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3편>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필연이든 우연이든 역사적 라이벌과 관련된 테마를 언급하게 된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다룬 무학대사와 정도전, 즉 불교세력 VS 유교세력 간의 라이벌 대결이 좋은 예이다. 인물이 아닌 자연지형물 간의 대결도 있다. <낙산 역사트레킹>에서 서울의 좌청룡(낙산)과 우백호(인왕산) 간의 대결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정릉 역사트레킹도 라이벌과 관련이 있다. 누구와 누구 간의 라이벌일까?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일단 한 명은 나왔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 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정릉: 필자가 탐방했을 때는 비가 많이 온 다음이어서 그랬는지 봉분에 방수포를 덮었었다. 보시다시피 정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무척 단출하다. 뺄셈을 당한 것이다.

 

 

 

 

 

 

●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 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 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병풍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에서 정자각 및 부속건물들을 내려본 모습.

 

 

 

 

 

 

 

●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들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이 대화들은 청계천 광통교를 탐방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신덕왕후의 능을 탐방한 후에는 정릉 숲길을 따라 걷는다. 정릉 자체보다 정릉 숲길이 더 좋다고 할 정도로 숲길이 참 빼어나다. 30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고 1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는데 둘 다 좋다. 트레킹팀은 일부러 긴 코스를 걸었다.

 

이제 트레킹팀은 흥천사(興天寺)로 향한다. 정릉에서 나와 위쪽 주택가로 길을 잡으면 흥천사 표지판이 나온다. 왕릉의 정문을 통해 나오니 바로 주택가가 나오는 것도 정릉의 특징이다. 큰 주차장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구릉이나 서오릉 같은 곳과는 차이가 확연하다. 숲길을 좋아하는 주민들은 아예 정릉 숲길에서 산책을 할 정도다. 정릉이 속해있는 성북구 주민들에게는 50% 할인이 적용된다. 성인 입장료가 1천 원이니 할인을 받으면, 500원으로 매일같이 정릉 숲길을 걷는 것이다. 무척 부럽더라.

 

 

 

 

 

 

 

* 석각신장: 청계천 광통교 교각 부분에 있는 석각신장. 머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정릉의 봉분을 두루고 있던 병풍석이었는데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이상한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릉의 봉분이 단출할 수밖에...

 

 

 

 

 

 

● 정릉의 원찰 흥천사

 

흥천사는 정릉의 원찰이다. 신덕왕후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했던 태조 이성계였기에 원찰을 크게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흥천사는 1397년에 170여 칸의 대가람으로 탄생했고, 창건과 동시에 조계종의 본산이 된다. 1년 후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각(舍利閣)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흥천사도 정릉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다. 흥천사는 정릉처럼 중구 정동에 세워졌다. 정릉이 현재의 자리인, 성북구로 옮겨진 후로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이때에는 원찰이 아닌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는 왕실 사찰이 된다. 하지만 성종 이후에는 쇠락해졌고 1504년(연산군10)에는 큰 화재가 나서 사리각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불에 타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다 1510년(중종5)에는 남아있던 사리각까지 불타 없어진다. 이렇게 사찰이 쇠락하니 그 안에 있던 기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게 보물 1460호로 지정된 흥천사 동종이다. 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에 전시되어 있다. 범종이 사찰이 아닌 궁궐에 있는 것이다.

 

흥천사는 1569년(선조2)에는 왕명에 의해 정동 생활을 마감하고 ‘함취정’이라는 정자터에 다시 세워진다. 이때는 이름을 바꿔 신흥사(新興寺)로 불렸다. 그러다 1669년(현종10)에 신덕왕후가 복권됐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자리인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전하여 중창된다.

 

신흥사에서 흥천사로 제 이름을 다시 찾게 된 건 1865년(고종2) 때였다. 흥선대원군은 대방을 짓고, 그 대방의 현판을 쓰는 등 흥천사의 중창에 큰 역할을 한다.

 

어렵지 않은가? 연도도 많이 나오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솔직히 정릉골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참 많이 애를 먹었다. 위에 저 내용을 트레킹팀 앞에서 해설을 했다고 생각해보시라!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 그래서 정리를 해본다.

 

1. 1397년 정릉과 흥천사 만들어짐

2. 1409년 정릉, 성북동으로 천장됨

3. 1569년 흥천사가 신흥사로 이름을 바꿔 옛 함취정 자리에 들어섬

4. 1669년 신덕왕후 복권됨

5. 1794년 신흥사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 중창됨

6. 1865년 흥선대원군이 중창을 하고, 흥천사로 이름을 다시 고침

 

흥천사는 사찰 탐방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본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대방, 명부전 등의 가람들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흥천사 대방의 겨울

 

 

 

 

 

 

 

● 이름값 하는 산사 가는 길

 

이제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의 동쪽편을 따라 걷는다. 차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북악하늘길을 걷는 것이다. 계속 북악하늘길을 따라 걷다 북악골프연습장이 나오면 숲길로 들어선다. 이 숲길은 ‘산사 가는 길’이라는 도보여행길이다. 북악산 북쪽편에는 작은 사찰들이 많은데 그 사찰들을 연결한 길이다. 북악하늘길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가 다니는 길이라 산사 가는 길보다 못하다. 산사 가는 길은 진짜 이름값을 한다. 직접 걸어보시길 권한다.

 

역사의 라이벌은 참 많이도 있었다. 싸움 구경이 재미나듯이, 역사가들에 의해 싸움 붙여진 라이벌들도 많을 것이다. 라이벌은 선의의 경쟁관계로 있어야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는 라이벌은 비극만을 초래할 뿐이다. 특히 권력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더 그렇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 흥천사의 본당 극락전

 

 

 

 

 

 

 

 

* 정릉 숲길

 

 

 

 

 

 


 

 

 

 

■ 정릉골 역사트레킹

 

1. 코스: 정릉 ▶ 흥천사 ▶ 북악하늘길 ▶ 산사가는길 ▶ 전망대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경전철 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 / OUT: 국민대 ☞ 국민대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정릉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2편>

 

 

역사트레킹 리딩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불만 섞인 지적을 받게 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필자에게 쏟아내는 욕구들도 다양했던 것이다. 역사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팔자에도 없는 욕을 먹게 될 거라는 건 각오를 했다. 하지만 서로가 충돌하는 욕구들을 쏟아낼 때는 참 난감해진다.

 

- 코스의 물리적 난이도가 너무 높다 혹은 너무 낮다

- 이동 속도가 너무 빠르다 혹은 너무 느리다

- 해설의 수준이 너무 높다 혹은 너무 낮다

- 막걸리를 못 마시게 해서 너무 싫다

 

일부 수강생분들 중에는 엄청난 여행 경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 엄청난 등산 경력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다. 그런 베테랑들에게 역사트레킹은 성이 안 찰 수도 있다. 7~8km 밖에 되지 않는 구간을 4시간에 이동을 하니 그 분들이 보기에 너무 느린 것이다. 평지 기준으로 보통 성인이 한 시간에 4km 정도를 이동하니 그 분들은 2시간 남짓이면 해당 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트레킹은 테마를 따라가는 느림보 트레킹입니다. 소걸음 걷듯이 아주 느긋하게 소풍 맞은 아이들처럼 그렇게 재밌게 걸을 겁니다.”

 

이렇게 사전에 계속 안내를 하지만 ‘너무 느리다’라는 컴플레인은 꾸준히 제기됐다. 그런 컴플레인을 제기했던 분들은 다음번 강의에서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불만이 다는 아닐 거다. 아무래도 막걸리를 못 마시게 해서 그런가...

 

 

 

 

 

 

* 이말산의 봄

 

 

 

 

 

 

● 이름도 독특한 이말산

 

이번에는 삼천사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말산(莉茉山)에서 시작된다. 이말산은 3호선 구파발역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곳인데 산이라고 칭하지만 작은 언덕배기에 불과하다. 해발이 겨우 132미터 정도니까. 구파발역 옆에 있는 통일로를 건너가면 앵봉산으로 갈 수 있는데 앵봉산 남쪽에는 유명한 서오릉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반대로 구파발역에서 이말산을 계속 타고 가면 북한산 서쪽편이 나온다. 즉 이말산은 앵봉산과 북한산의 중간에 있는 작은 산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말산은 이름이 참 독특하다. 명칭이 독특해서인지 동명이산도 없다. 실제로 검색을 해봐도 구파발 이말산이 유일하다. 그럼 이말(莉茉)은 무슨 뜻일까? 재스민을 한자로 풀면 '이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말산은 재스민이 만발한 산이라는 뜻이다. 이말산에 재스민이 많이 피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산에는 무언가가 확실히 많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무덤이다.

 

특히 이말산에는 내시를 비롯한 궁인들의 무덤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북한산의 지산인 이말산은 한양도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성저십리 밖이라 무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저십리(城底十里)는 도성에서 십리(4km)까지의 거리를 뜻하는데 성저십리까지는 무덤을 쓰지 못하게 했다. 북한산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말산은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무덤을 쓰기에 적당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의주로를 따라 비교적 편하게 당도할 수 있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의주로는 지금의 통일로다.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전에 소개한 <진관사 역사트레킹>과 여러 면에서 겹쳐진다. 동쪽편과는 다른 북한산 서쪽편의 이야기, 거기에 잠들어 있는 궁궐사람들의 이야기 등등... 실제로 진관사와 삼천사는 북한산 응봉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자리를 잡고 있다. 두 사찰 사이의 직선거리가 1km도 안 될 정도로 아주 가깝다. 그러니 이번편 삼천사 역사트레킹과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교차해서 살펴보시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 이말산: 주인을 잃은 석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 죽어서까지 서럽다

 

거대한 암봉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북한산은 골산(骨山)의 면모를 보인다. 이와 달리 해발 130미터 정도의 이말산은 육산(肉山)이라고 할 수 있다. 푸근한 동네 뒷산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현재 이 산의 무덤들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다. 쓰러진 문인석, 뒹굴고 있는 묘비, 잘려나간 망주석 등등... 자신들의 '씨앗'을 남길 수 없었던, 그래서 후손들을 둘 수 없었던 내시들이었기에 그런 황량함이 더 애절하게 느껴진다. 물론 예전 내시들 중에는 양자를 드려 자신의 제사를 받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양자도 후손을 둘 수 없는 이들이었기에 그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후손이 없는 무덤은 버려진 것과 다를 바 없다. 봉분은 깎여 나가 평평해지고, 그 주위에 세워둔 석물들은 쓰러진다. 그 중 잘 생긴 문인석은 누군가의 손에 들려 나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도둑을 맞는 것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서러운데 더 서러운 일도 있다. 2010년을 전후로 해서 이말산 부근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유명한 은평 뉴타운이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 입주민들이 이곳에 있는 무덤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민원을 넣은 것이다. 아파트 창문을 열면 바로 무덤들이 보이니 무섭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뉴타운보다 무덤이 더 오래됐다. 그 무덤들이 먼저 들어섰고, 몇 백 년 후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뉴타운이 굴러온 돌인 것이다. 그리고 이말산에 있는 궁인들의 무덤은 그자체로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

 

 

 

 

 

 

 

* 문인석: 머리가 잘려나간 문인석. 누군가 일부러 머리 부분을 자른 것처럼 절단면이 반듯해보인다. 주인이 없는 무덤가라 그런지 문인석들도 크게 훼손됐다.

 

 

 

 

 

 

 

● 북한산의 고봉들이 반겨주는 삼천사

 

이제 트레킹팀은 삼천사로 향한다. 삼천사는 661년(문무왕1)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웃한 진관사가 천년고찰이면서 서울의 4대 명찰로 불리지만 창건연대에서는 삼천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진관사는 1010년, 고려 현종 때 건립됐으니 삼천사가 그보다 400년이나 앞서 세워진 것이다.

 

삼천사는 한때 3000명의 수도자가 불도를 닦았을 정도로 크게 융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크게 손상을 입는다. 한국전쟁 때도 크게 불에 타는데 지금의 전각들은 1960년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때 복원을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터를 잡은 것이다. 오리지널 삼천사 터는 계곡을 따라 약 30분 정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현재의 삼천사에 들어서면 북한산 서쪽편의 고봉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계곡을 따라 장군봉, 나한봉, 나월봉, 보현봉... 그 다음에 뭐였더라? 그렇게 우뚝우뚝 서있는 고봉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심지 빌딩숲에 펼쳐진 인공의 스카이라인이 밋밋하게 여겨진다.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눈을 정화했다면 이제 부처님을 향해 갈 차례다. 삼천사에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마애불이 있는데 그 부처님을 만나 뵈러 가는 것이다. 보물 657호로 지정된 ‘서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을 뵈러 가는 것이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개성미가 넘치는 석불들이 많이 등장한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안동 제비원 석불, 파주 용미리 쌍미륵 등등... 이 시기에 등장한 석불들은 거대한 사이즈를 자랑하는데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약 18미터에 달할 정도다. 그렇게 어마어마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로 자리매김했다. 1등이라는 말이다.

 

돌장승같이 석불들이 큼직큼직하니 균형미나 비례미는 떨어졌다. 신체비율에 안 맞게 얼굴을 크게 부각하여 3~4등신으로 만들어진 석불도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개성미가 넘치게 된 건 그 당시 정치상황과 연관이 있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호족세력들이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는데 그런 사회상황이 석불 제작에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 삼천사: 뒤쪽으로 북한산의 고봉들이 펼쳐져 있다.

 

 

 

 

 

 

 

● 같은 고려 전기에 제작됐지만 삼천사 마애불은 다르다

 

11세기경에 제작됐으니 삼천사 마애불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된 고려 전기에 제작된 석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세련미와 균형미가 잘 갖추어졌다는 뜻이다. 격식을 파괴한 듯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이는 거대한 석불과는 차이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대웅전을 돌아 위쪽으로 올라가면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마애불(磨崖佛)은 벼랑애(崖) 자에서 보듯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환조(丸彫) 형식의 석상으로 되어 있다. 좀 어렵다. 학창시절에나 배웠던 미술용어도 나오고, 그보다 더 어려운 한자도 나왔으니까. 트레킹팀도 어려워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했다. 해설을 질을 떨어뜨렸다고 하지 마시라.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마애불은 벽에다 그리는 그래피티라고 생각하시고요, 환조는 이순신 장군 동상 생각하세요. 물론 동상은 금은동 할 때 그 동으로 만들었어요. 석상은 돌, 그러니까 스톤이고요. 오케이?”

 

삼천사 마애불은 신체의 비례가 잘 표현됐고, 승각기 등의 법복이 잘 그려졌다. 약 3미터 정도인 삼천사 마애불은 양각, 음각, 부조까지 다양한 기법들이 조화롭게 잘 스며들어 있다. 양각과 음각은 아실 것이다. 그럼 부조는? 부조(浮彫)는 돋을새김이라고도 하는데 평면에 형상이 도드라지게 만든 것을 말한다. 삼천사 마애불의 얼굴 부분을 보시면 부조로 잘 조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애불 앞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치성을 드린다. 이곳 아래로는 삼천사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다리 형식으로 복개를 하여 부처님에게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제작된 지 거의 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삼천사 마애불은 별로 마모가 되지 않고 뚜렷하게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석불 좌우에 뚫린 가구공(架構孔)에 당장이라고 목재를 끼워 지붕을 달 수 있을 정도로 가구공도 그 빤듯함을 유지하고 있다.

트레킹팀도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 기원을 드렸다.

 

“여러분 무슨 기원을 올리셨나요? 어쨌든 소중한 기원이 잘 성취됐으면 좋겠네요.”

 

글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역사트레킹은 테마를 따라가는 느림보트레킹이다. 쭉쭉 치고 나가는 걸 좋아하시는 분들은 역사트레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삼천사 역사트레킹과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따로따로 행하셨으면 좋겠다. 느긋하게 따로따로 행하는 게 더 기억에 남을 테니까.

 

 

 

 

 

 

* 삼천사 마애불: 고려 전기시대 작품

 

 

 

 

 

 

 

* 삼천사 마애불: 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음.

 

 

 

 

 

 


 

 

 

 

■ 삼천사 역사트레킹

1. 코스: 이말산 ▶ 진관근린공원 ▶ 삼천사 ▶ 삼천사계곡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 / OUT: 진관한옥마을 ☞ 삼천사계곡까지 탐방한 후 은평한옥마을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구파발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삼천사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1편>

 

 

 

 

* 철도공원

 

 

 

 

 

 

간단한 퀴즈로 시작해본다.     

 

- 태릉선수촌을 모르시는 분?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문제.   

  

- 그럼 태릉이 뭐하는 곳인지 아시는 분?     

 

문제를 못 맞히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 태릉 옆에 강릉도 있는데 강릉은 뭐하는 곳인지 아시는 분?     

 

일단 죄송하다. 독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책은 덮지 마시라. 정답은 아셔야 할 것 아닌가.     

 

 

 

 

* 옛 화랑대역: 역사트레킹 팀

 

 

 

 

 

 

● 커피 한 잔이 어울리는 간이역, 옛 화랑대역     

 

그렇다. 이번에는 태릉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태릉 역사트레킹은 철길을 걸으며 시작한다. 진짜는 아니고, 지금은 폐선이 된 경춘선 옛 철길을 걸으며 시작하는데  약 5분 정도 걷다보면 옛 화랑대역에 도착할 수 있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 잡고 있는 옛 화랑대역은 거대도시 서울과는 어울리지 않게 작고 아담한 간이역이다. 가을 낙엽이 떨어질 때는 커피 한 잔과 시집 한 권을 들고 서성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그런 곳이다. 

 

화랑대역은 1939년에 개통된 경춘선의 한 역으로 상업운영을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 역이 들어섰을 때는 화랑대역이 아닌 태릉역이었다. 그러다 1958년 화랑대역으로 이름이 바뀐다. 바로 옆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역명이 변경된 것이다.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이 화랑대다. 

 

목조건물로써 약 80년의 세월을 거친 옛 화랑대역은 좀 특이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좌우가 다른 비대칭 삼각형 형태의 지붕이 바로 그것이다.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길게 내려왔다. 일반적인 목조 간이역은 책을 뒤집어 놓은 박공지붕 형태를 취한다. 맞배지붕이라고도 불리는 박공지붕은 좌우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나 옛 화랑대역은 오른쪽이 쭈욱 더 내려와 있는 것이다. 건축용어로는 이어내림지붕이라고 말한다. 이런 독특한 모양을 갖춘 옛 화랑대역은 2006년에 국가등록문화재(300호)로 지정된다.  

 

2010년 경춘선은 복선화됐고, 옛 화랑대역은 더 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 역이 된다. 폐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화랑대역이라는 명칭이 아직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건 지난 2000년에 개통된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이다. 경춘선과 지하철 6호선은 다른 노선이다. 

 

기차가 달리지 않자 사람들의 발걸음도 끊겼다. 그러다 다시 옛 화랑대역을 사람들이 찾게 된다. 2018년에 철도테마공원인 화랑대 철도공원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기차들이 선로에서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청춘의 시절로 돌아간 듯 기차를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모두 다 행복한 표정이다. 달리지 못하는 그저 전시된 기차지만 이미 그들은 그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떠난 것 같았다. 필자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물어봤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네! 당연하죠!”     

 

그렇게 행복한 옛 화랑대역에서 달콤한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발걸음을 이어갔다. 이제 트레킹팀은 경춘선 옛 철길을 따라 태릉으로 향한다. 옛 화랑대역에서 태릉까지는 화랑천이라고도 불리는 묵동1천을 따라 걷는다. 작은 하천이지만 물과 함께 걸어서 참 좋은 길이다. 

 

일반적으로 서울에 있는 옛 철길들은 고층 빌딩에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옛 경의선 철길을 생각해보시면 된다. 도심지가 확장되니 기존에 있던 지상 철길 구간은 지하화 되고, 나중에는 공원으로 꾸며진다. 그래서 기차처럼 길쭉한 형태의 공원이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 철길 공원은 도심지에 폐철로가 있다는 점 이외에는 다른 공원들과 차이점이 별로 없다. 소음과 인파들 때문에 걷는 맛도 덜하다. 

 

하지만 화랑천을 끼고 걷는 옛 경춘선 철길 구간은 고독을 씹으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걷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소음도 별로 들리지 않고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그렇게 호젓하게 걷다보면 태릉에 도착한다.      

 

 

 

 

*옛 화랑대역: 사진에서도 보이듯 지붕이 비대칭이다.

 

 

 

 

 

 

● 태릉을 알려면 중종시대를 알아야 한다     

 

태릉이 뭐하는 곳인지 몰라도 태릉선수촌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릉은 1565년에 들어섰고, 선수촌은 1966년에 개촌 했으니 무려 400년이나 앞서 능이 조성된 것이다. 그래서 태릉(泰陵)이 뭐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하면 문정왕후가 크게 노여워하실지 모른다. 그렇다. 태릉에는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께서 잠들어 계신다. 

 

태릉에 들어서기 전에 입간판을 먼저 살펴보자. 태강릉이라고 적혀있다. 태릉에 왔는데 강릉? 강원도 강릉? 아니다.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그의 부인 인순왕후가 묻힌 곳이다. 이로써 앞서 제시한 퀴즈들의 답이 얼추 언급됐다. 퀴즈를 풀었다고 여기서 책을 덮으시면 섭섭하다. 이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태릉에 들어서면 의리의리한 그 넓이에 혀를 내두르실 것이다. 불암산 남쪽에 위치한 태릉은 단일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의리의리한 능역을 통해서 주인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다. 

 

윤지임의 딸인 문정왕후는 열일곱의 나이인 1517년(중종12)에 중종의 셋째 부인이 된다. 1515년에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가 왕자를 낳은 후 산후통증으로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장경왕후가 낳은 왕자는 이후 인종이 된다. 남한산성에서 굴욕을 당한 인조 말고 인종. 

 

좀 어렵다. 이 부분에서 교통정리 좀 들어간다. 일단 용어 정리부터. 문정왕후는 제2계비, 장경왕후는 제1계비이라고 했는데 그럼 계비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계비(繼妃)는 ‘임금이 다시 장가가서 얻은 부인’이다. 새어머니를 계모라고 부르듯이 왕의 새로운 부인을 계비라고 부른다. 

 

그럼 중종은 문정왕후, 장경왕후 이전에도 부인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있었다. 단경왕후가 바로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다. 중종이 조강지처라고 칭할 정도로 중종과 단경왕후는 금슬이 좋았다. 하지만 단경왕후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였기에 중종반정 세력들은 단경왕후를 폐서인으로 만들어 궁궐에서 쫓아냈다. 

 

신하들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중종이었기에 그렇게 자신의 조강지처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후 단경왕후는 평생 중종만을 그리워하다 삶을 마감한다. 경복궁 옆에 있는 인왕산에는 단경왕후가 치마를 흔들며 중종을 그리워했다는 치마바위가 있다.      

 

단경왕후(1739년 복위) - 장경왕후 문정왕후      

 

중종의 여인들이 이들 뿐이겠는가.  오죽했으면 ‘여인천하’라는 사극까지 있었을까.      

 

 

 

 

* 태릉: 정자각

 

 

 

 

 

 

●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지 못했다     

 

다시 태릉이야기. 앞서도 언급했지만 태릉의 능역은 크지만 단릉이다. 문정왕후 홀로 잠들어 계신다. 아들인 명종 재위시절 약 20년 동안 큰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아비인 중종 곁에 묻혀 있는 것이 맞지 않나?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생산했을 때는 1534년이었다. 입궁을 한지 무려 17년 만에 왕자를 출산한 것인데 30대 후반인 나이에 낳았으니 그때 당시의 기준으로는 노산이었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왕자를 생산했음에도 문정왕후의 앞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미 세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세자는 앞서 언급한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이었다. 

 

왕통을 이을 세자가 있는 마당에 중전의 몸에서 또 다른 적자(嫡子)가 탄생을 했다는 건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 있게 된다. 인조반정의 원인이 되었던 광해군의 인목대비 유폐와 영창대군 사사를 생각해보시라. 

 

1544년 문정왕후의 지아비인 중종이 숨을 거둔다. 왕위는 인종이 잇게 됐다. 그런데 인종은 재위 9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를 두고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인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경원대군이 1545년 왕위를 이어받아 조선 13대왕, 명종으로 등극한다. 이때 명종의 나이 12살이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 권력은 누가 휘둘렀을까?

 

중종은 죽고 나서 장경왕후와 함께 고양 서삼릉에 묻혔다. 그러다 명종 17년(1562) 지금의 자리가 길지라 하여 천장(遷葬)된다. 아버지 성종이 묻힌 선릉(강남구 삼성동) 옆으로 옮겨온 것이다. 사후에 자신의 지아비인 중종 옆에 묻히고자 문정왕후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공을 들였지만 문정왕후는 지아비와 함께 묻히지 못한다. 옮긴 중종의 능이 지대가 낮아 여름철에 비가 오면 그 일대가 다 잠겼기 때문이다. 결국 문정왕후는 중종과 멀리 떨어진 불암산 남쪽에 잠들게 된다. 홀로!    

 

 

 

 

* 연결숲길: 태강릉 연결 숲길.

 

 

 

 

 

 

● 태릉과 강릉을 연결하는 숲길을 따라     

 

자 이제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의 능이 있는 강릉을 향해 가보자. 강릉은 태릉과 언덕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는데 그 두 곳을 연결하는 숲길이 참 좋다. 말 그대로 왕릉의 숲이다. 산책로도 잘 정돈되어 있고, 나무들도 잘 가꾸어져 있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숲길이다. 산책로가 시원시원하고 널찍해서 그런지 언뜻 문경새재 길 분위기도 났다.

 

태릉에 비해 강릉은 무척 단출하다. 능역이 무척 소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명종은 죽어서까지도 문정왕후의 품에서 못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문정왕후가 1565년에 생을 마감했고, 명종은 1567년에 숨을 거두었다. 명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라 22년 간 용상에 앉아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치세 기간은 문정왕후 사후 2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위 기간 내내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식 사랑도 적당히 해야 한다. 과유불급!

 

그렇게 태강릉을 탐방한 트레킹팀은 산 중 호수인 제명호를 만나게 된다. 제명호는 미국인 선교사가 만든 인공호수인데 불암산 중턱부에 위치해 있어 산과 물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모습을 선사한다. 크지 않은 호수지만 그저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호수에 비친 불암산 봉우리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철도테마공원에서 행복해지고, 태강릉 숲길 힐링하고, 제명호에서 물에 비친 불암산을 바라보고. 아~ 좋다! 태릉 역사트레킹!          

 

 

 

 

 

* 강릉: 강릉의 참도

 

 

 

 

 


 

 

 

■ 태릉 역사트레킹

 

1. 코스: 옛 화랑대역 ▶ 경춘선철길 ▶ 태릉 ▶ 태강릉 연결숲길 ▶ 강릉 ▶ 제명호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6호선 화랑대역 / OUT: 삼육대학교 ☞ 삼육대학교 앞에서 6호선 화랑대역 방면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음.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이번 화는 전편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의 두 번째 이야기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제목에서처럼, 필자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산티아고’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셈이 됐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작성한 건 산티아고 순례길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필자는 여전히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동경심이 있고, 기회가 닿는다면 계속 방문을 할 예정이다. 다른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길을 걸으며 많은 감흥을 얻었고, 큰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만큼 필자도 ‘산티아고 앓이’를 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도발적인 글을 썼을까? 간단하다. 제대로 알고 가자는 의미에서 글을 썼다. 기왕 돈 들여, 시간 들여가는 길이라면 제대로 알고 가야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더 알찬 트레킹을 할 수 있을 테니까.

 

* 피스테라 가는길

●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피스테라(Fisterra)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한다.

많은 여행책자들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어쨌든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도 그렇게 피스테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말도 떠올랐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다.

 

                        * 피스테라 위치: 구글 지도 변형

●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로 가는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여있는 형태였다.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서게 된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선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던 곳이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으니까.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볼 수 있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였다.

 

 

* 피스테라 표지판

 

● 피스테라와 야고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이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그곳을 유럽대륙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피스테라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스테라는 필자가 반복해서 기술한대로 스페인의 땅끝이지 유럽 대륙의 땅끝은 아니다.

정확히 유럽 대륙의 땅끝은 호카 곶(Cabo de Roca)이다. 호카 곶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깎아질 듯 서 있는 해안절벽이 일품인 곳이다.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을 말할 때 두 가지로 분류를 해서 말한다. 튀어나온 규모가 크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곶’이 된다. 유명한 포항의 호미곶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다. 북한 쪽에서는 장산곶이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대한 환상(?)을 한 가지 더 깨볼까 한다. 전편에 ‘야고보 성인은 이베리아반도에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서술했다. 그 서술을 따라가 보면, 야고보의 시신이 담긴 배가 예루살렘에서 피스테라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뻔한 당시의 항해 기술은 둘째 치고, 사역을 하지도 않은 곳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전도자는 없을 테니까.

 

 

*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그렇다면 피스테라가 왜 야고보와 연결이 됐을까? 아무래도 야고보의 존재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피스테라가 동원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로마인들은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도착하여 별들의 들판이라는 산티아고 콤프스텔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정리될 수 있겠다. 이런 전개 과정 자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로마인들이 세상의 끝을 호카 곶으로 판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 호카 곶과 야고보가 서로 연결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환상이 다 깨졌다고 해도 피스테라는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곳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안절벽들을 따라 가다보면 땅끝 등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의 모습은 일품 중에 일품이다. 이곳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띄우는 의식을 행한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자신의 것들을 불태우는 것이다. 실제로 등대 근처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태운 신발과 옷가지의 흔적들이 널려 있었다.

피스테라는 그런 장소였다. 무언가 의식을 행하거나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소였다는 것이다. 마치 해남 땅 끝에 가면 무언가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필자도 대서양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 앞에서 다짐을 한 말치고는 무척 소박한가? 그래도 상관없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허상과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일들을 척척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괴롭게 되새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서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하다.

 

 

* cee: 피스테라를 가기 전에 만나는 cee라는 항국 도시. 매력적이다.

●남북한 순례자들이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면?

순례길은 화합의 길이었다. 지역감정으로 유명한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스페인 내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앙숙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발트3국) 청년들이 서로 의지를 하며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었다. 도보여행을 하는데 국적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소용이 없을 테니까.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그게 바로 순례길에 녹아 있는 정신일 것이다. 그런 정신들이 길 위에 뿌려지고, 뿌려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사랑하는 것일테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북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일일 될 것이다. 함께 격려하며 돕고, 먹을 것을 나누고... 힘들 때는 함께 아리랑도 부르고! 상상만으로도 참 흥미롭다.

 

 

 

* 피스테라 가는길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16편으로 종료가 됐다. 이제 두 편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필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들은 넘치고 넘치지 않았던가. 필자까지 거기에 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간의 통념을 깨려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제목도 저렇게 지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읽으신다면 그 환상이 깨질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 산티아고 순례길

 

●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이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지금은 2만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엄청난 영향을 준 셈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니까.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꼭 한 번은 다뤄봐야 하지 않겠나?

 

* 산티아고 순례길

 

 

●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한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온다.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년 7월 25일에 참수를 당한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이베리아반도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한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던 것이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한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길’)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여행기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장식된 야고보 성인.

 

●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린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종교다원론자(?)인 필자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필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바로셀로나가 있는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산티아고 대성당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하였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

 

 

* 산티아고 순례길: 저렇게 평원길을 많이 걷는다.

 

●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건립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침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던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셈이다.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위치. 구글 지도 변형.

●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한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

 

* 산티아고 순례길: 용서의 언덕에 선 필자.

ps. 이렇게 기존의 통념을 깨는 글을 쓰고 있지만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할 생각이다. 왜?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매력 있는 길이니까. 실제로 필자는 2014년 첫 방문 이후, 2018년과 2019년 연이어 방문을 했었다. 그 시간이 참 뜻 깊었다.

어떤 식으로든 필자는 야고보 성인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다. 뜻하지도 않은 짐을 지고 있는 야고보 성인의 어깨를 가볍게 해드리고 싶어 이 글을 쓴 것이다.

 

- 나답게 산다

- 한 박자 늦어도 상관없어

- 내 마음의 종소리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까지 <트레킹은 생각창고>에 실린 제목들이다. 나머지 제목들도 있지만 지면관계상 5개 정도만 가져와봤다.

이렇게 제목들만 놓고 보니 이 원고가 역사트레킹을 담고 있는 것이 맞나 할 정도로 트레킹이나 아웃도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트레킹 원고라면 올레길, 둘레길을 전면에 배치하는 게 일반적이다. 책표지는 수려한 풍광 속을 한들한들 걷고 있는 도보여행자의 원거리샷 사진이 빠지지 않고 장식한다.

그런점에서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통상적인 면에서 벗어나있다.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동네 뒷산’ , ‘내 아웃도어의 베이스캠프 관악산’처럼 직접적으로 트레킹을 드러내는 제목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두 편에 불과할 뿐이다. 그 외에는 다 저런 식으로 트레킹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았다. 저런 제목들만 보면 명상이나 종교 코너로 분류될지 모른다. 책표지도 홀로 고독에 휩싸인 수행자의 모습이 담겨질 거 같다. 사진이 아닌 펜화로.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듯이 <트레킹은 생각창고>의 포지션은 ‘반반치킨’이다. 역사와 트레킹을 반반으로 했고, 사색을 양념장으로 삼았다. 트레킹을 하면서 곱씹었던 생각들을 해당 유적지의 역사와 매칭을 시켜서 풀어냈던 것이다. 걷다보면 생각들이 피어올랐고, 그것들을 담아내고자 했다. 막걸리 잔부터 돌리는 트레킹이 아니라 걷기를 통해 정신영역의 확장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개똥철학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상관없다. 필자는 이런 생각까지 한다.

 

‘위대한 철학은 걷기로부터 생성된다!’

 

 

* 원효봉

 

●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의 몇 가지 포인트

벌써 마지막 여정이다. 이번편은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이다.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은 강의 커리큘럼에서 마지막으로 배치하곤 했었다. 그래서 본 원고의 마지막편도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은 몇 개의 탐방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1. 대서문과 중성문

2. 산영루

3. 북한산성계곡

4. 덕암사

진관사 역사트레킹,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통해 이미 북한산과 관련된 글을 소개했다. 이번편 북한산성 역사트레킹까지 합치면 벌써 3개나 된다. 북한산을 두고 아주 우려먹는다. 그만큼 북한산은 관악산과 더불어 서울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고마운 산이다. 필자에게는 직장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트레킹팀을 이끌고 역사트레킹을 행하니까.

다시 복기를 해보자. 화계사 역사트레킹이 북한산 동쪽편을 누볐다면,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서쪽편에서 행해졌다. 북한산성 역사트레킹도 서쪽편에서 행해지는데 진관사보다는 좀 더 북쪽에서 움직인다.

북한산은 일명 삼각산이라고 불린다. 만경대(800m), 백운대(837m), 인수봉(810m) 세 개의 봉우리가 삼각뿔의 형태를 지녔다고 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저 세 개의 봉우리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서 ‘만백인’으로 앞 글자를 따서 외웠다. 머리가 나쁘면 이렇게 고생하는 거다. 높이에서 보이듯 북한산의 최고봉은 백운대다. 워낙 인수봉이 유명해서 가장 높은 봉우리고 알고 있는 분들이 계신데 그게 아니다.

삼각뿔은 동쪽편에 치우쳐있다. 지역으로 따지면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방면이다. 그 삼각뿔은 서울에서 보는 것보다는 경기도 파주나 고양쪽에서 보면 그 생김새가 두드러져 보인다. 예전 조선시대 때 개성에서 한양으로 오가는 이들은 삼각산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했다고 한다. 참고로 파주 오두산 부근이 삼각산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 북한산: 원효봉쪽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고봉들.

● 한반도의 요충지 북한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북한산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산성이 축성되기에 이른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37)에 쌓은 성으로 북한산의 주요 봉우리를 연결해서 축성됐다. 성벽의 길이는 12.7km에 달한다.

백제시대에는 위례성의 북쪽 방어성으로 산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본격적인 삼국 항쟁시기에는 북한산을 두고 각국 간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그 항쟁의 증거 중에 하나인 진흥왕 순수비가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있다.

정확히는 지금 비봉에 세워진 순수비는 진품이 아니고, 순수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리는 알림석이다. 진품은 훼손을 막기 위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로 비봉은 앞서 언급한 진관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거리는 가깝지만 경사도는 상당히 가파르다. 답사에 참고하시라!

삼각뿔인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도 북한산성의 일부다. 그런데 그 삼각뿔에는 성벽이 없다. 성벽이 없는 게 당연한 게 그 험한 삼각뿔을 어떤 멍청한 군대가 기어 올라오겠나. 삼각뿔 자체가 워낙 험하니 인공적인 성벽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자연물 자체가 성벽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곳은 백운대 말고도 의상봉과 용암봉이 있다. 북한산 산행을 해보신 분들은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실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은가? 지형이 너무 평탄하여 적들의 공격으로 취약한 곳도 있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북한산성의 서쪽 구간이다. 그래서 이곳은 중성문을 쌓아 이중 방어 구조를 만들었다. 즉, 대서문 -> 중성문 식이 된다.

대서문은 북한산성에 있는 1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있는 성문을 말한다.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는 대동문, 대남문 등과 달리 대서문은 해발고도가 낮아 접근성이 매우 좋다. 북한산둘레길 코스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거리가 가까워, 둘레길과 묶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 대서문

● 총 맞은 성문?

중성문 밖은 외성, 중성문 안쪽은 내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중성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예전에 북한산성 행궁터가 있다. 행궁은 복원중이다. 이 중성문에 가보면 눈을 크게 뜨고 보셔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옆 수풀 속에 가려진 암문을 보셔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거 말고 중성문 육축에 쌓여 있는 총탄 자국을 보셨으면 한다.

육축은 문루 하부에 돌로 쌓은 부분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성문에 쌓인 성돌인데 성문에 쌓인 돌이라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고, 정교하게 쌓였다. 그 부분이 총을 맞은 것인데 한국전쟁 때 피탄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이런 설명을 했었다.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활동을 했다는 건 잘 아실 테지요. 그런데 빨치산이 지리산에만 있었을까요. 북한산에는 없었을까요? 어쨌든 북한산도 한국전쟁 때 격전지였습니다. 이 총탄 자국이 그날의 참상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 중성문

* 중성문: 구멍이 난 성돌이 보인다.

● 풍류객들의 발걸음을 모은 산영루

북한산성 서쪽편은 길이 순해서 백운대를 가는 코스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힘들이지 않고 찰랑찰랑 걸을 수 있는데다 옆쪽으로는 시원하게 북한산성 계곡(북한천)이 흐르고 있어 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이다.

계곡이 있어서 이 코스는 여름에 많이 왔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렇게 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전날에 비가 내렸고, 덕분에 북한산성 계곡은 풍부한 유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있는 계곡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북한산성 계곡은 나름 호평을 받는 계곡이다. 공룡알 같은 큰 바위도 많고, 선녀탕 같은 여울도 꽤 있다. 서울 인근에서 이렇게 시원한 계곡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렇게 찰랑찰랑 걷다보면 반환점인 산영루에 도착한다.

산영루(山映樓)는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 계곡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누각이다. 자연 암반 위에다 키가 큰 장대석주를 세우고 거기에 누각을 올렸다. 산 그림자가 수면 위에 비친다는 의미의 산영루는 워낙 풍광이 수려하여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았었다. 성호 이익, 추사 김정희 등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풍류객들은 이곳을 한 번쯤 다 다녀갔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1794년 가을, 둘째형인 정약전 선생과 함께 이곳을 방문한 후 ‘산영루’라는 누각과 같은 이름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영루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아픔이 있다. 산영루 앞에는 비석들이 서있는 비석거리가 있다. 북한산성과 관련하여 공로를 세운 이들의 공덕비가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잘 보면 몇몇의 비석은 깨지거나 큰 구멍이 나있다.

 

“아니 도대체 소중한 문화재에 누가 감히 이런...!”

트레킹팀의 시선을 끌기 위해 저런 멘트를 했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면서.

“누가 비석을 깨뜨리기라도 했나요? 드릴로 뚫었어요?”

“아니요. 이 비석들도 총 맞았어요. 한국전쟁 때 중성문처럼요.”

그러자 누군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외적 방어하라고 산성 만들었더니 같은 민족끼리 치고받았네...”

산영루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망실됐다. 그러다 2014년에 복원이 되었다.

 

* 산영루

 

 

* 비석거리 비석: 곳곳에 총탄 자국이 있다.

 

 

● 풍광이 수려한 북한산계곡에서

“우리 북한산계곡에 와 있습니다. 정말 시원스럽지 않습니까?”

 

원효봉이 시원하게 바라다 보이는 계곡에서 필자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저기 성벽 구간, 무너진 성벽 구간이 보이시죠? 원래 이 곳에는 수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수문을 통해서 계곡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산성에는 대서문 같은 7개의 대문과 6개의 암문, 그리고 한 개의 수문이 있었다. 이를 두고 북한산성 14성문이라고 말한다. 대문과 암문은 복원이 되고 해서 실재하고 있지만 수문은 소실된 상태다. 수문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망실됐다.

“아참, 북한산성은 포곡식 산성입니다. 포곡식이라는 건 계곡을 끼고 있는 산성이라는 뜻이죠. 성이 만들어지면 음용수 때문에 골치를 썩잖아요. 그런면에서 계곡을 끼고 있는 북한산성은 물 공급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죠.”

“진짜 그랬겠네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계곡이 있다 보니 풍수해에 취약해요. 그래서 저 앞에 수문이 떠내려가 버렸잖아요.”

 

의상봉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덕암사까지 탐방한 후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덕암사의 대웅전은 자연 석굴에다 법당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덕암사 대웅전의 실내 천장은 돌로 되어 있다. 이 석굴에서 원효대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덕암사는 메인 탐방로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은데 북한산 마니아라면 한 번쯤은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특히 덕암사에서 바라보는 의상봉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한편 덕암사는 아미타사라고도 불린다.

 

* 덕암사: 덕암사에서 바라본 의상봉

 

● 위대한 철학은 걷기로부터 생성된다!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을 이 원고도 마감된다. 물론 에필로그편이 있긴 하지만...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좋은 생각들이 계속 떠오른다. 그런 생각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래서 <트레킹은 생각창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아름다운 풍광에서 더욱더 활성화된다. 북한산성 입구, 원효봉이 보이는 전망대도 그런 곳 중에 하나다. 그곳에 서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곳이 바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제대로 찾아온 거야.’

북한산의 암봉들이 보여주는 시원한 풍광으로 머리가 맑아진다. 그리고는 다시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위대한 철학은 걷기로부터 생성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는다.

 

* 북한산성 계곡

 


 

■ 북한산성 역사트레킹

1. 코스: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 대서문 ▶ 중성문 ▶ 산영루 ▶ 덕암사 ▶ 북한산성 계곡 ☞ 덕암사를 잠시 방문한 후 왔던 길로 돌아와, 다시 북한산성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것이 좋다.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구파발역 ☞ 구파발역에서 북한산성 입구행 버스 탑승(약 15분간 이동) / OUT: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 북한산성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곽작가’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글을 참 늦게 쓴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본인 이름 걸고 쓴 책다운 책이 없다. 물론 글을 빨리 쓴다고 좋은 건 아니다. 속필이 명필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가 않으니까. 그 느릿느릿한 글쓰기는 필자의 성격과 닮아 있다. 느긋한 문장에서는 빠릿빠릿함보다는 게으름이 잔뜩 묻어있다.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배 쭉 깔고 단 잠에 빠져있는 누렁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필자는 의외로 꼼꼼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려면 생각보다는 많은 지식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지식노트를 만들었는데 우연하게 그 노트를 본 참가자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

 

“보기와는 다르게 참 꼼꼼하세요.”

 

사실 그런 꼼꼼함은 필자의 방어 기재다. 외부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완벽주의. 그렇게 완벽주의에 물들어 있다 보니 삶이 진도가 안 나간다. 살다보면 앞뒤 안 재고, 확 치고 나갈 때도 분명 필요하다.

 

본성이 게으른데 완벽주의에까지 물들어 있으니 글을 빨리 못 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필자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완벽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완벽주의에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없지!

 

 

 

 

 

 

* 정약용 선생 상

 

 

 

 

 

 

 

● 트레킹 강의명도 ‘섹시한 제목’이 필요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역사트레킹도 제목을 잘 지어야한다. 눈에 확 띄는 ‘섹시한’ 제목으로 나가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문화센터에서 트레킹 강의를 진행하는데 매학기 마다 제목 짓는 걸로 골머리를 썩어야했다.

 

수많은 쟁쟁한 강의들 사이에서 필자의 강의를 ‘잘 팔기’ 위해서는 제목으로 승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끌어다 쓸 수는 없었다. 내용성과 완전히 어긋나는 제목은 욕먹기 ‘딱’이기 때문이다.

 

“제 강의 커리큘럼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네이밍이 있나요?”

 

매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저렇게 물어보곤 했다. 그 중에서 단연 이 강의가 수강생들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요!”

 

그렇다.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본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 여유당: 정약용 선생 생가

 

 

 

 

 

 

 

● 2018년은 다산 정약용의 해배 200주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2018년과 다산 정약용 선생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본다. 시간을 좀 돌려보자. 2018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에서 해배(解配)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배’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한다. 정약용 선생은 1801년 11월에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1818년 10월에 고향인 마재(현 남양주)로 돌아온다.

 

정약용 선생은 유독 ‘18’이란 숫자와 연관이 많은 분이다. 유배를 18년 동안 당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 18년을 더 사신 후에 돌아가셨다. 또 관직 생활도 18년 동안 하셨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됐다. 폐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한결같이 다 즐거운 표정들을 하고서. 그래서인지 어떤 참가자는 이런 말까지했다.

 

“여기는 정말 딴 세상 같아요. 다들 즐거워 보여요.”

 

그런 딴 세상 같은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 능내역

 

 

 

 

 

 

 

●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위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됐을 정도였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된다.

 

 

 

 

 

 

 

* 마재성지

 

 

 

 

 

 

 

●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하게 된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쓰기에 이른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됐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죽음에 이르게 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 거중기: 다산 생가 앞에 전시되어 있음.

 

 

 

 

 

 

●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다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필자의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 마디 더 설명을 보탰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필자는 트레킹팀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필자에게 슬며시 말을 건넨 분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필자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다.

 

 

 

 

 

 

 

* 다산생태공원

 

 

 

 

 

 

 

 

● 귀에 확 꽂히는 이름,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여유당을 뒤로 한 트레킹팀은 자전거도로 옆에 놓인 인도를 따라 운길산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 길은 옛 중앙선 철로였다. 중앙선이 복선화되면서 옛날 단선 구간을 리모델링하여 자전거도로와 인도로 변신시킨 것이다. 이 길은 아름다운 한강변을 옆에 끼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전거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단점도 있다.

 

무섭게 페달을 밟아대는 일부 자전거족들이 이 구간에 많기에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걸어야한다. 하긴 필자도 예전에 자전거를 탔을 때, 특히 한강변을 달릴 때는 무식하게 페달을 밟았었다. 그래서 이런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자전거 폭주족이냐! 그 고물자전거로 애쓴다 애써!”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터)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 양수대교: 마진산성 터에서 바라본 양수대교. 강 건너편이 양수리다.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는 완벽주의의 허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완벽하지도 않은 인간이 완벽주의로 위장을 하고 있으니 정체성에 혼란만 올 뿐이다. 더군다나 나답게 살기를 원한다면서 자신을 완벽주의로 방어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다.

 

이렇게 필자의 허울을 벗겨주시는데 정약용 선생의 역할이 컸다. 무슨 소리인가? 정약용 선생도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배에서 풀려나기 위해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 쪽과 접촉했던 것, 제자들 중에 큰 사상가가 나타나지 않은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민족의 큰 스승인 정약용 선생도 이렇듯 개인적인 흠결이 있었다. 하물며 고만고만한 삶을 살고 있는 필자가 어설픈 완벽주의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일 뿐!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느릿느릿하게라도 꾸준히 쓸 것이다. 열심히 쓰다 글이 어느 정도 무루 익으면 과감하게 원고를 출판사에 보낼 것이다. 전에는 완벽한 원고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허울에 빠져있던 예전의 내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에 완벽한 원고가 있을까? 그렇게 했다가는 평생 책 낼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지. 완벽한 원고만 찾다가는 완벽하게 평생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걸!”

 

 

 

 

 

 

 

* 다산생태공원: 청명한 가을날의 다산생태공원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생가(정약용묘) ▶ 다산생태공원 ▶ 마진산성(터)

2. 이동거리: 약 10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팔당역 ☞ 팔당역에서 능내리행 버스 탑승(약 15분간 이동) / OUT: 운길산역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남양주정약용역사트레킹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언젠가 트레킹 리딩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홀로 트레킹을 했을 때는 타인의 시선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트레킹을 리딩하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짙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곽 작가님, 좀 웃어요. 아침부터 찡그리고 있어요.”

 

역사트레킹은 주로 오전 10시 30분에 실시한다. 출근 시간을 피하고자 그 시간으로 정한 것이다. 좋아서 하는 역사트레킹이지만 얼굴에는 월요병에 걸린 회사원의 표정이 묻어났나보다.

 

사실 저런 말을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표정관리를 한다고 했는데도 저런 소리를 들었으니까...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그렇다, 리딩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렇다 등등... 나름대로 변명도 해보았지만 말 그대로 변명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필자의 직업도 서비스업이 아닌가. 말이야 있어보이게 역사트레킹 마스터지 여행가이드와 별 차이가 없다. 서비스업종에 있는 사람이 얼굴을 찡그린다? 업계 관행으로 봤을 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오전에 찡그리던 모습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풀려간다. 어떻게 아느냐?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 LCD창에 비쳐진 모습을 그때그때 체크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필자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해진다. 역시 필자는 트레킹 팔자인 거 같다. 좀처럼 웃을 일이 없다는 요즘인데 트레킹만 하면 함박웃음을 얼굴에 걸고 있으니...

 

 

 

 

 

* 남자하동계곡

 

 

 

 

 

 

 

● 과천골 역사트레킹

 

이번편에는 과천골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과천골 역사트레킹은 말 그대로 경기도 과천시 일원에서 행해진다. 앞선 프롤로그에서도 언급됐듯이 이 원고의 원래 명칭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다. 필자와 대화를 주고받는 트레킹팀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프로그램에서 모집하여 꾸려진 모임이다.

 

이번편 과천골 역사트레킹도 마찬가지고, 안양시에서 행한 정조대왕 역사트레킹도 경기도에서 행한다. 그렇다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란 명칭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과천시나 안양시가 경기도에 있지 서울에 있는 게 아니니까.

 

도성을 관할했던 한성부는 도성뿐 아니라 성 밖 십리지역(4km)까지 그 행정 영역 안에 두었다. 이를 두고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칭했다. 필자는 성저십리 개념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 적용했는데 지금의 서울에서 반경 40km까지를 서울학개론의 범위로 삼은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필자는 수도권 전철이 닿는 곳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영역으로 삼았다.

 

 

 

 

●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

 

지금이야 필자가 무명이기에 과천을 가든, 남양주를 가든, 춘천을 가든 서울학개론이란 명칭을 써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필자가 거물급(?)이 된다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 과천골 역사트레킹이 포함된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곽 작가님, 왜 과천시에서 트레킹을 했으면서 서울학개론이라고 하세요? 그 말이 틀린 거잖아요.”

“맞습니다. 그 명칭은 분명 틀린 거예요.”

“그럼 빨리 고쳐주세요. 이름은 제대로 써야지요! 경기도청에서도 난리에요.”

“그래서 바꿨습니다.”

“뭘로요?”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

 

이런 대화가 현실화 됐으면 좋겠다. 필자라고 거물급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그날이 빨리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교통정리용 설명이 길어졌다. 빨리 진도를 나가자.

 

과천골 역사트레킹의 시작은 우면산 남쪽 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소가 졸고 있다는 뜻의 우면산(牛眠山)은 해발 293m로, 이웃산인 관악산(632m)보다 훨씬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보다 오르기도 수월하고 코스도 짧다.

 

우면산의 북쪽은 서울 서초구이고, 남쪽은 과천시에 속하는데 확실히 남쪽면보다는 북쪽면이 편의시설이나 표식들이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우면산의 남쪽면은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관리가 안 되어 있다. 편의시설도 전무하고 안내표식도 띄엄띄엄 있다. 그래서인지 우면산 남쪽면을 찾는 이들도 별로 없다. 무슨 이유일까? 우면산 남쪽면도 분명 좋은 트레킹 코스인데... 이유는 남태령과 관련 있다.

 

 

 

 

 

 

* 남태령옛길 표지석

 

 

 

 

 

 

 

● 남태령으로 개명한 여우고개

 

남태령(南泰嶺)은 관악산과 우면산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은 183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 워낙 해발이 높은 고개들이 많아 183m의 높이면 명함도 못 내미는 게 맞지만, 한자어에서도 보이듯 이 고개는 당당히 ‘남쪽의 큰 고개’로 명명되어 있다.

 

처음에 이 곳은 여우고개, 혹은 여시고개로 불렸다. 한자어 명칭도 ‘여우호’자를 써서 호현(狐峴)이라고 쓰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는 여우가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그 옛날 관악산과 우면산의 울창한 수풀은 여우들이 서식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여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우 굴들이 발견됐다. 그런 배경들 때문인지 이곳에는 천 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다녔다는 ‘전설의 고향’도 전승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곳은 왜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개명을 하게 됐을까? 가장 유력한 설은 정조대왕 시대에 행했던 화산 능행차와 관련이 있다. 지난 정조대왕 역사트레킹편을 다시 복기하면서 읽어보자.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을 한 후, 정조대왕은 참배에 나섰다. 이를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이 고개의 이름을 정조대왕께서 물으셨다. 이때 과천현의 이방이 여우고개라는 이름 대신 남태령이란 명칭으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상감께서 행차하는 고개가 ‘여우고개’라는 요망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여우고개가 토속적인 이름이기는 하지만 요망스러운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더불어 고개의 명칭이 한 사람에 의해 급작스럽게 변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대왕 이전 시대부터 여우고개가 아닌 남태령으로 불렸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한강 이남에는 정조대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혹시 남태령도 그에 편승된 것이 아닐까? 정조대왕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태령은 이미 보통 이상의 고개가 될 수 있으니까.

 

정조대왕이 남태령을 넘은 것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1794년 이후부터 능행차 노선이 시흥-안양 방면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과천에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어 일부러 남태령-과천 코스를 버렸다고 한다. 김상로는 영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자이다.

 

현재 남태령에는 ‘과천루’라고 불리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남태령이 삼남지방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만큼 망루를 설치하여 감시를 했던 것이다. 과천루는 현재 과천 8경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지역의 명물이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많은 이들이 찾지는 않는다.

 

 

 

 

 

 

*과천루: 남태령망루라고도 불린다.

 

 

 

 

 

 

● 군대생활 생각나게 하는 남태령 참호와 벙커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러 다녔던 남태령. 현재 남태령에는 곳곳에 참호가 놓여 있다. 벙커도 있다. 남태령처럼 서울 인근에서 그렇게 많은 참호와 벙커들이 정열 되어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안보(?)시설들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면산의 남쪽면이다. 그 참호와 벙커들을 파고,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인아저씨들이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시설들을 무심히 지나치기는 했지만 필자도 군대 생활이 생각나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렇게 우면산 남쪽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둘레길 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전무하다. 팔각정은커녕 그 흔한 벤치조차도 찾기 어렵다. 화장실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면산 남쪽 숲길은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높아질 대로 높아진 도보여행자들의 눈높이로 보자면 이 코스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둘레길 트렌드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전이 있기 마련이다!

 

- 이 숲길 정말 울창한데요.

- 서초구쪽 우면산은 가봤는데... 여기는 처음이에요. 그런데 여기가 더 좋아요.

- 숲길도 좋고 사람도 거의 없어서 걷기에 더 좋은 거 같아요.

 

트레킹팀은 저렇게 환호성을 외쳤다. 거의 한 시간 이상 이어진 울창한 숲길에 박수갈채를 보냈던 것이다. 특히 이곳은 완경사로 계속 이어지다보니 사색을 하면서 걷기에 ‘딱’이었던 것이다. 묵언수행을 하기에도 제격인 곳이었다.

 

 

 

 

 

 

* 용마골: 일명 너럭바위 계곡

 

 

 

 

 

 

● 너럭바위와 온온사

 

이제 트레킹팀은 우면산에서 관악산으로 넘어간다. 용담골이라는 곳을 통해 관악산에 진입을 하게 되는데 무척 흥미로운 풍광을 맞이하게 된다. 카펫이 깔려 있듯 너럭바위가 보기 좋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누가 일부러 깎아놓은 것처럼 평평한 너럭바위가 길이 돼주기도 했고, 의자가 돼주기도 했다.

 

그 위에다 식탁보를 깔면 밥상이 되기도 한다. 그랬다. 트레킹팀은 너럭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맛있게 식사를 했다. 노닐기 좋은 곳에서 배를 채웠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너럭바위 계곡을 지난 트레킹팀은 과천현의 옛 객사였던 온온사(穩穩舍)를 탐방하게 된다. 객사는 한마디로 관사를 말한다. 유명한 전주 객사를 떠올리시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649년(인조27)에 창건된 이 건물은 정조대왕에 의해 ‘온온사’라는 특이한 이름을 갖게 된다. 잠깐 한자를 살펴보자. ‘평안할 온(穩)’자가 하나도 아닌 두 개나 들어가 있다. 정조대왕은 평화, 아름다움, 휴식이라는 개념들을 이름에 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실제로 정조대왕은 화산 능행차를 하러가면서 과천현 객사에 머물렀는데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휴식하기에 좋았다고 하여 ‘온온사’라는 현판을 친필로 하사하셨다. 그 현판이 지금도 온온사에 잘 붙여져 있다.

 

지금이야 일대가 많이 개발이 되어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휴식하기에 좋은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온온사 뒤편 숲길은 꽤 아름답고 산보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그 숲길을 따라 트레킹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자하동 계곡으로 향했다. 드디어 추사 선생 글씨를 만나게 된다.

 

 

 

 

 

 

* 온온사

 

 

 

 

 

 

 

● 자하 신위 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

 

돌산인 관악산에도 경치가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 이 계곡은 자하동이라고 불리는데 조선후기 시·서·화에 능했던 자하 신위(1769~1847)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자하(紫霞) 신위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는데 그런 소문을 듣고 정조대왕이 궁궐로 불러 크게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신위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편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에서 한 번 언급했었다. 역시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읽어보자.

 

시(詩)·서(書)·화(畫) 모두에 능한 사람을 시·서·화 삼절이라고 부르는데 그 칭호를 얻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당연한 말일 것이다. 시와 글씨와 그림,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잘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신위 선생은 참 대단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왜 관악산에 신위 선생의 호를 딴 계곡이 있는 것일까? 신동이었으며 시·서·화 삼절로 불리기까지 한 신위 선생과 관악산이 무슨 연관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늘 그렇듯 천재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다. 신위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게 된다. 지방토호들의 횡포에 의해 파직 당하고, 당쟁의 여파로 인해 파직 당한다. 이에 세상의 환멸을 느낀 자하 신위 선생은 관악산에 은거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관악산에는 자하동이란 명칭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과천에 있는 자하동은 ‘남자하동’이라 부르고, 서울대 옆에 있는 자하동은 ‘북자하동’이라고 불린다.

 

 

 

 

 

* 남자하동계곡

 

 

 

 

 

 

● 천재가 천재를 알아봤다!

 

과천의 남자하동 계곡 바위면에는 단하시경(丹霞詩境), 자하동문(紫霞洞門),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등 4개의 바위글씨가 있다. 계곡을 따라 새겨진 이 바위글씨들은 예전에는 접근성이 많이 떨어졌다.

 

실제로 최근에 설치된 탐방데크와 흔들다리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문화재였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바위글씨들을 지나갔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늦게나마 탐방시설들이 확충되어 바위글씨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말 나온 김에 바위글씨에 대해서 살펴보자. 지면 관계상 단하시경(丹霞詩境) 하나만 이야기하겠다. 이 ‘단하시경’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글씨다. ‘단하’는 신위 선생의 다른 호로 추정되고, ‘시경’은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경지라는 뜻이다. 신위 선생이 관악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보고 지은 시를,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단하시경’이라는 바위글씨로 새겨 넣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관악산에 은거했던 신위 선생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그런 돈독함이 ‘단하시경’이라는 바위글씨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추사 선생도 시·서·화 삼절이었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봤던 것이다.

 

자하동 계곡 탐방을 끝으로 과천골 역사트레킹도 종료가 된다. 트레킹 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계곡물에 발 좀 담그고 바위에 새겨진 글씨도 감상해보자. 이런 것이 풍류 아니겠는가? 시·서·화에 능하지 않더라도 풍류는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법이지!

 

 

 

 

 

 

*단하시경(丹霞詩境) 각자바위

 

 

 

 

 

 

 

● 오늘도 즐겁게 역사트레킹해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 아니다. 타인과 끊임없이 호흡을 해야 벌어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시선에 익숙해져야한다. 어쩌면 즐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에 노출되는 것이 나답게 살기와 배치되지도 않는다. 물론 여기서의 타인의 시선은 갑질의 시선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모습을 더 멋지게 하면 좋은 일이 아닌가. 필자의 출근 장소는 트레킹 집합장소인데 해당 집합지에 미소를 띠며 도착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즐겁게 역사트레킹해요!”

 

 

 

 

 

 

*과천향교

 

 

 

 

 

 


 

 

 

 

 

과천골 역사트레킹

 

1. 코스: 남태령망루(남태령옛길) ▶ 너럭바위계곡 ▶ 온온사 ▶ 남자하동계곡(과천향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선바위역 3번 출구(지하철4호선) / Out: 과천역(지하철4호선)

 

 

 

 

 

 

* 과천골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 6월.

아직까지도 코로나바이러스-19(covid-19)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코로나가 발생했던 2019년 12월 경, 필자는 유럽여행 중이었는데 코로나 발병 사태를 보면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냥저냥 하다가 종료될 줄 알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한 후, 유럽배낭 여행을 이어갔다. 가난뱅이 여행이었지만 무척 재미있었고 유익했다. 원하는 사진도 아주 많이 찍었다. 귀국이 가까워졌을 때는 상황이 좀 심각해졌지만 그래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귀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는 국내생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느라 나름 부푼 꿈을 꾸기도 했었다.

 

‘올해는 역사트레킹을 더 많이 해봐야지. 작년에 세팅한 코스들이 많으니까 회원들하고 더 재미나게 트레킹을 할 수 있을 거야!’

정말? 아직까지 2020년도에는 역사트레킹을 한 번도 실시한 적이 없다. 언제 다시 제대로 실시할 수 있을지 기약도 없다. 코로나가 이렇게 무서운 거다.

코로나 사태 이후 사람들은 거리를 두게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 속 거리두기.

이번 편에 언급할 <트레킹은 생각창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정확히는 ‘아름다운 거리’다. beautiful street가 아니라 beautiful distance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염병을 막기 위한 물리적 방편이라면 ‘아름다운 거리두기’는 사람과 사람과의 존중을 해치지 않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꽤 오래전의 일이다. 공무원시험 준비를 할 때였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동갑내기를 만나게 됐다. 답답한 수험생 시절이었느니 간간이 티타임이나 하면서 수험 정보나 나눌 셈이었다. 수험생과 수험생이 만나서 친해지면 좋은 결과보다 안 좋은 결과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냉정하다고 그럴지 모르지만 필자의 스타일은 그랬다. 딱 커피 한 잔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 하지만 그 동갑내기는 필자의 스타일과는 반대였다. 동갑이니까 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그런 부류였다. 더군다나 답답한 수험생 시절에 만났으니 더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냥 친구도 아니고 진정한 친구.

딱 티타임 나누는 관계 VS 동갑이니까 진정한 친구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턱하고 가슴이 막힌다.

 

* 만안교

 

 

 

 

● 이제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이번 편부터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향한다. 이제까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으로 확장된다. ‘한국학개론’이 되어서 그런가? 첫 번부터 제목이 거창하다. 정조대왕 역사트레킹!

본격적인 내용전개에 앞서, 흥미로운 질문 두 가지! 서울 인근에 경주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진 사찰이 있다면? 또 그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한 돌다리가 있다면?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분명 이런 물음에 흥미를 느끼실 것이다.

불국사보다 더 오래됐다는 사찰은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라는 사찰이고,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된 다리는 만안교라는 석교(石橋)다. 이 두 장소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여 이동할 수 있다. 또한 편리하게 전철을 타고 탐방을 할 수 있는데 수도권 전철 관악역에서 시작하여 관악역으로 종료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면 걷는 거리가 너무 많기에 다리가 아픈 분들은 중간에 시내버스를 타시라고 권한다.

본 코스를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이라고 네이밍을 했을 때 좀 망설였었다. 아무리 정조대왕의 흔적이 남은 곳을 탐방한다고 해도 코스 이름에 떡하니 정조대왕의 이름을 붙이다니!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그 이름보다 더 좋은 네이밍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욕을 먹더라도 그냥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필자는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코스도 가지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도 소개할 예정이다. 어쨌든 왕의 이름을 떡하니 새겨 넣으니 해당 코스가 아주 강렬하게 느껴진다.

 

 

 

* 만안교: 만안교는 만들어진지 20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쓰이고 있다.

● 화산 능행차와 만안교(萬安橋)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관악역 1번 출구에서부터 시작된다. 1번 출구에서 나와 안양역 방면으로 약 5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만안교를 만날 수 있다.

1795년 축조된 만안교는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를 위해 만들어졌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이장을 한다. 그리고는 자주 참배에 나섰는데 이를 두고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처음 능행차는 도성에서 동작나루를 거쳐 남태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이후 시흥과 안양을 거치는 길로 변경된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지형적인 한계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다른 사정도 있었다. 과천 행차로에는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오화변(壬午禍變)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상로는 사도세자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하기 위해 떠나는 능행차 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상로 형제의 묘소를 지나는 것이 탐탁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임오화변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1794년 이후부터는 능행차 노선이 시흥과 안양 방면으로 변경된 것이다.

당시 왕의 행차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 등을 가설한 후, 행차가 끝난 뒤에는 철거 하는 방식이 반복됐다. 이에 정조는 그런 번거로움을 피하고, 인근 주민들이 평상시에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하천을 넘을 수 있게 튼튼한 돌다리(石橋)를 건설하라고 왕명을 내린다.

석교의 축조에는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될 정도로 큰 공사였지만 공사 기간은 3개월 정도였다. 그렇게 왕명으로 지어진 돌다리는 길이가 31.2m, 넓이가 8m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된다. 왕의 뜻대로 인근 백성들도 안심하고 하천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돌다리가 놓이게 된 것이다. 이 다리를 두고 정조대왕은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로 만안교(萬安橋)라는 이름을 직접 작명하였다.

 

 

* 관악산: 삼성산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관악산.

 

● 백성들을 위해 튼튼한 돌다리를 축조한 정조대왕

 

한편 원래 만안교는 지금의 자리보다 남쪽으로 200m 지점인 삼성천 위에 축조됐지만 1980년 국도 확장 공사시에 지금의 삼막천 위로 옮겨지게 됐다. 이 다리가 놓여 있는 안양시 만안구의 명칭은 만안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만안교는 무지개교라 불리는 홍예교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홍예교 중에서 가장 큰 다리로 모두 7개의 아치가 놓여 있다. 판석과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축조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불린다.

필자는 처음 만안교를 탐방했을 때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4대문 밖, 그것도 한강 이남에 이렇게 정교하고 거대한 아치형 석교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돌다리는 박물관에 갇혀 있는 죽은(?) 다리가 아니라 지금도 인근 주민들이 건너다니는 살아있는 ‘생활’ 다리였다는 점이다.

이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진두지휘하는 화산 능행차를 볼 수 없고, 다리 주위로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정조대왕의 바람은 계속 이어지는 듯싶다. 인근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하는, 그런 애민 정신 말이다. 돌다리를 넘으면서 필자는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조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다리를 걷고 있습니다.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까지 튼튼한 돌다리를 넘고 있는 거죠.”

트레킹팀은 정조대왕의 애민 정신을 곱씹으며 튼튼한 돌다리를 씩씩하게 걸어 다음 코스인 삼막사 계곡으로 향했다.

 

 

* 삼막사

● 울창한 숲길, 삼막계곡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은 삼막천을 따라 이동을 한다. 삼막천은 삼성산에서 발원된 작은 하천으로 그 상류 위쪽에는 삼막사가 터를 잡고 있고, 그 하류에는 현재 만안교가 놓여 있다. 만안교를 지난 삼막천은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안양천과 합수된다.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는 항상 여름경이었다. 그래서 땀방울이 눈앞을 가릴 정도로 흘러내렸다. 그때 필자도 지쳐갔고, 팀원들도 지쳐갔다. 하지만 삼막계곡에 들어서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솟구쳤다. 계곡을 끼고 있는 숲길로 들어선 것이다.

아무리 강한 직사광선이 내려찐다고 해도 숲속에 있으면 탈진할 일이 없다. 숲속이 강력한 ‘썬크림’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한 여름이라도 숲 속에 있으면 탈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원한 나무그늘에 있으면 원기가 회복된다. 이런 숲길을 걷는다면 한 여름 때양볕 아래에서도 트레킹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듯싶었다. 1시간 정도 계곡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삼막사에 도착했다.

 

* 삼막사

●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삼막사

 

삼막사는 677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원효, 의상, 윤필 3대사가 막(幕)을 치고 수행을 하다가 그 후에 절을 지으니, 그 절이 삼막사가 된 것이다. 삼성산의 명칭 유래도 마찬가지다. 원효, 의상, 윤필의 성인이 수도를 한 곳이라 하여 삼성산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서두에서 필자는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개창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불국사의 창건은 751년으로 잡는다. 그러면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무려 70년 정도 앞선 연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유서가 깊어서인지 삼막사에는 수많은 선승들이 머무르며 수도에 정진했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 고려시대에는 나옹선사,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와 사명대사,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 특히 조선왕조 개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는 삼막사에서 새로운 왕조에 대한 융성을 기원했다고 한다.

유명한 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건, 달리 말하면 삼막사가 좋은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멀리서 삼막사를 봤을 때, 기운이 사방으로 트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삼막사는 정상부 능선 부근에 자리 잡고 있어, 그 곳에 올라서면 멀리 인천과 서해바다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데 그런 입지적 조건이 삼막사의 기운을 ‘쾌’하게 생성시키는 것 같았다. 이런 좋은 기운 때문인지 삼막사는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으로 지칭됐다. 서울 남쪽의 수찰(首刹), 즉 우두머리 사찰이라는 뜻이다.

앞선 <진관사 역사트레킹>에서도 언급이 됐는데 삼막사는 진관사와 함께 서울을 지킨다. 다시 복습해본다. 남쪽 - 삼막사, 서쪽 - 진관사, 동쪽 - 불암사, 북쪽 - 승가사. 이를 두고 서울의 4대 명찰이라고 부른다.

삼막사에는 무학대사가 중수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1880년(고종 17년)에 지어진 명부전과 그 다음해 지어진 칠성각 등의 당우(堂宇)들이 배치되어 있다. 또 고려중기 시대에 건립된 3층 석탑과 조선 후기시대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불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삼막사 아래에 있는 염불암 탐방을 끝으로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염불암은 안흥사라고도 불리는 사찰로 태조 왕건이 도승인 능정을 위해 936년에 창건한다. 936년이면 왕건이 후삼국 시대를 통일한 그 때이다. 염불암에는 600년 된 보리수가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 염불암

● 만안교 만큼의 아름다운 거리

 

동갑내기와의 갈등 때문에 필자는 준비했던 공무원 시험을 접었다. 꽤 오랫동안 준비를 했었는데 타의에 의해 그만 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동갑내기와의 트러블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 녀석하고도 금이 갔다.

굳이 여기서 구질구질하게 아픈 기억을 언급하지 않겠다. 어쩌면 지금의 직업인 역사트레킹을 하라는 신의 계시로 그런 일이 발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좀 속이 편하다. 그만큼 필자에게는 그때의 일이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당시의 일을 좀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됐다.

 

- 그때 좀 더 현명하게 굴었어야 됐는데

- 좀 더 맺고 끊음을 잘 표현했어야 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상대방의 영역이나 스타일을 존중하지 않고 팍 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처 하냐 이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악당도 아니니까 문제지.’

아름다운 거리(beautiful distance)를 유지하면 된다. 코로나 방지를 위해서는 사회적 거리 유지, 서로간의 존중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면 된다.

그럼 그 아름다운 거리는 구체적으로 얼마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필자는 만안교 정도의 거리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떨어져 있지만 언제든지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그런 거리... 그런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면 진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정조대왕 역사트레킹

1. 코스: 만안교 ▶ 삼막사 초소 ▶ 삼막계곡 ▶ 삼막사 ▶ 염불암 ▶ 안양예술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수도권 전철 관악역 1번 출구 / OUT: 안양예술공원 ☞ 안양예술공원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관악역으로 이동함. 안양예술공원과 관악역은 버스로 5분 거리임.

*정조대왕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한때 필자의 제 3의 장소는 만화방이었다. 만화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만화방에서 먹는 라면이 일품이었기에 그곳을 즐겨찾기를 했었다. 삐거덕거리는 만화방 쇼파에 느긋하게 앉아 책장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항상 그 때였다. 콧속을 파고드는 그 진한 라면 냄새! 이 세상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옆 테이블의 라면 냄새! 그 냄새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분명 만화방에 오기 전에 두둑하게 식사를 하고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장님 라면 하나에 공기밥 추가요!”

미국의 사회학자인 레이 올든버그는 저서 <The Great Good Place>에서 제 3장소에 대한 개념을 제시했다. 집이 제 1장소라면, 직장은 제 2장소이다. 그렇다면 제 3장소는 무엇일까?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공간을 제 3의 장소라고 설명한다.

집과 직장에서 충족될 수 없는 본원적인 욕구를 제 3의 장소에서 사회적 교류를 통해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이 올든버그는 이런 교류들을 ‘비공식적 공공생활’이라고 칭했고, 그런 교류들을 위한 필수적인 공간을 제 3의 장소라고 명명했다. 대표적인 제 3의 장소는 어디일까? 아마도 도서관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The Great Good Place>에서 제시한 제 3의 장소는 지역사회의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는 공간으로 시민참여를 증대시키는 공공장소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제 3의 장소를 굳이 공공영역에서만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제 3의 공간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배불리 라면을 먹었던 만화방을 제 3의 장소로 언급한 것이다.

*화계사 일주문

 

● 흥선대원군과 화계사

이번편에는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화계사는 북한산 동쪽편에 있는 명찰이다. 경내가 크지는 않지만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고 주위 풍광이 수려하여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는 곳이다.

원래 화계사는 고려 광종 때 창건된 보덕암이 그 시초였다. 이후 152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며 이름을 화계사로 고쳐 불렀다. 화계사는 조선 후기에 크게 그 사세를 확장하게 됐는데 그 시점이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였다. 이후 궁(宮) 절’이라고 불릴 만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데 지금 남아있는 대웅전, 명부전, 대방 등이 모두 19세기 후반에 중건되거나 만들어진 것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명부전의 편액을 쓰는 등 화계사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겼다. 화계사 경내에는 까마귀가 돌을 쪼아서 물이 나오게 했다는 오탁천(烏啄泉)이라는 샘물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이 샘물에서 피부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 화계사: 화계사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명부전이다.

 

● 번잡한 화계사 범종루

일주문을 지나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큰 느티나무가 보이고, 그 옆으로 주차장이 있다. 주차된 차들 위쪽으로 범종루가 있는데 이곳이 화계사 탐방의 첫 번째 포인트다. 참고로 범종이 단층으로 이루어진 곳은 범종각(梵鐘閣)이고, 2층의 누각 형식으로 된 곳은 범종루(梵鐘樓)라고 부른다.

이곳의 범종루는 다른 사찰의 범종각이나 범종루보다 좀 더 번잡하게 보인다. 무언가 오밀조밀하게 밀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번잡함을 이해하려면 먼저 불구사물(佛具四物)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불구사물은 범종각이나 범종루에 있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네 가지를 지칭한다. 법고는 북이고, 범종은 종이라 누구나 다 그 쓰임새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운판과 목어는 무엇일까? 먼저 대판(大版)이라고도 불리는 운판을 알아보자. 운판(雲版)은 구름운(雲)자에서 보듯 구름을 형상화하여 만든 것이다. 청동이나 철제로 만든 평판인데 두드리면 맑고 은은한 소리가 난다. 목어(木魚)는 어고(魚鼓) 또는 어판(魚板)으로도 불리는데 나무로 만든 물고기의 배를 파내고 그 부분을 두들겨서 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그냥 물고기 형태가 많았다. 하지만 이후에는 몸은 물고기지만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한 용두어신 형태가 대세로 자리를 잡아갔다.

통상적으로 불구사물은 각각 하나씩 있다. 하지만 화계사 범종루에는 범종이 두 개가 있고, 목어도 두 개가 있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항상 숙제를 내준다.

“자 눈을 크게 뜨고, 범종 두 개와 목어 두 개를 찾아보세요! 특히 범종은 보물이에요.”

* 화계사 목어: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느라 많이 삭았다. 얼핏보면 무슨 외계인같다. 못 먹어서 바싹 마른...

● 2층에 걸려있는 사인비구의 동종

정확히는 보물 11-5이다. 11이면 11이지 왜 11-5인가? 그 이유를 알려면 화계사 범종을 제작한 사인비구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 주종장이었던 사인비구는 조선 후기 숙종 시대에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승려였다. 그의 실력이 뛰어나서인지 그가 제작한 동종 8개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강화 동종만 1963년에 지정됐는데 이후 2000년에 나머지 7개가 일괄로 지정되어 총 8개가 된 것이다. 그중 화계사 동종은 보물 11-5로 지정받았다. 이 동종은 원래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영주시) 희방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고종 때 이곳 화계사로 옮겨지게 된다.

화계사 동종은 무게가 300근으로 무게도 덜 나가고 크기도 작다. 1근이 0.6kg이니 300근이면 180kg 정도가 된다. 기계적으로 비교하는데 무리가 있지만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이 19톤이니 그 크기가 크지 않다는 것을 단 번에 아실 것이다. 화계사 동종은 범종루 2층에 걸려있고 지금은 타종을 하지 않는다. 대신 이후에 제작된 크기가 큰 범종이 타종을 한다. 2층에 걸려 있고, 크기도 작아서인지 사인비구의 동종을 단 번에 찾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다.

목어도 좀처럼 단 번에 두 개를 다 확실하게 알아채시는 분들이 많지 않았다. 목어 중 하나가 삭아서 으스러질 거 같은 형태로 걸려 있기 때문이다. 으스러질 거 같은 나무덩어리가 걸려있어 그것이 목어인지 아닌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저거는 도대체 왜 저렇게 팍 삭았어요? 누가 일부러 썩은 나무라도 걸어놨어요?”

“저 목어가 천년을 버틴 목어라서 그래요. 화계사의 시초가 고려 광종 때 만든 보덕암이거든요. 그러니 저 나무토막은 천년을 버틴 거에요.”

화계사 범종루에 걸린 불구사물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해봤다. 아직도 할 말이 더 많지만 이쯤에서 줄이겠다. 나머지는 마지막에 이야기하겠다. 글 서두에 언급된 제 3공간과 관련해서 꼭 언급해야 할 게 있으니까.

* 화계사 범종: 사인비구가 만든 보물 11-5 동종은 어느 것일까? 큰 종일까? 아니다. 2층에 걸려 있는 작은종이다.

 

● 안 가보면 서운한 화계사 명부전

화계사를 빠져나오기 전에 꼭 명부전에 들러보자. 명부전은 저승세계인 유명계의 교주 지장보살께서 계신 곳이다. 지장보살은 그린톤으로 염색한 것처럼 녹색 민머리를 드러낸다. 그래서 보관을 쓴 다른 보살들과는 확연히 구분이 된다. 지장보살 옆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좌우로 협시한다.

그밖에도 사후세계에서 인간들의 죄의 경중을 심판하는 시왕(十王)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염라대왕도 바로 그 시왕 중에 하나다. 열 명의 왕 중에 다섯 번째 왕이다. 영화 <신과 함께>를 보신 분이라면 지옥을 관장하는 열 명의 왕들이 눈에 그려질 것이다.

화계사 명부전이 이목을 끄는 것은 흥선대원군이 쓴 현판 때문만은 아니다. 그 안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과 시왕상이 더 주목을 받는다. 불상과 시왕상이 고려 말에 활동한 나옹화상이 조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옹화상이 누구인가? 바로 그 유명한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고려 말에, 그것도 나옹화상이 제작한 불상과 시왕상이 있으니 화계사 명부전을 빼놓고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삼성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성사라고 적혀 있다. 북한산이 바로 삼각산이다.

● 홀로 깨달은 나반존자

이제 화계사 경내를 빠져나와 숲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북한산둘레길 3코스인 흰구름길 구간에 속하는데 트레킹팀은 둘레길을 따라가지 않고 산 위쪽으로 올라간다.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한참 올라가다보면 갑자기 차도가 나온다. 산길을 열심히 올라왔는데 갑자기 차도가 나와 좀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게 다음 탐방지인 삼성암에 당도하게 된다.

북한산 칼바위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삼성암은 나반존자를 위해 지어진 사찰이다.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나반존자는 소승불교에서 중시되는 인물로 홀로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고 한다. 우리 사찰에서 나반존자는 독성각에 모셔지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독립된 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같은 대승불교인데도 우리와 중국, 일본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다.

나반존자는 중국이나 일본 불교에서는 그 이름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불경에도 그 이름이 없고, 부처님 제자 중에도 그런 인물이 없다. 그렇다면 왜 유독 우리 불교에서만 나반존자가 등장할까? 이와 관련하여 나반존자가 단군을 모시는 우리 고유 민족신앙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단군신앙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으로 연결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 설에 대한 반론도 있다. 너무 늦게 신앙화 됐다는 것이다. 독성각이 본격적으로 지어진 시기는 조선 후기인데 단군신앙은 4천년이 넘고,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도 1천 7백년 정도 된다. 단군이 나반존자라면 조선 후기가 아닌 훨씬 그 이전 시기에 불교 신앙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시기상으로 너무 늦었다.

어쨌든 나반존자를 모시는 독성 신앙은 우리 불교의 고유한 면이다. 우리 불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니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삼성암은 이런 독성 기도 도량으로서 매우 중시되는 곳이다. 삼성암 말고도 경북 청도에 있는 운문사의 부속암자 사리암이 나반존자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 삼성암 독성각: 다른 계절도 좋지만 가을에 가면 더 좋은 곳이다. 조용히 기도를 하기에도 좋다.

● 불교에 녹아든 우리의 고유 신앙

독성각 말고도 칠성각과 산신각은 우리 불교에만 있는 전각이다. 칠성각은 수명의 신인 칠성신을 모신 곳이고, 산신각은 여러분들도 다 아는 산신령을 모신 곳이다. 이들 전각이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으로 따로따로 3개의 독립 건물로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 곳이 하나로 뭉쳐지기도 한다. 그러면 삼성각(三聖閣)이 된다. 그래서 삼성각은 독성, 칠성, 산신 신앙이 함께 공존한다. 복잡하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 이 3개는 우리 불교에만 있는 것이죠. 우리 민족신앙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이런 형태로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 전각을 하나로 뭉쳐놓으면 삼성각이 됩니다.”

“무슨 소리에요?”

사실 해설하는 필자도 머리가 복잡하다. 그래서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설명했다.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 이 세 건물을 삼성각 하나로 퉁칩니다!”

나반존자와 독성신앙, 불교에 흡수된 민족신앙 등등... 풀어내야 할 것이 많아 머리가 복잡하다. 하지만 정작 삼성암에 들어서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삼성암이 칼바위 능선 쪽에 있다 보니 주위 풍광을 둘러볼 수 있는데 아래쪽 화계사에서 바라보는 풍광하고는 또 다른 멋이 난다. 독성각을 탐방하는 것도 잊지 말자. 삼성암에 왔으니 당연히 독성각에 가봐야 한다.

생각해보니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는 항상 가을이었다. 알록달록한 단풍들이 바람을 타고 경내에 흩날릴 때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그런 산사의 풍광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고즈넉하게 만든다. 그런 감흥에 취하다보면 불자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할 것이다.

* 빨래골: 빨래골 계곡

● 내 마음 속에 종소리가 울린다!

숲 속의 숲이라 불릴 수 있는 북한산 생태 숲 탐방을 끝으로 화계사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생소한 불교 용어들이 많이 언급되어 머리가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자 그럼 다시 제 3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만화방은 한 때 필자의 제 3의 장소였다. 만화방에서 맡는 라면 냄새는 필자를 무아지경에 빠뜨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만화방에 가지 않는다. 굳이 만화방 라면 냄새가 아니더라도 무아지경에 빠질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종소리다. 산사의 범종소리.

서양종이 경쾌한 소리를 낸다면 동양종은 장엄한 소리가 난다. 그래서 서양종은 아침에 들으면 좋고 동양종은 석양이 지는 저녁 경에 들으면 인상적이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갈 때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것이다.

필자의 머릿속에 뭉쳐있던 번뇌들은 범종 소리를 타고 저 멀리로 사라져간다. 내 마음 속에 종소리가 울린다.

개인의 제 3의 공간을 굳이 물리적인 영역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 3의 공간이 후각의 영역이 될 수도 있고, 청각의 영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어떻게 쉼표를 찍느냐다. 제 3의 공간에서는 제대로 좀 기분을 전환해보자. 쉼표를 제대로 찍고 나오는 곳이 바로 제 3의 공간이니까.

 

 

 


 

■ 화계사 역사트레킹

1. 코스: 화계사 ▶ 삼성암 ▶ 빨래골 ▶ 북한산생태숲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경전철 우이신설선 화계역 2번 출구 / OUT: 북한산생태숲

 

 

*화계사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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