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래된 물건] 단물 빠진 영어사전



[한겨레] “너희들, 여기서 단물 쪽쪽 다 빨아먹어야 한다.” 고1, 첫 수업시간에 영어선생님은 사전을 흔들며 그런 말씀을 하셨다. 쪽쪽 다 빨아먹기 위한 방편으로 난 형광펜을 준비했다. 한 색이 아닌 여러 색을 사용했다. 시험에 잘 나오는 어휘는 노란색, 적당히 나오는 어휘는 녹색 등등. 단어집과 필기노트를 거친 어휘들은 영어사전을 통해 숙성됐다. 영어사전은 오직 대입 준비만을 위해 존재했다. 외워도 외워도 끝이 없던 영어 단어들. 그렇게 외운 단어들은 돌아서면 다 까먹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전은 ‘걸레’가 되어가고 있었다.

복학을 해서도 내 가방에는 항상 사전이 들어 있었다. 토익과 토플을 위한 사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청년 실업층이 폭발적으로 증가할수록 영어 공부에 매달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어학 점수만 좋으면 먹고는 살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무조건 외워댔다. 외우고 또 외웠다. 그럴수록 내 머리는 복잡해졌다.

그래도 단물은 확실히 빼먹었다. 취침용으로. 복잡해진 머리는 내 눈을 감기게 했고, 사전이 베개로 안성맞춤 아닌가! 침도 많이 흘렸다. 그게 푹 잤다는 소리 아닌가? 최근에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저 호기심으로 몇번 접속했던 영국 <가디언>이나 <인디펜던트> 홈페이지에 매일같이 방문하고 있다. 외신 읽기가 쉽지 않은 만큼 영어사전을 들춰보는 횟수도 많아진다. 어떻게 보면 진짜 단물은 요즘에 다 빨아먹는 것 같다. 전날 외신에서 본 기사들이 오늘자 신문 국제면에 실리는 걸 보는 재미가 무척이나 쏠쏠하다. 단맛나는 재미있다.

곽정훈(자유기고가)/ ⓒ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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