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도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양으로 천도를 할 때 철저하게 풍수지리를 따져가며 도읍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서울의 우백호는 인왕산이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이번에 소개하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이다.

낙산(駱山)은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처럼 생겼다고 하여 낙타산 혹은 타락산으로도 불렸다. 낙산은 높이가 해발 125미터 정도로 산이라 불리기에는 턱없이 낮다. 실제로 한양도성을 두르고 있는 네 개의 산 중에서도 가장 낮다. 참고로 북악산은 342미터, 인왕산이 338미터, 남산이 270미터이다. 이 4개의 산은 서울 안쪽에 있다하여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른다.

* 낙산 성곽길: 낙산공원에서부터 혜화문까지는 성 밖을 걷는다.

● 서울의 좌청룡 낙산

실제로 이렇게 키가 낮다보니 낙산은 좌청룡으로서의 역할을 못한다고 질책에 시달려야했다. 이에 비해 우백호인 인왕산은 거대한 암반면이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어 돌이 많은 골산(骨山)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낸다. 낙산도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워낙에 체급 차이가 나다보니 우백호인 인왕산에게는 도전장조차 못 내미는 것이다.

그럼 왜 좌청룡의 역할이 중시됐을까?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청룡을 굳이 끌어다가 멀쩡한 산에 이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의미를 알려면 다시 풍수지리로 돌아가야 한다. 좌청룡은 남자, 장자를 뜻한다. 이에 비해 우백호는 여자, 차자를 뜻한다. 차자는 둘째나 셋째를 말한다.

다른 왕조국가들처럼 조선도 엄연히 장자 계승원칙이 있었다. 그러니 장자를 뜻하는 좌청룡이 튼실해야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울의 좌청룡은 우백호에게 게임이 되지 않았다. 용호상박은커녕 호랑이한테 냉큼 잡아먹히는 형상이다. 어쨌든 그 말대로 된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실제로 숙종이외에는 제대로 왕위를 이끈 장자 출신 왕이 전무했다.

좌청룡우백호니, 용호상박이니 판타지 같은 말들은 접어두고 낙산을 올라가보자. 우리는 말보다는 걷는 걸 더 잘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한양도성은 앞서 언급한 내사산을 두르고 있는데 그 길이가 18.6km에 달한다. 그런 한양도성을 걷는 것을 두고 순성놀이라고 부른다. 18.6km라면 걸을 만 하지 않은가. 트레킹 마니아라면 충분히 도전해볼만 하다. 옛 선조들은 짚신 신고도 잘 순성을 하셨다. 우리들이야 최신형 트레킹화를 신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순성을 잘 하려면 출발점이 중요한데 그 시작점을 많은 이들이 낙산 구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낙산 성곽길에서 몸을 제대로 풀어주고 북악산 성곽길로 넘어가는 것이다. 키가 작은 것이 역설적으로 낙산의 강점이 되는 것이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시작과 종료를 할 수 있으니 접근성도 무척이나 좋다.

 

 

* 낙산: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모습.

● 시원한 풍광을 품은 낙산공원

본격적으로 낙산 성곽길을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깎아지는 절벽 위에 세워진 집들이 보일 것이다. 이곳은 창신동인데 예전에 채석장이 있던 자리였다. 창신동하면 전태일 열사가 떠오르면서 작은 봉제공장들이 연상된다. 그런 창신동에 채석장이 있었다는 걸 아는 이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하여 도성밖 십리까지는 함부러 묘지를 쓰지도 못하게 했고, 돌도 캐내지 못하게 했다. 한양도성에 쌓여진 돌들은 해당 산에서 캐낸 것이 아니라 멀리 다른 산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성저십리 원칙은 훼손된다. 시가지의 확장으로 많은 석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도심지와 가까이에 있는 낙산은 그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인왕산도 채석장이 들어서 훼손이 된다. 일제에 의해 좌청룡우백호가 동시에 아픔을 겪었던 것이다.

“와 정말 시원한 풍광이네요. 저 앞에 있는 산이 북한산 맞죠?”

“예 맞아요. 북한산 북쪽에서 남쪽까지 파노라마로 보고 있어요. 도대체 이런 풍광을 어디서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낙산 정상부인 낙산공원 전망대에 올라가면 꼭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125미터라는 높이에 비해 품고 있는 풍광이 너무 아름답고 거대하다. 이런 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낙산공원을 좋아한다.

이제는 혜화문 방면으로 내려간다. 혜화문은 동소문인데 일제강점기에 철거됐다 1994년에 지금의 자리에 다시 만들어졌다. 낙산의 영역은 흥인지문과 혜화문 사이인 것이다.

* 낙산성곽: 낙산공원의 성곽. 여장의 구멍 3개가 보인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이고 양 옆에 구멍은 원총안이다. 근총안은 가까운 적을 공격할 때, 원총안은 원거리 적을 공격할 때 이용된다.

● 낙산 성곽길을 걸으며 성곽 공부를 한다

낙산공원 이전까지는 성곽의 안쪽을 걸었다면 혜화문까지는 성곽 밖을 걷게 된다. 그렇게 걷는다는 것은 한양도성 밖, 즉 4대문 밖으로 나왔다는 뜻이 된다. 그 이전까지는 여장(女墻)이라는 낮은 담장을 따라 걸으며 그 너머로 보이는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다. 구멍이 3개가 뚫린 여장은 성가퀴라고도 불리는데 구체적인 전투행위가 벌어지는 곳이다.

 

“여장 꼭대기 부분의 명칭은 옥개석인데요, 요거를 넘어서 보려면 좀 불편하시죠?”

“네 까치발 들고 봐야 돼요. 왜 이렇게 만들었대요. 키 좀 낮추지.”

 

다 이유가 있다. 한양도성은 애초 방어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관광을 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병사들이 그곳에서 생사를 걸고 싸워야했기에 방어에 적합한 높이로 여장을 만든 것이다. 여장이 높으니 성 밖에서는 그곳에 군사가 얼마나 배치되어 있는지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이와 달리 바깥쪽은 커다란 장벽 같은 성체를 끼고 걷게 된다. 적군은 그 큰 장벽을 기어 올라가야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 이렇게 안쪽과 바깥쪽이 다른 축성 방식을 두고 편축법(片築法)이라고 칭한다. 편축법은 한마디로 한쪽만 쌓았다는 뜻인데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특성에 적합한 축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쪽만 쌓으니 돈도 덜 들고, 공기도 단축된다. 얼마나 좋은가. 또한 편축법은 지형과 합치되는 방식이기에 성체가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형상을 보인다.

 

그럼 평지에서는 어떤 식으로 성을 축조할까. 협축법(夾築法)이란 방식으로 쌓는다. 협축법은 성벽의 안팎에서 성체를 올려쌓는 것을 말한다. 유럽의 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편축법이 바깥쪽만 낭떠러지라면 협축법으로 쌓여진 성들은 안쪽과 바깥쪽 모두 다 낭떠러지다.

사진에 등장하는 아빌라성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서북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이 아빌라성은 중세에 건립됐음에도 보존 상태가 좋아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에서 보듯 아빌라성은 협축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전에 찍은 스페인 역사 기행 사진을 여기서 써먹는다.

한양도성은 크게 세종, 숙종, 순조까지 세 시기에 걸쳐 성을 고쳐 쌓았다. 시간이 갈수록 성돌 낱낱의 크기는 커졌고, 다듬질의 강도는 정교해졌다. 낙산 성곽길을 걸을 때 놓치지 말고 관찰해보면 좋다. 이렇듯 낙산 성곽길 구간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성곽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된다. 이거야 말로 교과서 밖으로 나온 살아있는 역사 공부다.

*아빌라(Avilla)성: 협축법으로 축조된 아빌라성. 저 좁은 협로에서 병사들이 전투를 한다. 사진 왼쪽과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아빌라 대성당이다.

* 아빌라성: 성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협축법으로 축조가 됐으니 성 안쪽과 바깥쪽 모두 낭떠러지다. 그나저나 정원 참 예쁘다.

* 낙산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낙산 성곽길

1. 코스: 흥인지문 ▶ 낙산공원 ▶ 성곽길 ▶ 혜화문

2. 가는법: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바로 흥인지문을 탐방할 수 있음. 이후 혜화문에서는 4호선 한성대역으로 이동할 수 있음.

3. 같이 가면 좋을 곳: 심우장(만해 한용운 선생 집), 수연산방(수필가 이태준의 집. 지금은 전통찻집으로 변모함)

 

 

 

 






* 한양도성: 남산구간.







이전 포스팅에서 체성 구간의 돌과 문루 구간의 돌이 다르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똑같이 돌이라는 재료를 쌓아 올렸지만 문루 구간에 있는 돌들이 훨씬 더 격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그런데 문루 구간은 체성 구간과 또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


일단 한양도성이 어떻게 축조됐는지, 어떤 식으로 토목공사가 행하여 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양도성은 편축법이라는 방식으로 축조됐답니다. 편축법은 한쪽 면만 쌓는 방식인데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 합치되는 축조 방식입니다. 


밖에서 성곽을 보십시오. 5~6미터 이상 되는 성벽이 우뚝 서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 안에서의 눈높이는 여장 정도 잖아요. 이것이 바로 편축법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한쪽만 쌓았다는 겁니다. 


편축법으로 성벽을 쌓는다면 일단 산을 깎아내야 합니다. 이를 삭토법이라고 합니다. 뭐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적당하게 산을 깎아 성돌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할 테니까요. 


삭토법을 할 때는 맨 아래부분(시작점)과 맨 윗부분(종료점)의 위치는 달라집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뒤로 비스듬이 깎아낸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당연한 이야기겠지요. 시작점과 종료점이 수직으로 일치한다면 그 성벽은 드립다 무너질 겁니다. 그럼 공사 책임자는 유배가고...ㅋㅋㅋ


그렇게 비스듬이 삭토하고, 또 비스듬이 성돌을 올리다보니 맨 아래와 맨 윗 부분의 각도 차이가 생긴답니다. 구간에 따라 다르지만 약 15도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편축법은 한쪽만 쌓으니 그만큼 공력이 덜 듭니다. 물자와 인력을 아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사산을 둘러쌓은 한양도성은 편축법의 전형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산과 어우러졌기에 한양도성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편축법 말고 협축법이라는 방식이 있는데 고거이는 다음편에... ㅋ







* 여장: 한양도성 안쪽에서 바라보면 여장이 우리의 시야를 꽉 채운다. 여장의 위치가 우리가 보는 위치다. 여장 앞쪽의 평평한 공간을 내탁부라고 한다. 이 공간에서 전투와 경계가 이루어진다. 









* 성벽: 밖의 순성로에 보는 성은 우뚝 선 성벽이다. 






* 서울성곽: 여장 옆 내탁부를 걷고 있는 참가자.









* 숭례문: 도미노 블럭을 옆으로 쌓은 듯 하다. 필자는 저 돌을 지우개처럼 생겼다 하여 지우개 돌이라고 불렀다. 벽돌을 쌓아 올린 면장은 여장보다는 높이가 낮아 성 밖을 보기에 용이하다. 2008년에 방화에 의해 불탄 숭례문은 2013년에 복원되어 시민의 품으로돌아왔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행하다보면, 흔히 성곽길을 따라 걷다 대문 혹은 소문으로 쏙 들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낙산 역사트레킹을 한다고 가정해 보죠. 트레킹팀은 낙산 성곽길을 유유자적 하게 걷다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 길로 쏙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성곽길을 걸을 때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성체라 불리는 체성 구간과 문 구간의 차이점을. 체성 구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보는 성곽 구간입니다. 우리는 그 옆에 난 순성로를 따라 성곽과 나란히 걷는 것이죠. 


문 구간은 앞서 언급한 혜화문이나 사진에 등장한 숭례문(남대문), 창의문을 말합니다. 

첫번째 숭례문 사진을 보십시오. 같은 돌로 쌓여져 있는 듯하지만 체성 구간의 돌 하고는 차이점이 있지요? 잘 보세요. 여러분들의 센스를 믿어요...ㅋ


숭례문과 창의문에 쌓여진 돌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대석들입니다. 얼핏보면 블럭들을 차곡차곡 쌓아둔 것처럼 보일 겁니다. 이 부분을 육축이라고 합니다. 그 육축 위에 벽돌로 올려진 부분은 면장이라고 불리지요. 체성 구간의 여장이 문 구간에서는 면장이 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면장은 여장보다는 키가 낮아서 안에서 밖을 관망할 수 있다는 점이 있지요. 아무래도 문루에서는 장수들이 지휘를 하다보니 밖이 보여야 하잖아요. 여장처럼 키가 크다면 밖이 안 보일테고, 그러다보면 적군이 왔는지 산타클로스가 왔는지 모를테니까요...ㅋ


하지만 체성 구간의 돌들은 육축 구간의 돌들처럼 잘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시기마다 다르잖아요. 태조 시기의 돌, 세종시기의 돌, 숙종시기의 돌, 영정조 이후 시기의 돌. 


그렇게 보면 문 구간에 있는 육축은 그냥 시기구분이 없어서 참 좋네요. 구분할 필요가 없어서 머리가 아프지 않아...ㅋ  


한양도성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생각이 나서 올려봤습니다. 다음에 또 관련 이야기를 올려볼게요!









* 체성: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 창의문: 홍예문이 잘 드러나 있다. 면장이 여장보다 확실히 낮아 보인다. 










* 체성: 문 구간의 육축과는 돌이 다르다. 














* 각자석: 한양도성은 공사실명제를 도입했다. 각 구간마다 책임자들의 이름을 돌에 새겨 넣었다. 2015년에 복원된 흥인지문 북쪽 구간에 새겨진 각자들. 당시에 새겨진 글자를 본떠서 새로운 돌에 새긴 듯하다.

          









알고보면 더 재밌는 길, 서울성곽길


성돌에 맺힌 백성들의 피와 땀을 기억하며




17.04.10 11:12   최종 업데이트 17.04.10 11:12





             





    

        

      ▲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두고 걸으면 두 발이 아프다!"
 
한양도성, 즉 서울성곽을 두고 기자가 역사트레킹에 참가한 분들에게 했던 말이다. 찰리 채플린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유명한 명언을 빗대서 저런 말을 했던 것이다.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서울성곽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서울성곽은 네 개의 산(낙산-인왕산-남산-북악산)을 연결해서 만든 방어용 시설이다. 지금처럼 성곽길 트레킹을 하라고 만든 관광 자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애초 목적이 방어용 시설이었기에 경사도가 급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목적의 산성으로 축성됐기에 경사도가 급하면 급할수록 방어력은 더 높아졌던 것이다. 물론 구간에 따라서는 아주 완만한 길도 있다.

어쨌든 산을 연결해서 만든 성곽이기에 한양도성을 걸을 때는 그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하다.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옆으로 메는 가방이 아닌 아웃도어 배낭을 준비하고, 생수와 행동식도 넉넉히 준비하고...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를 한 후 떠나야 더 알차게 서울성곽 트레킹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적인 준비뿐만 아니라 지식적인 준비도 해보자. 알고 떠나면 더 재밌는 성곽길 투어가 될 테니까.  




 ▲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500명 이상이 죽었다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도성을 쌓으라고 명한다. 그래서 1396년(태조5)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한양도성이 축성된다. 서울의 네 개의 산을 연결하여 만든 성곽은 그 길이가 무려 18.6km에 달했다. 49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18km가 넘는 성곽을 쌓았던 것이다.

그렇게 빨리 도성 축조가 가능했던 이유는 많은 백성들을 공사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약 11만 명이 넘는 인원이 현장에서 땀방울을 쏟아냈으니 50일도 안 되는 시기에 그렇게 엄청난 결과물을 도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한양 인구를 10만 명 남짓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징발된 인원수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태조시기에 쌓은 성은 7할 이상이 토성(土城) 구간이었다. 돌이 아닌 흙으로 축성했으니 빠르게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토성은 석성(石城)보다는 견고함이 떨어진다. 성체의 형상도 반듯하지 않고, 비바람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여장 같은 방어력을 증대시키는 시설을 설치하기도 어렵다.





* 탕춘대성: 탕춘대성의 성돌. 돌의 앞면부와 뒷면부가 다르다. 모양이 마치 사람 이빨처럼 생겼다. 뒷면부에는 잡석과 흙을 채워 성돌을 고정시킨다. 탕춘대성은 숙종 때 쌓은 성으로 북한산성과 도성을 연결하는 익성이었다.






* 탕춘대성: 탕춘대성은 숙종 때 쌓은 성이다. 사진 아래부분에 다듬어진 성돌을 보라. 숙종시기에 쌓은 성돌과 비슷하다.  







이런 단점들은 축성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문제시되었고, 도성을 수축하자는 의견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대규모의 수축은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나 이루어졌다. 1422년(세종4) 1월 16일, 태조 시기보다 훨씬 더 많은, 무려 32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대적인 도성 수축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작업을 이끈 최종결정권자는 당시 태상왕으로 있던 태종 이방원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백성들이 징발된 만큼 그때 수많은 인명들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공사 중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네요. 전쟁 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인원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죠."
 
필자가 이런 설명을 하면 트레킹 참가자들은 십중팔구 무척 놀랬다.
 
"한편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은 자기 먹을거리를 자기가 준비해야 했습니다. 험한 공사에 징발된 것도 못마땅할 판에 자기가 식량까지 가져가야 했으니 아주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이런 설명을 하면 십중팔구 혀를 차며 어이없어했다.






        

▲ 성벽돌 정조 이후 양식이다. 성체의 위쪽 부분이 여장이다. 여장 하나를 '타'라고 부른다. 한 타에는 총 3개의 구멍이 뚫렸는데 가운데는 근총안, 양 옆에는 원총안이 뚫려 있다. 근총안에서는 가까운 적을 향해, 원총안에서는 멀리 있는 적을 향해 화포를 발사한다.







'사극왕' 숙종의 다른 모습

서울성곽의 대대적인 보수는 숙종 시기에 다시 이루어진다. 도성을 다시 쌓자는 의견은 숙종 즉위 초부터 개진되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 것은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숙종 30년(1704년)에 시작된 한양도성 다시 쌓기는 1710년까지 이어진다.

숙종은 그다음 해인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한다.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길이가 약 8km에 달하는 산성을 반년 만에 쌓게 한 것이다. 이렇게 '초스피드'로 북한산성을 쌓게 한 건 청나라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을 새로 쌓지도, 기존의 성을 보수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양도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30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진행된 이유 중의 하나도 청나라의 감시 눈초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TV 속의 숙종은 항상 인현왕후, 장희빈과 함께 등장한다. 숙종 시기는 사극계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그는 '사극왕'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사극 프레임으로만 숙종을 바라보지 않았나? 한양도성의 대대적인 보수, 북한산성 축성, 이에 더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축성 등 숙종 시기에는 국방력이 크게 신장된다. 자신의 여인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만들었던 숙종이었지만 이렇듯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타 속의 고양이 '타'는 여장 하나의 단위를 말한다. 또한 여장과 여장 사이의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타에서는 주로 활로 공격을 했다. 사진속 고양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활을 쏘았다는 것이다.








후기로 갈수록 돌이 커졌고, 더 잘 다듬었다 

"여기 돌은 세종시기에 쌓았어요. 옥수수처럼 생겼죠? 아니 메주처럼 생겼나요?"
 
세종 때 쌓은 돌들을 보면 생긴 것은 옥수수처럼 생겼고, 크기는 메주 정도만 하다.
 
"여기 숙종 때 쌓은 돌들은 조선 전기 때보다 더 크죠. 전체적으로 더 매끈하게 떨어지고요."
 
숙종 시기에 쌓은 성돌은 세종 때에 쌓은 성돌보다 모양도 더 크고, 다듬기도 더 많이 다듬었다.
 
"이 큰 성돌들은 정조 이후에 쌓은 돌들입니다. 숙종 시기보다도 더 크죠?"
"이 돌들은 확실히 크네요. 이거는 딱 봐도 알겠네."



        

▲ 성돌 사진에서 오른쪽이 정조 이후의 양식이다. 사진 왼쪽 하단부 검은색을 띈 돌들은 세종 시기의 양식이다. 왼쪽 상단부와 오른쪽 여장은 근래에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정조 이후에 쌓은 돌들은 숙종 때보다도 훨씬 크고, 치석(治石)도 훨씬 더 세밀하다. 성돌과 성돌의 이가 잘 맞물려 빈틈이 작다. 빈틈이 작다는 것은 그만큼 빗물이 침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여기서의 치석은 한자어 그대로 '돌을 간다'는 말이다.
 
"맞습니다. 저 성돌은 확실히 눈에 띄죠. 크니까."
"적어도 정조 이후 성돌들은 잊어버리지 않겠네요."
"저렇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돌이 커진 건 방어력을 높이려고 그랬던 거죠. 화포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려고요.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이 홍이포라는 대포로 남한산성을 공격했는데 그걸 교훈 삼아 성돌들을 더 크게 만든 것이죠."

 
이렇게 정리가 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성돌의 크기가 커지고, 치석의 강도도 세진다. 왜? 당시 세계는 대포로 성벽을 부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포 공격을 이겨내려면 성돌을 대형화시켜야 했고, 대형화된 성돌을 이가 잘 맞물리게 쌓으려면 치석을 잘해야 했다.
 
"두 가지를 알면 훨씬 더 재밌게 성곽길 탐방을 할 수 있어요. 후기로 갈수록 돌이 커진다. 돌을 다듬는 정밀도도 높아진다. 이 두 가지요."


성돌을 시기별로 구분할 줄 모른다고 해도 성곽길을 걷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왕 하는 성곽 순성길이라면 좀 알고 가면 좋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서울성곽도 아는 만큼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서울성곽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 속에는 일반 백성들의 땀방울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성돌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 그런 피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순성놀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 성벽을 쌓았던 이들의 노고를 잊지 않으며 성곽길을 걷는 것도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한다.




 * 훼손부분: 서울성곽의 훼손부분. 한 빌라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 중에서.











덧붙임

지난 3월 21일,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무산됐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유네스코 자문기관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아래 이코모스)는 한양도성을 대상으로 패널심사를 진행했는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등재 불가'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부득이하게 철회하며, 2020년 등재로 목표 수정을 했다고 밝혔다.

이코모스의 결정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양도성에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납득이 안 된다. 한양도성은 자연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방어력을 극대화시킨 성으로 평지에 축성된 다른 나라 성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협의회의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넘치겠지만,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꼼꼼히 챙겨 2020년에는 꼭 등재에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2020년 서울성곽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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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은 숙종 시기에 대대적인 보수를 한다. 도성을 다시 쌓자는 의견은 숙종 즉위 초부터 개진되었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 것은 무려 3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숙종 30(1704)에 시작된 한양도성 다시 쌓기는 1710년까지 이어진다.


숙종은 그 다음해인 1711,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한다. 북한산성은 6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길이가 약 8km에 달하는 산성을 반 년 만에 쌓게 한 것이다. 이렇게 초스피드로 북한산성을 쌓게 한 건 청나라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을 새로 쌓지도, 기존의 성을 보수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양도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30년 동안이나 지루하게 진행된 이유 중의 하나도 청나라의 감시의 눈초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TV 속의 숙종은 항상 인현왕후, 장희빈과 함께 등장한다. 숙종 시기는 사극계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다. 한마디로 그는 사극왕이다. 그렇듯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사극 프레임으로만 숙종을 바라보지 않았나?


한양도성의 대대적인 보수, 북한산성 축성, 이에 더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축성 등 숙종 시기에는 국방력이 크게 신장된다. 자신의 여인들을 들었다 놨다하며, 치명적인(?) 삼각관계를 만들었던 숙종이었지만 이렇듯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울에 '기도발' 잘 받는 바위가 있다고?


선바위와 국사당을 품고 있는 인왕산



17.01.26 10:29   최종 업데이트 17.01.26 12:10

곽동운(artpunk)             





    

        

 

▲ 선바위 인왕산 중턱에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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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거대한 암반이 노출된 인왕산은 그 자체가 절경이다. 그래서 옛 선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인왕산에 대한 애정 공세는 오늘날에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성곽길을 탐방하는 도보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왕산을 향하는 발걸음이 모두 성곽길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성곽길 트레킹이 아닌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인왕산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속인일 수도 있고, 그냥 평범한 일반 시민일 수도 있다. 필자와 같이 역사 트레킹을 즐겨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럼 그들은 어디를 가서 기원을 드릴까. 대충 아무 곳이나 가서 돗자리 펴고 절을 올리는 것일까.





       

▲ 선바위 누군가 간절히 기원을 드리고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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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복을 입은 바위?
 
그들이 기원을 드리는 곳은 인왕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바위라는 곳이다. 선바위는 높이 7미터, 가로 10미터 정도가 되는 바위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 있다. 그렇게 바위의 규모가 크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 국사당 인왕산 선바위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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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당과 산악신앙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년(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 국사당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신사를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사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그렇게 아래쪽에 국사당이 자리 잡게 되니 선바위는 거석숭배문화에다 산악신앙까지 더해지게 된다. 선바위에서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이 국사당 앞에서도 두 손을 모으게 됐다는 것이다. 









        

▲ 선바위의 뒤태 선바위의 뒷모습.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을 닮았다. 그래서 필자는 선바위를 사오정바위라고 부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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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와 정도전, 선바위를 두고 맞서다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인왕산은 그 자체가 매력적인 산이다. 또한 그 안에 선바위와 국사당 같은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을 잘 간직해온 산이다. 그렇게 매력적인 풍광과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가진 산이 서울 중심가에 '떡'하고 위치해 있는 것이다.







        

▲ 선바위 선바위는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세력들에 의해 한양도성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사진에서보듯 선바위는 한양도성과 무척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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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 불여일견! 인왕산에 직접 가서 선바위와 국사당을 탐방하고 오는 건 어떨까. 선바위가 기도발이 잘 받는 곳이라는데 그곳에서 기원을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살짝 뒤로 돌아 선바위의 '뒤태'도 살펴보자. 앞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왔던 사오정과 비슷하게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선바위를 '사오정바위'라고 부른다. 

거기에 더해 유명한 수성동 계곡에도 가보자. 수성동계곡에서 바라보는 인왕산은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거대한 암반이 노출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인왕산에 올라 '기도발'도 세워보고, 유명한 수성동 계곡도 탐방하고. 그 아래 서촌에 들러 배도 채우고! 참 서울을 즐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 것 같다.





여행정보

1. 교통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1번 출구 하차. 표지판을 따라 800미터 정도 올라가면 선바위에 도착함.


2. 추천이동경로: 선바위(국사당) ▶ 인왕산 성곽구간 ▶ 수성동계곡 ▶ 서촌
 






 



        

▲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성곽에 눈 내리는 날





1월 22일 토요일.


서울에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더군요. 온 세상이 다 하얗게 변했습니다.


서울성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인왕산 성곽길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곳은 설국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성곽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눈길을 걸었습니다. 성곽길 너머 희미하게 눈 쌓인 바위들이 보이더군요. 절경이었습니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하얗게 눈 덮인 성곽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게 다 정화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흰 눈으로 세상살이에 찌든 제 몸을 씻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눈 덮인 성곽길을 걷고 난 후 촛불 집회가 열리던 광화문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눈사람을 만났네요. 역시 촛불 집회에 참석하는 눈사람이라 그런지 그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열심히 주장하고 있네요. 앞에다 촛불도 여러개 켜 놓고서.






















2016년은 정말 다사다난했습니다. 국내외로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그렇게 다이내믹했던 2016년이 지고 이제 대망의 2017년의 새해가 밝아오네요.

새해가 되면 많은 분들이 해돋이를 보러 갑니다. 또 누구는 산에 오르기도 하지요. 그곳에서 한 해를 잘 살아보겠다는 다짐을 마음에 깊게 새기시겠지요. 그렇게 다짐을 하고 오는 곳은 자신에게 특별한 곳일 겁니다.

저한테도 그런 특별한 곳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바로 인왕산에 있는 선바위입니다.
승복을 입은 스님처럼 보인다고 하여 선바위로 이름 붙여진 큰 바위가 바로 그곳이지요.


누구는 이 선바위를 두고 무학대사 바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양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도성 안에 넣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선바위는 도성 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유학을 중시했던 정도전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죠.

저는 이 바위를 사오정 바위라고 부릅니다. 바위의 뒤태를 담은 사진을 잘 보세요. 꼭 사오정의 뒷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나요? 아니면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다의 뒷모습?

이름이 어떻든 간에 이 바위는 우리나라에서 기도발이 가장 잘 받는 곳 중에 한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두 손 모아 기원을 드립니다. 저도 선바위에서 삼 배를 올리곤 했습니다.

2017년 새해를 맞이해서 선바위에 가서 삼 배를 올릴 생각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번창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두 손을 모을 생각이지요. 또 한 해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도 다부지게 할 생각입니다.

아참! 2017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을 테니 그것에 대한 기원도 드릴 생각입니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이 고생을 했으니, 다음 대통령은 정말 상식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선출되라고 국가적인 기원을 드릴 생각입니다.













하이힐을 신고 성곽길을?


성곽길을 걷는 서울시티트레킹

 





이제 역사트레킹 펀딩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역사트레킹 펀딩 기간은 108일입니다. 108일이면 충분히 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기간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못 다한 이야기가 넘쳐나네요. 한편으로는 펀딩이 빨리 종료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원고를 작성하는 게 만만치 않았거든요. 여기에 올린 글들은 기 발표작들입니다. 그것들을 펀딩 플랫폼에 맞게 수정을 가했지요. 그런데 수정하는 게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새로 작성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으니까요.


어쩌면 역사트레킹 펀딩은 제게 108번뇌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번뇌를 벗어나고자 저는 계속 허우적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허우적거리다보니 이제 종료를 코앞에 두게 됐네요. 시간이 참 빠르죠!


후원자분들! 파티란에 리워드 트레킹 공지 올렸으니 확인해 주세요. 보충 트레킹도 올려놨으니 꼭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화에서는 서울시티트레킹을 소개해 봅니다. 서울시티트레킹은 '서울시티투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가보면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이 버스를 타면 서울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2층 버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면 좋겠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보려면 역시 자신의 두 발로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요.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정상에 버스를 타고 올라갈 수는 없으니까요!


한편 서울시티트레킹은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자매편입니다. A코스, B코스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될 듯싶네요. 인왕산이 스토리텔링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나눈 것이죠.

 




 

* 소녀상






 

꽃 한 송이가 놓여 있는 소녀상

 

서울시티트레킹은 조계사와 그 옆쪽에 자리 잡고 있는 우정국 탐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정국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1884)을 일으킨 곳입니다. 일명 '3일 천하'로 불린 갑신정변은 임오군란(1882)과 함께 개화기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정변 주동자들의 의견과 너무나 큰 간극을 보였던 당시의 조선 상황, 정변 당사자들의 과도한 일본 의존 등으로 갑신정변은 '그들만의 리그'로 막을 내렸고, 주동자였던 김옥균은 중국 상해에서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정변 주동자들은 일본을 맹주로 한 '대동합방론'과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후쿠자와 유키치의 충실한 모범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에 메이지유신을 '이식' 시키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 만 것이죠.


갑신정변이 발생한 곳인 우정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대사관이 있고, 그 앞에는 위안부소녀상이 꿋꿋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92년부터 개최된 수요집회는 2012년에 1000회를 맞이하게 됐고, 그 기념으로 본 위안부소녀상이 건립되었습니다.


누구는 위안부소녀상이 외롭고 처량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2인용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일본 정치인들의 끊임없는 망언들을 생각하면 그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소녀상이 외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소녀상을 방문할 때마다 꽃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꽃이 아니라 매번 다른 꽃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어떨 때는 과자나 그림 같은 것들이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소녀는 벤치에 홀로 앉아 있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친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녀상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행사. 뒤로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다음 탐방지는 광화문입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입니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 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광화문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무지개문)을 셋이나 내서 격식을 높였습니다.


궁궐은 ''''이 합쳐진 말인데 ''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맙니다. 광화문 앞에 화기를 막으려고 세운 해태상이 있었음에도 불에 전소되었던 것이죠.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임금의 피난)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갑니다. 급기야 백성들은 궁궐에 불을 놓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해태상을 세운다고 한들, 강력한 소방시설을 갖춘다고 한들 성난 민심 앞에서는 그저 무용지물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지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8월에 완공된 것입니다. 사실 광화문은 1968년에 중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져 버렸던 것이죠.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입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 동십자각. 도로 위에 섬처럼 떠있다.






 

섬처럼 떠 있는 동십자각

 

광화문에서 동쪽, 삼청동 방면으로 가다보면 누각 하나가 껑뚱하게 떨어져 나와 있습니다. 광화문 인근이라서 그런지 자동차들이 쉴 세 없이 그 앞을 지나고 있지요.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대형 버스들도 많이 지나갑니다. 도로 한복판에 툭 튀어 나온 누각을 보고 있다 보면 마치 섬이 하나 떠 있는 느낌이듭니다.


도로 한복판에 외떨어져 나온 누각은 앞서 언급한 동십자각입니다.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동쪽의 방위 초소 역할을 했던 곳이죠. 서십자각은 서쪽 방위 초소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담벼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왜 지금처럼 끊겨져 있는 걸까요? 이것 역시 일제에 의해 끊기게 됐습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남쪽 담벼락을 다 헐어버렸습니다. 그때 광화문도 이전을 하게 됐지요.


돌담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철책선이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구한말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십자각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단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한편 동십자각이 감시초소였던 만큼 그 역할은 무척 중요했습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인 자객들도 동십자각을 점령한 후 경복궁 내부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동십자각은 서십자각 보다는 상황이 더 낫습니다. 서십자각은 아예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 사이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는데 그때 서십자각을 철거했던 것입니다. 멀쩡한 광화문을 옮겨버리고, 담장을 헐고, 누각도 철거시키고...


그러고 보면 일제도 반달리즘을 저지른 셈입니다. 반달리즘은 로마의 유적들을 파괴했던 반달족들의 반문명적인 행위를 빗댄 명칭입니다.

 

 



* 서울성곽




 

인왕산과 서울성곽

 

이제 서울성곽을 오를 차례입니다. 18km에 달하는 서울성곽은 조선의 도성이었습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기준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멱산(남산)을 둘러서 만든 성곽입니다. 이 산들을 묶어 내사산이라 부릅니다.


북악산은 원래 백악산이라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북악'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런 도성에는 4대문이 있는데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 북쪽에는 숙정문, 서쪽에는 돈의문(서대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서대문은 없지요.


인왕산에 올라서면 성곽과 함께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입니다.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는 서울 중심부입니다. 이를 두고 저는 '작은 서울'이라 칭합니다.


그럼 '큰 서울'은 어디일까요?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아차산(용마산), 서쪽으로는 덕양산(행주산성)을 두고 외사산이라 부르는데 그 외사산의 안쪽 지역을 '큰 서울'이라고 불렀습니다.


서쪽 지역만 빼놓고는 지금의 서울 행정권역과 얼추 비슷합니다. 한양천도 이후, 서울의 확장은 계속됐지만, 지형적인 굴레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 서울성곽. 급경사를 타고 내려가는 참가자. 딱 봐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모든 참가자들이 완주를 해주셨다는 점이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급경사를 타는 서울성곽

 

서울성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요새를 구축했습니다. 산사면의 급경사를 이용하여 적의 침략을 대비한 것이죠. 한마디로 매우 급한 경사면에 성곽이 구축됐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경사면이 급하면 급할수록 방어력은 증강될 테니까요.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서울성곽길은 걷기가 만만치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걷다 보면 발바닥에 불이 난다는 뜻이지요.


물론 평지구간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평지 구간은 도시화로 인해 성벽이 거의 다 허물어졌지요.

간혹 서울성곽길을 좀 만만하게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전 트레킹 팀원 중에서도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께서 하이힐을 신고 오셨던 것입니다. 트레킹 리딩자로서 참 난감하더군요.

     

"! 제가 분명히 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고 오라고 당부 드렸는데요."

"앞에는 그냥 평지고, 서울성곽길 걷는다면서요..."

 

서울성곽은 여러 번에 걸쳐 개축됐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토성이었고, 이후에는 주위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됐습니다. 그러다 조선 후기 숙종시대에는 두부 모양의 장대석이 올려지게 됩니다.


이렇듯 서울성곽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마치 600년이란 시간이 퇴적층처럼 돌들에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랫돌은 옛날에 쌓여 '누리끼리'한데 그 이후에 축성된 돌들은 하얀색입니다. 윗돌과 아랫돌이 서로 '시간 퇴적층'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아참! 그 하이힐 신은 분은 어떻게 됐냐고요? 다행이었습니다. 그 분도 끝까지 완주를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참가자분들이 완주를 해주시면 저는 정말 뿌듯하더군요. 물론 조마조마 하기는 했지만...

 

 





* 독립문. 독립문을 지나고 있는 참가자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마지막 탐방지는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입니다. 독립문은 잘 아시다시피 독립협회에서 자주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문입니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문이죠.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든 문이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자주독립'은 분명 한계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독립의지는 확고했으나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이권침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했으나 일본의 이권 침탈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함의가 있어서 그랬는지 독립문은 일제강점기에도 헐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서울시티 투어를 떠납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설명을 듣고, 분주히 사진을 찍어 됩니다. 외국인들이 이렇게까지 서울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데 우리가 그들보다 서울을 더 모르면 안 되겠지요? 우리도 열심히 서울에 대해서 배워 보자고요.


그렇게 배우다보면 역사도시 서울의 매력에 푹 빠질 겁니다. 그 매력에서 허우적거리다보면 주말마다 배낭을 꾸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손에는 서울 역사지도를 들고 있을 거고요.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초대형 태극기.





 

 

서울 시티트레킹

 

1. 코스: 조계사 소녀상 광화문(동십자각) 황학정 서울성곽(인왕산) 서대문형무소(독립문)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투표 후에 떠나는 봄꽃트레킹

한강, 서울성곽, 수표교까지! 아기자기한 서울내부트레킹

 

  

봄날이 왔습니다. 봄바람이 부니 하얀색 벚꽃들이 잎을 흩날리고, 노란색 개나리들이 춤을 춥니다. 20대 총선도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트레킹의 계절이 다가온 만큼 정치의 계절도 다가온 것이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립니다. 413일에는 투표함에 민주주의의 꽃 한 송이를 넣으시고, 가까운 곳으로 봄꽃트레킹을 떠나보는 게 어떨까요? 이번에 소개할 코스는 서울 남산 부근에서 행해지는 일명 서울내부트레킹코스입니다. 남산 부근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투표를 하시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트레킹을 즐기셔도 좋을 듯합니다.


사실 이 서울내부트레킹은 동네 뒷산을 타고 갑니다. 시작점이 매봉산(금호산)이라는 곳인데 이 산은 전형적인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스 중간에 있는 남산도 그 동네 사람들에게는 동네 뒷산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동네 뒷산을 타고 가지만 서울내부트레킹도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풍부하게 품고 있답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한강을 조망할 수도 있고, 서울성곽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걸음을 더하면 수표교와 광희문, 그리고 동대문으로 익숙한 흥인지문도 탐방할 수 있답니다.

    


 

 


* 한강: 매봉산 팔각정에서 바라 본 한강. 사진 오른쪽에 있는 다리는 동호대교임.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트레킹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게 된 것이죠.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습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죠.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곳이죠.


지금의 매봉산은 의 눈빛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매를 볼 수 없는 매봉산이지만 트레킹팀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강을 시원스럽게 조망했던 것입니다. 매봉산 팔각정에 올라서면, 압구정동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역동적인 한강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답니다.


또한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까지 한강을 굽어볼 수 있습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춰보는 것도 매봉산 탐방의 재미입니다. 지인과 동행을 했다면 한강다리 맞추기 내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 버티고개: 버티고개를 걷고 있는 트레킹팀.

 





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전에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에서 김수현이 저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네요.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입니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합니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한 밤 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겠지요.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습니다. 안전한 보행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답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됩니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갑니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 서울성곽: 이 곳을 지나면 장충단공원이 나온다.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9월경이었습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지요.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습니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세긴 것입니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겁니다.


장충단은 1910, 일제에 의해 폐사됩니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됩니다. 마치 종묘사직할 때의 사직단,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죠.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습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습니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웃음이 나옵니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냥 폭사했습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죠.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습니다.

 





 *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있다.

    



 

유명한 정치집회 장소였던 장충단공원

 

광복 이후 장충단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1971418,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해 4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당시의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됩니다. 19791026일에 있은 시크릿 파티에서 한 잔의 술에 섞인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었지요.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습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당시 김대중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든 인파는 약 100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인파였죠.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그렇게 대규모 선거유세를 하지 않는 분위기지요. SNS를 이용한 선거홍보가 활발히 진행되니 굳이 대규모 정치연설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대규모 연설회를 하든 SNS를 활발히 운영하든 중요한 건 돈 안 들리고, 정정당당하게 선거에 임하는 모습일 겁니다. 깨끗한 선거운동, 착실한 의정활동, 국민 편에 선 정치 등등... 이런 후보자들을 찾아내서 국회로 보내야 하는 게 유권자의 임무입니다.

 

그 놈이 그 놈이다

 

이 말이 맹위를 떨치면 떨칠수록 우리 정치는 발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진짜 그 놈이 그 놈인지, ‘그 놈이 그 놈이 아닌지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유권자의 임무 아닐까요?

 

   





*  서울성곽: 성곽 주변에 핀 개나리. 







 

청계천 복원의 핵심, 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습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습니다.


수표교는 세종 2(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습니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1441)의 일입니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입니다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습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지요.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지요.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영조 36(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입니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입니다.


하지만 수표교는 청계천이 복원된 지금까지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광희문: 4소문 중에 하나인 광희문.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

 

 

광희문과 흥인지문(동대문) 탐방을 끝으로 서울 내부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광희문은 4소문 중에 하나고, 흥인지문은 4대문 중에 하나입니다.


한강 보고, 서울성곽길 걷고, 장충단도 탐방하고, 대문과 소문을 관찰할 수 있는 서울 내부트레킹! 동네 뒷산에서 시작되지만 이 정도면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라고 할 수 있겠죠. 봄날, 매봉산과 남산 부근에는 벚꽃과 개나리들이 활짝 피어납니다. 413일이면 만개를 했겠네요. 투표 끝난 후에 봄꽃트레킹 어떠세요? 투표함에 민주주의의 꽃 한 송이를 넣으시고, 가까운 곳으로 봄꽃트레킹을 떠나보는 거죠!

 

 

 

 

서울내부트레킹

 

1. 코스: 매봉산 팔각정 버티고개 성곽길 장충단공원(수표교) 광희문 흥인지문(동대문)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청구역(5호선) / OUT - 동대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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