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8년 12월 11일부터 2019년 2월 1일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및 이베리아반도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답니다. 앞으로 그 여행일지를 포스팅화 시킬 예정입니다. 여행일지를 약간의 수정 과정을 거쳐 올릴 거라 그렇게 재밌는 포스팅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큰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손글씨로 작성한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것에 불과할테니까요.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 발렌시아: platja del cabanyal 해변. 추워서 그런가? 누드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ㅋ 




*여행 44일차: 2019년 1월 23일 수요일 맑음

1. 아침에 호스텔을 나와 다른 숙소를 찾았음. 발렌시아는 바로셀로나로 넘어가기 위한 디딤돌 같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편한 숙박지가 필요했음. quart youth hostel은 시설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가격도 14유로라 저렴했지만 좀 어수선한 분위기였음.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던 풋볼 호스텔의 악몽이 몰려오는 느낌이 들어 호스텔을 바꾸기로 함. ㅋ

2. 새로 잡은 호스텔은 시설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좀 조용했고, 조식도 잘 나왔음.

3. 발렌시아는 무척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았지만 세비야나 그라나다처럼 무언가 임팩트 있는 관광 시설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발렌시아 대성당이 으리으리했고, 그곳에 성배가 보관되어 있다고 하지만 딱히 그 외에는...

4. 그래서인지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발렌시아는 매력적인 여행지로 여겨지지 않는 듯했음. 실제로 발렌시아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지 않았음. 차라리 발렌시아 여행의 백미는 중심가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platja del cabanyal이라는 해수욕장이었음.

5. platja del cabanyal은 광활한 모래사장이 인상적인 해수욕장이었음. 거의 10km가 넘을 정도로 엄청난 모래사장을 보유하고 있었음. 탁트인 지중해와 광활하게 펼쳐진 모래사장이 서로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음. 그나저나 이곳이 그 유명한 발렌시아 누드 비치?ㅋ

6. 한편 해수욕장까지는 전철과 트램을 타고 이동했다. 발렌시아 북부역과 인접한 xativa역에서 5호선을 타고 이동했는데 좀 이상한 점이있었다. xativa역은 시내중심가에 있었다. 그래서 3,5,9호선이 다니는 환승역이었다. 나는 5호선을 타고 martim-serreria역으로 이동해야했다. 그런데 난 5호선을 기다리고 있는데 3호선 전철이 들어오는게 아닌가? 다음에는 9호선 전철이 들어왔다. 

7. 이게 무슨 일인가? 발렌시아 지하철은 선로를 같이 쓰는 구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각기 다른 호선이 동일한 레일, 동일한 플랫폼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선로를 공유하면 사고가 나지 않을까? 사고는 아니었지만 출입문이 오작동하는 경미한 사고가 나긴 났었다. 

8. 지하철을 탄 후 트램을 타고 해수욕장으로 갔다. 간만에 타는 트램은 무척 재밌었다. 이제 내일이면 바로셀로나로 간다. 잘 가서 잘 여행해야지!




* 발렌시아 대성당 종탑





*여행 45일차: 2019년 1월 24일 목요일 맑음

1. 오전 10시발 바로셀로나행 버스를 타려고 호스텔에서 오전 8시 50분경에 나왔다. 숙소에서 터미널까지 거리가 있으니 부지런을 떤 것이다. 부지런을 떨면 뭐하나! 중간에 길을 잃어버렸는데...다음 버스는 12시에 있는 터라 시간이 붕 떠버렸다. 그래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2. 다행히 숙소와 기차역인 발렌시아 북부역이 가까웠다. 기차비는 약 41유로. 거기에 수수료가 붙어 약 43유로. 도둑넘들! 알아보니 버스비는 30유로가 안 넘었는데...ㅋ

3. 초고속 열차도 아니고 우리나라 새마을호와 무궁화호 중간 정도 등급의 기차였다. 시간도 10:07 출발 13;41 도착이었는데 13시 50분이 넘은 시각에 도착했던 것이다. 

4. 드디어 바로셀로나 도착! 바로셀로나 sants역 도착. 비교적 북족에 있어서 그런지 바로셀로나는 좀 추웠다. 슬쩍 감기 기운이 드는 듯했다. 어쨌든 바로셀로나에 왔고, 3일 동안 재미나게 바로셀로나를 탐방할 것임.

5. donmostache라는 도심지 인근에 있는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약 13유로 정도의 호스텔인데 조식도 나오고 시설도 썩 괜찮았다. 이 호스텔의 장점은 시내 중심가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 관광지를 걸어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6. 일단 숙소에서 나와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la)로 향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첫 인상은 대단했다. 어떻게 저런 건축물이 가능한지... 물론 아직 건설중이라 최종 결과물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7. 이걸 설계한 가우디도 대단했고, 그 설계를 실현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대단했다! 

8. 하지만 시내 한복판에 있다보니 다른 건물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 앞에 큰 광장이 있었으면 했는데 막혀있는... 좀 답답한 형상이었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 지난 2018년 12월 11일부터 2019년 2월 1일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및 이베리아반도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답니다. 앞으로 그 여행일지를 포스팅화 시킬 예정입니다. 여행일지를 약간의 수정 과정을 거쳐 올릴 거라 그렇게 재밌는 포스팅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큰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손글씨로 작성한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것에 불과할테니까요.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카르타헤나항: 카르타헤나항의 일몰. 로마시대 극장이 보인다. 






*여행 42일차: 2019년 1월 21일 월요일 맑음

1. 아침 일찍 일어나 호스텔을 빠져나왔음. 그라나다 버스터미널에서 카르타헤나(cartagena)행 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임. 오전 9시행 버스를 타야했는데 매표원은 내 앞에서 다른 업무를 보는게 아닌가! 겨우 10분 전에야 발권을 할 수 있었음. 자칫하면 차를 놓칠뻔했음. 한국 같았으면...ㅋ

2. 그라나다에서 카르타헤나까지는 버스로 약 5시간 정도 소요됐음. 그라나다에서 카르타헤나를 가려면 murcia(무르시아)라는 곳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무르시아 일대의 지형이 무척 독특했음. 무슨 황무지 같은 들판과 황량함을 드러낸 돌산들이 연이어 펼쳐졌다고나 할까? 스페인의 다른 지역과는 분명 달라보였음.

3. 얼핏 서부영화에서 봤던 그런 황무지 같은 광야가 펼쳐져있었음. 하여간 넓은 스페인 땅이 넓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그런 순간이었음.

4. 카르타헤나로 오게 된 건 순전히 예전에 봤던 세계사책 때문이었음. 카르타헤나는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도시로 포에니전쟁에도 등장하는 그런 유서 깉은 도시임. 한니발이 로마로 진격할 때 이곳을 거쳐갔던 같다고 함. 하여간 귀국하면 다시 세계사 책을 들춰봐야겠다.

5. 그런 유서 깊은 곳인데 한국인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는 곳 같았다. 아니 한국인들은 이곳을 전혀 모를지도 모른다. 검색을 해봐도 cartagena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음. 뭐 한국인들이 없어서 좋기는 한데...

6. 카르타헤나에 있는 loopinn hostels에 짐을 푼 후 시내를 활보하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었음. 로마가도였음. 구시가지 한편에 전시된 로마가도였음. 그저 일부 구간만 전시된 로마가도였지만 내가 로마가도를 직접 볼 줄이야! 이번 여행 성공했어!

7. 로마가도만 있던게 아니다. 그 뒤로는 한창 복원 중인 로마원형경기장과 또 그 뒤로는 로마극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로마가도-로마원형극장-로마극장. 로마문화재가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었다. 

8. castillo성이 있는 곳에 가면 전망대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서니 카르타헤나 시내뿐아니라 항구까지 시원하게 다 보였다. 전망대에 갔을 때는 석양이 지는 시각이었는데 낙조가 지는 카르타헤나항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9. 석양이 지는 카르타헤나항, 그 뒤로 펼쳐진 잔잔한 지중해의 모습!






* 로마가도: 로마시대 만든 도로. 얼핏봐서는 대리석인 줄 알았는데 석회암이었다. 하긴 그 비싼 대리석을...ㅋ






* 카르타헤나항







*여행 43일차: 2019년 1월 22일 화요일 맑음


1. loopinn hostels는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 난 무척 어렵게 잤다. 벙커라는 곳에 침대가 있었는데 왜그리 오르내리기가 어려운지...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르는데 다리가 좀 후들거렸다. 사다리의 경사도가 급해서...ㅋ

2. 어제 못 본 카르타헤나항 일대를 돌아보았다. 고깃배들이 없어서 그런가? 카르타헤나항 일대는 무척 평온했다. 분주히 오가는 고깃배들, 그 고깃배들에서 울려퍼지는 뱃고동 소리... 우리나라 항구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과는 분명 다른 모습들이었다. 하긴 여기는 스페인이지 대한민국이 아니지 않는가!

3. 카르타헤나항 일대를 자세히 살펴보니 왜 이곳이 고대부터 요충지 역할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야트막한 산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곳은 천혜의 요새라고 할 만 했다. 지금도 스페인 해군 함정들의 기항지로 쓰이고 있을 정도니까. 

4. 페니키아, 카르타고, 로마의 유적들... 그리도 현대의 건축물까지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이곳이 왜 한국에 잘 안 알려졌을까? 잔잔한 지중해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항구가 있는 이곳이 왜 안 알려졌냐 이 말이다. 

5. 교통이 불편해서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결정적인 한방이 없어서?

6. 나에게 카르타헤나는 생각지도 못한 보석과도 같은 존재였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방문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6. 그런 보석과도 같은 카르타헤나를 떠나 발렌시아로 향했다. 오후 4시 15분 버스, 버스비 약 21유로. 
4시간을 달린 후 이베리아 반도의 동쪽인 발렌시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까운 호스텔로 향했다. quart youth hostel. 14유로.





* 로마극장





* 로마 vs 카르타고





* 로마원형극장: 복원 공사중이다. 








☞ 지난 2018년 12월 11일부터 2019년 2월 1일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및 이베리아반도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답니다. 앞으로 그 여행일지를 포스팅화 시킬 예정입니다. 여행일지를 약간의 수정 과정을 거쳐 올릴 거라 그렇게 재밌는 포스팅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큰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손글씨로 작성한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것에 불과할테니까요.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 물의 정원: 그라나다 아함브라궁





*여행 40일차: 2019년 1월 19일 토요일 비온 후 갬

1. 사실 말라가는 거쳐가는 도시로 삼았음. 그래서 느긋하게 호스텔에서 나옴. 그냥 지중해를 보러왔다는 의미만 느끼고 가려고 했으니까.

2. 하지만 말라가는 그냥 스쳐지나가기에는 너무 큰 도시였다. 말라가를 너무 만만히 봤던 거지! 

3. 말라가 대성당에서부터 히브랄파로성(castillo de gibralfaro), mirador de gibralfaro까지. 히브랄파로성의 아기자기함과 요새 정상에서 바라보는 확트인 지중해의 모습, 확트인 말라가 시내의 모습. 요새에서는 말라가 시내 야경도 볼 수 있음.

4. 이런 명소들을 보지 않고 말라가를 스쳐 지나갔으면 정말 아쉬웠을 것이다. 입장료 5.5유로.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정도였음. 

5. 말라가에서도 좀도둑들이 극성인 듯. 어느 휴지통 근처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그 휴지통에 여자 지갑이 들어있는게 아닌가! 그렇다 소매치기가 어떤 여자의 지갑을 턴 후 현금만 빼놓고 나머지는 지갑을 휴지통에 던져 놓고 같 것이다. 

6. 티켓매표소에 안전요원이 있어 지갑을 들고 가져다줬다. 그런데 그 안전요원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여기서도 소매치기 범죄가 자주 발생해서 그런가? 

7. 오후 6시 30분, 그라나다행 알사버스를 탑승함. 티켓상에서는 1시간 45분 걸린다고 했는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2시간이 넘게 걸렸음.
 


*로마극장: 말라가 로마극장




* 말라가항구




* 말라가 시내: mirador de gibralfaro에서 바라본 말라가 시내





*여행 41일차: 2019년 1월 20일 일요일 비온 후 갬

1. 전날 묵은 호스텔에서 1박을 더 하기로 했음. 1박을 더 한다니까 어제보다 4유로 더 저렴한 11유로를 받았음. 아무래도 전날은 토요일이라 돈을 더 받았던 것 같음.

2. 그 유명한 그라나다 alhambra 궁을 보러 이동함. 아함브라 궁전은 크게 4개 영역으로 나뉨. 처음에는 찰스 5세 궁전(placio de carlos V)을 탐방함. 복층의 원형 회랑이 인상적인 찰스 5세 궁전은 정말 인상적이었음.

3. 이후 alcazaba de benedin을 탐방함. 이곳은 이 성을 지키는 요새로 좀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졌음. 이곳에 올라서니 그라나다 시내 일대가 360도로 펼쳐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과 그 곳을 감싸고 있는 산들이 서로 어루러진 모습이 장관이었음.

4. 이때 아침부터 오던 비가 그쳤고 앞산에 무지개가 떴음. 그라나다 아함브라 궁에 와서 무지개를 볼 줄이야!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5. 벨라의 탑(torre de la vela)에서 무지개를 봤고 시원한 풍광을 감상했음.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물의 정원이 있는 헤네랄리페(generalife)를 방문함. generalife는 물을 테마로 한 정원이었음. 갈수기인 겨울에 어떻게 그렇게 풍부한 유량으로 정원을 채웠는지 대단하더라!

6. 이제 남은 곳은 아함브라 궁전의 최고의 명소 나사리궁전(placio nazaries)이였음. 찰스 5세 궁전에서보니 긴 줄이 있었는데 그 줄이 바로 나사리 궁전으로 입장하는 줄이었음. 알고보니 나사리 궁전은 티켓에 표기된 시간에만 출입할 수 있었음. 내 티켓에는 오후 1시로 적혀 있었는데 나사리 궁전 출입구로 향했을 때는 이미 오후 3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음. 티켓을 자세히 확인하지 않은 탓에 아함브라 궁전의 메인 포인트를 놓치고 만 것임.

7. 세비야에서 스페인 광장을 못보고 온 것처럼 그라나다에서 나사리 궁전을 못 보고 온 것임!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 또 와서 보면 되는거다! 그 핑계대고 스페인에 또 오면 되잖아!ㅋ

8. 그라나다는 아랍풍의 건물들이 있어서 그런지 아랍계 여행객들이 많았음. 또한 아랍인들이 좋아할 음식점도 많았음. 그래서 나도 터키식 케밥으로 허기를 달랬음. 아주 맛났음.



* 아함브라궁: 찰스 5세 궁




*아합브라궁: 벨라의 탑



* 그라나다: 비 온 후라서 그런지 하늘이 청명하다.








☞ 지난 2018년 12월 11일부터 2019년 2월 1일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및 이베리아반도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답니다. 앞으로 그 여행일지를 포스팅화 시킬 예정입니다. 여행일지를 약간의 수정 과정을 거쳐 올릴 거라 그렇게 재밌는 포스팅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큰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손글씨로 작성한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것에 불과할테니까요.
그래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 세비야 대서당: 세비야 대성당의 야경, 그리고 트램





*여행 38일차: 2019년 1월 17일 목요일 맑음

1. 심야버스 탓인가 정신이 헤롱거리는 상황에서 세비야 plaza de armas 터미널에 도착했다. 새벽 5시가 안되는 시각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들은 우버 택시를 부르는 등 무척 분주해보였지만 난 할 일 없는 노숙자처럼 터미널 일대를 돌아다녔다. 

2. 어차피 호스텔 체크인 시각은 오후 2시경일테고 그동안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그저 걸음걸이를 늦추고 어슬렁거릴 수밖에! 그래도 이곳은 내가 그렇게 와보고 싶었던 세비야가 아닌가!

3. 천천히 걸으며 시내방향으로 향했다. 길을 걷다보니 과달키르비강이라는 강변을 걷게 됐다. 양 옆에 수변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구도심에 입성했다. 눈에 보이는 세비야 대성당! 참 정말 크고 웅장했다. 세게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 성당이라는데... 정말 그 멋진 성당을 눈 앞에서 볼 줄이야.

4. 성당이 보이는 바르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했다. 몸이 피곤한 상태여서 그런가? 커피가 정말 맛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오후 일정을 행할 수 없었다. 심야버스에서 얻은 피로 때문에. 빨리 호스텔을 잡고 세비야 성당 야경 투어를 하는게 남는 장사일 터!

5. 17유로 자리 호스텔에 체크인을 했는데 시설은 정말 좋았다. 그런데 한국인이 많은 것이다. 아니 세비야 시내 자체에 한국인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헬조선이라는데... 그게 아닌게 확실한 거 같다. 헬조선인데 해외여행을 이렇게나 많이다니나!

6. 호스텔에서 한 숨 자고 일어나 세비야 성당 야경을 보러갔다. 주간에 경치가 예쁜 곳은 야경도 예쁜 법이다. 그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밤 11시가 가까운 시각에도 안전한 도시 세비야, 그리고 그 도시의 근간이 되어주는 세비야 대성당. 그곳에 내가 서 있었다. 



* 세비야 대성당 내부





*여행 39일차: 2019년 1월 18일 금요일 맑음

1. 전날 새벽까지 50플러스센터 기획서 작업을 하느라 취침시간이 너무 늦어졌다. 그래서 늦게 일어났음. 그런데 나보다 더한 게으름뱅이들도 많더군...ㅋ

2. 드디어 기대하고 기대했던 세비야 성당 투어에 나서게 됐음. 입장료는 9유로. 세비야 대성당은 그 명성처럼 정말 엄청났음. 그 외관에 한 번 놀라고 그 내부 장식에 두 번 놀랐다고 해야 하나? 내부와 외부가 서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그런 멋진 곳이었음.

3. 예전 톨레도 성당과 세고비야 성당을 탐방했을 때의 감흥이 되살아나는 듯했음. 또 종탑까지 올라갈 수 있어 더 좋았음. 종탑에 올라가니 세비야 시내가 한 눈에 다 들어왔음.

4. 세비야 대성당 앞으로 트램이 다니고 있었는데 쇳덩어리인 트램이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돌로 만든 성당과 쇠로 만든 트램의 절묘한 조화라고나 할까나?

5. 세비야 골목골목은 왜 그리도 아기자기한지! 세비야는 꼭 다시 한 번 오고 싶은 곳이다. 하긴 시간 관계상 스페인 광장도 못 갔으니까...^^;

6. 다음 목적지를 말라가로 잡았다. 그라나다로 갈까하다가 지중해 바다가 보이는 말라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지브롤터로 갈 생각이다. 오후 6시경 말라가행 버스를 탔다. 말라가에 오후 8시 40분 경 도착했음.

7. 시내에 있는 top hostal에 체크함.



* 세비야 대성당




* 세비야 대성당









역사도시 톨레도의 골목길에서 서성이다!

스페인 톨레도 역사트레킹

 

 

이번에는 해외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해외 역사트레킹을 한 번 해보는 것이죠. 역사트레킹을 굳이 국내에서만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제가 소개할 곳은 톨레도(Toledo)라는 곳입니다. 톨레도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고도(古都)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자치 도시가 있었고, 서고트 왕국 시절에는 도읍지가 있던 곳이 바로 톨레도입니다. 8세기경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이슬람 무어인들도 톨레도를 전략적 거점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요새화시켰습니다.


이렇듯 2천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톨레도이기에 역사트레킹을 하기에도 제격인 것이죠. 우리나라의 경주나 공주, 혹은 전주를 탐방한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게 될 겁니다.

 

 




* 톨레도 위치






 

마드리드에서 고속버스타고 톨레도로!

 

저는 이 톨레도를 2년 전 쯤에 방문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4편에 언급함)을 탐방한 후 마드리드 근교 여행을 행했을 때, 그때 방문한 것입니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논스톱 버스로 5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고 왕복(round trip) 버스비도 약 10유로 정도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페인 중부지역의 드넓은 평원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광경들을 바라보다 잠깐 잠이 들었었는데 벌써 종착지였습니다. 역시 톨레도는 생각보다 가까웠습니다. 터미널에서 내려 구도심 쪽을 바라보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 펼쳐지더군요. 옛 건축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 여행은 언덕길을 올라가 비사그라 문을 통해 톨레도 구 시가지에 진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비사그라 문은 카를로스 1세가 1550년에 축조한 문으로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도 불립니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카를로스 1세는 이 문의 정면에다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았습니다.

 





* 세르반테스 상: 톨레도에 있는 세르반테스 상.




 

 

독일 출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

 

합스부르크가 문장에도 보듯 카를로스 1세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기도 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지방을 통치하는 황제가 스페인 국왕을 겸임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통해 왕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정복왕윌리엄 1(1028~1087) 같은 경우도 프랑스 노르망디 공이면서 영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왕이면서도 주로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지요. 영어도 못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불렸습니다. 그는 합스부르크 출신답게(?) 스페인보다는 독일 지역을 우선시 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 국내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의 집권 초기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의 원인 중에는 외국 출신 왕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집권 40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시기가 고작 1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지만 그는 스페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아들로 두었습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였습니다.

 

 




* 톨레도 성.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곳, 톨레도 성

 

비사그라 문을 지나 톨레도 성(Alcázar of Toledo)으로 향했습니다. 톨레도가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곳에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 분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성이었습니다.


톨레도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데 멀리서보면 빈틈이 없는 단단한 하나의 성채처럼 보입니다. 로마시대부터 궁성이 있었던 이곳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의 톨레도 성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때 밑그림이 그려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지금의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본 성의 형상은 고풍스러웠지만 실제 외관의 벽돌 하나하나는 비교적 때가 덜 묻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1936727. 당시 톨레도 성은 프랑코 휘하의 호세 모스카르도(José Moscardó) 대령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방어를 하고 있었고 외곽에서는 인민전선이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인민전선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16세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는데 톨레도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와 관련된 전화 통화 내용입니다.

 

나는 인민전선군 대장 바르델로 소령이오.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일 것이오.”

항복은 없소.”

최후통첩이란 말이오.”

중략...

아버지. 저 루이스에요.”

아들아, 스페인 국민으로, 기독교인으로 만세 두 번을 외쳐라. 한 번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

, 아버지. 신이여 만세! 스페인 만세!”

탕탕

 

어린 소년의 죽음 때문인지 성 안에 있던 프랑코 군은 70일간 지속됐던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냈습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톨레도 성은 복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70일간 계속된 인민전선의 혹독한 포위를 견뎌내고, 성을 지키는 최고 사령관의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까지... 이 곳은 이후 스페인 내셔널리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립니다. 독재자 프랑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톨레도 성을 선전장으로 활용했던 것이죠

 




* 톨레도 골목길: 톨레도의 거리는 저렇게 좁은 골목길 투성이었다. 그래도 자동차들은 쌩쌩 잘 달린다.





저는 이 일화를 들었을 때 좀 의아했습니다. 물음표부터 떠오르더군요. 그 엄혹한 순간에 만세를 외치라고 한 모스카르도 대령이나 그 말에 따라서 만세를 외친 아들 루이스나... 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민전선 측의 대응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질로 잡혀 있는 최고 사령관의 아들을 그대로 총살했다는 건 자신이 쥐고 있는 최고의 꽃놀이패를 스스로 버려버렸다는 뜻이니까요. 아무리 당시 인민전선 측이 노련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히든카드를 버릴 정도로 멍청했을까요

 

그래서인지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먼저 대령의 아들이 전화 통화 중에 죽지 않고 한 달 후에 벌어진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공습 때 총격을 당해 사망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민전선의 잔악성을 고발함으로써 프랑코 측의 만행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옵니다. 당시 ‘Guardia Civil’이란 공안조직이 다수의 인민전선 측 남성 인질들을 죽였는데 그 만행을 덮기 위해 어린 아들의 죽음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입니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또한 서양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톨레도 성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책무일 겁니다.

 


 


* 톨레도 성당.






 

스페인 내전과 마드리드 시민들

 

스페인 내전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우리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하여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까탈루니아, 빌바오를 위시한 바스크 지방이 프랑코 측에 의해 혹독하게 탄압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마드리드 지역은 프랑코 측에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 당시 많은 수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코에 맞서다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1970년대 중반, 프랑코 사망에 의한 혼란기 때 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이 앞장서서 민주화를 외쳤습니다.


스페인 내전을 마드리드 VS 바르셀로나프레임으로만 바라본다면, 프랑코 독재에 맞섰던 수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의 희생은 말 그대로 헛된 희생이 될 것입니다.

 






* 톨레도 성당.





 

 

정신없었던 톨레도 성당

 

다음 탐방지는 톨레도 성당입니다. 톨레도 성당으로 가는 길은 좁았습니다. 아주 좁은 골목길이었습니다.

 

? 8유로요?”

 

멈칫했습니다. 무슨 성당 입장료가 그렇게 비싸단 말입니까? 8유로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표를 끊었습니다. 속으로 궁시렁궁시렁거리며...


톨레도 대성당은 페르난도 3세 재위시절인 1226년부터 짓기 시작했습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완공 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됐습니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이 성당은 톨레도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핵심 코스라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8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톨레도 대성당은 훌륭했지만 인파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다음 탐방지로 향했습니다.

 

 



* 알칸타라.





 

천혜의 요새 톨레도

 

마지막 탐방지는 톨레도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타호강과 알칸타라(Alcantara) 다리였습니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때문이었습니다. 톨레도의 구도심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갑니다.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칸타라 다리입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죠.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습니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습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입니다.


톨레도를 탐방을 하니 중세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스페인 내전 같은 현대사도 떠올리기도 했지요. 덕분에 유익한 해외 역사트레킹을 행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톨레도에서 지인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네요. 대신 그때는 인원파악을 하느라 애를 좀 먹을 것 같습니다. 작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 산 마르틴 다리: 이 다리는 알칸타라가 아니다. 산 마르틴(San Martin) 다리다. 이 다리는 14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일품이라고 한다. 산 마르틴에서 알칸타라까지는 약 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샌책로로 연결되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

- 마음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번에는 국내를 넘어 스페인으로 이야기를 확장해볼까 합니다. 스페인에는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내용이 아닐 겁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입니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지금은 2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입니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많은 영향을 준 셈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이 역사트레킹펀딩에서도 꼭 한 번은 다뤄봐야겠지요.

    

 







 

 * 산티아고 콤포스테라라 시가지. 사진 중앙 상단에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합니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습니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지요.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습니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입니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습니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725일에 참수를 당합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겁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겁니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습니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습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습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우리언론들 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조각된 야고보.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립니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입니다. 종교다원론자(?)인 저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습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지요. 그 영감은 예전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보았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답니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저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한국 컵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많기에 저런 광고문구가 나왔으리라...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됩니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의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습니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지요.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집니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수준으로 서술하였더군요.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요?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요?

 

 




* 이베리아 반도 지도. 야고보의 제자들이 이베리아에 가려고 했다면 바로셀로나 같은 동부 지역에 닻을 내렸을 것이다. 뭐하러 지르롤터를 거쳐 대서양까지 나갔다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먼 길을 돌아갔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이 탄 배는 나룻배 수준이었을텐데. 한편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포함하는 서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습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611,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습니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습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합니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를 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릅니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됩니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입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을 겁니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습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답니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 산티아고 개: 산티아고 도심 입구 쪽에 있는 대저택에서 기르던 개. 무척 귀여워서 한 컷!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저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저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죠.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요.

 

 

 

 

 

 

 

 

 

 



 

 

레알마드리드 홈구장 가보니... 상암구장이 낫겠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14] 허탕만 친 마드리드 탐방기

 

15.02.09 11:22   최종 업데이트 15.02.09 14:10

 

곽동운(artpunk)

 

 

 

 

 

 

 

 

 

 
▲ 알칼라 문 알칼라 문(Puerta de Alcala). 1778년 카를로스 3세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문으로 한때는 마드리드의 동쪽 경계를 담당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2014년 11월 20일, 여행 18일째. 내일이면 스페인을 땅을 떠나게 된다. 작별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쉬움과 함께 후련함이 몰려왔다. 분명 나중에는 다시 스페인 땅을 그리워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빨리 여행의 종착역으로 향해가고 싶었다.

후련하다는 감정이 든다는 건 무언가 확실히 뽑아냈다는 뜻일 것이다. 정확히 어떤 것을 뽑아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똥배'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포함해서 계속 강행군을 했더니 '똥배'가 쏙 들어간 것이다. 여행 기간 동안 화장실을 잘 갔더니 배가 홀쭉해졌던 것이다.

역시 도보여행은 다이어트의 지름길이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건 똥배뿐이었고, 그에 따라 허리띠도 길어졌다. 그런데 짧은 기간이나마 허리띠가 줄어드는 신기한 경험도 해보았다. 물론 서울에 돌아와서는 다시 원상복구가 됐지만...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보다 상암구장이 더 좋더라

스페인에 와서 정작 수도인 마드리드를 돌아보지 못했던 탓에 그날은 작정하고 마드리드 일대를 탐방하기로 했다. 마드리드 구도심은 도보로 이동을 해도 끝에서 끝까지, 약 1시간 정도 밖에 소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도로 중요 지점을 찍어가면서 시내 탐방을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길을 잡은 곳은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이 있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였다. 스페인 프리메가리그의 팬이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팬인 필자에게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방문은 그 자체로 흥분거리였다. 그곳은 구도심에서 좀 멀기에 지하철을 탔는데 이동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쿵쾅' 거렸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도착했다. 경기가 없는 날이라 시합 구경은 못하더라도 구장 일대를 탐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중심가에 서 있어서 그런지 레알마드리드 홈구장은 차도로 둘러싸여 있었다. 차도로 꽉 막힌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FC서울의 홈구장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나 맨체스터 유나이티트의 올드 트레포드처럼 공원형 구장을 상상했는데... 그 공원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실 생각이었는데... 그런 기대들이 무참히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잔디라도 한 번 밟아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매표소에서 구장 투어 가격을 알아봤다. 무려 19유로(한화로 약 2만3천 원)였다. 19유로면, 톨레도 왕복 차비에다 점심까지 먹을 수 있는 돈이다.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댔다.

 


'FC 서울이랑 할 때는 당연하고, 레알 마드리드랑 맨유랑 붙었을 때도 맨유 응원해야지! 상암 구장이 훨씬 낫네. 인근에 하늘공원도 있고 말야.'

 


 
▲ 고야 프라도 미술관 앞에 서 있는 고야 동상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프라도에는 '게르니카'가 없더라

다음 이동 장소는 프라도 미술관이었다.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고 불리는 프라도 미술관은 1819년 개관했다. 프라도 미술관은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등등...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유명 화가들의 작품 6천여 점을 보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미술관이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가 프라도 앞을 서성였던 건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기 위해서였다. 화가 피카소를 좋아하고, <게르니카>의 가치를 잘 아는 만큼 직접 작품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그런지 미술관 앞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프라도 앞에서 그려야 '그림빨'이 사는지 열심히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는 예비 화가들, 느긋하게 잔디에 누워 늦가을 햇볕을 쬐고 있는 커플 등등... 그 중에는 한국인들도 많았다. 역시 이곳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여기 게르니카가 없다고요? 왜요? 프라도면 당연히 게르니카가 있어야 되지 않나요?"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에서처럼 필자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당연히 세계 3대 미술관이라는 프라도 미술관에 <게르니카>가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충격과 함께 창피함이 몰려왔다.

현재 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게르니카>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피카소가 1937년 6월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해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고국 스페인관에 내걸 벽화를 의뢰받았다. 당시는 스페인 내전 초기였는데 여기서 '고국'이라하면, 당연히 프랑코 정권이 아닌 인민전선 정부를 말한다.

처음 피카소는 작품 구상에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4월 28일 바스크 지역에 있는 게르니카에 독일군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혼신을 다해 그 참상을 화판에 담아낸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게르니카>였다.

 

 



 
▲ 게르니카 왕립 소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게르니카.
ⓒ 위키백과

관련사진보기


 

 

프라도에서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전된 게르니카

예전 일이다. 필자는 게르니카가 당연히 카탈로니아(동부) 지역인 줄 알았다. 스페인 내전 중에 카탈로니아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고, 이후에도 분리독립 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르니카는 바스크(북부) 지역이었다. 필자가 번지수를 잘못 안 것이다.

프라도의 명예 관장이었던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에 대한 항거의 뜻으로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보내지 않았다. 이후 <게르니카>는 조건이 하나 붙여진 상태로 뉴욕 근대 미술관으로 보내졌다.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프라도에 내건다는 조건이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다. 그렇다고 프랑코 체제가 일거에 사라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게르니카>는 1981년 9월 9일 고국 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또 문제가 하나 생겼다. 프라도 미술관은 20세기 이후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1937년도에 탄생한 <게르니카>를 소장한다면 스스로의 원칙을 깨게 되는 셈이다.

결국 <게르니카>는 왕립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결국 <게르니카>는 왕립 소피아 미술관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 소피아 미술관이 현대미술을 전문적으로 소장 전시하는 곳이기에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프라도가 19세기 이전의 작품만 소장한다는 원칙과 소피아 미술관이 현대미술의 보고라는 것만 알았어도 허무하게 발길을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실수를 발판 삼아 미학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무식하다'는 쓴소리를 밑천 삼아서 더 열심히 책을 뒤적거려야겠다.

 

 


 
 해군 박물관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거북선이 아쉽다... 스페인 해군 박물관에서

다음 탐방지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해군 박물관이었다. 원조(?) 무적함대의 나라 스페인에 왔으니 해군 박물관까지 걸음을 하게 됐지만 이곳은 한국인 방문객들에게는 큰 인기가 없는 곳인 듯싶었다. 민박집 추천 리스트 중에서도 이곳은 빠져 있었다.

앞선 두 탐방지에서 허탕을 쳤기에 이곳에서는 좀 진득하게 둘러봤다. 공항 검색대를 뺨칠 정도로 까다로운 보안 검색을 통과 한 후 입장을 했다. 입장료 3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전시물들이 다양했다. 해군이나 배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면 한 번쯤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배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축소된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대포나 총기류, 칼과 같은 비교적 소형 장비들은 실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동양관에는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의 전통 함선들도 전시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 그 곳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뒤로 하고 마드리드 시내를 가로질러 숙소로 향했다.

전체적으로 마드리드 여행은 허탕을 쳤고, 그만큼 아쉬움도 컸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왜? 다음에 다시 오면 되니까. 그때는 좀 더 알차게 탐방하면 되니까. 

 

 

 

 

 

 

 

* 해군 박물관: 마드리드 해군 박물관
   

 

 


 
▲ 솔 광장 마드리드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솔 광장. 각양각색의 희극인들이 쇼를 선보이며 관광객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사진 중앙에 빨간색 옷을 입은 광대는 공중부양을 하고 있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펠리페 2세 동상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톨레도, 그 골목길마다 숨 쉬는 역사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⑬] 역사도시 톨레도를 가다

 

15.02.05 12:19   최종 업데이트 15.02.05 12:19

 

 

 

 

 

 

 

 

 

 

 

 

 
▲ 톨레도 대성당 톨레도 대성당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음, 이 코스는 이 로마시대 다리를 건너서 저기 궁전으로 넘어가면 좋을 것 같군. 그런 후에는 강변길을 걸으면서 트레킹을 마무리 해보는 거야.'

직업병인가? 필자는 스페인 도시여행을 하는 내내 머릿속으로 트레킹 코스를 짜고 있었다. 어느 코스로 가야 역사 유적을 연이어서 만날 수 있을까, 어떤 길이 사람들의 시선을 더 사로잡을 수 있을까, 어느 바르(bar)에 가야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등등... 그러면서 실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나중에 리딩 할 일 있으면 반값에 한 번 해봐야겠다. 해외여행이라고 비싸게 할 필요가 있나? 반값에도 충분하지.'

고도 톨레도(Toledo). 로마시대에는 자치 도시가 있었고, 서고트 왕국 시절에는 도읍지였던 곳. 이슬람 무어인들도 요새로 사용한 곳이다. 이렇듯 2000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톨레도를 탐방하다보니, 서울과 충남 공주에서 행한 역사트레킹이 생각났다.

동선을 잡기 위해 답사를 하면서 애를 먹던 일, 해당 유적지에서 무슨 설명을 해야 하나 하며 답답해했던 일. 그렇게 시작 전에는 전전긍긍했지만 트레킹이 종료됐을 때는 참가자들과 즐겁게 뒤풀이를 했던 일 등등... 그런 것들이 필자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갔다.

 

 

 



고추장 비벼먹고 톨레도를 향해

 
▲ 세르반테스 톨레도 성 인근에 서 있는 세르반테스 동상. 톨레도는 세르반테스의 주 활동 무대였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2014년 11월 19일, 여행 17일째

한인 민박집에서 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터미널로 향했다. 안주인께서 특별식으로 닭백숙을 해놔서 고추장에 발라 먹었다. 닭백숙을 고추장에다 비벼서 밥과 함께 먹었더니, 속이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든든했다. 빵이나 치즈, 커피 등을 좋아하지만 필자도 역시 별 수 없는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져 있다. 무정차 버스로 약 50분이면 도착할 수 있고 왕복 버스비도 약 10유로 정도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도시로 여겨진다.

 

 



 
▲ 톨레도 톨레도는 예로부터 철제 산업이 발달했다. 그래서인지 중세시대 기사들이 쓰던 칼과 방패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들이 많았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버스 차창 밖의 풍광에 매료되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벌써 종착지였다. 역시 톨레도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터미널에서 내려 구도심 쪽을 바라보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었다. 옛 건축물과 성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 여행의 시작은 언덕길을 올라가 비사그라 문을 통해 톨레도 구 시가지에 진입하는 것이다. 이 비사그라 문은 카를로스 1세가 1550년에 축조한 문으로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도 불린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카를로스 1세는 이 문의 정면에다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았다.

 

 

 

독일 출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

 



 
▲ 알칸타라 다리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알칸다라 다리. 다리 끝 부분에는 방어를 위해 성채가 올려져 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합스부르크가 문장에도 보이듯 카를로스 1세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독일 지방을 통치하는 황제가 스페인 국왕을 겸임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통해 왕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정복왕' 윌리엄 1세(1028~1087) 같은 경우도 프랑스 노르망디 공이면서 영국의 왕이었다. 그는 영국의 왕이면서도 주로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다. 영어도 못했다고 한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불렸다. 그는 합스부르크 출신답게(?) 스페인보다는 독일 지역을 우선시 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의 집권 초기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의 원인 중에는 외국 출신 왕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을 정도였다. 코무네로스 반란과 관련된 이야기는 앞선 여행기(관련 기사 : "<백설공주>에 나오는 세고비아성, 직접 보니...")에 잠깐 언급이 되어 있다.

집권 40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시기가 고작 1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지만 그는 스페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아들로 두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였다.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곳, 톨레도 성

 



 
▲ 톨레도 성 스페인 내전 당시 격전지였던 톨레도 성.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비사그라 문을 지나 톨레도 성(Alcázar of Toledo)으로 향했다. 톨레도가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곳에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다는 뜻일 게다. 그런 분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성이었다.

톨레도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데 멀리서보면 빈틈이 없는 단단한  하나의 성채처럼 보인다. 로마시대부터 궁성이 있었던 이곳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현재 톨레도 성의 원형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때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지금의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 본 성의 형상은 고풍스럽지만 실제 외관의 벽돌 하나하나는 비교적 때가 덜 묻어 있었다.  

이렇듯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개를 해보겠다.

1936년 7월 27일. 당시 톨레도 성은 프랑코 휘하의 호세 모스카르도(José Moscardó) 대령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방어를 하고 있었다. 외곽에서는 인민전선이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한 상태였다. 인민전선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16살 아들을 인질로 잡고, 톨레도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와 관련된 전화 통화 내용이다.

"나는 인민전선군 대장 바르델로 소령이오.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일 것이오."
"항복은 없소."
"최후통첩이란 말이오."

(중략)

"아버지. 저 루이스에요."
"아들아, 스페인 국민으로, 기독교인으로 만세 두 번을 외쳐라. 한 번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
"예, 아버지. 신이여 만세! 스페인 만세!"


탕탕

어린 소년의 죽음 때문인지 성 안에 있던 프랑코 군은 70일간 지속됐던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톨레도 성은 복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진다. 70일간 계속된 인민전선의 혹독한 포위를 견뎌내고, 성을 지키는 최고 사령관의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까지... 이곳은 이후 '스페인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린다. 독재자 프랑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톨레도 성을 선전장으로 활용하게 된다. 

 
▲ 비사그라 문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 불린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먼저 대령의 아들이 전화 통화 중에 죽지 않고 한 달 후에 벌어진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공습 때 총격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민전선의 잔악성을 고발함으로써 프랑코 측의 만행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당시 '가디아 시빌(Guardia Civil)'이란 공안조직이 다수의 남성 인질들을 죽였는데 그 만행을 덮기 위해 어린 아들의 죽음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또한 서양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톨레도 성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책무일 것이다.

 

 

 



정신 없었던 톨레도 성당

 


 
▲ 톨레도 성당 톨레도 성당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스페인 근현대사의 아픔까지도 품고 있는 성을 지나, 필자는 톨레도 성당을 향해갔다. 아주 좁은 골목길을 따라서 갔다.


"예? 8유로요?"

멈칫했다. 무슨 성당 입장료가 그렇게 비싸단 말인가. 8유로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표를 끊었다. 속으로 욕에 욕을 해대며 말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페르난도 3세 재위시절인 1226년에 짓기 시작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완공 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됐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이곳은 톨레도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핵심 코스라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같은 규모의 세고비아 성당은 한산했지만 톨레도 성당은 자칫하면 줄서서 관람해야 할 정도로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8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톨레도 대성당은 훌륭했지만 인파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다음 탐방지로 향했다.

 

 



천혜의 요새 톨레도

 
▲ 좁은 골목길 톨레도의 골목길은 무척 좁다. 그런데 저 좁은 곳으로도 자동차가 다녔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마지막 탐방지는 톨레도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타호강과 알칸타라(Alcantara) 다리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덕분이다. 톨레도의 구도심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간다. 그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이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칸타라 다리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다.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이다.

톨레도를 탐방을 하니 중세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다. 물론 스페인 내전 같은 현대사도 떠올리기도 했다. 덕분에 유익한 해외 역사트레킹을 행했던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톨레도에서 지인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다. 대신 그때는 인원파악을 하느라 애를 좀 먹을 것 같다. 작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 타호강: 타호강에 있는 또 하나의 오래된 다리. 산 마르틴 다리.

 

 

 

 

* 기러기 떼: 톨레도에서 본 기러기 떼.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 한 컷.

 

 

 

 

 

 

 

* Monastery of San Juan de Los Reyes: 산 후안 수도원. 외벽에는 이슬람

왕국에 사로잡힌 기독교 포로들을 결박하기 위해 사용된 체인들이 걸려있다.

 

 

 

 

 

 

 

 

* Monastery of San Juan de Los Reyes: 외벽에 걸린 포로 결박용 체인.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세고비아의 자랑, 세고비아 성과 세고비아 성당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12편] 세고비아 2부

 

15.01.30 14:38 최종 업데이트 15.01.30 14:38

 

 

 

 

 

 

 

 

 
▲ 세고비아 성 일명 백설공주 성.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수도교의 지상 구간 관찰과 원거리 수원지 조망 등등... 세고비아 신시가지 일대 탐방은 상당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내친김에 '호랑가시 숲'이라고 불리는 수원지까지 가서 시작점을 직접 관찰해 보고 싶었으나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대충이나마 시작점을 조망했으니 이제 종료점을 향해 가야 할 차례였다. 수도교의 종료점은 일명 '백설공주성'이라 불리는 세고비아 성(Alcázar of Segovia)이다.

 

 



'큰 시장'보다 더 북적거리는 '작은 시장'

 


세고비아 성은 구시가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을 가려면 수도교와 아조구에호(Plaza de Azoguejo) 광장을 다시 거쳐 가야 했다. 스페인어로 '아조구에호(azoguejo)'는 '작은 시장'을 뜻하고, 마요르 광장(Plaza de Mayor)할 때 '마요르(mayor)'는 '큰 시장'을 뜻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조구에호 광장보다 마요르 광장이 더 크고 북적거려야 하지만 세고비아에서는 좀 달랐다. 수도교 때문인지 '작은 시장'이 '큰 시장'보다 사람들이 더 붐비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가는 데 돈 간다고, 실제로 작은 시장 쪽이 상권도 더 발달했다. 그러고 보면 건축물에도 새옹지마라는 속담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수도교를 두고 옛날 세고비아 사람들은 악마의 작품이라고 의문을 표시하며 경원시했지만 지금은 세고비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수도교가 잘 보이는 그 작은 시장에는 '코치니요'로 유명한 맛집이 있었다. 코치니요는 새끼 통돼지 요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통구이라면 고기를 나무꼬치에 꽂아 돌리는 것을 생각하지만 코치니아는 화덕에다 구운 요리다. 이 요리는 세고비아에 가면 꼭 한 번은 맛보아야 할 이 지역의 명물이라고 한다.

 

 

 


 
▲ 세고비아 성당 마요르 광장 쪽에서 본 모습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그 맛집 앞에서 필자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걸었던 순례팀과 재회를 한 것이다. 순례팀은 막 점심식사를 하려는 순간이었고 필자는 광장을 가로 질러 그 맛집 앞을 지날 때였다. 얼마나 반갑던지.

"여기서 또 만나네요. 역시 만날 사람은 만난다니까요!"

헤어진 지 겨우 3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정말 반가웠다. 단체여행을 하다가 갑자기 뚝 떨어져 나가듯 단독여행을 했으니 더 그 외로움이 더 컸고, 그래서 더 반가웠던 것이다. 순례팀도 마드리드 인근 도시를 탐방 중이었다. 마드리드 민박집을 베이스캠프 삼아 인근 세고비아나 톨레도 같은 인근 도시들을 당일치기로 여행하고 있었다.

필자도 자리를 꿰차고 앉아 고기를 뜯고 싶었지만 이미 식사를 한 터라 다음을 기약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대신 그날 밤에는 필자도 마드리드 민박집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밤에 봬요! 집에서!"

 

 


 
▲ 세고비아 성당 세고비아 성 방면에서 바라본 모습. 아래쪽에는 도시를 감싸고 있는 성곽이 보인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황새 들의 놀이터 세고 비아 성당

 



세고비아 성을 가기 위해 먼저 들러야 할 곳은 마요르 광장에 있는 세고비아 대성당이었다. 세고비아 대성당은 1525년부터 1577년까지, 52년 동안 건축된, 규모가 상당히 큰 성당이다. 노을이 질 무렵, 작은 첨탑들이 황새들의 놀이터로 이용될 만큼 세고비아 대성당은 뾰족한 고딕양식이 일품인 곳이다. 

현재의 세고비아 대성당은 옛 성당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옛 성당은 세고비아 성 인근에 있었는데 1520년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 때 파괴됐다. 코무네로스 반란은 당시 집권자인 카를로스 1세의 과중한 세금 부담 등에 반대하여 세고비아, 톨레도, 바야돌리드 등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이 봉기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 도시에서는 자치조직인 '코무니다드'가 만들어졌는데 그 구성시민들을 '코무네로스'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따서 코무네로스 반란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반란군들은 옛 성당을 접수하여 세고비아 성의 성벽부근을 방어하고 있는 카를로스 1세군을 격파할 생각이었다. 그런 공방전 끝에 옛 성당은 파괴되고, 5년 후 현재의 자리에 대성당이 지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듯 현재의 대성당은 건축 당시에는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자 지어졌고, 지금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대성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성당을 위에서 보면 3층짜리 아치형 지붕이 층층이 쌓아 올려진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사이에는 수많은 스테인글라스들이 성당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세고비아 대성당에서 가장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높이가 90m인 종탑이다. 이 종탑은 1614년에 세워졌는데 멀리서 보면 왕관을 올려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곳에 올라서면 세고비아 시내를 시원스럽게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 세고비아 좁은 세고비아의 구 시가지 거리.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요새였던 세고비아  성

 



대성당을 뒤로 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일명 '백설공주 성'이라고 불리는 세고비아 성을 향해갔다. 세고비아 성은 월트디즈니사의 <백설공주>에 나오는 성의 모델이 됐다고 해서 그런 별명을 얻게 됐다.

애니메이션의 배경 모델이 될 만큼 세고비아 성은 매우 아름다웠다. 또한 독특했다. 하지만 이곳이 처음부터 그런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공간은 아니었다. 성이 들어서기 전에는 요새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 기원은 로마 점령기 이전의 셀티베리안(Celtiberians)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다.

이곳은 수도교의 종착점이 될 정도로  로마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전략적 요충지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즉, 거의 2000년 전부터 중요한 거점으로 쓰였다는 뜻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코무네로스 반란 때에도 이 일대는 격전지였다.

 

 

 


 
▲ 해자 세고비아 성의 해자.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변을 판 후 물을 채워넣는 것을 말한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세고비아 성을 두고 안내책자에는 배 모양을 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 표현이 적합한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이 성이 '붕' 떠 있다는 것이다. 에레스마 강(Eresma)과 클라모레스 강(Clamores)이 휘돌아나가는 작은 협곡에 위치해 있는 이 곳은 연결다리를 폐쇄시키면 외부와는 격리가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였던 셈이다. 한편 그 옆을 흐르는 강들은 유량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수도교를 건설해 그 먼 곳에서 물을 끌어 왔던 것이다.

그렇게 협곡 요새로 기능하던 곳이 13세기 이후부터는 왕이 거주하는 왕궁으로 변모 했고, 그 이후부터 수세기동안 증개축이 거듭되었다. 세고비아 성은 감옥으로도 쓰였는데 마드리드에 있던 왕실 법정이 옮겨옴에 따라 죄수들을 격리할 공간을 마련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세고비아 성은 1862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거의 모든 게 파괴되는데, 20년 후 대대적으로 복원 공사에 나서게 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은 1882년에 재건축된 것이다. 한편 세고비아 성은 현재 왕립 포병학교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한쪽 면에는 각종 대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세고비아 성 성 앞에서 한 컷.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집 떠나면 고생, 하지만 떠나야 하는 운명

 



세고비아 탐방을 마친 후 필자는 마드리드행 버스를 탔다. 이제 순례팀이 묵고 있는 한인 민박집을 향할 차례였다. 한인 민박집에서 순례팀을 다시 만나니 마치 가족들과 상봉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와중에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집 나가니까 고생이지?"

필자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런 말을 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떠나야지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게 우리의 운명이잖아요!"

 

 



 
▲ 세고비아 성 세고비아 성에 전시된 중세 기사상.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도움말

1. 마드리드에서 세고비아까지는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다. 버스로는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2. 추천여행 노선: 터미널 → 수도교 → 세고비아 성당 → 세고비아 성
천천히 둘러보면 3~4시간 정도 소요된다. 

3. 시간이 되신다면 신시가지 방면에 있는 수도교 지상 구간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정수장 안쪽의 정수시설을 관찰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세고비아 수도교에서 느낀 절대음감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11편] 세고비아 1부

 

15.01.28 11:09   최종 업데이트 15.01.28 11:09
곽동운(artpunk)

 

 

 

 

 

 

 

 

 

 
▲ 수도교 구시가지 방면에서 본 수도교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세고비아와 '세고비아'는 무슨 관계?

 


평생 그곳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친숙한 도시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카사블랑카> 때문에 유명해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재즈의 발상지인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 등등. 필자도 그런 도시가 있다. 이번에 소개할 세고비아가 바로 그곳이다. 

예전에 통기타가 하나 있었다. 지인한테 물려받은 것인데 아무리 조율해도 그 음이 그 음 같은 그런 통기타였다. 그래도 열심히 튕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유시인까지는 못되더라도 좋아하는 후배 앞에서 폼 좀 잡아보겠다고... 그때 튕기던 기타가 바로 '세고비아 기타'였다. 그런 기억 때문에 세고비아는 필자에게 전혀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세고비아 기타는 유명 기타리스트인 안드레아 세고비아의 이름을 따서 상품명으로 삼았다. 안드레아 세고비아는 다른 악기용으로 작곡된 음악들을 기타 연주에 적합하게 편곡을 하는 등 현대 기타 연주의 대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안드레아 덕택에 '세고비아 기타'가 이름을 얻게 됐고, 그 상품명 덕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가 우리 귀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세고비아에 가면 안드레아와 관련된 기타 박물관 같은 것이 있는 줄 알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시 세고비아와 안드레아 세고비아와는 별 관계가 없다. 그는 남부인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데뷔도 안달루시아에서 했다. 그냥 그의 이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 이름이 들어간 것뿐이다. <강철군화>의 저자 잭 런던처럼 그냥 사람 이름에 도시명이 포함된 것이다.

 


 
▲ 수도교 야경 상상력을 고조시켰던 수도교 야경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수도교와 절대음감

 


2014년 11월 17일, 여행 15일째

오후 6시에 발라돌리드에서 세고비아행 버스를 탔다. 두 도시의 직선거리는 90km도 채 되지 않아 늦어도 1시간 20분 정도면 도착할 줄 알았다. 그래서 세고비아에서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행이 계획대로만 진행되는가? 버스가 인근 동네 구석구석을 다 정차하고 다녔다. 심지어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도 했다. 더 가관인 것은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는 점이다. 옆쪽에 있던 마드리드 청년이 일러주지 않았으면 아마 다른 행선지로 갔을지도 몰랐다.

결국 오후 8시가 넘어 세고비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긴장을 했는지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세고비아의 명물이라는 수도교(aqueduct)를 찾아갔다. 어차피 갈 거 미리 알아두고 다음날 꼼꼼히 살펴보자는 속셈이었다.  

"이야, 정말 환상적이네"

수많은 아치들로 이루어진 수도교의 장엄한 모습이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책에서나 보던 로마시대의 수도교를, 그것도 조명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한밤 중에 보는 수도교의 아치는 리듬감이 살아 있는 듯했다. 로마네스크 기둥을 타고 오르는 선율이 아치에서 곡선을 그린 후 위층으로 올라가 고음을 잡는 그런 모습... 그렇게 아치 기둥을 타고 나온 음악은 어떤 것일까? 한 밤의 세레나데일까 아니면 카이사르 군대가 불렀을지도 모를 행진곡? 세고비아에 세고비아가 없다지만 필자에게는 수도교가 '절대음감'처럼 보였다. 시각의 청각화를 통한 음악 연상해보기! 어쩌면 이런 것도 여행의 재미다. 해당 유적에 상상력을 더해 본다.

 

 



 
▲ 수도교 신시가지에서 바라 본 수도교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로마인들의 기술력이 집약된 거대한 수도교

기둥: 120개
아치: 167개
관로: 25*30*30cm
총길이: 16,220km
최고높이: 28.10m
교량구간: 728m

수도교의 스펙이다. 수도교는 로마시대인, 기원 후 1~2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인들은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는데 세고비아도 그 중 하나였다. 정착지는 세워졌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세고비아는 넓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터라 대규모로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수원지와 거리가 멀었다. 수도교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로마인들은 외곽에 있는 프리오 강(Rio Frio)에서부터 중심부까지 수로(水路)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무려 16km에 달하는 수로가 만들어졌다.

수도교는 그 수로의 교량구간이다. 즉 16km 송수관 중 728m 정도가 아치형 다리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은 왜 수도교라는 교량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냥 수로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하물며 시멘트도 없던 시대에 그런 거대한 구조물을 축조한다는 건 엄청난 공사였기 때문이다.

수도교를 잘 즐길 수 있는 곳은 아조구에호(Plaza de Azoguejo) 광장인데 그곳을 중심으로 양 옆쪽을 보면 왜 로마인들이 거대한 아치형 교각을 세웠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양 옆의 언덕으로 인해 광장은 협곡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껏 수로를 타고 온 물이 협곡으로 떨어지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 것이다. 협곡을 넘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인위적인 구조물을 연결하여 최종목적지까지 물을 도달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양편을 이으려고 하니 거대한 구조물이 나타났고, 교량 형식이니 아치가 그려졌다. 또한 협곡의 높이가 있으니 복층까지 올려 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고비아의 수도교가 탄생됐던 것이고, 그 가치를 높이 사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 세고비아 세고비아 외곽에서 바라본 사진. 뒤쪽에 보이는 산에서 물길이 시작된다. 전날에 눈이 왔는지 봉우리에 눈이 쌓여 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마가 만든 수도교?

옛날 옛적에 이 거대한 교량은 악마의 구조물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접착제도 없이 큰 돌조각들이 무지개를 그리며 놓여 있으니, 눈앞에서 보고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전설이 하나 있다.

 

매일같이 물 주전자를 들고 비탈진 길을 오르내려야 했던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일이 고된 나머지 소녀는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자신의 집까지 물길을 내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기에 이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소녀는 비극적인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열렬히 기도를 하게 된다.

그동안 악마는 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태풍이 발생하여 일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새벽닭이 울게 됐는데 그때 악마는 돌조각 하나만을 세우지 못한 채 건축물을 다 완성시킨 상태였다. 돌조각 하나 때문에 거래는 무산됐지만, 수도교는 온전히 그 자리에 생성됐고 소녀의 영혼도 빼앗기지 않게 됐다.

소녀는 마법 같았던 지난밤의 일을 세고비아 시민들에게 실토하게 됐고, 이에 사람들은 아치를 통과한 물은 유황 성분이 제거된 성수라고 여기며 새로운 건축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전설에도 내포되어 있듯이 옛날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대한 수도교가 경외적인 존재였을지 모른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축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수도교가 자신들의 식수를 공급해주고 있으니, 그 존립 자체를 인간 영역 밖에서 끌어오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교를 두고 거대한 '마법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고비아 시민들은 19세기 중반까지 그 '마법덩어리'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 수로 수로의 지상구간. 수도교의 맨 위쪽에도 이런 관로가 놓여 있다. 사진 중앙, 관로가 끝나는 부분에 있는 건물이 정수장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정수장 시설까지!

기둥들을 따라서 가봤다. 수로의 지상구간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세고비아는 수도교를 중심으로 그 안쪽은 구시가지이고, 그 밖은 신시가지로 분류된다. 수로의 지상 구간은 신시가지쪽에 있었다.

한 10분 정도를 걷다보니 정수장과 함께 드디어 지상구간이 나왔다. 전설에 유황이 제거됐다고 언급됐듯이 정수장도 수도교와 함께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정수는 이물질을 물에 침전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정수장에는 심도가 깊은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그 물탱크에 모래나 황 같은 불순물들을 침전시키고, 깨끗한 윗물만 빠져나가는 식으로 정수시스템을 만들었던 것이다. 간단한 구조였지만 그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상 구간의 수로는 말 그대로 수로였다. 화강암을 깎아내고 그 위에 25*30*30cm 규격의 홈을 파 내 관로를 삼은 것이다. 수도교의 맨 위 부분도 그렇게 관로가 놓여 있다. 고대 로마인들의 건축기술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했던 대목이었다.

지상 구간을 탐방하다 길을 잃고 말았다. 궁금했던 것들이 풀려나가는 재미에 빠져 있다 보니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덕분에 세고비아의 신시가지를 갈지(之)자로 마구마구 돌아다녔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수로가 시작되는 산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눈이 왔는지 산봉우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전날에는 수도교에 상상력을 더했다면, 그날은 수도교를 더 면밀하게 탐구한 날이 됐다. 문화유적 앞에서 멋지게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 문화유산에 상상력도 더해 보고, 더 꼼꼼히 관찰해 보는 것도 재미다. 여행의 큰 재미. 세고비아 여행은 다음편으로 계속 이어진다.   

 

 

  

 
▲ 정수장 신 시가지쪽에 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