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형경기장: 이탈리카에 있는 원형경기장. 2만 5천 명 정도가 입장할 수 있었다. 이탈리카 인구가 약 8천 명 정도이니 상당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재미난 스페인 19편> 이탈리카

 

스페인에 세워진 최초의 로마 도시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관람료가 무척 저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창덕궁을 스페인에 가져다 놓으면 입장료가 얼마가 될까? 지금 내는 돈의 5~6배, 많으면 10배 정도까지 더 지불해야 될지 모른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으로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을 탐방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돈도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다. 어쨌든 한국보다 스페인의 문화유산 관람료는 월등히 비싸다. 그래도 가물에 콩이 나듯 아주 저렴한, 혹은 공짜로 답사를 할 수 있는 곳들도 있다. 이번에 소개할 이탈리카(Italica) 유적지가 바로 그런 곳이다. 관람료가 겨울 1.5유로였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2,300원 정도.

이탈리카는 세비야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산티폰세(Santiponce)에 속한다.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탈리카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유적이다. 이탈리아반도 밖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로마 도시가 바로 이탈리카였다.

세비야에서 이탈리카까지 걸어갈까 하다가 초행길이고, 너무 덥기도 해서 그냥 시내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검색해보니 아르마스(armas)터미널 밖, 정류장에 산티폰세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참고로 아르마스 터미널은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는 버스가 있을 정도로 큰 터미널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안 오는 것이다. 알고 봤더니 터미널 내부 플랫폼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한여름 안달루시아의 햇살은 정말 강렬했다. 그 햇살을 바라보니 현기증이 일어났다. 결국 오후 늦게 이탈리카 정문 앞에 도착했다.

‘닫힘(cerrado)’

오후 3시를 겨우 넘은 시각인데 벌써 영업이 종료된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 뜨거운 안달루시아의 여름 햇살을 맞으며 터벅터벅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갑자기 냉면이 생각났다. 먹을 수 없으니 더 간절했다. 다음날 재도전에 성공했다. 관람 마감 시간은 오후 3시까지였는데 적어도 1시간 이상 걸리니 이점을 참조해서 가시면 좋겠다.

 

 

* 로마 가옥들의 모자이크: 옛 로마인들의 미적 감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탈리카는 제2차 포에니전쟁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와 로마가 맞붙은 전쟁으로 총 3번에 걸쳐 일어나는데 그중 제2차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 불렸다. 그만큼 한니발의 역할이 지대했던 전쟁이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다 패배했고, 결국 기원전 146년에 멸망하게 된다.

기원전 206년이었다. 2차 포에니전쟁이 시작된 지도 벌써 12년이 지났을 때였다. 세비야 인근, 일리파에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카르타고군을 크게 무찌른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땅에서 연전연승했듯이 스피키오도 이베리아반도에서 연전연승했다.

하지만 수크로(Sucro)항에 있던 로마 군인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다. 일명 수크로 반란이 일어난 것인데 스피키오는 이 반란도 제압하고, 서남부 카디스로 이동해 카르타고의 잔당들을 소탕한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것이다. 참고로 수크로는 현재 수에카(Sueca)로 불리는데 발렌시아에서 남쪽으로 약 35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다.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로마군은 지쳐갔다. 부상자도 속출했는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형편이 못 됐다. 이에 스피키오는 군인들의 불만을 달래주기 위해 세비야 인근에 도시를 건설한다. 그곳이 바로 이탈리카였다. 군복무 시절에 부대 앞에서 보았던 군인아파트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탈리카는 로마가 스페인에 만든 최초의 정착지였다.

 

 

 

* 원형극장: 이 통로를 따라 검투사들이 지상으로 올라갔다. 결투를 앞둔 검투사들은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이탈리카 입구에서 오른쪽을 보니 원형극장이 있었다. 이탈리카 원형극장은 2만 5천 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이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니 그 절반 수준이다. 그렇다고 이 원형극장이 다른 도시에 있는 원형극장에 비해서 작은 편이 아니었다. 타원형의 형태인 이탈리카 원형극장은 중심축 길이가 160m고, 경기장 한 가운데 지하공간이 있다. 이 지하공간 위로는 나무 덮개를 덮을 수 있게 만들었다.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었지만 탐방 동선이 잘 짜여 있어서 관람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혈투를 펼치기 전, 검투사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던 지하공간에 가보았다. 습한 눅눅함이 감돌 뿐, 그 옛날 검투사(글레디에이터)들의 비장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첨단 AI시대에 그런 고대시대의 감성을 찾고 있는게 좀 구닥다리인가?

로마의 최전성기는 5현제, 즉 5명의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네르바(12대), 트라야누스(13대), 하드리아누스(14대), 안토니누스 피우스(15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대)가 그들이다. 네르바가 기원후 96년에 집권했고, 아우렐리우스가 180년에 죽음을 맞이했으니 5현제의 치세 기간은 약 84년 정도가 된다. 이들 중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와 하드리아누스(117~138년)가 이탈리카 출신이다. 처음에는 군인들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황제까지 배출한 도시가 된 것이다.

 

 

 

* 이탈리카 원형극장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에 로마는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후임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제국의 유산들을 행정적으로 잘 관리하였다. 제국의 방비를 위해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 같은 성벽 시설을 축조하기도 한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브리튼족을 막기 위해 영국 땅에 세운 긴 성벽을 말한다.

로마는 이베리아반도 점령지를 히스파니아(Hispania)로 불렀는데 처음에는 반도의 동남지역에 국한됐다. 이후 점령지를 점점 더 넓혀가 기원전 19년,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이때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히스파니아를 로마 제국에 편입시킨다. 이제 히스파니아는 식민지가 아닌 로마 제국의 동등한 구성원이 된 것이다.

이런 권리의 향상이 있었기에 속주였던 히스파니아에서 황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5현제 중, 두 명의 황제가 탄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일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 가옥 지구로 향했다.

 

 

* 물고기잡이 모자이크: 사진 오른쪽 상단에 로마식 화장실이 있다.

 

 

 

로마가 만든 도시답게 대중목욕탕도 있었고, 빵집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원형경기장처럼 폐허로 남은 흔적들을 잘 갈무리하여 전시하는 방식이었다. 한쪽 편에 옛 화장실도 있었다. 돌에 엉덩이를 올려놓을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고, 아래로는 물이 흘러 용변을 치우는 식으로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자세히 보니 엉덩이를 올려놓는 돌이 대리석이었다. 저기서 일을 치르면 쾌변을?

가옥들은 벽면이 다 허물어지고, 거의 바닥만 남아 있었다. 그 바닥에는 모자이크 장식이 정교하게 남아 있었다. 꽃, 새, 동물 같은 자연물부터 기호, 도형 같은 표식, 그리고 수렵 장면이나 신의 모습까지 그 형태도 다양했다. 집 바닥을 그런 형형색색의 모자이크를 장식했다니! 로마인들의 미적 감각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특히 새들로 장식된 모자이크는 당장 갤러리에서 전시를 해도 될 만큼 뛰어난 감각이 느껴졌다.

이탈리카 탐방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세비야로 돌아왔다. 스페인의 다른 관광지보다 월등하게 저렴한 입장료를 지불했지만 그 만족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 만족감은 세비야에서도 이어졌다. 세비야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오랜만에 김치찌개를 먹었기 때문이다. 탐방도 만족! 김치찌개도 만족!

 

* 새 모자이크: 당장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해도 될만큼 뛰어난 작품성을 나타내고 있다.

 

 

* 이탈리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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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타헤나: 컨셉시온성에서 바라본 풍광. 하단부에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극장이 보인다.

 

 

 

<재미난 스페인 18편> 카르타헤나

로마가 무서워했던 한니발, 그의 근거지 카르타헤나

 

가브리엘은 주정뱅이였다. 그를 만난 건 스페인 남부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있는 한 오스탈(hostal)이었는데 그는 볼 때마다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호스텔(hostel)을 스페인에서는 오스탈이라고 부른다. 낯선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필자를 앉혀두고 스페인어를 속사포처럼 구사하고 있었다.

대충 들어보니 자신은 카르타헤나 출신이고, 이 동네는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로마보다도 먼저 페니키아인들이 정착지를 만들 정도로 카르타헤나는 중요한 지역이라고 했다. 가브리엘은 침을 튀기면서 열변을 토했지만 그가 하는 말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또 필자는 카르타헤나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정이 이러했지만 가브리엘이 민망하지 않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베리아반도는 문명의 십자로였다. 그래서 많은 이민족들이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했다. 서고트족 이전까지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 대표적인 세력은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였다. 이들 중 페니키아가 큰 영향을 끼쳤다.

페니키아인들은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거점을 두고 지중해에서 활발하게 교역 활동을 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이집트로 목재를 수출했고, 파피루스를 수입했다. 레바논에는 레바논 산맥이 있어 중동에 있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나무를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가 백향목이다. 레바논 소나무로 불리는데 현재 레바논 국기에도 표시되어 있다.

 

 

 

* 로마극장: 카르타헤나의 로마극장의 야경. 카르타고 시절은 물론 로마시대에도 카르타헤나는 무척 중요한 지역이었다.

 

 

 

파피루스는 비블로스(Byblos) 항구에서 배에 실려 그리스로 수출됐다. 이런 점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중계항의 이름을 따서 파피루스를 ‘비블로스’라고 칭했다. 바이블(bible)과 책(book)의 어원도 비블로스가 된다. 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문자의 기원이 된 페니키아 알파벳도 비블로스에서 만들어져 그리스로 전해졌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페니키아의 비블로스 항구는 서구 문명의 모태였다고 할 수 있다. 비블로스는 현재 주바일로 불리고 있다.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1100년경부터 이베리아반도에서 상업활동을 했다. 그들은 향수, 염장(소금에 절인 생선), 귀금속 등을 팔았고, 금과 은 등을 사서 갔다. 페니키아가 쇠퇴하자 그 자리를 그리스인들이 채웠다. 그리스인들은 서남부의 해안선을 따라 정착촌을 만들었고, 이베리아인들에게 제련기술, 건축, 공예품과 같은 문물들을 전수해주었다. 이 당시에 스페인 고대문화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진다. 바로 <엘체의 여신상>이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 지금의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세워진 나라이다. 페니키아 혈통인 카르타고는 작은 도시 국가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차츰 페니키아의 식민지들을 병합해나갔다. 페니키아는 페르시아와 같은 중동지역의 국가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던 페니키아 식민지들은 무주공산이 되었고, 그 틈을 타고 카르타고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신흥강자로 등장한 것이다.

 

 

 

* 엘체의 여신상: 출처 위키커먼스

 

 

 

 

예전에 마피아들이 들끓었던,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은 지중해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더군다나 튀니지의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는 불과 20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 시칠리아에 로마인들이 들어와 지중해 무역을 하려고 했다. 카르타고가 느긋하게 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 지중해를 두고 펼쳐진 두 세력 간의 대결은 숙명과도 같았다.

기원전 264년, 1차 포에니(poeni) 전쟁이 발발했다. 페니키아인을 뜻하는 라틴어는 Poenicus인데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페니키아의 후예로 보았다. 그래서 카르타고와 로마와의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원전 241년, 23년간의 공방 끝에 로마가 승리를 했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한다.

카르타헤나 답사는 컨셉시온성(Castillo de la Concepción)에서부터 시작된다. 컨셉시온성은 구시가지의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카르타헤나가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카르타헤나항 입구를 좌청룡 우백호처럼 양 옆으로 산들이 서 있고, 그 가운데로 배가 오간다. 항아리처럼 항구 안쪽은 넓고, 물살은 잔잔하다. 입구를 지키는 산들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카르타헤나항은 지금도 스페인 해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잠수함의 모항으로까지 쓰이고 있다.

 

 

 

* 린테르나타워(Torre Linterna): 9세기 경에 제작된 탑으로 등대로 쓰였다. 또한 항구 일대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도 했다.

 

 

 

이렇게 중요한 지역을 도시로 만든 인물은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맹활약을 했던 한니발(Hannibal)이 그의 아들이다.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도 1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로마군과 싸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명장이었다.

기원전 227년, 하밀카르 바르카는 북아프리카를 떠나 이베리아반도 동남부에 카르타헤나의 전신인 카르타고 노바(Carthago Nova)를 건설했다. 새로운 카르타고라는 뜻이다. 이곳은 방어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에 은 광산도 있고, 곡물 생산에 유리한 경작지도 펼쳐져 있었다. 카르타고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하밀카르 바르카는 자신의 가문, 즉 바르카 가문이 이베리아반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큰 토대를 세웠다. 그는 와신상담하듯, 이베리아반도에서 로마와 맞설 군대를 키워나갔다.

로마 정복이라는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하밀카르 바르카가 죽는다. 권력은 그의 사위인 하스두르발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하스두르발도 대업을 실행하지 못한 채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제 드디어 한니발이 카르타노바의 최고 권력자로 오르게 됐다. 한니발은 자신 가문의 오랜 염원인 로마 정벌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다.

드디어 진격의 나팔이 울렸다. 한니발 부대가 로마의 보호 아래 있던 사군툼을 공격한다. 이 공격이 시발점이 되어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이 시작됐다. 사군툼은 현재 사군토(Sagunto)라고 불리는데 발렌시아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다.

 

 

 

* 로마 대 카르타고: 포에니 전쟁을 형상화한 기념품

 

 

 

한니발은 무려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남부 프랑스를 거쳐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공격용 코끼리도 동원할 정도로 카르타고 군대는 위력이 대단했다. 이에 로마는 크게 당황한다. 코끼리까지 동원한 대규모의 병력이 이탈리아 땅에 침입했으니 크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물론 카르타고 군은 오랜 기간 행군을 하면서 많은 병력 손실이 있었다. 하지만 로마와 전투가 벌어지자 한니발은 큰 활약을 펼치며 연전연승을 했다. 많은 로마인들은 한니발에 대해서 공포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승리를 거둔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로마를 구한 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였다. 한니발이 그랬던 것처럼 스키피오도 허점을 노리는 전술을 펼친다.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 군대를 제쳐두고 카르타고 노바를 공략한 것이다. 결국 한니발의 근거지이자 자원 줄이었던 카르타고 노바는 로마군에 의해 함락당한다. 이후 스키피오는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카르타고 식민지들을 차례대로 점령해나갔다.

 

 

 

* 포에니 전쟁: 포에니 전쟁을 표현한 디오라마. 스페인 북부 하카에 있는 군 박물관에서 찍었다. 카르타고의 코끼리부대가 인상적이다.

 

 

카르타고는 이런 빈집털이(?) 전략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세비야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알카라 델 리오(Alcalá del Río)라는 평원이 있는데 이곳의 옛 지명은 일리파였다. 기원전 206년, 일리파에서 마고 바르카가 지휘하는 카르타고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가 맞붙는다. 마고 바르카는 한니발의 동생이었다. 그도 풍부한 실전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스키피오에게는 못 당했다. 일리파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크게 패배했고,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만다.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를 끝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료가 된다.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은 크게 패배했고, 로마군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당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호명되는 영웅호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컨셉시온성은 그 자체로 훌륭한 전망대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였다. 카르타헤나의 일몰을 감상한 후 숙소에 갔더니, 역시나 가브리엘은 취해있었다. 필자가 아는 체를 하자,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페니키아인들의 전통 인사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서로 무릎을 들어서 우측으로 한 번, 죄측으로 한 번 부딪히는 방식이었다. 무슨 닭싸움 같았다. 서로의 무릎을 부딪치며 인사하는 방식이 존재하나? 주정뱅이의 취기 어린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짜임새가 있어 보였다.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레바논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무릎 인사를 해봐야겠다. 잘못해서 필자가 ‘니킥’을 맞으면, 다 주정뱅이 가브리엘 때문이다!

 

 

 

* 카르타헤나 시청: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카르타헤나 시청 건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져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 카르타헤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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