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트레킹 코스를 잡기 위해 답사를 다니보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문화재입니다.

숲 속 길을 헤쳐나아가다 불현듯 문화재를 만나게 됐을 때! 제 눈에는 그런 문화재들이 보석처럼 여겨집니다. 

제 밥벌이를 해주는 물건들이라 그런가요?...ㅋ

그렇게 다니다보면 쉽게 접하지 못하는 독특한 문화재들도 만나게 됩니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그냥 말 그대로 독특하고, 흥미로운 문화재 정도로 표현을 하겠습니다. 아래의 사진들도 그런 독특한 문화재들입니다.

간단히 설명해보죠.









1. 마애종: 마애불은 많이 보셨을 겁니다. 그런데 마애종이라니요?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마애종입니다. 스님이 범종을 타종하는 모습이 상당히 정교하게 새겨져 있지요? 고려 전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거의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저렇게 종소리가 났을 겁니다. ^^;
저 마애종은 경기도 안양시 안양예술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2. 석분: 석분은 돌로 만든 분묘입니다. 그러니까 돌로 무덤을 만들어 망자의 시신을 안치한 것이지요. 한성 백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분인데 층층이 돌을 쌓아 올린 형상이 꽤 정교해보이더군요. 사실 고인돌은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좀 멀리 여행을 가야하지만... 하지만 석분묘는 쉽게 접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서울 인근에서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석분의 존재는 참 특별합니다. 
저 석분도 마애종과 같이 경기도 안양시 안양예술공원 인근에 위치해 있답니다. 










3. 호압사 법고: 사찰에서 법고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이 법고는 많이 독특하지요? 법고 밑에 호랑이가 깔려 있는 형상이니까요. 도대체 저 호랑이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매일 같이 북소리를 들으며 깔려 있어야 하는지...ㅋ  이 법고가 있는 절은 호암산에 있는 호압사입니다. 호암산은 관악산의 지산입니다. 규모가 커서 그런지 관악산은 여러 지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암산은 호랑이의 기운이 있다고 전해지는 산입니다. 그래서 조선 건국 초기, 무학대사가 이 곳에 사찰을 짓습니다.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사찰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 절이 바로 호압사입니다. '호압', 즉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이죠.
이 호압사는 앞서 언급했듯이 관악산의 지산인 호암산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위 세가지가 다 관악산과 연관이 있네요. 안양예술공원도 관악산의 지산인 삼성산 아래에 있고, 호암산도 그렇고... 나중에 기회되면 이 곳으로 함께 역사트레킹을!!! ^^;





 









지난 3월 12일 일요일에 행한 관악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후기입니다.


총 9강에 걸쳐 기획된 2017년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강의가 관악산에서 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진행된 것입니다.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길인역)은 트레킹을 하며


역사를 배우자는 의미로 개설된 평생교육 카페입니다. 명소를 다니며 트레킹도 하고, 역사와 문화도 배우면


좋잖아요. 요즘처럼 인생 2막, 3막을 준비하는 시대라면 길인역 같은 프로그램은 더욱더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그동안 동장군이 얼마나 얄미우셨습니까? 엉덩이가 들썩들썩 거리는데 그 넘의 동장군이란 넘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그렇게 동장군을 몰아내는 봄기운이 관악산에도 찾아왔습니다. 그 기운을 맞으며 트레킹팀은 관악산을 누볐답니다.


웃고, 즐기고, 이야기하고... 맛나는 거 나눠 먹고.


사진을 보십시오. 얼굴에 모두 다 봄을 품고 있잖아요! 정말 멋지십니다!


길인역 트레킹팀은 강감찬 장군의 생가지인 낙성대, 그 분의 뜻을 기리는 안국사를 탐방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를 거쳐 가톨릭 성지가 있는 삼성산 성지도 답사를 했답니다.


아직 봄꽃들이 머리를 내밀지 않아 좀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지천으로 봄꽃들을 만나게 될 테지요. 그때 다시 한 번 관악산을 탐방했으면 좋겠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답니다.


하여간 오랜만에 행하는 트레킹이라 정말 즐거웠답니다. 다음에는 더 즐겁고, 더 알차게 트레킹을 해보자고요! 






*** 참고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은 계속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길인역 카페를 방문해주세요!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








 

 






 





 
















 

사진을 보니 다 예술이네요... ^^


봄을 품고 있는 모습들이 다 좋아보입니다. 그런데 제 얼굴은 봄이 아니라 붕 떠보이네요. 그날 잠을 못 자서 그런가? ㅋ







정조대왕이 만든 돌다리를 건너며

 

삼성산 역사트레킹

 

 

흥미로운 질문 두 가지를 던져볼게요. 서울 인근에 경주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진 사찰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또 그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한 돌다리가 있다면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분명 이런 물음에 흥미를 느끼실 것입니다.


불국사보다 더 오래됐다는 사찰은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라는 사찰이고,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된 다리는 만안교라는 석교(石橋)입니다. 이 두 문화재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여 이동할 수 있습니다. 또한 편리하게 수도권 전철을 타고 탐방을 할 수 있답니다. 이를 두고 저는 일명 삼성산 역사트레킹이라고 이름을 붙였답니다.

 





 

* 만안교.







 

화산 능행차와 만안교(萬安橋)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관악역 1번 출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번 출구에서 나와 안양역 방면으로 약 5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만안교를 만날 수 있답니다.


1795(정조19)에 축조된 만안교는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이장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주 참배에 나섰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화산 능행차가 된 것입니다.


처음 능행차는 도성에서 동작나루를 거쳐 남태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이후 시흥과 안양을 거치는 길로 변경됩니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지형적인 한계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다른 사정도 있었습니다. 과천 행차로에는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도 뒤주에 갇혀 죽게 되지요. 이것을 두고 임오화변(1762, 영조 38)이라고 부릅니다.


임오화변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상로는 사도세자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하기 위해 떠나는 능행차 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상로 형제의 묘소를 지나는 것이, 정조 입장에서는 당연히 유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1794년 이후부터는 능행차 노선이 시흥과 안양 방면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당시 왕의 행차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 등을 가설한 후, 행차가 끝난 뒤에는 철거 하는 방식이 반복됐습니다. 이에 정조는 그런 번거로움을 피하고, 인근 주민들이 평상시에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하천을 넘을 수 있게 튼튼한 돌다리(石橋)를 건설하라고 왕명을 내립니다.


석교의 축조에는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됐습니다. 큰 공사였지요. 하지만 건설 기간은 3개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왕명으로 지어진 돌다리는 길이가 31.2m, 넓이가 8m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됩니다.


왕의 뜻대로 인근 백성들도 안심하고 하천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돌다리가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다리를 두고 정조대왕은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로 만안교(萬安橋)라는 이름을 직접 작명하였습니다.

 

 





* 만안교. 만안교를 건너는 트레킹 팀.








 

백성들을 위해 튼튼한 돌다리를 축조한 정조대왕

 

 

한편 원래 만안교는 지금의 자리보다 남쪽으로 200m 지점인 삼성천 위에 축조됐습니다. 그러다 1980년 국도 확장 공사 시에 지금의 삼막천 위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 다리가 놓여 있는 안양시 만안구의 명칭은 만안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만안교는 무지개교라 불리는 홍예교입니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홍예교 중에서 가장 큰 다리로 모두 7개의 아치가 놓여 있습니다. 판석과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축조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불린답니다.


저는 처음 만안교를 탐방했을 때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4대문 밖, 그것도 한강 이남에 이렇게 정교하고 거대한 아치형 석교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 돌다리는 박물관에 갇혀 있는 죽은(?) 다리가 아니라 지금도 인근 주민들이 건너다니는 살아있는 생활다리였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진두지휘하는 화산 능행차를 볼 수 없고, 다리 주위로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정조대왕의 바람은 계속 이어지는 듯싶습니다. 인근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하는, 그런 애민 정신 말입니다.

예전 삼성산 역사트레킹을 했을 때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조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다리를 걷고 있습니다.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까지 튼튼한 돌다리를 넘고 있는 거죠. 그 이름대로 만년동안 계속 잘 넘어 다녔으면 좋겠네요.”

 

 





* 남근석. 삼막사 칠성각 부근에 위치해 있다. 은근히 인기가 좋다.







 

울창한 숲길, 삼막계곡

 

 

다음 코스는 삼막천을 따라 이동을 합니다. 삼막천은 삼성산에서 발원된 작은 하천으로 그 상류 위쪽에는 삼막사가 터를 잡고 있고, 그 하류에는 현재 만안교가 놓여 있습니다. 만안교를 지난 삼막천은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안양천과 합수됩니다.


예전, 삼성산 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는 5월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여름과 같이 더운 날씨였지요. 땀방울이 눈앞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봄소풍 같은 역사트레킹을 기대했지만 때 이른 더위로 자꾸 나무그늘만 찾게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도 지쳐갔고, 참가자들도 지쳐갔습니다.


하지만 삼막계곡에 들어서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솟구쳤습니다. 계곡을 끼고 있는 숲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직사광선이 내려찐다고 해도 숲속에 있으면 탈진할 일이 없습니다. 숲속이 강력한 썬크림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원한 나무그늘에 있으면 원기가 회복됩니다. 이런 숲길을 걷는다면 한 여름 때양볕 아래에서도 트레킹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듯싶었습니다.


1시간 정도 계곡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삼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삼막사.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삼막사


  

삼막사는 677,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원효, 의상, 윤필 3대사가 막()을 치고 수행을 하다가 그 후에 절을 지으니, 그 절이 삼막사가 된 것입니다. 삼성산의 명칭 유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효, 의상, 윤필의 성인이 수도를 한 곳이라 하여 삼성산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선 8화에서도 언급을 했었습니다. 참고로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입니다.


서두에서 저는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개창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불국사의 창건은 751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무려 70년 정도 앞선 연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서가 깊어서인지 삼막사에는 수많은 선승들이 다녀갔습니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 고려시대에는 나옹선사,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와 사명대사,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 개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는 삼막사에서 새로운 왕조에 대한 융성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 삼막사.





유명한 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건, 달리 말하면 삼막사가 좋은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일 테지요. 제가 처음 삼막사를 탐방했을 때였습니다. 기운이 사방으로 트였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삼막사는 정상부 능선 부근에 자리 잡고 있어, 그 곳에 올라서면 멀리 서해바다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데 그런 입지적 조건이 삼막사의 기운을 하게 생성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좋은 기운 때문인지 삼막사는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으로 지칭됐습니다. 또한 진관사 등과 함께 서울 인근의 4대 명찰로 불리게 됐답니다

 

삼막사에는 무학대사가 중수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1880(고종 17)에 지어진 명부전과 그 다음해 지어진 칠성각 등의 당우(堂宇)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 고려중기 시대에 건립된 3층 석탑과 조선 후기시대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불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습니다.


삼막사에서 바라보는 낙조도 일품입니다. 서해바다로 넘어가는 해가 세상을 붉게 만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시조 한 수를 읊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삼막사 아래에 있는 염불암 탐방을 끝으로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8화에서 소개했던 관악산 역사트레킹과 함께 묶어서 해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서울 남부지역에 대한 이해도도 더 높아질 것입니다.

 


 



* 삼막사.






 

삼성산 역사트레킹

 

1. 코스: 만안교 경인교대 정문 삼막계곡 삼막사 염불암 안양예술공원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포함)

 

4. 난이도:

 

 

 


 

 

 












* 트레킹팀.









관악산은 내 베이스캠프

 

둘레길 따라가는 관악산 역사트레킹

 



 

당신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입니까?

 

산악인인 엄홍길 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키운 건 도봉산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같은 으리으리한 산들이 아니라 동네 뒷산인 도봉산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목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엄홍길 대장의 베이스캠프는 도봉산?’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있으신가요? 트레킹이나 등산을 즐겨하시는 분들은 각자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하나씩 있을 겁니다. 물론 여기서의 베이스캠프는 사전적인 의미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다리 근육을 키운 곳을 말하는 겁니다. 통을 키우고, 잔뼈를 궂게 해 준 그런 곳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아웃도어 지수를 높여준 곳을 뜻하는 것이죠.


그럼 저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일까요? 바로 관악산입니다. 동네 뒷산은 아니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던 관악산이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곳을 걸어 다니며 다리근육을 키웠고, 아웃도어 지수를 높였던 것입니다.

 





* 관악산 장승


 



 

남부 서울의 진산관악산

 

서울에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렇게 두 산은 서울의 남북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북한산을 서울의 최고 산으로 인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관악산은 항상 넘버 2’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강 이남으로 국한을 시키면 관악산이 당당히 진산의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서울 남부권에 관악산만한 산이 없거든요.


이미 삼국시대부터 관악산의 중요성은 부각되었습니다.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을 얻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의 남쪽 방어를 위한 산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듯 관악산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이런 역사성 때문인지 관악산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광화문에 해태상이 조각된 이유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편이라는 이야기, 조선 태종이 셋째 세종에게 양위를 할 것을 눈치 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도성을 빠져나와 왕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했다던 연주대이야기.


하지만 연주대(戀主臺)는 그 한자 이름에도 나타났듯이 왕좌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던 공간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럼 관악산을 누비며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 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힘들게 등산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수월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강감찬 장군 기마상: 말은 역동적으로 잘 조각됐다. 하지만 장군의 다리를 보라. 너무 짧지 않은가? 기왕하는 거 잘 만들지. 장군을 숏다리(?)로 만들어 버렸다.


 




 

노익장을 발휘한 문신 출신, 강감찬 장군

 

트레킹팀도 떠났습니다. 일명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하기 위해서!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성대였습니다. 수많은 관악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과 그의 생가인 낙성대(落星垈)일 것입니다. 낙성대라는 의미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굳이 신화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역사적인 인물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군사정권 시절, 성역화 작업의 한 대상자였던 강감찬에 대해 외면하고 싶은 시각도 존재할 것입니다. 현재의 낙성대는 1974, 유신헌법이 한참 맹위를 떨칠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 그래요!”

 

제 설명에 참가자들이 좀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놀랐습니다.





* 안국사: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낙성대 공원 안에 있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들이 아니었습니까?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보죠.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기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답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습니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낙성대 3층 석탑 좀 보세요.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인데요. 12세기 경에 건립됐으니 천 년의 세월을 버틴 탑이라네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탑이라는 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아 놓는 조형물이잖아요. 그런데 강감찬 장군은 부처님도 아니고 유명한 고승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곳에 탑이 세워졌습니다. 아무래도 강감찬 장군의 위엄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던 것 같아요.”

 

 




* 낙성대 3층 석탑





 

삼성산 성지

 

낙성대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시작됐습니다. 트레킹 팀은 서울대 입구를 지나 삼성산 성지로 향했습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으로 원효, 의상, 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삼성산에 있는 천년고찰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삼성산에 성지가 있는데 불교 성지가 아니라 천주교 성지입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입니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하여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습니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 세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 삼성산 성지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되었습니다.


삼성산 성지는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입니다. 성지라서 그런지 다른 탐방객들도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경건하게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트레킹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께서는 잠깐 동안 기도를 올리더군요.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입니다. 트레킹팀도 삼성산 숲에서 신선한 피톤치드를 온 몸으로 맞으며 기분 좋게 삼림욕을 했답니다

 

관악산의 또다른 자랑인 메타세쿼이어 숲 탐방을 끝으로 관악산 역사트레킹도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수도 없이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오를 생각입니다. 지겨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관악산에 발을 디디면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지금도 다음에 행할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떠올렸는데 벌써부터 흥분이 되네요. 역시 자신의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항상 즐거운 일인 듯싶습니다.

 

 



* 삼성산 성지: 한 중년 남성께서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관악산역사트레킹

 

1. 코스: 낙성대역 낙성대 서울대입구 헬기장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당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관악산 둘레길 따라 가는 ‘역사탐방’

 

 

 

프로필이미지 곽동운

 

 

서울에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다. 그렇게 두 산은 서울의 남북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북한산을 서울의 최고 산으로 치고 있다. 그래서 관악산은 항상 ‘넘버 2′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한강 이남으로 국한을 시키면 관악산이 당당히 ‘진산’의 지위를 누릴 것이다.

관악산의 중요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부각되었다.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을 얻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의 남쪽 방어를 위한 산으로 삼았다. 그렇듯 관악산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럼 관악산을 누비며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 보자. 어렵지 않다. 힘들게 등산을 할 필요도 없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수월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낙성대와 강감찬 장군 이야기

 

앞서도 언급했듯이 관악산은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곳이다. 그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두드러진 곳은 바로 낙성대(落星垈)다. 낙성대는 고려 초기의 명장인 강감찬 장군의 생가로 한자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을 때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 기마상과 낙성대 3층석탑

 

 

 

10만 거란군을 맞아 귀주에서 큰 승리를 이끌었던 인헌공 강감찬(948~1031년)은 사실 문신 출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시대에는 광종(925~975년)시기부터 과거시험이 시작됐는데 당시 과거는 문신을 등용하는 창구였다. 무신을 뽑는 과거는 고려 후기에 가서야 정례화 됐다. 즉 강감찬 장군은 문신 출신이었지만 귀주대첩이라는 큰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귀주대첩을 지휘할 당시, 강감찬 장군의 나이는 무려 70세였다는 것이다. 칠순의 나이에 최전방 사령관인 상원수가 되어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렇듯 노익장을 발휘하며 문무에 능통했던 인헌공 강감찬은 천수를 누리다 84세에 영면하게 된다.

 

 

 

사색하기 좋은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

 

 

 

 

관악산 둘레길 역사탐방은 서울대 정문을 지나 삼성산 성지로 길을 잡아 볼만하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으로 천주교 성지이다. 헌종 5년에 발발한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참수를 당하게 된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을 거쳐 이곳 삼성산에 가매장 되는데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다. 현재 그들의 주검은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

 

기해박해는 같은 세도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안동 김씨 집권기에는 천주교에 대해서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기해박해가 일어나게 됐고, 박해 이후로는 풍양 조씨 가문으로 권력의 추가 넘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관악산 주 등산로와 달리 삼성산 성지 일대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다. 더군다나 성지 인근에는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진 ‘삼성산 숲’이 있고, 또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메타세콰이어 숲’도 있다. 한적하게 숲길을 거닐며 사색하기 좋은 환경을 가졌다는 뜻이다.

 

 

 

둘레길 탐방로

 

 

 

역사를 따라 둘레길 탐방도 하고, 한들한들 봄바람을 느끼며 사색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관악산 둘레길이다. 주 등산로와는 달리 한적해서 더 좋은 곳이 바로 관악산 둘레길인 것이다.

 

 

■ 도움말
 1. 필자가 행한 관악산둘레길 역사탐방은 관악산둘레길 1, 2코스에서 이루어졌다.
 2. 코스: 낙성대역 ▶ 낙성대 ▶ 서울대입구 ▶헬기장 ▶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당
 3. 이동거리: 약 7km / 이동시간: 3시간 정도 예상(쉬는 시간 포함)
 4. 교통편: 출발-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 종료- 삼성당 성당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철 2호선 신림역행 버스 탑승. 약 10분 정도 소요됨.

 

 

 

 

 

 

 

 

 

풍경 좋은 산, '머리 잘리는 산'이 되다___ 1편

 

서울에서 가까운 천주교 성지는? 절두산, 삼성산 그리고 마재성지

 

14.08.13 11:29 최종 업데이트 14.08.13 11:29

 

 

 

 

 

 

 

 

 
▲ 절두산 성지 당산역 방면에서 바라본 절두산 성지. 뒤로는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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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4일부터 266대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다. 호세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라는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의 방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천주교 신자들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

비천주교 신자들도 그의 방문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선정될 정도로 그간 활발한 대외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노숙인을 초청하고, 분배의 정의를 역설하는 등 전임 교황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지만 역사 트레킹을 통해 천주교 성지 답사를 꾸준히 해왔다. 천주교 성지 탐방은 사찰 탐방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지금까지 천주교 성지 답사를 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 생각보다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성지를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이 기사는 서울 인근에 있는 천주교 성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맞춰, 우리 땅에서 천주교가 어떤 식으로 뿌리를 내렸고 또한 어떤 수난을 겪어 왔는지 공부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산, 절두산

 
▲ 척화비 절두산 성지 한 쪽 편에 서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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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지나다 보면 절두산과 선유도를 볼 수 있다. 절두산은 옛날에는 '잠두봉'이라 불렸는데 선유봉(선유도)과 함께 빼어난 경치를 자랑했던 곳이다. 양천 현감이었던 겸재 정선은 <양화환도>를 통해 화폭에 이 풍광을 담아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해 이름이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와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재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렸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인 절두산(切頭山)으로.

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뤄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임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아홉 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병인박해가 원인이 돼 병인양요가 발생한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로즈 프랑스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그런데, 당시 로즈 제독의 침공은 자국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병인양요는 국가 대 국가간의 분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한 곳까지 올라왔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격분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라면서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을 가진 절두산으로 바뀌어 불리게 됐다. 병인박해는 1866년을 시점으로 1871년까지 계속 이어졌다.

약 150년 전, 절두산은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우뚝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서 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세 프랑스 신부가 운명 달리한 곳,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지 왼쪽부터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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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삼성산은 원효·의상·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다. 그런 삼성산에도 삼성산 성지라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한 것이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 탄압에 앞섰다. 그렇게 해서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로 넘어갔다. 그런 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혔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했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조성됐다.

이 성지는 산 중에 있어서 그런지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이다.

 

 

 

 


 

 

 

 

 

 

 

---> 소셜다이닝 <집밥>에 올린 삼성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공지글입니다.

공지에 나온대로 6월 14일에 계곡트레킹을 하러 갑니다! 잼나게~ㅋ

 

 

 

 

관악산( 삼성산) 숲길 트레킹? 혹은 계곡트레킹___ 삼성산 역사트레킹!



 

* 더운데 웬 트레킹이냐고요? 때양볕에서 걷다 일사병 날 수도 있다고요?

ㅋㅋㅋ

하지만 숲길이나 계곡길을 걸으면 여름에도 트레킹을 할 수 있답니다.

숲길에서는 일사병이 일어나지 않거든요. 


그렇습니다. 이번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삼막계곡이라는 숲길을 따라 이동합니다.

그래서 한 여름에도 트레킹을 할 수 있답니다.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지난 5월 10일에 이미 한 번 실시를 했었답니다. 

그때 반응이 좋아서 한 번 더 해보려합니다. 사실 이 삼성산역사트레킹을 끝으로

상반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날씨가 너무 덥거든요. 올 가을에나 다시 재가동

될 거 같습니다. 



중간 중간에 사진 촬영이 있습니다. 이 점 양지해 주세요. 사진 촬영이 별로인 분들은
스키마스크 착용을 추천 드립니다!~ㅋ 



아래는 지난 5월 10일 모임에 사용했던 초대장인데 재활용(?) 해 봅니다!


***


혹시 그거 아세요? 서울 인근에 불국사보다도 더 오래된 사찰이 있는 거?

그 절이 어디냐고요? 바로 삼막사라는 사찰입니다. 

원효, 의상, 윤필의 세 성인께서 창건을 했다해서 삼막사라는 명칭이 붙여졌답니다.


한편 삼막사가 있는 산의 이름은 삼성산인데 그 세 분이 이 곳에서 수도를 했다해서

삼성산이라 불립니다. 사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입니다. 바로 옆동네 산이라는 뜻입니다.

통칭으로는 그냥 다 관악산으로 불리지요. 


이렇게 유서가 깊은 곳이라 그런지, 이 삼막사는 진관사, 불암사, 승가사 등과 

함께 서울의 4대 명찰로 불리는 곳입니다. 


이 곳에 올라서면 약간 강원도 산골짜기 분위기가 풍겨집니다. 또 산 정상 부근에 자리잡은 

사찰의 모습도 정감 있어 보입니다.    


아참 이번 트레킹에서는 만안교 탐방도 합니다. 만안교는 정조대왕 시절에 건립된 돌다리인데, 지금도

그 동네사람들은 만안교를 지나다닙니다. 박물관에 있는 다리가 아니라 지금도 실제로 동네 사람들이

애용하는 다리가 바로 만안교랍니다. 


한가지 더: 조선 후기시대에 제작된 다리도 직접 걸어보고, 삼막사를 

탐방을 하니, 이번 역사트레킹의 명칭이 <삼성산 역사트레킹>이 되었답니다.



일시: 2014년 6월  14일 토요일 오후 1시


집결장소
:  지하철 1호선 관악역 1번 출구

이동경로:  관악역 ▶만안교  경인교대 입구 삼막사 계곡  삼막사  ▶ 염불암 ▶ 안양예술공원 

이동거리: 약 8km / 약 4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쉬는 시간 포함)

 

난이도: 중 ---> 계곡트레킹입니다. 체력이 필요합니다만 그래도 지난번 참가자 분들도 무리 없이 다 완주를 했답니다. 


준비물: 여분의 옷, 배낭(백팩), 트레킹화(등산화) ---> 운동화를 신어도 상관없으나 가급적 트레킹화나

등산화를 준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의점: 장시간 트레킹을 하는 것이니 가급적 편한 복장을 해주세요. 
출발 즈음에 가볍게 스트래칭을 할 예정입니다. 아웃도어를 하기 전에는 꼭 스트래칭을!!!


참고사항:  당일날 햇살이 강할지 모르니 모자나 썬크림 등을 준비해주세요. 해가 떨어지면 추워집니다.

여분의 옷도 준비해주세요!

 


비용: 비용은 8천원입니다. ---> 식수, 간식, 리딩비 , 집밥 수수료 포함입니다.  

 

 

 

 

 

 

 

 

 

 

 

 

 

 

 


날씨가 무척 덥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해왔던 역사트레킹도 당분간 휴업상태에 

들어갑니다. 올 가을 경에나 다시 재개장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아쉽네요. 저만 아쉬운가요? ㅋㅋㅋ


그래서 관악산 야간산행을 해보려고 합니다. 야간산행은 주간산행과는 아주 다른

짜릿함을 전해 줍니다. 그런 맛에 취해 저는 한동안 야간산행을 즐겨했었지요.


그런 짜릿함을 집밥 식구분들과 함께 느껴보고자 야간산행 모임을 개설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오셨으면 합니다.



사진 나오는 것처럼 헤드랜턴을 꼭 준비해 오셔야 합니다!



 

1. 주간산행은 해보았으나 야간산행은 처음인 분

2. 무조건 야간산행을 한 번 해보고 싶으신 분

3. 관악산 부근의 야경이 보고 싶으신 분

4. 신림동 부근 혹은 신림동과 가까운 곳에 거주하시는 분  

5. 지갑이 두꺼워 택시비가 두렵지 않은 분

 


대신 체력이 약하신 분들은 다음 기회를 노려주세요. 어떻게 보면 야간산행은

자신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만큼 제약이 많이 따르는

아웃도어 활동이라는 뜻이죠. 


그런 제약들을 뚫고 한 여름 밤에 관악산 야간산행을 해보는 겁니다. 그리고는

신림역 부근에서 재밌게 뒤풀이를 해보는 것이죠.




 

일시: 2014년 6월  14일 토요일 오후 4시 30분


집결장소
:  지하철 1호선 관악역 2번 출구

이동경로:  관악역 ▶(버스이동) ▶ 경인교대 입구   삼막사  ▶ 호압사 ▶ 삼성산 성당

이동거리: 약 7km / 약 4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쉬는 시간 포함)

 

난이도: 중상 ---> 야간 산행입니다. 이 점 염두해 두세요!


준비물: 헤드랜턴, 여분의 옷, 배낭 ---> 헤드랜턴은 꼭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주의점: 꼭 헤드랜턴을 준비해 오세요. 야간 산행용 헤드랜턴은 좋은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굳이 비싼 것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제 경험상 다이소나 땡마트에서 판매하는 헤드랜턴을 착용해도 어렵지 않게 야간산행을 할 수가 있었답니다.  

대신 건전지는 새 것으로 준비해 주세요!

 

 

 


 

 

 

 

 

 

 

 

 

 

 

 

 

 

 

 

 

 

 

 

 

 

 

 

 

 

 

 

 

 

 

 

 

 

 

---> <삼성산 역사트레킹> 정조대왕을 생각하며 행했던 역사트레킹___ 2편입니다.

 

 

 

울창한 숲길, 삼막계곡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삼막천을 따라 이동을 한다. 삼막천은 삼성산에서 발원된 작은 하천으로 그 상류 위쪽에는 삼막사가 터를 잡고 있고, 그 하류에는 현재 만안교가 놓여있다. 만안교를 지난 삼막천은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안양천과 합수된다.

복날이 한참 남은 5월이었지만 날씨는 한여름이었다. 땀방울이 눈앞을 가릴 정도로 흘러내렸다. 봄소풍 같은 역사트레킹을 기대했지만, 때 이른 더위로 자꾸 나무그늘만 찾게 됐다. 필자도 지쳐갔고, 팀원들도 지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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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막계곡 밖에는 햇살이 강했지만 계곡 안쪽 숲길은 나무그늘이 져서 트레킹 하기에 적당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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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삼막계곡에 들어서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솟구쳤다. 계곡을 끼고 있는 숲길로 들어선 것이다. 아무리 강한 직사광선이 내린다고 해도 숲속에 있으면 탈진할 일이 없다. 숲속이 강력한 '선크림'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한 여름이라도 숲 속에 있으면 탈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원한 나무그늘에 있으면 원기가 회복된다. 이런 숲길을 걷는다면 한 여름 태양 아래에서도 트레킹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듯 싶었다.

1시간 정도 계곡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삼막사에 도착했다.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삼막사

삼막사는 677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원효, 의상, 윤필 3대사가 막(幕)을 치고 수행을 하다가 그 후에 절을 지으니, 그 절이 삼막사가 된 것이다. 삼성산의 명칭 유래도 마찬가지다. 원효, 의상, 윤필의 성인이 수도를 한 곳이라 하여 삼성산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서두에서 필자는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개창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불국사의 창건은 751년으로 잡는다. 그러면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무려 70년 정도 앞선 연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유서가 깊어서인지 삼막사에는 수많은 선승들이 머무르며 수도에 정진했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 고려시대에는 나옹선사,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와 사명대사,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 특히 조선왕조 개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는 삼막사에서 새로운 왕조에 대한 융성을 기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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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막사 산 정상 능선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삼막사는 사방이 트여있는 형세다. 그래서 좋은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사진은 올해 3월 달에 촬영한 것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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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막사 돌부적 지운영이 그린 돌부적. 지운영은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으로,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는데 그림과 글씨에 능했다고 한다. 지운영은 한 때 삼막사의 한 암자에서 은거하며 수도를 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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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건, 달리 말하면 삼막사가 좋은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멀리서 삼막사를 봤을 때, 기운이 사방으로 트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삼막사는 정상부 능선 부근에 자리 잡고 있어 그곳에 올라서면 멀리 인천과 서해바다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데 그런 입지적 조건이 삼막사의 기운을 '쾌'하게 생성시키는 것 같았다. 이런 좋은 기운 때문인지 삼막사는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으로 지칭됐다. 또한 진관사 등과 함께 서울 인근의 4대 명찰로 불리게 됐다.

삼막사에는 무학대사가 중수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1880년(고종 17년)에 지어진 명부전과 그 다음해 지어진 칠성각 등의 당우(堂宇)들이 배치되어 있다. 또 고려중기 시대에 건립된 3층 석탑과 조선 후기시대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불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낮에는 세상을 집어 삼킬 듯 강력하게 내리쬐었던 해가 어느덧 서쪽 하늘에 걸려 '붉은 노을'이 되어 있었다. 삼막사 부근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일품이라, 보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삼막사 아래에 있는 염불암 탐방을 끝으로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됐다.


정조대왕은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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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구릉 삼막사 위쪽에 가면 바위구릉이 있는데 그 곳에서 바라본 관악산 연주대 방면. 관악산이 돌산이라는 사실을 이 바위구릉에 올라서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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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마치기 전에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보겠다.

앞서 필자는 만안교에 얽힌 정조대왕의 애민 정신을 언급하였다. 인근백성들이 '만년동안 편한하게' 건널 수 있도록 튼튼한 돌다리를 축조하고, 그 이름을 직접 지었다는 것만으로도 백성을 중시했던 정조대왕의 마음 씀씀이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능행차 중, 격쟁(擊錚)을 통해 백성들의 호소를 직접 듣고 '민원처리'까지 해주던 개혁군주의 모습을 떠올리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것이다.

만약 정조대왕이 세월호 참사를 수습하는 수장이었다면 어떤 조취를 취했을까? 뚱딴지 같지만 필자는 그런 상상을 해보았다. 정조대왕이 수장이었다면 최소한 '청와대는 재난 수습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며,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자신들의 책임을 등한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경호의 원칙을 스스로 깨면서까지, 단순 조문객을 유족으로 둔갑시켜 '조문 빅 쇼'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느긋하게 용상에 앉아 행하는 '착석 사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조대왕이 수장이었으면 절대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책임을 통감하며, 크게 사죄하고 사태수습에 만전을 기했을 것이다. 자신의 책무를 발뺌하지 않고, 백성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었을 것 같다.

200여 년 전 백성들의 안전과 편안함을 위해 튼튼한 돌다리를 축조해 준 정조대왕이 그리운 봄날이다.


● 도움말

1. 삼성산 역사트레킹 코스: 만안교 ▶ 경인교대 정문 ▶ 삼막사 초소 ▶ 삼막계곡 ▶ 삼막사 ▶ 염불암 ▶ 안양예술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 소요시간: 약 4시간(쉬는 시간, 삼막사 일대 탐방 시간 포함)

3.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삼막천을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중간에 길을 잃을 염려가 없음. 또한 삼막계곡을 통과하기에 한 여름에도 트레킹을 진행할 수 있음.

4. 교통편: 수도권 전철 관악역 1번 출구에서 하차하여 남쪽으로 500미터 정도 이동하면, 만안교에 닿을 수 있다. 종료 한 후에는 안양예술공원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관악역으로 이동함. 안양예술공원과 관악역은 버스로 5분 거리임.

 

 

 

 

 

 

 

 

정조대왕을 생각하며 행했던 역사트레킹

 

집밥 식구들과 함께 한 삼성산 역사트레킹

14.05.15 19:15     최종 업데이트 14.05.1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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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안교 1795년, 정조 19년에 축조된 만안교. 건립된지 20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튼튼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돌다리를 씩씩하게 걷고 있는 삼성산 역사트레킹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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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질문 두 가지! 서울 인근에 경주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진 사찰이 있다면? 또 그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한 돌다리가 있다면?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분명 이런 물음에 흥미를 느끼실 것이다.


불국사보다 더 오래됐다는 사찰은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라는 사찰이고,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된 다리는 만안교라는 석교(石橋)다. 이 두 장소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여 이동할 수 있고, 또한 편리하게 수도권 전철을 타고 탐방할 수 있다. 필자는 그런 만안교와 삼막사를 묶어, 일명 '삼성산 역사트레킹'을 진행하였다.

지난 10일, 날씨는 조금만 움직여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5월 날씨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때 이른 더위였다. 필자 단독으로 행하는 트레킹이면 땡볕이든 폭풍우든 상관이 없지만, 단체트레킹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번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소셜다이닝 '집밥'에서 사람들을 모아, 함께 트레킹에 나섰기 때문이다.

'트레킹이나 등산하고는 담 쌓은 사람들도 올지 모르는데... 그러다 낙오자라도 생기면... 이거 잘못하면 욕만 바가지로 먹는 거 아냐?'

 

 

화산 능행차와 만안교(萬安橋)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관악역 1번 출구에서부터 시작된다. 1번 출구에서 나와 안양역 방면으로 약 5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만안교를 만날 수 있다.

1795년 축조된 만안교는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를 위해 만들어졌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이장을 한다. 그리고는 자주 참배에 나섰는데 이를 두고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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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안교 사진에서 보듯 만안교는 인근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생활속의 다리다. 박물관에 있는 잘 모셔진(?) 다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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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능행차는 도성에서 동작나루를 거쳐 남태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이후 시흥과 안양을 거치는 길로 변경된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지형적인 한계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다른 사정도 있었다. 과천 행차로에는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상로는 사도세자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하기 위해 떠나는 능행차 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상로 형제의 묘소를 지나는 것이 탐탁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1794년 이후부터는 능행차 노선이 시흥과 안양 방면으로 변경된 것이다.

당시 왕의 행차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 등을 가설한 후, 행차가 끝난 뒤에는 철거 하는 방식이 반복됐다. 이에 정조는 그런 번거로움을 피하고, 인근 주민들이 평상시에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하천을 넘을 수 있게 튼튼한 돌다리(石橋)를 건설하라고 왕명을 내린다.

석교의 축조에는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될 정도로 큰 공사였지만 공사 기간은 3개월 정도였다. 그렇게 왕명으로 지어진 돌다리는 길이가 31.2m, 넓이가 8m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된다. 왕의 뜻대로 인근 백성들도 안심하고 하천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돌다리가 놓이게 된 것이다. 이 다리를 두고 정조대왕은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로 만안교(萬安橋)라는 이름을 직접 작명하였다.

 

 


백성들을 위해 튼튼한 돌다리를 축조한 정조대왕

한편, 원래 만안교는 지금의 자리보다 남쪽으로 200m 지점인 삼성천 위에 축조됐지만 1980년 국도 확장 공사시에 지금의 삼막천 위로 옮겨지게 됐다. 이 다리가 놓여 있는 안양시 만안구의 명칭은 만안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만안교는 무지개교라 불리는 홍예교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홍예교 중에서 가장 큰 다리로 모두 7개의 아치가 놓여 있다. 판석과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축조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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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안교 밑줄친 부분은 현재의 만안교의 위치고, 동그라미 부분이 옛 만안교의 위치다. 애초 만안교는 세로로 놓였지만 현재의 위치로 이전할 때는 90도로 각도를 틀어 가로로 놓이게 됐다. 네이버 지도 사진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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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처음 만안교를 탐방했을 때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4대문 밖, 그것도 한강 이남에 이렇게 정교하고 거대한 아치형 석교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돌다리는 박물관에 갇혀 있는 죽은(?) 다리가 아니라 지금도 인근 주민들이 건너다니는 살아있는 '생활' 다리였다는 점이다.


이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진두지휘하는 화산 능행차를 볼 수 없고, 다리 주위로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정조대왕의 바람은 계속 이어지는 듯싶다. 인근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하는, 그런 애민 정신 말이다.

돌다리를 넘으면서 필자는 한마디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조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다리를 걷고 있습니다.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까지 튼튼한 돌다리를 넘고 있는 거죠."

역사트레킹팀은 정조대왕의 애민 정신을 곱씹으며 튼튼한 돌다리를 씩씩하게 걸어 다음 코스인 삼막사 계곡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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