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짱이었던, 북악산 역사트레킹!

호감도 높았던 북악산 역사트레킹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라는 속담처럼, 제게 역사트레킹 코스 하나하나는 모두 다 보배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달랐습니다. 유난스럽게 참가자들이 환영하는 코스가 몇몇 있었습니다. 그런 코스들은 아름다운 풍광과 풍부한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화에 소개할 북악산 역사트레킹도 참가자들이 크게 선호했던 코스 중에 하나입니다. 모객을 하기가 무섭게 매번 조기마감이 됐으니까요. , 그럼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하러 떠나볼까요? 진짜 인기 있는 코스가 맞는지 확인해 볼까요?

 


 



* 탕춘대성 성벽.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상명대 옆쪽에 자리잡은 홍지문(弘智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서울에는 큰 성곽이 두 개가 있습니다. 일명 서울성곽이라고 불리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바로 그것이지요. 서울성곽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동쪽의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을 둘러쌓아 축조한 것입니다. 이 네 개의 산은 내사산이라고 불립니다. 안쪽에 있는 네 개의 산이란 뜻이죠.


서울성곽이 도읍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다면,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손꼽히는 요충지였습니다.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요. 고려시대에도 여러 차례 북한산에 있는 산성을 수리·축조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북한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어 거점이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시기에 축조된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룬 조선은 국방력 강화와 도성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1704(숙종 30)부터 1710년까지 도성 성곽을 재정비했습니다.





* 홍지문





또한 다음해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조하기에 이릅니다. 8km 달하는 북한산성은 기공에서 완공까지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규모에 비해 무척 빨리 축조된 것인데 청나라가 간섭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공사를 서둘렀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의 축조와 수축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서울성곽은 내사산을 둘러 만든 성입니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있는 성이고요. 그래서 두 성곽 사이에는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두 성곽 사이가 좀 붕 떠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간극을 메울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축조된 것이 바로 바로 탕춘대성(湯春臺城)입니다. 성이 세워진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湯春臺)가 있어서 그렇게 명명된 것입니다.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성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약 5km에 걸쳐 연결한 탕춘대성도 1719, 조선 숙종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인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성벽은 홍제천(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북한산 쪽으로 숨 가쁘게 비탈을 타고 올라갑니다. 그러다 북한산 서남쪽 비봉 인근에서 북한산성과 합류합니다. 북한산 비봉은 유명한 진흥왕 순수비(555년 건립)가 있던 곳입니다.

 

 





* 홍지문. 성벽이 잘려나간 홍지문.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입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중에도 그렇게 오해를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아닙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입니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입니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가지고 있습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입니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입니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습니다. 1921년에 있은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갔던 것입니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습니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만에 복원을 한 것이지요.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 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 세검정. 옆으로 사천이 흐르고 있다.






 

이항복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 계곡

 

다음 탐방지는 백사실 계곡입니다.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이전까지 들리는 소음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길이 탐방객들을 반겨줍니다. 백사실 계곡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도롱뇽 서식지가 있는 곳입니다. 그만큼 수질이 맑다는 뜻이겠죠. 그렇게 청정함을 자랑(?)해서 그런지 멧돼지도 가끔 출몰하는 것 같습니다.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인상적이더군요.


사실 백사실 계곡은 실개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유량이 적다는 겁니다. 저는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계곡다운 면모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백사실 계곡을 방문하고 실망한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대성동이나 천불동 계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게는 분명 아쉬운 대목이겠지요





* 북악산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백사실계곡 숲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백사실 계곡은 숨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울창한 숲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울 종로에 이렇게 걷기 편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랍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벤치도 여러 개 갖춰져 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입니다. 숲길 한편에 자리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습니다. ‘백석백악을 뜻합니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 백석동천: 별서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석동천이라는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산 산책로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9월에 완공됐습니다. 이 도로는 그해 121일에 있었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습니다. 서울방어목적으로 개통됐던 것입니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습니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사산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까지도 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악산 팔각정입니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입니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위치를 이동을 하여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겁니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죠.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60~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습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한편 북악산 산책로는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과는 좀 다릅니다.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이 동서로 이어졌다면 산책로는 남북으로 연결됩니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습니다.

 


 



* 북악산 역사트레킹팀. 북악산 팔각정에서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는 트레킹팀. 백사실 사진에 등장한 팀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만해 한용훈이 싫어한 돌집은 사라졌지만...

 

마지막 탐방지는 성북동입니다.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이 트레킹의 종료점입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심우장은 남향으로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남향으로 하면 돌집을 봐야하기에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것입니다. 돌집은 조선총독부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집짓기의 기본까지 어겨가며 그렇게 하셨을까요?


만해선생이 그렇게 보기 싫어했던 돌집’, 그 조선총독부는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뿌려놓았던 식민 잔재들까지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요?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만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요?

 

심우장 탐방을 끝으로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보셨습니까? 매번 조기마감이 된 이유가 이해가 되셨는지요? 이해가 안 되셨다면 이번 주말에 당장 배낭을 꾸려서 떠나보세요. 직접 걸으면서 판단해주시길!

 




 

* 뮤지컬 심우. 심우장에서 뮤지컬 심우를 야외극 형식으로 공연하고 있었다. 2014년 가을경에 촬영한 사진임.






 

북악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홍지문 세검정 백사실계곡 북악산팔각정 북악산산책로 심우장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펀딩비 미리 당겨썼습니다!

- 청소년들과 함께한 인왕산역사트레킹

 

 

제게 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홍은동 공부방이라는 곳의 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검색을 통해 우연히 역사트레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아이들이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할 수 있는지 문의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트레킹을 통해 지역체험활동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왕산이 홍은동의 동네 뒷산이라서 그랬던 것이죠.

 

 



 

청소년들과 함께한 역사트레킹

 

사실 역사트레킹은 성인 대상 프로그램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껏 계속 성인들만 참가신청을 해왔기에 그렇게 굳어져버린 것이죠. 그러다보니 저도 성인들 기준으로 코스를 짜게 됐습니다. 또한 성인들의 입맛(?)에 맞는 해설을 준비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성인들 대상으로만 프로그램을 진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역사트레킹을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청소년들이 더 많이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거운 책가방만큼이나 학습에 짓눌린 그들이기에... 그렇게 해서 지난 528, 청소년들과 함께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나서게 됐습니다.


한편, 인왕산역사트레킹은 지난 1화에 언급이 됐습니다. 그럼 이번화는 재탕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때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에피소드 위주로 내용을 서술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번화에서는 코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또한 코스의 시작점도 변경됐습니다. 예전에는 광화문에서부터 시작을 했지만 변경된 코스에서는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번화가 재탕인지 아닌지 끝까지 읽어 봐주세요. 더군다나 펀딩비를 미리 땡겨쓴만큼 후원자분들은 냉철한 시선으로 이번화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광통교





 

 

광통교(廣通橋)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입니다. 대광통교, 광충교, 광교라고도 불리는 광통교는 원래 태조 때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습니다. 그러다 태종10(1410), 홍수로 인해 다리가 떠내려 가 다시 돌다리(石橋)로 만들게 됩니다. 이때 다리에 쓰였던 석재들은 정릉(貞陵)에 있던 석물들이었습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무덤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왕후의 무덤에 있던 돌들이 다리의 재료로 쓰일 수 있냐는 의문 말입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습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습니다. 그래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이 1392820일에 세자로 책봉됩니다. 그해 7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지요.


쟁쟁한 형들을 물리치고 이방석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신덕왕후가 개국 후 첫 번째 왕후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한 씨였습니다. 한 씨는 이성계가 즉위하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신의왕후는 방과(정종), 방원(태종), 방간(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킴) 6명의 남자 형제들을 낳았습니다

   



* 광통교. 거꾸로 세워진 신장석.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태조5)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강 씨를 무척 아꼈던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에 묘소를 만드니, 그것이 바로 정릉이었습니다. 이후 13988,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때 세자였던 방석이 죽고 맙니다. 이를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부릅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9(태종9),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정릉을 현 위치인 성북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石刻神將) 등을 광통교 건설에 이용하게 합니다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뒤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왕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인 만큼 그걸 제대로 쌓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신장석들을 뒤집어 놓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장석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습니다. 신덕왕후를 철저히 조롱한 것이죠.


이 광통교는 길이(12미터)보다 폭(14미터)이 더 넓습니다. 그래서 광통교라고 부르나 봐요. 그렇게 넓은 다리인 만큼 거기에 담긴 스토리텔링도 풍부하네요.”

 

트레킹 팀은 풍부한 역사를 담고 있는 광통교를 직접 건넜습니다. 다리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면서.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트레킹 팀은 광화문을 지나 사직단으로 향했습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입니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입니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섭니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습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이라고 부릅니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죠.


조선의 근간 중에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쳤습니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입니다.






* 사직단: 사직단 제단 바로 옆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청소년 트레킹 팀.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됩니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습니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합니다



트레킹 팀은 율을 넘어 사직단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물론 허락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죠. 소중한 문화유산을 앞에 두고 기념촬영을 할 수 있어서 은근히 기분이 좋더군요. 학생들의 표정도 밝아보였습니다. 이런 맛에 역사트레킹 하는 거겠죠!

 






* 사직단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입니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입니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더군요.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입니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죠.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입니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입니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습니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수성동 계곡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습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입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습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됩니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됩니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입니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청소년 트레킹 팀.





 

 

펀딩비를 미리 당겨쓰다!

 

트레킹 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습니다.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습니다만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닭이었습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한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넘었더군요. 그냥 그렇게 헤어지기는 아쉬웠습니다. 배도 고프고.


그래서 제가 점심을 쏘기로 했습니다. 제 사비를 쓸까 하다가 스토리펀딩비를 당겨 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유익하게 역사트레킹을 하려고 펀딩을 받고 있는 거잖아요. 그 목적에 맞게 지출이 됐다면 후원금을 미리 당겨쓴다고 해도 후원자분들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광통교 사직단 단군성전 수성동계곡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정조대왕이 만든 돌다리를 건너며

 

삼성산 역사트레킹

 

 

흥미로운 질문 두 가지를 던져볼게요. 서울 인근에 경주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진 사찰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또 그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한 돌다리가 있다면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분명 이런 물음에 흥미를 느끼실 것입니다.


불국사보다 더 오래됐다는 사찰은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라는 사찰이고,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된 다리는 만안교라는 석교(石橋)입니다. 이 두 문화재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여 이동할 수 있습니다. 또한 편리하게 수도권 전철을 타고 탐방을 할 수 있답니다. 이를 두고 저는 일명 삼성산 역사트레킹이라고 이름을 붙였답니다.

 





 

* 만안교.







 

화산 능행차와 만안교(萬安橋)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관악역 1번 출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번 출구에서 나와 안양역 방면으로 약 5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만안교를 만날 수 있답니다.


1795(정조19)에 축조된 만안교는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이장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주 참배에 나섰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화산 능행차가 된 것입니다.


처음 능행차는 도성에서 동작나루를 거쳐 남태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이후 시흥과 안양을 거치는 길로 변경됩니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지형적인 한계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다른 사정도 있었습니다. 과천 행차로에는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도 뒤주에 갇혀 죽게 되지요. 이것을 두고 임오화변(1762, 영조 38)이라고 부릅니다.


임오화변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상로는 사도세자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하기 위해 떠나는 능행차 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상로 형제의 묘소를 지나는 것이, 정조 입장에서는 당연히 유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1794년 이후부터는 능행차 노선이 시흥과 안양 방면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당시 왕의 행차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 등을 가설한 후, 행차가 끝난 뒤에는 철거 하는 방식이 반복됐습니다. 이에 정조는 그런 번거로움을 피하고, 인근 주민들이 평상시에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하천을 넘을 수 있게 튼튼한 돌다리(石橋)를 건설하라고 왕명을 내립니다.


석교의 축조에는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됐습니다. 큰 공사였지요. 하지만 건설 기간은 3개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왕명으로 지어진 돌다리는 길이가 31.2m, 넓이가 8m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됩니다.


왕의 뜻대로 인근 백성들도 안심하고 하천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돌다리가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다리를 두고 정조대왕은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로 만안교(萬安橋)라는 이름을 직접 작명하였습니다.

 

 





* 만안교. 만안교를 건너는 트레킹 팀.








 

백성들을 위해 튼튼한 돌다리를 축조한 정조대왕

 

 

한편 원래 만안교는 지금의 자리보다 남쪽으로 200m 지점인 삼성천 위에 축조됐습니다. 그러다 1980년 국도 확장 공사 시에 지금의 삼막천 위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 다리가 놓여 있는 안양시 만안구의 명칭은 만안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만안교는 무지개교라 불리는 홍예교입니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홍예교 중에서 가장 큰 다리로 모두 7개의 아치가 놓여 있습니다. 판석과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축조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불린답니다.


저는 처음 만안교를 탐방했을 때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4대문 밖, 그것도 한강 이남에 이렇게 정교하고 거대한 아치형 석교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 돌다리는 박물관에 갇혀 있는 죽은(?) 다리가 아니라 지금도 인근 주민들이 건너다니는 살아있는 생활다리였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진두지휘하는 화산 능행차를 볼 수 없고, 다리 주위로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정조대왕의 바람은 계속 이어지는 듯싶습니다. 인근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하는, 그런 애민 정신 말입니다.

예전 삼성산 역사트레킹을 했을 때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조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다리를 걷고 있습니다.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까지 튼튼한 돌다리를 넘고 있는 거죠. 그 이름대로 만년동안 계속 잘 넘어 다녔으면 좋겠네요.”

 

 





* 남근석. 삼막사 칠성각 부근에 위치해 있다. 은근히 인기가 좋다.







 

울창한 숲길, 삼막계곡

 

 

다음 코스는 삼막천을 따라 이동을 합니다. 삼막천은 삼성산에서 발원된 작은 하천으로 그 상류 위쪽에는 삼막사가 터를 잡고 있고, 그 하류에는 현재 만안교가 놓여 있습니다. 만안교를 지난 삼막천은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안양천과 합수됩니다.


예전, 삼성산 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는 5월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여름과 같이 더운 날씨였지요. 땀방울이 눈앞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봄소풍 같은 역사트레킹을 기대했지만 때 이른 더위로 자꾸 나무그늘만 찾게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도 지쳐갔고, 참가자들도 지쳐갔습니다.


하지만 삼막계곡에 들어서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솟구쳤습니다. 계곡을 끼고 있는 숲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직사광선이 내려찐다고 해도 숲속에 있으면 탈진할 일이 없습니다. 숲속이 강력한 썬크림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원한 나무그늘에 있으면 원기가 회복됩니다. 이런 숲길을 걷는다면 한 여름 때양볕 아래에서도 트레킹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듯싶었습니다.


1시간 정도 계곡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삼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삼막사.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삼막사


  

삼막사는 677,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원효, 의상, 윤필 3대사가 막()을 치고 수행을 하다가 그 후에 절을 지으니, 그 절이 삼막사가 된 것입니다. 삼성산의 명칭 유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효, 의상, 윤필의 성인이 수도를 한 곳이라 하여 삼성산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선 8화에서도 언급을 했었습니다. 참고로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입니다.


서두에서 저는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개창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불국사의 창건은 751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무려 70년 정도 앞선 연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서가 깊어서인지 삼막사에는 수많은 선승들이 다녀갔습니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 고려시대에는 나옹선사,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와 사명대사,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 개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는 삼막사에서 새로운 왕조에 대한 융성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 삼막사.





유명한 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건, 달리 말하면 삼막사가 좋은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일 테지요. 제가 처음 삼막사를 탐방했을 때였습니다. 기운이 사방으로 트였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삼막사는 정상부 능선 부근에 자리 잡고 있어, 그 곳에 올라서면 멀리 서해바다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데 그런 입지적 조건이 삼막사의 기운을 하게 생성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좋은 기운 때문인지 삼막사는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으로 지칭됐습니다. 또한 진관사 등과 함께 서울 인근의 4대 명찰로 불리게 됐답니다

 

삼막사에는 무학대사가 중수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1880(고종 17)에 지어진 명부전과 그 다음해 지어진 칠성각 등의 당우(堂宇)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 고려중기 시대에 건립된 3층 석탑과 조선 후기시대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불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습니다.


삼막사에서 바라보는 낙조도 일품입니다. 서해바다로 넘어가는 해가 세상을 붉게 만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시조 한 수를 읊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삼막사 아래에 있는 염불암 탐방을 끝으로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8화에서 소개했던 관악산 역사트레킹과 함께 묶어서 해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서울 남부지역에 대한 이해도도 더 높아질 것입니다.

 


 



* 삼막사.






 

삼성산 역사트레킹

 

1. 코스: 만안교 경인교대 정문 삼막계곡 삼막사 염불암 안양예술공원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포함)

 

4. 난이도:

 

 

 


 

 

 












* 다산 정약용: 다산 유물전시관에 서 있는 다산 선생 동상.







정약용 선생 만나러 갑시다_2편


강진 정약용 역사트레킹

    


 

남도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 , 바다가 서로 어우러진 풍광들은 여행자들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넉넉한 남도의 풍광들을 벗 삼아 길을 걷다보면 발걸음도 가벼워질 겁니다. 그렇게 걷다가 꼬르륵소리가 나면 푸짐한 남도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도 있겠지요. 상다리가 부러질 듯이, 한 상 가득 채워진 음식들을 먹다보면 콧노래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환호성을 터뜨리면서요.

 

~ 풍광 좋고, 음식 좋고...! 이 맛에 남도 트레킹한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남도로 떠납니다. , 그럼 아기자기한 풍광과 맛깔 나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남도로 우리 함께 길을 나서보죠!


제가 찾은 곳은 전남 강진군입니다. ‘남도 답사 1번지라고 불리는 강진군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다산 선생은 만덕산 기슭에다 다산초당을 짓고 그곳에서 집필 활동과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강진에서 무려 18년 동안이나 생활 하셨던 만큼 강진 곳곳에는 다산 선생의 자취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답니다. 그런 자취를 따라서 강진을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산 선생의 자취를 따라서 도보여행을 했습니다. 일명 강진 정약용역사트레킹을 행했답니다. 이번화는 그 강진 정약용트레킹을 담았습니다. 이전 9화가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었으니, 이번 10화는 9화의 후속편이 되는 셈입니다.

    



* 다산 정약용: 안경을 쓰신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산유물전시관.


 


 

정약용과 강진

 

영월군은 단종이 먹여 살리고 있어요!”

 

제가 영월강변둘레길을 리딩 했을 때였습니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를 앞에 두고 참석자들에게 저 말을 했답니다. 좀 과장된 면이 있긴 했지만 제가 했던 말이 영 틀린 표현은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참가자들이 거의 다 고개를 끄떡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는 한 마디를 더 보탰습니다

 

강진도 그래요. 전남 강진도 정약용 선생이 먹여 살리고 있어요!”

 

이 말에는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준을 넘어,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쳐주더군요. 그래서 저는 첨언을 했습니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를 가지 않았다면, 청령포가 지금처럼 많은 이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강진도 마찬가지죠. 다산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오지 않으셨다면, 강진이 지금처럼 남도답사 1번지라는 수식어를 부여받지 못했을 겁니다.”

 

여행지로서의 강진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고려청자의 고장이자, 도요새의 고장인 전남 강진! 그런 지역적 명물들이 강진을 빛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진을 강진답게 해주는 건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입니다. 정약용 선생이 없는 강진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해보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산 선생의 생가가 경기도 남양주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더군요. 하지만 다산 선생의 유배지가 강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드물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다산 선생과 강진을 한 묶음으로 묶어서 생각하고 있더군요. 한마디로 다산 선생과 강진은 떼래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 수원 화성 축조: 기중기를 이용하여 성을 쌓고 있는 모습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유물전시관

 

강진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다산유물전시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강진군 도암면에 위치한 다산유물전시관은 만덕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답니다. 유명한 다산초당은 다산유물전시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다산초당에 닿을 수 있지요.


다산유물기념관은 다산 선생과 관련된 유물과 서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산 선생이 500여권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기록한 만큼 기념관은 다산 선생이 기술한 책들로 가득했습니다. 다산 선생이 직접 기록한 책이 아닌 필사본이라 아쉽기는 했지만 옛 고서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제 눈을 사로잡은 서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기중가도설>이었습니다. <기중가도설>은 중국의<기기도설>을 토대로 다산 선생이 저술한 것인데 한마디로 기중기설계도였습니다. 수원 화성 축조 시, 다산 선생이 기중기를 제작하여 큰 성과를 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요.


<기중가도설>에는 그런 기중기의 도면이 직접 그려져 있었습니다. 꼼꼼하게 그려진 설계도를 보니 감탄사가 연신 터져 나오더군요. 그 밖에도 다산유물기념관에는 볼거리가 풍부했습니다. 공짜로 본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 전시물들이 꽤 많았답니다.


다산유물기념관 위쪽으로는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이 있었습니다.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은 큰 석상에다 선생의 어록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전 그 어록들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울림이 큰 말씀들이더군요. 세상의 지혜들을 모두 다 옮겨 놓은 것처럼 보였답니다.


어쩌면 따분한 도덕선생님같은 글귀들에 하품부터 내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그 말씀들이 죽비소리처럼 들렸답니다. 아주 큰 울림을 내는 그런 죽비소리.

    

 

    


*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





 

다산초당

 

다음 탐방지는 다산초당(茶山草堂)입니다.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였습니다. 다산 선생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하셨는데 그중 후반부 10년 정도를 다산초당에서 기거하시며 집필과 후학양성에 매진하셨습니다. 유배에서 풀리는 것을 해배(解配)라고 하는데, 그 초당에서 다산선생은 해배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무리 초당이 유배지였다지만 10년 동안 그곳에 기거하시다보니 정이 많이 드셨나 봅니다. 선생께서 고향땅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강진에 있는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초당의 안부를 물으시곤 했으니까요.


현재의 다산초당은 기와집입니다. 초당(草堂)이라 하면 초가집이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아무래도 현재의 다산초당을 복원하면서, 보다 위엄을 살리기 위해 초가가 아닌 기와집으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 다산초당: 현판에 걸린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다산초당은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기에 주변이 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숲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입니다. 초당 위쪽인 만덕산 중턱 부근에는 천년고찰인 백련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다산 선생께서는 백련사 스님들과도 활발하게 교유하셨기에 그 길을 자주 걸으셨답니다.


유학자였지만 다산 선생께서는 서학(천주교)에도 일가견이 있으셨습니다. 도교에도 문외한이 아니셨죠. 또한 스님들과도 활발하게 교류를 하셨습니다. 그럼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을까요?

 

다산 선생은 유···서를 두루 섭력하신 학자였다

 

다산(茶山) 선생은 자신의 호처럼 차를 즐기셨습니다. 또 백련사 승려들과 활발하게 불교에 대해서 토론을 하셨습니다. 간간이 강진 읍내도 다녀가셨고, 인근 영암에 있는 월출산에도 오르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다산 선생도 한 풍류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어쩌면 다산 선생의 일생 자체가 바람과 같은 삶이었을지 모릅니다. 계속되는 반대파들의 견제와 탄압, 그리고 억울한 귀향살이. 무려 18년이나 계속된 귀향살이. 하지만 그런 운명에 굴하지 않고 유배지를 도서관으로 만든 그 꿋꿋함.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못 다한 일을 잘 마무리하기까지.

 

드라마틱한 다산 선생의 일생을 들여다 볼 때마다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매일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제 자신이니까요. 얼마전에도 예정된 트레킹이 펑크가 났다고 며칠간 궁시렁거렸답니다. 조금만 궁시렁거려도 될 걸...


하지만 다산 선생을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은 정말 기쁘고 행복하네요. 딱 꼬집어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하나 배워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제 발걸음이 계속해서 다산 선생에게로 가는 것이겠죠. 강진이든 남양주든, 혹은 수원이든. 그 곳이 어디든지 상관없습니다. 다산 선생의 뜻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제 발걸음도 함께 것이니까요.






* 다산초당 가는 길: 저렇게 한적한 숲길을 지나면 다산초당에 닿을 수 있다. 한편 왼쪽에 삼남길이라는 표식이 보인다. 삼남길은 서울에서부터 해남까지 걸을 수 있게 만든 도보여행길인데 그 길이가 무려 600km에 달한다.






강진 정약용역사트레킹

 

1. 코스: 다산수련원 다산초당 백련사 뚝방길 강진읍내

 

2. 이동거리: 11km

 

3. 예상시간: 4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 백련사: 천년고찰 백련사.



 






















* 능내역. 작은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 있다.









정약용 선생 만나러 갑시다_ 1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서울내부트레킹, 속초해변트레킹. 솔직히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누가 그런 명칭을 지었습니까?”

 

트레킹 참여자들 중에는 간간이 이렇게 문의를 해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제가 직접 지었습니다. 코스에 담긴 내용성을 전달하려고 그런 이름을 지었어요.”

 

제 대답을 듣고 물음표를 거두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물음표를 몇 개 더 가져다 붙인 표정을 지으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그런가하면 이렇게 더 묻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럼 귀에 확 꽂히는 명칭 같은 건 없나요?”

 

당시 저는 잠시 망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답을 했지요.

 

! 이건 어떻습니까?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정확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 그래요? 귀에 확 꽂히네요. 다산 선생은 저도 좋아하는데... 그 명칭 잊어버리지 않겠는데요.”

 








* 능내역.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있는 능내역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보겠습니다. 귀에 확 꽂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을 소개하겠습니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습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됩니다. 폐역이 된 것이죠.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습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무척 차분했습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입니다.

 

 






* 마재성지. 한옥성당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입니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입니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요?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습니다. 바로 위형이었습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1791(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됩니다. 신유박해(1801)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 마재성지.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 다산생가 가는 길.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습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지요.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요? 정약용이 1순위였습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다산선생 묘.





벽파는 꼼수를 썼습니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습니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됩니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18006월이었습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습니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됩니다. 1801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되었죠.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 거중기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습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릅니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입니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 다산 선생 동상.





 

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제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마디 더 설명을 보탰습니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저는 참가자들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습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저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답니다. 그러고보면 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드네요.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죠.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답니다.


정약용역사트레킹은 그 명칭이 귀에 확 꽂힙니다. 또한 눈도 확 뜨이게 하지요. 양수리일대가 수도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에 한 곳이니까요. 그 아름다운 양수리 일대를 다산 선생을 생각하며 걸을 수 있기에 정약용역사트레킹은 더욱더 재밌는 것이겠지요.

 

 



* 마진산성. 마진산성에서 바라 본 양수리. 앞에 보이는 다리는 신 양수대교이다.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폐역)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마진산성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오늘 농월정에 다녀왔습니다. 농월정이 어디냐고요? 농월정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있답니다. 안의면에는 화림동이라고 유명한 계곡이 있는데 그 계곡 하류쪽에 농월정이 자리잡고 있지요.

달빛 아래에서 노닌다는 농월정. 비록 낮에 가서 달을 희롱하며 노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눈은 시원했습니다. 계곡에 유량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화림동 계곡은 더욱더 시원해지겠지요. 그렇게 시원하게 굽이치는 물에다 근심걱정을 다 실어보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몸과 마음이 다 상쾌해지겠네요!
















* 트레킹팀.









관악산은 내 베이스캠프

 

둘레길 따라가는 관악산 역사트레킹

 



 

당신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입니까?

 

산악인인 엄홍길 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키운 건 도봉산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같은 으리으리한 산들이 아니라 동네 뒷산인 도봉산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목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엄홍길 대장의 베이스캠프는 도봉산?’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있으신가요? 트레킹이나 등산을 즐겨하시는 분들은 각자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하나씩 있을 겁니다. 물론 여기서의 베이스캠프는 사전적인 의미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다리 근육을 키운 곳을 말하는 겁니다. 통을 키우고, 잔뼈를 궂게 해 준 그런 곳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아웃도어 지수를 높여준 곳을 뜻하는 것이죠.


그럼 저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일까요? 바로 관악산입니다. 동네 뒷산은 아니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던 관악산이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곳을 걸어 다니며 다리근육을 키웠고, 아웃도어 지수를 높였던 것입니다.

 





* 관악산 장승


 



 

남부 서울의 진산관악산

 

서울에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렇게 두 산은 서울의 남북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북한산을 서울의 최고 산으로 인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관악산은 항상 넘버 2’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강 이남으로 국한을 시키면 관악산이 당당히 진산의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서울 남부권에 관악산만한 산이 없거든요.


이미 삼국시대부터 관악산의 중요성은 부각되었습니다.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을 얻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의 남쪽 방어를 위한 산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듯 관악산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이런 역사성 때문인지 관악산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광화문에 해태상이 조각된 이유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편이라는 이야기, 조선 태종이 셋째 세종에게 양위를 할 것을 눈치 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도성을 빠져나와 왕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했다던 연주대이야기.


하지만 연주대(戀主臺)는 그 한자 이름에도 나타났듯이 왕좌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던 공간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럼 관악산을 누비며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 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힘들게 등산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수월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강감찬 장군 기마상: 말은 역동적으로 잘 조각됐다. 하지만 장군의 다리를 보라. 너무 짧지 않은가? 기왕하는 거 잘 만들지. 장군을 숏다리(?)로 만들어 버렸다.


 




 

노익장을 발휘한 문신 출신, 강감찬 장군

 

트레킹팀도 떠났습니다. 일명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하기 위해서!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성대였습니다. 수많은 관악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과 그의 생가인 낙성대(落星垈)일 것입니다. 낙성대라는 의미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굳이 신화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역사적인 인물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군사정권 시절, 성역화 작업의 한 대상자였던 강감찬에 대해 외면하고 싶은 시각도 존재할 것입니다. 현재의 낙성대는 1974, 유신헌법이 한참 맹위를 떨칠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 그래요!”

 

제 설명에 참가자들이 좀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놀랐습니다.





* 안국사: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낙성대 공원 안에 있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들이 아니었습니까?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보죠.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기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답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습니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낙성대 3층 석탑 좀 보세요.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인데요. 12세기 경에 건립됐으니 천 년의 세월을 버틴 탑이라네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탑이라는 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아 놓는 조형물이잖아요. 그런데 강감찬 장군은 부처님도 아니고 유명한 고승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곳에 탑이 세워졌습니다. 아무래도 강감찬 장군의 위엄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던 것 같아요.”

 

 




* 낙성대 3층 석탑





 

삼성산 성지

 

낙성대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시작됐습니다. 트레킹 팀은 서울대 입구를 지나 삼성산 성지로 향했습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으로 원효, 의상, 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삼성산에 있는 천년고찰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삼성산에 성지가 있는데 불교 성지가 아니라 천주교 성지입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입니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하여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습니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 세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 삼성산 성지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되었습니다.


삼성산 성지는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입니다. 성지라서 그런지 다른 탐방객들도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경건하게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트레킹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께서는 잠깐 동안 기도를 올리더군요.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입니다. 트레킹팀도 삼성산 숲에서 신선한 피톤치드를 온 몸으로 맞으며 기분 좋게 삼림욕을 했답니다

 

관악산의 또다른 자랑인 메타세쿼이어 숲 탐방을 끝으로 관악산 역사트레킹도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수도 없이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오를 생각입니다. 지겨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관악산에 발을 디디면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지금도 다음에 행할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떠올렸는데 벌써부터 흥분이 되네요. 역시 자신의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항상 즐거운 일인 듯싶습니다.

 

 



* 삼성산 성지: 한 중년 남성께서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관악산역사트레킹

 

1. 코스: 낙성대역 낙성대 서울대입구 헬기장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당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 선돌: 전망대에서 바라 본 선돌. 뒤로 보이는 강이 바로 서강이다. 영월강변둘레길은 서강을 따라 걷는다.








영월,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다!


서강길 따라 걷는 영월강변둘레길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게 선돌이고, 그 뒤로는 서강이 흐르고 있어요.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는 저 서강길을 따라 트레킹을 하게 됩니다. 일명 영월강변둘레길 역사트레킹을 하게 되는 거죠. 저 아름다운 길에 흠뻑 빠져볼까요?”

 

당시 저와 트레킹팀은 선돌이란 큰 바위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선돌은 강원도 영월군에 위치해 있는데 그 뒤로는 서강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선돌의 기묘한 자태가 푸른 강물과 어우러지니 그 멋이 한층 더 격조 있어 보이더군요.


영월에는 유명한 동강 말고, 서강도 있습니다. 워낙 동강의 유명세가 강해 서강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서강도 무척 아름다운 절경들을 여럿 품고 있습니다. 유명한 한반도지형도 서강이 품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떠날 곳은 영월입니다. 영월 중에서도 서강길을 따라 갑니다. 영월강변둘레길을 걷는 것이죠.

 






* 선돌: 아래쪽 서강에서 바라 본 선돌. 다른 바위에 가려서 갈라진 부분이 작게 보인다.





 

 

기묘한 자태의 선돌

 

영월강변둘레길은 선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진에서처럼 선돌은 서강 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기암괴석입니다. 선돌은 그 높이가 70m에 달하는데 그 자태가 오묘하여 예로부터 신선암으로 불리기도 했답니다. 푸른 서강을 배경삼아 기묘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선돌은 그 자체만으로도 명물 중에 명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묘한 모습 때문에 선돌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단종 임금도 그들 중에 한 명이었지요. 단종 임금의 유배지는 영월의 청령포였는데 그 곳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돌을 지나쳐야 했습니다. 단종도 기묘한 형상의 선돌을 볼 때만큼은 고된 귀양길에서 오는 피곤함을 잠시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트레킹 팀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선돌과 서강의 모습에 반한 듯, 한 컷이라도 더 좋은 장면을 찍기 위해 카메라 각도를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번 방문했던 선돌이었지만 올 때마다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지요

 




* 서강






즐거웠던 순간도 잠시! 이제 난이도 상()에 해당되는 구간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선돌에서부터 서강의 뚝방길로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그 구간은 등산로가 무척 험했습니다. 경사가 상당히 심했습니다. 심지어 낭떠러지를 스쳐지나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딩자였던 저는 무척 고민을 많이 했었지요.

 

제발 무사히! 아무도 다치지 말고 제발 무사히!’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참가자분들의 트레킹 실력이 출중해서 그랬는지 모두 다 그 위험구간을 무사히 통과했답니다. 리딩자로서 그런 모습이 참 고맙더군요. 그래서 저는 참가자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저만 알고 있던 비밀화원같은, 환상의 뷰 포인트(view-point)로 안내했던 것입니다.


그 곳에 올라선 참가자들은 더 열심히 사진을 찍더군요. 독사진을 찍고, 짝을 지어서 찍고... 저에게 이런 말들을 건네면서요.

 

이런 멋진 곳에서 사진 찍게 해줘서 고마워요!”

 

 




* 환상의 뷰 포인트: 실제로 가보면 사진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다.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

 

서강 뚝방길은 5km 정도에 달합니다. 옆으로 서강이 흐르고 있고, 간간이 기차도 지나고 하니 볼거리가 꽤 됩니다. 하지만 5km에 달하는 평지를 쉬는 시간 포함하여 1시간 반 이상을 걷고 있자니, 살짝 지루한 감이 밀려오더군요.


그렇게 살짝 지루한 감이 밀려올 때쯤, 트레킹팀은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에 도착했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트레킹팀은 청령포를 보자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배후면에는 가파른 육륙봉이 놓여 있어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립니다. 그래서 청령포는 지금도 배가 없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단종은 청령포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계유정난 발생 3년 후인 14566, 단종 복위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주도자들이었던 사육신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청령포: 청령포의 여름.



어두운 그림자는 단종에게도 드리워지게 되지요. 한명회, 권람 같은 일파들이 단종을 가만히 두었겠습니까? 엄청나게 단종을 몰아붙였고, 결국에는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 땅으로 유배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때가 14576월이었습니다.


졸지에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청령포에 왔다 그해 여름 홍수를 피해 영월 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다 그해 10월 하순에 관풍헌에서 숙부인 세조에 의해 사사됐지요. 단종의 짧았던 생애와 4개월 남짓한 영월 유배기간을 되새기며 저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한명회가 없었다면 수양대군이 정권을 틀어잡은 계유정난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수양대군은 정권을 잡았고, 한명회도 부귀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단종 대왕의 뜻을 기리는 곳에 왔습니다. 한명회가 아닌...”

 

계유정난 당시는 한명회가 승리자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단종의 자취를 따라갑니다. 한명회를 따라가지는 않지요. 김구 선생의 자취를 따라가는 공주 마곡사 트레킹도 같은 이치입니다. 해방공간에서는 이승만이 승리자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김구 선생의 뜻을 기리며 마곡사 트레킹에 나섭니다. 이승만의 자취를 따라 걷지 않는다는 뜻이죠.

 

 



* 청령포: 청령포의 겨울





 

청령포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기회가 되시면 겨울에 청령포를 방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보통 청령포는 그 맞은편에서 배를 타고 갑니다. 하지만 겨울에는 그 앞을 흐르는 서강이 꽁꽁 얼게 되지요. 그래서 배를 타고 들어갔던 청령포를 겨울에는 얼음 위를 걸어 입장하게 됩니다.


살살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떼며 강을 넘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입니다. 그렇게 꽁꽁 언 강을 넘다보면 미끄러지듯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갈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단종 임금이 겨울에 유배를 왔으면 저 얼음을 넘어서 다시 한양 땅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명도 짧고, 유배도 짧았던 우리의 슬픈 임금...’

 






* 참가자: 청령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가자.




 

 

방절리에 있는 방절산

 

트레킹 팀은 청령포를 지나 방절산으로 향했습니다. 방절산은 강 건너 청령포 앞쪽에 있는 야트막한 산인데 제가 임의적으로 네이밍을 한 것입니다. 제가 영월에 사는 것도 아닌데, 감히(?) 그렇게 산 이름을 지은 것이죠.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동네 분들을 붙잡고 계속 그 산 이름을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이런 대답뿐이었습니다.

 

그 산 이름 없어요. 저쪽 산도 이름 없는데...”

 

그래서 방절산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동네가 방절리였기 때문입니다. 방절(芳節)리의 뜻을 거칠게 풀어보면 꽃다운 나이에 꺾이다라는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역시 동네 지명도 단종 임금과 떼려야 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트레킹 코스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네이밍을 한 만큼 누군가 좋은 이름을 제시한다면 방절산은 곧 다른 이름으로 바뀌게 될 겁니다

 




* 방절산: 사진 오른쪽, 아파트 뒤편이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는 지점이다.





이름이야 어찌됐든 방절산은 충분히 올라갈 가치가 있는 산입니다. ?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어 남한강을 이루는 곳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곳에 올라서면 영월 읍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답니다. 그러니 충분히 올라갈 만 하지요.


지금은 무인역사가 된 청령포역 탐방을 끝으로 영월강변둘레길 트레킹은 종료가 됐습니다.

지금까지 영월강변둘레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어떠신가요? 당장 배낭을 꾸려 떠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굳이 영월이 아니어도 괜찮겠지요. 어디든 좋습니다. 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면... 우리나라도 갈 곳이 많으니까요.

 


 



* 서강 뚝방길: 뚝방길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영월강변둘레길

 

1. 코스: 선돌 서강 뚝방길 청령포 방절산(가칭) 청령포역(폐역사) 세경대학교

 

2. 이동거리: 10km

 

3. 소요시간: 4시간 30

 

4. 이용불가 계절: 겨울철과 여름철. 겨울에는 눈 때문에 이용불가. 여름에는 수풀이 우거져 등산로가 사라짐. 또한 서강의 범람이 우려됨.

 

 

 

 

 

 

 

 

 

 

    





























외롭게 서 있던 석탑에 부처님이 임하셨네!



이제 곧 석가탄신일입니다. 오랜만에 거창 읍내에 나왔더니 군청 앞 공원과 로터리가 연등으로 장식됐네요.

거창군청 로터리 중앙에는 아림사지5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 차들이 쉴세없이 뱅글거리며 도는 로터리에 귀중한 문화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석탑을 볼 때마다 마음이 좀 무거웠습니다.

고찰이었던 아림사는 몽고와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고, 5층석탑 마져 뱅글거리는 자동차들에 의해 찬밥처럼 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할 수밖에요.

그래도 석탄일은 석탄일입니다. 외롭게 서 있는 석탑에 조형물이나마 석가모니께서 함께 해주시니 고마운 일이죠. 코끼리도 있어서 더 다채로워 보이기도 하네요. 한지로 만든 조형물들이었지만 그래도 석탄일을 나타내주는데 부족함이 없어보입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거창의 옛 명칭은 아림이었습니다. 아림사의 명칭도 그것에 연유한 것이죠.


















* 조도: 속초해수욕장에서 바라 본 조도.







파도를 따라 걷는 속초 해변트레킹

지루할 틈이 없는 속초 해변트레킹

  

    

 

동해바다가 보이는 속초로 가자!

 

이번 화는 서울을 떠나서 동해바다 쪽으로 방향을 잡아봤습니다. 목적지는 강원도 속초입니다. 서울-춘천 고속도로의 개통, 미시령터널의 개통 등으로 이제 속초는 서울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해안 도시가 되었습니다. 속초시 관광안내 책자에는 ‘1시간 40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만큼 강원도 해안 도시로의 접근이 용이해졌다는 뜻이겠지요. 너무 서울 중심적인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속초나 강릉 같은 지역들은 서울의 근교 바닷가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번 트레킹의 특징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속초의 해변길을 걷기 때문에 속초해변트레킹이라는 이름도 붙여봤습니다. 속초해변트레킹은 해안가를 걷지만 꼭 바다 풍광만 바라보는 트레킹 코스는 아닙니다. 일단 코스 반대편에 우뚝 솟아 있는 설악산의 장엄함을 관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외옹치라는 작은 언덕에도 오릅니다. 갯배도 타고요.

    

 

    


* 고깃배




 

아바이마을과 갯배

 

속초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바닷가 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동명항이 나옵니다. 이 곳에 속초등대전망대가 있는데, 그곳에서부터 트레킹은 시작됩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속초 시가지와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또한 속초해변트레킹 코스를 눈으로 먼저 걸어볼 수도 있습니다.


동명항 탐방을 마친 후에는 아바이 마을이 있는 청호동을 향해갑니다. 아바이 마을은 1.4후퇴 때 남하했다가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피난민들이 정착한 곳입니다. 정착 초기에 함경도 사람들, 특히 노년층이 많았는데 함경도 방언으로 '아바이'가 할아버지란 뜻이기에 아바이 마을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됐습니다.


속초는 38선 이북에 있던 지역으로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쪽에 속해 있었습니다. 휴전이 됐을 때, ‘동쪽의 38은 북상했습니다. 그러나 서쪽의 38은 하강을 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38선 이북이었던 속초는 현재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이지만, 38선 이남이었던 개성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었으니 더더욱 그렇게 된 것이지요.






* 갯배





그렇게 실향민들은 조금이라도 고향에 가까운 곳에다 삶의 터전을 잡았던 것입니다. 함경도 도민들이 집단으로 생활을 하다 보니 그곳에는 전통적인 속초지역의 문화와는 다른 음식문화와 언어문화가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런 음식문화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입니다. 동네 떡볶이 집에서 파는 일반적인 순대는 돼지 창자 속에 당면을 넣지만 아바이순대는 찹쌀과 선지 등을 넣어 독특한 맛을 연출합니다. 오징어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부터 강원도를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돼지가 귀해 오징어를 이용하여 순대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런 방식의 오징어순대가 아바이마을에서는 함경도식으로 변형이 됐습니다.


한편 아바이마을에는 갯배라는 명물이 하나 있습니다. 갯배는 중앙동과 아바이 마을이 있는 청호동을 이어주는 무동력 선을 말합니다. 양쪽 선착장에 걸려 있는 밧줄을 끌어 당겨 그 힘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죠.


아바이마을은 육지속의 섬과 같은 형상입니다. 그래서 이 갯배가 없었다면 5분 정도 걸릴 거리를 30분 정도 돌아가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설악대교와 금강대교가 건설되어 이 갯배가 없어도 시내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이 갯배가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다리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 속초해수욕장: 뒤로는 외옹치가 보인다.




 

 

속초해수욕장과 조도

 

아바이마을을 빠져나오는 곳에서부터 본격적인 해변 트레킹이 시작됩니다. 거기서부터가 속초 제일의 명소라고 불리는 속초해수욕장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속초 해수욕장은 황토빛 모래사장이 인상적인 곳입니다.


1km 정도에 걸쳐 질 좋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새들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조도(鳥島)가 눈앞에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더구나 바다 반대편에는 우뚝 솟은 설악산이 내려다보고 있어 여느 바닷가 해수욕장과는 다른 운치를 자아냅니다.


사실 속초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닙니다. 느릿느릿 걸어도 20~30분 정도면 끝부분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운대나 경포대 같은 큰 백사장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성이 안 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 것보다는 아기자기함을, 더불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속초해수욕장에 더 높은 점수를 줄지도 모릅니다.


속초해수욕장의 끝자락에는 외옹치라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속초해수욕장 일대와 속초 중심부를 조망해 볼 수 있습니다. 푸른 동해바다의 물결과 황토빛 모래사장이 서로 서로의 배경색이 된 모습은 그야 말로 장관을 연출합니다

 





* 외옹치에서 바라 본 속초해수욕장: 현재 외옹치에는 대규모 리조트시설이 들어 서고 있다. 외옹치에는 고구마밭이 많았었는데 이제 그 밭들은 찾아 볼 수 없을 것 같다.





속초해수욕장에서 외옹치를 바라다보면 마치 어떤 산 하나가 바닷가를 향해 뛰어들려는 형상입니다. 평평한 해안가가 계속 이어지다 외옹치 부근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 나온 모습이라는 뜻이죠. 외옹치(外瓮峙)라는 명칭도 바깥()으로 튀어 나온 항아리() 같은 언덕()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속초시 지형도를 보면, 설악산 대청봉에서 동쪽 방면으로 내려온 줄기는 주봉산을 타고 내려오다 바다를 앞에 두고 외옹치가 됩니다. 즉 외옹치에서는 동해바다와 설악산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형적인 특색 때문인지 외옹치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됩니다. 사실 외옹치 해변은 2005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용 철책이 들어서서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습니다.


그런 군사시설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외옹치의 안쪽은 덕산이라고 불렸는데 그 곳에 봉수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산 봉수대는 북쪽으로는 간성 남쪽으로는 지금의 양양으로 봉화를 연결해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외옹치에 지금은 대규모 리조트 시설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리조트가 건설되면 속초경제가 활성화되겠지요. 또한 일자리 창출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외옹치에서 밭을 경작하는 모습은 그저 옛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겁니다. 외옹치의 옛 모습은 그저 우리의 기억 속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겁니다.

 

    


* 외옹치항의 낮



 

 

작고 아담한 외옹치항

 

외옹치에는 마을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외옹치 마을은 바닷가 쪽이 아닌 도로와 인접한 곳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어촌 마을이라면 조금이라도 바닷가와 가까운 곳에 집을 지어야 이치에 맞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1984년에 있었던 수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1984년에 있은 수해로 인해 산사태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그 이후 마을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당시 수해는 외옹치 마을의 어로 활동에도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1984년 이전에는 '뗀마'라고 불리던 무동력선을 타고 문어를 잡는 재래식 어로 작업을 많이 했답니다. 하지만 수해복구와 함께 항구도 현대식으로 탈바꿈 했고, 무동력선도 동력선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재래식 어로 활동도 자취를 감추었고요

 

외옹치 마을에서 조금만 이동하면 외옹치항이 내려다보입니다. 외옹치항은 작고 아담한 항구입니다. 외옹치항은 외옹치가 숨겨놓은 보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 보물이 가장 빛날 때는 달빛을 받을 때입니다. 동해바다에 떠 있는 달빛이 은은하게 항구를 감쌀 때, 외옹치항은 그 고운 자태를 드러냅니다.

 

    




* 외옹치항의 밤





 

유명한 대포항 수산시장

 

외옹치에서 유명한 대포항까지는 약 1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행정구역상 외옹치는 대포동에 속합니다.


대포항은 어시장이 잘 발달되어 속초 최고의 항구로 손꼽힙니다. 몇 해 전 현대화 공사가 끝나 대포항은 항구와 어시장이 확 바뀌었습니다. 싱싱한 횟감이 즐비한 어시장과 말끔하게 정비된 접안 시설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해안트레킹에서 어시장탐방으로 변형이 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대포항 일대를 다 걸어보려면 1시간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항구와 어시장은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대포항과 어시장 탐방을 마치면 약 8km에 달하는 속초해변트레킹이 종료가 됩니다.


속초해변트레킹의 특징은 바다만 따라가는 코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은 처음에는 드넓은 바다를 볼 수 있어 시원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2차원 적입니다. 아기자기한 멋이 없다는 뜻이죠.


그래서 바닷가를 끼고 걷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지루한 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속초해변트레킹은 갯배도 타고, 외옹치도 오르고, 설악산도 관망할 수 있습니다. 물론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변도 걷고요. 한마디로 지루할 틈이 없다는 뜻이죠!

    

 

    


 

속초해변트레킹

 

1. 코스: 시외버스터미널 동명항(속초등대전망대) 아바이마을(갯배) 속초해수욕장 외옹치 대포항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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