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래된 물건] 따뜻한 밥이 어디랴

▣ 곽정훈(자유기고가)

 


사실 이 물건의 주인은 우리 어머니다. 하지만 이 보온밥통을 매일 쓰는 사람은 바로 나다.

 

이 녀석으로 마지막 식사를 했을 때가 고3이었으니, 이 밥통은 10년 이상을 우리 집 찬장 안에 처박혀 있던 셈이다. 이 보온밥통의 ‘초라한 컴백’은 어느 가을날에 이루어졌다.

 

사실 난 취업준비생이다. 말이 취업준비생이지 매일같이 도서관을 전전하며 취업 공부를 하고 있는 백수다. 수중에 돈이 없으니, 전에는 ‘쌍팔년’이라는 어감 때문에 더욱더 꺼렸던 88만원 세대들이 부럽기까지 할 정도다. 왜? 비정규직이라도 88만원 세대들은 경제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달력상으로는 늦가을이지만 얼음이 얼었던 저녁이었다. 마침 매점 문도 닫아 도서관 계단에 쪼그려 앉아 도시락을 먹어야 했다. 그날따라 계단의 불도 나갔다. 가뜩이나 비참한 신세를 더욱더 비참하게 한 건 싸늘하게 식은 밥이었다. 낮에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는데, 계단에 쪼그려 앉아 찬밥을 먹으려니 왈칵 울음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군대에서 전투식량 먹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얼마나 서럽던지!

 

이 보온밥통 덕분에 그나마 찬밥 신세는 면할 수 있게 됐다. 얼핏 보면 원자력발전소 같은 곳에서 위험물질 운반용으로나 쓰일 것 같은 투박한 외형이지만, 보온도 꽤 된다. 저녁 때도 밥에 온기가 가득하게 남아 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다.

 

 

설거지를 하면서 생각해본다. 그나마 더운밥 먹는 게 어딘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처지라 퇴사는 엄두도 못 내면서 숨죽여 공무원 교재를 펼쳐보는 직장인들이 많다고 하지 않던가. 그에 비하면 난 학습에 전념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래, 이 보온밥통으로 더운밥 먹고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천지에 봄기운이 돌고 초목이 싹트는데, 내 인생에도 봄기운이 스며들어 희망의 싹이 텄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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