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주로 저런 멘트는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발화자의 얼굴 표정을 생각해보라. 가끔가다 저 멘트에 이런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했다!”

 

이 말까지 나왔다면 그 주위 상황이 어떨지 짐짓 상상이 되실 것이다.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표정은 심각하거나 화가나 있고, 그 주변의 공기는 아주 무거워서 착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그런 대화경험이 없으신 분들은 저런 멘트가 나오는 드라마의 해당 장면을 생각해보시라. 심상치 않은 배경음악이 흐르고, 배우들의 눈빛에는 불꽃이 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 대상자가 아니기를 빌어야 하나? 하지만 그 대상자가 나라면? 내 자신이 잘 안 변하고, 고쳐 쓸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이라고 지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면... 정말 난감할 것이다. 필자도 몇 년 전까지 ‘사람은 잘 안 변한다’라는 말에 한 표를 던졌었다. 어쩌면 지인들 입에 오르내리던 그 사람이 본 필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몇 수십 년을 사는 인간이 안 변할 수 있냐 이 말이다. 바뀌는 부분이 본질적인 파트냐 가변적인 파트냐 이런 논의는 둘째 치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위가 변하는데 사람이 그에 따라 안 변할 수가 없잖아!”

 

 

* 선유도: 선유교에서 바라본 모습

●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주었던, 선유봉

이번편은 한강 역사트레킹이다. 지난 4편에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을 소개를 했는데 4편과는 다른 내용이다. 지역적으로 보자면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은 한강의 동쪽편을 기술했다. 이에 비해 이번 편은 한강의 서쪽편을 기술했다. 4편과 이번 편을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지 모른다.

처음 한강 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 사람들 반응은 신통치가 않았다.

“한강이야 산책하고, 운동하는 그러는 곳이잖아요. 그렇게 친숙한 곳에 <한강역사트레킹>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붙이는 거 오버 아니에요? 괜히 있어 보이려고 말이에요.”

과연 그럴까? 정말 한강이 그저 그런, 무색무취의 공간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 그래서 이번 편은 한강에 대한 독자들의 변화를 이끌려고 한다.

한강 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도착지는 선유도 공원이다. 원래 선유도는 선유봉이라고 불렸던 해발 40m 정도의 봉우리였다. 강가 바로 옆쪽에 우뚝 선 모습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중국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선유봉이 있는 양화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고 할 정도였다.

겸재 정선도 선유도를 사랑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겸재는 양천 현감으로 있었던 1741년에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 등 3편의 진경산수화를 그려, 지금의 선유도 일대의 한강 유역을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내었다.

특히 <양화환도>에서는 선유봉과 함께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절두산이 등장하고, 또한 그 잠두봉 아래에는 양화진(지금의 합정동)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의 강물길을 느긋하게 나룻배로 건너고 있는 뱃사공의 모습도 화폭에 담겨져 있어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도 그 그림 속에 뛰어들어 신선놀음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 정도다.

그렇다. 선유봉(仙遊峰)은 신선이 노닌다는 봉우리였다. 그럼 왜 선유봉은 졸지에 선유도로 내려앉았는가? 선유도는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었다. 일제에 의해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설 무렵, 활주로를 닦고 제방을 쌓는다며 선유봉에서 채석을 한 것이다. 그렇게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봉우리는 점점 더 낮아져 갔다.

해방 이후에도 선유봉은 계속해서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선유봉에서 캔 돌들은 지금의 강변북로 공사 등에 이용됐다고 한다. 그렇게 깎이다보니 선유봉은 납작하게 되었고, 이후 한강이 개발되어 강폭이 넓어졌을 때 영등포쪽과 분리되어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1978년에는 서울 서남부권에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 선유도에 들어서게 됐고, 그 정수장이 지난 2000년에 폐쇄되어 지금의 선유도 공원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선유도는 참 사연이 많은 섬이다. 깎이고, 부서지고, 졸지에 섬이 되어버리고...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선유도가 그렇게 아낌없이 내주었기에 지금이 서울 시민들은 느긋하게 ‘신선놀음’을 할 수 있게 됐다. 선유봉의 변화로 서울 사람들이 좋은 휴식처를 얻게 된 셈이다.

 

* 척화비: 절두산 성지 안에 있다

●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개명했나?

선유도를 이야기하면서 절두산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안 될 것이다. 절두산은 한강역사트레킹의 루트는 아니었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앞서 말한 <양화환도>에서 절두산, 즉 잠두봉은 선유봉과 짝을 이루고 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제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으로.

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절두산이 아닌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죽었다.

이 병인박해가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이까지 올라온 것이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아주 격분을 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며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의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약 150년 전, 그렇게 절두산은 수 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감시견처럼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갔다. 그 흐름은 흥선대원군도 어쩌지를 못했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꿔다둔 보릿자루 마냥 껑뚱하게 서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우리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반대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사람들의 피로 그 흔적을 닦아낸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무슨 공포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사람피로 무엇을 닦는다는 말인가?

한편 병인양요에 대해서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더불어 그 콧대 높은 프랑스 함대가 왜 다시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시대사적인 유추를 해보았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통치기였다. 그 시절 전 유럽은 신흥강국으로 발돋움한 프로이센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 중 프랑스는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 중에 하나였다. 아니나다를까 몇 년 후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에는 전쟁이 벌어졌고, 그 파장으로 독일 지방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게 됐다. 즉 1866년 경, 프랑스는 동방의 조선에 물리력을 집중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 잠두봉: 선유도 방면에서 바라본 모습. 뒤쪽에 북한산이 우뚝 서 있다. 여기서 보이는 북한산은 남쪽이다.

 

● 숨어 있는 진주,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이런 필자의 설명을 뒤로 하고 한강 역사트레킹팀은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샛강은 여의도 남쪽과 영등포구 신길동 쪽을 흐르는 작은 강으로 한강의 지류다. 그곳에 샛강생태공원이 조성되어있다. 샛강생태공원은 1997년 9월 경에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샛강생태공원이 무슨 대단한 절경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샛강은 상당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여의도의 고층건물과 습지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여의도라는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첨단 구역에 샛강생태공원이라는 녹지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샛강생태공원에는 여의도와 1호선 신길역을 연결하는 샛강다리가 세워져있다. 샛강다리는 항해하는 돛단배를 형상화시켰는데 S라인, 곡선미가 두드러진다. 샛강의 푸른 수목들과 그 뒤에 우뚝 솟아 있는 여의도의 빌딩들이 샛강다리와 서로 어우러져 무척 이국적인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래서인지 이 샛강다리에서는 광고나 영상 촬영 장소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자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한강철교를 보러가자. 철길을 걷는게 아니라 63빌딩 앞에서 한강철교를 바라보는 것이다.

 

* 샛강생태공원

 

● 끊어진 다리

 

“그게 정말이에요? 저 한강대교가 폭파됐었다고요? 그게 언젠데요?”

수강생 중 한 분이 놀란 듯 큰 목소리로 필자에게 물었다.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끊은 주체가 인민군이 아닌 우리 국군이었다는 점입니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다리를 폭파시킨 거죠. 전쟁 때는 일부러 시설물을 파괴해서 적군의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강대교 폭파는 문제가 아주 많았어요. 다리 절단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죠.”

생각보다 한강철교와 한강대교에 대한 스토리를 알고 있는 수강생들이 많지 않았다. 한강철교는 1900년에 일제에 의해 건설됐고, 그 옆에 있는 한강대교는 1917년에 건설됐다. 한강인도교라고도 불렸던 한강대교는 1917년에 완공이 됐는데 한강철교가 건설되고 남은 자재들로 건설이 됐다. 이런 기본적인 스토리들을 이야기한 후 한강대교 폭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전 예고 없이 폭파가 실시돼서 당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들이 많이 죽었어요.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더 황당한 일은 다리가 끊기기 몇 시간 전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힘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는 겁니다.”

“그럼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끊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들은 멀리 대전까지 피난을 간 상태였습니다. 미리 녹음했던 음성으로 계속 돌려 됐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 방송 내용을 믿고 피난을 안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웃기는 거죠.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간 건 그렇다 쳐도 왜 거짓말을 합니까? 서울에 있지도 않으면서 서울에 있다고 구라쳐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이 부분까지 언급하면 주변의 공기는 아주 무거워서 착 가라앉아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두려운데 피난민들이 떠밀려가던 다리를 국군이 폭파를 시켰다니! 수강생들, 특히 청년 수강생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떤 수강생은 너무 충격이었는지 필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정도였다. 너무 쳐다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한강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이런 피드백으로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경제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을 하며 칭송을 했지만 정작 한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 한강철교: 63빌딩 부근에서 바라본 모습.

●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었던 한강

 

혹시 산태극과 수태극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산태극과 수태극은 풍수리지에서 길지의 요건으로 꼽히는데 산줄기와 물줄기가 서로 어울려 태극 문양을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청계천이 서울의 내수구였다면, 한강은 서울의 외수구였다. 내사산이 산태극이라면 내수구∙외수구가 수태극이다.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를 한 건 그곳이 길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에도 당연히 산태극과 수태극이 있었다. 물론 한양으로 천도를 한 것이 풍수지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상교통로서의 한강의 가치가 매우 컸기 때문에 천도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산태극이었던 내사산이 많은 변화를 겪은 것처럼 수태극도 큰 변화를 겪게 됐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풍수지리가 희미해지고 대신 부동산 신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을 때 더욱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한강은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한강은 사람들과 멀어지게 됐다.

시간이 흘렀다. 변화도 있었다. 필자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강이 산책하고, 운동하는 그런 곳이어서 좋다. 한강이 친숙한 곳이어서 좋다. 옛 선인들처럼 풍류를 즐길 수는 없지만 많은 아픔을 겪고 다시 사람들 품으로 돌아온 한강이 참 좋다.

세상이 변한만큼 한강도 변했다. 수도 서울에 있는 강이니 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무엇이야? 한강과 서울사람들과의 관계다. 그 둘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한강이 있기에 서울이 있을 수 있다.

 

* 샛강생태공원

● 변화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람은 잘 안 변해!”

사람은 정말 안 변할까? 필자의 경우는 확실히 변했다. 여가활동 같은 가변적인 파트뿐만 아니라 생활습성이나 종교 영역 같은 본질적인 영역까지 변했다. 변화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럴 수도 있고, 직업상으로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의 변화에 순응해서 그럴 수도 있고.

혹자는 저 말 뜻이 사람의 근원적인 부분, 즉 성품 같은 것이라고 지칭한다. 가변적인 파트나 본질적인 파트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부분을 지칭하며, 그것이 안 변한다고 힘주어 이야기를 한다.

이런 의문이 든다. 그렇게 힘주어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작 자신의 근원적인 부분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솔직히 자기 자신의 성품에 대해서 딱 이렇다 하고,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안 변한다고, 스스로를 가둬놓을 필요가 없다. 반면 주위변화에 촉각을 세우며 계속해서 변신을 할 필요도 없다.

필자는 변화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고 싶다. 최소한 트레킹을 하며 사색을 할 때는 중심을 잡았던 거 같다. 또 트레킹에 대한 칭송으로 글을 마친다.

 

 

 

* 산태극수태극: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작성한 수선전도에다 산태극과 수태극을 임의적으로 그려보았다. 서울의 산태극은 C자 형식을 드러내는데 동쪽에 있는 낙산 부근이 지대가 낮아서이기 때문이다. 지대가 낮으니 당연히 청계천의 물길이 낙산이 있는 동대문 쪽으로 빠지는 것이다. 이와 달리 수태극은 c자가 거꾸로된 형상이다. 그래서 산태극과 수태극이 서로 맞물리는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산태극수태극을 두고 명당이라 하지 않겠오!^^; 참고로 수선전도에서 '수선'을 한양을 뜻한다. 옛날 한양의 다른 뜻으로 수선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다.

 


■ 한강 역사트레킹

 

1. 코스: 선유도공원 ▶ 양화대교 ▶ 샛강생태공원 ▶ 한강철교앞(63빌딩)

2. 이동거리: 약 9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지하철 2,9호선 당산역 4번 출구 / Out: 63빌딩 ☞ 63빌딩에서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을 이용하여 귀가할 수 있음.

 

 

* 한강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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