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 역사트레킹 합니다! 함께 하고 싶은 분들 클릭클릭!!!^^;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비밀의 화원’ 같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별서터가 있었던 백석동천그 백석동천을 흐르고 있는 백사실 계곡또한 북악산의 수려한 산세 등등... 누군가 꼭꼭 숨겨 놓은 화원을 걷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북악산 팔각정에 서면 앞으로는 서울 시내가 뒤로는 북한산이 한 눈에 펼쳐집니다특히 북악산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일품 중에 일품입니다북한산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한 번 그 풍광 앞에 서 보세요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팔각정에서 성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군인들의 보초로입니다그 길을 걷다보면 지금 자신이 서울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지 모릅니다그만큼 그 길 주변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제가 강의를 하는 모습을 참가자 분께서 사진으로 담아주셨습니다. 


지난 3월 25일 북악산 역사트레킹 때 찍어주셨는데... 이제서야 포스팅을 하네요. 이 넘의 게으름은...ㅋ 

그날은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행하는 날이었습니다.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만족도가 높은 코스 중에 하나입니다.


이날 수업은 한겨레문화센터를 통해 진행을 했는데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해주셨답니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수업은 토요일날 진행하는 특성상 좀 강의료가 쎄지요. 그래서인지 제 강의 중 하나는 폐강이 되기까지도 했답니다. 하여간 그런 점을 감안해서 좀 많이 오셨다고 표현을 해봤습니다. 



내가 잘 나갈 때 말이지~~~ 내가 왕년에 말이야.  북악산 트레킹 공지 올리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렸어! 북악산 호랑이가 겁에 질려 도망갈 정도였다고!!! ㅋㅋㅋ 

오랜만에 왕년에 농담 좀 한 번 해봤습니다. 이 넘의 아재 개그... ㅋ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는지, 강의를 할 때의 제 모습을 담은 사진은 거의 없었습니다. 강의를 할 때 어떤 식으로 몸 동작을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를 알아야 더 좋은 강사가 될 텐데요.


하여간 그런 사진들이 없었는데 그날 오신 참가자 분이 정성스럽게 사진을 잘 찍어주셔서 이렇게 포스팅까지 하게 됐네요.



그 분들은 가족 참가자였는데 그날 역사트레킹 강의 사상 최연소 참가자 기록도 갈아치워주셨습니다. 초등학생 딸이 참가를 했기 때문이었죠. 또 그 분들이 카페에서 커피까지 사 주셨습니다. 원래 제가 사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얻어마셨답니다. 사진도 받어, 커피도 얻어 마셔. 그날 강의는 지금 생각해봐도 무척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다른 참가자분들도 강의에 적극적으로 임해주셨고요. 아귀가 딱딱 잘 맞아 떨어진 강의였다고 할 수 있었죠.



지금 다시 사진들을 보니 빨간 잠바를 입은 제가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네요. 마이크도 사용하면서 말이죠. 나름대로 워딩 연습도 하고 그랬는데 적절하게 설명을 잘 했는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이렇게 제 강습하는 모습을 찍어주신 참가자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런 재미 때문에 제가 역사트레킹을 계속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뭐 그런 것들 때문에요. 























 







 * 백사실 계곡: 백사실 계곡에서 한 컷







2016년 11월 5일.


이날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북악산 역사트레킹이 행해진 날입니다.


어제 제가 포스팅 두 개를 연달아 올렸는데 그 두 개는 스토리펀딩의 리워드 트레킹입니다. 오늘 올리는 포스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행해진 트레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트레킹 강의를 하고 있잖아요.


간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문화센터 트레킹 강의와 리워드 트레킹 강의가 다르나요?"


아닙니다. 둘 다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라면 코스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좀 길게 가느냐 좀 짧게 가느냐, 그 차이입니다.


이 북악산 트레킹은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코스입니다. 예전 포스팅들에도 그런 내용들이 언급되어 있지요. 제 말을 못 믿으신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백 번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한 번 와 보시라고! ^^;


인기가 많은 코스라 그런지 참가자들도 다른 트레킹보다 많았습니다. 그렇게 북적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더군요.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날 미세먼지 때문에 하늘이 뿌옇게 됐기 때문입니다. 시야가 너무 안 좋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북악산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화려한 풍광도 제대로 감상을 하지 못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악산 트레킹에 대한 만족도는 대체적으로 높았답니다. 북악산 자체가 볼거리가 많은 곳이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북악산 트레킹이 네 번째였고, 다섯번째 트레킹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끝으로 2016년 한겨레문화센터 가을학기 트레킹이 종료가 됐답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다!"


이번 가을학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상당히 정신없게 진행이 됐습니다. 그래서 아쉬운 점도 많았지요. 하지만 나름대로 찬사를 받으며 종료가 됐습니다. 그런 격려를 발판삼아 내년 봄학기에는 더욱더 알찬 트레킹 강의가 될 수 있게 노력을 해야겠네요.  








 * 현통사: 백사실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현통사.  

 




 * 북악산 역사트레킹 











 * 백사실 계곡: 백사실 계곡 입구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

북악산에 가면 무언가 얻어가는 느낌이 들 겁니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드높기만 하다. 설악산에서는 단풍 소식도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이런 계절에 집에만 있으면 손해 보는 느낌까지 든다. 가벼운 배낭 하나 둘러메고 어디를 가도 좋을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그럼 어디로 떠나는 게 좋을까? 북악산을 추천해 본다.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세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정자정()에서도 보듯 세검정은 계곡 옆에 지어진 정자다.


세검정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사천이라 불렸던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가 이후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내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농담 삼아 이런 말도 한다.

 

우리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 세검정: 홍제천 위에 서 있는 세검정

 

오성대감 이항복과 백사실 계곡

 

세검정을 지나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북악산 트레킹이 시작된다. 백사실 계곡은 말이 계곡이지 거의 건천에 가깝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을 때를 거의 본적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백사실 계곡은 계곡 자체보다는 숲길이 더 각광을 받는 곳이다. 중심가와 인접한 곳에 그렇게 잘 정돈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니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인다. 숲길 한편에 자리 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백석백악을 뜻한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한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백사실 계곡 인근에 있는 세검정은 광해군과 관련이 많은 곳이다.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반정을 획책하고 칼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항복도 광해군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오성대감으로 더 잘 알려진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과의 재기 넘치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중에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이항복은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이항복이 당쟁에 물들지 않고, 초연하게 자신의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해냈기에 이런 신임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항복은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원군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생기자, 그 자신이 직접 명나라에 가 오해를 풀고 오기도 했다. 이렇듯 이항복은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오성대감 이야기를 조금 더해보자. 전란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대북파로 분류됐던 문홍도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했다. 그러자 오성대감은 자신도 그 의견에 동조를 했다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영의정이었던 1600년에는 기축옥사(1589)와 관련하여 성혼을 변호하다가 반대파들에게 정철 비호자로 몰렸고, 그래서 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는 인목대비 폐위(1617)에 대해서도 반대하다 삭탈관직을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618년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만다. 오성대감이 그렇게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5년 뒤, 광해군도 인조반정에 의해 퇴위당하고 유배길에 오르고 만다. 그러다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 백사실계곡: 백사실 계곡 숲길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이?

 

백석동천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뒤편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북악산 역사트레킹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로 들어질 수 있겠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백석동천: 백석동천이라는 한자가 음각된 바위.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1623313.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퇴위된다.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매운 음식을 먹은 듯,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알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능금마을: '능금마을'을 가리키고 있는 표식. 

 

 

적어도 손해 보지는 않는다!

 

전편인 4편에서 나는 이렇게 부제목을 썼다.

 

- 다음은 북악산입니다. 안 가면 후회할 겁니다.

 

조금은 자극적이다. 한편으로는 너무 노골적인 영업성 멘트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적어도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 거라고. 무언가를 얻어 가는 느낌이 들 거라고.






 * 북악산: 북악산 팔각정에서 바라 본 북학산. 












* 서대문 안산: 봉수대 올라가는 길.










펀딩 잘 몰라요, 그냥 트레킹이 좋아서...

다음은 북악산입니다. 안 가면 후회할 겁니다!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이라는 프로젝트를 12월 20일까지 진행합니다. 그 프로젝트 연재글을 알맞게 편집·수정하여 오마이뉴스에 기고할 예정입니다. 이번글은 4편입니다. - 기자 말 

- 죄송합니다. 김밥이랑 생수 사느라고 한 10분 정도 늦을 거 같습니다.

 


925일 일요일.

 

나는 서대문 영천시장을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트레킹 참가자, 정확히는 내 후원자들에게 나눠줄 김밥과 생수를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미리 준비한다고 김밥집 검색도 해놨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 허둥지둥 댔던 것이다. 먼저 가서 후원자들을 맞았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을 기다리게 하다니! 후원자들과 함께하는 첫 번째 리워드 트레킹부터 발걸음이 꼬였던 것이다.

 

 




 *  안산: 봉수대 가는 길. 뒤로 보이는 산이 인왕산이다.









 

높아진 긴장도 수치

 

사실 이날 리워드 트레킹을 앞두고 나는 좀 긴장을 했었다. 후원자들과 직접 대면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하루 전인 토요일에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트레킹 리딩을 했는데 그 여파가 그날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행하는 트레킹 강의도 그날이 처음 시작하는 날이었다. 한마디로 이틀 연속으로 첫 시작이었던 것이다. 긴장도 수치가 높을 만 하지 않는가? 실제로 일요일 트레킹을 마친 후에 나는 며칠간 앓아누워야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이 리워드 트레킹 첫날인데 지각을 해버렸네요...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정이야기를 드려서 그랬는지 모두다 넘어가주는 분위기였다. 역시 후원자분들이었다. 다른 곳이었으면 분명 한소리 들었을 것이다. 리딩자가 어떻게 늦을 수 있냐며...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 탐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이 되었다. 미세먼지 때문인지 하늘이 좀 뿌옇게 보였다. 그래도 인왕산은 바로 옆에 있어서 그랬는지 멀리 있는 남산보다는 훨씬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이 인왕산입니다. 우리는 인왕산의 서쪽 면을 보고 있습니다. 경복궁이나 서촌 쪽에서 바라보는 인왕산과는 좀 다를 겁니다.”


어떻게 다르죠?”


경복궁 쪽에서는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려보잖아요. 그래서 인왕산의 암반 노출면이 두드러지게 보이죠. 하지만 이곳에서 보면 인왕산을 전체적으로 다 조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요?”


내사산인 인왕산이 북악산, 또 그 뒤에 있는 북한산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자리를 잡고 있는지 확인을 할 수 있다는 거죠.”

 

내 설명이 좀 부족했을지 모른다. 경복궁이나 서촌쪽에서 인왕산을 직접 올려다 본 후라야 저 해설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 곳을 제대로 보려면 365도로 다 둘러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안산에서 보는 인왕산이 다르듯, 북한산에서 보는 인왕산도 다르거든요. 북한산에서는 인왕산의 북쪽면을 둘러볼 수 있죠.”

 

 




* 안산 자락길: 안산 자락길 표식.







펀딩 그런 거 몰라요. 그냥 트레킹이 좋아서...

 

나는 이렇게 힘을 주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연신 카메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사실 나 같아도 저런 딱딱한 해설보다는 시원한 풍광 쪽에 포인트를 맞췄을 거 같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지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참가자들한테 한 번 물어보세요. 서울트레킹 펀딩의 취지가 좋아서 돈을 냈는지 아니면 그냥 트레킹이 좋아서 왔는지요.”

 

사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슬쩍 물어보았다.

 

스토리펀딩의 창작자 입장에서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오늘 트레킹에 참여를 하셨는데, <함께 걷는 서울트레킹>의 취지가 좋아서 참여를 했다 1, 그냥 펀딩 형식만 빌렸을 뿐 내 돈 내고 트레킹에 참여를 했다 2, 자 손을 들어 주십시오.”

 

압도적이었다. 내심 1번이 많았으면 했지만 거의 다 2번으로 손을 들어주셨다. 대충 감은 잡고 있었지만 그래도 2번으로 중심추가 쏠리니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1번에 선 분들이 언젠가는 2번으로 자리바꿈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물론 그렇게 자리를 옮기게 하려면 내가 잘해야 했다.

 

 



* 홍제천: 홍제천 인공폭포






 

승복을 입은 바위?

인왕산의 서울성곽 구간은 인왕산 자체보다 여기 안산에서 보는 게 더 낫습니다. 인왕산 정상부근에서 내려온 성곽이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 큰 바위 하나를 비켜서 나갑니다.”


무슨 바위죠?”


선바위입니다. 마치 바위가 승복을 입은 승려처럼 보인다고 해서 선()바위라고 불립니다. 성곽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저 선바위를 도성 안쪽에 놓자고 했지요. 하지만 정도전은 반대를 했습니다. 승복을 입은 거대한 바위가 도성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것이죠.”


누가 이긴 거죠?”


정도전이 이겼죠. 보시다시피 선바위는 성곽 밖에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했지만 아차 싶었다. 사실 멀리서보면 이 바위가 선바위인지, 저 바위가 선바위인지 잘 분간이 안 된다. 그래서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저 선바위 밑에 국사당이라고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대표적인 기도처가 있거든요. 거기가면 기도빨이 잘 받는다고 하니까 나중에 우리 거기 한 번 가보죠.”

 

애꿎은 국사당을 들먹이며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휴우!

안산의 자랑인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지나 홍제천 인공폭포 앞에서 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됐다. 거의 4시간 정도 진행이 됐는데 한 분도 낙오하지 않고 모두 다 완주를 해주셨다. 정말 감사할 일이었다.

 

 




 * 세검정: 북악산 역사트레킹.





 

다음은 북악산 역사트레킹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지만 서울트레킹 펀딩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리워드 트레킹은 북악산으로 이어집니다. 안 가시면 후회할 겁니다. 사실 안산 트레킹은 맛배기에 불과하거든요.”

 

안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됐지만 앞으로도 리워드 트레킹은 계속된다. 당장 109일에 북악산 역사트레킹이 실시가 된다. 그날은 또 어떤 후원자들이 오실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이미 오신다고 약속을 해주신 분들이 여럿이니 그날 먹을 김밥이랑 생수를 좀 넉넉히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 표지속: 북악산 완전 개방 표지석. 





 







인기짱이었던, 북악산 역사트레킹!

호감도 높았던 북악산 역사트레킹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라는 속담처럼, 제게 역사트레킹 코스 하나하나는 모두 다 보배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달랐습니다. 유난스럽게 참가자들이 환영하는 코스가 몇몇 있었습니다. 그런 코스들은 아름다운 풍광과 풍부한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화에 소개할 북악산 역사트레킹도 참가자들이 크게 선호했던 코스 중에 하나입니다. 모객을 하기가 무섭게 매번 조기마감이 됐으니까요. , 그럼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하러 떠나볼까요? 진짜 인기 있는 코스가 맞는지 확인해 볼까요?

 


 



* 탕춘대성 성벽.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상명대 옆쪽에 자리잡은 홍지문(弘智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서울에는 큰 성곽이 두 개가 있습니다. 일명 서울성곽이라고 불리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바로 그것이지요. 서울성곽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동쪽의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을 둘러쌓아 축조한 것입니다. 이 네 개의 산은 내사산이라고 불립니다. 안쪽에 있는 네 개의 산이란 뜻이죠.


서울성곽이 도읍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다면,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손꼽히는 요충지였습니다.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요. 고려시대에도 여러 차례 북한산에 있는 산성을 수리·축조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북한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어 거점이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시기에 축조된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룬 조선은 국방력 강화와 도성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1704(숙종 30)부터 1710년까지 도성 성곽을 재정비했습니다.





* 홍지문





또한 다음해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조하기에 이릅니다. 8km 달하는 북한산성은 기공에서 완공까지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규모에 비해 무척 빨리 축조된 것인데 청나라가 간섭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공사를 서둘렀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의 축조와 수축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서울성곽은 내사산을 둘러 만든 성입니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있는 성이고요. 그래서 두 성곽 사이에는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두 성곽 사이가 좀 붕 떠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간극을 메울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축조된 것이 바로 바로 탕춘대성(湯春臺城)입니다. 성이 세워진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湯春臺)가 있어서 그렇게 명명된 것입니다.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성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약 5km에 걸쳐 연결한 탕춘대성도 1719, 조선 숙종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인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성벽은 홍제천(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북한산 쪽으로 숨 가쁘게 비탈을 타고 올라갑니다. 그러다 북한산 서남쪽 비봉 인근에서 북한산성과 합류합니다. 북한산 비봉은 유명한 진흥왕 순수비(555년 건립)가 있던 곳입니다.

 

 





* 홍지문. 성벽이 잘려나간 홍지문.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입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중에도 그렇게 오해를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아닙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입니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입니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가지고 있습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입니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입니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습니다. 1921년에 있은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갔던 것입니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습니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만에 복원을 한 것이지요.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 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 세검정. 옆으로 사천이 흐르고 있다.






 

이항복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 계곡

 

다음 탐방지는 백사실 계곡입니다.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이전까지 들리는 소음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길이 탐방객들을 반겨줍니다. 백사실 계곡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도롱뇽 서식지가 있는 곳입니다. 그만큼 수질이 맑다는 뜻이겠죠. 그렇게 청정함을 자랑(?)해서 그런지 멧돼지도 가끔 출몰하는 것 같습니다.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인상적이더군요.


사실 백사실 계곡은 실개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유량이 적다는 겁니다. 저는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계곡다운 면모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백사실 계곡을 방문하고 실망한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대성동이나 천불동 계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게는 분명 아쉬운 대목이겠지요





* 북악산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백사실계곡 숲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백사실 계곡은 숨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울창한 숲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울 종로에 이렇게 걷기 편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랍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벤치도 여러 개 갖춰져 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입니다. 숲길 한편에 자리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습니다. ‘백석백악을 뜻합니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 백석동천: 별서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석동천이라는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산 산책로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9월에 완공됐습니다. 이 도로는 그해 121일에 있었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습니다. 서울방어목적으로 개통됐던 것입니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습니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사산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까지도 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악산 팔각정입니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입니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위치를 이동을 하여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겁니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죠.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60~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습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한편 북악산 산책로는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과는 좀 다릅니다.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이 동서로 이어졌다면 산책로는 남북으로 연결됩니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습니다.

 


 



* 북악산 역사트레킹팀. 북악산 팔각정에서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는 트레킹팀. 백사실 사진에 등장한 팀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만해 한용훈이 싫어한 돌집은 사라졌지만...

 

마지막 탐방지는 성북동입니다.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이 트레킹의 종료점입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심우장은 남향으로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남향으로 하면 돌집을 봐야하기에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것입니다. 돌집은 조선총독부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집짓기의 기본까지 어겨가며 그렇게 하셨을까요?


만해선생이 그렇게 보기 싫어했던 돌집’, 그 조선총독부는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뿌려놓았던 식민 잔재들까지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요?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만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요?

 

심우장 탐방을 끝으로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보셨습니까? 매번 조기마감이 된 이유가 이해가 되셨는지요? 이해가 안 되셨다면 이번 주말에 당장 배낭을 꾸려서 떠나보세요. 직접 걸으면서 판단해주시길!

 




 

* 뮤지컬 심우. 심우장에서 뮤지컬 심우를 야외극 형식으로 공연하고 있었다. 2014년 가을경에 촬영한 사진임.






 

북악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홍지문 세검정 백사실계곡 북악산팔각정 북악산산책로 심우장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북향의 한용운 집... '돌집' 증오 때문이다 2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2편] 역사 의미 생각하며 걷는 길

 

 

 

 

 

 

 

 

* 북한산: 북악산 팔각정에서 북한산 보현봉 쪽을 바라본 모습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년 9월에 완공됐다. 이 도로는 그해 1월 21일에 있었던 청와대 습격 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서울방어와 관광목적으로 개통된 것이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 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사산(인왕, 낙산, 남산, 북악)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도 볼 수 있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이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이동해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이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1960~19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북악산 산책로는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과는 좀 다르다.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이 동서로 이어졌다면 산책로는 남북으로 연결된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된 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 뮤지컬 심우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심우>. 만해 선생이 지은 심우장에서 공연되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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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이 싫어한 '돌집'은 사라졌지만...


성북동으로 내려온 역사트레킹 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심우장으로 향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다. 그곳에 도착하니 마침 <심우>라는 야외뮤지컬이 공연되고 있었다. 조선 독립을 염원한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담장 너머로 본 공연이었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야외에서 뮤지컬 보는 게 쉬운 게 아니니까.

잘 알려졌다시피 심우장은 남향으로 집을 짓지 않았다. 남향으로 하면 '돌집'을 봐야하기에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 '돌집'은 조선총독부다.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집짓기의 기본까지 어겨가며 그렇게 하셨을까?

만해선생이 그렇게 보기 싫어했던 '돌집', 그 조선총독부는 이 땅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 곳에서 뿌려놓았던 식민 잔재들까지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 식민지근대화론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그 이론을 충실히 따르는 이들이 역사교과서를 집필하는 지금의 현실을, 만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실까?  

 

 

* 도움말

1. 북악산 역사트레킹 코스: 홍지문 - 석파랑 - 세검정 - 백사실 계곡 - 이항복 별서터 - 능금마을 - 북악산팔각정(북악스카이웨이) - 북악산산책로 - 한용운 생가(심우장)

2. 약 6k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옴. 버스정류장에서 세검정 방면 버스에 탑승한 후 상명대에서 하차. 버스 이동 시간 약 10분 내외.

4. 종료점: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에서 종료한 후,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으로 이동. 버스 이동 시간 약 5분 내외.

5. 이 코스는 지도상으로만 존재한다. 따로 표식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길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지도검색으로 탐방지들을 찾아갈 수 있다.

 

 

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북향의 한용운 집... '돌집' 증오 때문이다 1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2편] 역사 의미 생각하며 걷는 길

 

14.10.19 20:38 최종 업데이트 14.10.19 20:38

 

 

 

 

 

 

 
▲ 백사실 계곡 백사실 계곡.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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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읽기]

 

 


 

사실 '홍지문 - 석파랑 - 세검정' 구간은 재미가 없다. 모두 다 대로변에 위치해 있어 자동차들의 소음을 들으며 탐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사실 계곡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짜 트레킹을 하는 맛이 난다.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이전까지 들리던 소음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길이 탐방객들을 반긴다. 백사실 계곡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도롱뇽 서식지다. 수질이 맑다는 뜻이다. 그만큼 청정하기 때문인지 멧돼지도 가끔 출몰하나 보다.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으니까.

사실 백사실 계곡은 실개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수량이 적다. 필자는 이곳을 여러번 방문했지만 계곡다운 면모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백사실 계곡을 방문하고 실망한 분들도 많다고 한다. 대성동이나 천불동 계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게는 분명 아쉬울 듯하다.

 


그런 아쉬움은 계곡 입구에 있는 현통사 앞, 너럭바위에 앉아 주위풍광을 둘러보면서 씻어버릴 수 있다. 전면으로는 인왕산이 보이고 뒤쪽으로는 울창한 숲길이 펼쳐져 있으니 아쉬움은 그대로 남겨두고 가볍게 숲길 걷기를 할 수 있으니까.

백사실 계곡의 숨은 매력은 울창한 숲길이다. 서울 종로에 이렇게 걷기 편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벤치도 여러개 갖춰져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 백석동천 이항복 별서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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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 이항복과 백사실 계곡

 

그렇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인다. 숲길 한편에 자리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종로구 부암동 일대는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았던 명승지였다. 그래서 세검정, 석파정 등 이름난 정자와 별장이 지어졌고,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풍류를 즐겼다. 이항복의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 계곡도 부암동에 있으니 이항복도 그 풍류객 대열에 합류했던 셈이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 '백석'은 '백악'을 뜻한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한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백사실 계곡 인근에 있는 세검정은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많은 곳이다.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반정을 획책하고 칼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항복도 광해군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 이항복 별서터 이항복 별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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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대감으로 더 잘 알려진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과의 재기 넘치는 일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임진왜란 중에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이항복은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이항복이 당쟁에 물들지 않고, 초연하게 자신의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해냈기에 이런 신임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항복은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원군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생기자, 그 자신이 직접 명나라에 가 오해를 풀고 오기도 했다. 이렇듯 이항복은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관료로서 업적도 뛰었지만 오성대감의 진면목은 의리다, 의리! 전란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대북파로 분류됐던 문홍도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을 탄핵했다. 그러자 오성대감은 자신도 그 의견에 동조를 했다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후 영의정이었던 1600년에는 기축옥사(1589년)와 관련하여 성혼을 변호하다가 반대파들에게 정철 비호자로 몰렸고, 그래서 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렇듯 의리가 강했던 그는 인목대비 폐위(1617년)에 대해서도 반대하다 삭탈관직을 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618년에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돼 그곳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만다. 오성대감이 그렇게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5년 뒤, 광해군도 인조반정에 의해 퇴위당하고 유배길에 오르고 만다. 그러다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호젓하게 숲길트레킹을 하며, 오성대감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자신의 말을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게 뒤집어 버리는 정치인들, 그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오성대감이 사랑한 백석동천을 거닐며 날려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광해군과 연관된 유적지가 두 곳이나 있는 부암동 일대를 뒤로 하고, 역사트레킹 팀은 북악산 산책로로 이동을 했다.

 

 

 

 

 

 

 


 

 

 

서울 도보여행, 이렇게 걸으면 즐거움 커진다  2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1편] 역사 알면 서울이 달라 보입니다

 

 

* 홍지문

 

 

 

 

 

---> 전편에 이어서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이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역사트레킹 팀에도 그렇게 오해를 한 참가자가 있었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아니다. 홍지문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탕춘대성이라는 보조성의 성문이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智'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이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다. 1921년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간 것이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 만에 복원을 한 것이다.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 석파랑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전통한옥과 중국풍이 어우러진 건축양식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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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역사트레킹 팀은 다음 탐방지인 석파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석파랑(石坡廊)은 석파정(石坡亭)에서 옮겨져 온 것인데 흥선대원군의 별서 사랑채였다. 석파정은 대원군이 사랑한 별장이었다고 한다. 현재 요릿집으로 쓰이고 있는 석파랑은 벽에 둥근 만월창을 내는 듯, 전통한옥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전통 방식과 중국식 양식이 조화를 이룬 건축기법이다.


석파랑에서 조금만 이동을 하면 세검정이 나온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석파정과 세검정에서 보듯, 이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사천이라 불렸던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 세검정 세검정과 사천으로 불렸던 홍제천.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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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 한 분이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홍지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숭례문 복원에서 보듯 부실하게 문화재를 복원하면 안 하는 것만도 못한 일이 된다. 특히 답사여행을 하는 사람들 앞에 놓인 것이 '불량 복원품'이라면, 그 답사여행자들은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필자 같이 자신의 두 발로 역사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은 더 크게 허탈함을 느낄 것이다.

문화재 복원에 대한 의문 혹은 아쉬움을 품고, 트레킹 팀은 이항복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계곡 쪽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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