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종교다원주의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큰 감흥을 느꼈었다. 사찰을 탐방하는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는 합장부터 하며 가람을 누볐다. 또한 간간이 교회도 갔고, 그 곳에서 이웃 사랑에 대해서 곱씹어 보기도 했다.

 

무속신앙도 빠질 수 없다. 친분이 있는 무속인이 있는데 작두를 아주 잘 탔다. 그 분 따라 작두잡이를 여러 번 해봤다. 작두잡이를 할 때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되기에 입에다 ‘함’을 물린다. 작두굿은 유혈이 낭자하는 경우가 많기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작두굿은 종료가 되고 관객들은 한 명씩 차례로 공수를 받는다. 공수는 신이 무당의 입을 빌려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때서야 작두잡이들도 긴장감에서 해방이 되어 입에 문 함을 뱉어낸다. 침방울로 범벅이 된 함을 그냥 태울 것인가? 안 된다. 함을 열어봐야한다.

“앗싸 돈 들어있다! 작두잡이 값이다.”

* 인왕산 성곽길

● 바위산인 인왕산

이번에는 우리나라 무속 신앙의 메카 같은 곳을 향해 간다. 그곳은 인왕산에 있는 선바위다.

인왕산은 바위산이라 그런지 돌이 많기로 유명하다. 호랑이바위, 투구바위, 해골바위 등등... 독특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참 많다. 원래 인간은 자연이 빚어놓은 형상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이 바위에도 투영되니 거석숭배문화가 발생했다. 인왕산 선바위는 그런 애니미즘적인 거석숭배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선바위는 가로 7미터, 세로 10미터 정도로 인왕산의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규모가 큰 바위인데다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인왕산에 다른 바위들이 많은 터라 좀 자세히 봐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선바위를 비롯해 인왕산의 남서부 일대를 한 발짝 떨어서져 조망하고 싶다면 인왕산이 아닌 그 앞쪽에 있는 안산(鞍山)에 올라가보자. 안산은 무악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이다. 서대문 형무소가 위치해있을뿐더러 유명한 안산자락길이 있어 도보여행자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는 산이다. 그 무악재에는 2017년에 무악재하늘다리가 놓여서 두 산을 연결하고 있다.

안산은 ‘편안한 안(安)’이 아닌 ‘안장 안(鞍)’을 쓴다. 산이 말 안장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 안장 형상을 제대로 인지하려면 인왕산, 그 중에서도 선바위 인근에서 바라봐야 한다. 가까이에서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있고, 반대로 멀리서 봐야 그 전체 틀거리를 알 수 있는 게 있다.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상황에 따라 줌인 / 줌아웃을 적절히 해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선바위

 

 

● 선바위와 국사당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는 ‘애국자 바위’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년(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궁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제가 예전에 작두 좀 탔습니다.”

국사당 앞에는 작두를 타는 단이 있는데 그 앞에서 좀 있어 보이려고 저런 멘트를 했었다.

 

“정말요? 무섭지 않았어요?”

“작두날이 날카롭지 않아요? 피 날 거 같은데.”

“아니 제가 탔다는 게 아니라... 전 작두잡이를 하면서요... 작두잡이 하면 돈도 입에다 물려줘요. 공수도 받고, 돈도 받고...”

돌아오는 반응은 항상 작두의 날만큼 매서웠다. 그럼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궁색해져 돈 타령으로 급히 마무리 할 수밖에...

 

 

* 국사당: 국사당에는 당연히 주차장이 없다. 그래서 제사 물품을 지게로 나른다. 최첨단 시대이지만 한편으로는 올드 스타일도 존재하는 법이다.

 

●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 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무속의 메카답게 오늘도 선바위에는 많은 이들이 와서 기도를 올린다. 아이를 낳게 해 줄 수 있는 바위라 그런지 확실히 여성들이 더 많다. 신엄마, 신딸로 보이는 무속인 무리들도 자주 보인다. 심지어는 외국인 여성도 와서 기원을 드리더라. 확실히 선바위의 기도빨이 좋긴 좋나보다. 그 여성 외국인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꽤 오랫동안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선바위 앞에서 필자도 조심스럽게 합장을 하였다. 무슨 기원을 드렸을까? 로또대박? 역사트레킹이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역사트레킹만큼은 정말 잘하고 싶으니까!

 

* 선바위와 한양도성: 선바위의 뒷모습. 선바위가 한양도성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 눈내린 인왕산 성곽

 


■ 선바위

1. 코스: 안산자락길 ▶ 무악재하늘다리 ▶ 선바위 ▶ 국사당

2. 가는법: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하차한 후 선바위로 바로 올라갈 수 있음. 하지만 안산자락길을 좀 걸은 후 무악재하늘다리를 통해 선바위를 탐방하는 코스를 추천함. 길도 예쁘고 완만해서 부담없이 걸을 수 있음.

3. 같이 가면 좋을 곳: 인왕산 수성동계곡

* 선바위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기원이 행해지는 곳이 어딜까? 정답은 서울이다.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다 기원을 한다. 건강, 학업, 승진, 시험... 누구는 로또.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원을 올린다.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기도를 드리겠지만 단어가 달라진다고 내용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성경책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불경 위에 올려진 합장한 손은 종교적인 구분만 있을 뿐 그 속에 담은 마음만은 동일하다.


무속신앙도 마찬가지다. 정화수를 떠놓고 바퀴 굴리듯 손을 비벼대며 올리는 기원도 외형만 다를 뿐이다. 잘 되라고, 건강하라고, 사랑하라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정성인 것이다.

오늘 탐방할 곳은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이다. 이곳 인왕산에는 한국에서 가장 기도빨이 잘 받는 기도터가 있다.

 




* 인왕산역사트레킹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울에도 좌청룡·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좌청룡·우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인왕산이 우백호라면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인왕산과 낙산, 거기에 남산과 북악산을 더해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안쪽의 4개의 산이라는 뜻이다. 이 내사산을 기반으로 18.6km의 성벽을 쌓았으니 그것이 바로 한양도성이다.


외사산(外四山)도 있다. 남쪽에서 주작 역할을 하는 관악산, 북쪽에서 현무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 여기에 동쪽의 아차산과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 4개의 산을 일컬어 외사산이라고 칭한다. 이를 두고 필자는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곤 했다.

 

내사산이니 외사산이니 하는 말들이 감이 잘 안 오시죠.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사산은 작은 서울, 외사산은 큰 서울. 지도 놓고 보시면 더 감이 잘 올 거예요.”

 





* 내사산 외사산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워 기원을 올렸다. 그것도 한 곳에만 세우지 않고 여러 곳에 세웠다. 우편번호를 검색해보면 사직동이라는 지명이 꽤 여러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부산에 사직야구장이 있지 않던가.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 지역에 있는 사직단에는 해당지역 수령이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라고 불린다. 그 유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이번편의 주제는 기원이다. 사직단은 국가적인 기원, 즉 풍작을 기원하는 곳이니 주제 적합도가 딱 맞아 떨어진다.

 




* 사직단





그래도 국가적인 기원은 계속될 것이다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자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역 안에 차례로 도서관, 어린이 놀이공간, 단군성전 등이 세워지게 된다. 심지어 수영장도 들어섰다. 애초 사직단의 근본 취지와 동떨어진 건물들이 자리를 잡게 됐다.


그렇게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국가적으로 기원을 드렸던 곳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현재 사직단은 복원정비사업 중이다. 2015년에 시작한 복원 사업은 2027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무려 12년 동안 진행된다. 상처가 깊었던 만큼 복원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는 셈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현대에는 왕도 없고, 국가적으로 제례를 드리지도 않는다. 농업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더 이상 사신과 직신은 한물간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적인 기원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녀상을 두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는 것과 세월호를 두고 진실규명을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 선바위






승복을 입은 선바위?

 

국가적인 기원을 올렸던 사직단을 탐방했으니 이제 개인적인 기원을 드리는 곳으로 가보자.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선바위다.


인왕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바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도빨이 잘 받는 곳 중에 하나다. 특히 아이를 잘 잉태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이런 말을 간간이 건넸다.

 

늦둥이를 낳고 싶으신 분들은 시주 한 번 하시고 간절히 기원하세요!”

 

어떤 대답이 돌아왔을까?

 

지금 있는 것들도 징글징글한데 무슨 놈의 늦둥이야!”

 

본전도 못 찾고 핀잔만 잔뜩 들었다.

 

선바위는 높이 7미터, 가로 10미터 정도가 되는 바위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 있다. 그렇게 바위의 규모가 크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는 애국자 바위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 국사당






국사당과 산악신앙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궁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그렇게 아래쪽에 국사당이 자리 잡게 되니 선바위는 거석숭배문화에다 산악신앙까지 더해지게 된다. 선바위에서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이 국사당 앞에서도 두 손을 모으게 됐다는 것이다.

사직단에서 선바위, 그리고 국사당까지. 인왕산 남쪽은 굵직굵직한 기원 장소가 즐비하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선바위를 빠져나오면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을 걸을 수 있다. 최근 성곽 밖의 순성로도 잘 정비되어 성곽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이다. 인왕산 성곽도 좌청룡인 낙산 성곽길처럼 성돌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더군다나 이 성곽길의 반대편은 자락길로 유명한 서대문 안산이기에 양 옆의 시선이 다 즐거운 곳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의 숨어 있는 보석, 수성동 계곡

 

다음 탐방지는 수성동 계곡이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 계곡인 것이다.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고,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인데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재개발로 사라졌던지.

 





* 창의문







창의문 밖에는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인왕산에도 자락길이 있다. 걷기에 부담이 없는 길이다.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지와 가까운 곳에 이렇게 부드러운(?) 길이 있다는 게 참 좋다. 그렇게 부드럽게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마지막 구간인 창의문을 만나게 된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이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 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창의문의 천장에는 큰 새가 그려져 있다. 필자는 창의문을 지날 때마다 트레킹팀에게 묻는다.

 

저기 위에 그려진 새가 뭐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다. 하지만 꽝! 정답은 닭이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이다. 창의문 밖을 나서면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냄새를 맡은 도보여행자들은 더 이상 길을 나설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럽게 트레킹도 종료되게 된다. 대신 입이 즐거워진다.


사직단, 선바위, 국사당, 성곽길, 수성동계곡, 창의문까지... 거기에 이번 글에 언급하지 않은 윤동주문학관(시인의 언덕)과 이빨바위, 출렁다리까지... 이처럼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인왕산을 소개할 수 있어서 필자도 참 기쁘게 생각한다.

 




* 인왕산 성곽길





난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사람

 

트레킹팀과 함께 열심히 걷다보니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내가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기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레킹에 오신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육체건강이든 정신건강이든 건강에 대한 간절함이 강렬하셨다.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역사트레킹이 거기에 이라는 것이다.


숲길도 걷고, 답사도 하고, 만 보 이상 걸으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튼튼해졌다고 필자에게 신앙고백을 하셨던 분들도 계셨다. 그런 말씀들을 하실 때마다 참 고마웠다. 어쨌든 필자가 건강에 대한 기원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으니까. 좀 우쭐하기도 했다. 복 받을 일을 했으니 이 정도 우쭐함은 괜찮지 않나.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선바위(국사당) 성곽길 수성동계곡 출렁다리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In: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 Out: 창의문(부암동)





* 인왕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10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을 실시합니다. 인왕산 선바위역사트레킹은 정말 인기가 많았던 코스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 십 번에 걸쳐 이 코스를 리딩했답니다. 그때마다 다 호평을 받았었고요.  

 

그런데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카페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비공식적으로는 하기는 했었지요. 하긴 카페가 개설된 지 아직 1년도 안 됐으니, 그런 것들을 시시콜콜하게 따질 필요는 없을 겁니다. 


아참! 이번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10월 29일을 마지막으로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의 세부코스가 전면적으로 재조정 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독립문역에서 만나 이동을 하지만 다음부터는 경복궁역에서 만나 시작할 생각입니다. 


어떠세요?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에 오실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아직 마음이 동하지 않으신 분들은 아래쪽의 사진들과 안내문을 꼼꼼히 읽어주세요. 그럼 분명 마음이 동하실 겁니다 ^^; 



http://cafe.naver.com/trekkingmaster/116  <- 클릭





















4월 16일 일요일.


오랜만에 소셜다이닝 <집밥>에서 모객을 해서 역사트레킹을 떠났답니다.

<집밥>에는 청년들이 많이 방문하기에 저도 간만에 청년들과 함께 트레킹을 했답니다.

주로 장년층들과 함께 발걸음을 같이 해왔던 터라 이번 모임은 좀 설레기도 했었답니다.


아참!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트레킹을 했을 때는 청년층과 좀 했었지요.


어쨌든 저는 청년들이 더 많이 트레킹을 즐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힐링이 필요한 세대니까요. 학업에 쫓겨, 취업준비에 쫓겨... 그렇게

사회에 나와서는 업무에 쫓겨... 진짜 발걸음을 멈추고 한 박자 쉼표를 찍어야 할 세대가 바로 이 땅의 청년들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힐링에 목마른 청년들과 함께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을 행했답니다.

그날 인왕산은 봄꽃이 만발해 있더군요. 형형색색의 봄꽃들이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일상에 시달려서 그랬는지 참가자들 대다수가 그때까지 꽃구경다운 꽃구경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한테 꽃구경을 시켜줘서 너무 고맙다고 이야기한 참가자들도 있었답니다.


그러고보면 봄꽃 덕분에 인왕산선바위 역사트레킹이 확실히 풍성해진 느낌입니다.

하여간 참 좋은 트레킹이었습니다. 우리가 꽃길을 걸을 수 있었으니까요.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낙성대: 비가 오는 낙성대에서. 역사트레킹에 후원해주신 제주도님. 16일에 행한 관악산 역사트레킹 때는 비가 많이 내렸다.







 * 낙성대: 우비를 입고 있는 나.











* 수성동 계곡: 17일에 행한 서울시티 리워드 역사트레킹에 참가한 후원자분들. 17일에는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아니 트레킹 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 역사트레킹 펀딩: 역사트레킹 펀딩이 다음카카오에서 108일간 진행되었다. 여기에 언급된 관악산과 인왕산 트레킹은 그 펀딩에 대한 리워드 차원으로 행해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주말을 매우 의미있게 보냈답니다. 저를 후원해주신 분들과 트레킹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위에 사진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저는 다음카카오에서 역사트레킹 펀딩을 진행했습니다. 목표 금액을 달성하지 못해 아쉽기는 했지만.... -_-ㅋ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펀딩이었습니다.


지난 7월 8일에 펀딩이 종료됐고, 저는 리워드를 후원자분들에게 드려야했습니다. 다른 펀딩을 보면 도서, 엽서, 머그컵 같은 것들을 많이  제공합니다. 하지만 저는 역사트레킹 모임에 후원자분들을 초대했습니다. 트레킹과 관련된 후원을 받았다면 그에 맞게 트레킹을 답례로 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답례로 드릴 책이나 엽서 같은 것들도 없고요.


그러다보니 역사트레킹 펀딩은 다른 펀딩과 달리 창작자와 후원자가 직접 대면을 하게 되더군요. 물론 다른 펀딩들도 후원자들을 티타임 같은 것에 초대를 하여 대면을 합니다. 하지만 단발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지요. 사진에도 나와있듯이 저는 벌써 두 번이나 후원자분들과 직접 대면을 했습니다. 또한 앞으로 두 번 정도 또 대면을 해야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후원자분 들과 직접, 또한 자주 만날 수 있는게 역사트레킹 펀딩의 장점인 듯싶습니다.










* 광화문: 서울시티트레킹에 참가한 후원자 분들.










여기서 해당 리워드 트레킹을 좀 설명하자면...


7월 16일 토요일에 행한 관악산 역사트레킹은 수중전이었습니다. 전날부터 비가 오더니, 결국 트레킹 때까지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더군요. 그래서인지 참가자가 단 한 분 뿐이었습니다. 제주도님이라고... 그래도 할 건 해야지요. 제주도님과 저는 열심히 트레킹을 했답니다.


수중전이었지만 나름대로 재미난 트레킹이었습니다.


7월 17일 일요일에 행한 서울 시티트레킹 때는 총 4분이 참석을 해주셨습니다. 그날은 트레킹 하기에 날씨도 좋았습니다. 흐려서 그랬는지 덥지가 않았거든요. 참가자분 중에는 멀리 충청도 서천에서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었죠.


관악산도, 서울 시티트레킹도 모두 다 잘 마무리했답니다. 모두 다 완주를 해주셨거든요. 특히 서울시티트레킹이 끝난 후에는 식사 자리도 했답니다. 물론 막걸리도 등장을 했지요.~ ㅋ


그런데... 그 식사비를 누가 지불한지 아십니까? 원래는 제가 내려고 했습니다. 후원을 받았으니 제가 식사라도 대접을 해드려야 맞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내지 않았습니다. 후원자분들이 결제를 하셨답니다. 정말 감사하더군요.


저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가요?


이렇게 대접을 받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요. 그래서 역사트레킹 펀딩을 한 번 더 해볼까 합니다. 아주 저렴하게 리워드 트레킹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설계를 해보려고요. 또한 리워드 트레킹의 횟수를 전보다 더 많이 잡아보려고요. 그럼 대면의 폭도 넓어지잖아요.


왜 그러냐? 여러분들이 역사트레킹을 더 많이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저는 지난 주말에 정말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래서 더 열심히 제 직분에 충실하려고요. 더 열심히 역사트레킹을 해보려고요!!!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앗! 곽작가도 나왔네^^; 왼쪽에서 두 번째에 서 있는 곽작가.










* 성곽길: 창의문을 향해 걷고 있는 후원자 분.



















*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참가자 분들.






 

​   * 전단: 역사트레킹을 알리는 렛츠런문화공감센터의 전단 










7월 12일 화요일.


일기예보에는 분명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진다고 했지만... 날씨가 화창했습니다. 기상청 예보대로 움직였으면 그날 트레킹을 못할 뻔했지요.


이날 저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했습니다. 제가 7월 달부터 렛츠런문화공감센터에서 역사트레킹을 런칭했는데 이날이 첫 시작일이었습니다.  사실은 일주일 전인 5일 날이 첫 개강일이었지만 그날 호우경보가 내려서 한 주 연기가  것이지요. 


어렵게 시작한 만큼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제가 문화센터 강의는 처음이라 긴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는 역사트레킹을 많이 리딩을 했지만요...


좀 덥기는 했지만 그래도 트레킹 하는데 양호한 날씨였습니다. 또한 인왕산 트레킹의 특징이 전반부만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숲길로 갑니다. 그래서 초반 30분 정도만 버티면 때양볕 걱정은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죠.


이날 참가를 해주신 분들은 트레킹에 대한 이해도가 무척 높으셨습니다. 제가 바짝 긴장을 할 만큼...^^;


트레킹에 적극적으로 임해주셔서 제가 다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부족한 저의 설명도 경청을 해주셔서 감사했고요. 그래서인지 한 분의 낙오자도 없이 모든 분들이 다 완주를 해주셨습니다.


또한 얼마나 저를 잘 챙겨주시는지... 먹을 것도 엄청 얻고 먹었습니다. 또 어떤 분께서는 제게 모자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날 제가 모자를 쓰고 가지 않았거든요. 제가 챙겨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제가 넉넉한 인심을 누리고 온 것이죠.


보람찬 하루였습니다. 이 맛에 트레킹 리딩을 하는 거겠죠! 카아~!



이 포스팅은 간략한 스케치입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정식 포스팅이 궁금하신다면


 

클릭 ☞ http://blog.naver.com/kwakmaster/220736534015


 









* 성곽길: 곡선미가 넘치는 서울성곽






* 수성동 계곡: 수성동 계곡에서. 뒤로 인왕산이 보인다.





​*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 뒤쪽에 있는 시인의 언덕에서.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펀딩비 미리 당겨썼습니다!

- 청소년들과 함께한 인왕산역사트레킹

 

 

제게 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홍은동 공부방이라는 곳의 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검색을 통해 우연히 역사트레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아이들이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할 수 있는지 문의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트레킹을 통해 지역체험활동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왕산이 홍은동의 동네 뒷산이라서 그랬던 것이죠.

 

 



 

청소년들과 함께한 역사트레킹

 

사실 역사트레킹은 성인 대상 프로그램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껏 계속 성인들만 참가신청을 해왔기에 그렇게 굳어져버린 것이죠. 그러다보니 저도 성인들 기준으로 코스를 짜게 됐습니다. 또한 성인들의 입맛(?)에 맞는 해설을 준비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성인들 대상으로만 프로그램을 진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역사트레킹을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청소년들이 더 많이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거운 책가방만큼이나 학습에 짓눌린 그들이기에... 그렇게 해서 지난 528, 청소년들과 함께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나서게 됐습니다.


한편, 인왕산역사트레킹은 지난 1화에 언급이 됐습니다. 그럼 이번화는 재탕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때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에피소드 위주로 내용을 서술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번화에서는 코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또한 코스의 시작점도 변경됐습니다. 예전에는 광화문에서부터 시작을 했지만 변경된 코스에서는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번화가 재탕인지 아닌지 끝까지 읽어 봐주세요. 더군다나 펀딩비를 미리 땡겨쓴만큼 후원자분들은 냉철한 시선으로 이번화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광통교





 

 

광통교(廣通橋)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입니다. 대광통교, 광충교, 광교라고도 불리는 광통교는 원래 태조 때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습니다. 그러다 태종10(1410), 홍수로 인해 다리가 떠내려 가 다시 돌다리(石橋)로 만들게 됩니다. 이때 다리에 쓰였던 석재들은 정릉(貞陵)에 있던 석물들이었습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무덤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왕후의 무덤에 있던 돌들이 다리의 재료로 쓰일 수 있냐는 의문 말입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습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습니다. 그래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이 1392820일에 세자로 책봉됩니다. 그해 7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지요.


쟁쟁한 형들을 물리치고 이방석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신덕왕후가 개국 후 첫 번째 왕후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한 씨였습니다. 한 씨는 이성계가 즉위하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신의왕후는 방과(정종), 방원(태종), 방간(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킴) 6명의 남자 형제들을 낳았습니다

   



* 광통교. 거꾸로 세워진 신장석.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태조5)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강 씨를 무척 아꼈던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에 묘소를 만드니, 그것이 바로 정릉이었습니다. 이후 13988,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때 세자였던 방석이 죽고 맙니다. 이를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부릅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9(태종9),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정릉을 현 위치인 성북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石刻神將) 등을 광통교 건설에 이용하게 합니다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뒤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왕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인 만큼 그걸 제대로 쌓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신장석들을 뒤집어 놓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장석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습니다. 신덕왕후를 철저히 조롱한 것이죠.


이 광통교는 길이(12미터)보다 폭(14미터)이 더 넓습니다. 그래서 광통교라고 부르나 봐요. 그렇게 넓은 다리인 만큼 거기에 담긴 스토리텔링도 풍부하네요.”

 

트레킹 팀은 풍부한 역사를 담고 있는 광통교를 직접 건넜습니다. 다리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면서.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트레킹 팀은 광화문을 지나 사직단으로 향했습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입니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입니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섭니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습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이라고 부릅니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죠.


조선의 근간 중에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쳤습니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입니다.






* 사직단: 사직단 제단 바로 옆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청소년 트레킹 팀.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됩니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습니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합니다



트레킹 팀은 율을 넘어 사직단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물론 허락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죠. 소중한 문화유산을 앞에 두고 기념촬영을 할 수 있어서 은근히 기분이 좋더군요. 학생들의 표정도 밝아보였습니다. 이런 맛에 역사트레킹 하는 거겠죠!

 






* 사직단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입니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입니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더군요.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입니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죠.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입니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입니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습니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수성동 계곡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습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입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습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됩니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됩니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입니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청소년 트레킹 팀.





 

 

펀딩비를 미리 당겨쓰다!

 

트레킹 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습니다.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습니다만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닭이었습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한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넘었더군요. 그냥 그렇게 헤어지기는 아쉬웠습니다. 배도 고프고.


그래서 제가 점심을 쏘기로 했습니다. 제 사비를 쓸까 하다가 스토리펀딩비를 당겨 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유익하게 역사트레킹을 하려고 펀딩을 받고 있는 거잖아요. 그 목적에 맞게 지출이 됐다면 후원금을 미리 당겨쓴다고 해도 후원자분들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광통교 사직단 단군성전 수성동계곡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창의문 천장에 '닭' 그려넣은 이유, 오호라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②]

 

15.06.09 20:06    최종 업데이트 15.06.09 20:06

 

 

 

 

 

 

 

 

 

▲ 수성동계곡 사진 왼쪽 부분에 돌다리가 보인다. 기린교다. 뒤에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1편 ->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①]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다. 열을 갖춰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 사이로 암반이 드러난 인왕산을 바라보다보면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수성동을 두고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에는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의 중심으로 발달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년 7월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수성동에 '동(洞)'자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행정구역명을 뜻하는 게 아니다. 골짜기를 뜻한다. 백사실계곡으로 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도 같은 한자어를 쓰고 있다. 수성동계곡이든 백사실계곡이든 참으로 소중한 존재다. 시내중심가와 멀지 않은 곳에 그렇게 청량감을 주는 계곡이 있다는 게 그저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 수성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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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동계곡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


수성동계곡을 벗어난 트레킹팀은 윤동주 문학관을 향해 갔다. 2012년 7월에 개관한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친필 원고와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문학관은 수도가압장과 물탱크 시설을 개조하여 만든 전시관이다. 그런 탓인지 전시관에는 옛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위쪽으로는 시인의 언덕이라는 작은 공원도 마련되어 있다.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이 상당히 낭만적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문학관에 가기 전에 누상동에 있는 윤동주의 하숙방을 먼저 탐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누상동 하숙방은 수성동계곡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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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년(중종 1년)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인,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이다.

 



 
▲ 창의문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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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의 천장벽화는 닭


트레킹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다. 광화문이든 창의문이든 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보면서 관찰해보자. 각 문마다 그려진 수호동물이 다르다. 막간을 이용한 퀴즈시간.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딱 봐도 용은 아니고."
"봉황 아니에요? 좀 모습이 우습긴 한데..."
"맞아요. 봉황 같은데요."


거의 다 '봉황'으로 답으로 말했다. 하지만 틀린 답이다. '닭'이다. 특이하게도 창의문의 천장화에는 닭이 그려져 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른다고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만든 것과 같은 이치다.

"설명을 들으니까 치킨이 생각나요. 저기가 부암동 아닌가요? 저쪽에 유명한 통닭집이 있다고 하던데요."

부암동을 잘 아는 참가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몰려왔다. 통닭 냄새였다. 마늘통닭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창의문 밖 치킨집에서 풍겨오는 치킨 냄새에 트레킹팀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모두 다 군침을 흘렸다.

 
▲ 창의문 천장화. 닭이 그려져 있다. 봉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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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익하고, 또한 맛집 탐방도 할 수 있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됐다. 글을 마치기 전에 1편에 언급된 사직단으로 돌아가 보자.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 조선의 왕들은 직접 제단에 나가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자신의 부덕함을 하늘에 고하면서 제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메르스 사태라는 중차대한 일을 직면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어떤가? 사태가 일어난 지 12일이 지난 후에야 '초기 대응이 잘못됐다'고 짧은 멘트를 남겼을 뿐이다. 이후 발표에서는 발병 환자의 수도 틀리게 언급을 했다. 또한 주말(6월 6~7일)에는 특별한 외부활동 없이 조용히 보내셨다고 한다.

지금이 그렇게 한가할 때인가? 시급을 다투며 행정력을 총결집해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 일인가? 차라리 화끈하게 사직단에서 제사라도 올려주셨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해서. 너무 답답해서 하는 말이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한다. 오죽 답답하면 여행기사를 이런 식으로 끝을 맺겠는가!   

 
▲ 창의문 창의문 문루는 개방되어 있다. 문루를 탐방중인 트레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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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 광화문→사직단→단군성전→수성동계곡→윤동주문학관→창의문
2. 약 5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하차. / 종료점: 종로구 부암동. 경복궁역행 버스 탑승 가능함.
4. 5월 25일에 트레킹을 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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