 프랑스의 대통령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인,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공동으로 최고 권력 수반을 이루고 있다. 안도라의 건국이 12세기였으니 그때는 프랑스 왕이었고, 지금은 대통령이 그 임무를 이어받는다. 이를 두고 입헌공동군주제라고 부른다. 입헌군주제도 아니고, 입헌공동군주제라니...! 물론 안도라에는 총리가 실질적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더군다나 피레네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야했던 그들의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었을것이다.

올 초에 지중해 지브롤터를 탐방하고, 약 5개월 만에 피레네 안도라를 방문했다. 예전부터 벼르고 별렸던 버킷리스트를 올 상반기에만 두개나 지운 것이다. 오~ 속도 좋은데!

그런데 좀 아쉬웠다. 안도라공국이라는 예전의 명칭 때문에 살짝 중세풍의 도심 풍경을 기대했다. 하지만 현대적인 건물이 즐비했다. 사실 안도라는 거의 모든 품목이 무관세라서 쇼핑이 발달했다. 또한 카지노도 유명하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주는 우렁찬 목소리가 있었다. 바로 피레네에서 흘러오는 물소리였다. 지도상으로는 무슨 강이었는데... 그렇게 유속이 빠른 도심지 강물은 처음봤다. 하여간 지리산 대원사 계곡물 소리처럼 우렁찬 피레네 강물 소리에 귀가 다 시원해졌다. 시차에서 오는 피로감이 싹 다 날라가는 듯했다.

안도라는 1995년 우리나라와 정식으로 수교했다. 하지만 워낙 작은 나라이기에 독립된 외교공관이 있지 않고, 주 스페인 대사관이 공관 업무를 대행한다. 사실 안도라는 카탈루냐 지방과 많은 면에서 닮아 있었다.

고도가 높아서 그랬나? 안도라에서는 덥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역시 피레네 산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ㅋ

 

 

* 성 에스테베 성당(St. Esteve of Andorra Church): 12세기에 지어진 성당.

 

 

* 성 에스테베 성당: 왼쪽이 에스테베 성당이고, 오른쪽 건물은 외벽을 사진으로 처리했다.

 

 

* 안도라: 오리엔트강이 시원스럽게 물줄기를 뿜고 있다. 상류 부근이라서 그런지 계곡 같은 느낌이다.

 

 

 

* 안도라공국: 프랑스 왕과 스페인 우르헬 주교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그린 조각품. 입헌공동군주제를 표현한 작품이다.

 

 

 

 

* 산티아고순례길

 

 

 

<재미난 스페인 5편> 산티아고 순례길

도대체 순례길이 무엇이기에!

 

 

"왜 순례길에 한국인들이 이렇게 많죠?"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였다.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의 외곽에 있는 산티아고 공항 부근을 걷고 있었다. 미국 알래스카에서 온 미국인 순례객 부부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얻어마셨다. 나이가 지긋하신 남편분이 보온병에서 차를 따르며 저렇게 물으셨던 것이다.

답을 좀 망설였다. 솔직히 필자 스스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사람들은 여기를 왜 오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또 뭐야?

"한국은 스트레스 사회입니다. 그래서 힐링이 필요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힐링을 합니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했는데 다행히 필자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떡이셨다. 이후로도 스페인을 여러번 갔었는데 갈 때마다 순례길을 걸었고, 그런 필자를 붙잡고 외국인들은 또 비슷한 질문을 했다. 왜 순례길을 걷는 한국 사람들이 많냐고?

그들이 보기에 필자는 전형적인(?)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딱봐도 엄청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단독으로 움직이며, 외국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인사하는 모습이 여타 한국인들과는 다른 모습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답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저런 물음들 속에는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을 좀 언짢게 생각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어떤 유럽에서 온 순례자는 필자에게 '한국인들이 꺼려진다'는 말을 직접 건네기도 했었다. 도대체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엇이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인가? 왜 일부 한국인 순례자들은 그 먼 스페인 땅까지 가서 회피의 대상이 되는가?

 

 

 

* 순례길표식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 접하는 분들도 있을테니 산티아고 순례길의 연혁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산티아고 순례길은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을 말한다.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하는데 예수의 12제자 중에 한 명이었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고향으로 돌아온 야고보는 헤롯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를 당하게 됐다. 12제자 중 첫 순교자가 야고보였던 것이다. 야고보에게도 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스승의 시신을 돌로 만든 배에 실어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다. 배 자체가 돌로 만든 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이베리아반도로 온 야고보의 유해는 9세기 초반에 발견되고, 그곳에 성당이 들어서니 그 성당이 바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인 것이다.

이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3대 성지로 선포한다. 이에 유럽 각국의 순례자들이 프랑스 땅을 거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향했다. 초반 순례길이 번성했던 시기는 11~15세기였는데 당시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국토회복운동이 진행중이었다. 이베리안반도 내에 있던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이슬람 무어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다른 유럽 국가들과 인적 교류가 끊길 수 있었음에도 순례길로 인해 명맥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다 16세기에 불어닥친 종교전쟁 이후로 쇠퇴하고 만다. 약 400년간 조용했던 순례길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건 1982년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또한 5년 후인, 1987년에 출간된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라는 책이 큰 인기를 끌면서 순례길은 더욱더 주목을 받게 된다.

스페인 정국의 변화 요인도 한 몫 했을 것이다. 1975년에 독재자인 프랑코가 사망하고, 이후 스페인은 민주화 과정에 놓이게 된다. 히틀러와 협력하여 참혹했던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프랑코가 아닌가? 그런 프랑코 정권 하에서는 순례길을 걷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1980년, 일부 정치군인들이 구체제 회귀를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신속하게 진압되고 만다. 그렇게 정치적인 위험 요인들이 제거됐기에 평화롭게 순례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대성당

 

 

이렇게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았던 순례길은 1993년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파울로 코엘료가 걸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길은 프랑스길이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생장피에드포드(Saint-Jean-Pied-de-Port)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km를 걷는 길이다. 프랑스길 이외에도 북쪽길, 포르투갈길, 마드리드길 등등... 여러가지 순례길이 있는데 이들 모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종착점이다.

"한국인들은 영어를 잘 못하고,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스위스에서 온 처자가 한국인 순례객들은 왜 다른나라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냐라는 물음을 해서 저렇게 답을 해줬다. 필자도 한국인이라 한국인에 대한 변호를 자임한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이 꺼려진다는 뜻일 것이다. 당시는 겨울철이라 순례객 자체가 별로 없을 때인데도 한국인들을 콕 짚어 이야기를 한 게 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혹시 그 스위스 처자는 한국인 순례객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일부 서양인들은 한국인 순례객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진 역사와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다. 떼지어 다니고, 엄숙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떠들고... 뭐 이런 이미지로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듯하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반박을 하고 싶다.

'니들은 안 그러냐? 니들도 큰 소리로 떠들고, 엄숙하지 못하잖아. 그리고 순례길이라면서 뭘 그렇게 연애를 하고 다녀! 알베르게에서 낯뜨거운 장면들은 지들이 다 하면서...'

여기서 알베르게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를 말한다. 알베르게는 기숙사 침대같은 2층 침대가 놓여 있다. 그 좁은 침대에 남녀가 쏙 들어가 있는 경우를 꽤 여러번 봤다. 좀 낯뜨거웠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순례길: 프랑길 말고도 다른 순례길도 많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길이 가장 메인이 된다.

 

 

 

* 순례길누렁이: 순례길의 표식인 조가비를 달고 있는 누렁이. 순한 녀석이었다.

 

 

 

또 야고보가 산티아고 대성당에 잠들어 계신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일까? 야고보의 제자들이 돌로 만든 배에 시신을 실어 옮겼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나? 그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지브롤터해협을 돌배로 건넜다는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항해는 과학이자 기술이다. 그래서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라는 말까지 오가는 것이다.

썩 달갑지 않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을수도 있다는 의문이 있으면서도 또 순례길에 발걸음을 하는 이유가 있다. 걸을수록 마음의 평화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로까지 확장되는 느낌까지 받았다.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고, 화합의 악수가 건내지길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의 진정한 정신이 아닐까?

  

 

* 순례자의 그림자

 

 

 

* 순례자동상

 

 

 

* 산티아고순례길: 프랑스길

 

 

<재미난 스페인 4편> 세고비아

돌기둥이 빚어낸 절대음감!

 

 

 

 

* 수도교

 

 스페인에 대해서 잘 모를 때였다. 당연히 스페인도 방문해 본 적이 없을 때였다. 그렇게 미디어를 통해서만 스페인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필자의 눈을 확 사로잡는 장소가 있었다. 정확히는 건축물이었는데 바로 세고비아의 수도교였다. 저 수도교를 꼭 보겠다고 다짐을 했었고, 결국에는 그 수도교를 직접 친견했다. 거기에 더해 수도교 앞 숙소에서 1박을 하기도 했다.

평생 그곳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친숙한 도시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카사블랑카> 때문에 유명해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희망봉이라고 불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등등... 필자에게도 그런 도시가 있었다. 이번에 소개할 세고비아(Segovia)가 바로 그곳이다.

예전에 통기타가 하나 있었다. 지인한테 물려받은 것인데 아무리 조율해도 돌 긁어대는 소리가 났던 그런 통기타였다. 그래도 열심히 튕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유시인까지는 못되더라도 좋아하는 후배 앞에서 폼 좀 잡아볼 생각이었다. 그때 튕기던 기타가 바로 '세고비아 기타'였다. 그런 기억 때문에 세고비아는 필자에게 전혀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세고비아 기타는 유명 기타리스트인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의 이름을 따서 상품명으로 삼았다.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다른 악기용으로 작곡된 음악들을 기타 연주에 적합하게 편곡을 하는 등 현대 기타 연주의 대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안드레스 덕택에 '세고비아 기타'가 명성을 얻게 됐고, 그 상품명 덕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가 우리 귀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세고비아에 가면 안드레아와 관련된 기타 박물관 같은 것이 있는 줄 알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시 세고비아와 안드레 세고비아와는 별 관계가 없다. 그는 스페인 남부인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데뷔도 안달루시아에서 했다. 그냥 그의 이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 이름이 들어간 것뿐이다. <강철군화>의 저자 잭 런던처럼 그냥 사람 이름에 도시명이 포함된 것이다.

수도교(aqueduct)를 품고 있는 세고비아는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래서 톨레도(Toledo)와 함께 마드리드 근교 여행지로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있다.

처음 세고비아를 방문했을 때였다. 버스를 잘못타서 밤 늦게 터미널에 내렸다. 그냥 숙소를 잡으러 갈까하다가 바로 수도교로 향했다. 야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와! 정말 환상적이네!"

수많은 아치들로 이루어진 수도교의 장엄함이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 그 위용을 더하고 있었다. 미디어에서나 보던 로마시대 때의 수도교를, 그것도 조명에 휩싸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필자의 눈을 확 사로잡는 광경이었다.

 

* 수도교의 야경

그런 장면에 매혹됐는지 상상력이 피어올랐다. 수도교의 아치에 리듬을 입혀본 것이다. 기둥을 타고 오르는 선율이 아치에서 곡선을 그린 후, 위층으로 올라가 3단 고음으로 울려퍼지는 그런 모습...

세고비아에 세고비아가 없다지만 필자에게는 수도교가 '절대음감'처럼 보였다. 시각의 청각화를 통한 음악 연상하기! 딱딱한 돌기둥을 보며 리듬감을 상상한 필자의 상상력이 과한 것일까? 돌기둥같은 돌아이?

- 로마인들의 기술력이 집약된 거대한 수도교

기둥: 120개

아치: 167개

관로: 25*30*30cm

총길이: 16,220km

최고높이: 28.10m

교량구간: 728m

수도교의 스펙이다. 수도교는 로마시대인, 기원 후 1~2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인들은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는데 세고비아도 그 중 하나였다. 정착지는 세워졌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세고비아는 넓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터라 대규모로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수원지와 거리가 멀었다. 수도교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로마인들은 외곽에 있는 프리오 강(Rio Frio)에서부터 중심부까지 수로(水路)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무려 16km에 달하는 수로가 만들어졌다.

수도교는 그 수로의 교량구간이다. 즉 16km 송수관 중 728m 정도가 아치형 다리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은 왜 수도교라는 교량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냥 수로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하물며 시멘트도 없던 시대에 그런 거대한 다리 구조물을 축조한다는 건 엄청난 공사였기 때문이다.

 

* 수도교

수도교를 잘 즐길 수 있는 곳은 아소구에호(Plaza del Azoguejo) 광장인데 그곳을 중심으로 양 옆쪽을 보면 왜 로마인들이 거대한 아치형 교각을 세웠는지 알 수 있다. 양 옆의 언덕으로 인해 광장은 협곡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껏 수로를 타고 온 물이 협곡으로 떨어지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 것이다. 협곡을 넘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인위적인 구조물을 연결하여 최종목적지까지 물을 도달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양편을 이으려고 하니 거대한 구조물이 나타났고, 교량 형식이니 아치가 놓여졌다. 또한 협곡의 높이가 있으니 복층까지 올려 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고비아의 수도교가 탄생됐던 것이고, 그 가치를 높이 사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 악마가 만든 수도교?

옛날 옛적에 이 거대한 교량은 악마의 구조물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접착제도 없이 큰 돌조각들이 무지개를 그리며 놓여 있으니, 눈앞에서 보고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전설이 하나 있다.

매일같이 물 주전자를 들고 비탈진 길을 오르내려야 했던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일이 고된 나머지 소녀는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자신의 집까지 물길을 내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기에 이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소녀는 비극적인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열렬히 기도를 하게 된다.

그동안 악마는 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토네이도가 발생하여 일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새벽닭이 울게 됐는데 그때 악마는 돌조각 하나만을 세우지 못한 채 건축물을 다 완성시킨 상태였다. 돌조각 하나 때문에 거래는 무산됐지만, 수도교는 온전히 그 자리에 생성됐고 소녀의 영혼도 빼앗기지 않게 됐다.

소녀는 마법 같았던 지난밤의 일을 세고비아 시민들에게 실토하게 됐고, 이에 사람들은 아치를 통과한 물은 유황 성분이 제거된 성수라고 여기며 새로운 건축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전설에도 내포되어 있듯이 옛날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대한 수도교가 경외적인 존재였을지 모른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축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수도교가 자신들의 식수를 공급해주고 있으니, 그 존립 자체를 인간 영역 밖에서 끌어오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교를 두고 거대한 '마법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고비아 시민들은 19세기 중반까지 그 '마법덩어리'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 수로: 정수장 인근에서 찍었다. 교량 구간이 끝나면 수로가 지면과 가까이에 위치하게 된다.

- 정수장 시설까지!

세고비아는 수도교를 중심으로 그 안쪽은 구시가지이고, 그 밖은 신시가지로 분류된다. 수로의 지상 구간은 신시가지쪽에 있다. 한 10분 정도를 걷다보니 정수장과 함께 드디어 지상구간이 나왔다. 전설에 유황이 제거됐다고 언급됐듯이 정수장도 수도교와 함께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정수는 이물질을 물에 침전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정수장에는 심도가 깊은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그 물탱크에 모래나 황 같은 불순물들을 침전시키고, 깨끗한 윗물만 빠져나가는 식으로 정수시스템을 만들었던 것이다. 간단한 구조였지만 그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상 구간의 수로는 말 그대로 수로였다. 돌을 깎아내고 그 위에 25*30*30cm 규격의 홈을 파 내 관로를 삼은 것이다. 수도교의 맨 위 부분도 그렇게 관로가 놓여 있다. 고대 로마인들의 건축기술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했던 대목이었다.

지상 구간을 탐방하다 길을 잃고 말았다. 궁금했던 것들이 풀려나가는 재미에 빠져 있다 보니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덕분에 세고비아의 신시가지를 갈지(之)자로 마구마구 돌아다녔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수로가 시작되는 산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산은 구아다라마(Guadarrama)산이었는데 당시가 11월경이라서 그랬는지 산봉우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아름다운 설봉이었다.

전날에는 수도교에 상상력을 더했다면, 이날은 수도교를 더 면밀하게 탐구한 날이 됐다. 문화유적 앞에서 멋지게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 문화유산에 상상력도 더해 보고, 더 꼼꼼히 관찰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아니겠나!

 

* 구아다라마(Guadarrama)산: 구아다라마산에서 발원한 물이 수도교 위를 흘러갔다.

* 세고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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