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장소에 울려퍼진 친일파 옹호론

 

 

높아진 목소리... 온라인 논쟁을 오프라인으로 옮겨온 듯

 

15.08.14 16:58   최종 업데이트 15.08.14 16:58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대형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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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친일을 하고 싶어서 한 거겠어. 상황이 그래서 그런 거지."
"그건 아니죠. 시대상황으로 돌리기에는 친일파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잖아요."
"상황을 이해해야지! 만약에 ○○씨가 일제시대에 살고 있어, 먹고 살아야 하잖아. 그럼 어떻게 하겠어? 일본놈들이랑 등 돌리고 살겠어? 그때 살았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 "
"선배님 말씀은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거의 다 친일파가 되야 한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그때 독립군은 뭐지요? 항일운동한 사람은 뭐가 되는 거죠?"

 


제가 집필실(?)로 이용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한 대학교의 휴게실이 바로 그곳입니다. 글 쓸 공간이 없어 도서관으로, 카페로 옮겨 다녀야 하는 글쟁이들보다는 제 처지가 훨씬 나을 겁니다. 와이파이도 빵빵 터지고, 에어컨도 시원한 공간에서 물건들을 '쫘악' 펼쳐놓고 글을 쓰니까요.  

하지만 휴게실은 휴게실입니다. 통닭 시켜 먹는 이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이들... 식사 시간이 되면 휴게실은 맛있는 음식 냄새로 채워집니다. 그러면 글이 잘 안 써집니다. 저도 배가 고프니까요. 그래도 후각을 혼란시키는 음식 냄새는 그나마 낫습니다. 문제는 역시 청각을 혼동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집필실'인, 어느 대학의 휴게실에서

 

 

이 대학은 오픈 대학교입니다. 그래서 학우들의 연령대가 아주 다양합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살부터 백발이 성성한 분들까지... 주축은 50~60대 학우들이 이루더군요. 그래서 대화의 내용도 일반 대학생들이 하는 말들과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일반 대학생들이 스펙과 취업 걱정으로 대화 내용을 채운다면, 이곳의 학우들은 자신의 아파트 값이 어떤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문제들을 입에 올립니다.

부동산이나 건강 문제들은 거의 비슷한 결론으로 달려가는 가더군요. 딱히 첨예하게 부딪힐 부분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하나라도 더 정보공유를 하려고 '코드'를 맞추더군요. 하지만 정치 문제가 나오면 양상은 달라집니다. 서로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서로 갈등을 빚고 얼굴을 붉히기까지 합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서 그런지 요즘에는 광복, 일제청산, 이승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들리더군요. 하여간 그렇게 첨예한 이야기들이 대화 테이블에 오르면 저도 본의 아니게 그 대화에 '참여'하게 됩니다. 휴게실이 지하에 위치해 있어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그 소리가 다 제 귀에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는 제 몸은 노트북 앞에 있지만 마음은 그 대화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동석'하기 싫은데 '동석'하게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글쓰기 작업은 잠시 중단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요즘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뭐라뭐라 안 좋게 이야기를 하지만, 난 이승만에 대해서 달리 봐야 한다고 봐. 그때 정부를 안 세웠으면 어떻게 되겠어. 한반도가 적화가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지."
"그럼 이승만 세력이 친일파 중용한 거랑 반민특위 해산한 거랑은 어떻게 보십니까?"

 

 

 

 

 

 


온라인 논쟁을 옮겨 놓은 것 같은 휴게실 논쟁

 
▲ 소녀상 위안부소녀상. 일본대사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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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두에 언급한 대화는 그렇게 계속 이어졌습니다. 총 네 분이서 이런 대화를 나누셨는데 나이가 많으신 분은 이승만과 친일파에 대해서 옹호를 하는 입장이었고, 상대적으로 젊은 분은 그에 대해서 반박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때는 나라가 새로 세워졌어. 당연히 인재가 필요하잖아. 그럼 누가 그 일을 하겠어? 일제시대에 일 좀 했다고 그 사람들을 안 쓸 수 있겠어."
"그게 바로 친일파들이 주로 주장하는 내용 아닙니까..."
"위쪽으로는 공산당이 꽈리를 틀고 있었고, 그래서 실제로 전쟁도 났잖아. 그런데 인재는 필요했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깐!"
"그게 바로 전형적인 그들의 주장이라니까요!"

 


이미 서로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주장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대화에 깊숙이 '참여'를 하게 됐습니다. 당장이라도 몸을 이끌고 그 테이블에 가서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은 친일 옹호론을 격파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친일 문제를 반박하는 분에게는 좀 더 내공을 쌓아 친일 옹호론을 꼼짝 못하게 하라고 조언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마음만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이 분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일제 잔재청산과 관련하여 온라인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댓글들이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휴게실에서의 대화들은 온라인에서 오가는 논쟁들을 오프라인으로 옮겨놓은 거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실제로 나이가 많았던 분의 논리는 인터넷에서 친일을 옹호하는 댓글의 내용과 거의 일치했으니까요. 대신 잘 아는 동아리 멤버들이었기에 서로 예의는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나중에는 2학기 수강신청에 대해서 서로 '코드'를 맞추더군요.

 

 


원죄론과 친일론

전 그 대화를 보면서, 친일을 옹호하는 측이 '우리안의 친일', 즉 '친일의 범위 확장'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생계형 친일과 악질 친일을 하나로 묶어버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생계를 꾸리던 모든 이들에게 '원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일제 잔재는 전부 아니면 전무 형식으로 프레임이 형성되겠지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신생 독립국에서 전무가 가능하겠습니까?

이렇듯 '친일 범위의 확장'은 악질 매국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이죠. 윤동주도 창씨개명을 했고, 북한도 정권 수립 초기에 친일파가 몇몇 요직에 기용됐다, 그러니  일왕에게 혈서를 쓰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되겠냐?, 하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휴게실에서 어깨너머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신다고 질책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이 드신 분이 큰 의중 없이 흘린 말에 과도한 해석을 한다고 타박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보고자 합니다. 친일매국노들의 뿌리가 깊은 만큼 자신들을 지키는 논리도 상당하다는 것을요. 그 논리가 타당한지 개연성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파급력이 중요한 것이겠죠. 그 파워가 중요한 것이겠죠. 대학교 휴게실이라는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친일매국행위를 옹호하는 논리들이 입에 오르고 있다면 그 파워는 상당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추신) 지난 12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습니다. 전직 총리라는 한계가 있지만 분명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씨는 일본 우익들이 좋아할 말들을 일본에서 쏟아내고 왔습니다.

 

두 사람의 행위를 보면 참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동생이 망동된 행동을 했는데도 사과 한 마디 없는 대통령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사태의 경중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어쨌든 15일은 광복절입니다. 이날만큼은 태극기를 가슴에 새겨보고, 경건하게 보내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역사에 가정법이 없다고? 그럼 역사에서 교훈을 찾자!

 

[리뷰] 영화 <암살>을 보고

 

15.07.28 14:10   최종 업데이트 15.07.28 14:11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한이 서려 있을수록 역사의 가정법은 더 왕성해진다


우리는 흔히들 말한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없다고. '한니발이 로마에 패배하지 않았다면',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축출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간절하게 이런 가정들을 한다 해도 해당 사건들을 다른 식으로 돌이킬 수는 없다.

역사에서 가정법을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해당 역사를 쟁취하지 못한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도 그럴 것이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을 격퇴한 로마군이 뭐가 아쉬워서 역사의 가정법을 사용하겠는가? 능양군(인조) 세력들도 무엇하러 광해군 걱정을 하겠는가?

이렇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역사의 가정법은 해당 역사에서 소외된 이들, 혹은 그들에게 공감하는 후세의 몫으로 남게 된다. 역사의 가정법은 정통 역사서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 분야에서 생명력을 얻게 된다. 해당 역사가 한이 서려 있으면 있을수록 가정법은 더욱더 왕성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영화 <암살>도 역사의 가정법을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한 가정법? 친일매국노 척결에 대한 가정이다. 실제로 <암살>이 그려낸 장면들은 사실이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1933년에 친일매국노 강인국(이경영 분)과 조선 주둔군 사령관 가와구치가 저격을 당하지 않는다. 사실 강인국과 가와구치라는 인물조차도 가공의 인물이다.

 

 


 
▲ 포스터 영화 암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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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필자는 스크린에서 보이는 내용이 명백히 허구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2시간 동안 팝콘도 먹지 않으며 열심히 집중할 수 있었다. 필자도 최동훈 감독이 제시하는 역사적 가정법에 크게 공감했다는 뜻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민족까지 팔아먹는 강인국은 탐욕적인 친일매국노의 캐릭터를 대변했다. 소설 <꺼삐딴 리>의 이인국 박사의 이름을 옮겨온 듯한 강인국은 자신의 이익과 배치된다면 서슴없이 가족들에게도 총질을 해대는 인물이었다.

이와 달리 염석진(이정재 분)은 김구 선생의 표현처럼 '어떨 때는 선비 같고, 어떨 때는 깡패 같은' 다층적인 면을 보인다. 극 중에서 염석진은 김구의 총애를 받으며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직위를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밀정이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강인국은 처음부터 매국노였고, 염석진은 독립운동을 하다 밀정이 된 변절 매국노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 변절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자신의 변절 행위를 지우기 위해 더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염석진은 암살 임무를 띠고 경성으로 떠난 안옥윤(전지현 분)과 속사포, 최덕삼 등을 제거하기 위해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을 고용한다. 안옥윤 팀은 염석진이 직접 소환했다. 염석진은 자신이 직접 '소환'한 암살팀을 죽이기 위해 킬러들까지도 몰래 '픽업'한 것이다.

 

 



 
▲ 백범 김구 남산에 있는 김구 선생 동상. 청소를 안 했는지 곳곳에 푸른색 곰팡이가 끼어 있었다. 지난 7월 19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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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법이 없다면, 역사에서 교훈을 찾자


<암살>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털어낸 후 본다고 해도 수작이 될 만했다. 이정재와 하정우의 불꽃 튀기는 연기 대결만으로도 영화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 더군다나 영감(오달수 분), 속사포(조진웅 분), 황덕삼(최덕문 분) 등의 감초 연기는 관객들을 쉴 새 없이 웃게 하였다.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 김구 선생과 김원봉(조승우 분) 선생이 서로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이 나온다. 약산 김원봉은 잔에 술을 채우며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김구와 김원봉, 두 거물에다 단재 신채호 선생까지 술자리에다 합석시키는 것이다. 물론 단재 선생은 1936년에 돌아가셨으니 그 세 분이 1945년도에 자리를 같이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억지로 단재 선생까지 소환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반민특위에 불려 나온 염석진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오히려 역정을 낸다. 거기에 더해 안옥윤이 "왜 배신을 했느냐"고 묻자 이렇게까지 답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일본이 빨리 망할 줄은 몰랐으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그렇다. 소설가 이광수, 시인 서정주가 광복 이후에 실제로 내뱉은 궤변이다. 이렇게 궤변을 내뱉었어도 그들은 잘살았다. 그와 달리 독립운동가들은 찬밥 신세에다 모욕감까지 느껴야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김원봉이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시라. 실제로 김원봉은 그렇게 당했다. 독립군을 고문했던 악질 노덕술에게 해방 후 조국에서 수모를 겪었다.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역사서에는 가정법이 들어설 수 없다. 하지만 역사의 가정법은 예술의 영역에서 계속 생명력을 이어 나갈 것이다. 한편 그런 방식은 한풀이식의 자기 위안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가정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면 된다. 자리에 동석하신 신채호 선생의 명언에서 역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래야 친일매국노들이 염석진처럼 적반하장을 하지 않을 테니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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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이 '친일매국노'냐고요?

 

청년들의 역사 인식 수준 안타까워

 

15.06.16 11:23   최종 업데이트 15.06.16 17:22

 

곽동운(artpunk)

 

 

 

 

 

 

 

 

 
▲ 서시 윤동주 문학관 뒤편, 시인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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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이야 모두 다 아실 테죠. 유명한 서시도 잘 아실 거고요."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 인근에는 윤동주 문학관이 있고, 그 뒤편으로는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어 있다. 지난 5월말 필자는 그 언덕에서 역사트레킹 참가자들에게 윤동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보다는 국문학에 가깝기에 짧게 설명을 한 후 다음 코스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괜히 서시를 통째로 외워보라고 짓궂게 구는 참가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빨리 이동하는 게 상책이었다.

"서시만큼 유명한 참회록도 아시죠?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스스로에게 느낀 자괴감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라 합니다."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친 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참가자 한 분이 불현 듯 이런 말을 건넸다.

"창씨개명을 했다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시인 윤동주가 친일매국노?


잠깐 발걸음이 꼬였다. 윤동주 시인이 친일파라는 소리를 듣다니! 하늘에 있을 시인은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 또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의 역사 지식수준이 '꽝'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그간 역사트레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했다. 역사트레킹이 제주 올레를 정점으로 한 걷기열풍의 부산물, 혹은 편승물이라는 조롱과 질책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름대로 그 안에서 보람도 찾았고, 재미도 느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부터 트레킹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중간에 코스를 잊어버려 참가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고, 저질(?) 체력인 참가자들의 보폭을 고려하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해당 유적에 대한 설명이었다. 즉 필자의 역사 실력이었다. 트레킹의 참가자들이 주로 젊은층들이라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가 예상됐었다. 그래서 이런 걱정까지 하게 됐다.

"이거 내 역사 실력이 확 드러나는 거 아니야? 학교 다녔을 때도 역사 점수 안 나왔었는데..."

저런 자조의 말이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다. 실제로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술서적보다는 대중서적을 읽으며 역사에 대해서 지식을 쌓았다. 그렇다고 학벌이 좋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건 20년 가까이 종이신문을 꾸준히 읽은 것과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런 장점들까지 끌어들이고서야 겨우 참가자들 앞에 설 수 있었다. 한국사에서 바닥을 치면, 세계사로 넘어가고, 그것도 역부족이다 싶으면 국제정치로 도망치자(?)는 게 전략이었다. 어쨌든 초창기에는 실력이 '뽀록'날까봐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었다. 

하지만 두어 번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다 보니 역사 실력에 대한 고민은 싹 사라지게 됐다. 오히려 너무 느긋했다. 나중에는 말장난까지 하면서 참가자들을 농락(?)할 정도였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왜 일어난 것일까? 밑천이 드러날 걸 초조해하던 마스터가 참가자들을 농락하기까지 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런 극적인 변화는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의 역사 지식이 '꽝'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참가자들이 역사 지식에 무지하다면 그만큼 필자의 '구라'가 통할 여지가 크다는 뜻이 된다. 

- 조선총독부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모른다.
- 서대문형무소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 부대가 어디서 패배를 했는지 어디를 가고자 했는지 모른다.

필자를 당혹스럽게 했던 참가자들의 발언들을 모아봤다. '이 정도면 당연히 알겠지' 하는 필자 나름대로 그어놓은 상식선은 저런 발언들로 인해 여실히 깨지게 됐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거 사기 쳐도 되겠는데... 그래서 그런가. 권력자들은 똑똑하지 않은 국민들을 선호하는 건가?'

 

 

 


윤동주를 괴롭게 했던 창씨개명, 그리고 참회록

 
▲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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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윤동주 시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941년 겨울,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라는 창씨명을 얻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윤동주 개인의 의사가 아닌 창씨개명이었다는 점이다. 집안 자체에서 행해진 것이지 윤동주가 직접 행정기관에 찾아가 창씨개명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자괴감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당시는 중일전쟁이 이미 발발한 상태였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났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때였다. 식민지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져 식량이 배급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다고 한다. 그런 생존과 직결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 매국노'로 분류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반민특위에서도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황군을 화끈하게 격려하고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고 궤변을 늘어놓은 시인 서정주나 소설가 이광수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를 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년층의 역사 인식 미비도 큰 문제


함께 장시간을 걸으며 동고동락한 참가자들을 폄하하는 내용을 작성하는 터라 필자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하지만 젊은층의 역사 인식이 생각보다 미비하다는 점을 꼭 알리고 싶었다. 청소년층의 역사 인식이 심각하다, 그래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20~30대 청년층의 역사 인식도 만만치 않게 수준이 낮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부족한 역사인식을 무엇으로 채워줘야 할까? 역사, 교양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것이다. 역사교양 강의의 확대, 역사체험 학습의 다변화 등등... 적어 놓고 보니 뻔한 대답이다.

그런 뻔한 것들이 쌓이다보면 내공이 된다. 그 내공은 역사 인식이 빈약한 정치인들을 솎아낼 수 있는 거름체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다.'

이렇게 싸잡아 묶어버리는 언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놈' 중에서도 덜 나쁘고, 덜 때가 묻은 사람들을 솎아낼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럼 역사를 현실에서 써먹게 되는 셈이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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