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가 정말 있을까?’

 

불혹을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철이 들지 않아서인가? 요즘도 가끔가다 저런 동화 같은 상상을 해본다. 그렇다고 필자만 파랑새를 찾고 있지는 않은 듯싶다. 우리사회가 무한경쟁 속에 놓이다보니 역설적으로 파랑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더 짙어지고 있는 듯싶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더 많이 입에 오를수록 파랑새도 더 많이 언급될 것이다.

잠깐 정리를 해보자. <파랑새>는 벨기에 출신인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가 쓴 동화이다. 주인공인 틸틸과 미틸의 꿈속에 요정 할매가 나타났다. 할매는 자신의 아픈 딸을 위해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틸틸과 미틸에게 부탁을 했다. 이제까지 치르치르와 미치르로 알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틸틸(tyltyl)과 미틸(mytyl)이더라.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아 여러나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파랑새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들은 지친나머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그건 꿈이었다. 그 꿈에서 깨어나 집에 있던 새장을 보니 기르던 새가 파랑새였던 것을 깨닫는다.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 온갖 고생을 하며 여러나라를 돌아다녔는데 정작 파랑새는 자신의 집에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제까지 <파랑새>가 안데르센의 작품인 줄 알았다. 여기서 필자의 독서 실력이 확 노출된 셈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의 어렸을 때 친구들 중에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간간이 파랑새를 입에 올리기는 했지만 원작자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냥 단순하게 ‘명작동화=안데르센’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파랑새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대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해본다.

 

 

 

 

 

* 안산자락길: 로고

 

 

 

 

● 경기도 안산? 아니 서대문 안산!

누구나 다 아는 사실 하나! 인구 천 만 명이 모여 사는 서울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라는 사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 하나! 서울에 정말 산이 많다는 사실!

초고층 빌딩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지만 서울 스카이라인의 최고점은 인공물이 아니다. 최고점은 항상 북한산과 관악산이 차지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한다. 이렇듯 산은 서울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현무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과 주작 역할을 하고 있는 관악산이 두드러졌지만 키가 작은 산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 소개할 곳은 서대문 안산이다. 이번 편에서는 이동순서에 따라 기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코스 상으로는 맨 뒤쪽에 놓이는 무악재하늘다리가 앞부분에 소개됐다.

문화센터에서 안산역사트레킹 강의 공지를 올렸을 때, 종종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안산 트레킹이요? 서울학개론이라면서 경기도 안산까지 가요?”

“아닙니다. 서대문 안산으로 갑니다. 서대문 안산(鞍山)하고 경기도 안산(安山)은 위치도 다르고 한자도 다릅니다.”

그렇다. 서대문 안산은 ‘안장안(鞍)’ 자를 사용한다. 산이 말 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명칭을 얻은 것이다. 실제로 안산은 완경사를 타고 가다가 정상부근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다. 멀리서보면 얼핏 말안장처럼 보인다. 그런 안산의 윤곽을 확인하려면 건너편에 있는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게 좋다.

안산은 인왕산과 무악(毋岳)재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그래서인지 안산과 인왕산은 지질구조가 비슷한 점이 많다. 지난 1편에 등장한 인왕산 선바위를 기억하시는가? ‘기도빨이 잘 받는’ 스님바위 말이다. 선바위를 보면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기이한 형태의 그런 구멍들은 풍화혈이라고 부른다. 벌집구조 형태로 작용하는 풍화혈은 화강암이 차별침식을 받았을 때 생성된다. 이 풍화혈은 타포니(taffoni)라고도 불리는데 ‘타포내라’라는 코르시카의 말이 그 어원이다.

“타포니는 프랑스 코르시카에서 나온 말입니다. 코르시카는 나폴레옹의 출생지고요. 하여간 이런 벌집 구조는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서울에서 이런 지형을 볼 수 있는게 참 고마운 일이죠.”

 

애꿎은 나폴레옹까지 끌어오면서 타포니 지형을 설명하지만 필자의 전달력이 딸려서 그러는 건지 수강생들의 표정은 ‘뚱’해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지질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나 있겠는가? 아무리 수강생들이 하품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야기할 건 이야기해야지.

“인왕산에서 봤던 타포니 지형을 이곳 안산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안산에도 해골바위가 있거든요. 구멍이 뻥뻥 뚫리는 타포니 지형이 그런 해골바위를 만들었지요. 인왕산에도 해골바위가 있고, 안산에도 해골바위가 있고...”

 

 

 

 

 

* 무악재하늘다리

 

 

 

 

 

●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생태다리, 무악재하늘다리

그렇게 비슷한 점이 많은 안산과 인왕산은 1972년 통일로 확장으로 인해 녹지축이 끊기게 된다. 무악재 위를 달리고 있는 도로가 바로 통일로다. 통일로 이전에는 의주길이었다. 의주길을 따라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들이 왔고, 조선의 문무백관들이 중국으로 향했다. 그 길은 매우 중요한 기간 도로였던 셈이다.

그렇게 약 40년 이상 끊겨있던 두 산에 생태다리가 놓였다. 무악재하늘다리가 놓인 것이다. 그 다리가 놓임으로서 두 지역을 오가는 코스가 다양해졌다. 생태다리 하나 때문에 트레킹 코스가 풍부해진 셈이다. 동물들보다 사람들이 더 즐겁게 된 것이다.

한편 무악재는 무학재로도 불린다. 이처럼 한끝의 차이는 왜 나타났을까? ‘무악’이나 ‘무학’이나 똑같아 보이는데. 조선이 개국할 즈음에 천도 예정지로 거론된 곳은 한양, 계룡산, 안산 세 곳이었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 하륜은 안산 주산론을 펼치며 안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었다.

만약 하륜의 주장대로 안산을 주산으로 삼았다면 한강의 이용가치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들의 상행위는 더욱더 활발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조선이 교조적인 성리학에 묶이지 않고 훨씬 더 개방적인 나라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의 나라였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상업활동을 천시하던 사회였다.

 

어쨌든 안산 주산론은 안산의 남쪽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이유로 폐기되고, 무학대사의 의견에 따라 북악산 남쪽이 도읍지로 결정된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어서인지 무악재가 무학재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무악재는 말안장 같은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고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렸다.

 

 

 

 

 

*메타세쿼이아 숲

 

 

 

 

● 서대문형무소와 다크투어리즘

안산 역사트레킹의 출발점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처음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1908년)으로 출발했는데 이후 서대문감옥(1912년), 서대문형무소(1923년)로 개명을 한다. 이름을 바꿨다고 해도 그 기능은 뻔했다. 독립지사들에 대한 탄압과 수감이 그 역할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독립을 외치며 피눈물을 흘렸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서울형무소(1945년), 서울교도소(1961년), 서울구치소(1967년)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감옥의 기능은 계속됐다. 드라마틱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반영하듯 이곳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됐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작고한 김근태 의원 같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었다.

형무소의 담장이 걷어지고 주변지역이 공원화 된 것은 1992년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포함한 이 일대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명명된 것이다. 시설이 잘 정비가 되어서 그런지 서대문독립공원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다. 많은 이들이 피눈물을 흘렸던 서대문형무소에는 체험학습 나온 초등학생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재개발 문제로 말이 많았던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 일대는 이제 고급아파트가 들어섰다. 현재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일대는 확실히 어두운 색채가 옅어져있다.

어두운 면을 찾아볼 수 없다고 역사의 교훈까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럴 때는 다크투어리즘으로 접근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다크투어리즘은 전쟁이나 학살, 천연재해(쓰나미) 등을 당한 곳을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다크투어리즘은 아픈 기억을 가진 지역을 탐방함으로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199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테마 여행의 한 형태다. 아우슈비츠, 체르노빌, 히로시마 같은 곳을 탐방한다면 다크투어리즘 여행을 행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대문 형무소가 다트투어리즘(dark tourism)의 대표적인 장소로 손꼽힌다.

다크투어리즘을 확대해보면, 서울도 곳곳이 다 그 탐방지에 속할 수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던 경복궁, 한국전쟁 중에 폭파가 됐던 한강철교 등등... 서울만 그러겠는가? 다른 곳들도 다크 투어리즘 천지다. 제주 4·3, 5·18 민주화운동, 노근리 학살 등등... 동학농민군이 몰살을 당한 공주 우금티도 다크투어리즘의 최적지일 것이다.

 

 

 

 

 

* 서대문형무소

 

 

 

 

● 나무데크는 이제 그만!

도보여행자들에게 안산은 상당히 인기가 있는 곳이다. 안산자락길이 있기 때문이다. 무장애길이라 하여 유모차나 휠체어도 통행할 수 있다는 게 안산자락길의 특징이다. 나무데크를 사용하여 경사도를 완곡하게 해 이동권 약자들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정말 유모차나 휠체어도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을까? 필자는 수 십 차례에 걸쳐 안산 역사트레킹을 진행했었다. 그런데 안산자락길에서 휠체어나 유모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안산(296m)이 키가 낮은 산이라고 해도 산은 산이다. 아무리 무장애길이라고 칭해도 경사도가 있기 마련이다.

‘무장애’라는 말에 부합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안산자락길에는 나무데크가 과도하게 사용됐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텅텅’거리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이동권 약자들이 더 손쉽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수단이 나무데크의 과도한 사용이라면 곤란하다. 나무데크도 적재적소의 원칙에 따라 최소한으로 그쳐야한다. 도보여행자들은 흙길을 걸으려고 길을 나서는 것이지 나무데크를 걸으려고 발걸음을 떼는 것이 아니니까.

어쨌든 안산은 경사도가 완만하여 초급자들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2달 과정의 강의가 있을 때, 수강생들의 체력을 알기 위해 테스트 과정이 필요한데 안산은 좋은 테스트장이 되어준다.

● 누구나 로맨티스트가 되는 그 곳!

이제 정상을 향해 가야한다. 안산자락길이 평지처럼 순한 길이었다면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은 좀 험할 수 있다. 이 부근은 암반이 노출되어 있는데 앞서 말한 타포니 지형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조심스럽게 정상을 향해가다 보면 해골바위를 만날 수 있다.

안산 정상에는 동봉과 서봉이 있는데 이곳에는 예전에 봉화가 설치됐던 곳이다. 동봉수대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작된 봉수를 받았고, 서봉수대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작된 봉수를 받았다. 둘 다 최종목적지는 남산 봉수대였다. 현재는 동봉수대만 복원이 됐다. 서봉수대 자리에는 통신 회사의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다.

안산 봉수대에 올라서면 사대문 안쪽의 모습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왕산의 성곽길이 선명하게 보이고, 뒤쪽의 북한산의 봉우리들도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들어온다. 인왕산이나 북악산에서 바라보는 광경과는 또 다른 멋이 있는 것이다. 특히 한강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게 안산의 매력인데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울시내,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한강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 더욱더 매력적이다.

그렇게 한강쪽을 바라다보면서 왜 경기관찰사였던 하륜이 안산 주산론을 펼쳤는지 생각해보자. 필자는 가끔 수강생들에게 그 숙제를 내줬다. 하지만 그 숙제에 관심 있는 분들은 거의 없었다. 대신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여기 낙조가 장난이 아니겠는데요. 노을 질 때 한강에 유람선이라도 다니면 정말 판타스틱 하겠네요!”

말 그대로다. 안산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정말 일품이다. 낙조가 진후에도 멋있다. 야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낙조와 야경을 본 사람은 누구라도 로맨티스트가 될 것이다. 그만큼 매력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정상에서 내려오면 하늘높이 쭉쭉 뻗어 있는 메타세쿼이아 숲이 트레킹팀을 맞이한다. 서울에서 그렇게 울창한 메타세쿼이아 숲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게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이렇게 안산역사트레킹은 지루할 틈이 없다. 300미터도 안 되는 작은 산이 이렇게 많은 것들을 안겨줄 수 있다니! 도보여행자로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 안산봉수대

 

 

 

 

● 가장 트레킹하기 좋은 곳은 어디?

“트레킹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에요?”

은근히 많이 저런 질문을 받는다. ‘어디가 여행하기 좋아요?’ 이런 질문도 많이 받는다. 트레킹 강사인 필자에게 저런 질문들은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콕 집어 달라는 것이다. 트레킹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전에 생태 공부가 하고 싶어서 숲체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 숲체험 교실도 현장이 중요하다. 그래서 강사분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숲 체험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에요?”

수강생 분들에게 들었던 질문을 필자가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이 질문을 했을 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좀 놀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트레킹을 하기 가장 좋은 곳은 바로 여러분이 사시는 동네 뒷산이에요.”

필자가 내놓은 대답은 동네 뒷산이었다. 그렇다면 숲체험 강사분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그 대답을 들었을 때는 더 제 발이 저렸던 것 같다.

“숲 체험을 하기 가장 좋은 곳은 바로 여러분이 사시는 동네 뒷산이에요.”

숲체험을 하려면 창덕궁의 비원이나 수목원 정도는 가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트레킹도 마찬가지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장 좋은 트레킹 코스일까? 아니다. 바로 발걸음을 뗄 수 있는 동네 뒷산이 가장 좋은 곳이다.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다. 가까이에 있다.

그런 면에서 서대문구에 사는 사람들은 참 복 받았다. 안산이 바로 동네 뒷산이니까. 전망, 숲길, 역사 등등... 안산이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다 가지고 있으니까.

 

서대문 사람들은 파랑새를 제대로 기르고 있는 셈이다.

 

 

 

 

 

* 서대문 안산 숲길

 

 

 

 

 

 

 

■ 안산역사트레킹

1. IN: 지하철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

2. OUT: 홍제천

3. 세부코스: 서대문독립공원 ▶해골바위 ▶ 봉수대 ▶메타세쿼이아숲길 ▶ 서대문독립공원(순환형태)

4. 길이: 약 8km

5. 예상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

 

 

 

 

 

* 안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안산 자락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변형해서 이동함.

 

 

 













9월 25일 일요일.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제 발걸음은 분주했습니다. 이날은 안산 역사트레킹을 하는 날이었으니까요.


안산 트레킹은 처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좀 긴장이 되더군요. 처음하는 트레킹도 아닌데 긴장을???



저는 현재 다음 스토리펀딩에 <함께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전에 올린 포스팅에도 기술되어 있지요. 이날 오신 분들은 모두 다 <함께걷는 서울트레킹>을 통해 참가를 해주신 분들입니다.

한마디로 저는 제게 후원해주신 분들과 함께 리워드 트레킹에 나선 것입니다.


크라우드 펀딩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저처럼 후원자들과 직접 만나는 창작자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더군다나 간단한 티타임이나 강연 형식이 아닌 저처럼 서너시간을 함께하는 창작자는 더더욱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참가자 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행운아에요. 이렇게 후원자분들을 직접 만나서 오랜시간을 함께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2348












 








하이힐을 신고 성곽길을?


성곽길을 걷는 서울시티트레킹

 





이제 역사트레킹 펀딩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역사트레킹 펀딩 기간은 108일입니다. 108일이면 충분히 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렇게 기간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못 다한 이야기가 넘쳐나네요. 한편으로는 펀딩이 빨리 종료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원고를 작성하는 게 만만치 않았거든요. 여기에 올린 글들은 기 발표작들입니다. 그것들을 펀딩 플랫폼에 맞게 수정을 가했지요. 그런데 수정하는 게 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새로 작성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으니까요.


어쩌면 역사트레킹 펀딩은 제게 108번뇌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번뇌를 벗어나고자 저는 계속 허우적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허우적거리다보니 이제 종료를 코앞에 두게 됐네요. 시간이 참 빠르죠!


후원자분들! 파티란에 리워드 트레킹 공지 올렸으니 확인해 주세요. 보충 트레킹도 올려놨으니 꼭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화에서는 서울시티트레킹을 소개해 봅니다. 서울시티트레킹은 '서울시티투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가보면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탈 수 있는데 이 버스를 타면 서울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2층 버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서울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면 좋겠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보려면 역시 자신의 두 발로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요.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정상에 버스를 타고 올라갈 수는 없으니까요!


한편 서울시티트레킹은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자매편입니다. A코스, B코스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될 듯싶네요. 인왕산이 스토리텔링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나눈 것이죠.

 




 

* 소녀상






 

꽃 한 송이가 놓여 있는 소녀상

 

서울시티트레킹은 조계사와 그 옆쪽에 자리 잡고 있는 우정국 탐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정국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1884)을 일으킨 곳입니다. 일명 '3일 천하'로 불린 갑신정변은 임오군란(1882)과 함께 개화기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정변 주동자들의 의견과 너무나 큰 간극을 보였던 당시의 조선 상황, 정변 당사자들의 과도한 일본 의존 등으로 갑신정변은 '그들만의 리그'로 막을 내렸고, 주동자였던 김옥균은 중국 상해에서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정변 주동자들은 일본을 맹주로 한 '대동합방론'과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후쿠자와 유키치의 충실한 모범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에 메이지유신을 '이식' 시키려고 했지만 실패를 하고 만 것이죠.


갑신정변이 발생한 곳인 우정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일본대사관이 있고, 그 앞에는 위안부소녀상이 꿋꿋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92년부터 개최된 수요집회는 2012년에 1000회를 맞이하게 됐고, 그 기념으로 본 위안부소녀상이 건립되었습니다.


누구는 위안부소녀상이 외롭고 처량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2인용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일본 정치인들의 끊임없는 망언들을 생각하면 그 외로움이 더 크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소녀상이 외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소녀상을 방문할 때마다 꽃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꽃이 아니라 매번 다른 꽃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어떨 때는 과자나 그림 같은 것들이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소녀는 벤치에 홀로 앉아 있지만 혼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친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녀상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행사. 뒤로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다음 탐방지는 광화문입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입니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 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광화문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무지개문)을 셋이나 내서 격식을 높였습니다.


궁궐은 ''''이 합쳐진 말인데 ''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복궁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맙니다. 광화문 앞에 화기를 막으려고 세운 해태상이 있었음에도 불에 전소되었던 것이죠.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임금의 피난)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갑니다. 급기야 백성들은 궁궐에 불을 놓기까지 합니다. 아무리 해태상을 세운다고 한들, 강력한 소방시설을 갖춘다고 한들 성난 민심 앞에서는 그저 무용지물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지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8월에 완공된 것입니다. 사실 광화문은 1968년에 중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져 버렸던 것이죠.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입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 동십자각. 도로 위에 섬처럼 떠있다.






 

섬처럼 떠 있는 동십자각

 

광화문에서 동쪽, 삼청동 방면으로 가다보면 누각 하나가 껑뚱하게 떨어져 나와 있습니다. 광화문 인근이라서 그런지 자동차들이 쉴 세 없이 그 앞을 지나고 있지요.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대형 버스들도 많이 지나갑니다. 도로 한복판에 툭 튀어 나온 누각을 보고 있다 보면 마치 섬이 하나 떠 있는 느낌이듭니다.


도로 한복판에 외떨어져 나온 누각은 앞서 언급한 동십자각입니다.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동쪽의 방위 초소 역할을 했던 곳이죠. 서십자각은 서쪽 방위 초소였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담벼락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왜 지금처럼 끊겨져 있는 걸까요? 이것 역시 일제에 의해 끊기게 됐습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남쪽 담벼락을 다 헐어버렸습니다. 그때 광화문도 이전을 하게 됐지요.


돌담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철책선이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구한말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십자각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단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한편 동십자각이 감시초소였던 만큼 그 역할은 무척 중요했습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인 자객들도 동십자각을 점령한 후 경복궁 내부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동십자각은 서십자각 보다는 상황이 더 낫습니다. 서십자각은 아예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 사이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는데 그때 서십자각을 철거했던 것입니다. 멀쩡한 광화문을 옮겨버리고, 담장을 헐고, 누각도 철거시키고...


그러고 보면 일제도 반달리즘을 저지른 셈입니다. 반달리즘은 로마의 유적들을 파괴했던 반달족들의 반문명적인 행위를 빗댄 명칭입니다.

 

 



* 서울성곽




 

인왕산과 서울성곽

 

이제 서울성곽을 오를 차례입니다. 18km에 달하는 서울성곽은 조선의 도성이었습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기준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멱산(남산)을 둘러서 만든 성곽입니다. 이 산들을 묶어 내사산이라 부릅니다.


북악산은 원래 백악산이라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북악'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런 도성에는 4대문이 있는데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 북쪽에는 숙정문, 서쪽에는 돈의문(서대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서대문은 없지요.


인왕산에 올라서면 성곽과 함께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입니다.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는 서울 중심부입니다. 이를 두고 저는 '작은 서울'이라 칭합니다.


그럼 '큰 서울'은 어디일까요?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아차산(용마산), 서쪽으로는 덕양산(행주산성)을 두고 외사산이라 부르는데 그 외사산의 안쪽 지역을 '큰 서울'이라고 불렀습니다.


서쪽 지역만 빼놓고는 지금의 서울 행정권역과 얼추 비슷합니다. 한양천도 이후, 서울의 확장은 계속됐지만, 지형적인 굴레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 서울성곽. 급경사를 타고 내려가는 참가자. 딱 봐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모든 참가자들이 완주를 해주셨다는 점이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급경사를 타는 서울성곽

 

서울성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요새를 구축했습니다. 산사면의 급경사를 이용하여 적의 침략을 대비한 것이죠. 한마디로 매우 급한 경사면에 성곽이 구축됐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경사면이 급하면 급할수록 방어력은 증강될 테니까요.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서울성곽길은 걷기가 만만치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걷다 보면 발바닥에 불이 난다는 뜻이지요.


물론 평지구간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평지 구간은 도시화로 인해 성벽이 거의 다 허물어졌지요.

간혹 서울성곽길을 좀 만만하게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전 트레킹 팀원 중에서도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께서 하이힐을 신고 오셨던 것입니다. 트레킹 리딩자로서 참 난감하더군요.

     

"! 제가 분명히 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고 오라고 당부 드렸는데요."

"앞에는 그냥 평지고, 서울성곽길 걷는다면서요..."

 

서울성곽은 여러 번에 걸쳐 개축됐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토성이었고, 이후에는 주위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됐습니다. 그러다 조선 후기 숙종시대에는 두부 모양의 장대석이 올려지게 됩니다.


이렇듯 서울성곽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마치 600년이란 시간이 퇴적층처럼 돌들에 새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랫돌은 옛날에 쌓여 '누리끼리'한데 그 이후에 축성된 돌들은 하얀색입니다. 윗돌과 아랫돌이 서로 '시간 퇴적층'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아참! 그 하이힐 신은 분은 어떻게 됐냐고요? 다행이었습니다. 그 분도 끝까지 완주를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참가자분들이 완주를 해주시면 저는 정말 뿌듯하더군요. 물론 조마조마 하기는 했지만...

 

 





* 독립문. 독립문을 지나고 있는 참가자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마지막 탐방지는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입니다. 독립문은 잘 아시다시피 독립협회에서 자주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문입니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문이죠.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든 문이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자주독립'은 분명 한계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독립의지는 확고했으나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서는 무척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이권침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했으나 일본의 이권 침탈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역사적인 함의가 있어서 그랬는지 독립문은 일제강점기에도 헐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서울시티 투어를 떠납니다.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 열심히 설명을 듣고, 분주히 사진을 찍어 됩니다. 외국인들이 이렇게까지 서울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데 우리가 그들보다 서울을 더 모르면 안 되겠지요? 우리도 열심히 서울에 대해서 배워 보자고요.


그렇게 배우다보면 역사도시 서울의 매력에 푹 빠질 겁니다. 그 매력에서 허우적거리다보면 주말마다 배낭을 꾸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손에는 서울 역사지도를 들고 있을 거고요.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초대형 태극기.





 

 

서울 시티트레킹

 

1. 코스: 조계사 소녀상 광화문(동십자각) 황학정 서울성곽(인왕산) 서대문형무소(독립문)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공공장소에 울려퍼진 친일파 옹호론

 

 

높아진 목소리... 온라인 논쟁을 오프라인으로 옮겨온 듯

 

15.08.14 16:58   최종 업데이트 15.08.14 16:58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대형 태극기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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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친일을 하고 싶어서 한 거겠어. 상황이 그래서 그런 거지."
"그건 아니죠. 시대상황으로 돌리기에는 친일파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잖아요."
"상황을 이해해야지! 만약에 ○○씨가 일제시대에 살고 있어, 먹고 살아야 하잖아. 그럼 어떻게 하겠어? 일본놈들이랑 등 돌리고 살겠어? 그때 살았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 "
"선배님 말씀은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거의 다 친일파가 되야 한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그때 독립군은 뭐지요? 항일운동한 사람은 뭐가 되는 거죠?"

 


제가 집필실(?)로 이용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한 대학교의 휴게실이 바로 그곳입니다. 글 쓸 공간이 없어 도서관으로, 카페로 옮겨 다녀야 하는 글쟁이들보다는 제 처지가 훨씬 나을 겁니다. 와이파이도 빵빵 터지고, 에어컨도 시원한 공간에서 물건들을 '쫘악' 펼쳐놓고 글을 쓰니까요.  

하지만 휴게실은 휴게실입니다. 통닭 시켜 먹는 이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이들... 식사 시간이 되면 휴게실은 맛있는 음식 냄새로 채워집니다. 그러면 글이 잘 안 써집니다. 저도 배가 고프니까요. 그래도 후각을 혼란시키는 음식 냄새는 그나마 낫습니다. 문제는 역시 청각을 혼동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집필실'인, 어느 대학의 휴게실에서

 

 

이 대학은 오픈 대학교입니다. 그래서 학우들의 연령대가 아주 다양합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살부터 백발이 성성한 분들까지... 주축은 50~60대 학우들이 이루더군요. 그래서 대화의 내용도 일반 대학생들이 하는 말들과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일반 대학생들이 스펙과 취업 걱정으로 대화 내용을 채운다면, 이곳의 학우들은 자신의 아파트 값이 어떤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문제들을 입에 올립니다.

부동산이나 건강 문제들은 거의 비슷한 결론으로 달려가는 가더군요. 딱히 첨예하게 부딪힐 부분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하나라도 더 정보공유를 하려고 '코드'를 맞추더군요. 하지만 정치 문제가 나오면 양상은 달라집니다. 서로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서로 갈등을 빚고 얼굴을 붉히기까지 합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서 그런지 요즘에는 광복, 일제청산, 이승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들리더군요. 하여간 그렇게 첨예한 이야기들이 대화 테이블에 오르면 저도 본의 아니게 그 대화에 '참여'하게 됩니다. 휴게실이 지하에 위치해 있어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그 소리가 다 제 귀에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는 제 몸은 노트북 앞에 있지만 마음은 그 대화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동석'하기 싫은데 '동석'하게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글쓰기 작업은 잠시 중단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요즘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뭐라뭐라 안 좋게 이야기를 하지만, 난 이승만에 대해서 달리 봐야 한다고 봐. 그때 정부를 안 세웠으면 어떻게 되겠어. 한반도가 적화가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지."
"그럼 이승만 세력이 친일파 중용한 거랑 반민특위 해산한 거랑은 어떻게 보십니까?"

 

 

 

 

 

 


온라인 논쟁을 옮겨 놓은 것 같은 휴게실 논쟁

 
▲ 소녀상 위안부소녀상. 일본대사관 앞.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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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두에 언급한 대화는 그렇게 계속 이어졌습니다. 총 네 분이서 이런 대화를 나누셨는데 나이가 많으신 분은 이승만과 친일파에 대해서 옹호를 하는 입장이었고, 상대적으로 젊은 분은 그에 대해서 반박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때는 나라가 새로 세워졌어. 당연히 인재가 필요하잖아. 그럼 누가 그 일을 하겠어? 일제시대에 일 좀 했다고 그 사람들을 안 쓸 수 있겠어."
"그게 바로 친일파들이 주로 주장하는 내용 아닙니까..."
"위쪽으로는 공산당이 꽈리를 틀고 있었고, 그래서 실제로 전쟁도 났잖아. 그런데 인재는 필요했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깐!"
"그게 바로 전형적인 그들의 주장이라니까요!"

 


이미 서로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주장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대화에 깊숙이 '참여'를 하게 됐습니다. 당장이라도 몸을 이끌고 그 테이블에 가서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은 친일 옹호론을 격파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친일 문제를 반박하는 분에게는 좀 더 내공을 쌓아 친일 옹호론을 꼼짝 못하게 하라고 조언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마음만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이 분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일제 잔재청산과 관련하여 온라인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댓글들이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휴게실에서의 대화들은 온라인에서 오가는 논쟁들을 오프라인으로 옮겨놓은 거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실제로 나이가 많았던 분의 논리는 인터넷에서 친일을 옹호하는 댓글의 내용과 거의 일치했으니까요. 대신 잘 아는 동아리 멤버들이었기에 서로 예의는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나중에는 2학기 수강신청에 대해서 서로 '코드'를 맞추더군요.

 

 


원죄론과 친일론

전 그 대화를 보면서, 친일을 옹호하는 측이 '우리안의 친일', 즉 '친일의 범위 확장'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생계형 친일과 악질 친일을 하나로 묶어버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생계를 꾸리던 모든 이들에게 '원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일제 잔재는 전부 아니면 전무 형식으로 프레임이 형성되겠지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신생 독립국에서 전무가 가능하겠습니까?

이렇듯 '친일 범위의 확장'은 악질 매국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이죠. 윤동주도 창씨개명을 했고, 북한도 정권 수립 초기에 친일파가 몇몇 요직에 기용됐다, 그러니  일왕에게 혈서를 쓰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되겠냐?, 하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휴게실에서 어깨너머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신다고 질책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이 드신 분이 큰 의중 없이 흘린 말에 과도한 해석을 한다고 타박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보고자 합니다. 친일매국노들의 뿌리가 깊은 만큼 자신들을 지키는 논리도 상당하다는 것을요. 그 논리가 타당한지 개연성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파급력이 중요한 것이겠죠. 그 파워가 중요한 것이겠죠. 대학교 휴게실이라는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친일매국행위를 옹호하는 논리들이 입에 오르고 있다면 그 파워는 상당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추신) 지난 12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습니다. 전직 총리라는 한계가 있지만 분명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씨는 일본 우익들이 좋아할 말들을 일본에서 쏟아내고 왔습니다.

 

두 사람의 행위를 보면 참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동생이 망동된 행동을 했는데도 사과 한 마디 없는 대통령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사태의 경중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어쨌든 15일은 광복절입니다. 이날만큼은 태극기를 가슴에 새겨보고, 경건하게 보내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뚜껑없는 박물관', 서울역사도보여행    

  


우리에게 3월은 봄의 시작이자 삼일절이라는 역사적인 날이 있는 달이다. 야외활동을 시작하기 좋은 이 봄에, 역사도보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멀리 떠날 필요도 없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광화문에서 서대문형무소까지 이어지는 길로 역사도보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화문과 사직단

 

일명 광화문-서대문형무소 코스로 불릴 수 있는 이 도보여행의 시작점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인 광화문에서 시작된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인데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한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일제의 마수는 광화문에도 미치게 된다. 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해방 이후 광화문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게 됐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한 것이다.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큰 관광 상품이 되었다.

 

경복궁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서촌에는 사직단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도보로 10분 정도 이동을 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례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사직단이 자리 잡은 것이다.




토지와 곡신의 신에게 제사를 올린다는 뜻의 `사직단` 제례

 

 

 

종묘사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직단은 종묘에 버금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직단도 일제시대에 큰 몸살을 앓게 된다. 경내가 크게 훼손되고, 그 영역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슈가 됐던 사직단 복원 문제도 그 근원에는 일제의 마수가 있었던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도보여행은 인왕산 서울 성곽으로 이어진다. 겸재 정선이 사랑했던 돌산 인왕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찬찬히 살펴보고 마지막 탐방 장소인 서대문형무소로 이동해보자.

서대문 형무소에 대형태극기가 걸려 있다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피눈물을 흘렸던 서대문 형무소는 역사도보여행의 절정부이자 종료 지점이다. 서대문형무소는 1996년 성역화 사업 이후 역사공원으로 탈바꿈했는데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아직도 이곳에는 유관순 열사가 옥사했던 여감방, 강인규 열사(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짐)가 처형당한 사형장 등등…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복역을 했던 독방들이 전시되어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가 봐도 좋다

 

 

 

이제 도보여행을 하기 좋은 봄이 왔다. 춘삼월에는 배낭을 꾸려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유적들을 탐방해보자. 도보여행을 통해 빛나는 역사뿐 아니라 그늘진 역사도 배워보자. 알고 보면 서울도 뚜껑 없는 박물관인 정도로 풍부한 역사유적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 역사도보여행 제안 코스
 1. 광화문-서대문형무소 코스:
    광화문(경복궁) ▶사직단(서촌) ▶ 인왕산(서울성곽) ▶ 서대문 형무소(독립문)
 2. 교통편: 출발 –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이용 / 종료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이용
 3. 이동거리: 약 5km / 서대문형무소 관람을 포함,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
 

 

 

'3.1절은 아이구아이구?'...

이런 달달달 암기 방식은 아니다

 

 

[주장] 기계적인 '암기식 역사' 학습에서 벗어나야

 

15.03.05 11:51   최종 업데이트 15.03.05 11:51
'이 여론조사만 놓고 보면,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이니 미래가 사라질 수도 있겠군!'

3·1운동 관련 뉴스를 하나 읽다가 저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뉴스는 우리나라 성인 남성 중 절반 이상이 3·1절의 정확한 연도를 모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성인 1005명을 대상으로 한일관계를 조사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담은 기사였는데, 응답자 중 32%만이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났다고 정확히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강제병탄이 있었던 1910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19%인 반면,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23%로 더 많았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격언을 그 기사에 빗대보면 필자의 독백이 전혀 틀린 말이 되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미래가 없는 민족이 되는 것일까?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우리 민족은 그대로 사라지고 말 것인가?

 

 


 
▲ 태극기 서대문 형무소에 걸려있는 태극기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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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퀴즈식의 여론조사

 


삼일절이나 광복절, 혹은 한국전이 발발된 6월 말 경이 되면 저런 역사 퀴즈(?)식의 여론조사 결과가 어김없이 언론에 공표된다. 그런 기사들은 질책을 담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생산되기 일쑤인데 이런 방식이다.

<역사의식 실종? 국민 절반이 3·1절이 언제 일어났는지 몰라...>
<충격적인 청소년들의 안보 불감증! 6·25전쟁이 북침이라고?>

여론조사는 칼럼이나 사설로 재생산되는데 질책의 강도를 더 높인 상태로 기사화 된다. 그런 칼럼이나 사설은 작성자의 성향에 따라 온도차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교육 강화라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그런 결론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교육 강화라는 명제는 큰 범죄만 일어나면 제시되는 '인성교육 강화'와 닮은꼴을 한다. 교육 강화를 외칠 때는 큰 보폭으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점으로 회귀해 있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강화만하면 무엇 하는가 내용이 달라져야지!

 

 

 



# '3·1절은 아이구아이구'로 외웠다!

 


학창시절에 필자는 역사를 좋아했지만 국사 시간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연표를 '달달달' 외우고, 인물을 암기하는 방식의 수업 시간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다른 과목들과 마찬가지로 국사도 그저 시험용 학습을 했을 뿐이다.

'3·1절은 아이구아이구(1919년)다'는 식의 암기 방식으로 삼일절 페이지에 '별표'를 했던 것이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됐고, 그에 따라 1919년 1월에 파리강화 회의가 개최됐는데 거기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는 부분에도 '밑줄 쫙'을 했다.

'별표'를 치고 '밑줄 쫙'을 하는 단편적인 암기는 시험 문제를 풀 때는 유용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계적인 암기는 필자의 머릿속도 기계적으로 만들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각 사건들이 파편화되어 단절된 지식으로 머릿속에 저장됐기 때문이다. 분명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민족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여기서의 '민족자결'은 패전국 식민지에 속해 있던 민족들의 자결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은 승전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혜를 입지도 않은 민족자결주의를 두고 3·1운동의 중요한 원인으로 별표를 했던 것이다.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 사이에 인과관계를 찾을 생각은 못하고 그저 기계적인 암기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필자의 학습은 거기까지였다. 시험범위가 거기까지였고 필자가 배운 교과서에도 그 이상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와의 간극을 그대로 남겨둔 채 교과서를 덮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에도 무언가 찜찜했는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파리강화회의가 강대국들의 놀이터라는 것을 몰랐나? 너무 순진했던 거 아니야?'

 

 
▲ 소녀상 일본 대사관 앞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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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편적 지식 극복하기  

파편적 지식으로 필자의 머릿속에서 따로 놀고(?) 있었던 민족자결주의와 3·1운동의 간극이 명쾌하게 극복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교복을 벗고, 또한 군복(?)까지 벗고 나서야 그 연결고리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역사읽기>라는 딱딱한 서술 방식이 아닌, 스토리텔링식으로 기술된 역사책을 읽다가 그 연결고리를 알아냈던 것이다. 만약 스토리텔링식의 역사책을 읽지 못했다면 아직까지도 그 둘은 서로 따로 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청도(靑島) 맥주로 유명한 중국의 산동반도와 중부태평양의 남양군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요구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남아있는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에 대한 침탈 야욕을 보인 것이다. 한마디로 민족자결주의와 어긋난 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행태는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 관심을 보이던 미국의 이익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지도자들은 이런 일본의 야욕과 미국의 이익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충돌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비록 같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할지라도 미국의 팽창은 우리에게 이익을 전해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의 운명을 미국이라는 또 다른 외세의 힘을 빌어 극복한다는 점에서 분명 한계가 명확했다. 어쨌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독립운동 진영에 큰 파동을 전해주었다.

 



 
▲ 단재 신채호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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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기계적 지식' 극복해야

2017년부터 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고, 또한 이제부터는 초등학생들도 정식과목으로 배우게 됐다. 이런 것만 놓고 보면 우리는 분명 역사교육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초중고생들은 필자가 국사책에 별표를 하며 기계적으로 암기를 했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이고 종합적으로 한국사를 배우고 있을까?

수험 대비용으로 '달달달' 외운 파편적인 지식은 오히려 한국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기계적인 암기는 시험의 공포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급격히 뇌리에서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적인 암기로 국사를 배웠던 사람들은 서두에 언급한 역사 퀴즈 여론조사에 걸려들어(?) 질책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신채호 선생이 강조한 역사 기억하기는 '3·1절은 아이구아이구(1919년)다'라는 식이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를 종합적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교훈을 얻자는 게 단재 선생의 의도였을 것이다. 기계적인 암기로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직시하지 못할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에도 실립니다.

 

 

 

 

 

 

 

서울시티투어? 아니... 서울시티트레킹!  2편

자신의 두 발로 가는 서울 명소탐방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자 정문이었다.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던 만큼 광화문은 다른 궐문보다 훨씬 더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광화문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무지개문)을 셋이나 내서 격식을 높였다.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말인데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을 말한다. 지금은 경복궁 돌담과 떨어져 있는 동십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일반적인 궁궐의 의미에 빗대어 보자면 광화문은 조선시대 궁궐 정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가지고 있다.

경복궁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불에 타고 만다. 광화문 앞에 화기를 막으려고 세운 해태상이 있었음에도 불에 전소되었던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임금의 피난)을 하게 되고, 이에 격분한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간다. 그중 노비 신분에 있던 사람들은 장예원에 불을 놓는다. 장예원에 노비문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예원에서 일어난 불길은 사방으로 퍼져나가 경복궁 전체가 화마의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아무리 해태상을 세운다고 한들, 강력한 소방시설을 갖춘다고 한들 성난 민심 앞에서는 그저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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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해 광화문을 헐어 동쪽으로 옮겨 버렸다. 그 자리에는 한용운 선생이 '돌집'이라고 불렀던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된 것이다. 1968년에 중수를 하게 되는데 그때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졌던 것이다.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다.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큰 깃발과 화려한 복식을 한 수문장들의 박력 있는 모습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들이 광화문으로 몰려들고 있다.

사직단은 경복궁에서 서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인 서촌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례를 올리기 위해 마련된 장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종묘, 서쪽으로는 사직단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런 배치는 <주례고공기>에 의한 것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계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 인왕산과 서울성곽


사직단이 있는 서촌까지는 요즘 유행하는 동네걷기와 별 차이가 없다. 포장도로를 걷기 때문이다. 서울성곽이 있는 인왕산 코스에 가야 트레킹다운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약 18km에 달하는 서울성곽은 조선의 도성이었다. 북쪽의 백악산(북악산)을 기준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멱산(남산)을 둘러서 만든 성곽이다. 이 산들을 묶어 내사산이라 부른다. 북악산은 원래 백악산이라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에 '북악'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 도성에는 4대문이 있는데 남쪽에는 숭례문(남대문), 동쪽에는 흥인지문(동대문), 북쪽에는 숙정문, 서쪽에는 돈의문(서대문)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서대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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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성곽 서울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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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 올라서면 성곽과 함께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서울 시내가 보인다. 내사산이 둘러싸고 있는 서울 중심부다. 이를 두고 필자는 '작은 서울'이라 칭했다. 그럼 '큰 서울'은 어딘가? 서울의 주산인 북한산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아차산(용마산), 서쪽으로는 덕양산(행주산성)을 두고 외사산이라 부르는데 그 외사산의 안쪽 지역을 '큰 서울'이라고 불렀다. 서쪽 지역만 빼놓고는 지금의 서울 행정권역과 얼추 비슷하다. 한양천도 이후, 서울의 확장은 계속됐지만, 지형적인 굴레까지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이다.

서울성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요새를 구축했다. 산사면의 급경사를 이용하여 적의 침략을 대비한 것이다. 한마디로 매우 급한 경사면에 성곽이 구축됐다는 뜻이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서울성곽길은 걷기가 만만치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걷다 보면 발바닥에 불이 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간혹 서울성곽길을 좀 만만하게 보는 분들이 있다. 우리 역사트레킹팀에도 그런 분이 있었다. 사전에 미리 공지를 올렸는데도 어떤 분께서 하이힐을 신고 오셨던 것이다. 트레킹 인도자로서 참 난감했다.

"읔! 제가 분명히 편한 복장에 편한 신발을 신고 오라고 당부드렸는데요."
"앞에는 그냥 평지고, 서울성곽길 걷는다면서요…."

 

 

 

 

 
▲ 서울성곽 '시간 퇴적층'이 새겨진 서울성곽 돌덩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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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을 신고 오신 분도 끝까지 완주를 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물론 필자는 무척 조마조마했지만….

서울성곽은 여러 번에 걸쳐 개축됐다. 조선 초기에는 토성이었고, 이후에는 주위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됐다. 그러다 조선 후기 숙종시대에는 두부 모양의 장대석이 쌓아올려지게 된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대에 또 한 번 개축된다.

이렇듯 서울성곽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마치 600년이란 시간이 퇴적층처럼 돌들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아랫돌은 옛날에 쌓여 '누릿누릿'한데 그 이후에 축성된 돌들은 하얀색이다. 윗돌과 아랫돌이 시각적으로 '시간 퇴적층'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역사트레킹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독립문과 서대문 형무소로 이동했다. 독립문은 잘 아시다시피 독립협회에서 자주 국권을 상징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지은 문이다. 영은문은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기 위해 만든 문이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자주독립'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에 대한 독립의지는 확고했으나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서 무척 관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이권침탈에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했으나 일본의 이권 침탈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 독립문 독립문을 탐방하는 서울시티트레킹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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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해 드리지는 않겠다. 너무나 잘 아시는 곳이겠기에 굳이 필자가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신 이 말은 하고 싶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 조국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현재 우리는 살고 있는가? 아베 총리의 우경화에 핏대 높여 반대를 하면서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끊임없는 나오는 나라를 그들은 꿈꾸었을까? '친일청산은 소련의 지령'이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친일 매국노의 후손이 KBS 이사장을 맡는 현실을 그들은 꿈꾸었을까?"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려 있는 대형태극기! 저곳에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었던 분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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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서울시티트레킹 코스: 조계사(우정국) ▶ 위안부 소녀상(일본대사관 앞)▶ 광화문(경복궁) ▶사직단(북촌)

▶ 인왕산(서울성곽) ▶ 서대문 형무소 ▶ 독립문

2. 약 6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하차 한 후 조계사로 이동. / 종료점: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이용.

4. 이 코스는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곳이다. 따로 표식작업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길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신다면 지도검색을 통해 해당 탐방지들을 찾아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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