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타워 아래쪽에 있는 비밀의 숲길 같은 서울성곽길.

이 구간에서는 숙종 시대에 쌓여진 성벽을 볼 수 있답니다.

 

이곳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 저는 여러가지 단어들이

떠올랐답니다.

 

한적함, 휴식, 느림 등등...

 

남산타워의 바글바글함에 정신이 없었는데 불과 몇 백 미터의

사이를 두고 이렇게 느긋하게 숲길을 걸을 수 있다니!

더군다나 서울성곽을 바로 옆에다 두고 걸을 수 있다니!

 

성벽을 호위하듯 서 있는 소나무 숲. 그 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드네요.

 

"서울에도 이런 보석 같은 곳이 있어!"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창의문과 능금마을

 

 

15.07.12 15:45    최종 업데이트 15.07.12 15:45

 

 

 

 

 

 

 

 

 

 

 
▲ 사과 능금은 아니다. 홍로라는 종이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했다. 2012년 경남 거창에서 촬형한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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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밖인 백사실 계곡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뒤편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필자와 함께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행한 참가자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가을만 되면 경림금 때문에 창의문이 들썩들썩!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능금마을 백사실 계곡 입구에서 촬영한 사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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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


1396년(태조5)에 세워진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의 하나로 경복궁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 고개에 서 있다. 서울 성곽길을 걷다보면 두 산을 거느리고 있는 창의문의 지형적 존재감을 더 명확하게 감상(?)할 수 있는데 인왕산을 타고 내려온 서울성곽이 북악산으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었던 숙정문이 근방에 있었음에도 소문(小門)이었던 창의문이 북문의 역할을 해야 했다. 숙정문을 이용하려면 북악산의 급격한 경사를 타고 가야 했기에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1413년(태종14)에 풍수가 최양선의 건의로 문이 닫히게 됐는데 숙정문이 오른쪽 어깨의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어깨로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능금마을 서울 종로구 부암동 부근에 위치해 있다. 북악산 뒤편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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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과 인조반정


오른쪽 어깨가 있으면 왼쪽 어깨도 있을 것이다. 그 왼쪽 어깨 역할을 창의문이 했다하여 1413년에 창의문도 함께 폐쇄가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렇게 하여 도성에서 북쪽 지역인 개성이나 양주로 가는 길이 오랫동안 불편을 겪게 된다. 창의문은 폐쇄된 지 거의 100년이 흐른 후인 1506(중종1년)에 와서야 다시 열린다.

문이 열리니 길도 열리게 됐고, 그로 인해 역사적인 발자국도 하나씩 하나씩 생기게 됐다. 인조반정도 그런 역사적인 발걸음 중에 하나다. 1623년 3월 13일,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퇴위된다.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매운 음식을 먹은 듯,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알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창의문 사소문 중에 하나인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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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창의문 능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창의문은 사대사소(四大四小)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연혁을 가진 문으로 등극(?)하게 된다. 지금의 문루는 영조 17년에(1740) 세워졌지만 1396년에 세워진 '동기동창'인 나머지 사대사소문들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철거되거나 그 원형이 훼손됐기에 창의문이 '최고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화재 전까지 숭례문이 그 '최고참' 자리에 있었다.

그 많던 부암동 일대의 사과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가을이면 경림금을 사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온 그 많던 상인들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능금나무가 심어져 있던 부암동에는 카페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상인들을 대신해서는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렇듯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역사적인 해석도 변한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군이 '의군'인지 아닌지, 광해군이 폭군인지 아닌지... 그런 역사적인 해석이 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변하지 말고 계속 그대로 존속해 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문화재들이다. 문화재들이 있어야 역사탐방을 하든 역사트레킹을 하든 할 테니까. 어찌됐든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47년 만에 창의문 옛길이 복원된다는 소식이 정말 반갑다. 180미터 복원이라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 원형을 찾아가는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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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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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사진을 찍다보면 단선보다는 곡선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그냥 단선은 밋밋할

 

뿐이라 별 감흥이 없잖아요. 같은 다리라고 해도 아치가 있는 한강대교가 그냥 밋밋한

 

원효대교보다는 그림이 더 잘 나올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비슷해서 그런지 여행 사진 공모전에 입상한 작품들을 보아도 곡선미가

 

살아 있는 사진들이 후한 점수를 받더군요. 'S라인 순천만', '반원을 그린 공룡해안'...

 

 

 

 

 

그렇게 둥글게 휘돌아 나가는 모습에 눈길이 가니 자연경관 뿐아니라 인공구조물도

 

곡선미를 중심에 두고 사진을 찍는 버릇이 생기더군요.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다보니...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이 생겼나 봅니다.

 

 

 

 

 

게재된 사진은 둘 다 서울 성곽을 담은 사진입니다. 메인은 남산 구간에서 찍었고,

 

아래 사진은 인왕산 코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성곽이 휘돌아 나가는 모습이 저에게는

 

하나의 '리듬'처럼 들리네요. 그럼 미감에 음감까지 얻게 된 것인가요?

 

예술가 다 됐네! ^^;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①]

 

15.06.09 16:33  최종 업데이트 15.06.09 16:33

 

 

 

 

 

 

 

 

 

▲ 낭만적인 서울성곽의 모습 활처럼 휜, C자형 구간. 뒤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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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仁王山)은 보면 볼수록 위엄이 느껴지는 산이다. 가파른 바위가 드러낸 바위색과 그 바위 사이로 가지를 뻗은 수풀들의 푸른색이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주니, 그 운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그런 인왕산을 겸재 정선은 <인왕제색도>, 강희언은 <인왕산도>를 붓끝으로 담아 표현하였다.   


호랑이가 살고 있어 무서운 곳이긴 했지만 인왕산은 예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광화문, 경복궁 너머로 보이는 인왕산의 풍광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혼자만 좋아한 게 아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트레킹을 할 정도로 좋아한다. 일명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며, 사람들에게 인왕산의 매력을 알려줄 정도다.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는 다음과 같다.

 


광화문 → 사직단 → 단군성전 → 수성동계곡 → 윤동주문학관 → 창의문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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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그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율'이라고 불린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조선의 근간 중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 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된다.

 


▲ 사직제례 사직제례를 준비하는 모습. 201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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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필자는 사직단 뒤편 신사임당, 이율곡 동상 근처에 있는 족구장과 배드민턴장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종묘에서 족구나 배드민턴을 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사직단에서는 지금 하고 있거든요. 현재 사직단은 복원화 사업을 하고 있는데 원안대로 한다면 저기 도서관이랑 어린이 시설을 철거해야 한답니다. 사직단을 종묘처럼 성역화한다면 이곳에서 족구는 못하겠죠. 그건 그렇다 쳐도 도서관이랑 어린이시설까지 철거한다면 너무 일이 커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설명을 얼버무리는 건 복원사업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다. 대신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성역화를 하더라도 입장료는 받지 마세요! 지갑이 얇아서요..."

 


▲ 단군성전 사직공원 한쪽편에 있는 단군성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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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처럼 휘어나가는 서울성곽의 곡선미


트레킹팀은 단군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직공원 위쪽에 자리 잡은 단군성전은 규모가 크지 않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단군성전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규모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성전이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직동의 단군성전은 우리동네 교회보다도 더 작다. 아무리 그래도 서울에 있는 단군성전이라면 일정 정도 규모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단군성전을 탐방할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섰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면 활처럼 곡선으로 휜 성곽이 펼쳐진다. 뒤쪽으로 남산을 두고 'C자'형으로 크게 휘어나가는 서울성곽은 트레킹팀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가 서울성곽 중 가장 곡선미가 뛰어난 구간인 듯싶습니다. 뒤쪽에 남산도 있어서 배경도 살아 있어요. 그러니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세요!"

 


 

▲ 서울성곽 성곽길을 걷고 있는 트레킹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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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이지 않은 서울성곽길


서울성곽길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면서 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성곽길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등산에 준하는 복장을 갖추라고 미리 공지를 했음에도 트레킹 당일날 보면, 필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참가자들이 꼭 있었다.

배낭이 없으면 백팩이라도 메고 오라고 당부했지만 옆으로 메는 가방을 들고 오는 참가자. 가급적 트레킹화를 신고 오라고 말을 해도 운동화는커녕 하이힐을 신고 오는 참가자.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필자는 이런 말을 건넨다.

"서울성곽 길은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성곽자체는 낭만적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한양도성은 말 그대로 방어시설이었어요. 비탈의 경사가 급격할수록 방어력도 높아지잖아요. 그런 상식에 기초해서 성곽이 만들어졌으니 성곽길이 험할 수밖에 없답니다. 그런 곳은 비낭만적이죠."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성곽길을 낭만적인 길로 인지하고 있을까? 미디어에서 접한 모습들이 낭만적으로 묘사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기자들이 험한 구간은 직접 취재하거나 체험하지 않고, 그저 '그림'이 잘 나오는 부분을 부각시키는 기사를 남발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도 자유롭지 않다. 곡선미가 사는 C자형 성곽구간을 메인 사진으로 올려 사람들의 참가를 유도했으니까. 어렵고 난이도 있는 구간은 쏙 빼놓았으니까.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성곽길을 뒤로하고 트레킹팀은 수성동 계곡으로 향했다.  

 

 


▲ 서울성곽 사진에도 보이듯 성곽길은 경사도가 꽤 된다. 계단을 계속 타고 올라가는게 무척 비낭만적이지만 성벽 넘어로 보이는 풍광들은 무척 낭만적이다. 비낭만이 있어야지 낭만이 더 돋보이는 법이다. 뒤로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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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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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보여행, 이렇게 걸으면 즐거움 커진다  2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역사 알면 서울이 달라 보입니다

 

 

* 홍지문

 

 

 

 

 

---> 전편에 이어서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이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역사트레킹 팀에도 그렇게 오해를 한 참가자가 있었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아니다. 홍지문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탕춘대성이라는 보조성의 성문이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智'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이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다. 1921년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간 것이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 만에 복원을 한 것이다.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 석파랑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전통한옥과 중국풍이 어우러진 건축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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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역사트레킹 팀은 다음 탐방지인 석파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석파랑(石坡廊)은 석파정(石坡亭)에서 옮겨져 온 것인데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석파정은 대원군이 사랑한 별장이었다고 한다. 현재 요릿집으로 쓰이고 있는 석파랑은 벽에 둥근 만월창을 내는 듯, 전통한옥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전통 방식과 중국식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기법이다.


석파랑에서 조금만 이동을 하면 세검정이 나온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석파정과 세검정에서 보듯, 이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사천이라 불렸던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 세검정 세검정과 사천으로 불렸던 홍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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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 한 분이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홍지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숭례문 복원에서 보듯 부실하게 문화재를 복원하면 안 하는 것만도 못한 일이 된다. 특히 답사여행을 하는 사람들 앞에 놓인 것이 '불량 복원품'이라면, 그 답사여행자들은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필자 같이 자신의 두 발로 역사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더 크게 허탈함을 느낄 것이다.

문화재 복원에 대한 의문 혹은 아쉬움을 품고, 트레킹 팀은 이항복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계곡 쪽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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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보여행, 이렇게 걸으면 즐거움 커진다  1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역사 알면 서울이 달라 보입니다

 

14.10.17 19:50 최종 업데이트 14.10.17 19:50

 

 

 

 

 

 

 

 
▲ 북악산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휴식터에서 북한산을 보고 있는 트레킹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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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의 장점은 텍스트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텍스트 안에서는 읽어낼 수 없는 지식들이 답사를 통해서 체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곽같은 축조물들은 해당 유적과 함께 주위 사방의 지형을 함께 둘러보아야 그 진면목을 명쾌하게 인지할 수 있다.

가파른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성곽이 어떤 방면의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탐방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적들의 예상 침입로를 짐작해보고, 해당 성곽이 그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축조됐는지 나름대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도 있다.

 


이런 과정들은 역사교과서나 위성지도 같은 텍스트로는 구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답사여행은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격언을 가장 잘 실천하는 행위인 듯싶다.

지난 10월 4일, 그런 격언을 실천하기 위해 필자는 배낭을 꾸렸다. 바로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하기 위해서다. 물론 북악산만 탐방하려고 나선 것은 아니다. 세검정 일대와 반대편인 성북동까지 두루 탐방하기 위해서 역사트레킹에 나선 것이다. 코스는 다음과 같다.

 


홍지문  석파랑  세검정  백사실 계곡  이항복 별서터  능금마을  북악산팔각정(북악스카이웨이)  북악산산책로 ▶

한용운 생가(심우장)

 

 



 

 

 
▲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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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상명대 옆쪽에 자리잡은 홍지문(弘智門)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울에는 큰 성곽이 두 개가 있다. 일명 서울성곽이라고 불리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바로 그것이다. 서울성곽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동쪽의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을 둘러쌓아 축조한 것이다. 이 네 개의 산은 내사산이라 불린다. 안쪽에 있는 네 개의 산이란 뜻이다.

서울성곽이 도읍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다면,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불릴 수 있다.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손꼽히는 요충지였다.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도 여러차례 북한산에 있는 산성을 수리·축조했다. 그만큼 북한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어 거점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룬 조선은 국방력 강화와 도성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1704년(숙종 30)부터 1710년까지 도성 성곽을 재정비했다.

또한 다음해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됐다. 약 8km 달하는 북한산성은 기공에서 완공까지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규모에 비해 무척 빨리 축조된 것인데 청나라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공사를 서둘러 완료시켰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의 축조와 수축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울성곽은 내사산을 둘러 만든 성이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있는 성이고. 그래서 두 성곽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두 성곽 사이가 좀 '붕 떠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보조성이 축성됐는데 그것이 바로 탕춘대성(湯春大城)이다. 성이 세워진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湯春大)가 있다하여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약 4km에 걸쳐 연결한 탕춘대성도 1719년, 조선 숙종 시기에 만들어졌다. 인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성벽은 홍제천(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북한산 쪽으로 숨 가쁘게 비탈을 탄다. 그러다 북한산 서남쪽 비봉 인근에서 북한산성과 합류된다. 북한산 비봉은 진흥왕 순수비(555년 건립)가 있던 곳이다.

 

 

 

 
▲ 홍지문 홍지문 바로 옆에는 도로가 있다. 탕춘대성의 일부를 잘라 도로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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