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은 생각창고>는 16편으로 종료가 됐다. 이제 두 편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필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들은 넘치고 넘치지 않았던가. 필자까지 거기에 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간의 통념을 깨려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제목도 저렇게 지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읽으신다면 그 환상이 깨질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 산티아고 순례길

 

●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이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지금은 2만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엄청난 영향을 준 셈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니까.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꼭 한 번은 다뤄봐야 하지 않겠나?

 

* 산티아고 순례길

 

 

●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한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온다.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년 7월 25일에 참수를 당한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이베리아반도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한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던 것이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한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길’)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여행기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장식된 야고보 성인.

 

●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린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종교다원론자(?)인 필자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필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바로셀로나가 있는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산티아고 대성당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하였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

 

 

* 산티아고 순례길: 저렇게 평원길을 많이 걷는다.

 

●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건립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침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던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셈이다.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위치. 구글 지도 변형.

●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한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

 

* 산티아고 순례길: 용서의 언덕에 선 필자.

ps. 이렇게 기존의 통념을 깨는 글을 쓰고 있지만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할 생각이다. 왜?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매력 있는 길이니까. 실제로 필자는 2014년 첫 방문 이후, 2018년과 2019년 연이어 방문을 했었다. 그 시간이 참 뜻 깊었다.

어떤 식으로든 필자는 야고보 성인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다. 뜻하지도 않은 짐을 지고 있는 야고보 성인의 어깨를 가볍게 해드리고 싶어 이 글을 쓴 것이다.







* 피스테라 가는 길. 대서양에 접한 스페인의 한 어촌 마을. cee라는 곳이다.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 길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 두 번째 이야기

 

 

 

이번 화는 전편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제목에서처럼, 저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산티아고지우개로 지워버린 셈이 됐으니까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작성한 건 산티아고 순례길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조만간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할 예정입니다. 다른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그 길을 걸으며 많은 감흥을 얻었고, 큰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저도 산티아고 앓이를 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도발적인 글을 썼을까요? 간단합니다. 제대로 알고 가자는 의미에서 글을 썼습니다. 기왕 돈 들여, 시간 들여가는 길이라면 제대로 알고 가야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 더 알찬 트레킹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 피스테라 가는 길. 조가비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물이다.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피스테라(Fisterra)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합니다. 많은 여행책자들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지요.


어쨌든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게 피스테라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입니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말도 떠올랐습니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습니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지요.

    






* 산티아고 순례길.







 

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로 가는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습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습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아 올려진 형태였습니다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입니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서게 됩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서게 됩니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습니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습니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습니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더군요.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봤답니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 피스테라. 큰 네모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작은 네모는 피스테라를 표시한다. 구글지도 변형.





 



피스테라와 야고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입니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그곳을 유럽대륙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스테라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스테라는 제가 반복해서 기술한대로 스페인의 땅끝이지 유럽 대륙의 땅끝은 아닙니다.


정확히 유럽 대륙의 땅끝은 호카 곶(Cabo de Roca)입니다. 호카 곶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깎아질 듯 서 있는 해안절벽이 일품인 곳이지요.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을 말할 때 두 가지로 분류를 해서 말합니다. 튀어나온 규모가 크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이 됩니다. 유명한 포항의 호미곶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네요. 북한 쪽에서는 장산곶이 유명하지요.







* 피스테라. 광활한 대서양이 펼쳐지는 곳. 가슴이 확 트이는 곳이다.








피스테라에 대한 환상(?)을 한 가지 더 깨볼까요. 저는 전편에 야고보 성인은 이베리아반도에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서술했습니다. 그 서술을 따라가 보면, 야고보의 시신이 담긴 배가 예루살렘에서 피스테라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큽니다. 뻔한 당시의 항해 기술은 둘째 치고, 사역을 하지도 않은 곳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전도자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피스테라가 왜 야고보와 연결이 됐을까요? 아무래도 야고보의 존재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피스테라가 동원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인들은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도착하여 별들의 들판이라는 산티아고 콤프스텔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정리될 수 있겠지요. 이런 전개 과정 자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 로마인들이 세상의 끝을 호카 곶으로 판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럼 호카 곶과 야고보가 연결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환상이 다 깨졌다고 해도 피스테라는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곳입니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안절벽들을 따라 가다보면 땅끝 등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의 모습은 일품 중에 일품입니다. 특히 이곳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띄우는 의식을 행합니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자신의 것들을 불태우는 것이죠. 실제로 등대 근처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태운 신발과 옷가지의 흔적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피스테라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무언가 의식을 행하거나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소였다는 것이죠. 마치 해남 땅 끝에 가면 무언가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요. 저도 대서양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 앞에서 다짐을 한 말치고는 무척 소박한가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한다고 하잖아요. 허상과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일들을 척척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는 것이죠. 지나간 과거를 괴롭게 되새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서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 피스테라 표지판


 




 

남북한 순례자들이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면?

 

순례길은 화합의 길이었습니다. 지역감정으로 유명한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 순례길이었습니다.


스페인 내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앙숙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발트3) 청년들이 서로 의지를 하며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었습니다. 도보여행을 하는데 국적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소용이 없을 테지요.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그게 바로 순례길에 녹아 있는 정신일 겁니다. 그런 정신들이 길 위에 뿌려지고, 뿌려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저도 짧게나마 일본인 친구들과 즐겁게 순례길을 걸었답니다. 니가타 출신이라는 처자는 저에게 한국말로 오빠라고 칭해주더군요.

 

나 아저씨인데...’

 

이 말을 표현할 방법은 없고, 기분은 좋고 하니, 저는 그들에게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춰줬습니다. 그들도 따라 추더군요. 아주 즐겁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북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일일 것이겠지요. 함께 격려하고, 도우며 길벗을 하고... 힘들 때는 함께 아리랑도 부르고!

 

 



* 진정한 챔피언. 이 친구의 왼쪽 다리를 보라! 의족이다. 하지만 사진에도 나와 있듯이 그의 표정은 아주 밝다. 자신을 북부 빌바오 출신이라고 말한 이 친구는 자전거로 이베리아 반도를 투어하고 있다고 했다. 저런 청년들이 있기에 순례길이 아름다운 것이다. 순례길 곳곳에 뿌려진 선한 마음과 인간애가 산티아고 순례길로 더 많은 이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

- 마음으로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번에는 국내를 넘어 스페인으로 이야기를 확장해볼까 합니다. 스페인에는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내용이 아닐 겁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입니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지금은 2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입니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많은 영향을 준 셈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이 역사트레킹펀딩에서도 꼭 한 번은 다뤄봐야겠지요.

    

 







 

 * 산티아고 콤포스테라라 시가지. 사진 중앙 상단에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합니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습니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지요.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습니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입니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습니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725일에 참수를 당합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겁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겁니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습니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습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습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우리언론들 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조각된 야고보.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립니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입니다. 종교다원론자(?)인 저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습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지요. 그 영감은 예전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보았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답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답니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저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한국 컵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많기에 저런 광고문구가 나왔으리라...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됩니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의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습니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지요.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집니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수준으로 서술하였더군요.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요?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요?

 

 




* 이베리아 반도 지도. 야고보의 제자들이 이베리아에 가려고 했다면 바로셀로나 같은 동부 지역에 닻을 내렸을 것이다. 뭐하러 지르롤터를 거쳐 대서양까지 나갔다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먼 길을 돌아갔겠는가? 더군다나 그들이 탄 배는 나룻배 수준이었을텐데. 한편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포함하는 서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습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611,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습니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습니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합니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를 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릅니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됩니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입니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을 겁니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습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답니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 산티아고 개: 산티아고 도심 입구 쪽에 있는 대저택에서 기르던 개. 무척 귀여워서 한 컷!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저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저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합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죠.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요.

 

 

 

 

 

 

 

 

 

 



 

대서양에 작은 다짐을 실어보내며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8]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15.01.22 08:25 최종 업데이트 15.01.22 08:28
곽동운(artpunk)

 

 

 

 

 

 

 

 
▲ 피스테라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바위 위에 철로 만든 신발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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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2일, 여행 10일째.


이전 여행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스페인의 땅 끝 마을인 피스테라(Fisterra)의 길은 확실히 개발이 덜 된 느낌이었다. 황무지 같이 방치된 곳들도 있었고, 간간이 버려진 집들도 눈에 띄었다. 스페인의 농어촌도 도시로의 인구 유출이 심각해 보였다.

그렇게 개발도 안 됐고 인적도 드물다 보니,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중 인상적인 지형도 눈에 띄었다. 아침에 올베이로아(Olveiroa)에서 출발을 한 후, 1시간 정도 이동했을 때였다. 길 옆쪽으로 살라스 강(rio xallas)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는데 감입곡류 형태였다.

 

 

 


 
▲ 살라스 강 감입곡류형 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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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입곡류는 하천이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뱀처럼 꾸불꾸불하게 감겨 나가는 것을 말한다. 감입곡류 일부 구간에서는 강물이 350도로 휘돌아 나가기도 한다. 그런 살라스 강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월의 한반도 지형과 예천의 회룡포가 생각났다. 사실 한반도 지형을 담은 서강과 회룡포를 만든 내성천에 비하면 살라스 강의 꾸불꾸불함은 새발의 피였다. 이렇게 남의 것을 바탕삼아 우리 것을 비교해 보는 것도 해외 도보여행의 장점 중에 하나다. 


뱀처럼 휘감겨 흐르는 살라스 강처럼, 강은 있는 그대로 흐르게 해야 한다. 괜히 직선화를 한다, 보를 세운다 하면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그럼 강은 역습을 하게 된다. 지금의 4대강을 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360도 전체를 보는 도보여행

 


 
▲ 피스테라 스페인의 북서부, 갈리시아 지역. 피스테라, 묵시아(Muxia), 산티아고 콤푸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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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의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가? 걷고 또 걷다 보니 배터리가 방전되듯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수그려서 걸으니 정면만 응시했다. 시야가 무척이나 좁아진 것이다. 그날 여행수첩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도보여행은 앞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위사방 360도 전체를 보고 가는 것이다. 길을 가다 잠시 멈춰 서서 꽃과 나무를 감상하고, 시냇물 소리도 듣고, 바람도 느끼는 것이 진정한 도보여행이다."

 


여행수첩에는 "도보여행은 360도"라고 적어 놓았지만 정작 필드에서는 시야각이 겨우 45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는 자신이 적어 놓은 것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니 결국 목적지인 피스테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보여행의 마지막을 아주 화끈하게 불태운 듯싶었다. 발바닥이 불이 난 듯 아주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본 대서양에 발을 담가 열을 식히고 싶을 정도였다.

4년 전 행한 국토종단 여행도 무척 힘들었다. 해남 땅끝 마을을 방문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태풍을 만나고, 텐트가 망가지고... 하지만 결국에는 국토종단 여행을 무사히 종료 됐다. 그렇게 고생스러운 여정 때문이었는지 아직까지도 그 여행은 필자의 뇌리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피스테라 길을 포함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도 마찬가지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고 또한 많이 배운 여행이라서 그런지 여운이 아주 길게 갈 것 같다. 

 

 



피스테라와 야고보는 관련이 없다?

 

 


 
▲ 오레오 곡물 창고인 오레오. 습기와 설치류들을 피하기 위해 기둥을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둥은 끝 마무리를 둥글게 했다. 기둥 마무리 부분이 둥그니 아무리 쥐들이 기둥을 타고 올라와도 끝 부분에서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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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대개 그곳을 유럽대륙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피스테라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피스테라는 필자가 반복해서 기술한 대로 스페인의 땅끝이지 유럽 대륙의 땅끝은 아니다.


정확히 유럽 대륙의 땅끝은 호카 곶(Cabo de Roca)이다. 호카 곶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깎아질 듯한 해안절벽이 일품인 곳이다.

 

 



 
▲ 피스테라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에 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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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테라에 대한 환상(?)을 한 가지 더 깨보자. 앞선 여행기 2편
(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에도 언급했듯이, 야고보 성인은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래서 야고보의 시신이 담긴 배가 예루살렘에서 피스테라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항해 기술은 둘째 치고, 사역을 하지도 않은 곳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전도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스테라가 왜 야고보와 연결이 됐을까? 아무래도 야고보의 존재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피스테라가 동원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로마인들은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도착하여 별들의 들판이라는 산티아고 콤프스텔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정리될 수 있다. 이런 전개 과정 자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익사이팅'한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 챔피언 이 스페인 사람은 피스테라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필자에게 큰 감흥을 주어서 이번 여행기에 사진을 올려본다. 이 분의 왼쪽 다리를 보시라. 의족이다. 저런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더 당당했다. 저 자전거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물론 이베리아 반도 순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챔피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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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 깨졌다고는 해도, 피스테라는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곳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안절벽들을 따라 가다보면 땅끝 등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의 모습은 일품 중에 일품이다. 특히 이곳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띄우는 의식을 행한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자신의 것들을 산화 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등대 근처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태운 신발과 옷가지의 흔적들이 널려 있었다.

피스테라는 그런 장소였다. 무언가 의식을 행하거나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마치 해남 땅 끝에 가면 무언가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필자도 대서양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 유럽대륙을 자전거로 피스테라에서 만난 한국 여대생. 터키에서부터 스페인 피스테라까지 무려 5000km 넘는 거리를 단독으로 여행 했다고 한다. 앳된 얼굴이었지만 진짜 강철같은 에너지를 가진 청년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자전거로도 순례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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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 앞에서 다짐을 한 말치고는 무척 소박한가? 그래도 상관없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한다는 것이 평소 필자의 삶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허상과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일들을 척척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고 생각한다.


지나간 과거를 괴롭게 되새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서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기 하다. 대신 너무 현실적으로 살지는 말자. 가능한 꿈은 얼마든지 꾸자!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도보여행은 끝이 났다. 도합 200km 정도를 걸었는데도 성취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서인지 <오마이뉴스>에 여행기를 작성해 송고할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였다. 당장 배낭을 꾸려서 다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꾹 참아야 했다. 그만큼 순례길은 필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남북한 순례자들이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

글을 마치기 전에 순례길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본다.

순례길은 화합의 길이었다. 지역감정으로 유명한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 순례길이었다. 스페인 내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앙숙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발트3국) 청년들이 서로 의지를 하며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었다.

도보여행을 하는데 국적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소용이 없다. 순례자의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열심히 즐기며 도보여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필자도 일본인 친구들과 짧게나마 즐겁게 걸었다. 니가타 출신이라는 처자는 필자에게 한국말로 '오빠'라고 칭해 주었다. 필자도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응답했다. 이런 것도 하나의 재미다.

산티아고 카미노에서 북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일일 것이다. '통일대박' 시대에 자연스러운 남북한의 인적교류가 이루어지는 거니까!

순례팀은 차량을 통해 피스테라에서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또 다른 바닷가 마을 묵시아(Muxía)로 이동을 했다. 묵시아도 풍광이 무척 아름다운 어촌 마을 중에 하나였다. 묵시아 여행을 끝으로 필자는 개인 배낭여행 형식으로 스페인 중부권 일대를 탐방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가겠다.

 

 



 
▲ 묵시아 묵시아는 풍광이 아름다운 어촌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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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스페인 땅끝 가는 길에 만난 '빤스' 할아버지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7]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 길

 

15.01.13 11:00최종 업데이트 15.01.13 13:51

 

 

 

 

 

 

 

 

 
▲ 피스테라 가는길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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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창피해서 명함을 못 내밀겠네요."

"뭐가요?"
"800킬로 찍은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겨우 100킬로 밖에 못 뛰었으니까요."
"에이, 그래도 100킬로도 적은 거리가 아니죠."

 


산티아고 대성당 인근에서 만난 한국 순례자들과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100km도 적은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풀코스인 800km를 마친 순례자들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필자도 국내에서는 무동력 여행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누볐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그저 1/8만 채운 순례자였을 뿐이다. 그런 자격지심 때문인지 성취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서 다음 목표를 향해 당장이라도 발을 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 감정은 필자 혼자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순례팀 전체가 느끼고 있었다.

 



 
▲ 피스테라 가는길 피스테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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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땅끝마을 '피스테라'


2014년 11월 10일, 여행 8일째. 아침 일찍, 순례팀은 피스테라(Fisterra)로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피스테라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한다.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다. 

'이번에는 종단을 했으니까 다음에는 남해안을 휙 가로질러 횡단을 해야겠군. ' 

 


 
▲ 산티아고 대성당 피스테라 길의 시작점인 산티아고 대성당. 중앙에 있는 이는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이다. 순례팀이 방문했을 때, 대성당은 공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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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가 필요한 피스테라 길


산티아고-피스테라 구간은 확실히 순례객들이 적었다. 전날까지 북적거리던 길은 한산하다 못해 인적이 뜸하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순례팀을 이끌었던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완주자들은 프랑스 국경에서 800km를 걸어서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온 거예요. 그래서 성취감과 함께 공허함 같은 것이 밀려 와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울기도 해요. 또 어떤 이들은 식사를 하다가 눈물을 닦기도 하고 그래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심경에 놓이는 거죠. 한편으로는 몸에서 진이 빠진 것도 있고요."

손성일 대장은 이번으로 해서 순례길만 벌써 3번째인데 자신도 처음 순례길을 완주했을 때 식당에서 갑자기 울컥한 적이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진이 빠진 사람들이 굳이 90km 남짓한 거리를 또 걸어서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산티아고 시내에서 피스테라까지는 직행버스가 다니기 때문에 그걸 타면 편안히 이동할 수가 있다. 요금은 약 10유로(약 1만4천 원)정도라 저렴하고, 시간은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피스테라 구간은 순례객들이 적은 만큼 편의 시설도 적다. 당연한 것이다. 사람 가는 데 돈 간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으니 바르(bar)나 알베르게(albergue)도 드물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좀 더 계획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알베르게 위치를 고려하여 하루 이동거리를 정확히 산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야간 트레킹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피스테라 가는 길 피스테라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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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갈리시아 지방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아 올려진 형태다. 

여행기 2편(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 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선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섰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을 것이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다. 그때마다 배낭에서 판초우의를 꺼냈다, 넣었다도 반복됐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봤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걸은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다.

 



 
▲ 무지개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많이 그런지 무지개도 자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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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두 번의 '폭풍우'를 만나다


11월 11일에는 짧은 순간이나마 엄청난 폭풍우를 만나기도 했다. Olveiroa라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 우박을 동반한 집중호우를 만났는데 무슨 태풍이 온 줄 알았다. 빗줄기는 따가울 정도로 세게 내려치지, 강풍으로 몸은 휩쓸려 갈 것 같지. 그날의 폭풍우가 얼마나 거셌는지 여행수첩에 이렇게 기록해 놓을 정도였다.

"서울 촌놈 스페인 깡촌에 와서 듣도 보도 못한 '스페인 폭풍우'에 휩쓸려 갈 뻔했네."

순례팀은 몸이 싹 다 젖은 상태로 사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사립 알베르게는 10~15유로 정도인데 공립보다는 좀 더 시설이 쾌적하다. 이날 1박을 한 사립 알베르게는 바르까지 함께하는 곳이라 숙식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침대도 깨끗하고 안락했다.

하지만 그렇게 쾌적한 알베르게에서, 필자는 또 한 번의 작은 '폭풍우'을 만나야 했다. 예상치 못한 엄청난 폭풍우를 만난 터라 몸이 피곤했고, 또한 배도 살살 아파왔다. 그래서 화장실을 좀 오래 썼다. 이곳도 화장실과 샤워실이 붙어 있는 곳이었는데 그날따라 '폭풍우'처럼 시원하게 화장실을 봤다. 변기가 넘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들 정도로 아주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며, 비에 젖은 속옷과 양말 등을 빨려고 세면대에 담가두었다. 화장실도 오래 보고, 샤워도 오래했더니만 밖에서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들겼다.

"쾅쾅쾅"

다른 쪽도 두들긴다.

"쾅쾅쾅"

단순히 노크가 아니라 아주 감정이 실린 듯 세게 두들겼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스페인어가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온 말들이 마치 폭풍우처럼 필자의 몸을 감싸왔다.

"아임 쏘리, 아임 쏘리(I'm sorry, I'm sorry)."

 

 



 
▲ 사립 알베르게 저 곳에서 연타석(?)으로 폭풍우를 만났다. 도착하기 전에 한 번, 그 곳 화장실에서 또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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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미안하다고 말했다. 괜히 '폭풍우'와 맞설 필요가 없으니까. 대충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후 문을 여니 어느 스페인 할아버지가 '빤스'바람으로 시계를 가리키며 필자에게 또 속사포를 쏴댔다. 이에 필자는 합장을 한 후 다시 '아임 쏘리'라고 했더니, 그분은 무언가 울분 같은 걸 삼킨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또 폭풍우를 하나 넘기게 됐다.


바르에서 치킨샐러드와 와인으로 맛있는 저녁을 즐긴 후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폭풍우 때문에 진이 빠졌기에 몸이 아주 노곤했다.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침실로 돌아왔을 때 좀 당혹스러웠다. 속사포로 작은 '폭풍우'를 일으켰던 '빤스' 할아버지가 맞은편 침대에서 느긋하게 '빤스' 바람으로 누워있던 것이 아닌가! 대신 이번에는 뭐가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 다혈질이라는데 '빤스' 할아버지를 보니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이렇듯 스페인의 땅끝마을로 가는 길도 역시 알콩달콩한 에피소드가 넘쳐났다. 폭풍우를 연이어 만났으니...

 

 



 
▲ 사이 좋은 개와 고양이 개와 고양이는 서로 앙숙이라는데 저 녀석들을 보니 그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순례길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편 필자도 저 사진에서처럼 그 스페인 '빤스' 할아버지와 다정(?)하게 1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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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산티아고-피스테라 구간은 약 90km 정도다.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이 구간은 바르나 알베르게 같은 편의시설이 메인 루트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 심지어 3시간 만에 겨우 바르를 하나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러니 하루 이동거리를 적절히 계산하여 움직여야 할 것이다.

2. 바르가 부족하다보니 한두 끼 정도의 식량은 항상 몸에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 좋다. 필자는 이 구간에서는 거의 3인분 정도 되는 식량을 계속 지니고 다녔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밥 처먹고 할일 없어서"... 걷다 보면 이런 소리도 듣네요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6편] 도보여행자 반기는 산티아고 주민들은 달랐다

 

15.01.11 19:42  최종 업데이트 15.01.12 08:22

 

곽동운(artpunk)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구시가지. 사진 중앙에 있는 첨탑이 바로 산티아고 대성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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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hola)."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보면 저런 말들을 숱하게 듣게 된다. '올라'는 스페인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인데 'h'가 묵음이 되어 '홀라'가 아닌 '올라'가 됐다. 부엔 카미노에서 '부엔'은 '좋은'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좋은 길'이 된다.

이런 말들은 순례자들은 물론이고 현지 주민들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들은 처음 보는 낯선 순례객들에게도 스스럼 없이 인사말을 건넸다. 그런 모습들은 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얼마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였다. 현지인들의 자부심은 순례길을 걷기 위해 다른 지방에서 온 스페인 자국민들도 인정할 정도였다.

 


 
▲ 자원봉사자 알베르게 자원봉사자. 공립 사리아 알베르게의 자원봉사자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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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방문지는 환대를 받은 곳과 일치한다

국내에서 도보여행을 하다보면 간혹 이런 소리를 듣곤 한다.

"밥 처먹고 할 일들이 없으니 저렇게 다니지!"

현지인들의 태도에 의해 그 동네에 대한 친밀도가 요동치기 마련이다. 현지분들이 환대를 해주었으면 그 동네에 대한 호감 지수가 급상승하고 차후에 다시 방문을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인지 필자의 재방문 예정지는 환대를 받았던 곳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저런 소리를 들으면 여행 자체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된다. 그러면 그곳을 다시 방문할 여지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이제는 단련이 됐지만 처음 저런 소리를 들었을 때는 무척 서운했었다. 나름대로 민폐를 끼치지 않고 여행을 다닌다고 자부를 했었던 터라 그 서운함의 강도는 좀 심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잔상들 때문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이 무척 부러웠다.

 

 


 
▲ 공립 알베르게 이모님 알베르게의 이모님. 저 이모님이 필자한테 판초우의를 건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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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자부심은 단순히 말로 그치지 않았다. 행동으로 이어졌다. 여행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는 크게 공립과 사립으로 나뉘는데, 공립 알베르게는 보통 6유로 정도에 이용할 수 있다. 1박을 하는 데 겨우 8000원 정도 밖에 들지 않는 셈이다. 아무리 순례객을 위한 시설이라지만 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숙박을 할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헌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공립 알베르게의 관리자들이 그렇게 헌신을 했는데 그들은 무급을 원칙으로 하는 자원봉사자들이다. 무급인데도 공립 알베르게 자원봉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 구간 순례를 마친 사람들만이 봉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후배 순례자들을 위해 선배 순례자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셈이다.

순례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오전 8시경, 그들은 침대를 정돈하고, 화장실을 청소한다. 외관상 숙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유사한 작업을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언제나 밝았다. 조금이라도 더 후배 순례자들을 챙겨주려는 마음이 엿보였다.

돈도 안 생기는 작업을 하면서도 그렇게 너그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건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들의 순례길을 방문하고 있다는 자부심, 그 순례객들을 잘 거두어 보내겠다는 자부심. 그런 자부심은 그곳을 재방문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11월 9일, 여행 7일째. 순례팀은 페드로조(O Pedrouzo)에 있는 한 공립 알베르게를 출발하였다. 페드로조에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는 약 17km 남짓 떨어져 있다.

그날도 역시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했다. 필자는 순례팀을 다 보내고 알베르게에서 제일 늦게 나올 생각이었다. 후미 대장을 자처한 탓도 있지만 '빨리 가서 뭐하냐' 하는 생각이 있어서 그랬다. 어차피 도보여행이라는 건 속도보다는 방향이 아니겠는가. 속도를 내서 빨리 가려면 그냥 자동차를 타고 가면 되지 굳이 배낭을 짊어 메고 걸어갈 필요가 없다는 게, 도보여행에 대한 필자의 강한 신념이다.

 

 



 
▲ 스페인 사람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스페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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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욕'을 하며 눈물을 보였던 마드리드 처자

꾸물꾸물한 스페인의 11월 날씨를 감상하며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이미 순례자들은 거의 다 떠나고 없어 알베르게에는 정적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필자도 배낭을 둘러메고 문을 나서려고 했는데 젊은 처자가 화장실에서 나와 자신의 침대로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무척 부자연스러웠다. 마드리드에서 왔다는 이 처자를, 사실 전날부터 유심히 지켜봤었다. 예뻐서(?) 지켜 본 것도 있었지만 발목에 큰 붕대를 메고 있어서 한 눈에도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페드로조에서 순례길의 종료점까지는 반 나절 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알베르게에 머무르는 순례객들은 들떠 있었다. 이제 곧 산티아고 대성당에 들어설 수 있다는 설렘이 그들 표정에서 묻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척 슬픈 표정을 지었고 눈물까지 보였다.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순례 여행의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눈물이 되어 흘러 내렸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녀는 이런 말까지 내뱉었다.

"Fu*****"

스페인의 젊은 처자에게 저런 '욕'을 들으니 귀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느낌이었다. '욕'을 들어먹었지만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의 배낭을 들어 아래층까지 내려주기로 했다. 그녀와 필자가 함께 있던 룸은 2층이었고, 절뚝거리는 다리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아래층까지 오기에는 좀 버거웠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나름대로 착한 일을 한 것이다. 참고로 알베르게는 남녀 공용이다.

 

 



 
▲ 스페인 사람들 이 스페인 친구는 길을 걷는 내내 우리 순례팀과 동선이 겹쳤다. 이 친구는 비고(vigo) 출신인데 축구선수 박주영을 좋아한다며 셀타비고 유니폼을 뽐내고 있었다. 셀타비고는 비고를 연고지로 한 축구클럽이다. 잠시 박주영 선수가 뛰기도 한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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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전날처럼 영락없이 몸이 젖을 판이었다. 우비를 가지고 가긴 했지만 다 찢어진 상태였다. 안일하게 1회용 우비로 준비한 게 패착이었다. 이미 우비는 비닐봉지보다도 더 못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착한 일을 해서 그런가?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바로 ARCA 알베르에서 자원봉사를 하시는 이모님(그냥 한국에서 잘 쓰는 호칭을 써봤다) 이 판초 우의를 하나 건네주신 것이다. 전날 신발이 젖었다는 필자의 몸짓에 이모님은 수더분한 미소를 보내며 직접 신발 말리는 장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는 필자가 따로 요청한 것도 아닌데 흔쾌히 판초 우의를 건네주셨던 것이다.

선배 순례자로서 후배 순례자를 잘 챙겨준 셈이다. 물론 그 판초 우의는 누군가가 두고 간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새 것 이상으로 고마운 물품이었다. 덕분에 그 이후부터는 비 걱정은 하지 않게 됐다.

 

 



 
▲ 십자가 길을 걷다 목숨을 잃은 순례객들을 위해 세워진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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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도 결국 사람이다

 


도보여행가 김남희씨가 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2: 스페인 산티아고 편>을 보면,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는 지은이를 독일인인 아그네스 아줌마가 치료를 해주는 대목이 나온다. 치료를 마친 후에 아그네스 아줌마는 김남희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를 도울 수 있어서 정말 기뻐."

필자는 배려와 친절도 순례길의 일부분이라고 판단한다. 필자도 그런 배려와 친절을 듬뿍 받고 왔다. 또한 할 수 있는 대로 받은 만큼 베풀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름답다. 주위 풍광이 아름답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도 아름답다. 그래서 그 길 위에는 좋은 기운들이 넘쳐난다. 저토록 사랑과 인심이 넘쳐나기에 나쁜 기운이 스며들 틈이 없다.

그래서인지 순례길 곳곳에는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다. 길을 걷다가 죽음을 맞이한 순례객들을 추모하기 위해 후배 순례자들이 세운 십자가들이다. 볼거리, 먹거리, 쇼핑거리를 다 거쳐 온 여행의 최종지점에는 항상 사람이 서 있었다. 앞에 것들이 다 좋아도 마지막에 사람이 별로면 그 동네의 친밀도도 별로가 된다. 반면 앞에 것들이 미진해도 사람이 좋으면 그럭저럭 다 무마가 된다. 그러고 보면 여행도 결국 사람이다.

"밥 처먹고 할 일들이 없으니 저렇게 다니지!"

웬만하면 이런 발언들은 삼가주셨으면 한다. 대신 이렇게 바꿔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밥 맛있게 드시고, 우리 고장도 좀 다녀가세요. 우리 고장에도 좋은 것들이 많아요. 대신 여행자의 매너는 잊지 마시고요!"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하는 나라들의 국기를 그려 넣은 그림. 우리나라는 맨 아래쪽에 있는데 'korea'가 아닌 'corea'로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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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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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산티아고에 한국인이 많냐고? 스트레스 사회라서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⑤] 산티아고를 걷는 한국인들

 

15.01.06 13:18 최종 업데이트 15.01.06 13:18

 

 

 

 

 

 

 

 

 

 
▲ 멜리다 중심부에 위치한 성당 멜리다는 내륙에 위치했지만 문어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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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7일, 여행 5일째다.


"저 고백할 게 있습니다."

필자의 뜬금없는 말에 순례팀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저, 사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스페인어였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따가운 시선과 함께 핀잔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렇게 스페인어를 몰라!"

 

 



 
▲ 개 신기한 듯 필자를 쳐다보고 있는 개. 그러고보니 '아니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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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말(animal)'들은 일단 맞고 시작했다


그 말이 맞다. 필자가 아는 스페인어라고는 CASA(집)와 ANIMAL(동물) 같은 간단한 단어들뿐이다. 아예 회화는 불가능하고 저런 간단한 단어들 정도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제대로 스페인어를 공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대신 몽둥이찜질을 당한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스페인어 선생님은 단어 암기를 무척이나 강조하셨다. 그래서 매일같이 단어 쪽지 시험을 봤다. 스페인어는 발음 기호가 없어 로마자를 그대로 발음한다. 예를 들면, bar를 '바르'로 animal을 '아니말'로 읽는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며 줄을 세우셨다.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은 아니말입니다. 아니말들은 일단 맞고 시작합시다."

필자는 스페인어 시간마다 '아니말'이 되어 두들겨 맞는 줄에 세워졌다. 그외에 스페인어 학습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저 '동물적 감각'으로 그 시간을 회피하고 싶었다는 것과 볼기짝의 아픈 트라우마가 있을 뿐.

저토록 형편없는 스페인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 트레킹을 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물론 스페인어 뿐 아니라 영어까지 능통하면 여행이 더 윤택해질 수 있고,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나 영어가 완숙되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만큼 산티아고 순례길은 외국어가 짧은 사람도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도보여행자들이 순례를 떠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 개와 순례자 개 한 마리가 순례팀 막내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막내는 너무 발에 꽉 끼는 트레킹화를 신어 고생을 많이 했다. 결국에는 트레킹화를 벗고 슬리퍼를 신고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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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물집을 터뜨리며 '아니말'이 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의 현실이란 바로 육체적인 괴로움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깨와 무릎 통증, 더불어 물집이다. 그런데 어깨와 무릎 통증은 각 개인별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물집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순례자의 숙소인 알베르게에서는 밤마다 물집을 터트리는 순례자들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자도 그런 신음 소리 대열에 참가했다. 잘잘한 건 그래도 터트리는 맛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대왕 물집을 터트릴 때는 인간이 아닌 '아니말'이 되어 비명을 내질렀다.

"아, 읔"

 

 

 



 
▲ 신라며 컵라면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저런 광고문구를 내건 기념품 가게도 있었다. 그나저나 저 광고문구를 보니 입 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계란 탁, 파 송송 썰어 김치 한조각 올려 후르륵~ 필자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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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 서구권 순례자들은 우리에게 물었다. "왜이리 한국인들이 많이 오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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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스트레스가 많아서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보면 많은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아마도 비유럽권 순례자들 중에서는 한국인들이 단연 압도적일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 현지인들과 서구에서 온 순례자들은 이렇게 많이 물어왔다.

"왜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그들이 보기에 한국은 불교나 유교 국가일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라는 가톨릭 성인을 기리는 순례길 곳곳에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난다는 건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서구인들이 물어왔을 때마다 필자는 못하는 영어로 떠듬떠듬 설명을 했다.

한국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척 많이 알려졌고, 이 길을 걷고 싶어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넣은 사람들이 많다고. 필자의 영어가 짧아서 그런지 흔쾌히 납득했던 표정을 지은 사람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미국 알래스카에서 온 노부부와 함께 잠깐 휴식을 취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왔어요. 이제 곧 목표한 지점에 도달합니다."
"대단하세요. 그런데 힘들지 않으세요?"
"아니요. 우리는 쌩쌩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은 거죠?"


필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한국이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노부부는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는 '스트레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보온병을 꺼내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씩씩하게 걸어가라고 주는 차 한 잔이었다.

 

 

 


 
▲ 멜리데 저 다리를 넘으면 멜리데 시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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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요리로 유명한 내륙도시 멜리데


순례팀의 목적지는 아르주아(Arzúa)였는데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멜리데(Melide)라는 도시를 지나야했다. 멜리데는 바닷가와 많이 떨어진 곳임에도 문어(pulpo)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이 도시에 들러 꼭 문어 요리를 맛 본다고 한다.

그날은 트레킹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트레킹이든 자전거여행이든 3일째가 제일 힘겨운 법이다. 그 순간을 넘기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완주를 할 수 있다. 그만큼 고비라는 뜻이다. 여행 수첩에도 그날 무척 힘들어다는 기록이 구구절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필자는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후미에 섰는데 말이 사진사 역할이었지 다리가 후들거려서 자연스럽게 뒤로 처졌던 것이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힘겨운 날에 멜리데 인근에서 철웅이를 만났다. 대학생이었던 철웅이는 다국적 팀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영어를 잘해서 그런지 일행들과 능숙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 그대로 다국적으로 '놀고' 있었다. 얼마나 부럽던지!

거의 한 시간 이상 철웅이와 이야기를 하며 걸은 것 같다. 홀로 걸었으면 그냥 주저앉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격려를 하며 걸어가니 훨씬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격언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그렇게 동행이 되어준 철웅이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딱히 해줄 건 없고 해서, 내륙에 위치한 멜리데가 왜 수산물(문어)의 산지인지를 알려주었다.

"혹시 충남 논산에 강경이라는 곳 알아요? 거기도 내륙 안쪽에 있는 곳인데 젓갈 산지로 유명해요. 예전에는 쌀과 수산물 집산지로도 유명했고요. 그게 다 금강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 강을 따라 배들이 올라왔던 겁니다. 이 곳도 마찬가지에요. 대서양에서 잡은 문어를 옛날에는 내륙수운을 통해서 여기까지 가지고 온 거죠."

실제로 멜리데 주위로 카타솔 강(rio catasol)과 프레로스 강(rio furelos)이 흐르는데 이 두 강은 합수되어 울라 강(rio ulla)이 된다. 이 울라 강은 대서양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강경도 이와 비슷하다. 금강은 옥녀봉 인근에서 논산천을 합수하여 더 큰 강폭을 자랑한다. 그리고는 유유히 서해바다로 빠져나간다.

 

 


 
▲ 철웅이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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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워도 아니말이 되지 말자!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아직 철웅이처럼 대학생 신분이거나 과감히 사직서를 쓰고 온 20대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은 아직 스트레스 사회의 중심에 섰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본격적인 스트레스 사회 진입을 위해 준비중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이 직면해야 하는 현실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갑보다는 을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 사회의 중심에 놓이게 되면 대왕 물집을 터트리며 걷는 순례길의 현실을 무척이나 그리워 할지 모른다. 그런 척박한 현실이 싫다고 도망갈 수 없다. 그러면 정말 '아니말'이 되는 것이다. '아니말'이 되지 않기 위해 파이팅 한 번 해보자. 좀 늦었지만 2015년 새해 각오도 다지면서...

"힘들고 외로워도 파이팅입니다! 가야할 길이면 가야 하는 게 운명이잖아요. 여행이든 현실이든..."

 

 



 
▲ 메모 한국인 순례자가 적어 놓은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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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장거리 도보여행을 할 때에는 일반 운동화보다는 트레킹화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 예행연습을 하며 미리 국내에서 길을 들여야 한다.

 


2. 트레킹화는 자신의 발보다 5㎜ 정도 큰 것을 장만하는 게 좋다. 그 여유 부분은 양말이나 끈 조임으로 조절할 수 있다. 한편 개인적인 건강에 따라 발이 부을 수도 있기 때문에 트레킹화는 꽉 끼지 않는 것이 좋다.

 


3. 우리팀의 막내는 너무 꽉 끼는 트레킹화를 가지고 왔는데 현지에서 신어보고야 그걸 알았다고 한다. 국내에서 예행연습을 하지 않아 이후 큰 고생을 하게 됐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산티아고 순례길, 밥도둑들에게 도시락을 빼앗기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③] 버렸더니 채워졌다

 

14.12.22 10:14 최종 업데이트 14.12.22 10:14

 

 

 

 

 

 

 

 
▲ 포르토마린(Portomarin) 포르토마린을 흐르고 있는 미뉴(Minho)강. 강 한가운데 로마시대에 지어진 다리의 잔해가 있다. 서기 2세기에 지어진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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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5일, 여행 3일째


순례팀은 전날 기차를 타고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사리아(Sarria)에 도착했다. 사리아는 순례길의 종료점인 산티아고 시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굳이 사리아에서 순례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완주증' 때문이었다. 100km만 걸어도 정식으로 발급되는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하면 순례길의 메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의 전 구간, 즉 800km를 다 걸은 이에게만 완주증이 발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00km 이상 걸은 이에게도 발급한다는 건 그만큼 더 순례길을 대중화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여건상 전 구간을 종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에 도달하면 '완주'를 인정해주겠다는 뜻이다.

 

 



 
▲ 사리아 사리아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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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짐은 고행의 지름길


아침부터 계속 비가 오락가락했다. 우비를 부실한 걸 챙겨와서 그런지 입어도 변변찮았다. 트레킹 첫날 오전부터 '삐끄덕'거리는 느낌이다. 비도 그랬지만 가장 문제였던 건 짐이었다.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배낭에 한 가득이었다. 배낭을 제대로 못 닫을 정도로 짐이 넘쳤다. 인천공항 수하물 코너에서 무게를 체크 할 때는 12㎏이었다. 그때는 그럭저럭 버틸 만 했는데 오전에 배낭을 매어보니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전날 마트에서 과소비(?)를 해서 그랬던 것이다.

스페인의 물가는 다른 유럽국들보다 더 저렴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식료품을 구매한 것이다. 우유, 치즈, 버터, 요거트, 빵 등은 한국보다 더 저렴해서 그런지, 한가득 집었는데도 8유로(1유로: 약 1400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필자는 자칭 빵돌이, 치즈돌이인 터라 매우 흐뭇하게 마트에서 나올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콧노래를 부르며 그것들로 저녁을 먹었고, 다음 날 점심에 먹을 도시락도 준비했다. 버터를 바르고 치즈도 넣고, 딸기잼으로 마무리 한 특선 도시락을 넉넉히 준비하였다. 또 남는 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배낭 속에 넣었다.

'무겁더라도 다 가져가야지. 어떻게 먹을 것을 버리고 가나!'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고 있는 순례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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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배낭이 무겁지! 배낭 무게는 자신의 몸무게의 10%를 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배낭이 30리터든 60리터든 빈 공간을 다 채우려고 드는 것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심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것저것 다 챙겨 넣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필자는 원래 짐에다 부식까지 잔뜩 더 짊어졌기에 어깨를 늘어뜨리며 걸어야 했다.


과도한 짐들은 어깨를 내리 누르고, 허리와 무릎에 부담을 가중시킨다. 즐거워야 할 도보여행길은 고행길로 바뀌게 된다. 물론 순례자라면 일정 정도 고행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과도한 고행은 도보여행 자체를 망칠 수도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길을 여행하려고 스페인에 왔지, 골병들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니까. 

 

 

 



어깨는 짓눌리고, 뱃속은 부글부글...

어쨌든 필자는 첫날, 고행과 더불어 고역을 겪어야 했다. 과도한 짐무게로 어깨는 내려앉을 것 같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배까지 아파왔기 때문이다. 유제품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엄청 배불리 먹었다가 탈이 난 듯싶었다. 과유불급이라고 적당히 사고, 적당히 먹었어야 했는데...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뱃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그러다보니 주위 풍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무척 아름다운 풍광이 연이어 이어졌지만 필자의 눈은 그저 화장실을 찾는 데 혈안이 됐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노상방변(?)까지 심각하게 고려를 했을까.

 

 



 
▲ 바르(bar) 사장 바르(bar) 사장과 '밥도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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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점까지 100km가 남았다는 표지석을 뒤로 하고 바르로 내달렸다. 'bar'를 영어로는 '바'라고 하지만, 스페인어는 발음 기호가 없이 로마자 그대로 읽어 '바르'라고 한다. 스페인도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공공화장실 개념이 희박하다. 마드리드 지하철역에도 화장실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행 중에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바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아주 시원하게 일을 처리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밀려나가듯 무척 후련했다. 박재동 화백이 저술한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에서는 아침 인사말이 '화장실을 잘 갔냐?'였다. 해외여행을 하면 긴장감 때문에 일을 시원하게 못 보기에 그런 인사말이 오갔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순례길을 걷는 첫날부터 아주 유쾌하게 처리했다. 역시 도보여행은 화장실 '도우미'다.

 

 



'밥도둑'들에게 도시락을 빼앗겼다

비웠으니 다시 속을 채울 때였다. 전날 준비했던 특선 도시락이 빛을 발했다. 1유로 짜리 커피 한 잔과 함께 도시락을 펼쳐놓았다. 이제 맛있게 점심을 즐길 시간이었다. 그런데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밥도둑'들이 몰려들었다. 그 녀석들은 순식간에 주위를 감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길 닦아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고, 도시락 뚜껑을 여니까 누렁이랑 야옹이가 먼저 달려드네!'

 

 


 
▲ 밥도둑 누렁이 표정이 참 거시기해서 빵조각을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었다. 앉은 자세도 참 거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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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치즈, 잼을 골고루 넣은 빵맛이 좋았나 보다. 한두 점 떼어주면 그것만 먹고 돌아설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다. '밥도둑'들은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도시락 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녀석들 빵맛을 아는구먼!'

그런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안양 삼막사에 있는 토종개 삼총사가 생각났다. 밥 때에 맞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공양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 토종개들...

그렇게 버릴 건 버리고, 채울 건 채웠더니 그제야 주위 풍광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다. 순례팀이 도보여행을 시작했던 사리아와 대성당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모두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속해 있다. 갈리시아는 이베리아반도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왼쪽 면에는 대서양과 맞닿아 있고, 기후는 다른 스페인 지역과 달리 대체로 습하다. 또한 비도 많이 내리는 지역이다.

 

 



 
▲ 소몰이 한 지역 주민이 소떼를 몰고 있다. 소들도 이런 산책(?)이 익숙한 듯 나름대로 진영을 갖춰 이동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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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제주 올레길을 떠올리다


필자도 나름대로 도보여행가라 이 곳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봤다. 갈리시아 지역은 대체적으로 산악지형이었다. 여행기 2편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에 의해 서고트 왕국이 멸망당했고, 옛 귀족들이 규합하여 반도 북부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설립했다고 언급했다(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가까스로 막아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 곳의 지형은 경사도가 가파르지 않고 무척 순했기 때문이다. 산악지형이긴 했지만 산들은 완만한 언덕배기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급격한 경사도를 나타내는 지형은 거의 없어 보였다. 방어력을 높여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천혜의 요새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험준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코르도바 왕국은 반도 북부지역을 점령할 의지가 없었다고 기술한 역사책도 있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지형을 방패삼아 방어를 잘 한 것이 아니라 애초 이슬람인들에게 북부지역은 관심권 밖이었다는 이야기다.

 

 


 
▲ 돌담 너머 보이는 목초지 넓은 평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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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만한 지형과 풍부한 강수량 때문인지 갈리시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목축업이 잘 발달되었다.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에서 소와 말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는 풍광은 갈리시아 지역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아름답고, 시원스러웠다.


순례팀은 약 25km를 걸어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도착했다. 미뉴(minho river)강을 넘어 다다른 포르토마린은 그 자체로 절경이었다. 미뉴강의 흐름으로 생성된 완만한 협곡 지형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현대식 교량으로 미뉴강을 넘지만 중세시대의 순례자들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교량을 넘어 도시로 진입했다. 그 교량은 서기 2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아직도 강 한복판에는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정겨움이 가득한 돌담들 너머 소와 말들이 한가롭게 초원을 누비는 모습, 미뉴강이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고 있는 포르토마린까지 보고 있자니 제주도가 생각났다. 또한 자연스럽게 올레길도 연상됐다. 필자가 산티아고에서 제주 올레를 떠올리듯, 유럽 출신 순례자들이 제주 올레를 걷는다면 산티아고 카미노를 떠올릴지 모른다. 필자는 평소에 지론이 하나 있다.

'아무리 지역이 다르더라도 아름다움은 서로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 포르토마린 포르토마린에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다리가 있었다. 중세시대 순례자들은 그 다리를 넘어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사진에서 보는 잔해물들이 그 다리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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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필자는 짐을 꾸릴 때 3-3-3 원칙을 썼다. 속옷 3, 양말 3, 상의 3. 이런 식으로 짐을 꾸렸다. 순례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서 그런지 일부 순례자들 중에는 '단벌신사'들도 있었다. 하여간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 옷을 너무 많이 휴대하지는 말자. 가벼운 짐은 순례여행을 더 알차게 만들 것이다.

2. 배낭이 커지면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고 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러니 배낭은 40리터가 넘지 않는 것을 구매하는 게 좋다. 여성순례자들이라면 30리터짜리 배낭을 메는 것도 좋을 듯싶다. 

3. 스페인의 11~12월은 우기라고 한다. 하루에도 비가 계속 오락가락한다. 그러니 꼭 우비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침낭도 필수다. 침구류가 없는 알베르게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4. 도시락용 플라스틱 용기를 준비하자. 의외로 많은 순례자들이 자신이 만든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대신했다. 바르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먹는 도시락도 그럭저럭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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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2부

 

 

 

 

 

 

---> 전편에 이어서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 스페인 가족은 포르투갈과 인접한 지역인 비고(Vigo)에서 왔는데 순례길을 걷는 내내 자주 마주치게 됐다. 동선을 함께한 것이다. 야고보 성인을 캐릭터화한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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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대로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된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무려 800km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넣는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필자의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다 책 <새 유럽의 역사>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됐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 성인인 야곱(기자 주. 야고보)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했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좇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인가?

 

 

 

 


국토 회복 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 무어인을 무찌르는 야고보 17세기 작품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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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9세기 초,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 중 유일하게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 12세기 경의 스페인: 북부 지방을 제외하면,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코르도바 왕국의 영역이다. 코르도바 왕국은 이슬람 무어인들이 세운 나라다.

 

 

 

 

 


이런 국토 회복 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 회복 운동은 이슬람 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 회복 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 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큰 역할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와 관련해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의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것이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돼주었던 것이다.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 산티아고 대성당 산티아고 대성당에 선 필자. 대성당은 당시 공사중이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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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대성당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한편 고생 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 순례길 팀에도 '어떻게 그 당시 항해 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냐'고 말씀한 분도 계셨다.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로 판단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짜 순례자들이라면 몸은 고달프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그릇된 배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돼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사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야고보가 묻힌 것이 맞냐'라는 필자의 의구심은 해소가 됐는가? 그걸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물음표는 그저 물음표로 남겨 두겠습니다. 어쩌면 느낌표가 대신 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관촉사 은진미륵에서 선한 감흥을 받았을 때도, 56억 7천만 년 후에 부처님이 도래한다는 미륵불 신앙을 기계적으로 믿어서 얻은 불심이 아니었거든요. 산티아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야고보가 묻혀 있든 아니든 저는 대성당에서 성소를 체험했기에 그 감흥을 느낌표로 간직하고 싶네요!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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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1부

 

14.12.19 10:47 최종 업데이트 14.12.19 14:03
 


 

 

 


 
▲ 산티아고 카미노 순례자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는 야고보를, 카미노는 길을 뜻한다. 즉, 산티아고 카미노는 '야고보 길'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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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한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열두 제자였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왔다. 고된 사역 길 이후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 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년 7월 25일에 참수를 당하고 만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된 것이다.

 

 



민중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 성인 야고보 산티아고 대성당 벽면에 새겨진 야고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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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하게 됐다고 한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 만큼 그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그 먼, 당시는 로마 지배하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것이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다.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 속에서 '부활'한 것은 8세기경이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 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당시 스페인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한다. 그렇게 해서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이후 대성당이 있는 곳에 도시가 들어서니, 그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 스페인어로 '길')에 녹아 있는 역사적 스토리텔링이다. 이 내용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언론들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 책자에도 기술돼 있다.

 

 

 

 

 



정말 산티아고 대성당에 성인 야고보가 잠들어 있을까? 

 

 
▲ 산티아고 순례길 지도상에 표기된 길은 순례길의 메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길이다. 프랑스 길 이외에도 북부길, 포르투갈길 등 다양한 지선들이 있다. 산티아고 정보를 담은 현지 홈페이지 자료이다.
ⓒ 산티아고홈페이지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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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린다. 말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종교다원론자(?)인 필자도 200km 남짓 되는 순례길을 걸으며 짧게나마 필그림이 됐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그 영감은 예전에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봤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다. 그러한 '신성한 느낌'에 이끌려서 그랬는지, 필자는 이후 계속된 스페인 여행에서 일부러 각 지역에 있는 성당들을 골라 탐방하기도 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필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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