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시작했을 때 몇 가지 기획 의도가 있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1. 트레킹을 통해 서울의 명소를 탐방한다.

2. 서울에도 울창한 숲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그곳에서 걷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3. 적절한 해설을 통해 해당 명소의 이해도를 높인다.

 

이외에도 만보 걷기를 유도하여 건강한 삶을 추구, 바쁜 도시인들에게 힐링 선사 등등...

이런 것들을 염두해두고 역사트레킹을 진행했었다. 그래서 해당 코스를 짤 때도 기획 의도에

맞추려고 무지 노력을 했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잘 될 때도 있었고, 안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꾸준히 하다보니 1년간 위탁을 받아 공무원 강의도 진행했었다. 또한 까다로운 기업체 강의도 진행했었다. 그때는 나도 잘 나갔다. 강의료도 좀 짭짤했다...ㅋ

 

바로 얼마전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을 진행했었다. <마이리얼트립>이라는 플랫폼에서 진행을 했었는데 엄마와 딸이 신청을 했다. <마이리얼트립>의 특징은 가족 단위 신청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진관사 역사트레킹에서도 3인 가족이 와서 알콩달콩하게 트레킹을 즐겼다.

 

그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에 참가해주신 분이 장문의 후기를 남겨주셨다. 조목조목 여행 후기를 남기셨는데 참 잘 작성해주셨다. 한마디로 찰진 후기를 남겨주신 것이다.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역사트레킹의 기획 의도와 딱 합치되는 내용을 서술해주셨다는 것이다.

 

이런 후기도 피드백 받고 뿌듯하다. 후기는 리딩자를 춤추게한다.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칭찬해주고 있다...ㅋ

 

ps. 참가자들에게 후기 강요 안 했어요. 자발적으로 작성해주신 거에요~^^;

ps2. 10월 24일에 성북동 역사트레킹 가셨다 찰진 후기 작성해주실 분은 아래 링크 클릭클릭!

 

https://www.myrealtrip.com/offers/85361

 

 

 

 

 

 

 

 

 

 

 

 

*** 사람들이 많이 묻는다. 맨날 역사트레킹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데... 그럼 그 역사트레킹을 어떻게

참가할 수 있냐고. 혼자만 가지 말고 함께 가자는 말이다. 그래서 광고한다. 같이 가보자, 역사트레킹!

뭐 먹고 살려고 광고하는 것이니까 좀 봐주시라~^^;

 

필자는 <마이리얼트립>이라는 플랫폼에서 역사트레킹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그 트레킹들은 필자가 여행기를 작성한 것들이다. 글로 읽는 재미를 넘어 직접 해당하는 곳에 가보면 더 재미나지 않겠는가!

직접 해당 코스를 탐방한 후 여행기를 읽고 복습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추석 명절이 지나면 이제 10월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인 것이다.

걷기에 딱 좋은 시기가 찾아왔다.

 

이런 걷기 좋은 계절을 그냥 흘려보내실건가? 하지만 길을 잘 알지 못해서 쉽게 발걸음이

떼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막걸리부터 꺼내드는 산악회나 트레킹카페에

가입하는 것도 꺼려진다. 더군다나 요즘 같은 코로나시대에 쌩판 모르는 사람들이랑

침 튀기며 섞이고 싶으실텐가???

 

그런 의미로 역사트레킹은 언택트 시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여행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1. 소규모로 모집하고 이동한다. 모객 인원이 최대 15명을 넘지 않는다. 요즘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최대 인원이 10명 정도다.

 

2. 리딩자인 본인은 예전부터 사람 많은 장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산도 메인 등산로가 아닌 사람들이 적게 다니는 장소를 찾아다녔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어떤 수강생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

 

"우리가 숲을 전세낸 거 같아요."

 

3. 역사트레킹은 역사를 배우는 재미가 있다. 주구장창 걷기만 하며... 막걸리 잔부터 돌리는 산악회나 트레킹 카페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걷기를 한다. 그들은 산을 술판으로 생각하지만 역사트레킹은 산을 배움의 장소로 생각한다.

 

4. 가족 단위 트레킹도 많이 신청하신다. 가족과 함께 트레킹을 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보이더라. 가족 소풍이라고 해야 하나?

 

 

길게 늘어서 썼는데.. 한마디로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해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그에 걸맞게 코스를 배치했으니 마음에 드는게 있으시면 바로 참가를! 물론 유료다. 공짜는 없다...ㅋ

 

아래 링크들은 필자가 <마이리얼트립>이라는 사이트에서 판매하고 있는 트레킹 상품들이다.

 

 

 

 

*** 진관사 역사트레킹:https://www.myrealtrip.com/offers/81535<- 참가신청

 

 

* 진관사역사트레킹 여행기:https://brunch.co.kr/@historytrekking/190

 

 

 

 

 

 

 

 

*** 성북동 역사트레킹:https://www.myrealtrip.com/offers/85361<- 참가신청

 

 

* 성북동역사트레킹 여행기: https://brunch.co.kr/@historytrekking/187

 

 

 

 

 

 

 

 

 

*** 인왕산 역사트레킹: https://www.myrealtrip.com/offers/85137<- 참가신청

* 인왕산 역사트레킹 여행기: https://brunch.co.kr/@historytrekking/180

 

-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10월 17일 토요일에도 실시될 예정이다.

 

 

 

 

 

 

 

 




책을 좀 많이 구매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지적 호기심도 왕성했었고, 책 욕심도 굉장했을 때였다. 없는 돈을 쪼개서 책을 샀고, 책장을 채워 넣었다. 차곡차곡 채워지는 책장을 볼 때마다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샀다. 역사, 철학, 사회과학, 문학 등등... 한 분야를 파고들 생각도 없었고, 학자가 될 수도 없었기에 그렇게 잡식성으로 책을 구매를 했던 것이다.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네럴리스트에 더 어울리는 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집 규모에 비해서 책이 너무 많았다. 집은 작은데 책이 쌓이니 주체가 안 되었다. 더 큰 문제도 있었다. 그 책들을 잘 안 읽었다는 점이다. 필자의 지적호기심은 책장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허세를 떨기 위한, 보여주기용 책장이었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성북동 역사트레킹





● 계절에 민감한 역사트레킹

당연한 이야기지만 역사트레킹도 계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해당계절에 맞게 코스를 배치하는 것은 매우 기본이 되는 일이다.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곳을 여름에 배치한다? 당연히 안 될 말이다.

계절에 민감하다보니 특정 시기에만 가는 코스도 있을 정도다. 봄꽃들이 군락을 이루는 곳은 봄에 가고, 단풍이 곱게 지는 곳은 가을에 간다. 숲길이 울창한 곳은 한여름에 가도 좋다. 역사트레킹도 엄연히 아웃도어 활동인 만큼 계절의 변화에 부응해야 하는 것이다. 봄꽃들의 화사함을 느끼며 문화재를 탐방하면 기쁨이 더 배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록달록한 단풍들을 배경삼아 문화재를 탐방한다면 더 로맨틱할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성북동 역사트레킹은 가을에 가장 적합한 트레킹 코스이다. 가을에 가야 더 로맨틱하게 즐길 수 있는 코스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광고할 때 꼭 이런 멘트를 사용했었다.

“서울 단풍의 메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울 단풍의 진면목을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통해 맛볼 수 있기에 저런 과감한 멘트를 사용했던 것이다.





* 성북동 역사트레킹

● 법정스님과 길상사

춘녀사추사비(春女思秋士悲)라는 말이 있다. 봄에 여인들은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가을에 선비는 비애를 느낀다는 뜻이다.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 말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춘녀사추사비’처럼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지만 단풍을 감상하기 위해 길을 나선 트레킹팀은 늘 그랬던 것처럼 여성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녀들은 봄꽃을 반겨하는 봄 처녀들처럼 곱게 물든 오색단풍 앞에서 크게 환호했다. 사실 형형색색의 단풍 앞에 남녀가 어디 있고, 노소가 어디겠는가? 그냥 즐겁게 즐기면 되지!

서론이 길어졌다. 성북동 역사트레킹의 첫 탐방지는 법정 스님의 자취가 남아 있는 길상사다. 길상사는 고급요정인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로 북악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이후 리모델링을 실시했지만 사찰 건물의 대부분은 요정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대원각이 조계종에 등록됐을 때는 1995년 6월이었는데 당시는 ‘대법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다 2년 후인 1997년에 시주자인 김영한(법명 길상화)의 법명과 비슷한 ‘길상사’로 명칭이 바뀌어 창건된다. 대원각을 운영하였던 길상화 김영한은 당시 시가로 천억 원이 넘던 대지와 건물을 시주했고, 그런 길상사에 법정 스님은 회주(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 임하게 된다.

아무리 시주 형식이라지만 천억 원이면... 로또를 몇 번 맞아야 하나? 더군다나 법정 스님은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셨던가? 그래서인지 법정 스님은 10년 동안 김영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10년 동안 시주를 제안한 김영한도 10년 동안 그 제안을 거절한 법정 스님도 정말 대단한 분들인 것 같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누군가 1천억을 준다고 하면 어떻게 화답하실 것인가? 필자는 속물이다. 그래서 전에 트레킹팀과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다.

“곽 작가님은 누가 천억 원을 시주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에요?”

“그럼 저는 바로 ‘제소유’로 만들 겁니다. 무소유가 아닌 제소유!”

길상사는 성북동을 찾는 이들이 잊지 않고 탐방하는 명소가 되었다. 꼭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방문하면 좋을 장소가 된 것이다. 그렇게 좋은 길상사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키워드로 정리해본다.

1. 법정스님

2. 김영한

3. 대원각

4. 시인 백석

5. 종교화합



* 길상사: 길상사의 가을




● 1000억 원보다 시 한 줄이 더 낫다?

1,2,3은 다 언급이 됐는데 시인 백석과 종교 화합은 좀 낯설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본명이 백기행이었던 백석 시인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의 시를 썼는데 한국 시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석을 좋아했던 시인 안도현은 문학청년 시절에 그의 시를 여러 번 필사했다고 한다. 이후 2017년에는 <백석 평전>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진짜 시인 백석과 길상사가 무슨 상관이 있나? 관련이 아주 많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가 길상화 김영한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녀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준다. 하지만 뜨겁게 타올랐던 그 둘의 사랑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히고 만다. 아들이 기생과 어울리는 게 마땅치 않았던 부모는 백석을 강제로 결혼시키려했던 것이다. 이에 백석은 자야(김영한)에게 만주로 도망가자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자야는 자신이 시인의 앞길을 막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백석 홀로 만주로 넘어간다.

이때가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이었다. 이후 자야는 다시는 백석을 보지 못한다. 그는 해방 후 북쪽을 택했는데 1958년에 숙청을 당해 국영농장에서 양치기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1996년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백석 시인과 자야가 사랑을 한 기간은 불과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야는 평생을 백석을 사모했으면 죽을 때까지도 그를 잊지 못했다. 노년에 김영한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1000억 원이라는 돈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도 못하다”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고. 그러다 또다시 쉽게 사랑하고, 또다시 쉽게 헤어지고... 너무 가벼운 ‘사랑의 시대’라 그런가? 자야가 간직한 그 사랑이 역설적으로 너무나 커 보인다.

마지막으로 5번, 종교화합을 살펴보자. 길상사에는 날씬한 관음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교수라는 분이 직접 조각을 했다. 통상적으로 관음보살상은 ‘자비’라는 단어에 어울리게 후더분한 면이 강조되지만 길상사 관음보살상은 호리호리한 모습이다. 그런 특이한 모습 때문인지 몰라도 더 눈길이 간다. 길상사에는 기독교 신자인 영안 모자 백성학 회장이 기증한 7층 석탑도 있다.

이렇듯 길상사에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가 서로 어우러져 있다. 서울에 이런 고요하면서도 종교적으로 화합을 이루는 장소가 있다는 게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 길상사 보살상



● 아픈 현대사를 만나다, 김신조 루트를 걷다

자, 이제 길상사 위에 있는 정법사를 지나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서보자. 정법사 경내에서 내려다보는 성북동 일대의 모습이 멋지니 꼭 잊지 말고 보셨으면 좋겠다.

정법사를 뒤로 한 후 북악스카이웨이를 지나 북악하늘길로 접어든다. 북악하늘길은 성북구에서 조성한 도보여행길로 총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트레킹팀은 제2산책로를 이용하여 이동한다. 하늘다리를 넘게 되는데 하늘다리를 넘으면 깊은 산중에 온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곳은 북악하늘길 제2코스입니다.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곳이죠.”

“아, 여기가 그 유명한 그 김신조 루트...”

“예 맞습니다. 청와대 습격 사건이라고 불렸던 1·21사태를 일으킨 일당들이 여기서 우리 군경들과 총격전을 벌였죠.”

북악산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출입이 제한되다가 지난 2007년에 전면적으로 개방이 되었다.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김신조 일당이었다. 필자는 호경암 앞에서 저렇게 설명을 했는데 호경암은 1·21사태 때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져 아직까지도 바위 곳곳에는 그날의 아픈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당시 김신조를 위시한 무장공비들은 시간당 10km 이동을 했답니다. 그것도 산길을요. 건강한 성인이 4km로 정도로 이동하니까 그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이동을 했는지 알 수 있겠죠.”

구멍이 뻥뻥 뚫린 호경암을 앞에 두고 설명을 이어갔다.





* 호경암




● 격동의 시기, 1968년!

김신조 사태는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국의 정보선인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된다. 또 그해 10월경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를 하기에 이른다. 1968년, 한반도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었다.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보자. 196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베트남에서는 월맹군의 구정공세로 미군의 예봉이 꺾였고,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서구에서는 68혁명이라 하여 구체제 극복을 내세운 혁명이 일어났다. 또한 자유분방함을 강조하는 히피문화도 크게 기세를 떨쳤다.

당시 공산권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프라하의 봄이라는 혁명이 일어났다. ‘밀란 쿤데라’라는 소설가 아시는가? 그 작가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프라하의 봄이 중요한 모티브였다. 하지만 그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구소련이 탱크를 밀고 들어오며 강제 진압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맞이한 ‘봄날’이 너무나 쉽게 사라지고만 것이다.

이렇듯 성북동 역사트레킹은 몇 안 되는 현대사, 그중에서도 세계사가 해설로 들어가는 곳이라 필자도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하고 간다. 준비를 많이 해서 그랬는지 말도 많이 한다. 하지만 말이 많으면 실수도 나오는 법! ‘밀란 쿤데라’를 ‘밀란 쿠데타’라고 했다가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끝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고 해설을 했었다.

-찰칵찰칵

하지만 이미 트레킹팀의 마음은 단풍나무에 가 있었다. 하긴 필자도 그랬을 거다. 재미없는 설명을 듣느니 알록달록한 단풍들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게 훨씬 더 남는 일이지!

그렇게 빛깔고운 단풍을 서울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장공비의 루트였던 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 북악하늘길: 북악하늘길 2코스는 일명 '김신조 루트'로 불린다. 그 김신조 루트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길을 자랑한다.






● 무소유 조치가 내려진 내 책장

역사트레킹을 업으로 삼다보니 책을 역사서 위주로 읽게 됐다. 책장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있었지만 결국 생존 독서형식으로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사실 역사서만 읽기도 버거웠다.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까지 섭력해야하니 다른 분야의 책들에는 눈길을 줄 수가 없었다.

좁은 공간에 책들이 넘쳐나니 어느 순간부터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자기가 직접 돈을 주고 산 물건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꼴이라니! 정말 결단이 필요했다. 이때 법정 스님의 말씀이 죽비소리처럼 스쳐갔다.

- 무소유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것조차도 떠나보내야 할 때는 떠나보내야 하는 법이다. 마음을 두지 않고, 애정을 하지 않는 것이 무소유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관심도 없는 것들이라면 굳이 ‘무소유’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법정 스님의 글들을 다시 읽으며 책장을 정리했다. 한 덩어리는 헌책방에 팔고, 다른 한 덩어리는 고물상으로 향했다. 버리기에 아까운 책들도 과감히 버렸다. 물론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역사서는 거의 다 그대로 놓아두었다.

‘무소유’ 조치를 당한 필자의 책장은 중간중간에 빈 곳이 꽤 많이 늘었다. 좀 허전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책을 버릴 생각이다. 특히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면 법정 스님을 떠올리며 책들을 처분할 생각이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일이 쉽지 않다. 소유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무소유인 듯싶다.





■ 성북동 역사트레킹

1. 코스: 길상사 ▶ 정법사 ▶ 하늘교 ▶ 김신조 루트 ▶ 성북동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 Out: 성북동






* 성북동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영등포50 플러스에서 서울단풍트레킹 금요일반을 모집합니다. 원래 단풍트레킹은 목요일반만 운영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단풍트레킹 목요일반이 하루만에 모집완료가 됐고, 신청을 못하신 분들이 많다는 이유로 금요일반을 급하게 만들게됐습니다. 제가 누구입니까! 잘 나가는 명강사 아닙니까!

마감을 확확 쳤다고... 시건방떨면 안되는디... ㅋㅋㅋ

그렇게하여 금요일반도 탄생을 하게됐습니다. 목요일반과 금요일반은 시간만 다를 뿐 그냥 쌍둥이입니다. 어쨌든 올 가을에는 무자게 바쁠 거 같습니다. 

강의도 열심히 뛰어야 하고, 배낭여행 준비도 해야 하고... 게으른 것보다 바쁜게 훨씬 더 좋지요!













서울에 아파트들만 있나요? 서울에는 단풍놀이 할 곳이 없는 건가요?

9월 6일 목요일부터 10주에 걸쳐 서울단풍트레킹을 진행합니다. 어디서? 영등포50플러스센터에서 진행합니다. 본 프로그램을 통해 서울에도 단풍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 아주 많다는 걸 보여드릴 생각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단풍을 보려면 추석 이후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실제로 이름에 걸맞는 단풍 감상은 6강 이후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ㅋㅋㅋ 

아직은 모객 준비중입니다. 8월 16일부터 접수를 한다니까 그때 빨리빨리 접수해주세요~!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무장공비 루트에 고운 단풍... 그런데 여기가 서울?



정릉에서 김신조 루트까지, 성북동 역사트레킹




16.11.21 13:10 최종 업데이트 16.11.21 13:10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12월 20일까지 진행합니다. 그 프로젝트 연재글을 알맞게 편집·수정하여 오마이뉴스에 기고할 예정입니다. 이번글은 5편입니다. - 기자 말

    

▲ 북악산 북악산 하늘길, 일명 김신조 루트를 걷고 있는 참가자들.
빛깔 고운 단풍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출발 전부터 바람이 불었다. 빗방울도 오락가락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처음 런칭하는 날인데..."

지난 10월 23일.

이 날은 성북동 역사트레킹이 행해진 날이었다. 성북동 트레킹은 스토리펀딩에서 처음으로 실시하는 트레킹이었다. 그래서 나름 준비도 열심히 했다.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답사도 여러번 다녀왔고, 자료를 찾는다고 책장을 분주히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당일 날 날씨가 발목을 잡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트레킹할 때 날씨가 좋으면 반을 먹고 들어간다고 하는데 보시다시피 오늘은 꽝이네요."
"그래도 좋아요!"
"이런 날씨에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자리에 모인 후원자분들이 더 걱정을 해주셨다. 말씀만이라도 고마웠다. 이런 후원자들과 함께 트레킹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일 테지!





▲ 정릉 세계문화유산 정릉.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 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 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을 두르는 봉분석이 없다.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인왕산역사트레킹 때 광통교 앞에서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 광통교 정릉에서 빼온 신장석이 거꾸로 세워져 있다. 무려 600년이 넘는 시간동안.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다.

     


 
  

아픈 현대사를 걷다, 김신조 루트를 걷다

정릉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본격적인 길을 나섰다. 바람이 좀 더 세게 부는 듯했다. 빗줄기도 더 강해지고 있었다. 참가자들 중에는 우비를 꺼내 입은 분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이런 게 내 잘못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하자. 오늘 가는 곳이 아픈 현대사를 담은 곳이잖아. 그러니 비를 배경 삼아 가는 것도 괜찮겠네.'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를 지나 <북악하늘길>로 접어들었다. 북악하늘길은 성북구에서 조성한 도보여행길로 총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트레킹 팀은 제2산책로를 '타깃'삼아 이동을 했다. 나는 제2산책로를 앞에다 두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정릉을 거쳤고, 북악스카이웨이 옆 산책로도 지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소요됐습니다."
"그럼 거의 끝난 건가요?"
"아니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 코스를 걷기 위해 우리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예행연습이었어요."
"에이..."
"너무 해!"







      ▲ 북악산 하늘길 단풍이 고운 북악산 하늘길.         

       



그렇게 참가자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어떤 참가자는 내게 '사기꾼'이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 탄식과 핀잔이 감탄사로 바뀔 것이라는 그런 자신감.

"이 곳은 북악하늘길 제2코스입니다.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곳이죠."

북악산은 군사 목적으로 출입이 제한되다가 지난 2007년 전면 개방이 되었다. 그 군사적인 목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김신조 일당이었다.

"1·21사태, 일명 김신조 사건에 대해서 알고 계시죠? 청와대 습격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그 사건이요."

나는 호경암 앞에서 입을 열었다. 호경암은 1·21사태 때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져 아직까지도 바위 곳곳에는 그날의 아픈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당시 김신조를 위시한 무장공비들은 시간당 10km 이동을 했답니다. 그것도 산길을요. 건강한 성인이 4km로 정도로 이동하니까 그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이동을 했는지 알 수 있겠죠."

구멍이 뻥뻥 뚫린 호경암을 앞에 두고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 호경암 치열했던 교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호경암. 빨간색으로 칠한 표시가 바로 총탄 자국이다.        

  





격동의 시기, 1968년!

"김신조 사태가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국의 정보선인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지요. 또 그해 10월 경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를 하기에 이릅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그때..."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베트남에서는 월맹군의 구정공세로 미군의 예봉이 꺾였고,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크게 일어났잖아요. 히피문화로 대변되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숨을 좀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이것 말고도 196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서구에서는 68혁명이라 하여 구체제 극복을 내세운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당시 공산권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프라하의 봄이라는 혁명이 일어났지요. 밀란 쿤데라라고 소설가 아시죠? 그 사람이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프라하의 봄이 중요한 모티브였습니다. 하지만 그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답니다. 구소련이 강제 진압을 했었거든요. 봄날이 너무나 쉽게 가버린 것이죠."

너무 설명이 진지했던 것 같아 약간 말을 돌렸다.

"이제까지 1968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 1968이라는 숫자를 저도 가지고 있답니다. 제 전화기 끝자리가 1968이거든요."

그렇게 내가 실없는 소리를 했어도 참가자들은 신나했다. 비가 오고 있어도 바람이 불고 있어도 신나했다. 왜? 성북동 트레킹이 아름다운 풍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악산 단풍이 아주 곱게 잘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빛깔 고운 단풍을 서울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장공비의 루트였던 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긴 아무리 지뢰가 깔리고, 철조망이 쳐져 있다고 해도 DMZ만큼 아름다운 곳도 없을 테니까!

글을 마치기 전에 혁명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한 마디만 하자. 며칠 전인 12일에 백 만명 이상 사람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열었다. 그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19일에도 수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촛불혁명이라고 명명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광장에 모여 불을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이렇게 외쳤다.

"박근혜 퇴진"

나중에 이 촛불혁명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승리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패배로? 나는 승리로 기록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 성북동 트레킹: 비주얼이 뛰어났던 북악산.








10월 23일.


강원도에서 들려오는 단풍 소식이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때였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울의 대부분의 산들은 아직 단풍 절정기에 들지 않았더군요. 기왕하는 트레킹, 아름다운 단풍을 보며 걸으면 좋잖아요.


이 날은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의 세번째 리워드 트레킹이 있었던 날입니다. 일명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성북동 트레킹은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처음으로 런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잘해야 하는데!"


첫 스타트였으니 부담감도 좀 생기더군요. 그런 약간의 부담감을 안고 약속장소인 성심여대역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첫번째 코스인 정릉을 지났는데... 그만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바람도 거세게 불고.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트레킹을 첫번째로 런칭한 날인데!!! 


그렇다고 하염없이 날씨 탓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기획한대로 제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답사를 제대로 해서 그랬는지 첫 번째로 행하는 트레킹치고는 물 흐르듯이 잘 진행이 되었답니다.


"우와!"


북악산을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참가자들의 탄성 소리도 커져갔습니다. 왜냐? 알록달록한 단풍들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다른 산들은 아직 단풍절정기가 아니었지만 우리가 갔던 북악산 코스는 단풍이 최절정기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비주얼을 바라보며 걸으니 발걸음이 한결 더 가볍더군요. 참가자분들의 반응도 폭발적이었습니다.


"올해 단풍놀이를 여기서 할 줄이야!"


첫번째인데다, 비 내리는 날 행한 트레킹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호응을 해주셔서 무사히 행사가 잘 종료가 됐답니다.


그러고보니 저도 올해 단풍놀이를 그날 처음했던 것 같네요. 눈이 호강을 한 하루였습니다.

 



 





 
   * 전망대: 뒤로 성북구와 도봉구 일대가 보인다.
 






 

  * 호경암: 1.21사태. 일명 김신조 사태 때의 상흔을 품고 있는 호경암.








  * 성북동 역사트레킹: 단풍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