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을 실시합니다. 인왕산 선바위역사트레킹은 정말 인기가 많았던 코스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 십 번에 걸쳐 이 코스를 리딩했답니다. 그때마다 다 호평을 받았었고요.  

 

그런데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카페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비공식적으로는 하기는 했었지요. 하긴 카페가 개설된 지 아직 1년도 안 됐으니, 그런 것들을 시시콜콜하게 따질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아참! 이번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10월 29일을 마지막으로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의 세부코스가 전면적으로 재조정 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독립문역에서 만나 이동을 하지만 다음부터는 경복궁역에서 만나 시작할 생각입니다. 


어떠세요?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에 오실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직 마음이 동하지 않으신 분들은 아래쪽의 사진들과 안내문을 꼼꼼히 읽어주세요. 그럼 분명 마음이 동하실 겁니다 ^^;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116  <- 클릭
















* 숭례문: 도미노 블럭을 옆으로 쌓은 듯 하다. 필자는 저 돌을 지우개처럼 생겼다 하여 지우개 돌이라고 불렀다. 벽돌을 쌓아 올린 면장은 여장보다는 높이가 낮아 성 밖을 보기에 용이하다. 2008년에 방화에 의해 불탄 숭례문은 2013년에 복원되어 시민의 품으로돌아왔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행하다보면, 흔히 성곽길을 따라 걷다 대문 혹은 소문으로 쏙 들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낙산 역사트레킹을 한다고 가정해 보죠. 트레킹팀은 낙산 성곽길을 유유자적 하게 걷다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 길로 쏙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성곽길을 걸을 때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 성체라 불리는 체성 구간과 문 구간의 차이점을. 체성 구간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보는 성곽 구간입니다. 우리는 그 옆에 난 순성로를 따라 성곽과 나란히 걷는 것이죠. 


문 구간은 앞서 언급한 혜화문이나 사진에 등장한 숭례문(남대문), 창의문을 말합니다. 

첫번째 숭례문 사진을 보십시오. 같은 돌로 쌓여져 있는 듯하지만 체성 구간의 돌 하고는 차이점이 있지요? 잘 보세요. 여러분들의 센스를 믿어요...ㅋ


숭례문과 창의문에 쌓여진 돌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대석들입니다. 얼핏보면 블럭들을 차곡차곡 쌓아둔 것처럼 보일 겁니다. 이 부분을 육축이라고 합니다. 그 육축 위에 벽돌로 올려진 부분은 면장이라고 불리지요. 체성 구간의 여장이 문 구간에서는 면장이 됐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면장은 여장보다는 키가 낮아서 안에서 밖을 관망할 수 있다는 점이 있지요. 아무래도 문루에서는 장수들이 지휘를 하다보니 밖이 보여야 하잖아요. 여장처럼 키가 크다면 밖이 안 보일테고, 그러다보면 적군이 왔는지 산타클로스가 왔는지 모를테니까요...ㅋ


하지만 체성 구간의 돌들은 육축 구간의 돌들처럼 잘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시기마다 다르잖아요. 태조 시기의 돌, 세종시기의 돌, 숙종시기의 돌, 영정조 이후 시기의 돌. 


그렇게 보면 문 구간에 있는 육축은 그냥 시기구분이 없어서 참 좋네요. 구분할 필요가 없어서 머리가 아프지 않아...ㅋ  


한양도성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다가 생각이 나서 올려봤습니다. 다음에 또 관련 이야기를 올려볼게요!









* 체성: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 창의문: 홍예문이 잘 드러나 있다. 면장이 여장보다 확실히 낮아 보인다. 










* 체성: 문 구간의 육축과는 돌이 다르다. 




























9월 24일 토요일.


제게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예전에 포스팅에서도 언급을 했듯이...


이 날은 제가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트레킹 강의를 첫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한겨레 문화센터면 왠만한 백화점 문화센터보다도 더 인지도가 있지 않습니까!


날씨도 좋더군요. 수강생들도 많이 오셨고. 저를 포함해서 총 19명이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시간에 맞춰 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광화문을 지날 때, '아차'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가을날의 광화문은 축제의 연속입니다. 그 축제의 장으로 트레킹팀이 들어갔던 것입니다.


소음과 번잡함 속으로 들어갔으니 정신이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제가 좀 말려버렸습니다. 9월의 광화문에 대해서 미리 판단을 했어야 했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니 참가자분들도 제가 좀 미더웠을 겁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상황은 좀 나아지는 것 같더군요. 일단 길이 예쁘고, 한적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트레킹의 묘미는 한적함입니다. 한들한들 거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야 참가자들도 저도 숨통이 트이니까요.


첫 트레킹은 그저그렇게 끝났지만 다음부터는 더 잘해보고 싶네요. 수강생들의 열화가 같은 박수를 받는


그런 강사가 되고 싶습니다.


추신: 한겨레문화센터 강의에 너무 신경을 곤두 세웠나 봐요. 그날 트레킹 끝나고 그냥 뻗어버렸답니다.~ 

트레킹 한 두 번 한 것도 아닌데 신경을 많이 썼나 봅니다. 잘해보려고 하는 욕심도 컸고요.  











 



 



 








 * 낙성대: 비가 오는 낙성대에서. 역사트레킹에 후원해주신 제주도님. 16일에 행한 관악산 역사트레킹 때는 비가 많이 내렸다.







 * 낙성대: 우비를 입고 있는 나.











* 수성동 계곡: 17일에 행한 서울시티 리워드 역사트레킹에 참가한 후원자분들. 17일에는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아니 트레킹 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 역사트레킹 펀딩: 역사트레킹 펀딩이 다음카카오에서 108일간 진행되었다. 여기에 언급된 관악산과 인왕산 트레킹은 그 펀딩에 대한 리워드 차원으로 행해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주말을 매우 의미있게 보냈답니다. 저를 후원해주신 분들과 트레킹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위에 사진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저는 다음카카오에서 역사트레킹 펀딩을 진행했습니다. 목표 금액을 달성하지 못해 아쉽기는 했지만.... -_-ㅋ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펀딩이었습니다.


지난 7월 8일에 펀딩이 종료됐고, 저는 리워드를 후원자분들에게 드려야했습니다. 다른 펀딩을 보면 도서, 엽서, 머그컵 같은 것들을 많이  제공합니다. 하지만 저는 역사트레킹 모임에 후원자분들을 초대했습니다. 트레킹과 관련된 후원을 받았다면 그에 맞게 트레킹을 답례로 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답례로 드릴 책이나 엽서 같은 것들도 없고요.


그러다보니 역사트레킹 펀딩은 다른 펀딩과 달리 창작자와 후원자가 직접 대면을 하게 되더군요. 물론 다른 펀딩들도 후원자들을 티타임 같은 것에 초대를 하여 대면을 합니다. 하지만 단발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요. 사진에도 나와있듯이 저는 벌써 두 번이나 후원자분들과 직접 대면을 했습니다. 또한 앞으로 두 번 정도 또 대면을 해야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후원자분 들과 직접, 또한 자주 만날 수 있는게 역사트레킹 펀딩의 장점인 듯싶습니다.










* 광화문: 서울시티트레킹에 참가한 후원자 분들.










여기서 해당 리워드 트레킹을 좀 설명하자면...


7월 16일 토요일에 행한 관악산 역사트레킹은 수중전이었습니다. 전날부터 비가 오더니, 결국 트레킹 때까지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더군요. 그래서인지 참가자가 단 한 분 뿐이었습니다. 제주도님이라고... 그래도 할 건 해야지요. 제주도님과 저는 열심히 트레킹을 했답니다.


수중전이었지만 나름대로 재미난 트레킹이었습니다.


7월 17일 일요일에 행한 서울 시티트레킹 때는 총 4분이 참석을 해주셨습니다. 그날은 트레킹 하기에 날씨도 좋았습니다. 흐려서 그랬는지 덥지가 않았거든요. 참가자분 중에는 멀리 충청도 서천에서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었죠.


관악산도, 서울 시티트레킹도 모두 다 잘 마무리했답니다. 모두 다 완주를 해주셨거든요. 특히 서울시티트레킹이 끝난 후에는 식사 자리도 했답니다. 물론 막걸리도 등장을 했지요.~ ㅋ


그런데... 그 식사비를 누가 지불한지 아십니까? 원래는 제가 내려고 했습니다. 후원을 받았으니 제가 식사라도 대접을 해드려야 맞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내지 않았습니다. 후원자분들이 결제를 하셨답니다. 정말 감사하더군요.


저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가요?


이렇게 대접을 받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그래서 역사트레킹 펀딩을 한 번 더 해볼까 합니다. 아주 저렴하게 리워드 트레킹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설계를 해보려고요. 또한 리워드 트레킹의 횟수를 전보다 더 많이 잡아보려고요. 그럼 대면의 폭도 넓어지잖아요.


왜 그러냐? 여러분들이 역사트레킹을 더 많이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저는 지난 주말에 정말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래서 더 열심히 제 직분에 충실하려고요. 더 열심히 역사트레킹을 해보려고요!!!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앗! 곽작가도 나왔네^^; 왼쪽에서 두 번째에 서 있는 곽작가.










* 성곽길: 창의문을 향해 걷고 있는 후원자 분.



















*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참가자 분들.






 

​   * 전단: 역사트레킹을 알리는 렛츠런문화공감센터의 전단 










7월 12일 화요일.


일기예보에는 분명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진다고 했지만... 날씨가 화창했습니다. 기상청 예보대로 움직였으면 그날 트레킹을 못할 뻔했지요.


이날 저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했습니다. 제가 7월 달부터 렛츠런문화공감센터에서 역사트레킹을 런칭했는데 이날이 첫 시작일이었습니다.  사실은 일주일 전인 5일 날이 첫 개강일이었지만 그날 호우경보가 내려서 한 주 연기가  것이지요. 


어렵게 시작한 만큼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제가 문화센터 강의는 처음이라 긴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는 역사트레킹을 많이 리딩을 했지만요...


좀 덥기는 했지만 그래도 트레킹 하는데 양호한 날씨였습니다. 또한 인왕산 트레킹의 특징이 전반부만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숲길로 갑니다. 그래서 초반 30분 정도만 버티면 때양볕 걱정은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죠.


이날 참가를 해주신 분들은 트레킹에 대한 이해도가 무척 높으셨습니다. 제가 바짝 긴장을 할 만큼...^^;


트레킹에 적극적으로 임해주셔서 제가 다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부족한 저의 설명도 경청을 해주셔서 감사했고요. 그래서인지 한 분의 낙오자도 없이 모든 분들이 다 완주를 해주셨습니다.


또한 얼마나 저를 잘 챙겨주시는지... 먹을 것도 엄청 얻고 먹었습니다. 또 어떤 분께서는 제게 모자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날 제가 모자를 쓰고 가지 않았거든요. 제가 챙겨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제가 넉넉한 인심을 누리고 온 것이죠.


보람찬 하루였습니다. 이 맛에 트레킹 리딩을 하는 거겠죠! 카아~!



이 포스팅은 간략한 스케치입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정식 포스팅이 궁금하신다면


 

클릭 ☞ http://blog.naver.com/kwakmaster/220736534015


 









* 성곽길: 곡선미가 넘치는 서울성곽






* 수성동 계곡: 수성동 계곡에서. 뒤로 인왕산이 보인다.





​*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 뒤쪽에 있는 시인의 언덕에서.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펀딩비 미리 당겨썼습니다!

- 청소년들과 함께한 인왕산역사트레킹

 

 

제게 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홍은동 공부방이라는 곳의 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검색을 통해 우연히 역사트레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아이들이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할 수 있는지 문의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트레킹을 통해 지역체험활동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왕산이 홍은동의 동네 뒷산이라서 그랬던 것이죠.

 

 



 

청소년들과 함께한 역사트레킹

 

사실 역사트레킹은 성인 대상 프로그램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껏 계속 성인들만 참가신청을 해왔기에 그렇게 굳어져버린 것이죠. 그러다보니 저도 성인들 기준으로 코스를 짜게 됐습니다. 또한 성인들의 입맛(?)에 맞는 해설을 준비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성인들 대상으로만 프로그램을 진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역사트레킹을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청소년들이 더 많이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거운 책가방만큼이나 학습에 짓눌린 그들이기에... 그렇게 해서 지난 528, 청소년들과 함께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나서게 됐습니다.


한편, 인왕산역사트레킹은 지난 1화에 언급이 됐습니다. 그럼 이번화는 재탕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때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에피소드 위주로 내용을 서술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번화에서는 코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또한 코스의 시작점도 변경됐습니다. 예전에는 광화문에서부터 시작을 했지만 변경된 코스에서는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번화가 재탕인지 아닌지 끝까지 읽어 봐주세요. 더군다나 펀딩비를 미리 땡겨쓴만큼 후원자분들은 냉철한 시선으로 이번화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광통교





 

 

광통교(廣通橋)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입니다. 대광통교, 광충교, 광교라고도 불리는 광통교는 원래 태조 때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습니다. 그러다 태종10(1410), 홍수로 인해 다리가 떠내려 가 다시 돌다리(石橋)로 만들게 됩니다. 이때 다리에 쓰였던 석재들은 정릉(貞陵)에 있던 석물들이었습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무덤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왕후의 무덤에 있던 돌들이 다리의 재료로 쓰일 수 있냐는 의문 말입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습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습니다. 그래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이 1392820일에 세자로 책봉됩니다. 그해 7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지요.


쟁쟁한 형들을 물리치고 이방석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신덕왕후가 개국 후 첫 번째 왕후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한 씨였습니다. 한 씨는 이성계가 즉위하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신의왕후는 방과(정종), 방원(태종), 방간(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킴) 6명의 남자 형제들을 낳았습니다

   



* 광통교. 거꾸로 세워진 신장석.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태조5)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강 씨를 무척 아꼈던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에 묘소를 만드니, 그것이 바로 정릉이었습니다. 이후 13988,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때 세자였던 방석이 죽고 맙니다. 이를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부릅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9(태종9),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정릉을 현 위치인 성북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石刻神將) 등을 광통교 건설에 이용하게 합니다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뒤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왕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인 만큼 그걸 제대로 쌓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신장석들을 뒤집어 놓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장석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습니다. 신덕왕후를 철저히 조롱한 것이죠.


이 광통교는 길이(12미터)보다 폭(14미터)이 더 넓습니다. 그래서 광통교라고 부르나 봐요. 그렇게 넓은 다리인 만큼 거기에 담긴 스토리텔링도 풍부하네요.”

 

트레킹 팀은 풍부한 역사를 담고 있는 광통교를 직접 건넜습니다. 다리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면서.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트레킹 팀은 광화문을 지나 사직단으로 향했습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입니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입니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섭니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습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이라고 부릅니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죠.


조선의 근간 중에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쳤습니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입니다.






* 사직단: 사직단 제단 바로 옆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청소년 트레킹 팀.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됩니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습니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합니다



트레킹 팀은 율을 넘어 사직단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물론 허락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죠. 소중한 문화유산을 앞에 두고 기념촬영을 할 수 있어서 은근히 기분이 좋더군요. 학생들의 표정도 밝아보였습니다. 이런 맛에 역사트레킹 하는 거겠죠!

 






* 사직단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입니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입니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더군요.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입니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죠.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입니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입니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습니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수성동 계곡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습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입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습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됩니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됩니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입니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청소년 트레킹 팀.





 

 

펀딩비를 미리 당겨쓰다!

 

트레킹 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습니다.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습니다만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닭이었습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한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넘었더군요. 그냥 그렇게 헤어지기는 아쉬웠습니다. 배도 고프고.


그래서 제가 점심을 쏘기로 했습니다. 제 사비를 쓸까 하다가 스토리펀딩비를 당겨 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유익하게 역사트레킹을 하려고 펀딩을 받고 있는 거잖아요. 그 목적에 맞게 지출이 됐다면 후원금을 미리 당겨쓴다고 해도 후원자분들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광통교 사직단 단군성전 수성동계곡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 인왕산 서울성곽에서 본 남산




돈 안 되는 거 뭐하러 하세요?


길 위의 인문학_ 인왕산 역사트레킹

 


 

윤동주 시인이야 굳이 제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겠죠. 유명한 서시도 잘 아실 거고요. 국어 시간에 배웠잖아요...”

 

햇살이 따사했던 어느 봄날. 당시 저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고 있었습니다. 역사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지나 창의문 인근에 있는 시인의 언덕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시인의 언덕은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는데 그 곳에 올라서면 서촌과 광화문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그만큼 전망이 좋은 곳이죠.


영화 <동주>에서도 보듯, 윤동주 시인은 너무나 유명한 국민시인입니다. 굳이 입 아프게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저 수준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도 <참회록>까지는 설명을 해야 할 거 같아서 첨언을 했습니다.

 

참회록도 아시죠? 그것도 배웠잖아요. 그래도 모르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스스로에게 느낀 자괴감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죠.”

 

됐다 싶어서, 저는 창의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참가자 한 분이 제게 불쑥 이런 말을 던지는 겁니다

 

창씨개명을 했으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잠시 저는 숨이 하고 막혔습니다. 발걸음도 잠깐 꼬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친일파소리를 듣다니!


하지만 이내 숨을 가다듬은 후에 그 참가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진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일부러 윤동주 시인을 깎아내리려고 그런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 인왕산역사트레킹: 인왕산 성곽구간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돈 안 되는 역사트레킹

 

저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트레킹은 말 그대로 도보여행을 통해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입니다. 마스터는 필드에서는 대장 역할을 하고, 역사유적 앞에서는 문화해설사로 변신을 해야 합니다.


참가자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화장실이나 주차시설을 찍어주는 것도 마스터의 책무이지요. 부상 방지를 위하여 스트레칭을 행하는 것도 꼭 챙겨야 할 임무중에 하나입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답사지를 소개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간 역사트레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그들과 함께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해왔습니다. 그렇게 만난 이들은 대체로 찬사와 격려를 보내줬습니다. 하지만 날카로운 지적도 꽤있었습니다. 역사트레킹이 걷기열풍에 편승한 단순한 파생물이라는 이야기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또한 이미 많은 이들이 답사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굳이 역사트레킹이라는 명칭을 써가며 차별화 하는 것이 좀 억지 같다는 이야기도 간간이 들리더군요. 그런 쓴소리들은 그냥 그렇게 흘려 넘겼습니다. 이미 예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애정 어린 쓴소리는 항상 저를 머뭇거리게 했습니다.

 

돈도 안 되는 거 뭐하러 하세요? 참가한 저희야 좋지만...”

 

그렇습니다. 역사트레킹은 돈이 안 됩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 사비를 턴 적도 꽤 있었죠. 그럼 저는 왜 돈도 안 되는 역사트레킹을 해왔을까요? 재밌으니까요! 역사 공부도 하고 트레킹도 하면 몸도 머리도 상쾌해지니까요!

 






* 윤동주 문학관: 시인의 언덕





 


 

마스터는 멍석을 깔아주는 사람

 

참가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참가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멍석을 깔아준다는 표현을 합니다. 저 혼자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 각 개인이 스스로 보고 느끼게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죠.


멍석이 잘 깔리면 참가자들은 스스로 그 멍석 위로 올라오더군요. 그러다보면 얼음처럼 굳어 있던 참가자들의 입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한들거리는 봄꽃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맛집이야기로 군침을 흘리기도 하더군요. 그렇게 즉흥적인 반응들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품격(?)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옵니다.


정약용 트레킹에서는 다산 선생의 실학 정신과 조선 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공주 우금티 트레킹에서는 우금티 전투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제가 굳이 아이스브레이킹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어색함을 깨버리고, 나중에는 해당 주제에 맞혀 토론까지 즐기더군요.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전 흐뭇했습니다. 요즘같이 파편화된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지식을 나누며, 함께 도보여행을 즐긴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닙니까? 헬조선이니, N포세대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는 요즘인데.

 

 

 




* 윤동주문학관: 서시





 


윤동주가 친일매국노?

 

다시 윤동주 이야기로 돌아와서.

1941년 겨울,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라는 창씨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윤동주 개인의 의사가 아닌 창씨개명이었다는 점이죠. 집안 전체에서 행해진 것이지 윤동주가 직접 행정기관에 찾아가 창씨개명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까지도 참회를 했던, ‘참회록을 썼던 윤동주였습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고뇌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한편 당시는 중일전쟁이 이미 발발했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때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져 식량이 배급되기에 이릅니다. 이때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다고 합니다. 그런 생존과 직결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 매국노로 분류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입니다. 실제로 반민특위에서도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황군을 화끈하게 격려하고 찬양한 시인 서정주나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소설가 이광수하고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가 진짜 친일매국노였다면 교도소에서 옥사했겠습니까? 윤동주도 나름대로 지식인 아니었습니까? 그가 진짜 친일매국노였다면 그의 재능을 팔아 일제와 잘 붙어먹었겠지요. 그래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서정주나 이광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대편에 섰고, 결국에는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이런 윤동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그 참가자에게 해주었습니다. 버벅대면서 이야기를 했는데도 내용은 전달됐는지 그 분은 고개를 끄덕거리더군요. 어쨌든 그 분이나 저나 함께 호흡을 맞춘 것입니다.

 






 * 성곽에 핀 풀과 꽃: 인왕산 성곽 구간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요즘도 인문학은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꺾일 만도 한데 그 위력은 계속 되더군요. ‘먹방처럼요. 아무리 사회가 각박하다고 해도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려주는 분야는 계속 건재하나 봅니다. 근원적인 지적 욕구! 근원적인 식욕

 

역사트레킹의 부제는 길 위의 인문학입니다. 트레킹을 하면서, 인문학을 느껴보자는 뜻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역사가 균형추를 잡고 있습니다. 그 균형추 옆에 다른 영역도 배치를 해두었죠. 세계사, 신화, 종교, 국제정치, 육식 문제까지... 역사만 하면 재미없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들... 트레킹을 하면서 참가자들과 함께 그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스토리펀딩에서도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취지에 맞춰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재밌죠!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인왕산 입구 수성동계곡 인왕산(서울성곽) 윤동주 기념공원창의문

2. 이동거리: 6km

3. 예상시간: 3시간 정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 OUT - 부암동 부암동(윤동주 기념공원 옆 정류장)에서 버스에 탑승한 후 다시 경복궁역으로 돌아올 수 있음.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창의문과 능금마을

 

 

15.07.12 15:45    최종 업데이트 15.07.12 15:45

 

 

 

 

 

 

 

 

 

 

 
▲ 사과 능금은 아니다. 홍로라는 종이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했다. 2012년 경남 거창에서 촬형한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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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밖인 백사실 계곡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뒤편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필자와 함께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행한 참가자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가을만 되면 경림금 때문에 창의문이 들썩들썩!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능금마을 백사실 계곡 입구에서 촬영한 사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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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


1396년(태조5)에 세워진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의 하나로 경복궁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 고개에 서 있다. 서울 성곽길을 걷다보면 두 산을 거느리고 있는 창의문의 지형적 존재감을 더 명확하게 감상(?)할 수 있는데 인왕산을 타고 내려온 서울성곽이 북악산으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었던 숙정문이 근방에 있었음에도 소문(小門)이었던 창의문이 북문의 역할을 해야 했다. 숙정문을 이용하려면 북악산의 급격한 경사를 타고 가야 했기에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1413년(태종14)에 풍수가 최양선의 건의로 문이 닫히게 됐는데 숙정문이 오른쪽 어깨의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어깨로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능금마을 서울 종로구 부암동 부근에 위치해 있다. 북악산 뒤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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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과 인조반정


오른쪽 어깨가 있으면 왼쪽 어깨도 있을 것이다. 그 왼쪽 어깨 역할을 창의문이 했다하여 1413년에 창의문도 함께 폐쇄가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렇게 하여 도성에서 북쪽 지역인 개성이나 양주로 가는 길이 오랫동안 불편을 겪게 된다. 창의문은 폐쇄된 지 거의 100년이 흐른 후인 1506(중종1년)에 와서야 다시 열린다.

문이 열리니 길도 열리게 됐고, 그로 인해 역사적인 발자국도 하나씩 하나씩 생기게 됐다. 인조반정도 그런 역사적인 발걸음 중에 하나다. 1623년 3월 13일,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퇴위된다.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매운 음식을 먹은 듯,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알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창의문 사소문 중에 하나인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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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창의문 능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창의문은 사대사소(四大四小)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연혁을 가진 문으로 등극(?)하게 된다. 지금의 문루는 영조 17년에(1740) 세워졌지만 1396년에 세워진 '동기동창'인 나머지 사대사소문들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철거되거나 그 원형이 훼손됐기에 창의문이 '최고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화재 전까지 숭례문이 그 '최고참' 자리에 있었다.

그 많던 부암동 일대의 사과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가을이면 경림금을 사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온 그 많던 상인들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능금나무가 심어져 있던 부암동에는 카페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상인들을 대신해서는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렇듯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역사적인 해석도 변한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군이 '의군'인지 아닌지, 광해군이 폭군인지 아닌지... 그런 역사적인 해석이 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변하지 말고 계속 그대로 존속해 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문화재들이다. 문화재들이 있어야 역사탐방을 하든 역사트레킹을 하든 할 테니까. 어찌됐든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47년 만에 창의문 옛길이 복원된다는 소식이 정말 반갑다. 180미터 복원이라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 원형을 찾아가는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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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창의문 천장에 '닭' 그려넣은 이유, 오호라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②]

 

15.06.09 20:06    최종 업데이트 15.06.09 20:06

 

 

 

 

 

 

 

 

 

▲ 수성동계곡 사진 왼쪽 부분에 돌다리가 보인다. 기린교다. 뒤에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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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①]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다. 열을 갖춰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 사이로 암반이 드러난 인왕산을 바라보다보면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수성동을 두고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에는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의 중심으로 발달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년 7월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수성동에 '동(洞)'자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행정구역명을 뜻하는 게 아니다. 골짜기를 뜻한다. 백사실계곡으로 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도 같은 한자어를 쓰고 있다. 수성동계곡이든 백사실계곡이든 참으로 소중한 존재다. 시내중심가와 멀지 않은 곳에 그렇게 청량감을 주는 계곡이 있다는 게 그저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 수성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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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동계곡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


수성동계곡을 벗어난 트레킹팀은 윤동주 문학관을 향해 갔다. 2012년 7월에 개관한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친필 원고와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문학관은 수도가압장과 물탱크 시설을 개조하여 만든 전시관이다. 그런 탓인지 전시관에는 옛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위쪽으로는 시인의 언덕이라는 작은 공원도 마련되어 있다.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이 상당히 낭만적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문학관에 가기 전에 누상동에 있는 윤동주의 하숙방을 먼저 탐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누상동 하숙방은 수성동계곡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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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년(중종 1년)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인,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이다.

 



 
▲ 창의문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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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의 천장벽화는 닭


트레킹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다. 광화문이든 창의문이든 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보면서 관찰해보자. 각 문마다 그려진 수호동물이 다르다. 막간을 이용한 퀴즈시간.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딱 봐도 용은 아니고."
"봉황 아니에요? 좀 모습이 우습긴 한데..."
"맞아요. 봉황 같은데요."


거의 다 '봉황'으로 답으로 말했다. 하지만 틀린 답이다. '닭'이다. 특이하게도 창의문의 천장화에는 닭이 그려져 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른다고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만든 것과 같은 이치다.

"설명을 들으니까 치킨이 생각나요. 저기가 부암동 아닌가요? 저쪽에 유명한 통닭집이 있다고 하던데요."

부암동을 잘 아는 참가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몰려왔다. 통닭 냄새였다. 마늘통닭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창의문 밖 치킨집에서 풍겨오는 치킨 냄새에 트레킹팀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모두 다 군침을 흘렸다.

 
▲ 창의문 천장화. 닭이 그려져 있다. 봉황이 아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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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익하고, 또한 맛집 탐방도 할 수 있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됐다. 글을 마치기 전에 1편에 언급된 사직단으로 돌아가 보자.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 조선의 왕들은 직접 제단에 나가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자신의 부덕함을 하늘에 고하면서 제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메르스 사태라는 중차대한 일을 직면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어떤가? 사태가 일어난 지 12일이 지난 후에야 '초기 대응이 잘못됐다'고 짧은 멘트를 남겼을 뿐이다. 이후 발표에서는 발병 환자의 수도 틀리게 언급을 했다. 또한 주말(6월 6~7일)에는 특별한 외부활동 없이 조용히 보내셨다고 한다.

지금이 그렇게 한가할 때인가? 시급을 다투며 행정력을 총결집해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 일인가? 차라리 화끈하게 사직단에서 제사라도 올려주셨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해서. 너무 답답해서 하는 말이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한다. 오죽 답답하면 여행기사를 이런 식으로 끝을 맺겠는가!   

 
▲ 창의문 창의문 문루는 개방되어 있다. 문루를 탐방중인 트레킹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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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 광화문→사직단→단군성전→수성동계곡→윤동주문학관→창의문
2. 약 5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하차. / 종료점: 종로구 부암동. 경복궁역행 버스 탑승 가능함.
4. 5월 25일에 트레킹을 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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