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답게 살기

무소유만큼이나 법정 스님이 일깨워주신 큰 화두이다. 무소유나 나답게 살기, 둘 다 큰 울림이 있는 말씀들이다. 무소유는 실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또 결단과도 관계가 깊다. 이에 비해 나답게 살기는 삶을 바라보는 자세 혹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나답게 살기를 자신의 신체보다 훨씬 더 큰 거울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울이 크니 자신만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보이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를 다듬어야 하는데 타인의 헤어스타일부터 훔쳐본다. 자신의 옷차림을 단정하게 해야 하는데 다른이들의 패션스타일에 주눅부터 든다.

크게 보라고 큰 거울을 가져다 놓았는데 타인을 보느라 정작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나답게 살기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나답게 사는 게 무엇일까? 무소유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 화두도 만만치가 않다.

일단 나답게 살기를 하려면 스스로를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장점은 무엇이며 단점은 무엇인가 등등... 그렇게 스스로를 알아가야 뿌리를 잘 내릴 것이 아닌가. 그래야 휘둘리지 않고 중심이 잘 잡힐 것이다.





*아차산: 아차산성 가는길


● 팔자에 없는 욕을 먹어도 다음을 준비한다

역사트레킹 강의를 진행하다보면 다양한 에피소드가 발생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적을 때는 5~6명에서 많을 때는 30명 가까이 되는 수강생들과 함께 트레킹을 행하다 보니 여러 가지 해프닝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암릉 구간이 있는 코스에 하이힐을 신고 와서 필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수강생, 시작과 동시에 막걸리 잔부터 돌리는 수강생... 이런 분들과 부대끼다 보면 팔자에도 없는 욕을 먹게 되어 낙담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필자는 다음 트레킹 강의 준비를 했다. 나름대로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욕을 먹으면서도 다음 일정을 준비할 때는 설레다니!





* 아차산성






● 너무나 중요했던 아차산, 너무나 시원한 아차산

이번편에는 아차산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아차산 역사트레킹이 행해지는 아차산은 해발 285m로 서울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해발 높이가 300미터도 되지 않으니 그리 높은 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동네 뒷동산으로도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키가 작은 아차산이지만 예로부터 그 지정학적인 중요성은 엄청나게 컸다. 한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시대부터 한강유역을 지배하는 자가 한반도의 주인이지 않았던가?

“눈이 아주 시원하지 않습니까? 아차산에 올라와야 하는 이유가 아주 명쾌해지죠. 안 올라왔으면 이런 광경을 바라볼 수 있겠어요?”

아차산이 돌산이라 그런지 곳곳에 너럭바위들이 펼쳐져 있고, 또 곳곳에 전망대가 펼쳐져 있어 한강변 풍광을 바라보기에 더없이 좋다. 인근에 자리 잡은 구리시와 강 건너 하남시는 물론 시야가 좋으면 팔당댐 부근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필자는 전망대에 오르면 항상 저 멘트를 했었다. 고생스럽게 아차산을 오르느라 힘이 많이 들어갔을 수강생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위해서.

“강 건너편 몽촌토성 쪽 좀 보세요. 아니 거기는 제2 롯데월드 타워고요. 한성백제의 옛 수도로 추정되는 몽촌토성 쪽이요.”

- 찰칵찰칵

“그러니까 약 470여년 정도를 이어왔던 한성백제가 475년 9월 장수왕의 공격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때 백제왕이 개로왕이었는데...”

- 찰칵찰칵

풍광이 좋은 코스를 탐방할 때마다 겪는 일이다. 그런데 아차산 코스는 그 강도가 더하다. 아차산은 바로 옆에 있는 용마산과 함께 서울둘레길 2코스에 속하는데 서울둘레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로 꼽힌다. 사실 저렇게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를 했지만 필자도 수강생이었다면 재미없는 강의에 집중하느니 사진기 셔터를 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 아차산: 아차산 능선에서 한강쪽을 바라본 모습.





● 아차산과 바보온달

아차산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등... 남쪽 한강변을 향해 솟아 오른 모양을 보고 남행산이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이 일대 산들이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봉화산 등으로 제각각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그냥 뭉뚱그려 아차산으로 불렸다. 앞서 언급한 서울둘레길 2코스는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으로 이어진다. 봉화산만 빠져있는 것이다. 봉화산은 서울둘레길에서 아예 빠져있다.

산 이름과 관련하여 또 다른 스토리텔링이 있다. 아차산의 한자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가 나타난다. 아차산으로 불리기도 하고 아단산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뜻이다. 지정학적으로 무척 중요했기에 불리는 이름도 다양했던 것 같다.

아차산이든 아단산이든 우리 같은 도보여행자들에게 네이밍이 뭐가 중요하겠나? 하지만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에게는 무척 중요했을 것이다. 왜? 온달장군이 아단성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온달장군이 출전을 했던 때는 고구려 영양왕 때였는데 그 시기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했고, 그 위쪽으로 계속 세력을 팽창하려 했다. 이에 온달은

‘죽령 서쪽을 빼앗지 못한다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

이런 비장한 각오를 하고 출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이 현재의 아차산성을 지칭하냐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위에 <삼국사기>에 언급한 것처럼 ‘아차(阿且)'와 '아단(阿旦)’으로 둘 다 불렸다면 현재의 아차산성이 아단성이라는 것이 아닌가? 뭐가 문제인가?

“평강공주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바보온달이 590년에 아단성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단성으로 불린 곳이 하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 아단성이 또 있어요? 아차산이랑 이름도 비슷해서 헤깔리는데...”

“그렇죠. 말을 하고 있는 저도 헤깔립니다.”

“그래서 다른 한 곳은 어디인데요?”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입니다.”

이 문제를 두고 수강생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온달산성에 대한 언급을 해야 겨우 실타래가 풀리게 된다. 한마디로 단양의 온달산성도 아차산처럼 아단성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더 정확히는 ‘을아단성’이라고 불렸다.




*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조형물





● ‘아차’해서 아차산?

재미가 없다. 잘 쓰이지도 않는 한자나 남발하고. 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보자.

조선 명종 때였다.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점을 잘 쳤다. 이에 명종이 그를 불러 시험을 해보았다. 홍계관에게 궤짝 하나를 보여줬는데 그 안에는 쥐가 있었다. 임금은 홍계관에게 궤짝 안에 든 쥐의 숫자를 맞춰보라고 했고, 만약 맞추지 못한다면 사형을 당한다고 엄포했다. 이에 홍계관은 궤짝 안에 세 마리의 쥐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궤짝 안에는 쥐가 한 마리뿐이었다. 결국 홍계관은 처형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왕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쥐의 배를 갈라보게 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거기에 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홍계관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이에 급하게 처형의 집행을 중지를 명했지만 이미 홍계관은 죽고 말았다. ‘아차’하고 늦었던 것이다. 이에 그 사형장 위쪽 산을 아차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냥 재미있는 야담이라고 보시면 된다. 조선시대의 공식 처형장은 서소문 밖이었다. 아차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차산에서 죽은 사람은 홍계관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던 개로왕이었다. 백제의 왕 개로왕이었다. 참고로 서소문은 소의문이라고 불렸는데 서대문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헐렸다. 그래서 서울의 서쪽에는 대문과 소문이 둘 다 멸실됐다.

아차산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에 대한 소개를 하느라 정작 트레킹은 뒷전인 글이 되었다. 늦었지만 다시 트레킹에 집중해보자.

아차산 역사트레킹은 아차산생태공원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등산로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아차산생태공원은 작은 야외식물원처럼 꾸며져 있다. 아래쪽에는 작은 호수가 있는데 여름에는 분수를 뿜고,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호수 안에는 인어공주동상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인어공주 앞을 지날 때마다 동전 던지기를 하며 소원을 빌었다.

필자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동상이 동상인 만큼 ‘로또대박’이 아닌 다른 소원을 빌었다.

- 우렁각시





* 아차산생태공원: 인어공주상이 있다.





● 보루를 걷다, 서울 최고의 풍광을 걷다

인어공주를 지나친 트레킹팀은 아차산성을 만나게 된다. 해발 200미터 고지에 자리 잡고 있는 아차산성은 둘레가 약 1km 정도인 테뫼식에 산성이다. 테뫼식이란 산 정상부를 둘러서 만든 성을 말한다.

아차산성은 한강이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다. 거기에 올라서면 백제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이 성은 백제가 수도 방어를 위해서 쌓았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에는 고구려로, 또 신라로 계속 주인이 바뀐다. 결국 아차산성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손길이 다 묻어있는 것이다.

아차산성을 지나면 고구려 보루군을 만나게 된다. 아차산을 위시하여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에는 여러개의 보루군이 있다. 보루(堡壘)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쌓은 구축물인데 성(城)보다는 작은 요새이다. ‘최후의 보루’라는 말을 생각하시면 쉽게 납득이 될 것이다.

사실 아차산 역사트레킹의 백미는 이 보루군을 걷는 것이다. 아차산 정상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보루군은 확 트인 시야를 선사한다. 완만하게 이어진 산책로 옆으로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멀리는 북한산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렇다고 한강이나 북한산 같은 자연물만 바라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서울의 동쪽편 시가지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풍광들을 다각도로 볼 수 있으니 서울둘레길 중에서 가장 멋진 코스라는 별칭이 붙은 것이다.

이 보루군들은 남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고구려 유적들이다. 이 보루군을 통해서 고구려의 국경지대 요새에 대한 이해 및 남하과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산들에 있는 보루들보다 아차산의 보루가 훨씬 더 잘 복원이 되어 있다. 확 트인 곳에서 트레킹도 하고 쉽게 볼 수 없는 고구려 유적들도 탐방할 수 있으니, 그거 정말 좋은 일 아닌가? 참고로 아차산 정상은 별다른 표식이 없었는데 최근에 표지석이 하나 생겼다.

이제 트레킹팀은 긴고랑길로 하산을 한다. 긴고랑길은 지형이 순하다. 그래서 올라오기도 편하고, 내려가기도 편하다. 그리고 옆에 계곡도 있다. 긴고랑길 계곡은 비가 와야 그 모습이 나타나는 건천에 가깝다. 하지만 비가 제대로 내려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면 꽤 매력적인 계곡으로 변신한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뿌리는 폭포도 형성된다.






* 아차산: 아차산 4보루. 주능선을 따라 고구려 보루들이 산재해있다. 그 보루들은 용마산과, 망우산을 넘어 북한산까지 이어진다.





● 역사트레킹을 할 때만큼은 나답게 산다!

우리 조상들은 방위에 맞춰 여러 가지 것들을 배치해놓았다. 오행 같은 경우는 동쪽 나무(木), 서쪽 금(金), 남쪽 불(火), 북쪽 수(水), 중앙 흙(土)이다. 맛도 배치해놓았다. 동쪽 신맛, 서쪽 매운맛, 남쪽 쓴맛, 북쪽 짠맛, 중앙 단맛.

필자의 본명은 곽동운이다. 이름에 ‘동’이 있어서 그런지 동쪽과 좀 잘 맞는 듯싶다. 신맛 나는 과일을 무척 좋아하고, 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좋아하니까. 아차산이 서울의 동쪽에 있으니 아차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더 신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소리라고 힐난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필자는 이런 것들이 바로 내 자신을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배워가며 예전에는 잘 몰랐던 내 자신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한다. 간간이 행하는 실내강의에 이런 것들을 써먹기도 한다. 전에 서울 은평구에서 실내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 즈음이었는데 은평구가 서울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니 이런 말로 강의를 끝낸 적이 있었다.

“우리가 서쪽에 있으니까요, 오늘 점심은 매운탕으로 드세요. 제가 그 어렵다는 점심 메뉴를 골라드렸어요.”

반응은? 맵지 않았다. 썰렁했다

.

필자는 무소유와 함께 나답게 살기라는 화두를 계속해서 곱씹을 것이다. 나답게 살기는 결코 이기적인 삶이 아니다. 자기 삶의 중심추에 온전히 자기 자신을 올려놓는 행위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나답게 살기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늦게 철이 들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진짜 좋아하면서 진짜 잘하는 거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나이가 먹어도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게, 진짜 잘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 않나.

그것이 무엇일까? 역사트레킹이다. 적어도 역사트레킹을 할 때만큼은 나답게 사는 산다!











* 아차산: 아차산 능선길을 걷는 트레킹팀







■ 아차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아차산생태공원 ▶ 아차산성 ▶ 고구려정 ▶ 보루군 ▶ 긴고랑길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아차산역 2번 출구(지하철5호선) / Out: 긴고랑길




* 아차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책을 좀 많이 구매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지적 호기심도 왕성했었고, 책 욕심도 굉장했을 때였다. 없는 돈을 쪼개서 책을 샀고, 책장을 채워 넣었다. 차곡차곡 채워지는 책장을 볼 때마다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샀다. 역사, 철학, 사회과학, 문학 등등... 한 분야를 파고들 생각도 없었고, 학자가 될 수도 없었기에 그렇게 잡식성으로 책을 구매를 했던 것이다.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네럴리스트에 더 어울리는 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집 규모에 비해서 책이 너무 많았다. 집은 작은데 책이 쌓이니 주체가 안 되었다. 더 큰 문제도 있었다. 그 책들을 잘 안 읽었다는 점이다. 필자의 지적호기심은 책장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허세를 떨기 위한, 보여주기용 책장이었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성북동 역사트레킹





● 계절에 민감한 역사트레킹

당연한 이야기지만 역사트레킹도 계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해당계절에 맞게 코스를 배치하는 것은 매우 기본이 되는 일이다.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곳을 여름에 배치한다? 당연히 안 될 말이다.

계절에 민감하다보니 특정 시기에만 가는 코스도 있을 정도다. 봄꽃들이 군락을 이루는 곳은 봄에 가고, 단풍이 곱게 지는 곳은 가을에 간다. 숲길이 울창한 곳은 한여름에 가도 좋다. 역사트레킹도 엄연히 아웃도어 활동인 만큼 계절의 변화에 부응해야 하는 것이다. 봄꽃들의 화사함을 느끼며 문화재를 탐방하면 기쁨이 더 배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록달록한 단풍들을 배경삼아 문화재를 탐방한다면 더 로맨틱할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성북동 역사트레킹은 가을에 가장 적합한 트레킹 코스이다. 가을에 가야 더 로맨틱하게 즐길 수 있는 코스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광고할 때 꼭 이런 멘트를 사용했었다.

“서울 단풍의 메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울 단풍의 진면목을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통해 맛볼 수 있기에 저런 과감한 멘트를 사용했던 것이다.





* 성북동 역사트레킹

● 법정스님과 길상사

춘녀사추사비(春女思秋士悲)라는 말이 있다. 봄에 여인들은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가을에 선비는 비애를 느낀다는 뜻이다.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 말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춘녀사추사비’처럼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지만 단풍을 감상하기 위해 길을 나선 트레킹팀은 늘 그랬던 것처럼 여성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녀들은 봄꽃을 반겨하는 봄 처녀들처럼 곱게 물든 오색단풍 앞에서 크게 환호했다. 사실 형형색색의 단풍 앞에 남녀가 어디 있고, 노소가 어디겠는가? 그냥 즐겁게 즐기면 되지!

서론이 길어졌다. 성북동 역사트레킹의 첫 탐방지는 법정 스님의 자취가 남아 있는 길상사다. 길상사는 고급요정인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로 북악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이후 리모델링을 실시했지만 사찰 건물의 대부분은 요정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대원각이 조계종에 등록됐을 때는 1995년 6월이었는데 당시는 ‘대법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다 2년 후인 1997년에 시주자인 김영한(법명 길상화)의 법명과 비슷한 ‘길상사’로 명칭이 바뀌어 창건된다. 대원각을 운영하였던 길상화 김영한은 당시 시가로 천억 원이 넘던 대지와 건물을 시주했고, 그런 길상사에 법정 스님은 회주(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 임하게 된다.

아무리 시주 형식이라지만 천억 원이면... 로또를 몇 번 맞아야 하나? 더군다나 법정 스님은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셨던가? 그래서인지 법정 스님은 10년 동안 김영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10년 동안 시주를 제안한 김영한도 10년 동안 그 제안을 거절한 법정 스님도 정말 대단한 분들인 것 같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누군가 1천억을 준다고 하면 어떻게 화답하실 것인가? 필자는 속물이다. 그래서 전에 트레킹팀과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다.

“곽 작가님은 누가 천억 원을 시주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에요?”

“그럼 저는 바로 ‘제소유’로 만들 겁니다. 무소유가 아닌 제소유!”

길상사는 성북동을 찾는 이들이 잊지 않고 탐방하는 명소가 되었다. 꼭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방문하면 좋을 장소가 된 것이다. 그렇게 좋은 길상사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키워드로 정리해본다.

1. 법정스님

2. 김영한

3. 대원각

4. 시인 백석

5. 종교화합



* 길상사: 길상사의 가을




● 1000억 원보다 시 한 줄이 더 낫다?

1,2,3은 다 언급이 됐는데 시인 백석과 종교 화합은 좀 낯설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본명이 백기행이었던 백석 시인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의 시를 썼는데 한국 시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석을 좋아했던 시인 안도현은 문학청년 시절에 그의 시를 여러 번 필사했다고 한다. 이후 2017년에는 <백석 평전>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진짜 시인 백석과 길상사가 무슨 상관이 있나? 관련이 아주 많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가 길상화 김영한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녀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준다. 하지만 뜨겁게 타올랐던 그 둘의 사랑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히고 만다. 아들이 기생과 어울리는 게 마땅치 않았던 부모는 백석을 강제로 결혼시키려했던 것이다. 이에 백석은 자야(김영한)에게 만주로 도망가자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자야는 자신이 시인의 앞길을 막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백석 홀로 만주로 넘어간다.

이때가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이었다. 이후 자야는 다시는 백석을 보지 못한다. 그는 해방 후 북쪽을 택했는데 1958년에 숙청을 당해 국영농장에서 양치기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1996년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백석 시인과 자야가 사랑을 한 기간은 불과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야는 평생을 백석을 사모했으면 죽을 때까지도 그를 잊지 못했다. 노년에 김영한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1000억 원이라는 돈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도 못하다”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고. 그러다 또다시 쉽게 사랑하고, 또다시 쉽게 헤어지고... 너무 가벼운 ‘사랑의 시대’라 그런가? 자야가 간직한 그 사랑이 역설적으로 너무나 커 보인다.

마지막으로 5번, 종교화합을 살펴보자. 길상사에는 날씬한 관음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교수라는 분이 직접 조각을 했다. 통상적으로 관음보살상은 ‘자비’라는 단어에 어울리게 후더분한 면이 강조되지만 길상사 관음보살상은 호리호리한 모습이다. 그런 특이한 모습 때문인지 몰라도 더 눈길이 간다. 길상사에는 기독교 신자인 영안 모자 백성학 회장이 기증한 7층 석탑도 있다.

이렇듯 길상사에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가 서로 어우러져 있다. 서울에 이런 고요하면서도 종교적으로 화합을 이루는 장소가 있다는 게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 길상사 보살상



● 아픈 현대사를 만나다, 김신조 루트를 걷다

자, 이제 길상사 위에 있는 정법사를 지나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서보자. 정법사 경내에서 내려다보는 성북동 일대의 모습이 멋지니 꼭 잊지 말고 보셨으면 좋겠다.

정법사를 뒤로 한 후 북악스카이웨이를 지나 북악하늘길로 접어든다. 북악하늘길은 성북구에서 조성한 도보여행길로 총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트레킹팀은 제2산책로를 이용하여 이동한다. 하늘다리를 넘게 되는데 하늘다리를 넘으면 깊은 산중에 온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곳은 북악하늘길 제2코스입니다.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곳이죠.”

“아, 여기가 그 유명한 그 김신조 루트...”

“예 맞습니다. 청와대 습격 사건이라고 불렸던 1·21사태를 일으킨 일당들이 여기서 우리 군경들과 총격전을 벌였죠.”

북악산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출입이 제한되다가 지난 2007년에 전면적으로 개방이 되었다.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김신조 일당이었다. 필자는 호경암 앞에서 저렇게 설명을 했는데 호경암은 1·21사태 때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져 아직까지도 바위 곳곳에는 그날의 아픈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당시 김신조를 위시한 무장공비들은 시간당 10km 이동을 했답니다. 그것도 산길을요. 건강한 성인이 4km로 정도로 이동하니까 그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이동을 했는지 알 수 있겠죠.”

구멍이 뻥뻥 뚫린 호경암을 앞에 두고 설명을 이어갔다.





* 호경암




● 격동의 시기, 1968년!

김신조 사태는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국의 정보선인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된다. 또 그해 10월경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를 하기에 이른다. 1968년, 한반도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었다.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보자. 196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베트남에서는 월맹군의 구정공세로 미군의 예봉이 꺾였고,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서구에서는 68혁명이라 하여 구체제 극복을 내세운 혁명이 일어났다. 또한 자유분방함을 강조하는 히피문화도 크게 기세를 떨쳤다.

당시 공산권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프라하의 봄이라는 혁명이 일어났다. ‘밀란 쿤데라’라는 소설가 아시는가? 그 작가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프라하의 봄이 중요한 모티브였다. 하지만 그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구소련이 탱크를 밀고 들어오며 강제 진압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맞이한 ‘봄날’이 너무나 쉽게 사라지고만 것이다.

이렇듯 성북동 역사트레킹은 몇 안 되는 현대사, 그중에서도 세계사가 해설로 들어가는 곳이라 필자도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하고 간다. 준비를 많이 해서 그랬는지 말도 많이 한다. 하지만 말이 많으면 실수도 나오는 법! ‘밀란 쿤데라’를 ‘밀란 쿠데타’라고 했다가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끝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고 해설을 했었다.

-찰칵찰칵

하지만 이미 트레킹팀의 마음은 단풍나무에 가 있었다. 하긴 필자도 그랬을 거다. 재미없는 설명을 듣느니 알록달록한 단풍들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게 훨씬 더 남는 일이지!

그렇게 빛깔고운 단풍을 서울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장공비의 루트였던 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 북악하늘길: 북악하늘길 2코스는 일명 '김신조 루트'로 불린다. 그 김신조 루트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길을 자랑한다.






● 무소유 조치가 내려진 내 책장

역사트레킹을 업으로 삼다보니 책을 역사서 위주로 읽게 됐다. 책장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있었지만 결국 생존 독서형식으로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사실 역사서만 읽기도 버거웠다.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까지 섭력해야하니 다른 분야의 책들에는 눈길을 줄 수가 없었다.

좁은 공간에 책들이 넘쳐나니 어느 순간부터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자기가 직접 돈을 주고 산 물건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꼴이라니! 정말 결단이 필요했다. 이때 법정 스님의 말씀이 죽비소리처럼 스쳐갔다.

- 무소유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것조차도 떠나보내야 할 때는 떠나보내야 하는 법이다. 마음을 두지 않고, 애정을 하지 않는 것이 무소유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관심도 없는 것들이라면 굳이 ‘무소유’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법정 스님의 글들을 다시 읽으며 책장을 정리했다. 한 덩어리는 헌책방에 팔고, 다른 한 덩어리는 고물상으로 향했다. 버리기에 아까운 책들도 과감히 버렸다. 물론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역사서는 거의 다 그대로 놓아두었다.

‘무소유’ 조치를 당한 필자의 책장은 중간중간에 빈 곳이 꽤 많이 늘었다. 좀 허전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책을 버릴 생각이다. 특히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면 법정 스님을 떠올리며 책들을 처분할 생각이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일이 쉽지 않다. 소유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무소유인 듯싶다.





■ 성북동 역사트레킹

1. 코스: 길상사 ▶ 정법사 ▶ 하늘교 ▶ 김신조 루트 ▶ 성북동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 Out: 성북동






* 성북동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우리나라만큼 답사여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도 드물 것이다. 5천 년에 걸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문화재가 국토 곳곳에 산재해있으니 답사여행에 ‘딱’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인프라가 갖추어져있다는 말이다.

사실 광활한 영토보다는 적당히 규모 있는 영토가 답사여행하기에는 더 낫다. 영토가 넓으면 그만큼 교통이나 숙박, 편의시설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수 백 킬로미터를 가야 겨우 마을을 만날 수 있는 곳에서는 답사여행이 원활이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높은 것도 답사여행이 활성화되는데 한 몫 했다. 역사와 문화에 목말라한 많은 소비자들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답사여행을 흥하게 하는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귀면: 오간수문에 조각되어 있다.

● 직접 가서 봐야지 그려볼 수 있다!

그럼 답사여행의 장점은 무엇일까? 텍스트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그 중 하나의 장점으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안에서는 읽어낼 수 없는 지식들을 답사여행을 통해서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곽과 같은 축조물들은 해당 유적과 함께 주위 사방의 지형을 함께 둘러보아야 그 진면목을 명쾌하게 인지할 수 있다.

가파른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성곽이 어떤 방면의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탐방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적들의 예상 침입로를 짐작해보고, 해당 성곽이 그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축조됐는지 나름대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도 있다.

이런 과정들은 역사책이나 위성지도 같은 텍스트로는 구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답사여행은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격언을 가장 잘 실천하는 행위인 듯싶다.

이번에 소개할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그런 격언에 잘 어울리는 답사 트레킹이라고 할 만하다. 그 길을 따라가면 탕춘대성은 물론 고려시대 마애불을 볼 수 있다. 또한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의 남사면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탕수육을 잘하는 중국집이 아닌, 방어용 산성이었던 탕춘대성! 그 길을 따라 걸어가 본다.





* 옥천암: 왼쪽 첫번째 건물이 백불이 모셔진 보도각이다. 홍제천이 바로 앞에 흐르고 있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상명대 옆쪽에 자리잡은 홍지문(弘智門)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울에는 큰 성곽이 두 개가 있다. 일명 서울성곽이라고 불리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바로 그것이다. 한양도성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동쪽의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을 둘러쌓아 축조한 것이다. 이 네 개의 산은 내사산이라 불린다. 안쪽에 있는 네 개의 산이란 뜻이다. 전편에서도 계속 언급을 했었다.

한양도성이 도읍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다면,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불릴 수 있다.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손꼽히는 요충지였다.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도 여러차례 북한산에 있는 산성을 수리·축조했다. 그만큼 북한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어 거점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룬 조선은 국방력 강화와 도성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1704년(숙종 30)부터 1710년까지 도성 성곽을 재정비했다. 또한 다음해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됐다.

약 8km 달하는 북한산성은 기공에서 완공까지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규모에 비해 무척 빨리 축조된 것인데 청나라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공사를 서둘러 완료시켰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의 축조와 수축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울성곽은 내사산을 둘러 만든 성이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있는 성이고. 그래서 두 성곽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두 성곽 사이가 좀 ‘붕 떠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보조성이 축성됐는데 그것이 바로 탕춘대성(湯春臺城)이다. 성이 세워진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湯春臺)가 있다하여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탕수육을 잘하는 중국집이 아니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약 4km에 걸쳐 연결한 탕춘대성도 1719년, 조선 숙종 시기에 만들어졌다. 인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성벽은 홍제천(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북한산 쪽으로 숨 가쁘게 비탈을 탄다. 그러다 북한산 서남쪽 비봉 인근에서 북한산성과 합류된다. 북한산 비봉은 진흥왕 순수비(555년 건립)가 있던 곳이다.






* 홍지문





●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이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트레킹팀 멤버 중에도 그렇게 오해를 하신 분이 계셨다. 이번 편에서는 예전 트레킹팀과 동행한 이야기들이 종종 언급될 것이다. 대화체로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북대문은 숙정문이라고 따로 있습니다. 홍지문은 북대문이 아니에요.”

한 번 더 이야기하지만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智’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이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다. 1921년에 있은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간 것이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만에 복원한 것이다.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 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오간수문과 홍지문: 오간수문 아래로 통행이 가능하다.





● 컬러풀한 부처님? 컬러풀한 보도각 백불!

앞서도 언급했듯이 홍지문 아래로는 오간수문이 있다. 최근에 산책로가 정비되어 그 오간수문을 직접 통과해서 걸을 수 있다. 수문은 홍예문, 즉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홍예문의 맨 위쪽 부분을 홍예종석이라고 부르는데 홍지문 오간수문에는 귀면이 장식되어 있다.

“저 아치의 꼭대기에 있는 돌에 괴상하게 장식된 것이 있죠. 저걸 귀면이라고 하는데 저는 편의상 치우천왕이라고 부릅니다.”

“저걸 왜 장식했어요?”

“물을 타고 들어오는 악귀가 저 괴상한 귀면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라고 그렇게 한 거죠?”

“풋, 정말 악귀가 도망갈까요?”

“글쎄요. 도망은 안 가도 한참 여기 서 있을 거 같아요. 무서운 거 같기도 하고, 웃긴 거 같기도 해서요. 절에 있는 사천왕을 생각해 보세요. 무서운데 우스꽝스럽잖아요.”

트레킹팀은 건강과 답사를 중시하는 ‘복덩이들’이기에 치우천왕의 보호(?)를 받으며 오간수문을 통과했다. 이제부터는 홍제천을 따라 걷는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이동을 하니 보도각 백불(白佛)을 만날 수 있었다. 정확한 명칭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인 보도각 백불은 지난 2014년 3월 11일에 보물 1820호로 승격했다.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불이 2014년에 와서야 보물로 승격됐다는 건 좀 늦은 감이 있다. 그 전에는 서울시지정문화재였다. 옥천암은 백불 바로 옆에 위치한 사찰이고, 보도각은 백불을 보호하기 위해 올린 기와 건물을 말한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이스턴 석상을 빰칠 정도로 큼직큼직한 석불들이 많이 등장하는 시기다. 발걸음이 많이 오가는 곳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던 석불들은 지나가는 이들의 수호신이자 이정표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석불들은 돌장승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됐다. 고려 전기시대에 유명한 석불들은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안동 이천동 석불, 파주 쌍미륵 등이 있다.

길이가 약 5미터에 달하는 보도각 백불도 홍제천을 따라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던 이들의 이정표이자 수호신 역할을 했다. 또한 많은 이들의 기도처이기도 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부처님과 달리 ‘화이트컬러’를 한 부처님인데 당연히 많은 이들이 왔겠지!

“그런데 왜 백불이에요? 흰색이 아닌데요. 회색인데요.”

“그렇죠. 화이트가 아니죠. 호분이라는 안료를 바른 건데요. 조개껍질에다 흰 색 성분이 섞인 안료로 바위에 칠을 했습니다. 목걸이나 팔찌, 보관들은 적색이고요.”

보도각 백불은 정확히 부처님 상도 아니다. 머리에 쓴 보관이 눈에 띄는 관음보살상이다. 부처상이 남성적인 면으로 그려졌다면 보살상은 여성적인 면으로 그려진다. 보관, 목걸이, 팔찌들에 색깔이 입혀져서 그런지 백불은 다른 보살상들보다도 더 여성적으로 보인다.

흰색이든 회색이든 무슨 상관인가? 또 부처상이든 보살상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건 거기에 거대한 돌장승 같은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고,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그네들은 잠시 시름을 달래며 기원을 드렸다는 점이다.

그렇게 컬러풀한 백불 아래 많은 이들이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 중에는 태조 이성계도 있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할 때쯤에 이곳에 와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트레킹팀도 각자 하나씩 기원을 올렸다. 무슨 기원을 드렸을까? 궁금해서 물어봤다.

“뭘 비셨어요? 로또 대박?”

사실 로또 대박은 필자의 기원이었다. 1편 선바위에서도 똑같이 빌었던 기원이었다.





* 보도각 백불




● 방치되어 있는 탕춘대성 암문


이후 트레킹 팀은 탕춘대성 암문을 향해 이동했다. 암문은 말 그대로 적 몰래 은밀하게 성 밖으로 나가는 출구이다.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고, 특공대를 파견하고, 식량을 조달하는 통로이다. 그래서 암문의 존재는 일급비밀이었다. 지도상에도 그려 넣지 않았다. 탕춘대성 암문은 한양도성 암문과 달리 좀 방치된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아직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탕춘대성 암문을 지난 후부터는 드문드문 북한산의 남쪽면이 나타난다. 북한산 남쪽면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보현봉이다. 북한산의 원래 이름은 삼각산인데 세 개의 봉우리가 삼각뿔 형태를 나타낸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 세 개의 봉우리는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인데 북한산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해 비해 보현봉을 위시한 비봉 등은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렇게 트레킹 팀은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의 남쪽면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북한산 남쪽 봉우리들이 진짜 손에 잡힐 거 같아요. 정말 멋지네요!”




* 탕춘대성 암문





● 현장에 답이 있다!


홍지문과 오간수문, 보도각백불, 탕춘대성 암문 등등...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마당바위 전망대까지.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답사패키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탐방한다.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교통카드 비용만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물을 만날 수 있는데다 숲길 탐방도 행할 수 있어 참 매력적이다. 전망은 또 어떤가. 트레킹이 마무리될 즈음에 방문하는 마당바위의 전망은 산과 도심지가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라 독특한 풍광을 선사한다. 마당바위에 앉아 포즈를 취하면 그것 자체가 인생샷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 사람들은 참 복 받은 사람들이다.


탕춘대성 역사트레킹 코스를 만들기 위해 필자는 그 인근을 수십 번씩 오갔다. 물론 사전답사는 숙명 같은 것이다. 10km 코스를 만들기 위해 100km 이상을 오가야 하는 것이 필자의 임무인 것이다. 갔던 길 또 가고, 또 갔다가 다시 고치고. 이런 식으로 수없이 발걸음을 하다 보니 결국 호평 받는 코스가 나오더라.


발바닥에 땀나도록 걸어 다녀야 제대로 된 결과물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말이다.


“현장에 답이 있다!”






*탕춘대성 성벽





■ 탕춘대성 역사트레킹


1. 코스: 홍지문(오간수문) ▶ 보도각백불 ▶ 탕춘대성 암문 ▶ 마당바위 ▶ 실록어린이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홍지문 / Out: 실록어린이공원 ☞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버스 탑승, 상명대 하차 / 실록어린이공원에서는 3호선 홍제역이 가까움.






* 탕춘대성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파랑새가 정말 있을까?’

 

불혹을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철이 들지 않아서인가? 요즘도 가끔가다 저런 동화 같은 상상을 해본다. 그렇다고 필자만 파랑새를 찾고 있지는 않은 듯싶다. 우리사회가 무한경쟁 속에 놓이다보니 역설적으로 파랑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더 짙어지고 있는 듯싶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더 많이 입에 오를수록 파랑새도 더 많이 언급될 것이다.

잠깐 정리를 해보자. <파랑새>는 벨기에 출신인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가 쓴 동화이다. 주인공인 틸틸과 미틸의 꿈속에 요정 할매가 나타났다. 할매는 자신의 아픈 딸을 위해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틸틸과 미틸에게 부탁을 했다. 이제까지 치르치르와 미치르로 알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틸틸(tyltyl)과 미틸(mytyl)이더라.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아 여러나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파랑새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들은 지친나머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그건 꿈이었다. 그 꿈에서 깨어나 집에 있던 새장을 보니 기르던 새가 파랑새였던 것을 깨닫는다.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 온갖 고생을 하며 여러나라를 돌아다녔는데 정작 파랑새는 자신의 집에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제까지 <파랑새>가 안데르센의 작품인 줄 알았다. 여기서 필자의 독서 실력이 확 노출된 셈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의 어렸을 때 친구들 중에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간간이 파랑새를 입에 올리기는 했지만 원작자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냥 단순하게 ‘명작동화=안데르센’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파랑새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대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해본다.

 

 

 

 

 

* 안산자락길: 로고

 

 

 

 

● 경기도 안산? 아니 서대문 안산!

누구나 다 아는 사실 하나! 인구 천 만 명이 모여 사는 서울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라는 사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 하나! 서울에 정말 산이 많다는 사실!

초고층 빌딩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지만 서울 스카이라인의 최고점은 인공물이 아니다. 최고점은 항상 북한산과 관악산이 차지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한다. 이렇듯 산은 서울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현무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과 주작 역할을 하고 있는 관악산이 두드러졌지만 키가 작은 산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 소개할 곳은 서대문 안산이다. 이번 편에서는 이동순서에 따라 기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코스 상으로는 맨 뒤쪽에 놓이는 무악재하늘다리가 앞부분에 소개됐다.

문화센터에서 안산역사트레킹 강의 공지를 올렸을 때, 종종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안산 트레킹이요? 서울학개론이라면서 경기도 안산까지 가요?”

“아닙니다. 서대문 안산으로 갑니다. 서대문 안산(鞍山)하고 경기도 안산(安山)은 위치도 다르고 한자도 다릅니다.”

그렇다. 서대문 안산은 ‘안장안(鞍)’ 자를 사용한다. 산이 말 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명칭을 얻은 것이다. 실제로 안산은 완경사를 타고 가다가 정상부근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다. 멀리서보면 얼핏 말안장처럼 보인다. 그런 안산의 윤곽을 확인하려면 건너편에 있는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게 좋다.

안산은 인왕산과 무악(毋岳)재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그래서인지 안산과 인왕산은 지질구조가 비슷한 점이 많다. 지난 1편에 등장한 인왕산 선바위를 기억하시는가? ‘기도빨이 잘 받는’ 스님바위 말이다. 선바위를 보면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기이한 형태의 그런 구멍들은 풍화혈이라고 부른다. 벌집구조 형태로 작용하는 풍화혈은 화강암이 차별침식을 받았을 때 생성된다. 이 풍화혈은 타포니(taffoni)라고도 불리는데 ‘타포내라’라는 코르시카의 말이 그 어원이다.

“타포니는 프랑스 코르시카에서 나온 말입니다. 코르시카는 나폴레옹의 출생지고요. 하여간 이런 벌집 구조는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서울에서 이런 지형을 볼 수 있는게 참 고마운 일이죠.”

 

애꿎은 나폴레옹까지 끌어오면서 타포니 지형을 설명하지만 필자의 전달력이 딸려서 그러는 건지 수강생들의 표정은 ‘뚱’해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지질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나 있겠는가? 아무리 수강생들이 하품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야기할 건 이야기해야지.

“인왕산에서 봤던 타포니 지형을 이곳 안산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안산에도 해골바위가 있거든요. 구멍이 뻥뻥 뚫리는 타포니 지형이 그런 해골바위를 만들었지요. 인왕산에도 해골바위가 있고, 안산에도 해골바위가 있고...”

 

 

 

 

 

* 무악재하늘다리

 

 

 

 

 

●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생태다리, 무악재하늘다리

그렇게 비슷한 점이 많은 안산과 인왕산은 1972년 통일로 확장으로 인해 녹지축이 끊기게 된다. 무악재 위를 달리고 있는 도로가 바로 통일로다. 통일로 이전에는 의주길이었다. 의주길을 따라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들이 왔고, 조선의 문무백관들이 중국으로 향했다. 그 길은 매우 중요한 기간 도로였던 셈이다.

그렇게 약 40년 이상 끊겨있던 두 산에 생태다리가 놓였다. 무악재하늘다리가 놓인 것이다. 그 다리가 놓임으로서 두 지역을 오가는 코스가 다양해졌다. 생태다리 하나 때문에 트레킹 코스가 풍부해진 셈이다. 동물들보다 사람들이 더 즐겁게 된 것이다.

한편 무악재는 무학재로도 불린다. 이처럼 한끝의 차이는 왜 나타났을까? ‘무악’이나 ‘무학’이나 똑같아 보이는데. 조선이 개국할 즈음에 천도 예정지로 거론된 곳은 한양, 계룡산, 안산 세 곳이었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 하륜은 안산 주산론을 펼치며 안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었다.

만약 하륜의 주장대로 안산을 주산으로 삼았다면 한강의 이용가치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들의 상행위는 더욱더 활발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조선이 교조적인 성리학에 묶이지 않고 훨씬 더 개방적인 나라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의 나라였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상업활동을 천시하던 사회였다.

 

어쨌든 안산 주산론은 안산의 남쪽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이유로 폐기되고, 무학대사의 의견에 따라 북악산 남쪽이 도읍지로 결정된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어서인지 무악재가 무학재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무악재는 말안장 같은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고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렸다.

 

 

 

 

 

*메타세쿼이아 숲

 

 

 

 

● 서대문형무소와 다크투어리즘

안산 역사트레킹의 출발점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처음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1908년)으로 출발했는데 이후 서대문감옥(1912년), 서대문형무소(1923년)로 개명을 한다. 이름을 바꿨다고 해도 그 기능은 뻔했다. 독립지사들에 대한 탄압과 수감이 그 역할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독립을 외치며 피눈물을 흘렸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서울형무소(1945년), 서울교도소(1961년), 서울구치소(1967년)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감옥의 기능은 계속됐다. 드라마틱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반영하듯 이곳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됐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작고한 김근태 의원 같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었다.

형무소의 담장이 걷어지고 주변지역이 공원화 된 것은 1992년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포함한 이 일대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명명된 것이다. 시설이 잘 정비가 되어서 그런지 서대문독립공원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다. 많은 이들이 피눈물을 흘렸던 서대문형무소에는 체험학습 나온 초등학생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재개발 문제로 말이 많았던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 일대는 이제 고급아파트가 들어섰다. 현재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일대는 확실히 어두운 색채가 옅어져있다.

어두운 면을 찾아볼 수 없다고 역사의 교훈까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럴 때는 다크투어리즘으로 접근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다크투어리즘은 전쟁이나 학살, 천연재해(쓰나미) 등을 당한 곳을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다크투어리즘은 아픈 기억을 가진 지역을 탐방함으로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199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테마 여행의 한 형태다. 아우슈비츠, 체르노빌, 히로시마 같은 곳을 탐방한다면 다크투어리즘 여행을 행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대문 형무소가 다트투어리즘(dark tourism)의 대표적인 장소로 손꼽힌다.

다크투어리즘을 확대해보면, 서울도 곳곳이 다 그 탐방지에 속할 수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던 경복궁, 한국전쟁 중에 폭파가 됐던 한강철교 등등... 서울만 그러겠는가? 다른 곳들도 다크 투어리즘 천지다. 제주 4·3, 5·18 민주화운동, 노근리 학살 등등... 동학농민군이 몰살을 당한 공주 우금티도 다크투어리즘의 최적지일 것이다.

 

 

 

 

 

* 서대문형무소

 

 

 

 

● 나무데크는 이제 그만!

도보여행자들에게 안산은 상당히 인기가 있는 곳이다. 안산자락길이 있기 때문이다. 무장애길이라 하여 유모차나 휠체어도 통행할 수 있다는 게 안산자락길의 특징이다. 나무데크를 사용하여 경사도를 완곡하게 해 이동권 약자들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정말 유모차나 휠체어도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을까? 필자는 수 십 차례에 걸쳐 안산 역사트레킹을 진행했었다. 그런데 안산자락길에서 휠체어나 유모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안산(296m)이 키가 낮은 산이라고 해도 산은 산이다. 아무리 무장애길이라고 칭해도 경사도가 있기 마련이다.

‘무장애’라는 말에 부합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안산자락길에는 나무데크가 과도하게 사용됐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텅텅’거리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이동권 약자들이 더 손쉽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수단이 나무데크의 과도한 사용이라면 곤란하다. 나무데크도 적재적소의 원칙에 따라 최소한으로 그쳐야한다. 도보여행자들은 흙길을 걸으려고 길을 나서는 것이지 나무데크를 걸으려고 발걸음을 떼는 것이 아니니까.

어쨌든 안산은 경사도가 완만하여 초급자들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2달 과정의 강의가 있을 때, 수강생들의 체력을 알기 위해 테스트 과정이 필요한데 안산은 좋은 테스트장이 되어준다.

● 누구나 로맨티스트가 되는 그 곳!

이제 정상을 향해 가야한다. 안산자락길이 평지처럼 순한 길이었다면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은 좀 험할 수 있다. 이 부근은 암반이 노출되어 있는데 앞서 말한 타포니 지형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조심스럽게 정상을 향해가다 보면 해골바위를 만날 수 있다.

안산 정상에는 동봉과 서봉이 있는데 이곳에는 예전에 봉화가 설치됐던 곳이다. 동봉수대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작된 봉수를 받았고, 서봉수대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작된 봉수를 받았다. 둘 다 최종목적지는 남산 봉수대였다. 현재는 동봉수대만 복원이 됐다. 서봉수대 자리에는 통신 회사의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다.

안산 봉수대에 올라서면 사대문 안쪽의 모습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왕산의 성곽길이 선명하게 보이고, 뒤쪽의 북한산의 봉우리들도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들어온다. 인왕산이나 북악산에서 바라보는 광경과는 또 다른 멋이 있는 것이다. 특히 한강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게 안산의 매력인데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울시내,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한강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 더욱더 매력적이다.

그렇게 한강쪽을 바라다보면서 왜 경기관찰사였던 하륜이 안산 주산론을 펼쳤는지 생각해보자. 필자는 가끔 수강생들에게 그 숙제를 내줬다. 하지만 그 숙제에 관심 있는 분들은 거의 없었다. 대신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여기 낙조가 장난이 아니겠는데요. 노을 질 때 한강에 유람선이라도 다니면 정말 판타스틱 하겠네요!”

말 그대로다. 안산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정말 일품이다. 낙조가 진후에도 멋있다. 야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낙조와 야경을 본 사람은 누구라도 로맨티스트가 될 것이다. 그만큼 매력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정상에서 내려오면 하늘높이 쭉쭉 뻗어 있는 메타세쿼이아 숲이 트레킹팀을 맞이한다. 서울에서 그렇게 울창한 메타세쿼이아 숲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게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이렇게 안산역사트레킹은 지루할 틈이 없다. 300미터도 안 되는 작은 산이 이렇게 많은 것들을 안겨줄 수 있다니! 도보여행자로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 안산봉수대

 

 

 

 

● 가장 트레킹하기 좋은 곳은 어디?

“트레킹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에요?”

은근히 많이 저런 질문을 받는다. ‘어디가 여행하기 좋아요?’ 이런 질문도 많이 받는다. 트레킹 강사인 필자에게 저런 질문들은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콕 집어 달라는 것이다. 트레킹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전에 생태 공부가 하고 싶어서 숲체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 숲체험 교실도 현장이 중요하다. 그래서 강사분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숲 체험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에요?”

수강생 분들에게 들었던 질문을 필자가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이 질문을 했을 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좀 놀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트레킹을 하기 가장 좋은 곳은 바로 여러분이 사시는 동네 뒷산이에요.”

필자가 내놓은 대답은 동네 뒷산이었다. 그렇다면 숲체험 강사분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그 대답을 들었을 때는 더 제 발이 저렸던 것 같다.

“숲 체험을 하기 가장 좋은 곳은 바로 여러분이 사시는 동네 뒷산이에요.”

숲체험을 하려면 창덕궁의 비원이나 수목원 정도는 가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트레킹도 마찬가지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장 좋은 트레킹 코스일까? 아니다. 바로 발걸음을 뗄 수 있는 동네 뒷산이 가장 좋은 곳이다.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다. 가까이에 있다.

그런 면에서 서대문구에 사는 사람들은 참 복 받았다. 안산이 바로 동네 뒷산이니까. 전망, 숲길, 역사 등등... 안산이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다 가지고 있으니까.

 

서대문 사람들은 파랑새를 제대로 기르고 있는 셈이다.

 

 

 

 

 

* 서대문 안산 숲길

 

 

 

 

 

 

 

■ 안산역사트레킹

1. IN: 지하철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

2. OUT: 홍제천

3. 세부코스: 서대문독립공원 ▶해골바위 ▶ 봉수대 ▶메타세쿼이아숲길 ▶ 서대문독립공원(순환형태)

4. 길이: 약 8km

5. 예상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

 

 

 

 

 

* 안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안산 자락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변형해서 이동함.

 

 

 





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갔을 때였다. 사리아(sarria)라는 도시에서 순례길을 중단했는데 사리아는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당시 필자의 왼쪽 다리 상태는 썩 좋지가 않았다. 햄스트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트레킹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다리에 이상이 있다니! 그래서 고민 끝에 사리아에서 기차를 타고 산티아고콤포스텔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미 그전에 순례길 800km를 완주한 적이 있었기에 과감히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도보여행가인데 기차 ‘점핑’이라니.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거기서 더 무리를 했으면 내 왼쪽 다리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을 지도 모른다. 이미 그때도 파스로 범벅을 하고 있었으니까.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하루 이틀하고 트레킹을 그만 둘 것도 아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길게 보고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다 순탄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의 경험은 그랬다. 기차를 잘못 탔는지 엉뚱한 곳에 도착을 했다. 오우렌세(ourense)라는 도시였다. 이곳은 산티아고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순례길에서 이미 체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기차를 잘못 탔고 뜻하지 않은 곳에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 기차까지 배차 시간도 꽤 길어서 역 밖으로 나와야했다.      


‘왜 이렇게 돌아가는 길이 어려운가. 왜 내 여행은 항상 이런 식일까?’     






* 남산성곽길: 단풍이 잘 물든 가을날에 촬영했다.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서 성곽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뒤에 북한산은 시원스럽게 보인다. 






● 트레킹 코스도 이름을 잘 지어야한다     


이제까지 인왕산, 낙산, 백사실계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다. 백사실계곡이 백악산(북악산)에 있으니 내사산 중 남산만 제외하고 다 언급한 것이다. 그럼 4편은 남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제목처럼 돌아간다. 대신 많이는 안 돌아간다. 이번편은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이다.       


“원래 이 코스의 이름이 <서울 내부트레킹>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으로 강제 개명을 시켰어요.”

“왜요?”

“이름이 서울내부트레킹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감을 못 잡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감을 잡나요?”

“그건 모르겠는데 최소한 예전보다 장사는 좀 되네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와요.”     


트레킹 코스도 이름을 잘 지어야한다. 해당 명칭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을 확 이끌 수 있는 무언가를 전달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은 예전 명칭인 <서울 내부트레킹>보다는 훨씬 더 낫다. 적어도 사람들의 발걸음을 확 이끌었으니까.  


그렇다고 서울 내부트레킹이라는 이름이 아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본 코스는 ‘서울숲 - 남산’을 연결하여 걷기 때문이다. 서울의 내부를 가로질러 가기 때문에 예전에 저런 네이밍을 했던 것이다. 한편 종료지점이 남산의 끄트머리인 장충단공원이라서 돌아간다고 표현한 것이다. 남산을 가기는 하지만 살짝 찍으니까.     




●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의 시작점은 지하철 5,6호선 청구역이다. 청구역에서 첫걸음을 뗀 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 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작은 산이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서운 눈빛이 사라진 매봉산이지만 그곳에 올라서면 눈이 크게 떠지게 된다. 시원스럽게 한강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강을 가깝게 전망할 수 있는 곳은 매봉산 팔각정이다. 이 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흐르고 있는 한강의 동쪽편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한강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한강은 예전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아리수'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려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역적으로 다른 이름을 가지기도 했는데 경기도 여주 지역은 '여강'이라고 불렸고, 임진강과 합수되는 한강 하류 일대는 조강이라고 불렸다.


매봉산 팔각정 앞에 있는 동호대교는 '동호'라는 옛날 그 지역의 명칭을 따서 지었다. 동호는 서울의 동쪽 지역 한강을 일컫는 말이다. 한강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게 보인다고 하여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팔각정에 올라서면 강남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한강의 역동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부근까지 조망할 수도 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춰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동행한 사람들과 한강다리 맞추기 놀이를 해볼 수도 있다. 필자도 동행한 트레킹팀과 함께 한강다리 맞추기 놀이를 했다. 결과는? 비밀!     





* 한강: 매봉산 팔각정에서 서울의 동쪽 지역을 바라본 모습.






● 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이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전 한 밤 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다. 안전한 생태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된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간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매봉산 팔각정






●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 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다.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년 9월경이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년)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다.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세긴 것이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것이다. 


장충단은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사된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된다. 마치 ‘종묘사직’ 할 때의 ‘사직단’이,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다.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년)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 그냥 폭사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다.      





* 수표교





● 정치집회 장소로 쓰였던 장충단공원     


광복 이후 장충단 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다. 1971년 4월 18일,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해 4월 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 와중에 행해진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에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다.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었다. 장충단 공원에 모인 100만 가까운 인파들 앞에서 저런 ‘센세이셔널’한 내용들이 확성기를 타고 퍼져나갔으니 당시 집권세력은 얼마나 긴장을 했겠는가?      



● 청계천 복원의 핵심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년,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다.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년(1441)의 일이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이다.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다.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다.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영조 36년(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이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이 된 지금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다. 


한강도 보고, 버티고개도 넘고, 장충단도 탐방하는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그렇게 서울 내부를 가로질러 가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들을 탐방하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울창한 숲길에 매료되게 된다. 



* 한강정망대 역사트레킹: 한양도성 남산구간






● 가야할 길이라면 우리는 가야한다     


서두에 언급한 오우렌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보자. 돌아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길을 헤매는 것도 여행의 일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도 여행의 일부니까. 


그런데 뜻밖의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로마시대에 건설된 다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ponte roman de ourense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로마시대의 다리인데 현재도 현역으로 쓰이고 있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도시자체가 무척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로마다리 밑으로는 미뉴강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수변과 어우러진 도심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직진을 하든 돌아서 가든 가야할 길이라면 우리는 가야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숙명이다. 그렇게 묵묵히 걷다보면 위와 같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에피소드를 이렇게 부른다.     


- 전화위복     





■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1. 코스: 금호산 ▶ 매봉산팔각정 ▶ 버티고개 ▶ 한양도성  ▶ 장충단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지하철5,6호선 청구역 / Out: 장충단공원(지하철3호선 동대역)    





*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역사트레킹


 

박수를 받든 안 받든 그냥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무대에 서 있을 때만큼은 정말 행복합니다.”

 

예전에 우연히 만난 연극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연극인이 겪어야 하는 생활고, 캐스팅에 대한 불안감...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고단한 연극판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해맑은 미소로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대행복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더 힘줘서 이야기를 했었다.


방송에서 인기가 떨어진 가수나 배우들이 무대가 너무 그립다는 말들을 할 때는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그냥 한물간 연예인들의 인기회복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시청자들의 감수성을 건드리려는 작업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연극인과의 대화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가식적인 방송용 멘트가 아니라 진짜 무대에 대한 간절한 갈증을 마이크에 대고 표출한 것이라고.


무대라고 하니까 가수나 배우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데, 무대를 그라운드로 바꿀 수도 있다. 시즌 중에 부상을 당한 한 여자배구 선수가 있었다. 재활 과정 중에 인터뷰를 했었는데 코트가 그립다며 눈물까지 보이더라. 배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그녀에게 배구는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야구선수 이종범도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부상 이후에 찾아온 슬럼프 때문에 너무 괴로웠고, 다시 그라운드에 서기 위해 더 열심히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루키시절보다 더 열심히 타격과 수비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곳이 바로 그라운드였으니까


결국 그는 다시 그라운드에 섰고, 2009년 소속팀인 기아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를 우승할 때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이종범의 나이는 40살이었다. 이미 은퇴를 해야 할 나이였지만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했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그라운드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올라서면 자신도 모르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게 된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힘에 부쳐하다가도 그곳에 올라서면 얼굴색이 달라진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렇다면 필자의 무대는 어디일까? 그렇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는 무아지경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어디일까? 길이다. 더 정확히는 숲길.

 



* 북악팔각정: 북악팔각정에서 바라본 북한산. 






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3편에서는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서울의 숨어 있는 비경이라고도 불리는 백사실계곡은 북악산에 자리 잡고 있다. 백악산이라고도 불리는 북악산은 서울의 내사산(內四山) 중 가장 키가 큰 산이다. 그 높이가 340m이다. 전편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한양도성은 내사산을 연결하여 만들어졌다. 북악산-인왕산(338m)-남산(270m)-낙산(125m)을 연결하여 18.6km의 성곽을 쌓았다.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듯, 북악산은 궁궐의 주산으로서 조선시대 내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지금도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 청와대가 있으니까.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은 상명대입구에 있는 홍제천에서부터 시작한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시내버스를 타고 약 15분 정도 이동하면 시작점에 도달한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아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다. 그 홍제천을 따라 백사실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세검정을 만날 수 있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정자정()에서도 보듯 세검정은 계곡 옆에 지어진 정자다.


세검정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가 이후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트레킹팀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 세검정





비밀의 화원 같은 백사실계곡

 

북악산은 많은 부분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인지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고 있단다. 그곳이 정확히 어디냐? 바로 백사실계곡이다. 북악산의 북사면에 위치한 백사실계곡은 비밀의 화원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중심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그렇게 한적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백사실 계곡은 말이 계곡이지 거의 건천에 가깝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을 때를 거의 본적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백사실 계곡은 계곡 자체보다는 숲길이 더 각광을 받는 곳이다. 울창한 숲이 터널처럼 산책로를 감싸고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저 한들한들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랄까.


산책로를 따라 백사실계곡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연못 자리와 함께 별서터가 나온다. 주춧돌만이 남아 있는 그곳은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의 별서터였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필자는 예전에 이런 식으로 해설을 했었다.

 

예전에 이곳은 백사 이항복 선생의 별장터였어요. 이항복 선생은 오성과 한음 할 때, 그 오성이었죠.”

 

하지만 몇 해 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의 주인이었다는 고문서가 발견됐고, 백사실계곡의 별서는 추사 선생의 소유라는 게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곳이 이항복 선생 소유든 김정희 선생 소유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히려 오성대감과 추사 선생이 함께 묶여 있으니 더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식으로 해설을 한다.

 

예전에는 이곳이 오성대감 별장터라고 말했는데요. 이제 추사 선생의 문서가 발견됐으니 저는 이렇게 가정해봅니다. 이곳이 오성대감 소유였다가 나중에 추사 선생이 매입했다, 이런 식으로요. 오성대감은 조선 중기 때 인물이고, 추사선생은 후기 때 인물이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행한 해설 오류를 만회하려고 나름대로 꼼수(?)를 써본 것이다.

백사실계곡 일대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동천은 풍광이 수려한 곳을 지칭하는데 어떤 풍류객이 白石洞天네 글자를 보기 좋게 각자를 해두었다. 그 백석동천 바위는 탐방객들의 포토존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누구나 그 곳을 탐방하면 그 바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꺼내고 멋진 포즈를 취하게 될 것이다. 찰칵!

 




* 백사실계곡: 계곡 초입에 있는 현통사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이?

 

백석동천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서북쪽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트레킹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로 들어질 수 있겠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백석동천: 각자바위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1623313.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폐위된다.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수각터: 수각터에서 바라본 별서터. 물에 세운 정자를 수각이라고 한다. 백사실계곡 별서터 옆에는 수각이 세워졌던 기단들이 이렇게 남아 있다. 현재 수각은 사라졌고, 연못은 매말랐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다음날에는 저 연못이 물이 차기도 한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산 산책로

 

능금마을을 돌아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산길도 계곡 이어진다. 백사실계곡 숲길보다는 덜하지만 이 산길도 정말 걷기에 좋은 길이다. 걷다보면 어깨춤을 추거나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필자는 둘 다 했다. 어깨춤을 추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제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간다. 북악팔각정을 향해가는 것이다.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9월에 완공됐다. 이 도로는 그해 121일에 있었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서울방어목적으로 개통됐던 것이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사산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까지도 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악산 팔각정이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이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이동을 하여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이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60~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한편 북악산 산책로는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과는 다르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팔각정에서 성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군인들의 보초로이다. 그 길을 걷다보면 지금 자신이 서울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지 모른다. 그만큼 그 길 주변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 백사실계곡: 울창한 여름숲도 좋고, 이렇게 단풍이 지는 가을도 좋다. 이렇게 좋은 길을 걸으니 어깨춤이 들썩이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거겠지!





숲길에 서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의 무대는 길이다. 길 위에 서서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모든 근심걱정에서 벗어난다. 평소에 거울을 보면 항상 해있는데 숲길에서 트레킹을 할 때는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렇게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다


좋은 기가 발산 되서 그런지 숲길에서는 해설도 잘 된다. 마이크를 잡고 이러쿵저러쿵 두서없이 이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박수로 갈무리된다그렇게 숲길은 필자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해주는 무대다. 가끔 그 위에 올라서면 어느덧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그 무대가 누구에게는 실험실일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그라운드일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주방일수도 있다. 누구의 무대가 더 좋고 나쁜지는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다. 그저 묵묵히 무대에 올라 자신만의 에너지를 발산하면 되는 것이다.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지만 숫자는 한 번 따져보고 싶다. 숫자는 확실히 필자의 무대가 압도적이다. ? 전국방방곡곡에 있는 숲길이 다 필자의 무대니까.

 

 



* 백사실계곡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1. IN: 부암동

2. OUT: 성북동

3. 세부코스: 세검정 백사실계곡 능금마을 북악산팔각정 성북동

4. 이동거리: 7km

5. 예상시간: 3시간 30

 

 


*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말이 좋아 역사트레킹 마스터지 필자의 삶은 백수의 고급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그것이 딱 필자의 자화상이었다.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엉뚱하게도 이름 떨치기에 대한 욕구가 커져갔다.


변변치 않은 벌이와는 별개로 트레킹 바닥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시즌과 비시즌이 확 갈린다는 것이다. 봄과 가을에는 신발밑창이 닳도록 열심히 움직이지만 여름과 겨울에는 멍하니 하늘을 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노을트레킹을 겨울에는 눈꽃트레킹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딱 거기까지다. 더군다나 필자가 추구하는 트레킹은 대중트레킹이다. 어두운 밤에 멧돼지를 만나거나 동장군에 맞서면서까지 트레킹을 하기가 쉽지 않다. 수강생들도 안 온다.


만약 필자의 이름값이 꽤 나간다면 비시즌에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열심히 원고 작성을 하거나 마이크를 잡고 실내 강의를 하고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동장군이 얼어 죽을 정도로 냉혹하다. 필자의 통장은 비시즌이 되면 싸늘함 그 자체가 된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이름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된 거 같다. 네임밸류가 있었으면 적어도 현재와 같은 불안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내 이름 석 자를 남길 수 있을까?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살다가 가는 건가?


허명(虛名)이라도 갖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답답한 현실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이자 판타지였다






* 인왕산: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낙산공원에서 촬영했다. 





낙산은 서울의 좌청룡

 

1편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복기해본다. 좌청룡·우백호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에도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동쪽-청룡’, ‘서쪽-백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남쪽-주작’, ‘북쪽-현무도 빼놓을 수 없다.


일단 우백호는 어디일까? 인왕산이다. 경복궁 옆쪽에 우뚝 서 있는 인왕산이 서울의 우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공원을 품고 있는 산이 바로 그 낙산이다.


낙산(駱駝)은 높이가 약 125미터로 키가 작은데 산의 형세가 낙타 등처럼 보인다하여 낙산 또는 낙타산이라고 불린다. 낙산은 인왕산과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낙산은 좌청룡이기에 우백호인 인왕산과는 필연적으로 용호상박을 해야 하는 팔자다. 청룡과 백호의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 당신은 어디에다 베팅을 할 것인가?

 

- 세상을 뒤흔들 세기의 맞대결! 메가톤급 강펀치가 천지를 진동한다. 세상의 모든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청룡과 백호의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그 세기의 대결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마감 임박~!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법이다. 저렇게 프로모션을 띄운다고 해도 결과

는 뻔하다. 세기의 대결치고 진짜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 거 본 적 있는가?  






* 낙산성곽길





우백호의 위세에 눌린 좌청룡

 

결론적으로 말해 서울의 청룡은 백호에게 게임이 안 된다. 체급부터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낙산은 해발고도가 125미터로 338미터인 인왕산에 비해 키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을 묶어 내사산으로 칭하는데 그 내사산 중에서 낙산이 가장 작다. 참고로 북악산은 342미터이고, 남산은 270미터이다.


해발고도가 낮으니 낙산은 산세도 그리 웅장하지 못하다. 이에 비해 인왕산은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돌출된 암반면이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300미터급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고 있다.


그렇게 우백호보다 기량이 딸리는 좌청룡이었기에 그것을 보완해야 했다. 동쪽에 있는 좌청룡은 남자, 장자를 뜻했다. 이에 비해 서쪽에 있는 우백호는 여자, 차자 등을 뜻했다. 적장자 중심의 왕위계승을 중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좌청룡에 대한 보완은 분명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짓자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궁궐의 방향을 동쪽인 낙산으로 향하게 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이 인왕산 주산론이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도전 세력들은 인왕산 주산론을 반대한다


궁궐의 방향을 서쪽으로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세력들의 주장이 힘을 얻었고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북악산 아래에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북악산 주산론이다






* 성북동: 성북동 성곽길은 낙산이 아닌 백악산(북악산)에 속한다. 낙산 역사트레킹

은 낙산을 다 걸은 후 성북동에서 종료한다. 



   


200년 후를 내다본 무학대사?

 

이렇게 자신의 주장이 꺾인 무학대사는 이런 말을 남기며 탄식했다고 한다.

 

“200년 뒤 경복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희들이 알겠느냐!”

 

여기서 다시 한 번 1,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한 내용을 재론해보겠다. 1

에서는 기도빨이 잘 받는 인왕산 선바위가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 세력에 의해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기술했었다. 그리고 이번 편에서는 인왕산 주산론

이 탈락되고, 북악산 주산론이 채택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듯 무학대사를 

위시한 불교세력들은 유교세력들에 의해 번번이 자신의 의사가 꺾이고 만다. 불교

세력들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무학대사가 200년 후를 내다보며 저런 이야기를 했을까? 무학대사가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닌데... 불교세력이 밀려난 후, 200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 때가 1394년이었으니, 200년 후는 

1590년대였다. 그 즈음에 누구나 다 아는 전쟁이 일어났다. 그렇다. 임진왜란이라 

불리는 조일전쟁이 1592년에 벌어진 것이다.


정말 무학대사는 200년 후를 내다보며 저런 예언을 했던 것일까? 1편에서도 언급했

듯이 불교 VS 유교간의 갈등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무학대

사의 예언은 개국 초기가 아닌 조일전쟁 이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당시의

민초들은 지배층이었던 사대부들에게 전란의 책임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백성도 버린 지배층에 대해서 힐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책임을 묻는 자리에 무학대사를 등판시킨 것이다. 자신들의 울분과 설움을 무학대사

에게 투영하여 당시 지배층인 사대부들을 꾸짖고 있었던 것이다





* 이화동 벽화마을






동인의 핵심 김효원이 살았던 낙산

 

낙산은 야트막한 산세 때문에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숲길이 우거져 있어 낙산 인근에는 별장들이 많았다. 인조의 셋째 아들이었던 인평대군이 지은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18세기에 활약했던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 많은 별채들이 있었다.


명사들도 많이 살았다. 태종의 외손이었던 남이 장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동서분당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김효원도 낙산 기슭에서 살았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동인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의 집은 지금의 덕수궁 근처라 한양의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심의겸을 따르는 이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도 낙산에 은거해 살았다고 한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를 떠나고 난 후, 폐서인이 된 정순왕후는 이 산 아래에 있는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임을 떠나보냈던 정순왕후는 이 산 동쪽에 있는 동망봉에 올라 매일같이 치성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낙산은 누군가에게는 한이 서린 기원의 장소이기도 했다






* 혜화문: 원래는 사진 아래에 있는 도로에 위치해 있었다. 1928년 도로 확장에 

따라 문이 헐리게 됐다. 이후 1994년에 현재의 위치로 복원된다.  







낙산 성곽길에서 성돌 모양 맞추기

 

이렇게 낙산에 대한 연혁들을 나열해봤다. 하지만 낙산 역사트레킹의 백미는 역시 성곽길을 걷는 것이다. 낙산 성곽길에서는 축성 시기에 따른 다양한 성돌 모양을 직접 관찰할 수가 있다. 한양도성은 축성 시기에 따라 크게 4시기로 나눌 수가 있다.

 

1. 태조시기. 이때는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이 혼합된 형태로 축성됐음.

2. 세종시기.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함.

3. 숙종시기. 종전보다 더 큰 성돌로 축성함.

4. 순조이후시기. 더 큰 성돌로 축성함.

 

낙산 성곽길에서는 세종시기부터 순조 이후까지, 즉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성돌의 변천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성돌의 변화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처음 봐서는 잘 구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랬는지 성돌 구분이 처음부터 확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름대로의 구별법을 써봤다.

 

1. 세종시기 -> 옥수수돌

2. 숙종시기 -> 두붓돌

3. 순조이후시기 -> 주사위돌

 

*정리: 시간이 흐를수록 성돌은 점점 더 커져갔고, 규격화됐다. 후기로 갈수록 치석(治石)의 강도가 세지고, 돌의 크기도 더 커지는데 순조 시기에는 큰 주사위돌 같은 형태가 나타난다. 여기서의 치석은 치과에서 말하는 치석이 아니라 돌을 다듬는 것을 말한다. 태조 시기의 돌들은 자연석을 옮겨놓는 수준이라 표면이 매우 거칠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치석이 강화되니 표면이 매끈한 성돌이 성체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 성돌의 시기별 모양





낙산 정상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낙산은 서울의 안쪽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 중에 가장 키가 작다. 그래서인지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보다 훨씬 더 걷기 편하다.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에는 급경사 구간이 있지만 이에 비해 낙산 구간은 시종일관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선조들에게는 왜소한 좌청룡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성곽길을 탐방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찬사를 받는 것이다.


또한 접근성도 상당히 좋다. 전철역에서 바로 성곽길 트레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후 흥인지문(동대문)을 둘러본 후 성곽길을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것이 낙산트레킹의 큰 장점 중에 하나다.


그렇게 성곽길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이화동 벽화마을도 만날 수 있다. 벽화마을을 탐방한 후 언덕길을 올라가면 낙산 정상부인 낙산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이 곳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멋진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눈앞에 북한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등의 동북쪽 봉우리들뿐만 아니라 보현봉이나 형제봉 같은 남쪽의 봉우리들까지도 한 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필자는 항상 이런 멘트를 했었다.

 

저 북한산 좀 보세요. 위쪽으로는 살짝 도봉산까지 보이죠? 북한산을 한 눈에 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려면 이 낙산만큼 좋은 곳도 없습니다. 낙산이 키가 작아도 이렇게 참 실하지 않습니까?”

 

성곽길 낙산 구간이 끝날 무렵에는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된다. 혜화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199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복원됐다. 낙산 역사트레킹은 북악산 성곽길도 걷는다. 그렇게 성북동 인근 북악산 구간을 걷다 와룡공원을 지나게 된다. 이후 트레킹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인 심우장에서 종료하게 된다






* 북한산: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북한산.




 작자미상

 

서울은 인구 천 만 명이 사는 메트로폴리탄이다. 그런 거대 도시에 축조된 지 600년도 더 넘는 거대한 성곽이 잘 버티고 서 있다는 게 참 대견스럽다. 서울의 내사산을 따라서 만들어진 한양도성. 마치 순리를 따르듯 자연지형에 녹아든 한양도성의 모습이 서울 메트로폴리탄을 더 돋보이게 한다.


그런 한양도성을 보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무엇을? 이름 모를 백성들의 피와 땀이다. 역군으로 징발된 그들에게 성곽축조는 중노동 중에 상중노동이었다. 그 추운 계절에 동원된 그들에게 나라에서는 아무런 반대급부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먹을 식량까지 각자 알아서 준비해야 했다. 농한기라도 힘없는 백성들은 느긋하게 쉴 수가 없었다.


죽기는 또 얼마나 많이 죽었겠는가. 그렇게 이름 모를 민초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가며 한땀한땀 성돌을 올린 것이 지금의 한양도성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 석 자는 어디에도 기재되지 않았다. 공사를 지휘하던 관리들은 그나마 각자성석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지만 민초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팔이 빠져라 성돌을 나르고 쌓았던 수많은 김개똥, 최돌쇠 등등... 부르튼 그들의 손을 누가 제대로 기억이라도 해줬을까?

 

이렇게 좀 씁쓸한 생각이 이어졌다. 결말을 지어야하는데 좀 우울한 면을 너무 부각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하는게 낫지 않나.


이름 모를 민초들은 성곽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성곽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한양도성이라는 예술작품을 그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김개똥도 최돌쇠도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대신 문서상으로는 그들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다. 작자미상이다. 물론 발주처는 명확하다. 조선 조정.


글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 이런 생각이 밀려왔다.

 

굳이 이름을 남겨야 돼?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작자미상이 있는데... 그냥 

민폐 안 끼치고 좋아하는 역사트레킹하면서 사는 것도 복 받은 일이잖아!’   







* 이름남기기: 순종 이후 시기에 쌓여진 성돌에 필자의 방식대로 민초들의 이름을 

남겨보았다. 하는 김에 필자도 이름도 슬쩍 끼어넣었다. 얄밉게 숟가락을 올리는 형식

이라 뒤가 캥기지만... 이런 식으로 필자의 이름을 남겨본다. 혼자 북치고 장구친다고

욕을 먹더라도 상관없다. 소원성취를 한 것이다. 이름을 남겼으니까...








 낙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흥인지문 ▶ 이화동벽화마을 ▶ 낙산공원 ▶ 혜화문 ▶ 와룡공원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지하철1,4호선 동대문역 / Out: 와룡공원(성북동)






* 낙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기원이 행해지는 곳이 어딜까? 정답은 서울이다.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다 기원을 한다. 건강, 학업, 승진, 시험... 누구는 로또.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원을 올린다.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기도를 드리겠지만 단어가 달라진다고 내용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성경책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불경 위에 올려진 합장한 손은 종교적인 구분만 있을 뿐 그 속에 담은 마음만은 동일하다.


무속신앙도 마찬가지다. 정화수를 떠놓고 바퀴 굴리듯 손을 비벼대며 올리는 기원도 외형만 다를 뿐이다. 잘 되라고, 건강하라고, 사랑하라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정성인 것이다.

오늘 탐방할 곳은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이다. 이곳 인왕산에는 한국에서 가장 기도빨이 잘 받는 기도터가 있다.

 




* 인왕산역사트레킹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울에도 좌청룡·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좌청룡·우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인왕산이 우백호라면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인왕산과 낙산, 거기에 남산과 북악산을 더해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안쪽의 4개의 산이라는 뜻이다. 이 내사산을 기반으로 18.6km의 성벽을 쌓았으니 그것이 바로 한양도성이다.


외사산(外四山)도 있다. 남쪽에서 주작 역할을 하는 관악산, 북쪽에서 현무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 여기에 동쪽의 아차산과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 4개의 산을 일컬어 외사산이라고 칭한다. 이를 두고 필자는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곤 했다.

 

내사산이니 외사산이니 하는 말들이 감이 잘 안 오시죠.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사산은 작은 서울, 외사산은 큰 서울. 지도 놓고 보시면 더 감이 잘 올 거예요.”

 





* 내사산 외사산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워 기원을 올렸다. 그것도 한 곳에만 세우지 않고 여러 곳에 세웠다. 우편번호를 검색해보면 사직동이라는 지명이 꽤 여러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부산에 사직야구장이 있지 않던가.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 지역에 있는 사직단에는 해당지역 수령이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라고 불린다. 그 유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이번편의 주제는 기원이다. 사직단은 국가적인 기원, 즉 풍작을 기원하는 곳이니 주제 적합도가 딱 맞아 떨어진다.

 




* 사직단





그래도 국가적인 기원은 계속될 것이다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자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역 안에 차례로 도서관, 어린이 놀이공간, 단군성전 등이 세워지게 된다. 심지어 수영장도 들어섰다. 애초 사직단의 근본 취지와 동떨어진 건물들이 자리를 잡게 됐다.


그렇게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국가적으로 기원을 드렸던 곳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현재 사직단은 복원정비사업 중이다. 2015년에 시작한 복원 사업은 2027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무려 12년 동안 진행된다. 상처가 깊었던 만큼 복원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는 셈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현대에는 왕도 없고, 국가적으로 제례를 드리지도 않는다. 농업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더 이상 사신과 직신은 한물간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적인 기원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녀상을 두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는 것과 세월호를 두고 진실규명을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 선바위






승복을 입은 선바위?

 

국가적인 기원을 올렸던 사직단을 탐방했으니 이제 개인적인 기원을 드리는 곳으로 가보자.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선바위다.


인왕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바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도빨이 잘 받는 곳 중에 하나다. 특히 아이를 잘 잉태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이런 말을 간간이 건넸다.

 

늦둥이를 낳고 싶으신 분들은 시주 한 번 하시고 간절히 기원하세요!”

 

어떤 대답이 돌아왔을까?

 

지금 있는 것들도 징글징글한데 무슨 놈의 늦둥이야!”

 

본전도 못 찾고 핀잔만 잔뜩 들었다.

 

선바위는 높이 7미터, 가로 10미터 정도가 되는 바위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 있다. 그렇게 바위의 규모가 크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는 애국자 바위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 국사당






국사당과 산악신앙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궁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그렇게 아래쪽에 국사당이 자리 잡게 되니 선바위는 거석숭배문화에다 산악신앙까지 더해지게 된다. 선바위에서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이 국사당 앞에서도 두 손을 모으게 됐다는 것이다.

사직단에서 선바위, 그리고 국사당까지. 인왕산 남쪽은 굵직굵직한 기원 장소가 즐비하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선바위를 빠져나오면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을 걸을 수 있다. 최근 성곽 밖의 순성로도 잘 정비되어 성곽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이다. 인왕산 성곽도 좌청룡인 낙산 성곽길처럼 성돌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더군다나 이 성곽길의 반대편은 자락길로 유명한 서대문 안산이기에 양 옆의 시선이 다 즐거운 곳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의 숨어 있는 보석, 수성동 계곡

 

다음 탐방지는 수성동 계곡이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 계곡인 것이다.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고,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인데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재개발로 사라졌던지.

 





* 창의문







창의문 밖에는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인왕산에도 자락길이 있다. 걷기에 부담이 없는 길이다.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지와 가까운 곳에 이렇게 부드러운(?) 길이 있다는 게 참 좋다. 그렇게 부드럽게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마지막 구간인 창의문을 만나게 된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이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 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창의문의 천장에는 큰 새가 그려져 있다. 필자는 창의문을 지날 때마다 트레킹팀에게 묻는다.

 

저기 위에 그려진 새가 뭐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다. 하지만 꽝! 정답은 닭이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이다. 창의문 밖을 나서면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냄새를 맡은 도보여행자들은 더 이상 길을 나설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럽게 트레킹도 종료되게 된다. 대신 입이 즐거워진다.


사직단, 선바위, 국사당, 성곽길, 수성동계곡, 창의문까지... 거기에 이번 글에 언급하지 않은 윤동주문학관(시인의 언덕)과 이빨바위, 출렁다리까지... 이처럼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인왕산을 소개할 수 있어서 필자도 참 기쁘게 생각한다.

 




* 인왕산 성곽길





난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사람

 

트레킹팀과 함께 열심히 걷다보니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내가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기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레킹에 오신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육체건강이든 정신건강이든 건강에 대한 간절함이 강렬하셨다.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역사트레킹이 거기에 이라는 것이다.


숲길도 걷고, 답사도 하고, 만 보 이상 걸으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튼튼해졌다고 필자에게 신앙고백을 하셨던 분들도 계셨다. 그런 말씀들을 하실 때마다 참 고마웠다. 어쨌든 필자가 건강에 대한 기원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으니까. 좀 우쭐하기도 했다. 복 받을 일을 했으니 이 정도 우쭐함은 괜찮지 않나.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선바위(국사당) 성곽길 수성동계곡 출렁다리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In: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 Out: 창의문(부암동)





* 인왕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트레킹은 생각창고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까?



● 서울은 어떤 도시일까?


서울은 어떤 도시일까내가 살고 있는 이 서울에 대해서 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필자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시작했을 때 품었던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서울천도 600’, ‘한성백제 2000’ 등과 같은 역사교과서적인 수식어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삶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물론 필자는 지금도 서울공화국’, ‘수도권과밀화’ 같은 서울에 붙여진 비판적인 꼬리표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있다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드리고 있는 이 블랙홀 도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거둘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적인 시각과 근원적인 물음이 꼭 상충되는 것만은 아니었다예를 들어 서울이 블랙홀이 되기까지의 과정들에 대한 탐구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서울의 확대발전에 대한 개념을 짚고 넘어가게 된다한편 서울이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두 세기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공룡 도시 서울에 대한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맞는 만큼 역사 도시 서울을 탐구하는 진지한 자세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곳은 우리가 발을 딛고 구체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니까자신이 속해 있는 이 도시가 잘 났는지 혹은 못 났는지 그것을 알아보자는 것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취지인 것이다.


● 토박이를 이길 수 있는 여행작가는 없다


각 개인이 살아가면서 층층이 쌓아올린 생각들도 지역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산들로 둘러싸인 지역에서는 갯가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반대로 바닷가 지역에서는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찾아보기가 어렵다자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관념들은 결국 지역적인 틀 속에서 생성된 상호작용의 결과물인 것이다.


필자가 낙산의 성곽길을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접했다면 어땠을까그저 벽화마을에서 사진을 찍고 성곽길을 잠깐 탐방한 후 이렇게 이야기했을지 모른다.


별 거 없네맛집이나 찾아서 가자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들고 다니는 가이드북 정도의 인식 수준으로 낙산과 성곽길을 바라봤을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비상한 여행작가라고 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토박이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학창시절에 그렇게 공부를 못했던 필자가 그나마 서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건 45년 동안 서울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이다서울에 있는 산들이 좋아 많이 돌아다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물론 군대생활 2년은 빼고.


필자는 이 책에서 역사적인 지식만 나열하지는 않을 것이다필자의 삶의 공간인이곳 서울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자유롭게 풀어나갈 생각이다서울 촌놈인 필자가 트레킹을 통해 서울 곳곳을 탐방하고그곳에서 주어올린 생각들을 나름대로의 필체로 풀어낼 생각이다.

밥값을 하듯이 책값을 하고 싶다나름대로 열심히 쓸 생각이다기대하셔도 좋을 것이다







* 필자: 해설을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









트레킹은 생각창고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들어가면서


사실 본 원고는 몇 해 전에 출간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중견출판사에서 필자의 원고를 눈여겨봤다고 메일로 연락이 왔던 것이다정형화된 형식에서 벗어난 역사서를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본 원고의 네이밍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니 그들이 찾는 원고로 이었을 것이다트레킹과 역사가 서로 합쳐진데다 서울학개론이라는 독특한 명칭까지 더해지니 편집자의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겼을 것이다.


● 김칫국을 제대로 마셨다


정말 기뻤다내 원고의 가치를 알아봐주었던 것도 기뻤고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낼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더군다나 찾기도 어려웠을 내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연락을 줬으니 출간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게 아닌가!

두근두근 설렜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


출간 제의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그런데 글에도 언급되었듯이 제가 역사 전공이 아닌데 괜찮을까요전공자가 아닌데 괜히 역사서 썼다가 씹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또 저는 본격적인 역사서보다는 역사트레킹아웃도어 이런 것들을 다 다루고 싶은데요제가 트레킹 강사니까요.”


이렇게 점잔을 뺐다그냥 좋다고 덥석 물면 괜히 없어 보일 거 같아서물론 당시 내 머릿속은 인세부터 계산하고 있었다또 저자 사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연구중이었다그렇게 난 김칫국을 제대로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곽 작가님의 의견 잘 봤습니다전공비전공 부분은 저희도 감안을 했던 부분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역사에 방점을 찍고역사서를 출간할 생각이거든요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다지만 핵심은 역사거든요트레킹이나 아웃도어는 그저 부수적인 영역이고요트레킹을 무시할 수 없으시다면 우리가 애초 기획한 포지셔닝과 어긋나네요책 분류 자체도 달라져서 무척 애매해질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결론은 내 원고로 책을 출간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내가 너무 겸손을 떨었던 것일까그냥 덥석 잡았을 걸치고 나갈 때는 확 치고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난 겸손을 떨다가 김칫국만 제대로 들이켰던 것이다.









● 내 원고의 포지션은 반반 치킨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그렇다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다그동안 더 많은 자료를 검토했고더 많은 코스를 탐방했다좋은 역사 해설을 위해서 책을 열심히 읽었고더 순조로운 트레킹을 위해 열심히 코스 답사를 다녔다김칫국을 들이켰을 때나 지금이나 내 포지셔닝은 반반치킨이다역사 반트레킹 반출간 제의를 했던 그 편집자 입장에서는 내 원고는 아직도 포지셔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어쩌면 그때 책을 출간하지 않았던 것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 원고는 부족해 보인다비역사 전공자의 한계가 고스란히 눈에 밟힌다.


그렇다고 눈 비비며 작성했던 내 노력의 결정체가 다시 또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원고를 변경하기로 했다.  그럼 역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인가아니다오히려 역사의 비중은 그대로 두거나 줄이고 에세이적인 면을 더 보강하려고 한다


트레킹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해당 탐방지의 역사적인 면과 결합시켜 글로 풀어낼 생각이다반반치킨에 에세이라는 양념소스를 제대로 버무리려한다그래서 제목도 <트레킹은 생각창고>아니던가!


비전공자의 역사다루기라는 ‘잘 안 받아주는’ 포지션보다 역사적인 길을 걷다 느낀 단상들을 에세이로 풀어내는 게 더 그나마 ‘잘 받아' 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편집자도 비전공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피상적인 역사 원고를 ‘오케이’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에세이라는 거대한 장르라면 비전공자도 그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역사 글빨’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앉아서 하는 트레킹?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트레킹을 통해 자신의 두 발로 서울의 명소들을 탐방하는 아웃도어 프로그램이다이 책은 그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기록들과 함께 필자가 트레킹을 행하며 느꼈던 생각들을 정리하였다그래서 역사아웃도어에세이가 결합된 짬뽕된 포지셔닝을 갖고 있다


누구는 이런 결과물에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정체성이 없다고근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하지만 요즘같이 최첨단 초결합시대에 도서항목 분류표에 따라 기계적으로 원고를 맞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시대가 변했다독자도 변했고.


독자여러분들은 필자와 함께 서울구경을 하실 것이다간간이 경기도구경도 하신다이제 필자와 함께 앉아서 하는 트레킹을 행하실 것이다.


자 함께 같이 떠나볼까요신발 끈 단단히 묶으셨나요그럼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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